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9

알라딘: 엄상익ー소설 親日마녀사냥 1,2

알라딘: 엄상익

엄상익

“살아남는 자는 가장 강한 자도 가장 현명한 자도 아닌 변화하는 자다.” 찰스 다윈의 말이다. 세상은 그렇게 변화하는 사람을 선택한다. 참혹한 6.25전쟁이 끝날 무렵 피난지인 평택의 서정리역 부근에서 태어난 그의 이력은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는 대한민국 제일의 경기 중고교를 졸업하고 1973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해 졸업한 뒤 1978년 법무장교로 입대했다. 1982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80년대 격동하는 대한민국에서 현실적인 출세의 길이 열렸지만 하나님에 떠밀려 1986년 작은 법률사무소를 차리고 변호사와 개신교 신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대도 조세형과 탈주범 신창원의 변호를 맡아 범죄 이면에 있는 인권유린과 또 다른 진실을 세상에 알렸다. ‘변호사 저널리즘’을 표방하며 성역이었던 교도소, 법원, 검찰 내부에 감추어진 사실을 세상에 폭로했다. 청송교도소 내의 의문사를 월간 ‘신동아’에 발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1호의 인물을 탄생시켰다. 은폐된 모 준 재벌 회장부인의 살인청부의 진실을 발표하기도 했다. 2007년 소설가 정을병 씨의 추천으로 소설집을 발간하여 늦깎이 소설가로 등단했다. 이어서 소설 ‘검은 허수아비’, ‘환상살인’ 등을 발표하고 그 외 ‘거짓예언자’ 등 10여 권이 넘는 수필집을 썼다.

문인협회 이사, 소설가협회 운영위원, 대한변협신문 편집인과 대한변협 상임이사를 지냈으며 20여 년 간 국민일보, 한국일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일요신문 등에 칼럼을 써오고 있다. 그리고 만년에 이르른 요즘 매일 새벽마다 사회에 대한 보수적 통찰력과 기도의 예지력으로 우찌무라 간조처럼 믿음의 글을 쓰고 있다.







별이 빛나는 건 흔들리기 때문이야

국정원장의 눈물

세상은 우리가 사랑한 만큼 아름답다

연민 피로

우리 시대의 거짓 예언자들






5.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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親日마녀사냥 1 - 한국 자본주의의 개척자들
엄상익 (지은이)
조갑제닷컴2016-11-21







정가
23,000원
판매가
540쪽
150*225mm
1026g


책소개

동아일보 설립자이자 정치인인 형 김성수에게 가려져 대중적으로는 덜 알려진 기업인, 김연수. 


저자 엄상익 변호사는 우연한 인연으로 김연수 궐석 재판의 영혼 변호를 맡았고, 변호사 업무를 하면서 위원회와 법정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해 책으로 냈다. 김연수라는 나라 잃은 조선인과 그가 살아갔던 비상한 시대의 명암을 한편의 소설처럼 그려냈다.







목차


1권 | 한국 자본주의의 개척자들

화보 … 8
序文 … 17
歷史가 독과점의 대상일까?_嚴相益

1. 親日派의 땅 소송 … 32
2. 부글거리는 여론 … 34
3. 공청회 풍경 … 38
4. 申鉉碻 총리의 친일시비 … 42
5. 화가의 아들 … 46
6. 종교 지도자의 손자 … 50
7. 조선 인민민주주의입니까 … 52
8. 어느 공산주의자의 고백 … 56
9. 金相浹 총장의 現代史 요약 … 60
10. 金氏家의 손자 … 68
11. 門中회의 … 72
12. 제국의 후예 … 80
13. 역사의 岐路에 서서 … 84
14. 계약 … 90
15. 始祖 김요협 … 95
16. 明堂과 名家 … 101
17. 무역하는 地主 … 107
18. 후손의 感想 … 114
19. 金氏家의 유적 … 120
20. 宗孫과 맏사위 … 125
21. 조선의 詩人 … 129
22. 벼슬과 낙향 … 137
23. 위원회의 소환 … 143
24. 趙甲濟의 논리 … 153
25. 洪命憙와의 인연 … 158
26. 동양척식회사 … 164
27. 민권사상 … 170
28. 유학 가는 소년들 … 175
29. 조선행 3류 일본인들 … 181
30. 金秊洙의 유학 … 188
31. 일본 풍경 … 194
32. 조선 유학생들 … 200
33. 학교사업 구상 … 206
34. 중앙학교 인수 … 213
35. 尹潽善家 공장 인수 … 221
36. 꼬마사위 金容完 … 227
37. 중앙학교 … 232
38. 고등학생 김연수 … 238
39. 조선인 주식회사 운동 … 243
40. 경성방직의 좌초 … 253
41. 차별 … 259
42. 東京과 京城 … 266
43. 겁먹은 일본인 … 271
44. 정치인 사이토 … 277
45. 東亞日報 창간 … 284
46. 고뇌하는 예비기업인 … 291
47. 민족 분열과 동아일보 … 298
48. 경제福音 … 305
49. 大東亞共榮 … 311
50. 잠자는 조선 … 317
51. 산업조사위원회 … 325
52. 김연수의 귀국 … 331
53. 대감의 고무신공장 … 336
54. 별표 고무신 … 341
55. 농장회사 三養社 … 349
56. 孫佛 간척사업 … 355
57. 삼각산표 광목 … 362
58. 진상규명위원회 … 369
59. 재산추적 … 376
60. 대책회의 … 383
61. 家臣의 증언 … 390
62. 위원장 … 394
63. 역사는 해석하기 나름 … 399
64. 법률가 위원 … 405
65. 강만길의 논리 … 409
66. 金相敦 회장 조사 … 415
67. 간척사업 … 424
68. 海里농장 … 430
69. 만주의 농장 … 436
70. 백두산 원시림 … 440
71. 첫 번째 염전의 탈환 … 446
72. 염전의 두 번째 탈환 … 449
73. 과거의 京城 포목상거리로 … 456
74. 太極星 상표 … 465
75. 朴承稷상점 … 470
76. 백윤수상점 … 476
77. 京紡의 장돌뱅이패 … 481
78. 조선인 실업가들 … 485
79. 애국심에 호소한 광고 … 494
80. “김 형이 짠 실로 온 겨레를 입히고…” … 500
81. 총독부 앞에 동아일보 신축 … 506
82. 京城 거리의 모던 보이들 … 511
83. 공산당 조직 침투 … 518
84. 보성전문 인수 … 523
85. 일본 백화점 진출 … 529
86. 일본풍 근대도시 京城 … 535

부록
反民裁判 金秊洙 판결 全文 … 1032
金秊洙 一家 가계도 … 1044
金秊洙 年譜 … 1045

讀後記 … 1051
親日마녀사냥에 대한 도발적 질문_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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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정부수립 직후 반민특위(反民特委)에서 그 기준 때문에 어떻게 고민했습니까? 일제시대를 다 같이 살아본 사람들이 그 문제에 부딪쳐 심사숙고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판결문들을 보면 그런 고뇌를 느낄 수 있어요. 그때는 당사자도 증인도 살아있고 자료도 많이 남아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당사자도 죽고 증거도 증인도 없는데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위원회의 조사관들이나 위원들에게 누가 그런 역사해석의 독점권을 줬는지 저는 의문입니다. 지금의 조사관들은 도대체 누군지 신분들을 모두 감추고 있어 알 수가 없어요. 역사학자도 아닙니다. 법률가도 아닙니다. 그들의 정체가 뭘까요?”
<필자의 말, 본문 중에서>

“민족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의사나 열사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현실을 너무나 외면한 순수론이 아닌가? 지난날 의병들이 봉기해서 그렇게 치열하게 항거했는데도 일본은 끄덕도 하지 않았는데. 지금의 일본은? 그때에 비해 열 배 백 배 국력이 증대됐는데… 물산장려 운동도 실패하고 민립대학 운동도 돈이 없어 성공하지 못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애국심이 아니고 조직인데 말이야, 무력도 없는데 조직도 없다면 어떻게 일본하고 대항하라는 거야?”
<동아일보 김성수(金性洙) 사장>

“고종(高宗)이 나라를 일본에 넘겼습니다. 그러면 그 밑에 있던 항복한 신민(臣民)들의 태도는 어때야 하겠습니까? 전쟁에서 장수가 항복을 했을 때 그 밑에 있던 졸병들에게 각자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적(敵)과 싸우라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우리 민족이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에 순응했던 것과 친일(親日)은 분명히 구별해야 됩니다. 어떤 인간을 친일파라고 하면 그 사람 생애(生涯) 전체에 있었던 한 1~2퍼센트가 되는 걸 가지고 99퍼센트의 긍정적인 면을 부정하는 겁니다.”
<조갑제(趙甲濟) 기자>

“저희 위원회에서는 한 인간의 전인격을 판단한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사람이 살던 중 한 시점에서의 어떤 행위가 친일이냐 아니냐만 지적하는 겁니다.”
내가 다시 되받아쳤다. “친일 반민족 행위의 문제는 그렇게 단선적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인간도 오랜 인생을 살면서 순간의 실수나 얼룩 같은 오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실수나 오점만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더러운 인간이라고 단정한다면 안 될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엄상익 (지은이)


“살아남는 자는 가장 강한 자도 가장 현명한 자도 아닌 변화하는 자다.” 찰스 다윈의 말이다. 세상은 그렇게 변화하는 사람을 선택한다. 참혹한 6.25전쟁이 끝날 무렵 피난지인 평택의 서정리역 부근에서 태어난 그의 이력은 그 사실을 증명한다. 그는 대한민국 제일의 경기 중고교를 졸업하고 1973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해 졸업한 뒤 1978년 법무장교로 입대했다. 1982년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80년대 격동하는 대한민국에서 현실적인 출세의 길이 열렸지만 하나님에 떠밀려 1986년 작은 법률사무소를 차리고... 더보기


최근작 : <김동인의 항변>,<연민 피로>,<노인 웨이터의 도통> … 총 27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21세기 마녀사냥


3·1운동 선언문 작성자 및 주동자,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사람, 낙동강 전선 다부동 전투의 영웅, 일제하에서 일종의 정부 역할을 했던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 사장, 이화여대와 연세대학 총장, 한국어를 아름답게 가꾸고 고난의 시기에 한국인의 마음을 감싸주었던 시인과 소설가, 교과서를 통해 친숙해진 작곡가·극작가·화가·무용가, 대주교, 그리고 기업인.

대한민국 대통령 직속이었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일제강점 하 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적용하여 2009년 11월27일 국회에 보고한 반민족 행위자 명단에 오른 사람들의 면면이다.

민족기업, 민족언론, 민족대학으로 통하던 민족진영의 핵심 인물들, 한국 근대화의 개척자들 거의가 사후(死後)에 자기 변론의 기회를 얻지도 못하고 ‘反민족 행위자’로 저격되었다.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 위원이었던 역사학자 이명희 교수는 엄상익 변호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위원회에서 나와 한 교수를 빼놓고는 모두 좌파죠. 그들이 제일 미워하는 건 대한민국입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功)을 세운 사람들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몰아버렸죠.”

이 책 《親日마녀사냥》의 주인공 김연수(金秊洙)는 동아일보 설립자이자 정치인인 형 김성수(金性洙)에게 가려져 대중적으로는 덜 알려진 기업인이다. 김연수는 일본 교토제국대학 졸업 후 삼양사(三養社)의 전신인 삼수사(三水社)와 해동은행(海東銀行)을 설립하고 한국 최초의 주식회사인 경성방직(京城紡織)의 책임자가 되었다. 1939년엔 만주 봉천에 남만방적(南滿紡績)을 순 우리 자본으로 설립, 조선 최고(最高)의 기업인의 자리에 올랐다. 백씨 인촌(仁村) 선생을 도와 굴지의 사학(私學)의 모체인 고려중앙학원의 설립, 민족 언론기관 동아일보(東亞日報) 창설에 재정적으로 기여했다. 전경련(全經聯) 전신인 한국경제협의회 초대회장을 맡았고 사후(死後)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해방 직후 살기등등한 시절의 반민특위 재판부는 그를 ‘민족기업인’이라 평가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60년이 흘러 대한민국은 오늘의 시점에서 그 시절 사람들의 친일반민족행위를 규명하겠다고 나섰다. 김연수도 다시 반민족 행위자로 결정되었다. 당시의 판결을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뜻이었다. 저자 엄상익(嚴相益) 변호사는 우연한 인연으로 김연수 궐석 재판의 영혼 변호를 맡았고, 변호사 업무를 하면서 위원회와 법정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해 책으로 냈다. 김연수라는 나라 잃은 조선인과 그가 살아갔던 비상한 시대의 명암(明暗)을 한편의 소설처럼 그려냈다. 철지난 친일(親日)마녀사냥에 대한 분노, 통쾌한 반론, 인간과 역사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때로는 문학적 표현으로 녹여낸 장대한 역사 드라마다.

살아본 적 없는 자들의 오만
엄상익 변호사는 이 책을 통해 한국 사회에 몇 가지 핵심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 ‘일제시대는 과연 암흑시대였나?’
  • ‘장수(고종)가 항복했는데 졸병이 죽을 때까지 저항하지 않았다고 벌을 줄 수 있나?’
  • ‘일제시대를 살아본 사람들은 김연수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민족기업인으로 칭송했는데, 살아본 적 없는 사람들이 자신도 지킬 수 없는 잣대로 단죄하려는 것은 오만 아닌가?’
  • ‘김연수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훈장을 준 대한민국과 그를 민족반역자로 몬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인가?’
  • ‘인간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사는 게 생존의 목표인가?’
  • ‘친일(親日)’이란 말 앞에 얼어붙는 지적(知的)풍토에서 어떤 지식인도 발설한 적 없는 도발적 질문들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일제시대라는 공기를 두르고 산 기업인으로서 그 시대를 지배하는 정권과 소극적, 미온적으로 타협해야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런 행동은 법이 규정하는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기업의 목표는 돈을 버는 것이지 항일(抗日)이 아니다. 항일 운동가에게 기업을 하지 않았다고 비판할 수 없듯이 기업인더러 항일 운동하지 않았다고 단죄할 수 없는 것 아닌가.”
1949년 반민특위 재판부는 김연수가 기업 활동으로 번 돈의 힘으로 한국인의 실력을 길러 일본을 이기는 방향으로 고차원의 항일을 했음을 인정했다.

조갑제(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는 독후기에서 “이 책을 관통하는 가치관과 논리적 대결의 뼈대는 1949년 반민특위 재판부(단심제)의 무죄 선고 對 60년 뒤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의 ‘반민족행위자’ 결정”이라며 1949년 반민특위의 김연수 무죄 선고 판결문이 친일 행위를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단죄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역사적 문서라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이 세워진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어제 일처럼 생생했을 일제시대의 행위에 대해 형사적 책임을 묻는 데 즈음해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성숙된 역사관과 균형 감각이 스며있다는 것이다.

반면 60년 전의 무죄판결을 뒤집는 2010년 행정법원의 ‘식민지해 하에서라도 기업인이 자신의 기업 활동을 위해 식민통치에 도움이 되는 행위에 가담했다는 것은 내심의 동기가 어떠하였는지에 불구하고 비난 받아 마땅하다’는 ‘반민족행위자’ 결정 판결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이 판결의 논리라면 통일 후 북한에서 조선노동당 당원으로 활동한 약 300만 명 전원을 민족반역자로 처단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적 강압에 의한 굴복이었다는 항변은 ‘내심의 동기가 어떠하였든지 간에 그런 강압에 의하여 이뤄진 것이라는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로 간단히 무시될 것이다.”

