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17

[경술국치 100년] 조선인 강제노역 흔적 지우고 미이케 탄광 세계유산 추진 - 국민일보



[경술국치 100년] 조선인 강제노역 흔적 지우고 미이케 탄광 세계유산 추진 - 국민일보




[경술국치 100년] 조선인 강제노역 흔적 지우고 미이케 탄광 세계유산 추진
입력 2010-03-10 00:06



제1부 일본 3대 재벌의 전쟁범죄

③ 광산업 장악한 최대재벌 미쓰이


탄광은 일제의 강제노역 먹잇감이 된 조선인 노무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작업장이다. 강제동원 시기인 1938∼1945년 일본 본토에 끌려간 조선인의 약 45%가 각 기업체 탄광에 배치됐다. 단일 업종 가운데 가장 높은 비율이다. 노동 강도가 혹심하고 사망률이 가장 높은 작업장이 탄광이었기에 조선 청년들은 징용 전부터 ‘제발 탄광만은…’이라며 불안에 떨어야 했다.

조선인이 아무리 탄광을 피하도 싶어도 당시 광산업으로 몸집을 키워가던 일본 기업들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 중에서도 미쓰이 재벌 계열사 미쓰이광산이 운영하던 미이케탄광은 한때 일본 석탄 생산량의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손꼽히는 탄전(炭田)이자 조선인과 중국인 징용자가 많았던 곳으로 유명했다. 후쿠오카현 오무타시와 구마모토현 아라오시에 걸쳐 있는 이 탄광에 조선인 노무자 수천명이 있었다.

지난 1월 22일, 오무타역에서 재일본대한민국민단 간부인 재일교포 우판근(72)씨를 만나 그가 운전하는 자동차에 올랐다. 차를 타고 20분쯤 가자 ‘마와타리 공원’이 나타났다. 지금은 헐리고 없지만 이 인근에 조선인들이 묵었던 사택(舍宅), 즉 노무자 숙소가 있었다.

미이케탄광의 강제징용 역사를 오랫동안 조사해 온 우씨가 말했다. “마와타리는 지명인데, 한자로 ‘馬渡’입니다. 땅바닥에 물이 많아 진흙탕을 걸어 다니기 어려워서 말을 타고 다녔다고 붙은 이름이에요. 얼마나 살기 나쁜 곳에 조선인 숙소가 있었는지 알 수 있지요.”

1939년 건립된 마와타리 사택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고 징용 조선인들이 한 방에 30명씩 거주했다. 채탄 작업에 지쳐 누더기가 된 육신을 눕히던 거처. 본래는 15명만 겨우 누울 수 있는 면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30명씩 잤을까.

“2교대로 12시간씩 근무했어요. 15명은 일 나가고, 다른 15명이 자는 것이지요. 그래서 30명이 한 방에서 지내는 게 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아픈 사람이라도 생겨서 자리가 모자라면 어떡했는지 아세요. 미이케탄광 경영진으로 일했던 일본인 노인한테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병들어서 일을 못 나가 누워 있는 조선인 환자를 산 채로 우물에 집어넣고 덮개를 닫은 일도 있었다고.”

그 시절 조선인 노무자들은 고향을 그리며 사택의 구석진 벽에 일본인들 몰래 낙서를 했다. 한자와 한글을 아는 대로 섞어 ‘경기도’니, ‘고양군’이니, ‘자력갱생’이니 하는 낱말들을 비뚤비뚤한 글씨체로 새겨 넣었다. 공원 한쪽에 그 낙서를 사진으로 찍어 기념비로 만든 게 있었다. 건립문 글귀는 이렇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이케탄광에 조선인 수천명이 강제연행돼 가혹한 노동을 했다. 그 중 약 200명이 마와타리 사택에 수용돼 있던 중 망향의 염원이 담긴 낙서를 해놓은 것이 1989년 발견됐다. 조선인에게 막대한 희생을 가져다준 고통을 생각할 때 다시는 그런 행위가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 1997년 2월 오무타시.’

