2019-07-04

1907 [조성환] 창조를 꿈꾼 시대 - .성산기획

[조성환] 창조를 꿈꾼 시대 - .성산기획


창조를 꿈꾼 시대
조성환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책임연구원)


<폐허>·<개벽>·<창조>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에 심상치 않은 이름의 저널이 잇달아 창간되었다. <창조>와 <개벽>과 <폐허>가 그것이다. 오늘날 출판계에서는 꺼릴법한 파격적인 제목들이다. 그러나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생각하면 하나같이 일리 있는 이름들로 보인다. 식민지 지배라는 ‘폐허’의 상황에서 새로운 세계를 열자는 ‘개벽’ 운동을 통해서 주체적인 문명을 ‘창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폐허>와 <창조>는 문학작품을 수록한 문예지이지만, <개벽>은 일종의 최신 사상지에 가깝다. 서양의 철학과 종교라는 최신 담론을 소개하면서, 조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창조>는 삼일독립운동 직전인 1919년 2월에 창간되었고, <개벽>과 <폐허>는 삼일독립운동 다음 해인 1920년 6월과 7월에 창간되었다. 그래서 발행 시기로는 “창조-개벽-폐허”의 순이 된다.



창시와 창조

이중에서 ‘창조’는 서양어 creation의 번역어로, 동아시아 고전에는 나오지 않는 개념이다. 동아시아에서 ‘창조’에 가까운 개념을 찾는다면 ‘作(작)’을 들 수 있다. 이 말의 역사는 깊다. 일찍이 공자는 <논어>에서 자신을 가리켜 “述而不作(술이부작)”이라고 했다. 자신은 “술(述)을 했지 작(作)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여기서 ‘작’은, ‘제작하다’, ‘창작하다’고 할 때의 ‘작’으로, 공자 이전의 성인들이 유교 문명의 토대를 만든 행위를 말한다. 구체적으로는 예(禮)나 악(樂)과 같은 문물제도의 창조를 가리킨다. 반면에 ‘술’은 ‘서술하다’, ‘진술하다’고 할 때의 ‘술’로, 공자 이전의 성인들이 만들어 놓은 문물이나 제도를 해석하고 전승하는 작업을 말한다. 그래서 영어로는 interpret나 transmit라고 번역된다.

그런데 여기에 ‘술’의 역설이 있다. 공자는 자신은 창조[作]가 아닌 해석[述]을 했다고 하지만, 오늘날 공자는 유학의 ‘창시자’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해석 작업을 통해 새로운 학문을 연 것이다. 이를 두고 훗날 신유학을 창시한 주자는 ‘계왕개래’(繼往開來)라고 하였다. “과거[往]를 계승하여[繼] 미래[來]를 열었다[開]”는 뜻이다. 실은 이렇게 말하는 주자 역시 공자와 같은 계승과 종합 작업을 통해 새로운 유학을 창시하였다. 그를 신유학의 창시자라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주자를 하늘같이 떠받든 조선의 퇴계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쓴 저서는 없고, 유교 고전과 성인들의 말씀을 편집하고 해석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다. 하지만 퇴계는 조선 유학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공자와 주자와 퇴계가 새로운 학문을 ‘창시’하였다면 세종의 한글 창제는 말 그대로 ‘창조’에 다름 아니다. 중국을 해석하고 전승하는 수준이 아니라 종래에 없는 완전히 새로운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자나 주자나 퇴계의 작업이 술작(述作)이라고 한다면 세종은 창작(創作)을 한 셈이다. 그것도 단지 문자에 한정되지 않고 음악, 천문, 기술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창조를 실행하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창조경영의 선구자인 셈이다.

1920년대 조선의 지식인들도 이러한 의미에서의 창조를 꿈꾼 것으로 보인다. 중국이나 서양을 재해석하는 창시 수준이 아니라,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다. <창조>라는 서명에는 그런 포부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실학과 개벽

한편 <개벽>은 ‘창조’와 같은 서양어의 번역어가 아니라 중국 문헌에 이미 나오고 있는 개념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조선에 와서 크게 변화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중국 고전에서 말하는 ‘개벽’은 천지개벽, 즉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린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교적으로 말하면 천지창조에 해당하는데, 동아시아에는 창조주 개념이 없기 때문에 천지가 ‘저절로’ 생성되었음을 말한다.

이러한 개벽 개념이 조선에 오면 인간에 대해서도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일종의 ‘개벽의 인문화’라고 할 수 있다. 실학시대의 군주로 일컬어지는 영조가 신하들에게 “마음을 개벽하라”고 한 말이 그것이다: “지난번에 개벽하라는 하교를 내렸는데 신하들의 마음은 과연 개벽되었는가?”(頃以開闢下敎, 而諸臣之心, 果能開闢乎? <영조실록> 13년, 1737년 9월 1일) 여기에서 ‘개벽’은 자동사가 아닌 타동사로 쓰여, 닫힌 당파적 마음에서 벗어나서 열린 개방적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마치 천지가 개벽되듯이 신하들의 닫힌 마음을 열어 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조의 개벽 개념은 천지개벽에 대해서 ‘인심개벽’이라고 할 수 있다.

