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사회와 정책연구 2018년 상반기(통권 33호)
일본계 외자 기업의 공장철수에 대한 한일 노동자 풀뿌리 국제연대:
1989년 수출자유지역 노조의 일본 원정투쟁 사례
이종구
(제1저자,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심상완
(참여저자, 창원대학교 사회학과)
이상철
(참여저자,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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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용어: 연대, 국제네트워크, 원정투쟁, 수출자유지역, 외국인 투자, 다국적 기업, 한일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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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은 2013년도 정부 재원(교육과학기술부 인문사회 연구 역량 강화 사업)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NRF-2013S1A3A2054223)을 받았다.
이종구(제1저자),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cklee@skhu.ac.kr
심상완(참여저자), 창원대학교 사회학과, swshim@changwon.ac.kr
이상철(참여저자),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sclee@skhu.ac.kr
1. 머리말
1965년의 국교 정상화
이후 한일 경제교류가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다.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 한국은 경제개발을 위한 자본, 기술, 노하우를 확 보한다는 명분으로 외국인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했다. 일본 기업들은 지리적으로 인접하고 저임 노동력이 풍부한 한국을 생산 입지로 활용하 기 시작했다. 또한 한국의 권위주의적 정권은 노동운동을 통제하고 있 었다. 마산과
이리 지역에 설치된 수출자유지역의 고용 규모는 급속하 게 확산되었으나 열악한 노동조건은 개선되지 않았으며 노사관계의 제 도화 수준은 낮았다.
1987년 6월에 정점에 달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항쟁은 대통령 직 선제 개헌과 절차적 민주주의의 복원을 실현하는 성과를
이룩했다. 이 와 함께 1987년 7월, 8월부터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 노동조건이 획 기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했다. 저임 노동력이라는 투자유인을 상실한 외 국인 투자 기업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적절한 절차를 거치지 않 은 외국인 투자 기업의 철수와 사업장 폐쇄는 심각한 노사 분쟁을 유발 하였다. 1989년에는 이리 수출자유지역에 입주한 일본계 장갑 제조업체 인 아세아스와니, 마산 수출자유지역의 일본계 전기전자 부품업체인 한 국수미다의 노동자들이 본사가 있는 일본으로 건너가 사용자의
일방적 폐업에 항의하는 원정투쟁을 감행했다. 특히 아세아스와니 노조와 한국 수미다 노조는 장기 원정투쟁을
전개하여 일본 본사로부터 사과와 함께 보상을 받아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사건은 한일 양국에서 외국인
투 자기업의 노동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구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 으며 자본과 기업의 초국경 이동이 확산되는 1990년대 이후의 세계화 시대에 발생하는 노동문제의 성격을 예시하고 있다. 원정투쟁을
계기로 양국의 노동운동을 잇는 일종의 “풀뿌리 국제주의”(grass-roots
internationalism)[1])가
형성되어 지속적인 교류로 이어지게 되었다. 장기간의 권위주의적 정권 하에서 외국의 정보와 차단되어 있었던 한국 노동자들이
어떻게 국경을 넘어 국제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고 또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이 연구는 한일
노동자와 시민을 주 체로 한 풀뿌리 수준의 새로운 국제교류 협력 연대가 태동 발전한 사례 로서 아세아스와니 노조와 한국수미다 노조가 전개한 일본원정투쟁의
특징과 동학을 재고찰하고자 한다.
한국에서 수출자유지역의 노동문제에 대한 기존 연구의 주요 관심은
노동조건의 실태 파악, 노동운동과 노사관계의 실태, 노동력의 주력이었 던 여성노동자의 상황 파악에 놓여 있었다. 특히
투자와 고용의 비중이 높은 일본계 기업의 노동문제가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제도적으 로 제약 조건이
많았던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운동은 민주노조 운동의 형 성 과정에 대한 연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2]). 다만 마산수 출자유지역에 입주한 전기전자 업체의 노동운동에
대한 조미진의 연구 는 1987년 여름의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 외자기업의 철수에 항의하는 다국적기업대책특별위원회가
조직되는 과정과 한국수미다 노조의 집단 해고 철회를 요구하는 원정투쟁 과정에 대한 분석을 포함하고 있다(조
미진, 1990). 반면에 일본에서는 한국 노동자의 원정투쟁은 일본계 다 국적 기업의 횡포가 초래한
사건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촉구하는 시민운동의 필요성을 촉구하는 논의가 제기되 었다(佐久間真一, 1992b). 또한 원정투쟁을 계기로 일본에서도 한국에 투 자한 일본 기업의 노동실태에 대한 고발성 조사연구가
진행되었다(労働情報編集委員會, 1990; 宮嶋信夫, 1990; 相川俊英, 1992).
그러나 일본의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한국의 노동운동을 지원하게 된
과정과 결과에 대한 고찰은 아직 양국의 노동연구에서 본격적으로 시도되지 않았다. 즉, 기존 연구에는 노동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사회 수 준의 국제협력에 대한 고찰이 누락되어 있다. 여기에서 다국적 기업의 문제 행동과 노동문제의 국제화라는 맥락에서 원정투쟁의 성격을 고찰 할 필요가 있다는
과제를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논의를 보다 일반화하 면 자본 이동의 자유화는 사회문제의 국제화와 국제문제의
사회화를(小倉充夫, 2002: 1~5; 梶田孝道, 1991: 2) 촉진하고 있다는 시각이 중요 한 의미를 가진다. 즉, 사회를 연구할 때에도 세계화 시대의 도래라는 맥락에 입각한 접근방법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각을 노동연구에 대입하 면 자본의 국제적 이동에 수반한 국제분업과 기업조직의 국제적 재배치 는 국민국가를
단위로 형성되는 노사관계 제도의 현실 적합성을 저하시 키고 있다는 문제가 제기된다. 특히 1990년대 이후에 본격적으로 전개 된 세계화(globalization) 시대에는
국경을 초월하는 공간에서 전개되는 노동운동과 노동연구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노동비용을 절약하
기 위해 자본은 용이하게 국제 이동을 할 수 있지만 인격체인 노동자가 국경의 벽을 넘는 것은 제약을 받는다. 즉, 세계화 시대에 노동자의 노 동조건 교섭력은 구조적으로 저하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는 각국의 노동자 사이에는 양호한 고용 기회와 노동조건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노동자 국제주의에
입각한 노동운동의 국제협력은 용이하지 않다. 또한 현지 법인과 다국적 기업 본사는 법적 으로 별도의
존재라는 명분 때문에 노사관계에서 사용자의 책임 소재가 애매하게 되므로 노사분쟁이 제도적인 틀 내부에서 해결되기 어려운 상 황이 발생한다. 결국 현지의 노동자는 사용자 책임을 추궁하는 과정에 서 본사 소재지의 노동운동 및 사회운동 세력과 연대를 모색하게
된다. 이와 함께 다국적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묻는 시민사회의 감시 운동이 노동문제와 연관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노사관계에서도 외국
정부, 외국 의 시민적 주체가 행위 주체로 등장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자본 이동의 국제화에 대응하는 노동자 국제주의의 성격과 동학을 고
찰하는 데에 참조할 수 있는 유익한 이론적 자원으로는 사회현상이 발 생하는 공간의 지리적 규모(scale)에
대한 비판적 이론화로서 다중규모 접근(multi-scalar approach)이 포함된다. 핵심적 논지는 지리적 규모는 존재론적으로 주어지는 정태적인 범주가 아니라 인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생산되는 구성물이라는 것이다(박배균, 2001:
201). 글로벌 스케일로 움직이는 자본이 로컬 스케일에 고착된 노동과 지역사회와의 관계에서 우위를 점한다는 이분법에 다중규모접근
은 비판적이다. 이와 같은 이분법은 자본이 생산활동에 유리한 각종 산 업입지적 조건과 사회적 기반이
형성되어 있는 장소로부터 반드시 자유 로운 것이 아님을 간과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반면에 단순 노동력을
활용하는 노동집약적 산업은 장소, 즉 산업입지에 대한 구속성이 상대 적으로 낮으므로 국제이동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19세기 유럽의 사회주의
운동에서도 등장한 노동자 국제주의는 내용 적으로 초국적으로 움직이는 자본에 대항하기 위해 "스케일
뛰어넘기
(jumping of scale)"를 통한 국제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 나 실제로 제1세계 이외의 지역에서의
노동자 국제주의는 기대하기 어 렵다(황진태, 2011). 제3세계의 노동조합 운동은 국제 활동에 대한 역사 적 경험, 지식 정보, 인적 물적 자원동원 역량이나 제도적 기반이 부족 하다. 기존 국제
노동조직들도 제1세계 중심으로 설립되었다는 태생적 한계와 관료주의적 운영방식 때문에 사실상 제1세계 외부의 노조와 연
대를 형성하기 어려웠다(Munck and Waterman,
2010: 283). 이와 같은 이유를 들어 황진태(2011)는 스케일 뛰어넘기를 할 수
있는 제도적 인 프라가 부족한 조건에서 제1세계 중심의 노동자 국제주의는 제1세계 이 외 지역의 모든 노조들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고 보고, 초국적 기업에 맞서는 또 다른 대안전략으로 지역사회 노조운동 에 주목했다. 그는
GM대우 비정규직 노조에 대한 사례연구를 통해 노 동자 국제주의 대신에 지역사회와의 연대에 기반한 ‘로컬공동체노조운 동’이 거둔 성과를 예시하며 노조와 지역사회간의 연대의
중요성을 강 조하고 있다.