조선 민족으로 태어나 일본 국적으로 살아야 했던 시절에 ‘밖으로 강적과 싸우고 안으로 빈곤에 울면서’(반민특위 판결문中) 한국 자본주의의 싹을 틔워간 민족기업인 김연수는 정말 민족반역자인가, 《親日마녀사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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親日마녀사냥 2 - 오만과 편견


목차


2권 | 오만과 편견

87. 石造건물의 꿈 … 556
88. 산업조사위원회의 격론 … 561
89. 만보산 사건과 華僑 보호 활동 … 566
90. 만주사변과 만주시장 … 570
91. 경제조사위원회의 토론 … 575
92. 기회가 된 中日戰爭 … 581
93. 사라져 가는 민족정신 … 585
94. 민족적 轉向 … 593
95. 만주에 방직공장 … 599
96. 정치폭풍 … 606
97. 조선인 재벌의 탄생 … 612
98. 만주·중국 특수로 흥청대는 도시 … 618
99. 崔南善의 고민 … 624
100. 조선인 지원병 제도 … 630
101. 노다이사건(乃台事件) … 634
102. 軍國의 물결 … 638
103. 기자의 代筆 … 650
104. ‘全민족적 저항’에서 ‘全민족적 협력’으로 … 656
105. 末期的 상황 … 661
106. 1945년 8월15일 봉천 … 666
107. 親日 단죄론 … 674
108. 좌익의 공장 점령 … 682
109. 反民特委 발족 … 688
110. 무엇이 ‘反민족’인가 … 693
111. 金昌國 위원장 … 701
112. 李完用의 반론 … 707
113. 재판장의 생각 … 710
114. 郭善熙 목사의 설교 … 717
115. 소설가 鄭乙炳의 고백 … 721
116. 3·1운동 사건 법정 … 725
117. 左右 대립 … 730
118. 진짜 앞잡이 … 735
119. 李奉昌의 증언 … 741
120. 張夏成 교수의 설명 … 759
121. 崔普植 기자와 한 인터뷰 … 767
122. “법정에서 공개 구술 변론하라” … 778
123. 李光洙와 만나다 … 781
124. 두 마을의 이야기 … 786
125. 잡지 時事좌담회의 성숙한 모습 … 793
126. 잡지에 실린 1930년대 조선의 日常 … 799
127. 法이 없는 암흑시대가 아니었다 … 806
128. 응답하라 1930년대 … 811
129. 일본 군복을 입은 조선 청년들 … 818
130. 저항과 협력의 시대 … 827
131. 最後의 나날들 … 833
132. 金東仁의 ‘속 亡國人記’ … 841
133. “그들이 미워하는 건 대한민국입니다” … 845
134. 법정의 역사논쟁 … 851
135. 徐淳泳 재판장의 고민 … 859
136. 金相浹 총리 발탁의 진실 … 863
137. 李文烈의 분노 … 868
138. 핵심 위원과의 논쟁 … 871
139.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의 오만 … 897
140. 日本人化의 예 … 900
141. 잡혀가던 날 … 904
142. “제 정신만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 911
143. 거절 못한 이유 … 918
144. “민족의식으로 뭉친 회사” … 924
145. 태극과 무궁화 … 931
146. 無罪 … 939
147. 전쟁 속 財界의 변화 … 949
148. 쓰러질 때까지 사업 … 957
149. 주홍글씨 … 962
150. 드라마와는 다른 재벌家의 풍습 … 969
151. 손자의 추억 … 976
152. 비자금을 안 만드는 그룹 … 984
153. 김연수의 私生活 … 993
154. 직원이 본 김연수 … 1006
155. 富者가 치러야 할 代價 … 1017
156. 판결 … 1022
157. 屍身의 기증 … 1028


부록
反民裁判 金秊洙 판결 全文 … 1032
金秊洙 一家 가계도 … 1044
金秊洙 年譜 … 1045

讀後記 … 1051
親日마녀사냥에 대한 도발적 질문_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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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정부수립 직후 반민특위(反民特委)에서 그 기준 때문에 어떻게 고민했습니까? 일제시대를 다 같이 살아본 사람들이 그 문제에 부딪쳐 심사숙고하지 않았습니까? 당시 판결문들을 보면 그런 고뇌를 느낄 수 있어요. 그때는 당사자도 증인도 살아있고 자료도 많이 남아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당사자도 죽고 증거도 증인도 없는데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위원회의 조사관들이나 위원들에게 누가 그런 역사해석의 독점권을 줬는지 저는 의문입니다. 지금의 조사관들은 도대체 누군지 신분들을 모두 감추고 있어 알 수가 없어요. 역사학자도 아닙니다. 법률가도 아닙니다. 그들의 정체가 뭘까요?”
<필자의 말, 본문 중에서>

“민족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의사나 열사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현실을 너무나 외면한 순수론이 아닌가? 지난날 의병들이 봉기해서 그렇게 치열하게 항거했는데도 일본은 끄덕도 하지 않았는데. 지금의 일본은? 그때에 비해 열 배 백 배 국력이 증대됐는데… 물산장려 운동도 실패하고 민립대학 운동도 돈이 없어 성공하지 못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애국심이 아니고 조직인데 말이야, 무력도 없는데 조직도 없다면 어떻게 일본하고 대항하라는 거야?”
<동아일보 김성수(金性洙) 사장>

“고종(高宗)이 나라를 일본에 넘겼습니다. 그러면 그 밑에 있던 항복한 신민(臣民)들의 태도는 어때야 하겠습니까? 전쟁에서 장수가 항복을 했을 때 그 밑에 있던 졸병들에게 각자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적(敵)과 싸우라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우리 민족이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본에 순응했던 것과 친일(親日)은 분명히 구별해야 됩니다. 어떤 인간을 친일파라고 하면 그 사람 생애(生涯) 전체에 있었던 한 1~2퍼센트가 되는 걸 가지고 99퍼센트의 긍정적인 면을 부정하는 겁니다.”
<조갑제(趙甲濟) 기자>

“저희 위원회에서는 한 인간의 전인격을 판단한 게 아닙니다. 그냥 그 사람이 살던 중 한 시점에서의 어떤 행위가 친일이냐 아니냐만 지적하는 겁니다.”
내가 다시 되받아쳤다. “친일 반민족 행위의 문제는 그렇게 단선적으로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인간도 오랜 인생을 살면서 순간의 실수나 얼룩 같은 오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실수나 오점만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더러운 인간이라고 단정한다면 안 될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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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親日 마녀사냥]을 읽고 - 조갑제닷컴

Feb 18, 2019 - 1 post[親日 마녀사냥]을 읽고. 피고석에 앉아야 할 사람은 벌써 죽었고 심판자는 일제 시대에 살아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엄상익 씨는 그런 궐석 재판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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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親日 마녀사냥]을 읽고
피고석에 앉아야 할 사람은 벌써 죽었고 심판자는 일제 시대에 살아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엄상익 씨는 그런 궐석 재판의 영혼을 변호한 셈이다.
대서양의 민들레(회원)  

이 책을 무료로 보내주신 조갑제닷컴과 엄상익 변호사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 책을 쓰기 위해 방대한 관련 자료를 섭렵한 엄 변호사님의 노고와 열정에 다시 한번 경의와 감사를 드립니다.

법률적인 문제는 문외한이라 말할 수 없고 이 책 가운데 공감하는 몇 구절만 인용하며 감사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처벌에 관한 법>
"법을 발의한 열린우리당 대표의 아버지도 친일파로 다시 조사를 받나? 신문을 보면 자기 아버지가 만주에서 일본경찰 앞잡이를 했으면서도 독립투사인듯 가장했던데? "
"헌병대 오장은 계급이 낮아서 빠졌데. 수사기관의 앞잡이면 진짜 친일파인데 말야.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이 자기들 멋대로 기준을 만들었어."

<崔普植 기자와 한 인터뷰>

"그러면 일제 식민지하에서의 친일 행위에 대해 더 이상 선과 악, 정의라는 잣대로 판정하기 어렵다는 얘기인가요?" 기자가 물었다.
"저는 정확히 분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자료를 보면 자기네들에게 적극 협력한 사람들의 명단이 있습니다. 그보다 더 객관적인 기준이 어디 있습니까?…그보다 더 정확한 친일파의 분류 기준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외 악질적으로 조선 사람을 괴롭히고 우리를 헤치면서까지 일제에 달라붙은 사람들이 있죠. 친일파는 이들로 한정해야 합니다. 시대적 상황과 각 인물들의 전체적인 삶을 봐야지 함부로 친일파로 몰고가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게 제 입장입니다,

<진짜 앞잡이>

박춘금은 보통학교도 마치지 않고 일본에 건너가서 떠돌아다니던 건달이었다. 그는 일본 야쿠자 이상으로 칼을 잘 썼다. 그는 관동대지진 때 일본 경시총감을 찾아가 죽은 조선인 5000명의 시체를 처리해 주겠다고 자청했다. 그는 교포 수용소를 찾아가 그곳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석방을 조건으로 노동을 요구했다. 거기서 나온 임금은 그의 수입이었다. 그는 조선인 노무자들을 상대로 밥장사를 해 돈을 벌었다. 교포들이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우리 사업을 방해하는 놈은 죽여버린다!"

박춘금이 부하 10여 명과 함께 우르르 몰려왔다. 김성수와 송진우가 반 죽도록 얻어맞고 바닥에 널부러졌다. 박춘금은 단도를 꺼내 요리상 위에 콱 박았다. 살기가 등등했다. 박춘금의 부하들이 뒤에서 공포 분위기로 몰아갔다.…그는 동아일보가 모금한 재일동포 위문금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자기가 조직한 '노동상애회'가 재일동포 노동자라는 뜻이었다. 그가 조직폭력배들을 이끌고 일곱 번이나 동아일보를 찾아오는 동안 경무국장 마루야마는 모른 체하고 있었다. 결국 김성수는 3000원을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 앞에 내놓았다. 박춘금의 협박사건이 알려지자 여론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마루야마는 몰래 박춘금을 일본으로 보냈다. 이 사건으로 경영진은 총사퇴하고 동아일보는 기능이 마비되고 말았다.

" 백정 출신들이 일제시대 순사보가 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친일반민족행위자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생계용 친일파라 봐준 겁니다."

1949년 8월 6일 반민족행위처벌 특별재판소 제3부장(재판장 徐淳泳)은 경성방직 전 사장 김연수 피고인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였다. 대한민국이 세워진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였을 日帝시대의 행위에 대하여 형사적 책임을 묻는 데 대한 판결이었다.

그런데 60년이 지난 지금, 정권이 바뀌자 그 판결이 틀렸다면서 심판을 다시 하자는 것이다. 피고석에 앉아야 할 사람은 벌써 죽었고 심판자는 일제 시대에 살아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역사를 체험이나 사실이 아닌 관념으로 심판하려는 사람들의 오만과 편견이 항변할 수 없는 영혼을 판결하는 불공정 게임이 되고 말았다. 21세기의 마녀사냥인 것이다. 엄상익 씨는 그런 궐석 재판의 영혼을 변호한 셈이다.

이조시대 당파싸움에서 일어났던 4대사화, 정권을 잡으면 죽은 적장(敵將)을 부관참시하던 분풀이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이 야박한 세상에 무료로 이 책을 선물해주신 조갑제닷컴과 엄상익 변호사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 2019-02-18, 0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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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칼럼] 親日마녀사냥에 대한 도발적 질문 - 미디어워치


Dec 4, 2016 - 日帝시대는 과연 암흑시대이기만 하였나? 민족기업인에서 민족반역자로 몰린 '조선 제1재벌' 金秊洙(김연수) 변론기. '親日마녀사냥'(엄상익著) 讀 ...

[조갑제칼럼] 親日마녀사냥에 대한 도발적 질문

日帝시대는 과연 암흑시대이기만 하였나? 민족기업인에서 민족반역자로 몰린 ‘조선 제1재벌’ 金秊洙(김연수) 변론기. ‘親日마녀사냥’(엄상익著) 讀後記.

※ 본지는 앞으로 조갑제닷컴(http://www.chogabje.com)의 역사, 외교, 안보 분야의 우수 콘텐츠들을 미디어워치 지면에도 소개하는기회를 갖기로 했습니다. 본 콘텐츠는 조갑제닷컴 조갑제 대표님의 글입니다.


철 지난 親日마녀사냥에 대한 분노, 통쾌한 반론, 그리고 인간과 역사에 대한 따뜻한 시선(視線)이 때로는 문학적 표현으로 장대한 역사 드라마에 녹아 있었다.


공고판에 효수된 사람들

출판 편집자로서 嚴相益 변호사의 원고를 읽는 며칠 간은 행복하였다. 새로운 사실이 주는 흥미뿐이 아니었다. 철 지난 親日마녀사냥에 대한 분노, 통쾌한 반론, 그리고 인간과 역사에 대한 따뜻한 시선(視線)이 때로는 문학적 표현으로 장대한 역사 드라마에 녹아 있었다.

“문 옆의 벽에 공고판이 보이고 두툼한 서류뭉치가 마치 밧줄에 목이 매달린 사형수처럼 줄에 걸려 있었다. 위원회에서 친일파로 결정한 명단이었다. 누구든지 와서 그 이름들을 보라고 공고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명단을 들춰 보았다. ‘서춘, 장덕수, 진학문, 모윤숙, 노천명’ 등 귀에 익은 이름들이었다. 서춘(徐椿)은 학생시절 동경에서 2·8 독립선언을 주도하였고 동아일보 기자를 했던 인물이다. 장덕수(張德秀)는 민족의 지도자로 인기가 높았다. 진학문(秦學文)도 기억에 떠올랐다. 일제시대 타고르를 만나 한국을 위한 시(詩)를 써달라고 조르던 문학청년이었다. 노천명(盧天命) 시인의 시 ‘사슴’은 국어교과서에 나와 있었다. 그는 외롭고 쓸쓸하게 죽었다. 맑은 영혼을 가졌던 그 사람들이 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 그 이름들이 위원회의 공고판에 효수(梟首)되어 있는 것일까.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文明 개화의 주역들

대한민국 대통령 직속이었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적용하여 조사, 2009년 11월27일 국회에 보고한 戰時(中日·태평양전쟁) 기간 중의 反민족 행위자 705인의 명단에는 친숙하거나 존경받던 이름들이 많다.

尹致昊, 金錫源, 白善燁, 宋錫夏, 申應均, 申泰英, 申鉉俊, 李鍾贊, 洪思翊, 金秊洙, 金性洙, 朴興植, 金活蘭, 張德秀, 方應謨, 盧基南, 白樂濬, 申興雨, 崔麟, 李卯默, 崔南善, 金基鎭, 金東仁, 金東煥, 盧天命, 毛允淑, 徐廷柱, 兪鎭午, 李光洙, 李無影, 張德祚, 鄭飛石, 朱耀翰, 蔡萬植, 崔載瑞, 崔貞熙, 柳致眞, 李瑞求, 玄濟明, 趙澤元, 金基昶, 金殷鎬, 金仁承.

컴퓨터에서 漢字 이름을 찾으면 자동 검색이 되는 이들이다. 3·1운동 선언문 작성자 및 주동자,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사람, 낙동강 전선 다부동 전투의 영웅, 일제하에서 일종의 정부 역할을 하였던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 사장, 이화여대와 연세대학 총장, 한국어를 아름답게 가꾸고 고난의 시기에 한국인의 마음을 감싸주었던 시인과 소설가들(최초의 현대 소설과 현대 시의 작가 포함), 교과서를 통하여 익숙해진 명문장가들, 작곡가, 극작가, 화가, 무용가, 대주교, 그리고 기업인들.

개화기, 식민지배기, 건국, 호국, 근대화의 시기에 이 나라의 주역 내지 조역이었던 그야말로 기라성(綺羅星) 같은 이름들이다. 가히 문명 개화의 주인공들이다. 민족기업, 민족언론, 민족대학으로 통하던 민족진영의 핵심인물들이 거의가 死後에 자기 변론의 기회를 얻지도 못하고 ‘反민족행위자’로 저격된 것이다. 이들은 우리가 오늘 누리는 근대 문명의 중요한 요소를 이루는 각 분야의 개척자들이다.

