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28

손민석 | [단독인터뷰] 구 일본군 군속이 밝히는 일본군 위안소 충격실태

손민석 | Facebook

손민석
21 May at 02:19 · Public
"전혀 없었습니다. 저만 해도 그랬던 것이 당시 일본에는 공창제도가 있었거든요. 때문에 군 위안소도 공창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아무런 저항감이 없었어요. 그 땐 지금과 달라서 보통 직장에서도 회식하고 단체로 공창에 가고 그랬거든요. 그런 문화가 사회적으로 인정됐던 것이죠. 쇼와 31년(1956년)에 공창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다들 그런 감각이었어요. 지방에 출장갔다 돌아오는 길에 역 주변에 있는 공창촌에 들러 여행의 때를 벗긴다는 게 당연한 시대였으니까요. 저는 위안소를 이용하면 숙박을 자주했기 때문에 아침에 귀대를 했습니다. 그러면 '야노'라는 해군 중좌(중령)가 저를 불러서 '너 말이지, 너무 그런 곳 가는 게 아니다'라고 꾸중하기도 했어요. 사고방식 자체가 그랬으니까 그 때는 위안소에 간다는 것이 부끄럽거나 그랬던 건 없었습니다."
http://m.jpnews.kr/a.html?uid=4598&sc=sc1

 1, 2부 모두 재밌는 증언인데 내 눈에 툭 하고 걸린 지점은 이 부분. 예전부터 주장해왔지만 성매매 합법화는 결국 성구매자인 남성의 죄책감을 사회가 덜어주는 기능을 한다. 성구매자 남성들 대부분 성매매 초기에만 죄책감을 느낄뿐, 시간이 지나면 거의 예외없이 정당한 "거래"로 인식한다. 나는 그 죄책감이 한편으로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기적 단계에서 임노동을 상품으로 판매하고 구매하는 것에 대해 당대의 경제학자들이 얼마나 비판했는지를 여러 곳에서 지적한다. 이제는? 물론 마르크스는 그 비판이 전근대적 사회구성체에 포섭된 의식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비웃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의식 자체는 중요한 것이다. 여성의 성을 구매하는 게 더 이상 자연스럽지 않은 사회가 되어야 한다. 노동력의 상품화, 인간의 상품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서 시작해야 문제가 해결된다. 사실 사회 문제 대다수는 논리로 바뀌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다고 믿기 때문에 바뀐다.

[JPNews 일본이 보인다! 일본뉴스포털!] "군 부대가 위안소를 직접 관리했다"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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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News 일본이 보인다! 일본뉴스포털!] "군 부대가 위안소를 직접 관리했다" (2부)
(`위안부들은 결국 속아서 온 거야` (1부) 에서 이어짐) - 그러니까 요금소라는 곳에 돈을 지불했을 뿐이니까 실제로 위안부들한테 돈이 건네졌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런 말씀이네요.`그렇죠. 다른 곳 이야기를 들어보면 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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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부대가 위안소를 직접 관리했다" (2부)
[단독인터뷰] 구 일본군 군속이 밝히는 일본군 위안소 충격실태
박철현 기자
기사입력 2010/04/23 [11:40]
("위안부들은 결국 속아서 온 거야" (1부) 에서 이어짐)
 
- 그러니까 요금소라는 곳에 돈을 지불했을 뿐이니까 실제로 위안부들한테 돈이 건네졌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런 말씀이네요.
"그렇죠. 다른 곳 이야기를 들어보면 육군위안소 중에는 위안부에게 직접 군표로 지불했다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지만 여기 위안소는 돈으로 냈습니다. 그리고 군표는 말이 군표지 일반사회에서 통용되는 화폐가 아니니까 사실 의미가 없다고 봐야지요."
 
- 마쓰바라 씨가 이용했다는 그 '남국료 위안소'에는아까 60명 정도 위안부가 있었다고 했는데 전체 군인들 수에 비해서 어떤 정도였나요. 위안소는 항상 붐볐습니까?
"네. 붐볐습니다. 항상 군인들로 바글바글거렸어요. 매번 줄을 서야 했으니까. (사이) 평면도로 그리면 이렇게 되는데..."
 
- 일반인은 사용하지 못하는 거죠?
"(평면도를 그리면서) 그렇죠. 일반인들은 바깥사회에 유곽 같은 곳을 이용하거나 공창이 있었으니까... (사이) 여기가 이렇게 울타리가 쳐져 있고, 입구가 이렇게 있으면 왼쪽에 요금소가 있고. 요금소 앞에 사람들이 줄을 길다랗게 늘어섰죠. 요금소 오른편에 길다란 동(棟)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1층짜리 길다란 막사인데 들어가면 길다란 복도가 나오고 끝에 세면장, 화장실이 보입니다. 물론 공용입니다. 복도를 쳐다보고 오른쪽에 방이 죽 나열돼 있습니다. 번호표를 든 사람들은 자기 방 번호표를 찾아가는 그런 방식이었죠."
 
▲ 마쓰바라 씨는 직접 위안소 평면도를 그렸다. 오른쪽이 마쓰바라 씨의 손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이런 막사가 위안소 내에 몇 개나 있었습니까?
"대 여섯개 정도? 보통 한 막사에 방이 10개 정도였으니까요. 정문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한 동이 서 있고 뒷편으로 죽 나열돼 있었죠."
 
- 실제 방 구조는 어떻던가요?
"방 크기는 4조(다다미 4장 크기, 약 2평) 정도였습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 구석에얇은 판이 놓여져 있고 그 위에 매트리스가 깔려져 있었어요. 오른쪽 구석에는 위안부들이 자기 물건을 놔 둘 수 있는 조그만 탁자가 있었고 문 바로 옆에 경대가 있었나... 아무튼 그랬어요. 그 외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 아까 위안소 주변에 울타리가 쳐져 있다고 하셨는데, 그건 어떤 종류의 울타리인가요? 철조망같은 겁니까?
"아뇨. 그냥 외부와 구분하기 위해서 친 건데, 사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대충 만든 그런 형태였습니다."
 
- 바깥에서 들어올 수 있다면 안쪽에서 나가는 것도 가능했겠네요. 마음만 먹으면.
"하지만 남국료는 섬이니까 나가봤자 별 의미가 없지요. 그리고 경비원이 그 주변을 계속 돌았습니다. 위안부가 나가는 걸 막는다기 보다는 혹시라도 들어오는 사람을 제어하기 위한 건데... 그렇지만 아까 말씀드렸듯이 들어온다고 해서 무작정 하는게 아니라 요금소에 돈을 내고 방 번호표를 받아야 위안부들이 있는 방에 들어갈 수가 있으니까요. (들어와도)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 정리하자면 위안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요금소에 돈을 내고 방 번호표를 받아 위안소를 이용한다는 거니까, 위안부들이 돈을 직접 받았는지 아닌지는 모른다는 것이죠?
"네. 어떻게 배분했는지 그런 건 저희들은 모릅니다."
 
- 그런데 아까 마쓰바라 씨는 위안소를 시설부대가 관리했다고 했는데요.
"위안소 자체는 군부대가, 그러니까 나쓰시마 위안소는 우리 부대가 관리한 게 맞지만 시설운영 자체는 민간업체에 위탁해서 했으니까 요금이 어떻게 분배되고 그런 구체적인 부분까지는 모릅니다."
 
- 그 민간업체 이름이나 그런 건 기억나십니까?
"음, 그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 시설부대에서 그 쪽 관련 계약이나 그런 건 어디가 담당했습니까?
"위안소에 관련된 사항은 시설부대 서무과가 담당했습니다."
 
- 이 남국료출입증도 그럼 서무과가 발급했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출입증 나이란을 가리키며) 사실 이 나이도 거짓말인데요. 여긴 22살이라고 적혀 있지만 이 때 제 나이는 19살이었어요. 왜 그랬냐면 20살이상이 아니면 위안소 이용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 제가 서무과로 찾아가서, 선물 같은 걸 가지고 간 것 같은데... 아무튼 좀 잘 봐달라 그런 식으로 얘기해서 이걸(출입증) 발급받았지요."
 
