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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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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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 휘
鮮于 輝
대한민국 국토통일원 고문
임기 1975년 2월 8일 ~ 1978년 4월 30일
대통령 박정희
총리 김종필 국무총리
최규하 국무총리 서리
최규하 국무총리
장관 신도성 국토통일원 장관
유상근 국토통일원 장관
이용희 국토통일원 장관
차관 유상근 국토통일원 차관
동홍욱 국토통일원 차관
동훈 국토통일원 차관
신상정보
출생일 1922년 1월 3일
출생지 일제 강점기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 남산리
사망일 1986년 6월 12일 (64세)
사망지 대한민국 부산 동구 초량동 49-6 세호장 여관에서 고혈압으로 인한 뇌일혈로 병사
본관 태원(太原)
학력 1956년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기
경력 소설가, 작가, 군인, 시인
언론인, 문학평론가, 시사평론가
한독당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1962년)
신민당 특임촉탁위원(1969년)
국민당 최고위원 겸 고문(1981년)
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
정당 무소속
부모 선우 억(부)
형제 누나 4명
남동생 2명
누이동생 2명
선우 연(둘째 남동생)
자녀 슬하 1남 3녀
(첫째딸 선우숙희
둘째딸 선우숙영
셋째딸 선우숙임
아들 선우 정)
친인척 이세화(첫째사위)
이민환(둘째사위)
선우 영(친조카딸)
선우기성(족척 숙부)
별명 호(號)는 목산(牧山)
아명(兒名)은 鮮于 煇
서훈 동인문학상
군사 경력
군복무 대한민국 육군
복무기간 1948년 ~ 1959년
최종계급 대한민국 육군 대령
지휘 육군본부 정훈차감
육군본부 정훈참모부 정훈과 과장
근무 육군본부
참전 한국 전쟁


선우 휘(鮮于 輝, 아명(兒名)은 鮮于 煇, 1922년 1월 3일 ~ 1986년 6월 12일)는 대한민국언론인이자 소설가·작가·반공주의 운동가였고 군인(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대령)이었다.

박관수 등과 함께 1960~70년대 반공 우익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이끌었다. 1986년 6월 12일 KBS 한국방송공사 6.25 특집 프로그램 〈살아있는 전장수첩〉 녹화 촬영 중 과로고혈압으로 인한 뇌일혈부산직할시에서 타계했다.



목차
1일생
2생애
2.1초기 활동
2.1.1수학과 청년기
2.1.2교사 생활과 해방 정국
2.1.3군 복무와 6.25 전쟁
2.2언론 활동
2.2.1언론활동 초기와 5.16 군사 정변
2.2.2언론, 문학 활동
2.2.3김대중 납치 사건
2.2.4감사원장 낙점과 거부
2.2.5유신 시절

2.3생애 후반
2.3.1제5공화국 시절
2.3.2사망
2.4사후
3연보
4학력
4.1비학위 수료
5평가
6일화
7저서 및 작품
7.1단편 소설
7.2중편 소설
7.3장편 소설
7.4평론집
8상훈
9사상과 신념
9.1반공주의 신념
9.2좋은 글에 대한 생각
9.3편집 자율권 보장
10가족 관계
11기타
12각주
13참고자료
14참고 서적
15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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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편집]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육자로 있다가 1946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입사하면서 언론활동을 시작하였다. 인천중학교 교사를 거쳐 1949년 여순사건 이후에 대한민국 육군에 정훈장교로 입대하여, 1959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특수부대원을 자원, 전진군단 유격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58년 서울신문 논설위원으로 언론에 복귀, 1959년 한국일보 논설위원, 1961년 조선일보에 입사하여 1986년 조선일보를 정년 퇴사하기까지 조선일보 논설위원, 편집국장, 주필, 논설고문, 주필 등으로 활동했다. 1962년1965년 조선일보 논설위원, 1964년1967년 조선일보의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1970년 조선일보 기획심의실장을 거쳐 71년 조선일보사의 이사가 되어 1986년까지 조선일보사의 이사로 경영에 참여했고, 71년부터 80년까지 조선일보의 주필로 활동했다. 현직 신문 논설위원, 주필로 구속되거나 여러 번 중앙정보부, 검찰 등에 소환되기도 하였다.

소설 작품으로는 1955년 단편소설 '귀신'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고, 1957년 발표한 '불꽃'은 '문학예술' 신인특선에 당선되어 제2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75년 국토통일원 고문, 1983년 2월 한국 예술원 소설부문 회원, 1985년 3월 30일 한국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1986년 6월 12일 한국방송공사(KBS) 6·25특집극 〈살아있는 전장수첩〉 녹화촬영 중 과로와 고혈압의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낭만주의, 감성주의적 작품이 유행하던 사조와는 달리 현실적인 문체와 소재를 주로 활용했다. 감성, 낭만주의적인 작가, 언론인으로 활동하다가 점차 초현실주의적인 사상가로 변모해갔다. 그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이며 본관은 태원(太原)이다.