노조와 지역사회 간 연대는 중요하지만 다국적기업의 현지 공장이
단
순조립 보세 임가공 위주의 생산방식을 채택해 지역 내 배태(embedded)
수준이 미약한 가운데 보다 저렴한 임금을 노려 공장 이전을 추진하고 있는 경우에는 그다지 효력이 없을 수 있다. 콕스(Cox, 1998)에 따르면,
스케일 뛰어넘기는 어떤 장소에 기반하고 있는 일련의 행위자들이 자신 의 ‘장소의존적인’ 이해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의존의 공간을 뛰어넘 어 다른 공간 스케일에 있는 행위자들과 ‘연대의 공간’을 형성함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스케일 뛰어넘기의 성패는 다른 공간 스케일에 있 는 행위자들과의 연대 형성 여부에 따라 달라지고 이
같은 연대형성의 참여는 이들을 연결하는 네트워크 존재와 이들 간 신뢰관계 여하에 크 게 좌우된다고 할 수 있다.
다국적 기업이 무소불위의 만능적 존재가 아니다. 다국적 기업도 본사나 지사가 설립되는 지역과
관계를 맺게 되 고 특정 장소에 고착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다국적 기업도 취약할 수 있고, 노동운동이나 시민사회의 압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다국적기업 본사가
공장철수를 추진할 경우, 현지 노동자들은 국경을 넘어서 본사 가 위치한 나라에 가서 시위, 언론홍보 등을 통해 기업이미지에 타격을 가하거나 다국적 기업의 모국이나 유치국의 중앙정부를 압박하여 본사 의
자본철수 결정을 철회시킬 수 있다(Park and Hwang, 2011; 황진태, 2011: 140).
이상의 이론적 논의로부터 이 연구에서 초점을 두고 조명하고자 하는
질문은, "노동자 국제주의가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 즉, 노동자가 국경 을 뛰어넘어 다른 공간 스케일에 있는 행위자들과 연대를 형성할 수 있 는 배경과 조건은 무엇인가?", "특히 기존 공식적 노동조합 네트워크의 국제연대 기능이 부재하거나 취약한 상태에서 공식 노조 네트워크 외부 에서 국제연대가 추구되었다면, ‘스케일 뛰어넘기’를 가능하게 하는 풀 뿌리 국제협력 네트워크의 형성 과정과 특성은 무엇인가?", "노동자 국 제주의의 성과와 한계는 무엇이고 여기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는 무 엇이 중요한가?"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연구 질문을 해명하기 위해 이 연구는 1980년대 말 일본원정투쟁을 실행한 다수의 일본계 외자기업 노조 가운데 상대적으로 자 료를 용이하게 입수할 수 있었던 한국수미다 노조와 아세아스와니 노조 의 사례를 중심으로 고찰하였다[3]). 사례연구를 위해 한일 양국에서 작성 된 문서, 문헌, 영상자료 등 질적 자료를 수집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하였 고 당시 연대투쟁에 참여한 당사자들과 면담을 실시했다. 한국수미다 노조는 원정투쟁 과정을 보고서로 남겼다(한국수미다전기노동조합, 1990). 1989년에 진행된 한국 노동자들의 원정투쟁을 지원하는 일본 사회운동의 중심이었던 ‘진출기업 문제를 생각하는 모임’4)도 한국수미다 노조의 활동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 아세아스와니 노조는 원정 투쟁 자체에 대한 보고서는 남기지 않았으나 일본 측 지원조직인 ‘조선 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지지하며, 한국의 민주화 투쟁과 연대하는 오사 카 부민 공투회의’5)(이하: 共闘会議)가 남긴 원정투쟁 과정에 대한 상세 한 기록을 이용할 수 있었다. 아세아스와니 노조의 원정투쟁을 계기로 만들어진 한일노동자 연대운동의 역사를 정리한 자료에는 원정투쟁에 참가한 양국 활동가들의 회상이 수록되어 있다(한일민주노동자연대 전 북모임, 2005). 일본의 지원자들도 다수의 문서자료를 남겼다. 또한 소 수의 일본 측 지원자를 접촉하여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표 1>). 이 밖에도 공개된 수기와 증언을 활용할 수 있었다.
<표 1> 면접자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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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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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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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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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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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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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투쟁 당시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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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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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아키라
(鈴木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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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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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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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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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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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꾜 동부 산재직업병센터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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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안전운동,
|
|
나카무라 다케시
(中村猛)
|
71세
|
남
|
서울
|
2014.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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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본항만노조 칸사이지
방본부 법률대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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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전북지역
본부 명예지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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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자카 고이치 (石坂浩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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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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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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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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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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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 비상근 대학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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릿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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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다 다케시 (古田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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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세
|
남
|
도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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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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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꾜수도노조 조합원 일한민중연대 사무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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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꾜수도노조 촉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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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연령은 면접 당시 기준
료의 한계로 인하여 고찰에서
제외하였다. 4) 進出企業問題を考える会.
5) 朝鮮の自主的平和統一を支持し、韓国の民主化闘争に連帯する大阪府民共闘会議.
2. 원정투쟁의 배경과 경과
원정투쟁의 배경을 파악하려면 1987년의
노동자대투쟁 이후에 발생
한 노사관계와 노동조건의 변화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저임 노동력을 활용할 목적으로 한국에 투자한 일본계 기업들은 노동운동이 활성화된 한국을 떠나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하는 상황에 주목하였다. 아세아스와니와 한국수미다의 원정투쟁 사례를 고찰하기 위해 우선 업 종, 노사관계, 철수 과정을 중심으로 사건의 배경을 고찰하였다.
1)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외국인 투자기업의
행동
1987년의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운동의 활성화와 노동조건의 개선을 가져왔다. 당시 상황에 대한 한 분석에 따르면, “1987년 4/4분기의 임 금 인상률 20%는 3년 동안의 임금인상과 맞먹는다. 대투쟁 시기에 100% 임금 인상한 곳도 여러 곳 있었다(양규헌, 2017: 264~265). 수 출자유지역에서도 민주노조
운동이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이와 같은 투 자 환경의 변화는 한국의 저임 노동력을 활용할 목적으로 수출자유지역
에 입주한 외국기업이 철수하거나 새로운 저임 지역을 찾아 이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전에도 수출자유지역에 서는 각종 제약 조건에도 불구하고 열악한 노동조건과 낮은
고용안정성 에 항의하는 노동운동이 태동하고 있었다.