- 나이가 차지 않은 다른 사람들도 다들 그렇게 하면 발급받을 수 있었다, 그런 건가요?
"모두가 그런 건 아닙니다. 저같은 경우는 부서는 달라도 같은 부대에서 비슷한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으니까 얼굴을 다 알고 있지요. 그러니까 발급해 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보통 20살 이전 어린 병사들이 위안소를 이용하고 그러면 안된다 그런 분위기도 있었으니까... 거짓말로 발급받은 건 제가 알고 있는 범위내에선 저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 마쓰바라 마사루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어떻게 보면 규칙을 어긴 셈인데, 왜 그러신 건가요?
"그 땐 위안소 실태를 알고 싶다 그런 생각이 있었던 건 전혀 아니고, 그냥 그걸 해결하고 싶었지요."
 
- 요금 문제를 제외한 위안부들의 처우는 어땠습니까? 보통 직장이나 군대도 평시훈련중에는 1시간에 10분 휴식하고 그러는데요.
"그런 건 전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영업이 시작되면 무조건 군인들을 받아야 했고 군인들이 없더라도 언제 올 지 모르니까 계속 대기해야 했으니까 식사시간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휴식시간은 없다고 봐야 겠지요."
 
- 군인들은 어땠나요? 시간제약 그런 건 있었습니까?
"네. 그런데 시간이 길고 그러지 않아요. 10분에서 20분 정도? 욕구만 해결하고 바로 나오는 그런 겁니다. 여운에 빠져 있거나 그럴만한 시간이 없었습니다. 뒷 사람이 기다리는 것도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군인들은 외출할 때 반드시 콘돔 2개를 지급받았습니다. 혹시라도 임신하거나 성병에 걸리면 큰일나니까 그걸 예방하기 위해서 받는 것입니다."
 
- 콘돔은 외출할 때 무조건 지급받는 겁니까?
"네. 무슨 신청서를 쓰거나 그러는게 아니라 무조건 다 주는 겁니다. 외출 나가면 위안소에 가라는 말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전부 가는 것도 아닙니다. 위안소에 안 가는 그런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런 이들은 콘돔을 버리거나 그냥 놔두거나 그랬지요."
 
- 합해서 120명의 위안부가 있었습니다. 군인들 수는 몇 명 이었습니까?
"그건 유동적이었습니다. 나쓰시마는 함대기지니까 바다에서 죽지 않는 이상 이쪽에 모이게 됩니다. 함대가 집결할 때는 군인 수가 늘어나고 다시 바다에 나가면 줄어들고 그랬으니까... 평균 잡아서 3, 4만명 정도였다고 봅니다."  
 
- 3, 4만명을 위안부 120명이 상대했다는 거네요.
"그런 셈입니다. 제가 생각해 보면 위안부 여성 한 명당 하루 평균 14, 5명을 받았을 거라고 봅니다. 훈련이 없을 땐 위안소가 붐비지만 훈련시에는 또 비게 되니까. 그걸 다 평균내면 14, 5명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 마쓰바라 씨는 1942년에 시설부대로 배치받았다고 했습니다만 이 때 이미 이런 위안소가 있었습니까? 왜 이런 걸 물어보냐면 보통 우익들 하는 말이 위안소가 있었다 하더라도 전쟁말기에 조금 있었거나 다들 공창이었다, 그러니까 자기네들이 원해서 돈 벌러 온거다 라면서 일본군 위안부가 성적학대를 받는 성노예라는 사실을 부정하거든요.
"그건 말이 안되는 것이지요. 공창은 환락가에 따로 있었으니까요. 나쓰시마만 하더라도 그런 공창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위안소는 막사가 설치되고 무엇보다 시설부대 관리하에 있었습니다. 또 제가 배치받았던 42년에 이미 이런 위안소가 존재하고 있었어요. 이 출입증은 43년으로 돼 있습니다만, 42년에 있었던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42년에도 있었지만 종군위안소 자체는 중일전쟁 때부터 있었지요. 이건 제가 경험해 보지 않아서 확실하게 말씀드리지 못합니다만 태평양전쟁 전부터 있었던 건 사실인 듯 합니다.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중일전쟁 당시 강간사건 같은게 많이 발생했지요. 그게 이제 문제가 되니까 그럼 아예 이런 시설을 만들자, 그런 발상에서 출발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 아까 44년에 대공습을 받았다고 하셨는데요. 그 이후에 위안소는 어떻게 됐습니까?
"위안소는 다행히도 공습을 피해 갔습니다. 하지만 다른 곳들이 전부 폐허가 돼 버려서 위안부들은 전부 스스로 먹거리를 조달해야 했습니다. 고구마나 감자 같은 걸 재배하거나 근처 해안가에서 생선을 잡았죠. 위안부들의 자급자족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계속됐습니다. 이 때 저는 공습직후인 4월에 본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만 나중에 그렇게 들었습니다. 위안부 여성들은 그게... 그러니까 44년 7월 사이판이 완전히 함락된 이후에 돌려보냈다고 그러더군요."
 
- 돌려보냈다는 건 어디로 돌려보냈다는 겁니까?
"본국이지요."
 
- 본국이라면 한국을 말하는 겁니까?
"아뇨. 일본입니다."
 
- 어떤 루트를 통해 일본으로 돌아왔을까요?
"그게 상당히 불분명한데 제 예상으로는 아마 병원선(病院船)을 탄 게 아닐까 합니다. 저도 병원선을 타고 귀국했으니까요. 나쓰시마는 비록 공습은 받았지만 전부가 몰살한 건 아니니까요. 병원선도 간혹 왔다갔다 하고 했습니다. 여성군속, 거류민들도 있었으니까요. 그들과 함께 귀국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 위안소에 대해서 좀 더 듣고 싶습니다. 특별히 생각나는 위안부 여성이 혹시 있습니까?
"음... 네. 자주 만났던 위안부는 22살이었는데 이름이 '미도리'였습니다."
 
- 일본인 위안부인가요?
"아뇨. 한국에서 온 위안부인데 본명은 모르고 위안소에서는 미도리로 불렸던 여성입니다. 솔직한 성격이었습니다. 그녀를 기억하는 이유는 저같은 경우엔 잡무가 많아서 보통 밤늦게 위안소를 갔습니다. 군무원은 숙박이 가능했기 때문에 위안소에서 자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때 그 여성과 함께 있었지요. 꽤 여러 번 같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 같이 밤을 지새고 또 그게 여러 번이었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할 것 같습니다만.
"그렇죠.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습니다. 가족 이야기, 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또 그렇게 제가 숙박을 하게 되면 다른 방에서, 그러니까 영업시간은 끝났고 숙박 군인이 없는 위안부 여성들이 미도리 방으로 건너 왔어요. 꽤 여러 명이 와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 마쓰바라 씨가 직접 사용했던 위안소 출입증 사본. 오른쪽이 앞면, 왼쪽이 뒷면이다. 원본은 이쪽 링크(http://jpnews.kr/sub_read.html?uid=4576)에서 확인할 수 있다.     ©jpnews/박철현
 
- 주로 어떤 이야기를 하던가요?
"기본적으론 아까 말했던 그런 것들입니다. 다들 울면서 가족들과 헤어진 아픔, 슬픔을 이야기하는 건데 한국인들은 가족을 생각하는 그런 것이 상당히 있으니까요. 이제 못 간다, 영원히 못 만난다 그런 말들을 하면서 우는 겁니다. 아까 그 미도리라는 이름의 여성은 저에게 소포를 부쳐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는데 그 때 그 여성의 주소와 본명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다른 종이에 그것들을 옮겨 적어 놓고 부쳤어야 했는데 그냥 우체통에 넣어버린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쉽고 그러네요. 만일을 생각해서 적어 놨어야 하는 건데 말이죠."
 
