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4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나라를 새로 세우기 위하여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나라를 새로 세우기 위하여 - 금강일보



[김조년의 맑고 낮은 목소리] 나라를 새로 세우기 위하여

금강일보
승인 2020.01.13
한남대 명예교수





며칠 전 나는 친구와 언쟁을 했다. 원자력발전소 문제가 왜 심각하게 논의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누구나 다 알듯이 원자력발전소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전기를 생산한다. 그 재료인 우라늄을 태우고 나면 어마어마한 방사능을 방출하는 재가 나온다. 그 재를 안전하게 처리할 기술이 아직은 없다. 궁여지책으로 땅 속이나 바닷물 속에 보관하지만, 어디에도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수십만 년이 흐른 뒤에 그 무서운 효능은 사라질 것이다. 핵폭탄을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이 생긴다. 인간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핵폭탄을 왜 만드는가? 그것은 모든 인류가 망하자고 작심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물건이다. 그러나 위험은 항상 있다. 왜 그런 불안한 무기를 만들고 보유하여야 하는가?

어떤 미친놈이 핵폭탄을 사용한다고 할 때, 그냥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는 것이 아닌가라고 반론한다. 그 말 속에는 많은 핵폭탄을 가진 미국보다는 북한의 보유와 사용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어떠하든, 핵은 사용가능한 무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빠른 시간에 모든 핵을 안전하게 폐기할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키고, 서로 그것을 향하여 나가야 한다. 아직까지 핵무기는 큰 전쟁을 억제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한계가 뻔한 일이다. 무익하고 소모성이 있고 장기간에 걸쳐서 광범위한 위험을 유발하게 될 핵무기를 왜 개발하고 가져야 하는 것일까? 이렇게 되는 데는 인간의 역사지음의 삶에 어떤 바닥으로부터 완전히 새롭게 되는 일이 있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여 주는 것이라고 본다. 여기에는 세계가 삶의 자세를 완전히 새롭게 바꾸어야 한다는 요청을 받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주 고매한 도덕성을 어느 개인이 소유하고 생활에 실천하지만 그 도덕성을 민족 간, 국가 간, 종교 간 어떤 적대관계가 설정된 데에서는 전혀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경험은 영원히 유효한 것인가? 사람도 달라지고, 사회도 변화하며, 생각과 삶의 모양도 크게 바뀐다. 그렇다면 개인도덕이 집단도덕으로도 승화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활동하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일까?

우리들이 따르고자 하고, 지극히 높은 신뢰를 드리는 스승들은 한결같이 서로 사랑하면서 살라고 한다. 국경이니 가족이니 이념이니 하는 것들을 벗어버리라고 한다. 그런 것들은 알맹이가 아니라 바람에 날리는 티끌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도 실제 우리들의 삶은 그러하지가 못하다. 왜 그러한 것일까? 여기에는 개인이나, 가족이나, 사회나, 국가에 대한 지나친 폐쇄관점이 있어서 그런 것이지 않을까? 그것들은 원래부터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역사를 짓고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것일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면서 유영모 선생의 시집을 다시 꺼내 읽었다. 거기에서 나라, 국가, 가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할 어떤 실마리를 찾았다.

“나라는 역사적으로 계속 발달되고/ 새로워져야 한다./ 나라라는 국가도/ 하나의 생명력이 강한/ 생명체가 되기를 바란다/ 국가도 이름이 없어야 한다/ 이름질 수가 없다//이름 없는 나라만이/ 참 나라라고 뽑낼 수 있는 나라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한국이라고 한다/ 한이란 말도 없이 있는 것이다/ 없이 있는 것이 하나다/ 무와 유가 부딪치는 것이 하나다”(유영모, 없이 있는) 

그래서 그는 국가라는 말을 달리 쓰기를 제안한다. “국가라는 말이 틀렸다/ 국가(國家)라 하면 의례히/ 집 가(家)자가 붙어 다닌다/ 우리나라가 망했다면/ 가족제도 때문에 망하지 않았을까?// 집만 생각하고/ 나라까지는 가지도 못한 것이 아닌가!/ 나만 보다가/ 너는 생각도 못하고 만 것이 아닌가!// 나는 집 가(家)자 대신에/ 차라리 사방천하라는 방(方)을 써서/ 국방(國方)이라고 했으면 좋겠다/ 왜정 때 쓴 국가라는 말을/ 우리가 따라 쓸 필요는 없다”(유영모, 가족제도 때문에)


사실 나라를 뜻하는 국(國)자는 거대한 울타리 속에 있는 이들을 무기로 보호한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에 이르러 이 거대한 울타리가 되는 국경은 점점 더 묽어간다. 세계는 국경을 넘는 무수히 많은 네트워킹의 시대를 산다. 이렇게 가다보면 언젠가는 국경 없는 시대가 될 것이다. 이러한 때 귀담아 들어볼 것은 이런 대목이다. “웃으며 사람 죽인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이해타산으로/ 싸우기를 좋아하는데/ 싸울 대상은/ 자기이지 남입니까?// 자기를 이겨야지/ 남을 이기면 뭐 합니까?”(유영모, 남을 이기면 뭐합니까?) 이러한 지경이 되려면 새로운 생명의 힘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다시 유영모의 시를 인용하면 이렇다. “사랑에는 원수가 없다/ 원수까지 사랑하는데/ 적이 있을 리 없다/ 언제나 힘이 없는 것 같지만/ 언제나 무서운 힘을/ 내놓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평등각(平等覺)이다/ 누구나 꼭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힘은/ 아무도 당할 재간이 없다/ 그래서 하느님도/ 사랑이라고 한다”(무서운 힘을 내놓는 것)

이렇게 되려면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것을 함석헌은 이렇게 말한다. “나도 사람의 자아는 한번 새로 나야 한다고, 사회는 그 구조가 근본적으로 혁신되어야 한다고, 인류는 종당 한집이 되어야 한다고 이 40년을 줄곧 생각해 오는 사람의 하나입니다.”(함석헌) 결국 개인이나 사회나 인류 전체나 삶을 사치스럽고 허황한 것을 버리고, 참을 찾고 실현하는 데로 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올 한 해 이런 데 집중하면서 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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