개척자들이란 처음 해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시행착오가 유달리 많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산업혁명이 가장 늦었던 나라에서 그것도 日帝의 압제 속에서 주로 서구(西歐)에서 발전된 새로운 기술과 사조(思潮)와 예술을 받아들여 뿌리를 내리게 하는 일이 순리대로 소신대로 윤리대로 되었을 리가 없다. 이들 한국 근대화의 주역들은 나침반 없이 탐험에 나선 이들이었다. 이들의 개척과 탐험을 도와줄 국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장수는 이미 항복하여 적국(敵國)의 지배층에 편입, 안주하고 있었다. 장수를 따르던 백성들은 극지(極地)에 버려진 존재였다. 생존이 이들의 1차적 의무였다. 한반도를 벗어나지 않는 한 현존하는 권력과 제도를 떠난 생존은 불가능하였다.

“그들이 제일 미워하는 건 대한민국”

‘반민족행위자’는 쉽게 줄이면 ‘역적’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이런 ‘역적들’이 없었으면 공산화되었거나 경제적으로 일본에 종속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이들 反共과 克日의 공로자들은 왜 역적으로 몰린 것일까?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 위원이었던 역사학자 이명희(李明熙) 교수는 엄상익 변호사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위원회에서 나와 한 교수를 빼놓고는 모두 좌파죠. 그들이 제일 미워하는 건 대한민국입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을 세운 사람들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몰아버렸죠.”

계급 투쟁론에 기초한 세계관, 역사관, 인생관

이유가 간단해진다. 대한민국을 미워한다는 말은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하여 피, 땀, 눈물을 흘린 이들을 미워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체로 계급투쟁론에 기초한 세계관, 역사관, 인생관을 가졌다.

“(위원회의 주류인 좌파들은) 민중사관이나 운동사관에 입각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독립운동이나 혁명운동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다’ 이런 논리죠.”

엄 변호사가 위원회 조사팀장에게 물었다.

“구조론이 뭡니까?”

“사회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일종의 혁명론이죠.”

“개인적으로는 양심적이라도 상부구조에 있으면 친일파로 척결되어야 한다는 게 구조론 같던데….”

“맞습니다. 백정 출신들이 일제시대 순사보가 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친일반민족행위자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생계용 친일파라 봐준 겁니다.”

21세기의 마녀사냥

엄상익 변호사는 이 책을 통하여 한국 사회에 몇 가지 핵심적 질문을 던진다.

● 일제시대는 과연 암흑시대였나? 그때도 행복한 사람이 있었고, 역사는 발전하였으며, 문명은 건설되었다. 1930년대의 경성이 지금의 평양 같았단 말인가?

● 장수(고종)가 항복하였는데 졸병이 죽을 때까지 저항하지 않았다고 벌을 줄 수 있나? 초인(超人)이 못되었다고 단죄할 수 있나?

● 살아본 사람들은 김연수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민족기업인으로 칭송하였는데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도 지킬 수 없는 잣대를 들이대어 단죄하려는 것은 오만 아닌가?

● 그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훈장을 준 대한민국과 그를 민족반역자로 몬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인가?

● 인간은 과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사는 게 생존의 목표인가?

‘親日’이란 말 앞에선 얼어붙는 知的 풍토에서 일찍이 어떤 지식인도 발설한 적이 없는 도발적 질문이다. 이 책은 이 질문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런 질문은 60년 전에도 있었고(반민특위 검찰의 공소장), 그것에 대한 정답(반민특위의 판결)도 나왔다.

문제는 좌파정권이 들어서자 그 정답이 틀렸다면서 심판을 다시 하자는데, 피고석에 앉아야 할 사람은 죽었고, 심판자는 일제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었다. 역사를 체험이 아닌 관념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의 오만과 편견이, 항변할 수 없는 영혼을 심판하는 불공정 게임이 되고 말았다. 21세기의 마녀사냥인 것이다. 엄상익 씨는 그런 궐석 재판의 영혼 변호를 한 셈이다.

역사적 문서

이 책의 주인공인 김연수(金秊洙)는 동아일보 설립자이자 정치인인 형 김성수(金性洙)에게 가려져 대중적으로는 덜 알려진 기업인이다. 나는 그를 ‘한국 자본주의의 개척자’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데 60년 전 재판부도 그를 ‘민족기업인’이라 평가하였다. 이 책을 관통하는 가치관과 논리적 대결의 뼈대는 1949년 반민특위 재판부(단심제)의 무죄 선고 對 60년 뒤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의 ‘반민족행위자’ 결정이다.

1949년 8월6일 반민족행위처벌 특별재판소 제3부(재판장 徐淳泳)는 경성방직 전 사장 김연수 피고인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 판결문은 친일 행위를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단죄(斷罪)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역사적 문서이다. 대한민국이 세워진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였을 日帝시대의 행위에 대하여 형사적 책임을 묻는 데 즈음하여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고민이 느껴진다. 이 판결문에는 인간의 숨결과 성숙된 역사관과 균형감각이 스며 있다.

‘反民族’ 개념은 超法的

판결문은 먼저 국가가 없던 일제시대 조선인의 행위를 반민족행위처벌법으로 단죄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재판장은 “反민족행위라는 것은 反국가행위와는 다소 이념을 달리하는 윤리적 관념으로서 19세기 이래 발전된 민족주의를 그 사상적 배경으로 한 것인 만큼 이것을 법률적 규범으로 파악하기는 자못 곤란한 점이 없지 아니하나(下略)”라고 서두를 열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되어 없어진 상황에서, 더구나 그 지도부가 저항을 포기한 상태에서 비무장 상태의 조선인이 현존하는 권력인 日帝에 협력한 행위를 ‘反국가행위’, 즉 반역죄로 처벌하는 것은 논리상 불가능하다. 조국이 없는 조선인들은 일본이냐 대한제국이냐의 선택을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일본 지배에 순응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의 선택뿐이었다.

국가가 없던 시절의 행위를 처벌하기 위하여 ‘반민족행위’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 이는 통상적인 법적 기준이 아니다. 서구에서 발전한 민족주의를 근거로 삼은 기준이다. 한국어엔 ‘민족’이란 낱말조차 없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서양문물을 도입할 때 영어의 Nation이나 독일어 Volk를 ‘민족’이라고 번역하면서 소개된 외래 개념인 것이다.

그렇다면 재판의 지침이 되어야 하는 민족주의의 가치는 무엇인가? 재판부는 이렇게 설명한다. “민족의 긍지와 순결을 위하여 그 단결을 공고히 하고 그 도의(道義)를 앙양하여서 정치적으로는 자주의 정신을 고취하고, 경제적으로는 자치의 기초를 확립하여 세상의 여하한 경우에 봉착하더라도 민족적으로 사생동수(死生同守)의 대의를 지키자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3·1운동이야말로 이런 정신을 체현한 것이라고 예시(例示)하였다.

재판부는 여러 나라의 민족운동의 역사를 보면 상황이 악화될 경우 “결국 대중은 부지불식(不知不識)의 사이에 민족의 대의(大義)보다 自我의 구출에 급급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드물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떤 자세로 민족반역행위를 단죄할 것인가. 재판부는 엄격하되 신중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다.

“민족 전체를 죄인시하면 안 된다”

“우리는 모름지기 엄숙한 자기반성과 냉철한 사적(史的) 고찰에 입각하여 민족 전체를 죄인시하는” 자세를 피하고 世人이 입을 모아서 죽여도 좋다고 저주할 정도로 악질적인 행위를 한 자만을 가려내어 벌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처벌 대상자에 대하여 구체적 개념 규정을 내린다.

“敵의 세력을 필요 이상으로 이용하여 동족을 박해하였거나 자신의 영예를 위하여 직권을 남용하고 동족을 희생케 하였거나 민족적 비극이 목첩에 있는 무자비한 정책임을 알면서도 일부러 敵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자진 아부한 자”를 처벌 대상인 ‘악질적 反民族 행위’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또 “反民族 행위가 원래 법률 이전의 관념이지만 이것을 법률적 수단에 의하여 처리코자 하는 이상 모든 것을 법률적으로 이해하는 외에 다른 요구가 있을 수 없”다고 못박았다. 有無罪를 판단함에 “형사책임의 일반이론을 좇”아서 할 뿐이고, 자구에만 구애 받아 그 해석을 멋대로 할 순 없다고 했다.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 이뤄진 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초법적(超法的)인 면이 있으므로 인권유린이나 권력남용을 피하려면 오히려 형사소송법이 규정한 증거주의 등 사실 확인의 과정을 정확히 지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초법적인 역사 재판일수록 법치주의에 입각해야 무리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요약하면 인민재판 식 親日 斷罪論을 경계한 것이다. ‘민족’을 흉기화하여 대한민국 건설자들을 단죄하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로 써먹는 작금의 풍조를 예견한 것인가.

“직위가 아니라 행동으로 판단해야”

판결문은 또 日帝시대에 어떤 직위에 있었는가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뜻이 아니고 “그러한 지위와 신분이었던 자는 反民族의 개연성이 있다는 개괄적 규정”으로 보고, 그러한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하였는가를 따져서 판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日帝 때 활동하였던 사람들을 직위에만 근거, 획일적으로 범죄 유무를 판단하여선 안 된다는 경고이다. 형식보다는 내용, 즉 직위가 아니라 행동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뜻이다.

반민특위 검찰이 김연수(金秊洙)를 기소한 이유는, 피고인이 경성방직의 사장 등 15개 회사의 중역을 거쳐 조선 실업계에 상당한 권위와 존재를 보유하면서, 관선 도의원, 만주국의 京城 주재 명예 총영사, 중추원 칙임(勅任)참의 등에 임명되었고 청년학도의 출정을 권유하는 등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하였다는 것이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런 형식적인 면보다는 그가 무엇을 하였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서 판단하였다고 밝힌 뒤, 검찰 신문과 재판 증언에서 드러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김연수의 일제(日帝) 때 행위는 ‘이런 것’이었다고 요약하였다.

“피고인은 교토제국대학의 경제학부를 다닐 때부터 일생 실업인으로 종시(終始)하여 조국의 장래에 기여하겠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연구를 거듭하던 끝에 기미운동의 자극을 받아 한인(韓人)의 손으로 설립 경영하던 경성방직이 재정난으로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이를 인수 경영하기로 하고 전무취체역으로 입사한 것이 효시(嚆矢)이다.”

민족자본으로 키운 근대 공업의 萌芽

여기서 판결문은 김연수가 일본의 대기업과 경쟁하면서 경성방직을 발전시킨 점을 높게 평가한다. “경방이야말로 민족적 자본과 민족적 정열을 근저로 한 근대적 경공업이 조선에 수립되던 맹아(萌芽)인 만큼” 일본의 큰 회사들이 눈엣가시로 생각하여 압박하는데도 “밖으로 강적과 싸우고 안으로 빈곤에 울면서” 회사를 파산의 위기에서 구하고, 오랜 신고(辛苦) 끝에 기술을 습득, 연간 생산 면사(綿絲) 200만 관(貫), 광목 80만 필의 대회사로 키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 방직 회사들의 대공세에 대항하기 위하여 경방을 능가할 정도의 남만방적을 봉천에 설립한 것 등 그 공적은 적다고 볼 수 없다”고 평가했다.

재판부는 경성방직을 키운 김연수의 역할을, 자본주의 불모지대에서 민족적 자본과 정열을 모아 한국 자본주의의 맹아(萌芽)를 만든 선구자로 그리면서, 일본 대자본의 위협에 직면하여 민족적 기술과 투자로 이를 극복해낸 민족기업인이라고 판단하였다. 김연수의 기업활동을 경제 부문에서 이룬 항일(抗日)운동으로 해석한 셈이다.

판결문은 김연수가 경영하던 경방이 ‘결코 민족정신을 버리지 않은 증좌(證左)’를 몇 가지 들었다.

● 정치적 경제적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만만(滿滿)한 투지(鬪志)로써 일본 자본에 매수되거나 타협하지 않은 점

● 경방 주권(株券)에 태극기 도안을 넣어 민족혼을 상징한 점, 생산광목 포스터에 태극기를 상표로 한 점

“일제 말기 戰時엔 자유 의사가 통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공직(公職)에는 나아가지 않는다는 신조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와서 약간의 公職에 이름이 나게 된 것은 개인의 자유 의사가 용납되지 않은 日帝의 강제조치 때문이었다는 피고인의 변해(辯解)에 대하여 ‘수긍할 점이 없지 아니하다’고 했다. 판결문은 日帝가 일방적으로 발표한 관직에서 김연수가 사퇴하기 위하여 노력한 사실들을 열거하였다. 조선인 청년들에게 출정을 권유하였다는 기소 사실도 인정하지 않았다.

“도쿄 출장은 당시 총독의 명령으로서 자의(自意)가 아닐 뿐더러 강연 당시에도 저성(低聲)으로 밑만 바라보고 학생출정의 필요성을 이론적으로 역설한 것이 아니요 오직 소위 유세단이 도쿄까지 오게 된 경위를 말한 정도이었으며 강연을 마친 후에는 즉시 순천향 병원에 입원하였다.”

판결문은 일제 말기 戰時 상황에서 빚어졌던 이른바 친일행위에 대한 판단에 기준이 될 만한 언급을 남겼다.

“요컨대 본건 공소사실은 모두가 피고인의 자유의사에서 결과된 사실이 아니요, 당시의 정치적 탄압(전쟁 말기의 정치 성격은 公知의 사실)과 사회적 협박으로 말미암아 항거키 어려운 주위 사정에 반사적으로 취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 점이 인정된다.”

지금 한국에선 中日전쟁과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제의 통제가 강화된 가운데서 일어난 수동적 친일행위에 대하여 더 가혹하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의 오만과 위선을 60년 전 반민특위 재판부가 미리 경계해 둔 것 같다.

판결문은 피고인 김연수가 일제 때 민족 교육 및 사회사업을 위하여 기여한 긴 목록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균형감각과 종합적 시각(視角)에서 한참 벗어나 日帝 협력 행위만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려는 요사이 행태와 대조적이다.

잘한 점도 봐준 판결

● “기미운동의 책원(策源) 장소이며 광주학생 사건의 본영적 학교인 중앙중학교 및 보성전문(고려대학의 前身)을 운영하는 재단법인 중앙학원에 현금 250만 원과 田地 97정보를 기증하여 경영의 기초를 삼게 하고, 8개 중학교, 11개 소학교, 기타 교육단체 및 학생단체에 전지 629정보, 현금 370만 원 기부, 養英會를 통하여 학교에 수백만 원의 연구비 및 수백 명에게 장학금 지급, 李升基 공학박사 외 다수의 학자 배출, 경방 및 南滿紡績 출신 기술자로서 대한민국의 섬유공업회사(敵産)를 관리하는 이가 34명, 기타 재해 구휼(救恤), 체육보급, 종업원 복지증진을 위한 사회사업 등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

● 경방의 방계 회사로서 금융, 製絲, 정미, 농사 등 회사를 설립, ‘민족적 산업개발을 위한 선구적 역할’.

● 중앙 및 고려 두 학교를 졸업한 6000~7000명의 문화인, 그리고 “현 섬유공업계의 기술진영 편성이 가히 京紡의 독담장(獨擔場)이 되어 있는 사실 등은 피고인의 교육산업 및 사회방면에 끼친 공적으로서 특기할 가치가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판결문은 김성수, 김연수의 선친인 김경중이 “조선문화와 민족사상의 발양에 이바지하고자 단기 4269년부터 전후 18년의 세월을 소비하여 비밀리에 조선사 17권 1질을 편찬, 이것을 사립학교, 향교 등에 무상 배부한 사실”도 기록하였다. 판결문은 이어서 “자녀와 질(姪) 십수 인에 대하여는 한 사람도 왜정의 관공리로 취직케 한 사실이 없음”도 적시하였다.