- 그 소포는 어떤 소포입니까?
"안은 확인해보지 못해서 모릅니다. 두꺼운 봉투였습니다. 아마도 고향집에 보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도리는 자기는 못 돌아가니까 저한테 일본으로 돌아가면 꼭 부쳐달라고 하더군요."
 
- 미도리라는 분의 본명이나 주소 같은 건 전혀 기억나지 않습니까?
"사실은 저도 군무원이니까. 원래 그런 부탁을 받으면 안됩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쉽고 미안하지만 그 때는 그런 것을 적어두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금방 머릿속에서 지웠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도 주소도 들었습니다만, 전혀 기억이 안 나네요."
 
- 공습후 위안부 여성들은 자급자족을 했다고 하셨는데, 공습전에는 어떻게 식사같은 걸 해결했나요?
"식사는 시설부대에서 했고, 잠은 그 위안소에서 자고 그랬습니다."
 
- 위안소나 시설부대에서 잡역을 하던 장정들 말고 다른 한국인들도 있었습니까?
"거류민으로 와 있는 한국, 조선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위안부 여성들을 보는 일반인들의 시선은 어땠나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마 접점 자체가 없으니까 위안부라는 존재자체를 몰랐었을 가능성도 있지요. 군인과 군속들만 (위안부와) 접촉했으니까요. 또 일반인들은 위안소를 사용할 수 없었고 성욕을 해결하려면 환락가에서 따로 해결해야 했습니다."
 
- 아까 말씀하신 공창 같은 곳을 의미하는 건가요?
"그렇죠. 거기가 사실 중요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위안소는 공창하고 전혀 다릅니다. 위안소는 완전히 따로 격리된 곳입니다. 매일 일해야 하고 한 달에 한 번만 외출이 가능합니다. 외출도 성병검진을 위한 거니까 그냥 병원과 위안소를 왕복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위안소로 다시 돌아오면 바로 일을 해야 하니까 쉰다는 개념 자체가 없다고 봐야지요."
 
- 위안부가 120명 정도 된다고 했는데 그 숫자는 변함없었나요? 새로 사람이 오면 그만큼 준다거나 그런 건 있었나요?
"제가 나쓰시마에 주둔하기 시작한 때가 정확하게 43년 11월인데 이 때는 60명 수준을 유지했습니다. 목표기준이란 것이 있었는데 그 목표기준이 5, 60명 이었으니까요. 그 전에는 남국료 위안소가 어땠는지 잘 모릅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점점 더 늘어나 70명 이상 됐던 것 같습니다."
 
- 늘어났다는 건 원래 있던 분들은 그대로 있고 더 추가됐다는 겁니까?
"그렇지요. 기존 멤버는 계속 있는 겁니다. 괌 자료를 보면 나중엔 300명까지 늘었다 그러는데 그건 좀 아닌 것 같고 아무튼 시간이 지나면서 더 늘어난 것은 확실합니다."
 
- 솔직한 마음을 듣고 싶습니다. 당시 군인이나 군무원들, 그러니까 위안소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위안소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나요. 위안부들이 불쌍하다는 인식같은 건 있었나요?
"전혀 없었습니다. 저만 해도 그랬던 것이 당시 일본에는 공창제도가 있었거든요. 때문에 군 위안소도 공창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아무런 저항감이 없었어요. 그 땐 지금과 달라서 보통 직장에서도 회식하고 단체로 공창에 가고 그랬거든요. 그런 문화가 사회적으로 인정됐던 것이죠. 쇼와 31년(1956년)에 공창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다들 그런 감각이었어요. 지방에 출장갔다 돌아오는 길에 역 주변에 있는 공창촌에 들러 여행의 때를 벗긴다는 게 당연한 시대였으니까요. 저는 위안소를 이용하면 숙박을 자주했기 때문에 아침에 귀대를 했습니다. 그러면 '야노'라는 해군 중좌(중령)가 저를 불러서 '너 말이지, 너무 그런 곳 가는 게 아니다'라고 꾸중하기도 했어요. 사고방식 자체가 그랬으니까 그 때는 위안소에 간다는 것이 부끄럽거나 그랬던 건 없었습니다."

- 그 상사는 어떤 의미에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아, 그건 단순히 제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런 곳에 자주 가기 보다 군무에 힘을 써라, 그런 의미에서 말했다고 생각합니다."
 
- 위안부 여성들과 연애감정을 느끼거나 그런 건 있었습니까?
"그런 사례도 있었습니다. 제가 그랬다는 건 아니고 한국출신 죄수와 위안부 여성이 같은 고향 출신이라서 같이 도망갔다는 사례보고가 올라온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 마쓰바라 씨가 도망가게 해 줬다거나...
"그건 없습니다. 그랬다간 큰일나지요. 또 섬이라는 것도 있었고. 제가 할 수 있는 건 우편물을 우체통에 넣어주거나 그녀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 정도 밖에 없었습니다.  
 
- 죽은 사람은 있습니까?
"폭격을 받아 몇몇 위안부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제가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 위안부들의 귀환 역시 제가 본 것이 아니니까 무사히 돌아갔는지 아닌지 확실치 않습니다."
 
- 임신한 사례는 있습니까?
"제가 들은 바로는 없습니다."

- 만약 임신하면 어떻게 처리하도록 돼 있습니까?
"중절시키는 게 일반적입니다. 위안부가 임신한 케이스는 버마(현 미얀마)에서 있었는데 결국 사산했다고 하더군요."
 
- 마쓰바라 씨는 구 일본군 군속 출신으로 실제 위안소를 이용하기도 했고 또 그 위안소를 관리하는 부대에서 근무하셨는데요. 지금은 '아비코 평화네트' 등 시민단체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계시고 오늘은 귀중한 증언까지 해 주셨습니다. 무엇이 계기로 작용했나요?
"위안소 문제는, 오늘 제가 경험한 것을 공식적으로 말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그간 노랫말을 짓거나 해서 위안부들의 심정을 노래로 표현해 왔습니다. (가방에서 종이를 꺼내며) 이게 제가 지은 노랫말인데 제목이 '종군위안부'입니다."
 
▲ 마쓰바라 씨가 직접 지은 노랫말.  제목은 '종군위안부' 노랫말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속았다고 눈물 흘리는 위안부를 때리는 저 차가운 바람은 오늘도 멈추지 않아 / 탄식하는 모습 또렷히 남아있는 위안부는 어느새 백발이 되어 오늘도 괴로워한다 / 다테야마(館山)의 종군위안부 비석이 부르는, 적도에서 원한속에 죽어간 여성 / 보소(房總) 바다 저편 먼 언덕에서 들려오는 통곡의 비석 '의 종군위안부'"    ©jpnews/박철현
 
- 이건 언제 지으셨나요?
"그 옆에 날짜가 나오는데, 2005년 1월에 만들었네요. 그때 nhk가 종군위안부 관련 다큐멘터리를 방송한 적이 있었는데 그 내용이 뭐랄까, 위안부의 비참한 삶을 제대로 보도하기는커녕 방송내내 역사를 왜곡한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화가 많이 났습니다. 보도기관이 역사를 왜곡한다면 그걸 까발리는 것을 제 나름대로 해야 겠다고 생각해서 이 노랫말을 지은 겁니다."
 
- 어떤 내용입니까?
"제가 직접 경험했던 위안부들의 삶을 옮긴 것에 불과합니다. '속았다고 눈물 흘리는 위안부들을 때리는 저 차가운 바람은 오늘도 멈추지 않아...'라는 식으로 나갑니다."
 
-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그러니까 nhk의 방송을 보며 화가 났다고 하셨는데 그 화가 왜 났을까라는 부분입니다. 언제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됐는지가 궁금합니다.
"아, 그건 예전부터 반전운동도 줄곧 해 온 것도 있고 또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듣고 참 죄송스럽다는 마음이 들었지요.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1998년 당시 농수산 대신이 종군위안부는 없었다라고 발언한 것이 컸습니다. 제가 위안소를 이용했고 관리하는 입장이었는데 종군위안부가 없다니 그게 말이 안되지 않습니까?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런 거짓말을 태연하게 하는데 그냥 있어선 안되겠습디다."
 