실제로 수출자유지역에 유치된 업체의 상당수는 일본 국내에서 경쟁
력을 상실한 영세업체 및 공해배출 업체들이었다. 1974년 4월
공업단지 관리청이 대통령비서실에 제출한 “마산수출자유지역 저임금실태조사”에 따르면 학력별 임금 격차가 존재하지 않았다. 즉, 이 지역의 노동자는 국졸 이상의 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지극히 단순한 직무에 종사하고 있었다. 1973년 말 제1차 석유위기로 인한 세계적 불황의 여파로 1974년 7월 대통령비서실에서 작성한 마산수출자유지역에 대한 조사보 고서에 따르면 총 입주업체 111개 중 정상가동업체는 79개뿐이었다. 불 황으로 인해 감원된 노동자수도 1,589명에 달하였다. 불황이 도래하자, 근로조건 개선과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쟁의가
빈번해졌다. 당시 검 찰 조사에 따르면, 1974년 마산수출자유지역에서는
11개 업체 2,711명 의 노동자가 쟁의에 참여하였다. 수출자유지역에서의 노조결성과 노동쟁 의는 “외국인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 조정에 관한 임시조치 법”과 “수출자유지역 설치법”에 의해 이중으로 제약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쟁의가 발생했던 것이다. 한국수미다의 경우도 1974년 2월
25일 262명의 노동자가 참여하는 쟁의가 발생하였고, 이들의 요구 는 임금 30% 인상이었다(이상철, 2008: 80~82, 87). 이란에서 발생한 혁명의 여파로
1970년대 말에 제2차 석유위기가 닥치자 마산수출지역
에 투자한 일본기업들은 휴폐업과 임금 체불 사태가 일어났다. 당시 11
개 일본인 투자 업체가 폐업한 다음 경영주가 귀국해 버리는 바람이 600여 명의 노동자의
체불임금이 1억 6,100만원에 이르렀다고 한다. 더 욱이 이들 공장의 재산이 은행에 담보로 잡혀 있어 체불임금 해결은 어 려운 상황이었다(매일경제신문, 1979.12.7.). 1980년 봄이 되자, 마산수 출자유지역에도 노조가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1980년 4월 1일에는 키타 비시(北菱)의 노동자 150명이 최초의 노조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한국노 총 경남협의회 사무실에서 경남서부지역지부 키타비시 분회 결성대회를 개최하고 경영주가 운영난을
이유로 노임체불, 부당해고, 부당노동행위 등을 하는 것을
막는데 앞장 설 것을 다짐하였다(경향신문, 1980.3.2.).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리와 마산의 수출자유지역에서도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와 함께 JOC, 산업선교, YMCA를 비롯한 기독교 계통의 활동가들이 노동자 교육과 조직화에 기여했다(김덕순, 2009: 18~41; 김주완, 2007; 황주석, 2005: 160~161, 188~189; 이상익, 2005:
222~223; 김하경, 1999: 35). 이러한 과정에서 형성된 선진노동자 집 단은
실질적으로 1987년의 노동자 대투쟁을 선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 마산수출자유지역에서 전개된 상황을 보면 1989년 11월에는 사업장의 57%에
노조가 만들어지고 노동자의 74%가 조합원이 되었다(조미진, 1990: 35). 이와 함께 입주 기업은 1988년 무 렵부터
인원 감축, 폐업, 철수의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6)(韓国スミダ労組に連帯する会, 1990a:
24) 노동자와 조합원도 급속하게 줄어들었다. 일 본 기업이 1976년~1978년 무렵에 집중적으로 진출한 이리수출자유지 역에는
1989년 11월에 28개사가
입주해 있었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 한 상황을 보면 인원 감축 2개사, 폐업 1개사였다(山原克二, 1990: 69). 마산수출자유지역 입주업체의
평균 임금 상승률은 1987년 16%, 1988 년 24%, 1989년 24.29%라는 보도(韓国スミダ労組に連帯する会, 1990a: 7)가 등장할 정도였다.7) 그러나 이미 일본 기업의 생산 입지는 1980년
대부터 신흥공업국 지역과 비교해도 임금 수준이 더욱 낮은 아세안과 중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宮嶋信夫, 1990: 29). 즉, 일본→신흥공업국
→중국, 아세안으로 노동집약 산업이 이동하는 구조적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1987년을 전후한 시기의 국제적인 임금 격차를 살펴보면 1980 년대 후반에 신흥공업국은 일본의 약 1/5 수준이지만, 아세안은 약
1/10, 개혁 개방
정책이 시작된 직후인 중국은 약 1/100 수준이었다
(<표 2>).
<표 2> 아시아의 시간당 임금 국제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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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국가
|
임금 (달러)
|
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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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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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5
|
|
|
신흥공업국
|
타이완
|
2.88
|
1988
|
|
한국
|
1.72
|
1987
|
|
|
홍콩
|
2.04
|
1987
|
|
|
싱가포르
|
2,21
|
1987
|
|
|
아세안
|
말레이시아
|
1.12
|
1986
|
|
태국
|
0.64
|
1986
|
|
|
필리핀
|
0.83
|
1987
|
|
|
인도네시아
|
0.56
|
1985
|
|
|
|
중국
|
0,17
|
1987
|
자료: 日本開發銀行, 調査 1990年2号(宮嶋信夫: 29에서 재인용).
6) 
1989年11月29日, 韓国スミだ労組に連帯する会, 結成集会、プログラム.
7) 원자료는 동아일보, 1988.10.26.
한국의 노동자들은 외국인투자 기업의 철수라는 위기 상황에 공동으
로 대응하기 위하여 연합체를 만들었다. 9개 회사의 노조는 1989년
10 월에 ‘외자공투위’8)를
결성하여 야당 당사 농성, 대사관 항의 방문, 대 학별 서명운동, 민중대회 참석과 사례 보고, 등의 방법으로 여론을 환기 시켰다.9) ‘외자공투위’는 1987년의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고조된 민주 노조운동의 연합체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와 밀접하게 연계된 노동운동
조직이었다. 반면에 한국노총을 비롯한 기존 노동운동 조직은 외자기업 의 노동문제를 사실상 방치하고 있었다. 즉, 아세아스와니, 한국수미다
노조의 일본 원정투쟁은 민주노조운동의 진출이라는 맥락 위에서 이루 어졌다.
2) 아세아스와니 노조의 사례
아세아스와니의 본사는 1937년에
설립된 스와니(スワニー)이며 소재 지는 일본 시코쿠(四国)지역에 있는 카가와현(香川県) 시라도리쵸(白鳥町) 에 있었다. 주요 제품은 지역 특산물인 가죽장갑이었다. 1978년부터 이 리수출자유지역에 입주한 아세아스와니는 일본 측이 주식 지분을 100% 소유한 노동집약적인 봉제 업체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 일본
본사에는 영업 부문을 남기고 생산 부문은 모두 한국의 자회사에 이관했다. 그러 나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 한국 자회사를 단계적으로 폐쇄하면서 중 국에 공장을 세우기 시작했다(共闘会議, 1990: 45~48).
아세아스와니에서는 1989년
4월 22일에 여성 노동자 176명, 남성 노 동자 36명으로
구성된 노조가 결성되었다. 9일간의 파업을 거쳐 단체협 약을 체결하여 확보한 노동조건의 주요 개선 내용은10) 임금 인상, 관리
8)
한국피코, 한국TC전자, 한국TND, US마그네틱스, 에프코아코리아, 한국수미 다전기, 금산전자, 한국동경전자, 아세아스와니가 결성한 ‘외국자본 부당철수
한국피코, 한국TC전자, 한국TND, US마그네틱스, 에프코아코리아, 한국수미 다전기, 금산전자, 한국동경전자, 아세아스와니가 결성한 ‘외국자본 부당철수
집단해고 및 노조탄압 분쇄 공동투쟁위원회’.