생애[편집]
초기 활동[편집]
수학과 청년기[편집]

선우휘는 1922년 1월 3일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 남산동 325번지에서 아버지 선우억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위로 4명의 누이가 있었으나 누나 둘은 어려서 죽었고, 그가 태어난 뒤 그의 아래로 2명의 남동생과 2명의 여동생이 더 태어났다.

아버지 선우억은 자작농으로 자수성가 했는데, 인색할 정도로 검소했으며 자기중심적이고 보신주의적 태도를 가졌으며, 가족에 대한 사랑과 개인의 자유를 최우선으로 하는 가치관을 가졌다. 선우휘는 아버지 선우억의 영향을 받았다. 후일 그는 자신의 장편 소설 「노다지」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모델로 한 등장인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교사 생활과 해방 정국[편집]

1944년 9월 경성사범학교 본과를 졸업했고, 귀향하여 잠시 정주 조일소학교의 교사로 있다가 구성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구성국민학교 교사로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소련군 진주에 환멸을 느껴[1] 1946년 2월 교사직을 사퇴하고 월남했다. 1946년고향 어른 계초 방응모를 찾아가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그는 민족지도자들을 가까이 취재하면서도 어떤 정당·단체에도 가입하지 않았다.[1] 1946년조선일보에 입사,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다가 입사 1년이 안 돼 미국 유학을 꿈꿨으나 실현하지 못하고 조병화 시인의 소개로 1947년 다시 인천중학교 교사가 되었다.[1]

군 복무와 6.25 전쟁[편집]
한국 전쟁, 대한민국 제1공화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인천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 여순사건을 계기로 1948년 육군에 정훈장교로 입대했고 1949년 4월 육군소위로 임관하였다. 입대 2개월 만에 중위로 특진, 1950년 육군 대위가 되어 정훈국에 보직, 국방신문의 편집을 맡았다. 그해 6월 6·25 전쟁이 터지자 육군본부 정훈국 평양분실에 보직되었다. 51년 특수부대원 선발에 자원, 전방군단 유격대장으로 참전했다. 6.25 전쟁이 끝난 뒤 줄곧 정훈장교로 활동하다가 1953년 중령으로 진급하였다. 1955년에는 임기제 대령으로 진급, 육군본부 교육총감부 정훈참모를 거쳐 육군본부 정훈감실 정훈차감에 이르렀고, 1959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군에서 제대하기 전 문학에도 관심을 보여 1955년 잡지인 《신세계 (新世界)》지에 「귀신」을 발표하여 작가로 등단하고, 1957년 《문학예술 (文學藝術)》지에 「불꽃」이 신인특집에 당선, 작가로 이목을 끌기도 했다. 그해 그는 제2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첫 소설인 「불꽃」에서 그는 일제 강점기부터 광복과 6·25를 거쳐 50년대 후반까지의 30년간을 고현이라는 한 청년 지식인의 삶을 통하여 조망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일본 군국주의 파시즘과 좌익 사회주의 사상을 모두 비이성적이고 비인간적인 이념이며, 이런 이념들이 광기(狂氣)의 역사를 만들어낸 가장 큰 원인이라고 파악하였다. 그의 작품은 군부대의 정훈 작품과 각급 학교에 교양 서적으로 배포되기도 했다. 「불꽃」은 1975년 6월 KBS1 텔레비전 드라마로도 방영되었다.

육군본부는 "군인이라면 무식한 줄 아는 일반인의 통념을 깨고 군의 위상을 높였다"며 그에게 표창장을 주었다.[1] 육군 대령으로 예편 후, 1958년 서울로 상경, 서울신문사 논설위원이 되었다. 그해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논설위원이 되었다.

선우휘는 이승만 정권이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한 점을 높이 평가했지만 이범석, 이기붕자유당원들의 부정과 전횡에는 상당히 부정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언론 활동[편집]
언론활동 초기와 5.16 군사 정변[편집]
한국일보, 5·16 군사 정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한국일보》에 입사하여 다시 언론에 복귀하고, 1959년 다시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되었다. 1960년 6월 김팔봉, 김광주 등과 함께 한국소설가협회(韓國小說家協會)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였다. 1961년 4월에는 경향신문의 어린이 작품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었다. 또한 각종 안보 강연과 반공 대회의 강사, 연사로도 초빙되었다.