‘장려(推奬)할 공적뿐’

재판부는 결론 부분에서 법적 판단을 이렇게 정리하였다.

“피고인의 性行, 사업, 사상, 家庭이 이와 같을진대 우리는 피고인의 공적을 추장(推奬)할 무엇이 있을지언정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위하여 同族을 구박하고 명예와 지위를 위하여 독립정신을 방해한 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할 논거는 없으며 피고인의 과거 공적을 보아 소위 장공속죄(將功贖罪)의 관용을 施할 수 있거든 하물며 본건 공소사실은 前段 인정과 같이 먼저 犯意의 점에 있어서 이를 肯認할 만한 자료가 없으니 그 악질 여부를 究明할 여지도 없이 결국 증거 불충분에 귀착되지 아니할 수 없으므로 형사소송법 제362조에 의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하노라.

단기 4282년 8월6일

반민족행위처벌 특별재판소 제3부
재판장 재판관 徐淳泳
재판관 李春昊
재판관 崔國鉉
재판관 申鉉琦
재판관 鄭弘巨“

재판장의 아들

엄상익 변호사는 故人이 된 서순영 재판장이 어떤 사람인가를 추적한다. 무죄 선고를 음모론으로 해석하기 좋아하는 이들을 의식한 것이다. 원로 법조인의 소개로 아들을 만났다. 교장 출신의 서주성 씨다. 그는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만든 것”이라며서 문집 두 권을 嚴 변호사에게 건네주었다.

“강직한 분이었습니다. 여론을 거슬러가면서 소신대로 판결하였습니다. 李承晩 대통령이 부산에서 장기집권을 위하여 정치파동을 일으켰을 때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가 법관직을 그만두셨습니다. 반민특위 당시 대법원장은 김연수 씨에게 유죄를 선고하라는 쪽이었는데 아버님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서순영 변호사는 아들에게 김연수에 대하여 이런 평을 남겼다고 한다.

“경성방직 제품에 태극성이라는 상표를 붙인 걸 보고 민족정신이 있는 분이구나 느끼셨답니다. 누구나 공부를 좀 하면 관직에 나가고 싶어할 때인데 김연수 사장한테서는 그런 것을 볼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일제 말기에는 일본으로 기울어진 행동을 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해방이 되자마자 독립운동을 했다는 애국자가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며 악질적인 친일파만 처벌하는 선에서 그치는 게 좋다고 하셨어요.”

“인간의 생존 목표가 국가와 민족이어야 하나”

서순영 재판장과 대척점에 있는 이는 60년이 지나 김연수에 대한 무죄선고를 부정하는 결정을 내린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핵심 위원인 박연철 변호사이다. 엄상익 변호사는 경기고등학교 선배인 그를 찾아가 논쟁을 벌이고 그 기록을 이 책에 실었다. 위원회가 어떤 논리로 민족기업인을 민족반역자로 판단하였는지 잘 알 수 있게 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이 논쟁에서 엄 변호사는 주로 듣는 쪽이지만 간간이 하는 질문이 날카롭고 도전적이기까지 하다. 토론에서는 답보다 질문이 더 어렵고 중요한 경우가 많다.

“1910년 한일합병 당시 집에 일장기를 걸었다면 친일행위지만 1930년대 戰時의 일본 경축일에 걸었다면 달라지는 게 아닐까요?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출전한 걸 비난 못하지 않습니까?”

“저는 김연수 회장만한 민족기업인이나 경제 분야의 독립운동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육과 문화에도 엄청난 돈을 기부하였고, 민족에 현실적으로 그만한 도움을 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단죄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인간이 생존하는 이유가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일까요? 개인을 희생해서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보전해야 한다는 국가주의 민족주의는 우리 헌법이나 특별법이 추구하는 논리가 아니라고 보는데요. 그건 또 다른 전체주의적 역사관이 아닐까 합니다.”

박연철 변호사의 다음 이야기는 경청할 만하다.

“우리가 조사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은 당대의 선각자, 지식인, 유산층 등 지도적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야. 그들은 해방 후에도 지도자로 생활한 사람이 많아. 그들의 행적을 철저히 파헤치는 건 우리가 나라를 잃게 될 경우 우리나라의 동량(棟梁)이 되어야 할 인사들이 어떻게 변모했는가 그 비극적인 행태를 철저히 인식시키려는 데 있는 거지.”

우리가 나라를 잃게 될 경우를 타산해 보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핵무장한 북한정권에 대한민국이 합병당하는 모양새이다. 위원회의 이념적 성향으로 보아 그런 경우를 상정(想定)한 것 같지는 않는데 누가 아는가, 親北派가 親日派보다 더한 규탄의 대상이 될 날이 다가오고 있는지를.

주홍글씨

엄상익 변호사는 김연수에 대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내린 국가기관을 상대로 한 행정 처분 취소 소송에서 이렇게 변론하였다.

“민족 공동체에는 이왕 받은 상처에 소금을 끼얹는 아픔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선 친일파로 낙인 찍히면 갈 곳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자손까지 주홍글씨가 새겨진 옷을 입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기관인 위원회가 편향된 목적을 설정하고 진실을 왜곡함으로써 역사의 권력화 현상을 초래하였습니다. 위원회는 과거를 현재의 목적에 맞추어 이용한 면이 있습니다. 과거는 과거라는 공간 속에 두고 보야야지 현재의 눈높이와 정치적 의도에 맞추어서는 안 됩니다.”

엄 변호사는 책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라를 빼앗긴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눅 들고 그 회한을 가슴속에 새기면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산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일제가 강요하는 일정한 활동을 하였다고 해서 민족을 잘못 인도한 민족반역자처럼 단죄하는 것은 후 시대인 오늘을 산다는 특권만으로 그들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 같았다. 그런 편견은 한 개인이나 학자의 의견이라도 지탄 받을 수 있다. 국가인 대한민국이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은 지나친 것 같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아이가 어른을 재판하는 것 같다”고 비판하였다. 노기남 대주교에 대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에 대한 논평이었다.“

엄 변호사는 위원회가 모범으로 삼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에서 있었던 부역자 단죄는 경우가 다르다고 지적한다.

“나치 치하 짧은 기간 벌어진 일들과 한 세대가 넘는 36년간이 이어진 일제 식민 상황 속의 절망적 행동과 맞비교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상과 당위라는 잣대로 당시를 보면서 조선 사람들에게 超人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프랑스에서도 9000명을 약식으로 처형한 데 대한 반성이 있다.”

‘아무리 자료를 내도 안 읽는다면…’

2010년 행정법원은 원고의 청구를 기각, 김연수에 대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을 유지하였다. 엄상익 변호사는 이렇게 개탄한다.

“재판을 시작할 때의 재판장 말이 떠올랐다. 다른 재판부에서 유사한 사안이 결론 나 있는, 간단한 사건이라고 그는 말했었다. 그는 역사문제에 대해 그리고 김연수라는 한 인물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 같았다. 솔직히 내가 낸 증거자료들이나 주장들을 그 판사들은 읽지 않았을 것 같았다. 아무리 자료를 제출해도 눈을 빤히 뜨고도 그걸 읽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며칠 후 판결문이 왔다. 60년 전의 무죄 판결을 뒤집는 행정법원의 논지는 이러하였다.

“식민지배 하에서라도 기업인이 자신의 기업 활동을 위하여 식민통치에 도움이 되는 행위에 가담했다는 것은 내심의 동기가 어떠하였는지에 불구하고 비난 받아 마땅하다. 중추원 참의 등 그 관직에 나아간 자체가 이미 적극적 주도적으로 日帝에 협력하혔다는 점이 추정되는 것이다. 김연수의 중추원 참의 등 임명과 활동이 본인의 의지와 관계 없이 강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정은 보이지 않는다.”

이 판결의 논리라면 통일 후 북한에서 조선노동당 당원으로 활동한 약 300만 명 전원을 민족반역자로 처단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적 강압에 의한 굴복이었다는 항변은 ‘내심의 동기가 어떠하였던지 간에 그런 강압에 의하여 이뤄진 것이라는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로 간단히 무시될 것이다.

엄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일제시대라는 공기를 두르고 산 기업인으로서 그 시대를 지배하는 정권과 소극적 미온적으로 타협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런 행동은 법이 규정하는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엄 변호사는 항변한다.

“기업의 목표는 돈을 버는 것이지 抗日이 아니다. 抗日운동가에게 기업을 하지 않았다고 비판할 수 없듯이 기업인더러 항일운동하지 않았다고 단죄할 순 없는 것 아닌가.”

1949년 반민특위 재판부는 김연수가 기업활동으로 번 돈의 힘으로 한국인의 실력을 길러 일본을 이기는 방향으로 고차원의 抗日을 하였음을 인정하였다.

“당신들은 후퇴해 본 적이 있소?”

김연수라는 나라 잃은 조선인과 그가 살아갔던 비상한 시대의 명암(明暗)을 그려낸 엄상익 변호사의 글은 문학적 감동을 준다. 위원회와 재판부의 결정과 판결에서는 빠져 있는, 역사 속에서 숨쉬는 인간을 이 책에서 살려낸 덕분이다. 일제시대를 간단히 ‘암흑시대’로 규정하는 것은 이 시대를 치열하게 살면서 미래를 준비하고, 文明을 발전시켰던 우리의 先代에 대한 모독이며 역사 부정이고 무엇보다도 사실과 맞지 않는다는 점을 일깨운다. 그의 글을 읽다가 문득 생각 난 다른 글을 찾아내어 읽어 보았다. ‘인간의 심연(深淵)’을 쓴 영문학자 朴承用 선생이 노무현 정권 시절(2005년)에 조갑제닷컴에 기고하였던, 오래 여운이 남는 글이다.

“헤밍웨이의 전쟁소설 ‘무기여 잘있거라’의 주인공 프레데릭 중위는 전선에서 후퇴하던 중 이탈리아군 헌병들이 이탈리아軍 중령을 처형 직전에 심문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 심문자(헌병)들은 ‘사격은 하지만 사격은 받지 않는’ 이탈리아 군인들의 그 모든 능률성과 침착함과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소속 여단은?”

그(중령)는 대답하였다.

“연대는?”

그는 대답하였다.

“연대에서 왜 이탈하였나?”

그는 대답하였다.

“장교는 부대와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나?”

그는 안다고 말하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다른 헌병장교가 말하였다.

“너같은 놈 때문이다. 야만인들이 조국의 신성한 국토를 짓밟게 만든 것은 바로 너같은 놈들이다.”

“선처를 바랍니다”라고 중령이 말하였다.

“우리가 승리의 열매를 놓친 것은 네놈들의 반역 때문이다.”

“당신들은 후퇴해 본 적이 있소?” 중령이 물었다.

헌병은 총살집행을 위한 총은 쏘지만 전투에 참여하여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지는 않는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총에 맞을 일도 없고 후퇴의 경험도 없다. 그들은 죄의 유혹을 받은 적이 없으면서 죄에 굴복한 자를 단죄(斷罪)하는 성직자와 같다. 헌병들이 사용하는 ‘신성한 국토’와 ‘승리의 열매’같은 애국적인 어구(語句)는 조개껍질처럼 공허한 것이어서 “후퇴해 본 적이 있는가?”라는 중령의 말 앞에서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헌병들의 용감한 말은 실제 상황과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중령의 질문은 핵심을 찌르기 때문이다. 행동과 경험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추상적인 이론이나 명분은 객관적인 사실에 부딪히면 오판(誤判)을 가져오기 쉬우며 인류사는 너무나 많은 오판의 사례를 보여준다. 중령은 이러한 오판의 희생자이다.

盧武鉉과 그의 동류(同類)인 386은 일제시대에 살기는커녕 태어나지도 않았고 세계최빈(最貧)의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강국으로 변한 건설과정에 땀 한 방울 흘리지도 않았으면서 이승만과 박정희 등 시대의 짐을 지고 고난의 세월을 살아간 사람들에게 총질을 마구 해대는 미친 ‘헌병’들이다.“

대한민국이 딛고 있는 문명 건설의 주인공들을 주로 골라내어 주홍글씨를 새긴 듯한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은 저승에 있어 항변이 불가능한 영혼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중세의 마녀사냥보다 더 비열하다. 이 책을 다 읽으면 마녀사냥꾼들의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로베스피에르, 자베르, 일제 고등계 형사, 그리고 헤밍웨이의 헌병을 합성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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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일제강점기 기업인 수당 김연수를 변호합니다” : 뉴스 ...


Dec 8, 2016 - 삼양그룹 창업주 수당 김연수에 관한 책 '親日(친일) 마녀사냥'을 최근 낸 엄상익 변호사(62)를 6일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엄 변호사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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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 “일제강점기 기업인 수당 김연수를 변호합니다”
조종엽기자입력 2016-12-08 0


‘親日 마녀사냥’ 발간 엄상익 변호사

최근 책 ‘친일 마녀사냥’을 낸 엄상익 변호사는 6일 자신의 사무실에서 “자료를 모으려고 수년 동안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점을 뒤졌다”며 “일제강점기 상황을 한 페이지 쓰려고 논문과 잡지, 기행문 등 30여 개를 읽으며 역사적 사실을 검증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일제강점기 지주 출신 부자들은 놀면서 부(富)를 탕진한 이들이 대부분이고, 일본 유학생들은 보통 고등문관 시험 치고 군수, 법관 되는 게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수당 김연수(1896∼1979)는 근대적 경제관념을 가지고 민족 기업을 일으켜 일본 자본과 경쟁했습니다. 선구적 기업가인 거지요.”

 삼양그룹 창업주 수당 김연수에 관한 책 ‘親日(친일) 마녀사냥’을 최근 낸 엄상익 변호사(62)를 6일 서울 서초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엄 변호사의 사무실 서가에는 일제강점기 관련 연구서와 논문 등이 가득했다. 엄 변호사는 청송교도소 내 의문사 사건을 ‘신동아’에 밝히면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첫 의문사 규명을 이끈 인물이다. 대도 조세형, 탈옥수 신창원처럼 누구나 꺼리는 인물의 변호를 맡기도 했다. 2009년 수당의 후손들이 냈던 친일반민족행위결정 취소 청구소송도 대리했다.

 책은 엄 변호사가 변론하는 과정과 과거 김연수가 성장한 과정 및 기업가로서의 면모 등 일대기를 소설처럼 재구성해 교차시켰다. 수당이 인수한 경성방직은 조선인이 만든 조선인의 회사였다. 직원들은 조선인만 고용했고, 1923년에는 처음으로 우리 기술로 광목을 생산했다. 태극기를 변형한 모양의 태극성(太極星) 상표를 달기 위해 조선총독부보다 덜 민감한 일본 상공성에 상표등록을 하기도 했다. 수당이 상하이 임시정부 등에 독립운동 자금을 댔다는 증언도 있다.


 수당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당대의 상황을 묘사한 내용도 책에 적지 않다.


“변론을 준비하며 일제강점기를 공부할수록 여태까지 역사의 해석을 독과점한 이들의 특정 시각만 일방적으로 수신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수당은 일제강점 말기 중추원 참의 등의 관직을 받는다. 이에 대해 엄 변호사는 “아예 ‘일본 사람이 되겠다’며 적극적으로 친일한 기업인이 분명히 있다”면서도 “수당은 일제가 주는 관직을 억지로 받았지만 기업을 운영하기 위한 것이었고,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았던 인물”이라고 말했다. 경성방직이 조선총독부에 낸 국방헌금에 대해서는 “전시에 조선총독부가 헌금을 하라고 공개적으로 내용증명을 보내오는데 사업가로서 안 낼 수 있었겠나”라고 말했다.

 엄 변호사는 사건을 수임한 2008년부터 자료 수집을 시작해 이 책을 쓰는 데 8년이 걸렸다. 이유는 뭘까. “자비 출판입니다. 팔릴 책도 아니고, 이 나이에 공명심도 아닙니다. 다만 세상을 보는 시각이 자유로웠으면 합니다. 변호사 일을 하다 보니 한 색깔만 통하는 사회, 외눈으로만 보라고 강요하는 사회가 싫었어요. 학문이나 법정이 객관적 진실을 밝히는 것 같지만 자칫하면 ‘진실의 무덤’이 될 수도 있지요.”