9) 인터넷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제4권 제2장 제4절
(http://wbook.liso.net/view.asp?menucode=read&book=4&number=966, 2016.2.20.접속, 大阪府民共闘会議, 1990: 46, 50).
자의 사정(査定) 권한
축소, 장기근속자 우대, 능률급의 비중 축소, 노동 시간 단축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共闘会議, 1990: 49; 서소화,
1991: 243~245). 그러나 회사는 한국에서 철수할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1989년
9월 30일에 한국인 상무가 [4]월
1일부로 폐업한다는 사실을 구두로 노조에 통보하였다. 일본
본사는 10월 1일자 팩스로 폐업과 전 원 해고를 통지했다. 노조는 가두시위, 노동부와 거래 은행에 대한 항의 방문 등의 행동을
하다가 12월 22일에 5인의
대표단을 일본 본사로 파 견해 원정투쟁에 들어갔다(労働情報編集委員會, 1990: 56). 노조는 본사 를 상대로 단체교섭을 요구했으며 가두시위, 단식투쟁
등을 통해 여론 에도 호소하였다. 결국 1990년 3월 13일에 아세아스와니 노조와 본사 가 합의서에 서명하고 쟁의를
종결했다. 주요 합의 내용은 일방적 폐업 에 대한 회사의 사죄, 해고
철회, 해고수당과 퇴직금 지불, 3월 30일까 지의 임금 지불, 노조에 대한 생존권 대책 자금 지불, 야간 학교 재학 자의 학업 지속을 위해 재직증명서와 취학동의서를 발급하고 관계 기관 에 학적 유지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며 졸업할 때까지 회사가 부담해야 할 학비를 노조에 지급, 회사는 구속 노동자의 석방을 요청하며
노사는 민형사상의 책임을 묻지 않을 것, 등이었다(共闘会議, 1990: 66).
아세아스와니 노조의 원정투쟁 사례는 1987년의 노동자 대투쟁을 계 기로 활성화된 노동운동과 이에 대응하는 외국인투자 기업의 철수가 초 래한 노사
분쟁의 해결 과정을 을 보여주고 있다. 이 사례의 배경에는 기업의 전제적 노무관리 및 권위주의적 정권의
노동통제에 대항하는 민 주노조 운동의 성장과 이를 지원하는 JOC의 활동이 있다. 한국의 민주 노조운동과 일본의 지원자 사이의 협력관계는 JOC의
국제네트워크를 통하여 출발하였다. 그러나 원정투쟁이 종결된 이후에도 양국의 노동운 동 활동가들은 지속적인
교류관계를 유지하고 있다(조문익, 2005: 45~57). 즉,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형성하는 시민사회 수준의 한일관계 가 장기적으로 형성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
3) 한국수미다 노조의 사례
마산수출자유지역에 입주한 한국수미다전기의 본사는 도꾜(東京) 동북 부의 중소공장 밀집 지역인 카츠시카구(葛飾区)의 카나마치(金町)에 있 는 수미다전기(スミダ電機)였다. 1950년에 설립된 이 회사의 주요 생산 품은 코일을 비롯한
전기기계용 부품이었다. 한국 자회사는 1972년에 설립되었으며
종업원 규모가 최대 3,000명에 달한 적이 있었을 정도의 해외 주력공장이었다. 이 회사는 1984년 10월부터
중국 공장에 생산을 위탁하기 시작하였으며 한국에서 노동운동이 활성화되기 시작하자 1988 년부터 본격적으로
중국과 말레이시아로 생산 기능을 이전하기 시작했 다(相川俊英,
1992: 55~59; 韓国スミダ労組に連帯する会, 1990a: 14~15,
86~87).
원정투쟁이 발생했을 때 언론 인터뷰에서 본사 상무는 “한국에 진출 할 때에는 노조가 없었으며 기업의 노무관리는 국가가 하고 있었다.
종 업원은 필사적으로 일했다.”(宮嶋信夫, 1990:
29)[5])고
상황을 설명했다. 반면에 원정투쟁에 참가한 7년 경력의 여성
노동자가 1989년 12월 10 일에 일본 측 지원자 단체와 인터뷰한 기록에는 “노동자의 7~8할이 중 졸 여공이었으며 야간 고교에 다니고 있었다. 일상적으로
하루 4시간정 도의 잔업을 했지만 무급이었으며, 한 달에
2회는 일요일에도 출근해 무급으로 일했다. 노조를 결성하기
이전에 월 12만원을 받았다. 본사가 고임금이라고 하는 폐업
직전의 실제 수령액은 22만원이다.”는 실태가 드러나 있다. 이 노동자는 “1980년대 동안 오랫동안 준비 과정이 있었 기 때문에
1987년 8월에 노조를 결성할 수 있었다. 노조의 가장 큰 성 과는 단체협약을 맺어 잔업시간 제한, 연장근로에
대한 할증 임금, 모성 보호를 명문화 한 것이 가장 큰 성과이다”는
내용의 기록을 남겼다 (韓国スミダ労組に連帯する会, 1990a:
89~91). 이 회사 노동자들은 1985 년과 1986년에도
노조 결성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한국수미다에서는 1987년
8월에 노동조합이 결성될 당시에는 종업원
이 약 2,000명이었다.
그러나 본사는 1988년 3 월에 주력 생산
공장을 한국에서 중국으로 이동한다는 결정을 하였으며 마산공장에서는 기계 반출과 부서 해체, 희망퇴직
모집, 임금 체불, 상여금 분할 지급 등으 로 노동자 사이에
불안감이 확산되었다. 신규 노동자 채용은 1988년 3 월에 30~40명을 채용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노 조 조합원의 규모는 축소되어 1989년
10월에는 450명으로 줄었다(韓国スミダ労組に連帯する会, 1990a: 25).
1989년 10월 14일에 폐업과 전원 해고를 일본 본사에서 팩스로 통 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한국수미다노조의 대표단 4명은 일본에 도망치 듯 돌아간 사장을 쫓아 1989년 11월 15일에
일본으로 건너가 원정투쟁 을 시작했다. 이들은 본사에 단체교섭을 요구하며 일본의 지원자와 같 이 시위, 단식투쟁 등의 방법으로 여론에 호소하였다. 해고 통보 이후 약 8개월에 걸친 항의 운동은 1990년 6월 8일 노사가 합의서에 서명함 으로써 종결되었다. 주요 합의 내용은 회사 측의 사과, 해고 통지 철회,
월말까지 지급해야 할 임금과 고용대책 및 생존권 대책자금을 조합에게 지급하는 것이었다(佐久間真一, 1992a: 22).
한국수미다 노조의 원정투쟁은 일본의 수도 도꾜에서 전개되어 여론
의 주목을 가장 많이 받았으며, 노동조합과 사회운동 단체, 사회당의
지 원을 받았다[6]). 이 사례에서도 이윤 추구에 유리한 저임 노동력을 찾아
국제적으로 이동하는 다국적 기업의 행동을 규제하기 위해서는 시민사 회 수준의 정보 교류와 이의제기 행동이 중요하다는 사실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한국수미다의 노동조건, 노조의 결성과 운동 과정은 마산수 출자유지역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상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3. 바다를 넘는 풀뿌리 국제협력 네트워크
1) 한국의 민주노조운동과 기독교 사회운동의 국제네트워크
수출자유지역이 조성된 직후인 1972년
10월부터 한국에서는 유신체 제가 시작되었으며 시민적 자유와 기본권이 극도로 제한되었다. 제도적 으로 외자기업에서 발생하는 노동운동을 엄격하게 제약하는 조치가 이 루어진 상황에서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운동은
위축되어 있었다. 반면에 정권의 통제와 감시를 받는 제도화된 공식 노동조합의 외부에서 새로운 민주노조
운동의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다. 수출자유지역에서도 기독교 노동운동 단체와 지식인 출신 노동운동가들이
노동자를 조직하고 권리 의식을 교육하며 노동조건을 조사하는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새로운
노동운동은 권위주의적 정권에 항거하는 민주화 운동과 연 계되어 있었다.