- 용기를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중요한 증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증언이라기 보다 그냥 당사자로서 이런 부분이 감추어져선 안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제 지인들에게는 조금씩 말했습니다만... 사실 그거 여성에게 있어 가장 억울하지 않을까요. 자신의 성을 무참하게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의 물리적 힘에 의해 빼앗겨버렸다는 것이 얼마나 원통하겠습니까. 부모는 물론이거니와 남편, 아이들이 있는 위안부도 있었으니까 언젠가는 말해야 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게 마침 오늘이었을 뿐입니다."
 
- 긴 시간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이 인터뷰는 2010년 4월 21일 지바 현 아비코 시내 모처에서 이루어졌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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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들은 결국 속아서 온 거야" (1부)
[단독인터뷰] 구 일본군 군속이 말하는 종군위안소 충격적 실태
박철현 기자
기사입력 2010/04/22 [20:03]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들이 얼마나 두려웠을지..."
 
마쓰바라 마사루(85) 씨는 인터뷰 도중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담담하게 풀어나갔지만 역시 감정의 동요는 감출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지바 현 아비코 시의 시민단체 '아비코 평화네트' 회원인 그는 65년전 제국해군 군속(군무원)으로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
 
마쓰바라 씨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들고있던 손가방에서 당시 자료들을 꺼낸다. 그리고 그는 다시 겉옷 속주머니에서 샛노랗게 물든 명함크기 증명서를 탁자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이게 그 때 사용한 군 위안소 출입증입니다."
 
▲ 마쓰바라 씨가 발급받았던 위안소 출입증. 1943년 11월에 발급받았다고 한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가로 5.8센티, 세로 10.8센티의 그 증명서에는 '남국료출입증(南国寮出入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위안소를 이용할 때엔 이 출입증을 가져가야 해요. 우리 부대 근처에는 두 군데가 있었죠. 하나가 여기 적혀져 있는 '남국료위안소'였고 또 하나는 '남성료(南星寮)위안소' 였습니다."

마쓰바라 씨는 "남국료와 남성료는 일본군 위안부들이 모여있는 시설로 군인, 군속들의 성적욕구 해결을 위한 시설로 사용됐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도 물론 남태평양 트럭(truck) 제도 일대로 배속된 1943년부터 '남국료'를 몇 번 이용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18~25세 정도되는 종군위안부들이 각 위안소에 5, 60명 정도씩 있었습니다. 44년부터는 더 늘어났어요. 마지막에는 아마 각각 70명 정도씩 되지 않았나 하네요. 일본인 위안부가 그중 10% 정도였고 나머지는 전부 조선에서 온 위안부들이었습니다."
 
1942년 제국해군 제4함대 시설대대에 배속된 마쓰바라 씨는, 43년 남태평양 마리아나 제도의 트럭제도에 둥지를 틀었다.
 
하루시마, 나쓰시마, 아키시마, 후유시마, 그리고 게쓰요시마, 가요시마, 수이요시마, 모쿠요시마, 긴요시마, 도요시마, 니치요시마 등 총 11개의 큰 섬과 100여개의 무인도로 구성된 트럭제도는 산호초로 둘러싸인 바다의 요새였다.
 
▲ 위안소 실태를 최초로 육성증언한 마쓰바라 마사루 씨. 그는 1998년 나카가와 농수산대신의 일본군 위안부 발언으로 인해 이 문제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그는 나쓰시마(夏島)에 주둔했고 이 안에 있는 두 위안소를 관리하는 시설대대 군속으로 일했다. 나쓰시마는 후방보급기지로 그 주변에는 각종 유곽, 술집, 식당, 옷가게 등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하지만 나쓰시마를 기준으로 각각 위 아래에 위치한 하루시마(春島), 아키시마(秋島)는 전투부대가 주둔했다. 양 섬은 물론 나쓰시마에 주둔하는 일본군 및 군속들은 일과가 끝나거나 휴일이 찾아오면 나쓰시마의 두 위안소를 이용했다.
 
"위안소 접수대엔 위안소를 이용하려는 군인들로 바글바글했습니다. 한산한 경우를 한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전투태세에 들어가거나 중요한 훈련이 있는 날엔 한산했을 수도 있지만 저도 그 땐 작전에 참가해야 하니까 실제로는 어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평균잡아서 종군위안부 한 명당 하루에 14, 15명 정도는 받아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1시간 10분간에 걸쳐 자신이 경험한 위안소의 모든 것을 담담하게 털어 놓았다. 하지만 그 역시 "조선에서 속아서 끌려 온 그녀들"을 추억하는 장면에서는 목소리가 떨린다.
 
"본명은 모르지만 '미도리'라는 이름을 가진 위안부가 나에게 울먹거리면서 '고향에 꼭 부쳐달라'며 소포를 건네 줬지요. 그 땐 그 정도 였어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게 그녀 고향으로 잘 갔는지 지금도 마음에 걸립니다."
 
마쓰바라 씨는 언론에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라고 말한다. 평화운동을 계속 해 왔기에 언젠간 말할 날이 오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다 보니 미뤄졌다. 
 
하지만 지난 1998년 당시 농수산성 나카가와 쇼이치 장관의 "종군위안부는 없었다"는 발언에 양심고백을 결심했다.
 
구 일본군 군속으로 위안소의 이용자이면서, 또 그 위안소를 관리하는 일을 맡아본 마쓰바라 마사루 씨. 그가 회고하는, 참혹하고 소름돋는 일본군 위안부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인터뷰는 2010년 4월 21일 지바 현 아비코 시 모처에서 1시간 10분에 걸쳐 진행됐다.)
 
- 오늘 이렇게 시간 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먼저 자기소개부터 부탁드립니다.
"저는 마쓰바라 마사루라고 합니다. 지금은 노랫말을 만들고, 또 시민단체 활동도 하고 있지만 1942년부터 44년까지 남태평양 북 마리아나 제도의 트럭제도에서 군속으로 복무했지요. 도쿄에서 따진다면 3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입니다. 트럭제도는 크게 11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일본에서는 이 4개 섬을 하루, 나쓰, 아키, 후유시마라고 불렀지요. 왼쪽은 게쓰요시마를 중심으로 7개 섬이 있었지요. 산호초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외곽길이는 약 240킬로미터에 달했습니다."
 
- 위안소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병참기지, 그러니까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나쓰시마에 위안소가 두 개 있었습니다. 하나는 남국료(南国寮), 또 하나는 남성료(南星寮)였습니다."
 
- 그 위안소는 누가 관리했습니까?
"나쓰시마 일대가 제4해군함대의 기지였는데 이곳(나쓰시마)는 병참보급기지였어요. 제가 배속된 곳은 제4함대 시설부대였습니다. 부대장은 하기와라 간이치 대좌였지요. 제4함대 시설부대라는 건 제4함대에 소속된 부대입니다. 제4함대 사령장관은 고바야시 마사시 해군중장이었습니다. 제가 배속받은 이 시설부대가 위안소를 관리했습니다." 
 
- 시설부대는 위안소 관리만 했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위안소도 관리했지만 본국(일본)에서 넘어 온 죄수들도 관리했습니다. 한 700명 정도? 그들은 주로 잡역을 했습니다. 그 외에 한국에서 그러니까 당시엔 조선인데요. 조선에서도 많은 수의 장정들이 왔었습니다. 그들은 일을 시켜준다는 말에, 그러니까 결국 속아서 온 셈인데 아무튼 다들 같이 사역을 했습니다. 유사시 인적지원이라는 명목으로 평소에 일을 시킨 것이지요. 아무튼 위안소, 위안부, 죄수 등은 전부 제가 소속돼 있던 시설부대가 관리했습니다."
 