차를 돌려 미야하라갱 터를 둘러본 뒤 아라오시에 있는 만다갱으로 향했다. 미이케탄광에는 가장 많을 때 41곳의 갱이 있었는데, 지금은 이 두 곳의 갱만 제대로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1902년 문을 열어 1951년까지 존속한 만다갱이 주력갱 역할을 했다. 대부분 농촌 출신이었던 조선인들은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됐을까. 이에 대해서는 미이케탄광 인사과장으로 일했던 도미타 와타루(1918년생)라는 인물이 우씨에게 남긴 증언이 있다. 정년퇴임 후 시집 ‘오수(午睡)의 꿈’을 내는 등 시인으로 활동했던 그는 우씨를 1993년 2월 27일 만나 이렇게 털어놨다.

“내가 조선 현지에 직접 가서 사람들을 데려왔다. 여러 번 가서 총 4000명을 데려왔다. 말이 데려온 것이지 실제로는 잡아온 것이다. 갈 때마다 지역 면장, 일본 헌병 등 힘 있는 사람들에게 돈과 선물을 건네주고 협조를 받았다. 면 단위 시골 마을에 낮에 가면 남자들은 다 도망가 있었다. 그래서 밤에 갔다. 헌병과 함께 어떤 집에 침입하니 젊은 남자가 부인과 함께 잠자리에 있었다. 다가가서 일본도를 들이대고 잡아왔다. 길에서 지나가는 조선인을 잡아 트럭에 싣기도 했다.”

미이케탄광은 1997년 3월 마지막 갱구를 닫고 폐광했다. 그러나 만다갱은 일본의 근대화 유산이라는 이유로 2000년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됐다. 그래서 본래 일반인 출입금지 구역인데, 우씨의 주선으로 현장에 나와 있던 담당공무원의 허락을 얻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갱 주변을 길게 둘러친 철조망 안에 거대한 망루 모양으로 우뚝 서 있는 수직갱도 탑(竪坑櫓)을 비롯해 권양기(捲揚機)실, 탄차, 레일, 선탄장 등이 넓은 지대에 펼쳐져 있었다.

특히 핵심 시설인 권양기실 내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아라오시 사회교육과장이라는 담당공무원은 굳게 잠겨 있던 자물쇠를 열면서 “당신들은 권양기실 내부로 들어온 최초의 일반인”이라며 “이 권양기를 이용해 깊이 274m의 갱도 바닥까지 1분이면 도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삐걱거리는 녹슨 철제 계단을 밟아 2층으로 올라가니 육중한 권양기가 보였다. 권양기는 원통형의 드럼에 쇠밧줄(와이어로프)을 감고 도르래를 돌려 무거운 것을 끌어 올리거나 내리는 기계다. 작동 원리가 엘리베이터와 비슷한데, 탄광에서는 갱도 안팎으로 석탄이나 장비, 광부들을 운반하는 데 사용됐다. 조선인 노무자들은 이 권양기를 이용해 지하 막장으로 내려갔다. 이들이 캐낸 석탄도 탄차에 담겨 권양기로 지상에 끌어 올려졌을 것이다.

만다갱을 떠나 다시 차를 타고 오무타시 석탄산업과학관에 들렀다. 입구 쪽 천장에 세로로 길게 대형 플래카드가 내걸려 시야를 가로막았다. ‘축! 미이케탄광의 미야하라갱과 만다갱, 세계유산 잠정리스트에 기재.’

일본 정부와 오무타시, 아라오시 당국은 이들 갱의 세계유산 지정을 적극 추진 중이다. 이미 유네스코의 잠정목록에 올라 공식 심의가 진행되고 있어 일본 내 기대감도 높다고 한다. 이 머나먼 땅까지 끌려와 음습한 지하 갱도 안에서 공포와 탈진의 시간을 보내야 했던 조선인들. 그 암흑의 핵심이었던 미이케탄광이 이제 ‘세계인의 문화유산’으로 변신하려 한다.

오무타(후쿠오카)=특별기획팀 글·사진 김호경 권기석 우성규 기자 hk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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