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27

한국인들이 일 시킬 줄도, 할 줄도 모르는 것이 저생산성의 핵심 원인





Leo Kim
3 hrs


얼마전 이런 질문을 했었다.

본인의 경험에 비추어 우리가 A급 지식 인력을 최대한 갑질을 해서 갈아넣었을 때 아웃풋은 선진국에서 동일한 인력에게 합리적인 대우(금전, 금전 외적)와 충분한 자율성을 부여해서 결과가 나왔을 때와 비교해서 기대 퀄리티가 몇 퍼센트 정도일 것이라고 보시나요?

질문을 한 이유는, 지난 10년 가까이 직접 리서치 프로젝트를 하거나 클라이언트 컨설팅을 하면서 한국인들이 일 시킬 줄도, 할 줄도 모르는 것이 저생산성의 핵심 원인이라는 확신이 쌓였기 때문이다. 답글이나 별도 코멘트로 좋은 말씀을 주신 페친들도 있었는데, 주신 의견(표현)들을 보니 이 문제 해결은 오래 걸릴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에 살면서 나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보이는데 주변 사람들은 마치 투명한 공기를 멀거니 바라보듯 전혀 핵심을 못보고 엉뚱한 생각(doxa, 일종의 체계적인 착각)을 해서 답답했던 일이 두가지 있었다.

첫째는 교실의 왕따 문화. 왕따라는 말이 있기 전에 이미 한국에는 괴롭힘 문화가 만연했다. 적절한 용어가 없었을 때 그런 경험들은 그냥 일상에서 겪는 당연한 것이라 문제인식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일본에서 '이지메'라는 말이 건너오자 당시 많은 한국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일본 영향 땜에 한국도 이런 게 생기는 건가?" 했었다. '이름'이 없었을 때는 현상조차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일본? 천만에. 획일적인 권위주의와 폭력이 팽배한 시공간에서는 원래 사도-매조키즘이 사람들 심성에 충만해지고, 그 잔인함이 약자를 향하기 쉽다. 문제에 대한 용어와 개념이 생기고 여러 사람이 죽어나가고, 엄마들을 중심으로 감수성과 우려가 공유되고 나서야 학교폭력 문제는 심각한 사회현상으로 인지되기 시작했다.

둘째는 만연한 성희롱, 강간 문화. 한국의 그런 분위기 속에서 자라나면서 나라고 전혀 실수하지 않고 살았을 것 같진 않다. 
어쨌거나 내가 10대, 20대일 땐 한국 사회에서 가장 저명한 지식인들도 사석은 물론 공적인 자리에서도 음담패설, 이상한 성적 농담이나 이야기들을 공공연히 내뱉었다. 마초적, 남근중심주의적 사회에서 그런 표현이 은근히 자기 힘과 사회성의 과시처럼 기능했다. 만약 그런 언행에 정색을 하고 "이건 너무하다"고 하면? 기껏해야 사회성 없이 혼자 점잔빼는 놈이 된다. 왕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런 사람들한테 변태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과시하는 사회문화 그 자체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이고, 더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할 수 있는 정신문화의 토대가 되는지를 설명하거나 이해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난 지금 세번째 답답한 문제인식이 생겼다. 한국 사람들, 일 더럽게 못하고 더럽게 못 시킨다. 
한 페친의 표현을 빌자면, 특히 일을 '병신스럽게' 시키는 방식이 매우 패턴화되어 있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그렇게 일을 시키고 하는 이유는 케이스마다 다양한데, 근본적으론 무능한 상사에게 책 잡히지 않게 보고하면서, 다방면으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누적되어 온 잔기술인 것으로 보여진다. 
일부러 간명한 핵심, 철학이 내재된 문제인식을 회피하고, 잡다하게 쓸데없는 일들을 많이 해서 '너도, 나도 고생했다'는 이미지를 객관화 하는 것이 일을 하는 주된 방향성이 되는 문화가 만연하다. 상급자가 핵심을 파악할 능력이 없거나 행여 핵심이 뭔지를 알더라도 자기가 책임을 지고 뭔가를 하면 안되기 때문에 일을 엉뚱한 방향으로 잔뜩 부풀려 뭔가 열심히 하긴 했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너도, 나도 헷갈리게 만들어 놓는 것이다. 특히 정부 부처의 관료, 서기관급 이하 실무자들의 행태에서 심하게 나타나지만, 민간이라고 안 그런 것은 아니다. 너도 나도 책임 안 지고 도망다니는 방식으로 일을 하려고 하니.

앞의 두가지 문제인식은 한국 사람들이 문제의 심각성(심층적인 분석과 성찰은 아니더라도)에 공감하는데 대략 30년 정도 걸린 것 같다. 이번에 반응을 보니, '갑질과 일 못 시키는'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에 대해 파악하고 공감하는 것 역시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 같다. 단편적인 분노들은 있는데 문제의 원인에 대한 구조적인 성찰이 부족하고, 갈아넣어 일을 시키는 게 outcome을 위해 정말 문제인지에 대한 공감대도 형성이 안되어 있다.

한국의 지식노동? 생산성? 이렇게 보면 된다. 차가 정말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리스크가 생기기 때문에 일단 사이드 브레이크를 걸어놓는다. 그러고 외친다. 이러다 우리 죽게 생겼다고. 혁신하라고. 악셀을 죽어라 밟으라고. 그럼 엔진이 과열되면서 이상하게 큰 소리가 붕붕~하고 난다. 비로소 제대로 일하고 있는 것 같은 맛이 난다. 누군가 차가 '엘도라도'를 향해 가야 하는데, 목적지의 위치와 개념이 불분명하거나, 아마도 이런 식으로 운전해서 가야 한다고 얘기하거나, 옆에 채워져 있는 사이드 브레이크를 곁눈질하면서 "어? 이 차는 이래선 실제로 움직일수가..." 하고 말을 꺼내면, "야 이 새끼야~!"가 된다. 지금 일에 필요한 도움을 주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게 한국의 저생산성, 저성장의 핵심 원인이다. 근로자의 임금이 아니라. 내가 한국에서 세번째로 발견한, 공기와도 같이 만연해 있는 폐습이다. 얼마나 더 세월과 희생이 따라야 이게 얼마나 심각한 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만이라도 생길까? 혁신의 구호는 요란하고, 엔진 타는 냄새가 난다.



경영능력의 부재. 대경영으로 경영을 해본 적이 없는 나라라는 역사적 경험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기껏해야 관료제로 대기업을 운용하는 수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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