- 보통 시설부대라면 공병을 쉽게 떠올리기 마련인데 마쓰바라 씨가 있었던 곳은 사람도 관리했다, 그런 의미네요.
"그렇죠. 우린 시설부대니까 막사나 도로, 항만, 비행장 같은, 그러니까 토목건축도 다 했습니다. 그것도 하고 아까 말한 그런 것도 하고... 사실 뭘 짓고 그러는게 결국 노동력이 필요하니까요. 일본인 사역자들도 꽤 있었습니다. 물론 한국인들이 더 많았습니다만..."
 
- 시설부대가 위안소도 관리했다는 것인데 당시 위안소는 어떤 사람들이 드나들었습니까? 또 어떤 사람들이 일본군 위안부를 하고 있었나요?
"(겉옷 안쪽 속주머니에서 증명서를 꺼내며) 이게 남국료 출입증입니다."
 
- 남국료라면 아까 위안소라고 말씀하신...
"네. 그렇습니다. 저는 남국료를 담당했고 또 남국료를 사용했습니다. 이 출입증은 당시 실제로 사용했던 원본입니다. 계속 가지고 있었지요."
 
- 출입증 겉면에 적혀있는 내용은 어떤 의미입니까?
"여기 적혀있는 건, 먼저 가장 왼쪽이 남국료출입증, 그러니까 이걸 가지고 있으면 남국료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하기와라 부대라고 씌여져 있습니다. 부대장 이름이 하기와라 간이치여서 하기와라 부대입니다. 인감이 그 밑에 찍혀 있지요. 원본인데 원래는 반납하지 않으면 안되는 건데 몰래 가지고 귀국했지요."
 
- 위에 이 번호는?
"그건 발급번호입니다. 갑제511호. 모두 이런 번호가 찍혀져 있습니다. 관리번호지요."
 
- 쇼와 18년에 발급받았네요.
"네. 서기로 따지면 1943년이고, 11월에 발급받았습니다. 발급날짜가 출입증 옆에 씌여져 있는 것이죠."
 
- 1943년이면 태평양전쟁이 한참 일어나고 있었던 때입니다.
"그렇죠. 전시상태였죠.(사이) 이듬해, 그러니까 1944년 2월 17일과 18일 양일간에 걸쳐 미군 폭격기의 대공습을 받았어요. 여기, 나쓰시마가 거의 궤멸됐습니다. 위안소도 물론 공습피해를 받았습니다."
 
- 대공습으로 사라질 때까지 위안소는 계속 있었나요? 그러니까 마쓰바라 씨가 처음 여기로 갔던 1942년에도 위안소는 있었던 겁니까?
"계속 있었습니다. 남국료와 남성료 둘 다 있었어요. 각각 5, 60명 정도 위안부 여성이 있었습니다. 남성료는 육군이 이용했고 남국료는 해군이 이용했습니다. 저는 제4함대 소속이었기 때문에 남국료를 이용한 것입니다. 여기(나쓰시마)는 또 함대기지였기 때문에 해군장병들이 특히 많았습니다. 언제 출격할지 모르니까 그 전까지는 마음껏 즐겨라 그런 분위기가 있었지요. 육군은 주로 하루시마(나쓰시마의 북쪽에 위치한 섬)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하루시마에는 죄수들도 같이 있었습니다."
 
▲  마쓰바라 씨가 직접 그린 당시 트럭제도 일대. 그의 증언에 따르면 지도 오른편에 보이는 나쓰시마(夏島)라는 곳에 두 곳의 위안소가 있었다고 한다.  ©jpnews

 
- 아까 나쓰시마에 남성료, 남국료 둘 다 있다고 했는데요. 그럼 육군은 배를 타고 와서 위안소를 이용했다는 건가요?
"그렇죠. 거리상으로 그리 멀지 않으니까 조그만 배도 자주 왔다갔다 했습니다. 트럭제도 동쪽 4개 섬만 놓고 보면 위안소는 나쓰시마에만 있었으니까. 꼭 위안소가 아니더라도 하루시마, 후유시마(나쓰시마의 남쪽에 위치한 섬)에 주둔중이던 군인들은 자주 나쓰시마로 놀러 왔습니다."
 
- 놀러?
"아, 네. 여긴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요코스카 미군기지 같은 그런 개념인데요. 환락가가 있어요. 보통 상점들도 줄 지어 있고, 학교는 물론 신사까지 있었습니다. 일용품이나 그런 건 다 살 수 있어요. 술집이나 요정도 물론 있었지요."
 
- 그 군인들이 나쓰시마에 와서 놀았다는 것은 결국 다른 섬에는 그런 시설이 없었다는 거네요.
"네. 하루시마, 후유시마는 그냥 기지만 있었죠. 그러니까 다들 놀고 싶을 땐 나쓰시마로 건너 왔습니다."
 
- 위안소는 그런 군인, 군속들이 주로 이용했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 마쓰바라 씨도...
"네. 저도 물론 이용했습니다."
 
- 위안소는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이용할 수 있었나요?
"영업시간은 기본적으로 12시부터 22시까지 였습니다. 22시에 일단 영업은 끝납니다. 단, 일반사병들은 18시까지만 이용하도록 돼 있습니다. 귀대해서 이것저것 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 외 하사관이나 장교, 저희같은 군무원들은 22시까지 이용할 수 있었고 또 자고 가는 것도 허용됐습니다."
 
- 위안소는 매일 운영됐나요?
"네. 매일 열었어요."
 
- 공휴일은 없었습니까?
"네. 그런 건 없었고, 다만 한 달에 한 번씩 성병검진이 있었어요. 위안부 여성들은 이 때만 영외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해군병원에서 검사를 받았으니까요. 해군병원은 위안소에서 한 2킬로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트럭으로 가면 금방 가지만 걸어서 갔어요. 어차피 도망가지 못하니까 천천히 걸어가면서 시원한 공기도 좀 쐬고 그래라 그런 것이었지요."
 
- 도망가지 못한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섬이니까요. 사방이 바다니까..."
 
- 하루 10시간씩 매일 그런 일을 강요해 놓고 한 달에 한 번 시원한 공기 쐬라고 인정 베풀 듯이 그랬다는 건 좀 그렇네요.
"해군은 위안부에 대해서 그나마 그런 감정같은 게 있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쯤은 그런 해방감을 맛봐라 그런 기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30일간 줄곧 한 군데서만 지내야 하니까. 그렇게 병원을 가는 위안부 여성들도 그 때만큼은 파라솔도 펴고 오랜만에 바깥구경한다고 즐거워했었습니다. 하지만 금방 또 같은 짓을 반복해야 하니까. 위안소로 돌아가는 그녀들을 보면서 저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무엇보다 다들 20살 안팎인 게 참 그 뭐랄까..."
 
- 하지만 마쓰바라 씨는 그녀들을 관리해야 하는 입장이기도 합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그게 오히려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저에게 마음을 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또 눈물도 보였습니다.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 것이 너무 슬프다, 돌아가고 싶어도 못 돌아간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 돌아가고 싶어도 못 돌아간다는 무슨 말입니까?
"그건 그녀들이 위안소에 어떻게 왔는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사실 위안부들은 모두 속아서 왔어요. 모집공고가 붙는데 위안부 모집한다는 문구는 그 안에 없습니다."
 
- 그럼 어떤 문구를 넣죠? 그 모집공고라는 것에.
"보통은 고급장교의 메이드(하녀)를 모집한다던가, 병원에서 사무 볼 사람을 찾는다는 그런 내용들입니다. 그러니까 위안부들은 결국 속아서 온 겁니다. 게다가 월급이 30엔, 숙박료도 식대도 필요없다고 하니까 다들 응모하는 겁니다."
 
- 월 30엔이면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얼마나 됩니까?
"지금 얼마나 할 지는 모르겠는데, 그 당시 초임, 그러니까 중학교 졸업하고 취직했을 경우 초임이 45엔이었으니까..."
 
- 30엔이면 꽤 높은 급료네요.
"그렇습니다. 30엔이면 상당히 좋은 수준입니다. 그러니까 다들 거기에 속아서 오는 겁니다. 30엔이나 받는데 숙박료, 식대 다 무료니까 아, 이 돈 모아서 고향에 부쳐주면 되겠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응모하는 겁니다."
 