권위주의적 정권 시대에 지식인 집단과 산업선교 및 JOC의 활동가들 이 노동운동에 참여한 한 것은 노동자가 조직을 형성하는데 필요한 최 소한의 기초적인 자원을 제공하는
의미가 있었다. 집회·결사·통신의
자 유가 극도로 제한되고 기본적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당시 한국에서 종 교 단체가 제공하는 교육프로그램과 활동 공간은 노동자들이 계급적 이
받아 NHK 등 일본 내외 언론 인터뷰, 국회 및 정당방문, 등 일본내 여론 화 및 홍보 작업을 했다. 한국수미다 문제에 대해 일본 TBS에서 방송하고, NHK-TV에서는 ‘한국의 노동문제를 생각한다–수미다 그 후 투쟁 100일’이
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하기도 하는 등 미디어에서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
(한국수미다노조, 1990).
해를 인식하고 노동운동의 주체로 변화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이러
한 현실에 대해 정진상은 교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운동과 학생운동이 가지고 있던 상대적으로 자율적인 공간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다(정진 상, 2006: 34). 또한 구해근은 해방신학과 같은 진보적
신학에 영향을 받은 교회단체들이 국제적인 네트워크와 상대적으로 안전한 정치적·이데 올로기적 위치를 활용하여
노동운동가들을 지도하고 피난처를 제공하였 으며 야학과 소모임 활동을 조직하여 현장 노조 활동가를 양성하고 지 원한 사실을 중시하고 있다. 즉, 사업장 외부에서 노동계급 사회를 형성 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Koo Hagen, 2001: 42). 이 와 같이 탄압에도 불구하고 기존 노조 바깥에서
민주화 운동 세력의 지 원을 받은 평노동자 중심의 민주노조 운동이 확산되었다.
특히 산업선교와 JOC를
비롯한 기독교 계통의 노동운동만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던 기독교 인권운동은 외국의 종교단 체 및 인권운동과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다. 권위주의적 정권 시대에 는 언론과 통신의 자유가 심각한 수준으로 제한되었지만 국제네트워크 를
갖춘 개신교와 가톨릭 계통의 사회운동 단체는 외국의 정보와 지식 을 국내에 전달하는 통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인권 탄압 상황 을 외국의
종교단체, 인권단체, 평화운동 단체 등에 알려 국제 여론을
환기시키고 한국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는 창구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의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진 외국의 사 회운동과 국내 민주화 운동 사이에는 네트워크와 신뢰관계가 형성되었
다. JOC와 산업선교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 사회운동의
국제네트워크는 원정투쟁을 실행한 한국의 노동자들과 일본의 지원자를 연결하는 역할 을 수행하였다. 현지
지원자들은 원정투쟁단이 일본 현지에서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자원과 정보를 제공했다. 이들이 구체적으로
숙소와 교통수단 확보, 법률 자문, 시위, 언론 홍보, 정부 지자체 국회를 대상 으로 한 항의와 교섭 활동
지원 등과 같은 도움을 제공했으므로 장기간 의 원정투쟁이 가능했다(한국수미다전기노동조합, 1990: 17~33; 共闘会議, 1990).
아세아스와니 노조의 사례를 보면 노동자들은 1983년에 발생한 JOC 회원 김덕순 부당해고 사건 당시부터 JOC를 매개로 하여 일본의 지원 자와 연결되어 있었다(김덕순, 2009: 18~41). 1984년 11월말에 일본 JOC는 15개 단체의 대표를 모아 대책을 논의하고 “12월 14일 스와니 도꾜 지사에서 시위”, “본사인 일본의 스와니와 한국의 아세아스와니에 항의 편지 전달”, “아세아스와니
사건의 부당성에 대한 여론 환기”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행동을 실천하기로 결정했다. 실제로 1984년 12월
14일에는 스와니 도꾜 지사를 항의 방문한 30여명이 28개 단체가 서명 한 항의문을 전달했으나 기업 측은 내용을 인정하지 않았다.[7])
그러나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아세아스와니 문제를 생각하는 모임’[8])이
만들 어지고 재일한국조선인[9]) 정치범 구원운동 단체인 ‘오사카일조공투’[10])가
아세아스와니의 모기업인 스와니의 본사가 있는 시코쿠 지방 및 이와 인접한 일본 서부의 칸사이 지방에서 적극적으로 항의 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은 1989년의 원정투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도 중요 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수미다 노조 조사통계부장으로 원정투쟁에 참가한 박성희도 ‘진 출기업 문제를 생각하는 모임’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마산에 있는
가톨 릭 노동상담소를 통해 수출자유지역 노조와 간담회를 가진 적이 있었으 며, 출발하기 전에 일본에서
이 조직이 투쟁을 적극 지원하기로 예정되 어 있었다는 증언을 남기고 있다(박민나, 2004: 243~244). 즉, 가톨릭 노동운동의 국제네트워크는
1989년의 원정투쟁에도 기여하고 있었으며 다국적 기업을 감시하는 일본의 시민운동과 연계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한국수미다 노조의 원정투쟁 당시에 통역을 맡았던 이시자카 고이치(石坂浩一)는 노조 대표들이 일본에 도착하기 하루 전에 가톨릭
측의 인사 를 통해 지원 요청을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기독교 단체가 오랜 세월 동안 연대운동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배경을 빠르고도 정확하게 상대방의 정보를 입수하고 상대가 필요로 하는 도움을 제공할 수 있는 통로가 확보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찾고 있다(이시자카, 2012: 309). ‘한국문제
기독자 긴급회의’(韓国問題キリスト者緊急会議)와
같은 개 신교의 해외 민주화 운동 네트워크도 한국 노동자와 일본의 지원자를 연결하였다(김경남, 2015: 27, 39, 72~73; 東海林勤, 2012:
176~178 ).[11]) 이시자카 고이치는 “아세아스와니
본사를 상대로 가톨릭 활동가와 오사카 지역 활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1980년대 중반부터 부당해고에 항의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여기에는 개신교 활동가도 참가했으며 한국 정부가 반국가 단체로 규정한 한통련[12]), 한청[13]) 인사들은 눈에 띄지 않 게 개인적으로 도움을 제공했다.”는 증언을 하고 있다[14]). 기독교 사회운 동의 국제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시작된 원정투쟁은
노동자의 독자적인 교류와 협력을 활성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산업안전과 노동자 건강 문제를 다루는 단체에서 활동하며 일본에서
수미다 노조의
원정투쟁을 지원하는 활동에 참가했던 스즈키 아키라(鈴木明)도
한국수미다의 원정 투쟁을 계기로 일본의 노동운동 활동가들과 한국의 전노협[15]) 활동가들이 교류하는 계기가 만들어졌으며 김영삼 정 부가
들어선 이후부터 한일 노동자 교류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고 밝 히고 있다. 도꾜(東京)수도노조22)의 활동가로서 한국수미다 노조의 원정
투쟁을 [16]지원했던
후루다 다케시 (古田武)는 노동자 대투쟁이 전개되기 이전인
1986년에도 한국 개신교 성직자의 도움으로 방한하여 한국의 민주노조 활동가들의 조직인 민주노동자복지협의회
관계자와 전태일 열 사의 모친인 이소선 여사를 만났다는 증언을 하고 있다. 또한 그는 1988년에 일본계 다국적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촉구하는 ‘진출기업
문 제를 생각하는 모임’의 일원으로 마산을 방문해 가톨릭 인사들의 중개 로 한국수미다 노조를 비롯한
한국의 민주노조와 만나기 시작했으나 곧 양국의 노동운동 활동가들은 직접 교류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
한 아세아스와니 노조의 원정투쟁을 지원한 오사카 지역의 노동단체와 전북 지역의 노동단체는 쟁의가 마무리된 이후에도 활발하게 교류하여 한일 노동자의
연대를 강화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정기적인 교 환 방문을 통해 경험을 교환하고 집회와 서명운동에
참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2004년 10월 26일에는 일본 오사카에서 ‘한일민주노동자연 대’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조문익,
2005: 37, 91). 전북 지역의 민주노 총 활동가들과 일본 오사카 지역에서 활동하는 ‘젠고완’(全港灣)[17]),
‘젠로 쿄’(全労協)[18])등의
‘렌고’(連合)[19])와
거리를 두고 있는 계급운동 지향적 노동단체의 활동가들이 참가하는 ’한일민주노동자연대‘는 현재까지 지속 적인 교류를 지속하고 있으며 한국에 있는 일본계 기업의 노동문제에 대한 감시 활동을 하고 있다[20]). 이와 같은 사례는 시민사회 수준에서 노동운동 활동가들이
독자적인 한일관계를 형성해 나가며 서로 이해 수 준을 높여 나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1987년의 노동자
대투쟁으로 민주노조가 노동운동의 주체로 등장하 였지만 종교 단체와 지식인 단체는 노동운동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다국적 기업의 행동과 이에 대응하는 사회운동에 대한 정보 가 풍부한 기독교 사회운동의 국제네트워크를 활용해
연결된 한국의 노 동자와 일본의 지원자는 접촉을 확대해 가면 독자적인 협력관계를 가지 게 되었다. 따라서
원정투쟁의 의미를 심층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노동자와 일본의 지원자의 관계 형성 과정에 초점을 맞춘 고찰 이 필요하다.