1961년 5월 15일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재입사한다.[1] 이후 1986년 조선일보를 정년 퇴사하기까지 『조선일보』 논설위원, 편집국장, 주필, 논설고문, 주필 등으로 꾸준히 활동하였다. 그해 5월 16일 그는 출근길에 쿠데타 소식을 듣고 육본으로 가서 “어떤 정신 나간 놈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나”라고 일갈했고, 그 일로 체포령이 떨어져 보름쯤 숨어 지내다 신문사에 복귀해 1년간 무기명으로만 글을 쓸 수 있었다.[1] 이때 그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육군 본부로 뛰어들어갔지만 박정희의 배려로 체포는 모면하였다.

그는 역사적 격동기에 참여와 방관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형, 지식인의 고뇌와 책임을 묘사한 행동주의 문학가로 꼽힌다.[2] 한편 그는 언론인과 작가 생활을 병행하면서 「오리와 계급장」(1958년), 「깃발없는 기수」(1959년), 「십자가 없는 골고다」(1965년) 외에도 수많은 단편, 중편, 장편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발표하였다.

언론, 문학 활동[편집]
조선일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61년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입사했다. 1962년 《조선일보》 논설위원, 편집부장을 거쳐 1964년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되었다. 1963년 발행인이 된 방우영 상무가 편집국장 직을 제의했을 때 “방 상무가 정도를 벗어나면 언제든지 그만두겠다”고 조건을 달았다.[1] 1964년 8월 공화당이 언론 통제를 노린 언론윤리위원회법을 국회 통과시킨 후 각 언론사에 윤리위 소집에 대한 입장표명을 요구했을 때 “신문사는 문을 열고 죽는 수가 있고, 문을 닫고 사는 수가 있다”며 방일영 당시 대표에게 호소해 반대 의사를 밝히도록 했다.[1]

1964년 조선일보 편집국장이 되었다. 그해 4월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운영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64년 11월 언론위원회법을 둘러싸고 빚어진 언론파동이 일어나자, 정부의 언론법 제정에 반발했다가 반공법 및 임시특례법 위반혐의로 체포되었다가 한달 만에 풀려났다. 그는 당시 현직 언론사 편집국장으로는 처음으로 구속되었다 한다. 12월 중순 불기소로 풀려났다. 전후 등단했던 작가들이 대부분 단명한 것과는 달리 꾸준히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그해 말 베트남 전쟁의 종군 기자로 참전한 뒤 1965년 1월에 귀국하였다.

다시 1965년 조선일보 논설위원을 거쳐 그해 8월에는 김수영(金洙暎), 이어령 등과 함께 동인계간지 한국문학지 발간에 참여했다. 그해 4월 일본으로 유학, 일본 도쿄 대학 행정대학원 행정정책과정에 입교했으며, 그해 12월에는 강재구 소령의 일대기인 '소령 강재구'를 집필하였다. 1966년 일본 도쿄 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정책과정을 수료하고 귀국하였고, 1967년 다시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하였다. 1967년 9월 한일신문세미나 협회에 한국측 대표의 한사람으로 참석하였다. 1968년 4월 한국신문편집인협회 자문위원, 1969년 2월 편협 운영위원이 되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을 군사 독재라고 비난했다가 소환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선우휘는 자신의 고집을 절대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학생운동계열의 선우휘에 대한 평가는 박했는데, 학생운동에 상당히 부정적이었으며 그는 학생운동이 공산주의와 북한을 대안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에서 학생운동에 비판, 비관적이었다. 또한 학생운동가들의 운동이 야당 정치인들의 집권 수단, 도구로 이용된다는 점과 운동권 내의 폭력성과 조직성, 전체주의적 성향에도 심한 반감과 불쾌감을 드러냈다. 1970년 미국 국무성의 초청으로 미국을 시찰하였다. 그해 조선일보 기획심의실장을 거쳐 71년 조선일보사의 이사가 되어 1986년까지 조선일보사의 이사로 경영에 참여했다. 같은 해 동신문 주필이 되었고, IPI 회원으로도 위촉되었다.
김대중 납치 사건[편집]

1973년 8월 8일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 당시 야당 지도자가 실종됐고, 그로부터 닷새 뒤 서울 동교동 자택에 모습을 나타내 세인들을 놀라게 한 '김대중 납치음모 사건'이 발생했다.

9월 7일자 조선일보는 중앙정보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납치사건을 대서특필로 보도했다. 9월 7일 새벽, 편집국에 선우휘 주필이 나타났다.[1]

"주필로서의 판단에 따라 책임지고 행동하겠다. 어떤 위협에도 누구의 간섭에도 굽히지 않겠다.[1]"

비장한 어조로 야근자들에 거사(擧事) 계획을 알린 주필은 윤전기를 세우고 자신이 써내려간 사설을 끼워 놓을 것을 지시했다.[1] 사설의 제목은'당국에 바라는 우리의 충정― 결단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라는 제목이었다.