- 연령대가 어떻게 되던가요?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보통 18세정도부터 많게는 25, 6살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아주 어려 보였습니다."
 
- 아까 한 위안소에 60명정도 있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약 120명이라는 말이 되는데, 국적은 어떻게 됩니까?
"일본인도 있었습니다. 그 외엔 전부 한국이었지요. 일본인 비율은 약 10% 정도였습니다."
 
- 90%가 한국인, 그럼 적게 잡아도 조선에서 속아서 온 여성들만 100명 이상이 있었다는 거네요.
"네. 그렇습니다."
 
- 아까 가족들과 떨어져 있는게 가장 슬프다 그런 말씀을 들었다고 하셨는데, 그 외엔 어떤 말들을 들었는지 혹시 기억나는게 있습니까?
"보통은 그런 말들인데,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일단 여기 와 버리면 끝이라는 겁니다. 인생이 끝나는 거예요. 속아서 남태평양 섬까지 왔는데 돌아갈 가능성이 거의 없지 않습니까? 사방은 바다고... 결국 그녀들은 희망이 사라져버린 겁니다. 저는 군무원으로 왔지만 저조차 돌아갈 수 있을지 장담을 못했어요. 저만 해도 그런데 하물며 위안부들이 어떻게 자력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절망적이지요. 또 군에서 그녀들을 돌려보내지 않아요. 절대로."
 
- 그건 왜 그런 거죠?
"돌아가면 거짓말이 탄로나니까요. 고향에 가서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모집공고 거짓말이다, 속으면 안된다고. 그러니까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 그러면 평생 여기 있다가 죽어라, 뭐 그런 겁니까?
"그렇습니다. 평생 여기서 그렇게 강요당하다가 죽어가는 겁니다. 육군의 경우를 보면 작전지역에 위안소를 만듭니다. 작전기간 중에 짬을 내서 위안소를 이용하는 거지요. 그런데 작전이 끝났습니다. 후퇴를 해야 한다고 칩시다. 그럼 데려갈까요? 아니예요. 위안소도 위안부도 버리고 갑니다. 군대만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겁니다. 아무 것도 없는 폐허가 된 땅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이지요."
 
- 섬은 더 고통스러울 것 같습니다.
"네. 실제 44년에 대공습이 있었습니다. 다 날아 갔어요. 위안소는 그나마 피해를 덜 받았지만 대부분의 청사, 창고 등이 폭격을 받았어요. 2000기가 떴으니까 엄청난 공습이었죠. 문제는 식료품이 사라졌다는 것. 물탱크도 박살났고... 하지만 섬이니까 도망칠 데가 없어요. 공습이 또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속에서 죽어가는 겁니다."
 
▲ 마쓰바라 씨가 활동하는 '아비코 평화네트'의 회원들도 인터뷰에 동석했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마쓰바라 씨는 위안소 관련해서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직접 이야기도 하고 그랬다니까 위안소 관련 업무를 전문적으로 했을 것 같은데요.
"네. 저는 제4해군함대 시설부대 경리과에 있었지만 위안소 관련해서는 직접 필요한 물건을 나르기도 했지요. 다른 일도 다 했습니다. 위안소를 위해서 특별히 뭘 했다 그런 건 없습니다."
 
- 아까 위안소 출입증을 보여주셨는데 그건 보급품이나 그런...
"아닙니다. 그건 위안소를 이용할 때 제시하는 증명서 같은 겁니다."
 
- 출입증은 일본군이라면 누구나 지급받았습니까?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출입증은 저같은 군무원만 받습니다. 군인은 이걸 보여주지 않아도 군복을 입고 있으니까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지요. 출입증이 필요없는 겁니다. 저희는 사복도 입기 때문에 이런 출입증을 발급받는 겁니다. 일반인들과 구별하기 위해서죠."
 
- 요금은 지불하나요?
"네."
 
- 얼마 정도인가요?
"잘 기억나지 않는데... 1, 2엔 정도였던 것 같네요. 아니, 아마 1엔이었던 것 같습니다."
 
- 일본 우익들 논리중에 하나가 위안부들이 성매매를 통해 상당한 돈을 벌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손을 내 저으며) 그건 말도 안되지요. 군인이 무슨 돈이 있다고."
 
- 요금은 위안부에게 직접 건넵니까?
"아뇨. 요금소가 있어요. 나쓰시마에 있었던 위안소, 그러니까 남국료, 남성료는 둘 다 길다란 단층짜리 막사 대여섯동이 죽 나열된 형태입니다. 1개 막사에는 보통 10개에서 12개 정도 방이 있는데 위안소 주위에는 울타리같은 게 쳐져 있어요. 정문에 가서 출입증을 보여주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방 번호표를 받아야 하는데요. 그 번호표를 주는 곳이 요금소라는 곳입니다."
 
- 방 번호는 뭡니까?
"위안부 여성들이 거주하는 방입니다. 막사 1개 동 내부구조를 보면, 길다란 복도가 하나 있고 그 복도를 따라 조그만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각 방마다 몇 호인지 적혀져 있어요. 복도 끝은 세면장과 화장실입니다. 방 크기는 하나당 4조(약2평) 정도? 왼쪽 구석에 매트리스 침대가 하나 있고 조그만 탁자가 하나 있습니다."
 
- 그럼 그녀들에게 직접 주는 건 아무 것도 없나요?
"네. 방 번호를 건넬 뿐이지요."
 
- 돈을 직접 건네지 않았다는 말이네요.
"돈은 요금소에 냅니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남국료는 그랬어요. 아무튼 그런 시스템이란 것을 생각해보면 그 돈이 실제로 위안부들에게 건네졌는지 아닌지 아무도 모르지요."
 
▲ 마쓰바라 씨가 직접 그린 위안소 평면도. 왼쪽에 요금이라고 적혀진 곳이 요금접수대이다. 군인, 군속들은 요금소 앞에서 길게 줄 섰다. 요금을 내면 방 번호표를 받고 오른쪽 복도를 지나 지정된 방으로 들어간다. 방은 다다미 4장 정도의 크기로 가재도구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복도 끝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jpnews/야마모토히로키
 

■ 2부 - "군 부대가 위안소 관리했다" 구 일본군 군속 최초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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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qe10/04/23 [11:58]
아놔.. 죽이고싶당 일본색끼들..글고 부카니스탄도 죽어랏
범범10/04/23 [12:25]
분노가 치밀어 오르네요... 
cpt10/04/23 [13:15]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1818181810/04/23 [13:30]
치가 떨린다...
진짜 죽이고 싶다..
읽는데 눈물이 나려그러네...
지금 나보다도 한참 어린나이의 여자아이들을 ...
장쾌10/04/23 [13:52]
한국측의 증언 말고도 일본측의 증언, 증거도 볼 수 있는 이런 기사는 흔치 않죠
제이피 오는 이유중에 하납니다 ㅎㅎ
akia10/04/23 [13:55]
이런 인터뷰에 응한 마쓰바라씨에게 존경심을 표합니다. 이런 일본인들의 진솔함과 용기를 접할때마다 역시 일본은 강하구나 느낍니다. 

자...이제 우리 이야기를 해보죠. 조선인 처녀를 속여 지옥으로 보낸 조선인 브로커에 대한 이야기는 왜 피합니까? 그들의 명부는 아주 간단히 확인할 수 있어요. 조선인 위안소 경영자도 있었던 사실은 또 어떻구요...80년대 미군부대 양공주에대한 르뽀 기사나 소설, 영화를 보면 돈 때문에 속아 미군기지로 흘러들어가 인생막장으로 끝난 수많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정말 똑같아요. 
lierre10/04/23 [14:08]
일본인 중에는 위안부 존재사실조차 인정하지 않거나, 
인정한다고 해도 그 진상을 부인하고 왜곡하는 경우가 많은데
개인적으로도 주변 일본인들에게 이 기사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실제 일본 증언자의 말이라, 기사에 대한 반응이 어떨지요..
증언 형태로 기사를 올리시다니 현명하신 선택이었던것 같습니다.
뒤에서 응원하겠습니다!
박철현 기자님 화이팅!
10/04/23 [14:58]
그래도 문제는 역시 우익 꼴통들이라는거....
너구리10/04/23 [16:57]
일본 정부는 세상이 뒤집어져도 사과, 보상은 해 주지 않을듯 하고..