2) 원정투쟁을 지원한 일본 사회운동 집단과 국제네트워크
일본에서 한국 노동자의 원정투쟁에 협력한 집단은 고정된 특정한 세
력이 아니며 한일관계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장기적으로 형성되었다. 지 원자 집단의 형성 과정에는 한국에
투자한 일본계 기업의 노동문제만이 아니라 한일관계 및 일본의 사회운동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전후 일 본에서 자유주의적인 시민과 혁신세력은 반전, 평화, 민주주의라는 가치 관을 내세우면서 동북아 지역의 냉전체제 극복과 한반도의 분단 해소가 연결되어 있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1973년의 김대중 납치사 건은 일본의
사회운동이 한국의 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민주화 운동 과 협력하는 방안을 모색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일본 내 부에서 원정투쟁을 지원하는 집단이 형성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시민사 회 수준의 한일교류를 통해 축적된 네트워크가 일본 내부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시자카 고이치는 한국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를 신좌익의
영향을 받은 젠교토(全共斗)[21])
학생운동 경험에서 찾고 있다. 그는 고교 1학년
때 중금속 폐기물을 방출하는 공장을 한국으로 이전하려는 일본 기업의 공해 수출에 대해 항의하는 시민운동[22])에 참가했으며, 같은 고 교에 다니는 재일동포 학생의 부친이
한국에서 1974년에 간첩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은 사건29)이 발생했을 때 학생회 부회장으로서 구출운동에 참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후루다 다케시의 사례 는 계급운동적 노동운동을 지향하는 ‘소효’(総評)’30) 계통 노조의 활동가 와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이 관계를 맺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후루다 는 1972년
6월부터 15명 내외의 노동운동과 지역운동 활동가들과 같이
연구회를 만들어 한국어와 식민지 지배의 역사를 학습했다. 이 모임에 서 총련계 조선대학교 교원이 역사와
언어를 강의했다. 그는 전태일 열 사의 모친 이소선 여사를 소재로 한 영화를 제작해 상영하는 활동에
참 가했다. 또한 김대중 납치 사건, 재일한국조선인 정치범
사건, 청계피복 사건, 동일방직사건 등에 대한 지원 활동에
참가하며 한국 문제를 다루 는 ‘민중연대31) 수도권연락회의’ 사무국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1989년에 울산 현대중공업의 쟁의 현장을 방문했다가 추방되고
한국 정부로부터 입국 금지 처분을 받았다. 한국의 민주노조운동과 연계하려는 일본의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적극적인 자세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 현장을 확인 할 목적으로 1987년 가을에 노동운동 활동가 1인과 같이 서울에 와서 대학 캠퍼스에서 살포되는 유인물을 수집해 귀국하다가 김포공항에서 적발된 스즈키 아키라의
체험에서도 발견된다. 일본의 혁신 진영 활동 가들이 한국의 민조노조운동과 협력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원정투쟁에 대한 지원자 집단이 일본 현지에서 형성될 수 있었다.
‘JOC’의 국제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일본에서 결성된 김덕순 부당해고 사건에 항의하는 ‘아세아스와니 문제를 생각하는 모임’의 회원들은 ‘한 국음향32) 노조 탄압 대책회의’의 회원들과 같이 ‘진출기업 문제를 생각
을 한국으로 이전하려 시도하다가 일본 시민들의 항의로 중지한 사건을 말 한다(구도완, 2015: 233~235).
29) 1974년에 발생한 진두현 사건을
말한다. 내용은 김효순, 2015: 380~381 참조.
30) 日本労働組合総評議会.
31) 民衆連帶首都圈連絡會議 1979.11.13. 발족. 다양한 한일연대 활동 단체가 참가해 조직한
상설 기구.
32) 서울 구로공단 소재, 일본계 외국인투자기업. 1985년 4월 9일에 노조를 결
1989년 2월에 실시한 한국 현지조사에 참가한 오쿠라 카즈요시(大倉一
美) 신부를 비롯한 회원들은 이리를 방문하여 가톨릭 노동사목센터를
통하여 1983년에 태창메리야스와 아세아스와니에서 해고된 김덕순의 소 식을 확인하였으며, 일본계 기업인 동양석재와 코리아테크노에서 쟁의를 벌이고 있는 노동자를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進出企業問題を考える会, 1989: 32~33).
칸사이(關西) 지역에서 아세아스와니 노동자의 운동을 지원한 ‘오사카 일조공투’는 본래 1975년에 한국에서 발생한 재일한국조선인 본국 유학 생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를 지원하고 한국의 군사정권을 비판하는 시민 단체, 노동단체, 재일한국조선인 단체로 구성된 연대 조직이었다. 이 조 직은 1984년부터 김덕순 사건을 계기로 아세아스와니 본사 사장, 대주 주, 거래 은행을 상대로 항의 운동을 전개하면서 형성된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1989년에
발생한 아세아스와니 노조의 원정투쟁을 지원하는 일본 사회운동의 중심이 되었다(共闘会議, 1990: 45, 48). 1989년에도 ‘오사카일조공투’는 아세아스와니 노조의 원정투쟁단이 일본에 도착하기
성하고 집행부가 민주화추진협의회 사무실에서 농성하다 17일에
연행된 사
건.
33) 이시자카 고이치의 증언.
이전인 11월 중순부터 스와니 본사가 있는 시코쿠(四国) 지역의 지원자 들과 같이 항의 운동을 시작했다. 각종 지원 집회의 연락처만이 아니라 원정투쟁이 종료된 다음에 나온 보고서의 발행자도 ‘오사카일조공투’였다.