조종엽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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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친일마녀사냥 107 - 親日 단죄론
운영자 2019.09.16 12:32:09



親日 단죄론

총독부는 중요 기밀문서를 소각하고 미리 찍어두었던 조선은행권으로 관리들의 퇴직금과 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의 귀국경비를 지급했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상범들이 풀려나왔다. 독립문에서 서대문형무소에 이르는 길은 환희에 들뜬 한국인으로 메워지고 ‘혁명동지 환영’이라고 쓴 깃발이 나부꼈다. 거리는 태극기로 뒤덮이고 만세소리와 시위행진이 벌어졌다.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군중대회가 열렸다. 인기 있는 대중정치인 여운형(呂運亨)이 행정권을 이양 받은 경위를 설명한 후에 소리쳤다.


“여러분 오늘 오후 1시에 소련군이 서울역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 환영을 하러 갑시다.”


그 말을 들은 군중들은 서울역까지 시가행진을 벌였다. 그날 오후 3시 안재홍(安在鴻)은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자격으로 경성방송국에서 방송을 했다.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총독부로부터 행정권을 인수받은 것을 공표하고 정규군대의 편성, 통화의 안정, 대일(對日)협력자에 관한 대책을 선포했다.


안재홍은 이렇게 당부하였다.


<끝으로 국민 여러분께서는 각별히 유의하여 일본 거주민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40년간의 총독 통치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습니다. 조선·일본 양 민족의 정치 형태가 어떻게 변천하더라도 두 나라 국민은 같은 아시아 민족으로서 엮이어 있는 국제 조건 아래서 자주 호양(自主 互讓)으로 각자의 사명을 수행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 일본에 있는 500만의 조선동포가 일본에서 꼭같이 수난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조선에 있는 백수십만 일본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총명한 국민 여러분께서는 잘 이해해 주실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종전(終戰)을 맞은 일본인들은 이 연설이 수많은 일본인의 생명을 살렸다고 고마워하였다.


그 무렵 보성전문 교장인 김성수(金性洙) 부부는 경원선의 화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경원선 기차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기차 안에 일본인도 몇 명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은 초주검이 되어 구석에 짐짝처럼 앉아 떨고 있었다. 조선 사람들이 비키라고 하면 비키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갔다. 엊그제까지의 서슬과 거드름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해방된 서울의 밤거리는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등화관제로 거리는 먹물을 풀어놓은 것 같이 깜깜했었다. 그런 거리가 갑자기 휘황찬란하게 변했고 다니는 사람들은 활기가 넘쳐흘렀다. 김성수 부부가 기차에서 내려 계동 어귀에 이르렀을 때였다. 완장을 두른 몇 명의 청년들이 골목을 지키고 있었다. 완장에는 ‘건국준비위원회 보안대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아직 여드름자국이 나 있는 학생같아 보이는 청년 한 명이 김성수 부부 앞을 막아서면서 위압적으로 말했다.


“여기는 여운형 선생 댁이니 저쪽 가회동 쪽으로 돌아가시오.”


여운형은 이미 해방된 한국의 정권을 잡고 있었다.


“여기가 우리 집으로 가는 길이에요.”


김성수 선생의 부인 이아주(李娥珠)가 화가 난 어조로 항의했다.


“저쪽으로 돌아가라는데?”


보안대원인 학생이 눈을 부라렸다.


“몽양 여운형이 이렇게 하라고 시킵디까?”


김성수가 화를 참으며 조용히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보안대원인 학생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 나라를 세우는 일에 이렇게 하면 안 되지.”


“도대체 영감이 뭔데 우리 위원장님을?”


보안대원 완장을 찬 학생은 곧 화를 내며 덤벼들 기세였다. 그때였다.


“선생님 아니세요?”


뒤쪽에서 한 보안대원인 학생이 인사하면서 말했다.


“저는 보전(普專) 출신입니다.”


학생은 그렇게 사과하면서 앞을 막아서던 학생을 말렸다. 이미 여운형의 위세는 전국을 흔들고 있었다. 그 시각 서울거리 요소요소에 일본군이 바리케이드를 쌓고 있었다. 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이 총독부 관리들과 접촉해 ‘경성 일본인회’가 만들어졌다. 경성전기회사의 사장이던 호츠미가 회장이고, 부회장에는 조선전업사 사장이던 구보다와 국민의용대 부사령이던 와타나베가 선출됐다. 아직 조선에 남아 있는 일본 경찰은 ‘한국인의 시위 및 정치운동은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 건준(建準)의 안재홍(安在鴻)이 방송한 내용에 대해서도 이렇게 이견을 발표했다.


“건준의 발표내용은 그 사명을 벗어난 점이 많다. 건국준비위원회는 본래 총독부의 행정치안유지에 협력하는 것이 그 사명이다.”


일본 경찰은 종로에 기관총대를 배치해 위압적인 무력을 시위하고 여러 한국인 단체 책임자를 종로경찰서에 모이라고 하면서 통보했다.


“오늘 하오 5시까지 모든 한국인의 정치, 또는 치안단체는 간판을 내리고 해산하라.”


총독부는 일본 본국에서 비행기로 조선은행권 5억 원을 날라와 시중에 유통시켰다. 아직 실질적인 해방이 아니었다.


해방으로 경성방직 내부의 수많은 간부와 공원들은 축제의 분위기였다. 공장장은 소를 잡아서 쌀밥을 지어 공원들에게 먹였다. 식당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사람들은 공장에서 키우는 말을 타고 영등포 일대를 시위하기도 했다. 경성방직은 해방 후 독보적으로 직포(織布)를 생산했다. 조선 내 대부분의 방직회사는 일본인 자본과 경영에 일본인 기술이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 기술자의 양성을 기피했었다.


패전으로 일본인들이 공장에서 손을 떼자 일시에 모든 공장들이 휴면상태에 빠졌다. 일본인 공장의 한국인 종업원들은 일본인의 공장을 자기네 소유물로 착각하고 자치관리위원회를 구성해서 철수하지 못한 일본인들에게 공장의 인계를 요구하는 한편 재고품을 분배하라고 했다. 그런 소동으로 모든 공장들이 폐쇄됐다. 경성방직은 해방공간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회사였다.


일본인이 하던 방직공장들을 다시 가동시켜야 했다. 그러나 기술자 부족으로 거의 불가능했다. 어떤 방직공장은 일본인 기술자의 잔류를 군정(軍政)당국에 요청하는 형편이었다. 만주에서 돌아온 남만방적 기술자들이 일본인들이 남긴 방직공장들로 진출했다. 남만방적을 이끌던 공장장 오규선은 대부대를 이끌고 일본인이 하던 동양방적 경성공장으로 갔다. 그렇게 남만방적의 기술자들에 의해 해방정국의 정지된 방직공장들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미군이 인천을 통해 서울로 들어오고 일본인들이 물러갔다.


해방과 동시에 북한에선 이른바 민족반역자에 대한 숙청이 이루어졌다. 그런 가운데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평남지구대확대위원회에서 처음으로 친일파에 대한 규정이 등장했다. 그 해당자는 한일합병에 공헌한 매국노와 그 후예, 일본 침략전쟁에 직접·간접으로 협력한 자, 관리로 임명된 자들이었다. 단 관리에 임명되었다 하더라도 인근 주민 및 소작인으로서 그의 본의가 아니라는 증명이 될 때는 예외로 하고 있었다. 그해 9월 고성에서는 민족반역자 11명에 대한 인민재판과 사형선고가 있었다. 양양에서도 민족반역자 3명에 대한 인민재판이 열렸다. 서울의 조선공산당의 지도자 박헌영(朴憲永)은 이렇게 입장을 밝혔다.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토지와 권세를 가지고 인민을 지배하다가 일본 제국주의에 투항해서 민족을 배반한 특권층이 있다. 이들은 조선 사람의 생활과 언어와 감정까지를 말살하려 했으니 일본 제국주의와 똑같은 조선 사람의 적(敵)이요, 이른바 친일파요, 민족 반역자이지 조선 민족은 아니다. 이들의 완전한 숙청이 없이는 조국의 자주독립과 민주건설을 바랄 수 없을 것이다. 조선민족이라고 하면 일본 제국주의와 그 협력자인 구(舊) 봉건지배자들에게 착취당하고 압제 받으며 그 생존을 위하여 싸운 노동자, 농민, 소시민이다. 8할 이상 차지하는 이런 근로인민이 조선 민족의 내용을 형성하고 있다. 따라서 당면강령으로서 조선 경내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잔여세력과 반동분자를 철저히 숙청하고 재산을 몰수하여 대기업은 국영(國營)으로 하고 토지는 농민에게 분배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체의 친일파를 공개재판으로 철저히 응징해야 한다.”


겨울 특유의 스산한 날씨가 계속되던 12월 중순경이었다. 서울의 관수동 국일관에서 한민당 간부들과 임정(臨政) 요인들의 간담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임정의 신익희(申翼熙)가 이런 말을 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친일(親日)하지 않고 어떻게 생명을 부지해 왔겠어?”


지청천(池靑天), 조소앙(趙素昻) 등 임정 요인들은 국내 지도자들에 대한 숙청론을 들고 나왔다.


“그러면 나는 숙청이 되겠군.”


그 자리에 참석했던 장덕수(張德秀)가 신익희의 말을 되받았다.


“그게 어디 장덕수뿐일까?”


신익희의 가시가 들어 있는 말이었다. 그의 거리낌 없는 발언은 취중의 말이라고는 하지만 임정 입국(入國) 이후 친일파 숙청론의 첫 발언이었다. 임정은 이승만(李承晩)을 떠받드는 듯한 한민당을 꺼렸다. 이승만이 있는 한 자기들은 빛을 보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었다. 임정 측이 주도권을 잡으려면 한민당을 눌러야 했다. 임정 측은 먼저 일제 말 장덕수가 학병권유 연설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들고 나왔다. 장덕수는 손꼽히는 이론가요 웅변가로 대중적인 인기가 높았다.


한민당을 이끄는 송진우(宋鎭禹)가 이의를 제기했다.


“여보시오, 국내에 발 붙일 곳도 없이 된 임정을 누가 오게 하였기에 그런 큰 소리가 나오는 거요? 인민공화국이 했을 것 같아? 해외에서 모두들 헛고생했군. 더구나 일반 국민에게 모두 떠받들도록 하는 것이 3·1운동 이후 임정의 법통 때문이지, 노형들을 위해서인 줄 알고 있나?


여봐요, 중국에서 궁할 때 당신들이 무엇을 해 먹고 살았는지 여기서는 모르고 있는 줄 알아? 국외에서는 배는 고팠을지 모르지만 마음의 고통은 적었을 거 아니야? 가만히 있기나 해, 하여간 환국(還國)했으면 모든 힘을 합해서 건국(建國)에 힘쓸 생각들이나 먼저 하도록 해요. 국내 숙청문제 같은 것은 급할 것 없으니, 임정 내부에서 이런 말들을 삼가도록 하는 것이 현명할 거요.”


송진우는 임정 요인들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다. 그가 참지 못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해외에서 고생했다고 받들어주니까 30년 전의 머리를 그대로 갖고 자기들만이 애국자란 얼굴을 한단 말이야.”


친일파 척결에 대한 지도자의 의견은 조금씩 달랐다. 박헌영은 지주와 자본가 출신은 조선 민족에서 배제하자는 입장이었다. 임정의 김구(金九) 주석은 이런 의견을 표명했다.


“해방 이후 국내 사회는 너무 혼란하다. 이것은 과거 36년 동안 왜적(倭敵)이 갖은 수단과 방법으로서 민족의 단결을 저해시키기 위해 부식(扶植)해 놓은 여러 가지 정신적 독소의 잔해가 소탕되지 못한 까닭이다. 앞으로 이러한 혼란을 방지하고 조선의 전체적인 통일 독립정권을 건립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냉정한 양심적 반성이 필요하다.”


이에 대해 이승만의 의견은 이랬다.


“친일분자는 일제하의 직위가 문제가 아니라 해방 후의 처신이고 현재의 자세다. 식민잔재의 청산은 대일(對日)정책과 교육을 통해 이루어야 한다.”


이승만이나 김구의 입장은 악질 친일분자에 한해 처단하고 그 외에는 관용하고 포섭해서 국가건설에 참여시키자는 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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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친일마녀사냥11 - 門中회의
엄상익 변호사

joyful 2019.08.31 16:42
http://blog.daum.net/parkland/15821089




서울 중구 퇴계로 5가 쌍림빌딩 9층에 있는 삼양사 그룹 계열사의 회의실에 고창 김씨가의 문중(門中)사람들이 모였다. 금융지주회사의 김한 회장이 사회를 봤다. 경기고, 서울대와 미국의 예일대학을 졸업한 그는 메리츠 증권의 부회장을 지낸 금융통으로 알려져 있다. 삼양사 그룹을 일으킨 김연수 회장의 직계(直系) 자손들만 모인 자리였다. 그룹 이외에도 집안의 범위는 넓었다. 동아일보와 고려대학교 그리고 영등포의 경방필백화점이나 경성방직의 사람들도 회의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나는 변호사 자격으로 문중회의에 참석한 유일한 외부인이었다. 김한 회장이 사회자로서 입을 열었다.


“윗대의 어르신들이 계시지만 이제 모두 연로(年老)하셔서 할아버님의 친일(親日)시비에 대한 방어는 그 아랫대인 저희들이 주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우리보다 아랫대인 동아일보 사장이나 경성방직 사장 그리고 삼양사 그룹 계열사를 이끄는 세대들은 한참 사업에 전념을 해야 하는 40대 중반이라 이 일에 신경을 쓰게 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일은 우리 집안의 명예가 달린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모두 힘을 합쳐서 난관을 뚫어 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먼저 오늘 모이신 집안 분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을 예정입니다. 그리고 수시로 집안이 다 모이는 건 어려울 것 같아서 구체적으로 일을 추진할 문중대표들을 뽑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세 명 정도를 문중의 대표로 선정해서 이 자리에 참석한 嚴 변호사에게 일을 맡겨 추진해 나가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바로 본격적인 토의로 들어가겠습니다.”


“먼저 삼양사 그룹을 대표해서 나온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가 손을 가볍게 들고 말을 시작했다. 그는 자기 앞 회의 탁자에 올려놓았던 책을 집어 문중사람들에게 보였다. 《제국의 후예》라는 제목과 함께 볼사리노 모자를 쓴 창업자 김연수(金秊洙) 회장의 젊은 시절 사진이 박혀 있었다.


“이 책은 미국 하버드대학의 에커트 교수가 우리 문중을 연구한 논문입니다. 몇 년 전 그 미국인이 인터뷰를 하겠다고 우리 그룹을 찾아왔어요. 우리는 아무 거리낄 게 없다고 생각하고 그 사람이 묻는 말에 솔직히 모두 대답을 해주고 달라는 자료도 모두 협조해 줬습니다. 자료도 취사선택해서 준 게 아니에요, 달라는 대로 줬죠. 그런데 발표된 논문의 내용을 보면 시각이 특이합니다. 우리 집안이 지주(地主)였으니까 당연히 착취했을 거라고 단정하는 겁니다. 그 미국인은 동양의 전통적인 지주제 특성을 모르고 착취라는 관점만으로 설명하고 있어요. 우리 집안에서 일제시대 경성방직을 경영한 데 대해서도 삐딱한 시각이에요. 민족기업을 표방해 왔으면서 일본에서 왜 기술은 도입했느냐는 식이죠. 그 외에도 문중의 입장에서 보면 거북한 장면이 너무 많아요. 은행에 정상적인 이자를 내고 대출을 받아쓴 것도 모두 특혜라고 몰아치고 있어요, 제국주의 침략에 협조하고 일본과 공생관계를 맺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노동자들에 대해서도 계급적인 관점에서 우리 집안을 난도질합니다.


