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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해저 1000m 갱도, 구타는 일상이었다” 92세 군함도 생존자 - 중앙일보




“해저 1000m 갱도, 구타는 일상이었다” 92세 군함도 생존자
[중앙일보] 입력 2017.08.11 01:13 | 종합 12면 지면보기

기자여성국 기자




군함도 징용 생존자인 이인우씨가 지난 9일 대구 자택에서 지하 1000m 갱도에 들어가 석탄을 캐던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1945년 8월 27일 부산항에 내려 태극기를 처음 봤지. 그때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더라고. 부산에서 고향 대구까지 7시간 기차를 탔는데, 그 시간이 어찌나 길던지…. 고향 집 앞에 왔는데 어머니가 맨발로 뛰어 나오셨어. 둘이 붙잡고 펑펑 울었지. 아버지는 뒤에서 ‘나 모르게 도망 가더니만 고생만 실컷 하고 왔구나’ 하시고….”

미쓰비시 공장서 일하는 줄 알고
일본 보국대 모집 응해 화물선 타

한국인 시체 타는 냄새 섬 뒤덮어
월급으로 채권 줘, 한푼도 못 받아

고국 돌아온 후 6·25전쟁도 참여


젊은 사람들, 군함도 참상 기억하길백발의 이인우(92)씨는 72년 전 부모님과의 상봉 장면을 떠올리며 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는 일제 징용 피해자다. 1944년 사할린을 거쳐 ‘군함도’라 불리는 하시마(端島)에 강제징용됐다.

9일 오후 대구의 자택에서 만난 이씨는 72년 전 생환한 순간을 떠올렸다. 그는 경북 경산군 안심면 사복동 41번지(현재 대구 동구)에서 7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가난한 농사꾼이었다. 3년 동안 국민학교에 다닌 게 학력의 전부였던 18세 소년은 배고픔이 지겨웠다. “면사무소를 퇴직한 공무원들이 보국대(일제가 조선인 학생, 여성과 농촌 노동력을 동원하기 위해 1938년 조직한 단체)를 모집하더라고. 공장에서 일하면 집에 돈을 많이 부칠 수 있다고. 그땐 집안을 일으키고 싶었지. 40명쯤 모여 같이 열차 타고 부산으로 갔어. 나처럼 다 가난한 사람들이었지. 일본 미쓰비시 공장에서 일할 줄 알고….”

1944년 5월 이씨는 부산에서 화물선을 탔다. 400명 넘는 이들이 바닥에 앉아 구토를 해가며 물살을 견뎠다. 7일 동안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일본 본토가 아니었다. 사할린. 여름부터 겨울까지 사할린 탄광에서 일했다. 대구에서 자란 그가 영하 40도의 추위를 견디는 건 쉽지 않았지만 악몽의 시작에 불과했다.

눈보라가 치던 날 이씨는 영문도 모른 채 다시 화물선에 태워졌다.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군함도로 가는 배였다. “배에서 섬을 봤는데, 콘크리트 담이 섬을 둘러싸고 7층쯤 되는 건물 2개가 우뚝 서 있더라고.”

군함도는 야구장 2개 크기의 섬(남북 약 480m, 동서 약 160m)으로 일본 나가사키항에서 남서쪽으로 약 18㎞ 떨어진 곳에 있다. 19세기 후반 미쓰비시 그룹은 이곳을 탄광으로 개발해 큰 수익을 올렸다.

군함도에서 6명이 한 방을 썼다. 3명씩 2교대로 12시간씩 일하고 잠을 잤다. 훈도시(일본식 속옷) 차림에 장비를 들고 해저 1000m로 석탄을 캐러 들어갔다. “중국인들과 일을 하는데 말이 안 통하니까 일은 더디고, 일본인 감독관은 계속 때렸지.”

사고를 당한 동료들은 시체가 돼 갱도를 나갔다. 죽음을 목격할 때마다 어머니 생각이 났다. “바다 건너 육지가 보여. 닿을 것 같아. 그럼 어딘가 내 고향이 있겠구나 싶고. 별은 어디서나 똑같으니까 밤에 별을 보면 고향 생각, 부모님 생각….”

막노동에 시달리던 한국인이 죽으면 군함도 옆 작은 섬 화장터에서 시신을 태웠다. 시체 타는 냄새가 섬을 덮었다.

“월급은 그때 돈으로 220원. 정비비·세탁비·식비 등을 다 빼면 150원이었어. 한국에서 우동 한 그릇이 5전, 일당이 35전이었으니 적은 돈은 아니지. 근데 이걸 5년짜리 채권으로 주네. 결국 아무것도 못 받았지.”




이인우씨가 6·25 전쟁 참전으로 받은 충무무공훈장을 손에 꼭 쥐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1945년 7월 일본인 감독관은 이씨에게 영장을 건넸다. 일본군으로 징집돼 군함도를 떠났다. 히로시마에서 기차로 한 시간쯤 더 가서 구레에 내렸다. 하루도 빠짐없이 폭탄을 들고 미군 장갑차에 자폭하는 훈련을 받았다. 40여 일이 지난 8월 15일 점심시간, 기적이 찾아왔다. 부대에서 라디오로 일왕의 항복 방송을 들었다. “두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졌다고 했을 때 ‘전쟁이 끝나나. 나도 살 수 있나. 아니면 미군 장갑차가 들어올 테니 나는 죽나’ 별 생각이 다 들었지. 라디오로 일왕이 항복 선언을 할 때 ‘아, 살았구나’ 싶었어.”


1945년 8월 27일 이씨는 고국 땅을 밟았다. 이씨는 이후 1950년 6·25전쟁 때 경주 안강 전투와 포항 형산강 전투에 참전했다. 그 공으로 충무 무공훈장을 받았다. 다리에 총상을 입은 그는 장해 7급의 상이군인이다. 이후 소방대원으로 일했다는 그는 군함도에서의 경험을 10년 전까지 자식들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픈 기억을 꺼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들 이상목(67)씨는 “어릴 적 아버지가 돈 벌기 위해 일본에 다녀왔다는 말만 하시고 군함도 얘기는 안 하셨어요. 어느 날 혼자 서울 올라가셔서 조사위원회로부터 강제징용 피해자 인정을 받으셨다며 자식들에게 말씀하셨죠”라고 말했다.

이인우씨는 한숨 섞인 독백으로 인터뷰를 마쳤다. “수십 년 동안 군함도 강제징용에 대해 아무도 관심이 없었지. 나는 애국자가 아니라 생존자일 뿐이야. 다만 이 나라가, 젊은 사람들이 군함도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이제는 알아줬으면 좋겠다 싶어. 나라는 그동안 뭘 했는지. 이미 너무 늦었어. 다 죽고 아무도 없잖아. 한 10년 전에만 이야기가 나왔어도 서로 얼굴도 보고 그럴 텐데….”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따르면 군함도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500~800명, 당시 사망자는 121명이다. 현재 국내 생존자는 이씨를 포함해 6명이다.
대구=여성국 기자 yu.sungkuk@joongang.co.kr

[출처: 중앙일보] [단독] “해저 1000m 갱도, 구타는 일상이었다” 92세 군함도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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