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6

Vladimir Tikhonov 박권일 회원제 시민운동 민주주의

Vladimir Tikhonov
27 mins ·

"온건해진" 요즘 운동의 문제점들을 너무나 정확하게 포착한 글인 것 같습니다.

 '변혁' 운동이 아닌 '시민' 운동의 제일 큰 문제점은, '시민'이어야 참여가 가능해지는 그 '울타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대생의 운동은 ('외부 불순 세력'이 아닌) 이대생만의 운동이라면, '이대생'이라는 입장의 특권성은 이미 논외로 치부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대생의 대부분은 (부모의 재력으로) 과외, 학원 공부를 해서 입시에 성공했으며, (상당수가 역시 부모의 재력으로) 고가의 등록금을 내면서 학교에 다니게 돼 있는 집단인데 이 입장의 '묵시적 특권성'은 '회원제' 운동 안에서는 당연시되고 논의 대상에서 제외되지요.

 '시민'들(만)의 운동이라면, '비시민', 예컨대 한국 관리자와 동료들로부터 늘상 상습 폭력을 당하고 있는 농어업 부문의 외국인 노동자 등은 참여에서도 의제에서도 제외되어 비가시화됩니다. 

외국인은 그렇다 치고, 세월호 유족이나 '불순', '과격' 단체 회원, 아니면 '시민'과 행동패턴이 다른 극빈층, 노숙자 등도 '비국민' 취급 받아 발언권을 얻지 못하는 경우들이 생기지요. 

이참에 새로이 '운동'의 주체,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 부상된 '시민'의 계급적 정체가 궁금해집니다. 언제 과로사 당할지 모르면서 사는, 페북할 시간도 에너지도 없는 배달 노동자는 '시민'일까요? 주민들의 폭언, 심지어 폭력까지 당하면서 사는 경비 노동자는요? '국민'이라는 벅정희주의적 단어가 하도 어감이 안좋아 이제 '시민'으로 대체되곤 하는데, 사실 이 '시민'이라는 개념의 묵시적인 한계성부터 따져봐야 합니다....

---------

박권일 ㅣ 사회비평가  회원제 민주주의

바람이나 물결처럼, 지난 20년의 어떤 흐름을 감촉하긴 했다. 하지만 그걸 뭐라 불 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혁명” 또는 “케이(K)-민주주의”라 부른 일련의 사태를, 도저히 그리 부를 수 없었다. 틀렸다기보다 결정적인 게 빠졌다고 느 꼈다. 촛불의 원형을 보려면 적어도 2002년 촛불까지 올라가야 한다. 2004년 노무현 대통 령 탄핵 반대 촛불시위,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는 물론이고, 촛불에 대한 일종의 ‘백래시’로서 이명박과 박근혜 집권 역시 거대한 ‘촛불 연대기’에 포함된다. 촛불이란 사물이 강조되지 않아도 이념과 스타일이 동질적이라면 ‘촛불’에 속한다. 이화여대 ‘미래라이프’ 대학 반대 투쟁(2016년)이 그랬다. 

기묘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이대 투쟁은 어떤 촛불시위보다 ‘촛불적’이었다. 촛불시 위의 가장 또렷한 특징은 ‘반(反)정치’였다. 광장의 정치적 발언은 강하게 제지됐다. 운동권 깃발 논쟁이 벌어진 2002년 촛불시위 때부터 가장 또렷한 특징이다. 촛불시 민 다수는 자신이 “외부 세력”, 즉 ‘비(非)국민’이 아님을 증명하는 데 몰두했다. 정치 발언을 하는 이들은 “빨갱이” “프락치”라 낙인찍혀 내쫓겼다. 이대 학생들은 훨씬 더 철저했다. 학생증 검사, 정치 발언 금지는 말할 것도 없고 메갈리아 티셔츠, 세월호 리본까지 단속했다. 촛불의 또 하나 특징은 ‘위임 거부’였다. 공간을 마련하고 정비 하는 주최 측은 있었지만 운동 목표, 전략, 전술을 명하는 지도부는 존재하지 않았 다. 이대 투쟁에도 ‘지도부’가 없었다. 본관 농성자 모두가 평등한 피해자이자 당사 자였다. 아무리 작은 사안도 다수결로 결정됐다. 석달 가까이 지속된 농성의 결과는 놀라웠다. 설립 계획이 백지화되고 총장까지 물러났다. 지난 30년간 대학생이 주도 한 투쟁 중 이토록 성공한 경우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야말로 압도적 승리였다. 

‘반정치’와 ‘위임 거부’. 이 두가지 특징은 이화여대만이 아니라 오늘날 대학생, 청년 세대에게 더욱 밀도와 강도를 높여 나타나고 있다. 학생회 선거 자체가 무산되기 일 쑤지만, 설령 학생회가 세워지더라도 학내 복지 외에 조금이라도 정치색 묻은 활동 은 하기 어렵다. 선거로 선출되었음에도 사안에 대해 일일이 학생들 의견을 물어야 탈이 나지 않는다. 이런 면은 최근 노조에 가입한 신입사원에게도 많이 보인다. 노조 집행부는 위임된 권한을 행사하는 조직인데, 젊은 세대일수록 이를 권위적이고 비 민주적이라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그렇다 보니 사소한 일 하나하나 전부 다수결에 부쳐야 하는 상황이 됐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다른 노조와의 연대 사업도 어렵다. “우리 문제나 신경 쓰라”며 온라인 게시판에 대놓고 ‘저격’이 올라온다. 원래도 조합 주의 경향이 강했던 한국의 노동조합은, 젊은 세대가 들어오며 더욱 자기 울타리만 지키는 조직이 되고 있다. ‘반정치’와 ‘위임 거부’는 사회운동의 필승 공식이자 시대정신이 됐다. 오늘날 타인의 권리나 사회 전체의 변혁을 위해 싸우는 운동, 예컨대 변혁적 학생운동이나 연대주 의적 노동운동은 “제 앞가림도 못 하는 놈들의 오지랖”으로 조롱받는다. 반면 당사 자 운동은 순수한 당사자성과 피해 사실이 증명되면 정당함을 인정받는다. 촛불의 주류가 주장한 것은 요컨대, ‘순수한 당사자의 민주주의’였다. 국적을 상실하거나 포 기한 난민, 미등록 이주 노동자, 대중교통을 방해하는 ‘폭력 장애인’, 공산주의자, 동 성애자와 트랜스젠더…. 다수결로는 인정받지 못할 ‘비국민’의 형상들은 촛불 광장에 서 자신의 요구를 말할 수 없었다. 온갖 일에 다 참견하며 ‘비국민’과 함께 싸우던 운 동권들은 이미 죽었거나 깃발을 내렸다. ‘순수한 당사자의 민주주의’는 철학자 지제크의 재담을 연상시킨다. “내 애인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아. 왜냐하면 거짓말을 하는 순간 내 애인이 아니기 때문이지.” 이 것은 무적의 논리지만 영원히 실패할 운명이다. 그런 애인, 그런 민주주의는 존재하 지 않기 때문이다. ‘비국민’들은 이미 안다. 헌법 제1조를 외치며 광장을 지킨 촛불시 민과 무슬림 혐오 가짜뉴스를 퍼 나르며 난민 추방을 요구한 시민이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울타리 안 평등에는 민감하지만 울타리 밖 비참에는 무관심한 민주주의, 앞 으로 그것을 회원제 민주주의(membership democracy)라 부르려 한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

Note: Only a member of this blog may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