우리가 제공한 모든 자료가 독(毒)이 돼서 이렇게 돌아온 겁니다. 서양 사람의 눈에 비칠 때 오해가 없도록 자료를 선별해서 줬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예를 들면 서양은 정부의 규제가 거의 없는 자유경쟁 상태에서 기업이 움직이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일제(日帝) 전쟁기 동양의 경우를 보면 정부가 원료부터 가격까지 전부 통제했잖아요? 그런 속에서는 정부의 명령을 받고 협조할 수밖에 없었던 게 기업의 입장인데 그런 당시 기업의 일반적인 현상까지도 에커트라는 미국인은 현대의 미국식 잣대를 들이대면서 우리 집안이 일제와 밀착했다고 하는 거죠. 그리고 창업자 김연수 회장님이 시대적 상황상 마지못해 국방헌금을 뜯기거나 관변단체에 강제 가입된 것들까지도 모두 친일로 몰아버린 겁니다.”


모인 사람들은 모두 침통한 표정이었다. 묵묵히 듣고 있던 김병진 회장이 다음으로 발언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런 때 우리 집안을 터무니없이 모략하는 이런 책이 나온 거죠. 위원회에서 《제국의 후예》라는 이 책을 보면 꽤 좋아하겠네요. 미국인이 증거까지 대고 하나하나 공격해 주니까.”


삼양그룹을 대표해서 나온 남자가 그 말을 받아 계속했다.


“그리고 또 다른 책이 있습니다. 국내학자 주익종 씨가 쓴 《대군의 척후》라는 이 책입니다. 주익종 씨는 미국학자 에커트의 논문을 한글로 번역해준 사람입니다. 에커트의 논문을 번역하다 학자로서 자기 나름대로의 의견을 제시한 게 이 책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우리 집안을 옹호하지는 않았어요, 그 사람 나름대로는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 집안의 친일을 지적한 거죠. 에커트의 무지막지한 친일 주장에 대해 자기식의 반론을 제기한 부분도 일부는 있습니다. 또 다른 논문들도 있어요. 경제사학자 김용섭 씨의 ‘조선말 고창 김씨가의 농업경영’이 그 대표적인 거죠. 그 논문들을 보면 농민들을 착취해서 갑부가 됐다는 논조입니다. 그러면서 일제 때 협력했다고 몰아붙입니다. 전부들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선입견을 가지고 적대적으로 쓰고 있어요. 아마 칭찬을 하면 혹시 뒤에서 우리 돈이라도 받고 쓴 걸로 세상이 오해할까봐 더 그렇게 했는지도 모르죠.”


김병진 회장이 다시 덧붙여 발언했다.


“사실 제가 어제 교보문고에 가서 《제국의 후예》라는 책을 사서 봤어요, 에커트란 작자는 아예 한국의 근대화와 경제성장은 전부 제국주의의 은혜라는 독선적인 주장을 하고 있더라구요.”


이번에는 사회자인 김한 회장이 말했다.


“그렇다면 박정희 대통령 때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오고 그 돈으로 공장을 세우고 지금까지 여러 가지 기술을 일본에서 배우는데 그것도 다 제국주의에 종속한다는 해석이겠네? 일본에서 배우면 제국주의에 종속한 거고 미국에서 배우면 아니라는 논린가? 아니면 아직도 우리는 제국주의 속에 있다는 좌파의 이론인가?”


묵묵히 듣고 있던 종손인 김병휘(金炳徽) 교수가 조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일제시대 할아버님은 조선인도 잘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사업을 일으키신 거 아니야? 조선인이라고 일본인보다 훨씬 더 불리한 대출을 받고 나라가 없는 조선인이라 지원은커녕 차별을 극복하려고 그렇게 애쓰시면서 기업을 성장시켰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지금에 와서 어떻게 그런 주장을 할 수 있지? 좋은 제품을 만들어 내려면 기술력이 좋아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겠어? 할아버지가 일본인 기술자를 쓰지 않고 한국인 직공들을 일본 공장에 보내 기술을 배우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닌가? 그리고 일본 덕을 봤다고 하는데, 그 시절 일본 기업가들이 우리 한국시장을 다 점령했잖아? 할아버지는 할 수 없이 만주에 가서 광목을 판 건데 그걸 가지고 만주시장을 점령한 일본 덕을 봤다고 하는 건 그 미국인 학자가 너무 상황을 모르고 자기 이론에만 모든 걸 꿰어 맞춘 거라고 생각해. 그가 발표한 책에 대해 우리 문중에서 정확한 근거를 대보라고 항의라도 해야겠어.”


문중 사람들은 은은한 분노를 태우고 있었다. 사회자인 김한 회장이 유일한 국외자인 나를 보면서 말했다.


“엄 변호사, 우리 집안은 조선 말(末)의 갑부로 지금까지 150년이 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해. 우리 집안 이전에는 경주의 최(崔)부자 가문이 있었지만 말이야. 경주 최부자 집안은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그냥 땅에만 집착한 면이 있어. 그러나 우리 할아버님은 일본에 유학하면서 당시 첨단산업인 면직업(綿織業)을 보고, 제조업 방면에 눈을 뜬 거야. 그래서 돌아와서 광목을 만들어낸 거지.


지금으로 비유하면 삼성전자가 반도체사업에 뛰어든 거나 마찬가지로 발상의 전환이지. 지금 삼성전자가 대한민국 경제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중보다 일제시대 우리 할아버님의 경성방직이 조선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더 컸지. 조선 전체의 1년 예산보다 경성방직의 연(年)매출액이 더 많았다니까 말이야. 하여튼 우리 후손들이 훌륭한 할아버님을 만나 덕을 보니까 이렇게 그 코스트도 치르는 게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지. 부자가 된 값을 우리 집안에서 톡톡히 치르는 거라고 생각해.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 집안은 친일파하고는 거리가 멀어. 우리 집안을 친일파라고 하는 공작은 일제 시대부터 좌익들이 오랫동안 책동해 온 거야.”


김한 회장이 잠시 말을 쉬었다가 계속했다.


“해방이 되자 거리에는 ‘친일반민족행위자 김연수를 처단하라’는 붉은 벽보가 막 붙었었대. 좌익들이 민족주의의 대표로 알려져 온 우리 할아버님을 공격한 거지. 좌우 대립이 심한 1948년에 우리 아버님 김상협이 고려대학교 교수였는데, 그때 교수들의 98퍼센트가 좌익이었다고 그래. 그때 세상에서 보는 우리 아버지는 지금으로 치면 이병철(李秉喆) 회장의 아들인 이건희(李健熙)의 입장쯤 됐고 말이지. 빨갱이들이 우리 집안을 친일파로 몰아서 공격들을 했는데 기가 막혔었다고 그래.


그때 우리 할아버님이 친일파로 몰려서 감옥에 가고 반민특위 재판부에서 재판을 받으셨지. 그러자 평소 신세지던 사람들이 발길을 딱 끊더라는 거야. 그게 세상 인심이지. 할아버님은 재판을 받고 정식으로 무죄가 선고됐는데, 60년이 훌쩍 지난 지금 이제는 할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없으니까 후손인 우리들을 재판해서 재산을 빼앗자는 건데 이게 민주국가의 법 맞아?”


그때까지 듣고만 있던 80대 중반의 김상돈(金相敦) 옹이 조용히 손을 들어 문중사람들을 진정시켰다. 그는 문중회의에 참석한 윗대의 최고 어른이었다.


“해방 후 좌우대립이 심할 때 이런 일이 있었고, 좌파정권에서 다시 우리 집안이 공격을 당하는 거야. 앞으로 남북통일 시 북한이 주도권을 잡으면 이런 일이 또 있을 거야.”


까랑까랑한 어조로 말을 하는 노인은 잠시 생각을 하는 듯 말을 멈췄다가 계속했다.


“내가 어려서부터 옆에 있었지만 아버님은 절대 친일파가 아니야. 사실 아버지는 정무총감 같은 높은 일본 사람들을 사업상 많이 아셨지만 좋아하지 않으셨어. 성북동 우리 집에 일본 사람을 초청한 일이 없거든. 또 창씨개명도 하지 않으셨잖아? 아버님은 일본에 출장을 가실 때도 트렁크에 꼭 한복을 챙겨가셨지 절대 유카타나 하오리를 입으신 적이 없어. 일제시대 많은 사람들이 진짜 본토 일본인이 되려고 난리였을 때인데 말이야. 그런데 우리 아버님은 달랐어. 내가 기억하기로는 독립자금도 많이 대신 분이야. 아버님은 김좌진(金佐鎭) 장군도 도와주고 박헌영(朴憲永)도 우리 줄포정미소에 숨겨줬어. 그렇지만 그런 것들은 증거가 없으니까 말할 수는 없겠지. 사회주의자들에게 준 돈까지도 사실은 전부 우리 아버님한테서 나온 돈이야.”


80대 중반의 노인은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한 것 같다. 뭔가 기억의 저편에서 끄집어내려고 애쓰는 표정이었다.


“참, 아버님이 해방 후 감옥에서 하시던 말씀이 생각나네.”


노인은 갑자기 생각이 떠오른 듯 한마디 했다.


“뭔데요? 작은아버님.”


사회자 김한 회장이 물었다. 문중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노인에게 쏠렸다.


“아버님이 그렇게 여러 사람을 도와주고 수만 명에게 일자리를 줬는데도 해방 후 구속이 되니까 혹시라도 연루가 될까봐 찾아오는 사람이 없더라는 거야. 그때 인촌(仁村) 큰아버님이 한민당(韓民黨) 총무로 계셨었지, 집안에선 그래도 믿을 분이 거기뿐이잖아? 그런데 인촌 큰아버님 측근들은 인간 벽을 쌓고 우리가 큰아버님을 못 만나게 했어. 인촌 선생이 앞으로 이 나라를 이끌어갈 큰 중책을 맡을 분인데 동생의 친일문제로 흠이 생기면 안 된다는 거였지. 우리 집 입장에서는 정말 섭섭했어. 그후에 아버님이 무죄를 선고받고 나니까 이번에는 형이 부통령이고 실력자니까 동생을 빼냈다고 억지소리를 하더라구.”


회의가 끝나가고 있었다. 일을 추진할 대표로 세 명이 선정됐다. 창업자 김연수 회장의 맏아들 쪽에서 종손인 김병휘 교수, 차남인 김상협 총장의 아들인 김한 회장, 김상돈 옹의 아들인 김병진 회장이었다. 사회를 보던 김한 회장이 나를 보면서 물었다.


“우리 할아버님을 변호할 수 있어?”


단번에 대답할 입장이 아니었다.


“아직 잘 모르지만 정말 친일파라고 생각이 들면 변호를 맡을 생각이 없는데.”


입장을 분명히 했다. 재벌에 돈으로 양심을 파는 변호사는 하지 않아 왔기 때문이다.


“우리도 할아버님이 진짜 친일파라고 생각한다면 사건을 맡기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한번 우리 할아버님을 객관적으로 보고 결정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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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TV] 친일(親日)마녀사냥 -죄 없는 자 있으면 돌을 던져라
조갑제닷컴 조갑제TV 2017년 6월30일, 광화문에서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와 '친일마녀사냥'의 저자 엄상익 변호사와의 대담 [조갑제TV] 친일(親日)마녀사냥 -죄 없는 자 있으면 돌을 던져라
조갑제TV
020 1K hour 16min



<헤밍웨이의 전쟁소설 ‘무기여 잘있거라’의 주인공 프레데릭 중위는 전선에서 후퇴하던 중 이탈리아군 헌병들이 이탈리아軍 중령을 처형 직전에 심문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 심문자(헌병)들은 ‘사격은 하지만 사격은 받지 않는’ 이탈리아 군인들의 그 모든 능률성과 침착함과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소속 여단은?”
그(중령)는 대답하였다.
“연대는?”
그는 대답하였다.
“연대에서 왜 이탈하였나?”
그는 대답하였다.
“장교는 부대와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나?”
그는 안다고 말하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다른 헌병장교가 말하였다.
“너같은 놈 때문이다. 야만인들이 조국의 신성한 국토를 짓밟게 만든 것은 바로 너같은 놈들이다.”
“선처를 바랍니다”라고 중령이 말하였다.
“우리가 승리의 열매를 놓친 것은 네놈들의 반역 때문이다.”
“당신들은 후퇴해 본 적이 있소?” 중령이 물었다.
헌병은 총살집행을 위한 총은 쏘지만 전투에 참여하여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지는 않는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총에 맞을 일도 없고 후퇴의 경험도 없다. 그들은 죄의 유혹을 받은 적이 없으면서 죄에 굴복한 자를 단죄(斷罪)하는 성직자와 같다. 헌병들이 사용하는 ‘신성한 국토’와 ‘승리의 열매’같은 애국적인 어구(語句)는 조개껍질처럼 공허한 것이어서 “후퇴해 본 적이 있는가?”라는 중령의 말 앞에서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헌병들의 용감한 말은 실제 상황과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중령의 질문은 핵심을 찌르기 때문이다. 행동과 경험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추상적인 이론이나 명분은 객관적인 사실에 부딪히면 오판(誤判)을 가져오기 쉬우며 인류사는 너무나 많은 오판의 사례를 보여준다. 중령은 이러한 오판의 희생자이다.
盧武鉉과 그의 동류(同類)인 386은 일제시대에 살기는커녕 태어나지도 않았고 세계최빈(最貧)의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강국으로 변한 건설과정에 땀 한 방울 흘리지도 않았으면서 이승만과 박정희 등 시대의 짐을 지고 고난의 세월을 살아간 사람들에게 총질을 마구 해대는 미친 ‘헌병’들이다.>

대한민국이 딛고 있는 문명 건설의 주인공들을 주로 골라내어 주홍글씨를 새긴 듯한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은 저승에 있어 항변이 불가능한 영혼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중세의 마녀사냥보다 더 비열하다. 이 책을 다 읽으면 마녀사냥꾼들의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로베스피에르, 자베르, 일제 고등계 형사, 그리고 헤밍웨이의 헌병을 합성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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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조선 NewsRoom Exclusive 기사 프린트


애국자 김성수(金性洙) 선생에게 준 훈장을 박탈한 이 정권!
김성수가 친일파라면 나는 매국노일 것이다


글 조갑제 조갑제닷컴 대표
2017년 7월 12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에서 고려대 학부, 일반대학원 총학생회, 민주동우회 등 참석자들이 학교 내 인촌 기념시설 철거를 요구하고 있다. 사진=조선일보
동아일보 설립자, 고려대학교 운영자, 최초의 주식회사 경성방직 설립자, 그리고 한국 보수 정치의 원류인 한민당 창당의 주인공, 제2대 부통령 김성수(金性洙) 선생. 대한민국이 그에게 수십 년 전에 수여하였던 훈장을 이 정부가 박탈하였다. 친일파라는 이유이다. 김성수가 친일파라면 나는 매국노일 것이다. 일제 시대 온갖 수모와 탄압을 받으면서도 교육, 기업, 언론사업으로 민족혼을 지켜가면서 후일을 기약하였던 인물이고 해방 뒤에는 공산주의와 싸우는 데 앞장섰던 애국자를 친일파로 모는 것은 역사 이전에 인간에 대한 모독이다. 김성수와 그의 동생 김연수(金秊洙)를 다룬, '친일마녀사냥'이란 제목의 책을 쓴 엄상익(嚴相益) 변호사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친일(親日)마녀사냥에 대한 도발적 질문

趙甲濟


공고판에 효수된 사람들

출판 편집자로서 엄상익(嚴相益) 변호사의 원고를 읽는 며칠간은 행복하였다. 새로운 사실이 주는 흥미뿐이 아니었다. 철 지난 친일(親日)마녀사냥에 대한 분노, 통쾌한 반론, 그리고 인간과 역사에 대한 따뜻한 시선(視線)이 때로는 문학적 표현으로 장대한 역사 드라마에 녹아 있었다.