저런 분이라도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몇년 전 료코 이야기가 미국에 교과서 채용이 논란이 있었는데, 그 옆에 이런글 실어 넣고 싶군요.
10/04/23 [17:45]
정말 뻔뻔한 민족이지요.. 
일본정치가도 문제지만 무관심하거나 가만히 묵인하고 있는 일본 국민들도 똑같은 존재입니다.
dsdfsh10/04/23 [18:02]
일본인들은 자기나라를위해 속이기만 하지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데
이 할아버지는 솔직하네요
그런데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 정말 죄송합니다ㅠ 제가 죄책감을 느낍니다ㅠ
인간병기10/04/23 [18:12]
부르르르르를르르ㅡ르.............
skfjslk10/04/23 [18:14]
읽으면서 정말 계속 화가났다. 우리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가서 항의하는 것도 단순한 보상을 바라는게 아니라 진심어린 사과를 바라는 것이다.그 때 위안부로 들어갔을 때 쯤이 대부분이 내 나이 었을텐데 얼마나 절망으로 살아 오셨을까 ...............
대냐뿌냐10/04/23 [18:20]
김정일은 뭐하냐~!!!얼른 일본 한가운데 도심 심장부를 미사일로 없애버려라~!!
진짜 너무 하다...10/04/23 [19:03]
종군 위안부가 아니라 나라가 멍청하고 힘이 없어서 강제로 끌려가서 몸을 바친 강제 위안부다....
아 열받게10/04/23 [19:11]
볼때마다 열받는데 이제 그만좀 올려이런기사 이젠 지겨울라고한다.이제 연관된 사람들은 다죽거나 죽을나이 되지 안앗나?
22222222222222222222222210/04/23 [19:48]
화나네요
so cool10/04/23 [20:14]
일본하고 중국만 없어도 동아시아는 아주 평화로울 겁니다.그리고  akia.이상한 쪽으로 물타기 하지마라.
실은..10/04/23 [20:49]
한국에도 불과 얼마 전까지 수많은 여성이 종군 위안부 같은 삶을 살고
있었다..직업소개소에서 가정부 모집한다고 유인하고 고소득 있다고
유인하고...길거리에서 납치도 하고..그렇게 모아서 집창촌에 팔아먹지..
실은.10/04/23 [20:53]
방세다 화장품값이다.,하며 강제로 빚을 떠넘기지..그렇게 이용해 먹다
또 다른곳에 팔아먹고...결국 섬같은 곳으로 가지..
어때..모집 방법이나 착취하는 방법..피해 여성들에 대한 대우..

종군 위안부와 무엇이 달라?  그녀들이 탈출해서 인근 경찰서에 
도움을 요청하면?  88올림픽때 외국인 여성 기자가 쓴 기사가 하나
있다..여교사가 납치되어 집창촌에 끌려갔다..탈출해 인근 경찰서에
도움을 요청하면..경찰이 포주를 불러 그 교사를 인계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서 하는 말...아가씨 관리 잘해..
실은.10/04/23 [20:56]
포주들이 오히려 경찰에 신고한다..그 강제로 받은 차용증으로 
돈떼먹고 도망갔다고..그럼 경찰이 잡아주지..검찰이 법정에 세우지..

오죽하면 어떤 판사분이 그건 돈떼먹은게 아니고 인신매매다..하고
한탄하셨겠니..이런 나라가 종군 위안부를 떠들어?
요즘은 그래도 정신대하고 구별은 할줄 아나 보네..다행이다.
죽일놈들10/04/24 [18:43]
일본은 언젠가 망한다
구천에 떠도는영혼들이 너희  쪽바리들을
저승으로 데려 갈날이 머지 않았다
어이없네요10/04/24 [20:03]
난 또 자기는 이용 안하고 그런말 하는줄 알았네요, 나원 참 결국 같은 사람이면서 하지만 증언이라도 해주는건 감사합니다.
그리에르10/04/24 [22:03]
과연 나라면 옛날에 멋모르고 한짓이 나이들고 부끄럽고 죄스러운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을때 얼굴밝히고 피해당한사람들에대한 진실을 말하기가 쉬울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ㄱㄷ10/04/24 [23:22]
일본놈들은 상상이하의 짓거리들을 하고 다녔구만 ㅉㅉ
말이않나오네요10/04/25 [00:46]
일본은 이런 악행을 하고도 뻔뻔하게 오리발 내미는것들입니다
지들도 똑같이 당했음 좋겠네요
hope10/04/25 [01:57]
기자분과 증언해주신 분들의 용기에 박수를...영어, 일어 번역본도 함께 제공되면 참 좋겠습니다.
호호10/04/25 [03:09]
일본에 거대 지진이 나서 다 쓰러지면 만사 오케이인데.. ㅋㅋㅋ 하나도 남김없이 뿌리채 다 뽑혀서 일본놈들이 살려달라고 울부 짖을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손 모가지를 잘근 잘근 밟아주면 되는거지~ 잇힝~ 완전 최고야 ^_^
남행열차10/04/25 [04:07]
참 이럴 땐 입에 게거품 물고 흥분하지만 여기서 광분하는 사람들 중에 상당한 비율로 일본 문화에 젖어있는 사람들 많다는 데에 내 전재산 건다.
쪽발이 노래에 에니메이션하며 쪽발이풍 패션 등등... 아니라고? 허? 과연 그럴까? 
나원참..10/04/25 [09:18]
그 어린 나이에....... 여자로서 그런 일을 겪고.. 한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죽어가신... 
오메불망10/04/25 [19:24]
종전하면서, 미국놈들은 일본전쟁의 책임자들에게 여러가지 이유로 면죄부를 주었읍니다. 그중에 하나가 바로, 위안부문제입니다. 이것은 작년에 밝혀진 극비문서인 일본내 미군핵 반입허용과 절대 발설금지.....그리고, 일본군의 육이오 전쟁 참전댓가(실제로 전사자도 있습니다. 하나는,미군작전지역의 기뢰제거와 둘째, 세균전 수행에 따른 731부대의 동원)로 종전 정리 책임에서 제외된 사항들입니다. 독도를 보면 정확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이미, 독도는 일본으로 넘어간 것과 같습니다. 때가 아직 아닐 뿐이죠. 선언만 남았다는 겁니다. 위의 주요한 세가지 문제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배제하면 전혀, 답이 않나오는 겁니다. 일본이  위 주요한 문제에서 증인, 문서, 역사적 사실등등..이 있다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경제대국이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턱도 없는 짓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사실은, 그 배후에 미국과의 밀약이 있는 겁니다. 백날, 일본에게 뭐라해봐야..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만약, 미국이 한국의 편을 든다면, 일본은 찍 소리 못하겠지요. 허나, 미,일간의 밀약은 밝혀지면 미국이라는 나라의 본질을 드러내는 상당한 충격을가진 폭탄이기때문에,,미국의 힘이 한국과 일본에서 사라질 때나 되야 이루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뭐든지, 힘이 없으면 먹힙니다.
대포ㅡ,총..그런 것만의 전쟁이 아닌, 경제 전쟁, 외교 전쟁...질 수 밖에 없습니다. 특히, 독도는 미국의 태평양 전선의 최전방입니다. 독도가 만일의 경우에 북에 넘어간다고 하면,,,미국의 태평양  전선은 일본열도에서 뒤로 물러나야만 합니다. 독도를 중심으로한 해역이 자원 문제도 있지만, 역시 미국의 이익이 물려 있는 이유로 미국은 일본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이지요. 
오매불망10/04/25 [19:45]
자신의 감정을 그렇게 들어내면,,,제가 볼때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댁을 

욕할 것입니다. 전 재산같은 거 걸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분들도 계시겠지만,,,그렇지 않은 분들도,,,일본의 본질을 아시는 분들도

대 일본 문제의 뒷 배경을 인식하고 계시는 분들은 적습니다. 이것은 고의적

인 정보 왜곡의 결과입니다. 이런 사실이 이제서야 서서히 알려지고 있는 

시점입니다. 역사를 왜곡하는 것도 역시 관련되어 있습니다. 최근,,,일본은

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만...(그 연장선상에서 민주

당에서 의해서 일본,미국의 핵밀약이 폭로 되었지요.)  60년의 깊이라...