아세아스와니 노조의 원정투쟁단이 일본에 도착한 직후에 ‘오사카일
일본 시민들이 조직한37) ‘한국수미다노조와 연대하는 모임38)’의 연락 처는 도꾜에 있는 카톨릭 마치다(町田)교회였으며 대표는 오쿠라 카즈미 (大倉一美)는 신부였다. 이
조직과 ‘진출기업 문제를 생각하는 모임’, ‘한국TND 노조를 지원하는
모임’39)은 연락처와 대표를 공유하고 있었 다(韓国スミダ労組に連帯する会, 1990a: 69). 여기에서도 가톨릭의 국제 네트워크가 ‘진출기업
문제를 생각하는 모임’과 연계되어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한국수미다
노조위원장 등 4명의 노조원이 일본 수미다노조 가 소속된 상급단체를 방문하고 일본 본사와의 교섭을 추진했으나
진전 이 없었다. 한국수미다 노조의 원정투쟁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한 일 본의 노동단체는 계급운동적
노동운동을 지향하고 있는 공공부문의 ‘도 꾜수도노조’ 및
본사 인근의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도꾜동부노조’ 였다.40) 또한 사회당은 한국수미다 노조 대표단의 단식투쟁 사태를 맞 아 사건의 조기 해결을
촉구하는 국회의원 41명의 서명을 받아 회사에 제출하고 국회에서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방법으로 사용자의
태도 변화 를 촉구하였다41).
이상과 같이 한일 양국 노조의 전국적 정상단체가 한국에 있는 일본계 기업에서 발생한 노동문제를 사실상 방관하고 있는 가운데 기독교
36)
CD자료, SWANY 1989, アジアスワニ─日本遠征闘争の記録-1989, 아세 아스와니 일본 원정투쟁의 기록- , 監督 OH DOOHEE, 2014, 製作 平和の嵐,68Min. Japan.
37) 1989.11.29.
38) 韓国スミダ労組に連帯する会. 39)
韓国TND労組を支援する会.
40) 스즈키 아키라의 증언.
41) 1989.12.5.
참의원
외무위원회, 다케무라(竹村)
의원이 수미다전기 문제 거 론, 1990.4.16. 중의원, 상공위원회, 무토(武藤)통상대신 답변, “사태를 심각 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경영자가 양심적이지 않다. 무엇이 가능한지 빨리 서 둘러 연구하겠다.”고 답변(進出企業問題を考える会,
1990).
사회운동의 국제네트워크는 일본 시민의 관심을 촉구하고 지지를 호소 하며 양국의 사회운동을 연결하는
매개 기능을 수행했다. 그러나 한국 의 민주화와 함께 양국의 대중에 기반을 둔 풀뿌리 수준의 노동운동은
종교단체의 국제네트워크를 매개하지 않고 직접 교류하는 관계를 맺게 되었다. 즉, 한국 노동자들은 원정투쟁 과정에서 일본의 사회운동 단체 와 접촉을 확대해 가며 독자적인 국제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었다.
3) 한일 사회운동의 국제네트워크와 공론장
일본에서 한국 민주노조의 원정투쟁을 돕는 지원자 집단이 형성되는
과정은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일본 시민의 관심과 밀접하게 연관 되어 있다. 이러한 관계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려면 시민사회 수준에서 전개된 한일관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특히 김대중 납치사건 (1973.8.8)의 충격으로 일본 사회 내부에
한국의 인권 문제와 민주화 운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러나 일본 의 한일
연대운동은 단순히 한국을 돕자는 운동이 아니라, 일본인이 주 체성을 가지고 일본의 현실을 개혁하려는
집단의 운동이기도 했다(石坂浩一, 2012: 308).
한국 노동자의 일본 원정투쟁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기
독교 사회운동의 국제네트워크가 수행한 역할 만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축적된 시민과 노동자의
국제네트워크가 존재하고 있었다. 원 정투쟁을 지원한 국제적 네트워크는 형성은 국경을 초월하는 공론장(이 종구, 2015: 28~29)이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 의 다국적 기업 문제를 감시하는 시민운동인 ‘진출기업
문제를 생각하 는 모임’은 한일 양국의 사회운동을 연결하는 초국경 네트워크와 공론 장으로서 기능했다. 또한 아세아스와니 노조의 원정투쟁이 계기가 되어 ‘한일민주노동자연대’가 만들어지고 한일 노동자 교류가 장기적으로 지 속되는 사례를 통해서도 국제적 공론장의 형성 과정을 볼 수 있다.[25])
또한 일본 원정투쟁은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이 일본만이 아니라 필리핀 을 비롯한 동남아 지역의 노동운동을 비롯하여 개신교와 가톨릭의 국제
적 사회운동네트워크와 협력 관계를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 원 정투쟁이 마무리된 이후 1990년 10월에 서울에서 전노협 주관, 아시아 교회협의회 도시농어촌선교위원회43) 주최로 개최된 원정투쟁에 관련된 주요 논점을 토의하는 ‘외자기업 노동문제에
관한 국제회의’는 국경을 초월한 공론장이 형성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회의 에는 원정투쟁의 주체와 지원자만이 아니라 한국, 일본, 필리핀의 노동 단체와 사회운동 단체가 참가하여,44) 다국적
기업의 노동 문제를 고찰 하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원정투쟁은 국경을 초월해 발생하는
노동문제를 국제적인 사회운동으로 해결하는 선례를 남겼다. 다국적
기 업의 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운동의 국제화와 함께 시민의 국제협력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원정투쟁을
계기로 한일 양국 의 노동자들은 지속적인 교류관계를 가지게 되었으며 노동 인권의 확립 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지식, 정보, 경험을 공유하는 협 력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바다를 넘어선 첫사랑-1989
수미다의 기억”(감독 박정숙, 2010, 95min)의
일본 시사회가 2010년 12월 20일 당시 지원 현장인 도꾜 키쯔시카구 가나 마치의 한 노동상담센터에서 개최되었는데 시사회 장소를 꽉 채운 당시의
지원자, 노조, 시민운동 인사 등 200명 가운데에는 아세아스와니 투쟁에 대 한 높은 관심이 유지되고 있다(NPO,
法人労働組合作ろう!入ろう!相談センタ
http://blog.goo.ne.jp/19681226_001/e/d88f166652d6e1b62b5a1cc7ef88e757,
2017.12.26. 접속).
43) CCA-URM,
Christian Conference of Asia – Urban Rural Mission.
44) 인터넷 전국노동조합협의회
백서 제4권 제2장 제4절
(http://wbook.liso.net/view.asp?menucode=read&book=4&number=966,
2016.2.20. 접속).
4. 마무리 :
노동문제의 국제화와 풀뿌리 국제주의
한국 노동자의 일본 원정투쟁 사례는 자본의 국제적 이동이 촉발한
노동문제의 국제화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와 시민의 풀뿌리 국제 연대의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다. 원정투쟁의 기반은 시민사회 수준의 한일관계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풀뿌리 국제네트워크였다. 당시 한국의 사회환경은 노동운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자원동원능력을 갖춘 노조의 조직화도 곤란한 열악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실정에서 군사독 재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가톨릭과 개신교가 주도하는 사회운동의
국제네트워크가 풀뿌리 수준에서 한일 노동운동의 연대 형성을 매개하 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와 같은
풀뿌리 국제네트워크의 존재에 힘입 어 양국 시민사회 사이에는 신뢰 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일본의
노 동운동도 한국의 노동운동과 풀뿌리 수준에서 교류하는 과정을 통해 새 로운 활동 영역을 개척하고 내부 구성원의 국제적 감각과 연대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원정투쟁을 감행한 한국의 민주노조 운동은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
는 운동에 그치지 않았으며 인권과 노동기본권의 확립을 요구하였다.