<문 옆의 벽에 공고판이 보이고 두툼한 서류뭉치가 마치 밧줄에 목이 매달린 사형수처럼 줄에 걸려 있었다. 위원회에서 친일파로 결정한 명단이었다. 누구든지 와서 그 이름들을 보라고 공고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명단을 들춰 보았다. ‘서춘, 장덕수, 진학문, 모윤숙, 노천명’ 등 귀에 익은 이름들이었다. 서춘(徐椿)은 학생시절 동경에서 2·8 독립선언을 주도하였고 동아일보 기자를 했던 인물이다. 장덕수(張德秀)는 민족의 지도자로 인기가 높았다. 진학문(秦學文)도 기억에 떠올랐다. 일제 시대 타고르를 만나 한국을 위한 시(詩)를 써달라고 조르던 문학청년이었다. 노천명(盧天命) 시인의 시 ‘사슴’은 국어교과서에 나와 있었다. 그는 외롭고 쓸쓸하게 죽었다. 맑은 영혼을 가졌던 그 사람들이 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 그 이름들이 위원회의 공고판에 효수(梟首)되어 있는 것일까.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文明 개화의 주역들

대한민국 대통령 직속이었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적용하여 조사, 2009년 11월 27일 국회에 보고한 전시(戰時·中日·태평양전쟁) 기간 중의 反민족 행위자 705인의 명단에는 친숙하거나 존경받던 이름들이 많다.

尹致昊, 金錫源, 白善燁, 宋錫夏, 申應均, 申泰英, 申鉉俊, 李鍾贊, 洪思翊, 金秊洙, 金性洙, 朴興植, 金活蘭, 張德秀, 方應謨, 盧基南, 白樂濬, 申興雨, 崔麟, 李卯默, 崔南善, 金基鎭, 金東仁, 金東煥, 盧天命, 毛允淑, 徐廷柱, 兪鎭午, 李光洙, 李無影, 張德祚, 鄭飛石, 朱耀翰, 蔡萬植, 崔載瑞, 崔貞熙, 柳致眞, 李瑞求, 玄濟明, 趙澤元, 金基昶, 金殷鎬, 金仁承.

컴퓨터에서 한자(漢字) 이름을 찾으면 자동 검색이 되는 이들이다. 3·1운동 선언문 작성자 및 주동자,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사람, 낙동강 전선 다부동 전투의 영웅, 일제하에서 일종의 정부 역할을 하였던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 사장, 이화여대와 연세대학 총장, 한국어를 아름답게 가꾸고 고난의 시기에 한국인의 마음을 감싸주었던 시인과 소설가들(최초의 현대 소설과 현대 시의 작가 포함), 교과서를 통하여 익숙해진 명문장가들, 작곡가, 극작가, 화가, 무용가, 대주교, 그리고 기업인들.

개화기, 식민지배기, 건국, 호국, 근대화의 시기에 이 나라의 주역 내지 조역이었던 그야말로 기라성(綺羅星) 같은 이름들이다. 가히 문명 개화의 주인공들이다. 민족기업, 민족언론, 민족대학으로 통하던 민족진영의 핵심인물들이 거의가 사후(死後)에 자기 변론의 기회를 얻지도 못하고 ‘반(反)민족행위자’로 저격된 것이다. 이들은 우리가 오늘 누리는 근대 문명의 중요한 요소를 이루는 각 분야의 개척자들이다. 개척자들이란 처음 해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시행착오가 유달리 많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산업혁명이 가장 늦었던 나라에서 그것도 일제(日帝)의 압제 속에서 주로 서구(西歐)에서 발전된 새로운 기술과 사조(思潮)와 예술을 받아들여 뿌리를 내리게 하는 일이 순리대로 소신대로 윤리대로 되었을 리가 없다. 이들 한국 근대화의 주역들은 나침반 없이 탐험에 나선 이들이었다. 이들의 개척과 탐험을 도와줄 국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장수는 이미 항복하여 적국(敵國)의 지배층에 편입, 안주하고 있었다. 장수를 따르던 백성들은 극지(極地)에 버려진 존재였다. 생존이 이들의 1차적 의무였다. 한반도를 벗어나지 않는 한 현존하는 권력과 제도를 떠난 생존은 불가능하였다.


“그들이 제일 미워하는 건 대한민국”

‘반민족행위자’는 쉽게 줄이면 ‘역적’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이런 ‘역적들’이 없었으면 공산화되었거나 경제적으로 일본에 종속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이들 反共과 克日의 공로자들은 왜 역적으로 몰린 것일까?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 위원이었던 역사학자 이명희(李明熙) 교수는 엄상익 변호사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위원회에서 나와 한 교수를 빼놓고는 모두 좌파죠. 그들이 제일 미워하는 건 대한민국입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을 세운 사람들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몰아버렸죠.”


계급 투쟁론에 기초한 세계관, 역사관, 인생관

이유가 간단해진다. 대한민국을 미워한다는 말은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하여 피, 땀, 눈물을 흘린 이들을 미워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체로 계급투쟁론에 기초한 세계관, 역사관, 인생관을 가졌다.

“(위원회의 주류인 좌파들은) 민중사관이나 운동사관에 입각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독립운동이나 혁명운동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다’ 이런 논리죠.”
엄 변호사가 위원회 조사팀장에게 물었다.
“구조론이 뭡니까?”
“사회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일종의 혁명론이죠.”
“개인적으로는 양심적이라도 상부구조에 있으면 친일파로 척결되어야 한다는 게 구조론 같던데….”
“맞습니다. 백정 출신들이 일제시대 순사보가 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친일반민족행위자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생계용 친일파라 봐준 겁니다.”


21세기의 마녀사냥

엄상익 변호사는 이 책을 통하여 한국 사회에 몇 가지 핵심적 질문을 던진다.
● 일제시대는 과연 암흑시대였나? 그때도 행복한 사람이 있었고, 역사는 발전하였으며, 문명은 건설되었다. 1930년대의 경성이 지금의 평양 같았단 말인가?
● 장수(고종)가 항복하였는데 졸병이 죽을 때까지 저항하지 않았다고 벌을 줄 수 있나? 초인(超人)이 못되었다고 단죄할 수 있나?
● 살아본 사람들은 김연수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민족기업인으로 칭송하였는데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도 지킬 수 없는 잣대를 들이대어 단죄하려는 것은 오만 아닌가?
● 그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훈장을 준 대한민국과 그를 민족반역자로 몬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인가?
● 인간은 과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사는 게 생존의 목표인가?

‘親日’이란 말 앞에선 얼어붙는 지적(知的) 풍토에서 일찍이 어떤 지식인도 발설한 적이 없는 도발적 질문이다. 이 책은 이 질문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런 질문은 60년 전에도 있었고(반민특위 검찰의 공소장), 그것에 대한 정답(반민특위의 판결)도 나왔다.

문제는 좌파정권이 들어서자 그 정답이 틀렸다면서 심판을 다시 하자는데, 피고석에 앉아야 할 사람은 죽었고, 심판자는 일제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었다. 역사를 체험이 아닌 관념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의 오만과 편견이, 항변할 수 없는 영혼을 심판하는 불공정 게임이 되고 말았다. 21세기의 마녀사냥인 것이다. 엄상익 씨는 그런 궐석 재판의 영혼 변호를 한 셈이다.


역사적 문서

이 책의 주인공인 김연수(金秊洙)는 동아일보 설립자이자 정치인인 형 김성수(金性洙)에게 가려져 대중적으로는 덜 알려진 기업인이다. 나는 그를 ‘한국 자본주의의 개척자’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데 60년 전 재판부도 그를 ‘민족기업인’이라 평가하였다. 이 책을 관통하는 가치관과 논리적 대결의 뼈대는 1949년 반민특위 재판부(단심제)의 무죄 선고 對 60년 뒤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의 ‘반민족행위자’ 결정이다.

1949년 8월6일 반민족행위처벌 특별재판소 제3부(재판장 徐淳泳)는 경성방직 전 사장 김연수 피고인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 판결문은 친일 행위를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단죄(斷罪)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역사적 문서이다. 대한민국이 세워진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였을 日帝시대의 행위에 대하여 형사적 책임을 묻는 데 즈음하여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고민이 느껴진다. 이 판결문에는 인간의 숨결과 성숙된 역사관과 균형감각이 스며 있다.


‘反民族’ 개념은 초법적(超法的)

판결문은 먼저 국가가 없던 일제시대 조선인의 행위를 반민족행위처벌법으로 단죄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재판장은 <反민족행위라는 것은 反국가행위와는 다소 이념을 달리하는 윤리적 관념으로서 19세기 이래 발전된 민족주의를 그 사상적 배경으로 한 것인 만큼 이것을 법률적 규범으로 파악하기는 자못 곤란한 점이 없지 아니하나(하략)>라고 서두를 열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되어 없어진 상황에서, 더구나 그 지도부가 저항을 포기한 상태에서 비무장 상태의 조선인이 현존하는 권력인 日帝에 협력한 행위를 ‘反국가행위’, 즉 반역죄로 처벌하는 것은 논리상 불가능하다. 조국이 없는 조선인들은 일본이냐 대한제국이냐의 선택을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일본 지배에 순응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의 선택뿐이었다.

국가가 없던 시절의 행위를 처벌하기 위하여 ‘반민족행위’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 이는 통상적인 법적 기준이 아니다. 서구에서 발전한 민족주의를 근거로 삼은 기준이다. 한국어엔 ‘민족’이란 낱말조차 없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서양문물을 도입할 때 영어의 Nation이나 독일어 Volk를 ‘민족’이라고 번역하면서 소개된 외래 개념인 것이다.

그렇다면 재판의 지침이 되어야 하는 민족주의의 가치는 무엇인가? 재판부는 이렇게 설명한다.

<민족의 긍지와 순결을 위하여 그 단결을 공고히 하고 그 도의(道義)를 앙양하여서 정치적으로는 자주의 정신을 고취하고, 경제적으로는 자치의 기초를 확립하여 세상의 여하한 경우에 봉착하더라도 민족적으로 사생동수(死生同守)의 대의를 지키자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3·1운동이야말로 이런 정신을 체현한 것이라고 예시(例示)하였다.

재판부는 여러 나라의 민족운동의 역사를 보면 상황이 악화될 경우 <결국 대중은 부지불식(不知不識)의 사이에 민족의 대의(大義)보다 自我의 구출에 급급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드물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떤 자세로 민족반역행위를 단죄할 것인가. 재판부는 엄격하되 신중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다.


“민족 전체를 죄인시하면 안 된다”

<우리는 모름지기 엄숙한 자기반성과 냉철한 사적(史的) 고찰에 입각하여 민족 전체를 죄인시하는> 자세를 피하고 世人이 입을 모아서 죽여도 좋다고 저주할 정도로 악질적인 행위를 한 자만을 가려내어 벌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처벌 대상자에 대하여 구체적 개념 규정을 내린다.

<敵의 세력을 필요 이상으로 이용하여 동족을 박해하였거나 자신의 영예를 위하여 직권을 남용하고 동족을 희생케 하였거나 민족적 비극이 목첩에 있는 무자비한 정책임을 알면서도 일부러 敵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자진 아부한 자>를 처벌 대상인 ‘악질적 反民族 행위’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또 <反民族 행위가 원래 법률 이전의 관념이지만 이것을 법률적 수단에 의하여 처리코자 하는 이상 모든 것을 법률적으로 이해하는 외에 다른 요구가 있을 수 없>다고 못박았다. 有無罪를 판단함에 <형사책임의 일반이론을 좇>아서 할 뿐이고, 자구에만 구애 받아 그 해석을 멋대로 할 순 없다고 했다.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 이뤄진 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초법적(超法的)인 면이 있으므로 인권유린이나 권력남용을 피하려면 오히려 형사소송법이 규정한 증거주의 등 사실 확인의 과정을 정확히 지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초법적인 역사 재판일수록 법치주의에 입각해야 무리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요약하면 인민재판 식 親日 斷罪論을 경계한 것이다. ‘민족’을 흉기화하여 대한민국 건설자들을 단죄하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로 써먹는 작금의 풍조를 예견한 것인가.


“직위가 아니라 행동으로 판단해야”

판결문은 또 日帝시대에 어떤 직위에 있었는가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뜻이 아니고 <그러한 지위와 신분이었던 자는 反民族의 개연성이 있다는 개괄적 규정>으로 보고, 그러한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하였는가를 따져서 판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日帝 때 활동하였던 사람들을 직위에만 근거, 획일적으로 범죄 유무를 판단하여선 안 된다는 경고이다. 형식보다는 내용, 즉 직위가 아니라 행동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뜻이다.

반민특위 검찰이 김연수(金秊洙)를 기소한 이유는, 피고인이 경성방직의 사장 등 15개 회사의 중역을 거쳐 조선 실업계에 상당한 권위와 존재를 보유하면서, 관선 도의원, 만주국의 京城 주재 명예 총영사, 중추원 칙임(勅任)참의 등에 임명되었고 청년학도의 출정을 권유하는 등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하였다는 것이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런 형식적인 면보다는 그가 무엇을 하였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서 판단하였다고 밝힌 뒤, 검찰 신문과 재판 증언에서 드러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김연수의 일제(日帝) 때 행위는 ‘이런 것’이었다고 요약하였다.

<피고인은 교토제국대학의 경제학부를 다닐 때부터 일생 실업인으로 종시(終始)하여 조국의 장래에 기여하겠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연구를 거듭하던 끝에 기미운동의 자극을 받아 한인(韓人)의 손으로 설립 경영하던 경성방직이 재정난으로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이를 인수 경영하기로 하고 전무취체역으로 입사한 것이 효시(嚆矢)이다.>


민족자본으로 키운 근대 공업의 맹아(萌芽)

여기서 판결문은 김연수가 일본의 대기업과 경쟁하면서 경성방직을 발전시킨 점을 높게 평가한다. <경방이야말로 민족적 자본과 민족적 정열을 근저로 한 근대적 경공업이 조선에 수립되던 맹아(萌芽)인 만큼> 일본의 큰 회사들이 눈엣가시로 생각하여 압박하는데도 <밖으로 강적과 싸우고 안으로 빈곤에 울면서> 회사를 파산의 위기에서 구하고, 오랜 신고(辛苦) 끝에 기술을 습득, 연간 생산 면사(綿絲) 200만 관(貫), 광목 80만 필의 대회사로 키웠다는 것이다. 뿐 아니라 <일본 방직 회사들의 대공세에 대항하기 위하여 경방을 능가할 정도의 남만방적을 봉천에 설립한 것 등 그 공적은 적다고 볼 수 없다>고 평가했다.

재판부는 경성방직을 키운 김연수의 역할을, 자본주의 불모지대에서 민족적 자본과 정열을 모아 한국 자본주의의 맹아(萌芽)를 만든 선구자로 그리면서, 일본 대자본의 위협에 직면하여 민족적 기술과 투자로 이를 극복해낸 민족기업인이라고 판단하였다. 김연수의 기업활동을 경제 부문에서 이룬 항일(抗日)운동으로 해석한 셈이다.

판결문은 김연수가 경영하던 경방이 ‘결코 민족정신을 버리지 않은 증좌(證左)’를 몇 가지 들었다.
● 정치적 경제적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만만(滿滿)한 투지(鬪志)로써 일본 자본에 매수되거나 타협하지 않은 점
● 경방 주권(株券)에 태극기 도안을 넣어 민족혼을 상징한 점, 생산광목 포스터에 태극기를 상표로 한 점


“일제 말기 전시(戰時)엔 자유 의사가 통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공직(公職)에는 나아가지 않는다는 신조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와서 약간의 公職에 이름이 나게 된 것은 개인의 자유 의사가 용납되지 않은 日帝의 강제조치 때문이었다는 피고인의 변해(辯解)에 대하여 ‘수긍할 점이 없지 아니하다’고 했다. 판결문은 日帝가 일방적으로 발표한 관직에서 김연수가 사퇴하기 위하여 노력한 사실들을 열거하였다. 조선인 청년들에게 출정을 권유하였다는 기소 사실도 인정하지 않았다.