애를 먹고 있씁니다. 잘못하면 일본은 미국으로 부터 버림받고,, 갈 데 없는

고아가 될 지도 모릅니다. 그 옛날, 미국과 중국의 수교로 대만이 토사구팽 

되었습니다. 유엔 축출, 국가 지위 상실(외교권없음)등등,,,거지가 되었지요.

일본이 그 뒤를 따를 가능성과 함께,  한국 역시 그 뒤를 따라가는 처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미국에 의지하는 군사력, 그 덕분에 일본, 한국 두나라는

오랫동안 아세아에서 경제적 성장을 보장받아 왔습니다.(물론 댓가는 컷지요.

공짜가 어딨습니까?? 일본뉴스보세요. 부모에 의한 아동학대와 살해.자살..

복지, 의료혜택을 못받아 자살하는 경제 대국 일본의 현실..한국, 올해부터

자살 1위입니다. 하루,,30여명!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면,,미국의 

생존을 위해서 토사구팽되는 법입니다.  자국을 위한 군사력을 가지지 못하면

경제, 외교 모두 헛소리죠. 미국의 노선을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대만과의

외교단절로 일본, 한국도 대만과 외교관계를 끊었을 때,  대만인들이 그랬지

요.  의리도 없다고..ㅋㅋ..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적인 곳이 세계 정세의 현실입니다. 아무 죄도 없는 이라크의 개박살(후세인

도 한 때, 친미였었지요. 뒤늦게 정신차리려고 했지만...) 이란이 군사력이 

없었다면,,,이란도 역시 개박살 났을 겁니다. 아프카니스탄..마찬가지지요.

군사력이 정의를 만듭니다. 역사를 쓰지요. 일본도 미국의 힘을 업은 경제력

으로 한일관계에 있어서 그들의 역사를 그들의 힘으로 써가는 겁니다. 

역사는 승자의 것입니다. 옳고 그른 윤리적인 문제는 압도적인 힘앞에 아무런

제재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일본의 저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한국이 일

본보다 강력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간단한 거지요. 한국은 일본보다 국력

이 약한 나라입니다. 센놈이 약한놈을 먹겠다는 건데,,, 일본놈들은 이상하

다. 쪽발이다. 해봐야  웃기는 이야기지요. 지난, 일본의 역사교과서 선언은

사실, 자주국가에 대한 선전 포고와 마찬가지입니다.  힘으로 제압 하지 못하

는 한,, 나머지 항의,,어쩌구,,하는 것들은 죄다 쇼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다 알고 있지요. 김형오국회의장이 해방후 처음으로 독도

갔다고 해서, 그게 강력한 대응이 될 리가 만무 한 겁니다.  확실히, 

쇼지요.  무엇보다 그리고 그 배후에서 미국이 한국,일

본을 이래저래 조절하는 형국이었던 것입니다. 


한국의 (일본도 마찬가지) 근현대사에서 미국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

는 이상, 해결책은 없습니다. 단언하건대.... 
대한인10/05/01 [03:40]
인터뷰 하고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부디 하루빨리, 비공식 세계기록(지식e채널)이 더이상 길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asdf11/07/23 [01:16]
jeje는 왜 이런 기사에는 리플을 안다니~? 어딨니~?
12/08/24 [07:12]
인터뷰 감사합니다.

이런 글은 포탈 메인에 떠야 합니다.
asdf12/08/24 [23:11]
일본에 대한 인상이 좋다는 EU나 미국에서조차 위안부 결의안이 나온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위안부 망언을 지껄인 하시모토 도루, 이시하라 신타로, 노다 총리와 이놈들을 지지하는 전일본인들은 결국 그 댓가를 치루게 될 거다.
하박국12/08/30 [09:17]
일본 총리를 비롯한 우익 정치인들이 위안부는 없었다고 망언을 일삼고 있을 때도 이 기사의 마쓰바라 마사루 씨처럼 전쟁 당시 위안소를 이용한 일본군 또는 군속 출신 노인들은 대부분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이 후안무치한 일본인들의 모습이다. 역사의 현장을 경험한 자들이 아직도 벌겋게 살아 있음에도 일본 정부의 사실 부정, 호도, 망언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자들이 극히 드물다는 것이다. 마사루 씨도 마찬가지다. "언젠간 말할 날이 오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다 보니 미뤄졌다"고? JP 뉴스가 섭외하지 않았더라면 무덤까지 가져갔을 것이다. 일본에는 이처럼 양심 선언을 할 용기 있는 자들이 드물다. 다음 세대에게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전범국의 일원이었음이 부끄럽고, 공범이었음이 부끄럽고, 이지메를 당하는 것이 어쩌면 더 두려워서일 수도 있다. 반성할 줄 모르는 완악한 민족, 선진국민이요 세계 최고 민족이라는 자부심 아닌 교만으로 가득찬 인간들, 역사의 증인들이 살아 있고 증거가 있음에도 뻔뻔스럽게 부인할 뿐 아니라 왜곡을 일삼는 범죄자 집단, 이것이 일본의 본모습이다. 일본인들이여, 부끄러운 줄 알아라!
70년전12/08/30 [10:45]

이 증언조차 빼먹거나 물타기한것 같습니다.
美청문회 증언할 네덜란드인 위안부피해자 오헤르너 <-네덜란드 위안부 100명가량
일본군 위안부 강제연행 요시다 세이지 증언 <- 주로 전라 경상 지역가서 노예사냥 강제구인. 위안부 20만명.
순수한13/07/31 [17:12]
일본이라는 섬에사는 왜놈들은 그 섬에서 왜 지진이 많고 츠나미가 오는지 관심이 없고 뭣에 들뜬재 오락이나 즐기고 진지하지 못한 삶을 살고있습니다.

인간이라고 신뢰할수없고 음란한 일본인들이 남을 못믿어 늘 외토리로 혼자있고 조상이저지른짓에  왜 내가 죄와벌을 받냐고 다지지만,
유전적으로 죄가 흐르기 때문에  그죄값을 다 받아야합니다.
지진해일이 일본의  인간들을 사냥하는것이 자연현상이라고 바라보겠지만 
일본에의해 억울하게 죽임을당한 수많은 원혼들이 일본의 멸망을 위해 복수하는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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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상 인간으로 보기 어려운 동물보다 못한짓을 일쌈은 일본종족들.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할것없이 그어느국가의 사람들이 일본인을 정상인들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영토전쟁이나 신념에 의해 벌어지는 전쟁은전쟁이지만 ,일본인들이 저지른짓들은 도저히 용서할수없는 인간이라고 상상할수없는짓들입니다.

일본의 후손들은 앞으로 수많은  죽음이 보여도 스스로 당해도   억울해 하지 말아야합니다.
죽을때까지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고도빌어야 할지경입니다.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폭발과함께 방사능 낙진으로 국가로서의 운명이 이미  끝났습니다.
몇년후 암이나 질병 쓰나미 화산폭발로 일본인들은 그 섬과함께 사라지겠지요.
다행이다13/10/05 [19:32]
위안부를 인정한다는거 자체가 정말 다행일지도 모르겠네요.
우리도 다시 힘내서 일본을 이길수 있게 노력해야할거 같아요.
19/08/14 [20:36]
인간 악마들. 그 이름. 일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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