또한 민주노조운동은 권위주의적 정치 질서에 대해 항거하는 민주화 운 동과 결합되어 있었으며 가톨릭과 개신교의 국제네트워크를 활용할
수 있었다. 또한 한국의 민주화 운동과 일본의 사회운동 사이에는 인권이 라는 공동의 보편적 가치에 기반을
둔 공론장과 국제네트워크가 형성되 어 있었다. 일본의 지원자들은 인권의 가치를 강조하는 가톨릭과 개신
교의 사회운동, 일본계 다국적 기업의 행동을 비판하는 시민운동, 계급
운동을 지향하는 비주류 노동운동, 사회당, 미일동맹과 북한을
배제한 한일 국교정상화를 비판하는 반전평화운동, 한국에서 구속된 재일한국조 선인 출신 정치범 구출운동, 재일한국조선인의 노동운동 등을 포함한 다양한 집단으로 구성되었다. 원정투쟁은
한일 양국에 걸치는 국제적인 공간에서 발생한 노동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민사회 수준의 협력체제 가 형성되는 과정이 되었다. 이는 제도화된 기존 노조의 공식적인 틀 외부에서 노동자 국제연대가 실천된 사례에 해당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노동문제와 노동운동의 국제화 과정은 한일 양국의
시민사회가 공유하는 사회적 공간이 확대되고 있는 추세를 반영하고 있 다. 즉, 세계화 시대의 특징인 자본과 기업 활동의 초국적화는 노동문제
를 포함한 사회문제의 국제화를 초래하고 있다. 원정투쟁의 사례는 다 국적 기업에 대한 이의제기 행동은
세계시민사회 형성을 지향하는 운동 과 동일선상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즉, 개별 국 가 내부에서 제도화된 절차에 따라 개별 기업을 상대로 노동조건을 교 섭하는 경제적 조합주의는 세계화
시대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사 회 연구의 분석 단위를 초국가적으로 설정하는 접근은 사회과학 연구의
방법론적 일국주의(nationalism)를 지양하고 방법론적 세계시민주의
(cosmopolitanism)를 채택할 것을 강조하는
벡(Ulich Beck)의 시각과 연 결된다. 벡은 근대화, 산업화, 발전, 세계화의
이면에서 진행되고 있는 ’글로벌 위험사회‘에 대처하는 성찰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국경을 넘는 공론장의 생성‘과 세계시민적 기억에 입각한 인식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Beck,
2002: 85~93). 방법론적 세계시민주의에 입각한 시각을 원정투쟁 사건에 적용할 경우에는 시민사회 수준에서 한일 양국 사이에
형성된 국제네트워크와 공론장에 대한 고찰이 중요한 의미를 가 지게 된다.
(2017. 11. 22 접수 ; 2017. 12. 20 심사 ; 2017. 12. 28 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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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national Solidarity of Korean and Japanese Grass-root Workers protesting against the Behavior of Japanese Enterprise withdrawing investment and closing Workplace : expedition struggle in Japan by labor unions of Korean FEZ in 1989.
Lee, Chongkoo
Shim, Sangwan
Lee, Sang-Cheol
Since the 1970s, foreign enterprises began to invest at the free export zone established in Masan and Iri of Korea, so as to utilize cheap labor. Since the latter half of 1987, in the midst of democratization and upsurge of labor movement, foreign business pulled out of FEZ in Korea. At the end of 1989, Asia Swany labor union in Iri FEZ and Hankook Sumida labor union in Masan FEZ made expedition struggle to company headquarters in Japan so as to protest against unfair behavior, closing workshop and dismissing all employees without notice and due procedure. At last, Japanese managers made apology and compensated unpaid wage and redundancy pay. Lacking support of peak labor organizations in Korea and Japan, the success of expedition struggle was achieved by the international cooperation and solidarity on grass-root level between concerned citizens and workers in both countries. During expedition struggle, Korean and Japanese workers have organized their own international network and public sphere, so to enhance the level of Korea-Japan relationship in the sphere of civil society.
keywords: solidarity, international network, expedition struggle, free
export zone, foreign investment, multinational corporation
[1] ) 풀뿌리 국제주의는 대체로 전국 및 국제 노동조합 운동의 공식 기구 외부에 서 이루어지는 초국적 노동자 조직 활동을 가리킨다(Castree, 2010: 272).
[2] ) 이리수출자유지역에 대해서는 남춘호(2008), 이성호(2007; 2009), 마산수출자 유지역의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강인순(1996; 1997; 2000) 등을 참조.
[3] ) 경기도 군포지역에서 조업하고 있던 카세트 녹음기 제조업체인 한국TND의 노동자들도 같은 시기에 원정투쟁을 전개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자
[4] ) “일급을 기준으로 월급을 받는 노동자의 근속 기간에 따른 급여 차이를 현 재의 1년 간격 기준에서 6개월 간격 기준으로 산정”, “상·중·하 평가제 철 폐”, “장기근속자 우대”, “능률급자(도급제 적용자)의 급여에서 연공을 보다 많이 반영할 것”, “단가 1.2% 인상”, “능률급을 기준으로 일급을 책정하지 말고 평균 일급을 보장할 것”, “연장근로수당 200% 인상”, “주 46시간 근 무 보장”, “만 18세 미만 노동자의 하루 7시간 근무제 실시” 등이었다.
[5] ) 원자료: 朝日新聞, 1990.2.24.
[6] ) 원정투쟁이 전개되는 가운데 한국수미다 대표이사 쿠시노는 교토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수미다 폐업의 실질적 원인에 대하여 1988년 노조가 임투를 과격하게 했고, 노조간부가 조합원에게 과격한 교육을 시켰기 때문이라고 말 해 노조탄압 목적임을 분명히 했다(조미진, 1990: 60). 한국수미다노조의 일 본 원정투쟁단은 일본의 종교단체인 ‘진출기업을 생각하는 모임’의 지원을
[7] ) 가톨릭노동사목연구소, 해외노동소식 제5호. 1985.4.17.
[8] ) アジア·スワニ-問題を考える会.
[9] ) 재일조선인은 총련계, 재일한국인은 민단계를 지칭한다는 정치적 오해를 불 식하기 위하여 1970년대부터 재일동포 인권 활동가들이 사용하는 명칭이다. 일본의 지역사회에서 생활하는 주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0] ) 朝鮮の自主的平和統一を支持し、韓国の民主化闘争に連帯する大阪府民共闘会議. 1993년에 ‘연대네트 오사카’로 개편.
[11] ) TND노조 원정투쟁단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일본교원노조가 지원하도록 중 개했다.
[12] ) 한민통(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일본본부)은 1973.8.15. 도꾜에서 결 성되어 김대중 구출 운동과 한국의 민주화 운동 지원을 표방했다. 1989년에 한통련(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으로 개편되어 남북한 통일 운동에 주력했다 (곽동의, 2012 참조).
[13] ) 재일한국청년동맹.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의 산하 단체였으나, 박정희 정권 에 대한 비판적 입장 때문에 한통련 산하 단체로 전환.
[14] ) 2015.6.19. 면접.
[15] ) 전국노동조합협의회, 1990.1.22. 창립. 1995.12.3. 해산.
[16] ) 全水道東京水道労働組合.
[17] ) 全日本港湾労働組合.
[18] ) 全国労働組合連絡協議会, 1989년 결성. ‘소효‘ 운동의 계승을 표방하며 ’렌 고‘와 공산당계 젠로렌(全国労働組合総連合)에 참가하지 않는 모든 좌파 노 조의 결집을 지향하는 협의회.
[19] ) 日本労働組合総連合会.
[20] ) 나카무라 다케시 증언.
[21] ) 全学共闘会議. 대학 운영의 난맥상을 규탄하는 운동에서 출발해 반체제 운 동으로 발전하였다. 이들은 기존 좌파 정당도 비판하였으므로 신좌익으로 부 른다. 공권력의 개입으로 진압되었으나 일본 사회운동에 일체의 권위를 부정 하고 개인의 자기 책임을 강조하는 행동 문화를 남겼다.
[22] ) 1974년에 발생한 도야마화학이 수은공해를 유발하는 머큐로크롬 생산 공장
[23] ) 도살, 피혁가공업에 종사하는 직업집단이며 관습적인 신분 차별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24] ) 기노시나 마사노부(시코쿠북동지역노동조합 다카마쓰중기지부), 아세아스와 니 도일투쟁–일본에서의 지원운동 실태와 앞으로의 과제- , 민주화운동기념 사업회 사료 아카이브 등록번호 00435055
(http://archives.kdemo.or.kr/isad/view/00435055, 2017.6.2. 접속).
[25] ) 1980년 한국수미다 투쟁 그리고 그 후 20년을 추적한 다큐멘터리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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