영조의 인심개벽은 1860년에 이르면 ‘다시 개벽’으로 발전되게 된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는 “인간은 누구나 하늘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 사상을 바탕으로 문명의 질서를 수직에서 수평으로 재구축한다는 의미에서 ‘다시 개벽’을 주창하였다. 인간 안에서 신성을 발견하여 노비나 백정도 모두 하늘같이 존엄하고 신성한 존재임을 천명한 것이다. 그의 개벽사상은 자신이 거느리고 있던 노비 2명을 해방시키는 실천으로 구체화되었다. 최제우의 뒤를 이은 최시형은 영조가 말한 것과 같은 ‘인심개벽’을 실제로 개념화하여 비폭력평화사상과 만물존엄사상을 주창하였다. 우리의 마음이 사물까지도 하늘처럼 섬기고 받드는 데까지 이르러야 비로소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개벽과 근대

1920년에 창간된 <개벽>은 이와 같은 동학의 개벽사상을 잇고 있다. ‘개벽’이라는 서명을 쓴 것도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에서 이 저널을 발행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동학과 천도교는 모두 ‘개벽파’라고 명명할 수 있다. 개벽파는 일본적 근대화를 지향한 당시의 개화파와는 다른 한국적 근대를 모색하였다. <개벽> 창간호에 실린 「개벽군에게 드리는 글」에서 ‘조선적 개벽’이라는 표현이 보이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렇게 보면 ‘개벽’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함축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창조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이다. 창조(creation)와 근대(modern)가 서양어의 번역어라면, 개벽은 동양어의 재발견이자 재창조이자 재해석이다. 그것은 조선적 근대를 창조하기 위해 호출된 개념이다. 동학과 천도교로 시작된 개벽파는 이후에 원불교로 이어지게 된다. 원불교의 개교(開敎) 표어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인 것은 이들이 최시형의 인심개벽을 잇고 있음을 말해준다.



영성적 근대

개벽파의 근대 기획은 ‘나’의 발견에서 시작되었다. 마치 서양의 근대 철학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에서 시작된 것과 유사하다. 데카르트가 중세의 ‘신’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을 독립시키려고 ‘이성’을 강조했다면, 동학은 유교의 ‘성인’ 중심의 세계관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려고 ‘하늘’을 부활시켰다. “내가 하늘이다”(我卽天)는 최시형의 말이 그것이다. 이제 성인의 말씀에 의지하지 않아도 내 안의 하늘을 자각하기만 하면 모두가 성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그러나 동학은 데카르트와 같이 이성을 강조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영성을 강화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성이 지니고 있는 인간중심주의를 경계하였기 때문이다. 동학에서 말하는 ‘천인(天人)’이나 천도교에서 말하는 ‘공개인(公個人)’이나 ‘우주아(宇宙我)’ 등은 ‘내’가 단독적 개인이 아니라 우주와 함께 하는 공공적 대아(大我)임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는 서양 중세로의 회귀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아시아에는 서양과 같은 황제와 교황 사이의 갈등이 없었다. 아니 황제와 교황이 처음부터 일치되어 있었다. 애당초 ‘창조’ 개념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황제는 ‘하늘’을 대신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교황에 다름 아니었다. 동학은 이러한 동아사아의 전통에서 나온 근대 사상이다.





기억의 부활

최근 들어 한국사회에서 ‘개벽’이 다시 화두가 되고 있다. 원광대학교 박맹수 총장의 ‘개벽대학’ 선언과 원광대학교 이병한 교수의 ‘개벽학당’ 개교가 그것이다. 원불교 교무인 강성원은 ‘개벽학’이라는 신개념을 제시하였다. 동학에서 원불교에 이르는 개벽사상을 ‘학’으로 정리하고, 나아가서 서구적 개화를 넘어서는 지구적 개벽을 준비하는 ‘학’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문학계에서도 ‘개벽’의 관점에서 근대문학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신동엽기념사업회 상임이사인 김형수 작가는 신동엽을 ‘영성적 근대’라는 지평에서 자리매김하였고, 국문학 연구자인 홍승진 박사는 김소월과 이상화의 문학에 동학과 대종교 사상을 분석하였다. 이 외에도 여기저기에서 자칭 ‘개벽파’를 선언하는 무리들이 잇따르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더 이상 서구 중심의 근대 기획에 한국과 인류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자각에서 비롯된 개벽 운동의 부활이다. 그 시기가 삼일독립운동 100주년이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창조의 기억을 백년 만에 되찾은 것이다. 개벽의 꿈을 다시 꾸기 시작한 것이다. 잊혀진 기억과 꿈을 부활시킨 것은 다름 아닌 촛불시민의 함성이었다. “나라다운 나라”의 외침이 개벽파를 백 년 동안의 잠에서 깨어나게 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의 다시 개벽 운동은 촛불 이후를 준비하고자 하는 ‘새로운’(modern)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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