<도쿄 출장은 당시 총독의 명령으로서 자의(自意)가 아닐 뿐더러 강연 당시에도 저성(低聲)으로 밑만 바라보고 학생출정의 필요성을 이론적으로 역설한 것이 아니요 오직 소위 유세단이 도쿄까지 오게 된 경위를 말한 정도이었으며 강연을 마친 후에는 즉시 순천향 병원에 입원하였다.>
판결문은 일제 말기 戰時 상황에서 빚어졌던 이른바 친일행위에 대한 판단에 기준이 될 만한 언급을 남겼다.

<요컨대 본건 공소사실은 모두가 피고인의 자유의사에서 결과된 사실이 아니요, 당시의 정치적 탄압(전쟁 말기의 정치 성격은 公知의 사실)과 사회적 협박으로 말미암아 항거키 어려운 주위 사정에 반사적으로 취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 점이 인정된다.>

지금 한국에선 中日전쟁과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제의 통제가 강화된 가운데서 일어난 수동적 친일행위에 대하여 더 가혹하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의 오만과 위선을 60년 전 반민특위 재판부가 미리 경계해 둔 것 같다.

판결문은 피고인 김연수가 일제 때 민족 교육 및 사회사업을 위하여 기여한 긴 목록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균형감각과 종합적 시각(視角)에서 한참 벗어나 日帝 협력 행위만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려는 요사이 행태와 대조적이다.


잘한 점도 봐준 판결

● <기미운동의 책원(策源) 장소이며 광주학생 사건의 본영적 학교인 중앙중학교 및 보성전문(고려대학의 前身)을 운영하는 재단법인 중앙학원에 현금 250만 원과 田地 97정보를 기증하여 경영의 기초를 삼게 하고, 8개 중학교, 11개 소학교, 기타 교육단체 및 학생단체에 전지 629정보, 현금 370만 원 기부, 養英會를 통하여 학교에 수백만 원의 연구비 및 수백 명에게 장학금 지급, 李升基 공학박사 외 다수의 학자 배출, 경방 및 南滿紡績 출신 기술자로서 대한민국의 섬유공업회사(敵産)를 관리하는 이가 34명, 기타 재해 구휼(救恤), 체육보급, 종업원 복지증진을 위한 사회사업 등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
● 경방의 방계 회사로서 금융, 製絲, 정미, 농사 등 회사를 설립, ‘민족적 산업개발을 위한 선구적 역할’.
● 중앙 및 고려 두 학교를 졸업한 6000~7000명의 문화인, 그리고 <현 섬유공업계의 기술진영 편성이 가히 京紡의 독담장(獨擔場)이 되어 있는 사실 등은 피고인의 교육산업 및 사회방면에 끼친 공적으로서 특기할 가치가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판결문은 김성수, 김연수의 선친인 김경중이 <조선문화와 민족사상의 발양에 이바지하고자 단기 4269년부터 전후 18년의 세월을 소비하여 비밀리에 조선사 17권 1질을 편찬, 이것을 사립학교, 향교 등에 무상 배부한 사실>도 기록하였다. 판결문은 이어서 <자녀와 질(姪) 십수 인에 대하여는 한 사람도 왜정의 관공리로 취직케 한 사실이 없음>도 적시하였다.


‘장려(推奬)할 공적뿐’

재판부는 결론 부분에서 법적 판단을 이렇게 정리하였다.
<피고인의 性行, 사업, 사상, 家庭이 이와 같을진대 우리는 피고인의 공적을 추장(推奬)할 무엇이 있을지언정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위하여 同族을 구박하고 명예와 지위를 위하여 독립정신을 방해한 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할 논거는 없으며 피고인의 과거 공적을 보아 소위 장공속죄(將功贖罪)의 관용을 施할 수 있거든 하물며 본건 공소사실은 前段 인정과 같이 먼저 犯意의 점에 있어서 이를 肯認할 만한 자료가 없으니 그 악질 여부를 究明할 여지도 없이 결국 증거 불충분에 귀착되지 아니할 수 없으므로 형사소송법 제362조에 의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하노라.
단기 4282년 8월6일
반민족행위처벌 특별재판소 제3부
재판장 재판관 徐淳泳
재판관 李春昊
재판관 崔國鉉
재판관 申鉉琦
재판관 鄭弘巨>


재판장의 아들

엄상익 변호사는 故人이 된 서순영 재판장이 어떤 사람인가를 추적한다. 무죄 선고를 음모론으로 해석하기 좋아하는 이들을 의식한 것이다. 원로 법조인의 소개로 아들을 만났다. 교장 출신의 서주성 씨다. 그는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만든 것”이라며서 문집 두 권을 嚴 변호사에게 건네주었다.
“강직한 분이었습니다. 여론을 거슬러가면서 소신대로 판결하였습니다. 李承晩 대통령이 부산에서 장기집권을 위하여 정치파동을 일으켰을 때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가 법관직을 그만두셨습니다. 반민특위 당시 대법원장은 김연수 씨에게 유죄를 선고하라는 쪽이었는데 아버님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서순영 변호사는 아들에게 김연수에 대하여 이런 평을 남겼다고 한다.
“경성방직 제품에 태극성이라는 상표를 붙인 걸 보고 민족정신이 있는 분이구나 느끼셨답니다. 누구나 공부를 좀 하면 관직에 나가고 싶어할 때인데 김연수 사장한테서는 그런 것을 볼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일제 말기에는 일본으로 기울어진 행동을 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해방이 되자마자 독립운동을 했다는 애국자가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며 악질적인 친일파만 처벌하는 선에서 그치는 게 좋다고 하셨어요.”


“인간의 생존 목표가 국가와 민족이어야 하나”

서순영 재판장과 대척점에 있는 이는 60년이 지나 김연수에 대한 무죄선고를 부정하는 결정을 내린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핵심 위원인 박연철 변호사이다. 엄상익 변호사는 경기고등학교 선배인 그를 찾아가 논쟁을 벌이고 그 기록을 이 책에 실었다. 위원회가 어떤 논리로 민족기업인을 민족반역자로 판단하였는지 잘 알 수 있게 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이 논쟁에서 엄 변호사는 주로 듣는 쪽이지만 간간이 하는 질문이 날카롭고 도전적이기까지 하다. 토론에서는 답보다 질문이 더 어렵고 중요한 경우가 많다.

“1910년 한일합병 당시 집에 일장기를 걸었다면 친일행위지만 1930년대 戰時의 일본 경축일에 걸었다면 달라지는 게 아닐까요?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출전한 걸 비난 못하지 않습니까?”
“저는 김연수 회장만한 민족기업인이나 경제 분야의 독립운동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육과 문화에도 엄청난 돈을 기부하였고, 민족에 현실적으로 그만한 도움을 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단죄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인간이 생존하는 이유가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일까요? 개인을 희생해서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보전해야 한다는 국가주의 민족주의는 우리 헌법이나 특별법이 추구하는 논리가 아니라고 보는데요. 그건 또 다른 전체주의적 역사관이 아닐까 합니다.”

박연철 변호사의 다음 이야기는 경청할 만하다.
“우리가 조사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은 당대의 선각자, 지식인, 유산층 등 지도적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야. 그들은 해방 후에도 지도자로 생활한 사람이 많아. 그들의 행적을 철저히 파헤치는 건 우리가 나라를 잃게 될 경우 우리나라의 동량(棟梁)이 되어야 할 인사들이 어떻게 변모했는가 그 비극적인 행태를 철저히 인식시키려는 데 있는 거지.”

우리가 나라를 잃게 될 경우를 타산해 보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핵무장한 북한정권에 대한민국이 합병당하는 모양새이다. 위원회의 이념적 성향으로 보아 그런 경우를 상정(想定)한 것 같지는 않는데 누가 아는가, 親北派가 親日派보다 더한 규탄의 대상이 될 날이 다가오고 있는지를.


주홍글씨

엄상익 변호사는 김연수에 대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내린 국가기관을 상대로 한 행정 처분 취소 소송에서 이렇게 변론하였다.
“민족 공동체에는 이왕 받은 상처에 소금을 끼얹는 아픔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선 친일파로 낙인 찍히면 갈 곳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자손까지 주홍글씨가 새겨진 옷을 입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기관인 위원회가 편향된 목적을 설정하고 진실을 왜곡함으로써 역사의 권력화 현상을 초래하였습니다. 위원회는 과거를 현재의 목적에 맞추어 이용한 면이 있습니다. 과거는 과거라는 공간 속에 두고 보야야지 현재의 눈높이와 정치적 의도에 맞추어서는 안 됩니다.”

엄 변호사는 책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라를 빼앗긴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눅 들고 그 회한을 가슴속에 새기면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산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일제가 강요하는 일정한 활동을 하였다고 해서 민족을 잘못 인도한 민족반역자처럼 단죄하는 것은 후 시대인 오늘을 산다는 특권만으로 그들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 같았다. 그런 편견은 한 개인이나 학자의 의견이라도 지탄 받을 수 있다. 국가인 대한민국이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은 지나친 것 같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아이가 어른을 재판하는 것 같다”고 비판하였다. 노기남 대주교에 대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에 대한 논평이었다.>

엄 변호사는 위원회가 모범으로 삼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에서 있었던 부역자 단죄는 경우가 다르다고 지적한다.
<나치 치하 짧은 기간 벌어진 일들과 한 세대가 넘는 36년간이 이어진 일제 식민 상황 속의 절망적 행동과 맞비교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상과 당위라는 잣대로 당시를 보면서 조선 사람들에게 超人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프랑스에서도 9000명을 약식으로 처형한 데 대한 반성이 있다.>


‘아무리 자료를 내도 안 읽는다면…’

2010년 행정법원은 원고의 청구를 기각, 김연수에 대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을 유지하였다. 엄상익 변호사는 이렇게 개탄한다.
<재판을 시작할 때의 재판장 말이 떠올랐다. 다른 재판부에서 유사한 사안이 결론 나 있는, 간단한 사건이라고 그는 말했었다. 그는 역사문제에 대해 그리고 김연수라는 한 인물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 같았다. 솔직히 내가 낸 증거자료들이나 주장들을 그 판사들은 읽지 않았을 것 같았다. 아무리 자료를 제출해도 눈을 빤히 뜨고도 그걸 읽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며칠 후 판결문이 왔다. 60년 전의 무죄 판결을 뒤집는 행정법원의 논지는 이러하였다.
<식민지배 하에서라도 기업인이 자신의 기업 활동을 위하여 식민통치에 도움이 되는 행위에 가담했다는 것은 내심의 동기가 어떠하였는지에 불구하고 비난 받아 마땅하다. 중추원 참의 등 그 관직에 나아간 자체가 이미 적극적 주도적으로 日帝에 협력하혔다는 점이 추정되는 것이다. 김연수의 중추원 참의 등 임명과 활동이 본인의 의지와 관계 없이 강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정은 보이지 않는다.>

이 판결의 논리라면 통일 후 북한에서 조선노동당 당원으로 활동한 약 300만 명 전원을 민족반역자로 처단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적 강압에 의한 굴복이었다는 항변은 ‘내심의 동기가 어떠하였던지 간에 그런 강압에 의하여 이뤄진 것이라는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로 간단히 무시될 것이다.
엄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일제시대라는 공기를 두르고 산 기업인으로서 그 시대를 지배하는 정권과 소극적 미온적으로 타협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런 행동은 법이 규정하는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엄 변호사는 항변한다.
“기업의 목표는 돈을 버는 것이지 항일(抗日)이 아니다. 抗日운동가에게 기업을 하지 않았다고 비판할 수 없듯이 기업인더러 항일운동하지 않았다고 단죄할 순 없는 것 아닌가.”
1949년 반민특위 재판부는 김연수가 기업활동으로 번 돈의 힘으로 한국인의 실력을 길러 일본을 이기는 방향으로 고차원의 抗日을 하였음을 인정하였다.


“당신들은 후퇴해 본 적이 있소?”

김연수라는 나라 잃은 조선인과 그가 살아갔던 비상한 시대의 명암(明暗)을 그려낸 엄상익 변호사의 글은 문학적 감동을 준다. 위원회와 재판부의 결정과 판결에서는 빠져 있는, 역사 속에서 숨쉬는 인간을 이 책에서 살려낸 덕분이다. 일제시대를 간단히 ‘암흑시대’로 규정하는 것은 이 시대를 치열하게 살면서 미래를 준비하고, 文明을 발전시켰던 우리의 先代에 대한 모독이며 역사 부정이고 무엇보다도 사실과 맞지 않는다는 점을 일깨운다. 그의 글을 읽다가 문득 생각 난 다른 글을 찾아내어 읽어 보았다. 《인간의 심연(深淵)》을 쓴 영문학자 박승용(朴承用) 선생이 노무현 정권 시절(2005년)에 조갑제닷컴에 기고하였던, 오래 여운이 남는 글이다.

<헤밍웨이의 전쟁소설 ‘무기여 잘있거라’의 주인공 프레데릭 중위는 전선에서 후퇴하던 중 이탈리아군 헌병들이 이탈리아軍 중령을 처형 직전에 심문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 심문자(헌병)들은 ‘사격은 하지만 사격은 받지 않는’ 이탈리아 군인들의 그 모든 능률성과 침착함과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소속 여단은?”
그(중령)는 대답하였다.
“연대는?”
그는 대답하였다.
“연대에서 왜 이탈하였나?”
그는 대답하였다.
“장교는 부대와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나?”
그는 안다고 말하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다른 헌병장교가 말하였다.
“너같은 놈 때문이다. 야만인들이 조국의 신성한 국토를 짓밟게 만든 것은 바로 너같은 놈들이다.”
“선처를 바랍니다”라고 중령이 말하였다.
“우리가 승리의 열매를 놓친 것은 네놈들의 반역 때문이다.”
“당신들은 후퇴해 본 적이 있소?” 중령이 물었다.
헌병은 총살집행을 위한 총은 쏘지만 전투에 참여하여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지는 않는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총에 맞을 일도 없고 후퇴의 경험도 없다. 그들은 죄의 유혹을 받은 적이 없으면서 죄에 굴복한 자를 단죄(斷罪)하는 성직자와 같다. 헌병들이 사용하는 ‘신성한 국토’와 ‘승리의 열매’같은 애국적인 어구(語句)는 조개껍질처럼 공허한 것이어서 “후퇴해 본 적이 있는가?”라는 중령의 말 앞에서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헌병들의 용감한 말은 실제 상황과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중령의 질문은 핵심을 찌르기 때문이다. 행동과 경험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추상적인 이론이나 명분은 객관적인 사실에 부딪히면 오판(誤判)을 가져오기 쉬우며 인류사는 너무나 많은 오판의 사례를 보여준다. 중령은 이러한 오판의 희생자이다.
盧武鉉과 그의 동류(同類)인 386은 일제시대에 살기는커녕 태어나지도 않았고 세계최빈(最貧)의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강국으로 변한 건설과정에 땀 한 방울 흘리지도 않았으면서 이승만과 박정희 등 시대의 짐을 지고 고난의 세월을 살아간 사람들에게 총질을 마구 해대는 미친 ‘헌병’들이다.>

대한민국이 딛고 있는 문명 건설의 주인공들을 주로 골라내어 주홍글씨를 새긴 듯한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은 저승에 있어 항변이 불가능한 영혼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중세의 마녀사냥보다 더 비열하다. 이 책을 다 읽으면 마녀사냥꾼들의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로베스피에르, 자베르, 일제 고등계 형사, 그리고 헤밍웨이의 헌병을 합성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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