“요즘 우리의 심정은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알 수가 없고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가 없는 상태에서 몹시 우울하고 답답하다. …그것은 한마디로 김대중 사건이라고 하겠는데… 그러나 무엇보다 더 유의해야 할 것은 설혹 우방과 얽힌 문제가 결정적인 불행을 초래하지 않는다손 치더라고 이번 사건이 불투명하게 처리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이다….[1]

9월 7일 당일 중앙정보부가 총동원돼 회수작업을 벌였지만, 대부분 시내판이 독자들 손에 쥐어진 뒤였다. 주필은 사직서와 사과의 글을 방우영 당시 조선일보 사장 책상 위에 올려 놓은 채 안양 지국장 집으로 피신했다.[1]

감사원장 낙점과 거부[편집]

1968년 11월의 문학인 대회에서 사회를 주관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꼿꼿한 자세로 박대통령을 대했다. 1973년 9월 17일 중정(中情)과 신문사의 열흘 간 실랑이 끝에 사태는 마무리됐다. 박 대통령은 호된 경험을 안긴 선우 주필을 오히려 높이 사게 됐고, 중용 의사를 밝히게 된 것이다. 박정희는 그에게 감사원장 직을 제의했다.

"정치가 안정되면 (대통령 직을) 물러날 겁니다. 들어와서 좀 도와 주십시오. (박정희)"

"들에 핀 꽃이 아름답다 해서 집안에 옮겨 심으면 아름다울 리 있겠습니까? (선우휘)"

박정희 대통령이 그에게 감사원장 직을 권하자, 선우휘 조선일보 주필은 일본의 시(詩)를 인용하며 사양했다고 한다.[1] 이후에도 박정희국회의원과 내각 장관직을 제의하였으나 그는 신병과 능력 부족을 이유로 모두 사양하였다.

유신 시절[편집]

1971년 조선일보 이사가 되고 86년까지 조선일보 이사로 재직했다. 1971년부터 80년까지 주필을 겸하였고, 1971년 IPI(국제신문편집인협회) 회원이 되었다. 1975년 국토통일원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한림대 교수를 지낸 지명관은 1970~80년대 일본에 머물 당시 잡지 《세카이(世界)》에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이란 칼럼을 통해 한국의 인권탄압·민주화운동 소식을 ‘T.K생’이란 필명으로 연재했다.[1] 선우 주필은 1980년대 초 안기부에 불려가 “T.K생이 누구냐”고 추궁을 받았지만, 끝까지 고향 후배를 보호했다. 지명관 교수는 “선우 주필이 일본 잡지에 나를 필자로 소개해 주었다”고 훗날 털어 놓았다.[1] 한편 그를 영입하려는 신민당의 영입 제의는 모두 거절하였다.

현직 신문 논설위원, 주필로 구속되거나 여러 번 중앙정보부, 검찰 등에 소환되기도 하였다. 그는 이미 학생운동계열이 민족해방, 민중해방 계열로 나뉘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두 진영 모두에 비관적이었다. 민족해방 계열은 6.25 전쟁의 원흉이며 김일성 독재정권인 북한을 대안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그르다고 생각했고, 민중민주 계열은 지나친 계급투쟁론에 몰입되어 있어서 사회적 융화가 어려운 대상으로 봤다. 1979년 제2회 고재욱 아세아언론상을 수상하였다.

1970년대 중반에는 잡지 자유를 편집하며 사서 환단고기 연구가인 이유립, 박창암 등을 만나 이들을 직접 취재, 인터뷰하였다. 이후 이유립, 박창암 등과 만나 한국사에 대한 대담과 토론을 하였다.

1978년 10월 22일조선일보에는 ‘잘못된 국사 원상대로 찾아야 한다’는 제목으로 조선일보 주필인 선우휘씨와 이유립씨가 대담하는 기사가 실렸다.[3] 1979년 2월 동인문학상 심사위원에 위촉되었다.

생애 후반[편집]
제5공화국 시절[편집]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자 그는 혼란을 틈타 북한의 도발을 우려하였다. 신민당에서 지지를 요청했지만 그는 이 요청을 거절한다. 그 뒤 최규하 정부와 5공에서도 계속 국토통일원 고문직을 유지했다.

1980년 1월 30일 일본 산케이신문과의 회견에서 12.12 사태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를 지지하면서 언론통제를 정당화하는데 참여하는 등, 신군부의 집권을 위해 자발적으로 애쓴 언론인이라는 의혹이 있다. 그 뒤 전두환 정권에서 특별히 국정자문회의 위원직을 그에게 제의하였으나 그는 병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1980년부터 6년간 조선일보 논설고문으로 있었고, 1983년 2월 한국 예술원 소설부문 회원을 거쳐 1985년 3월 30일 한국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학생운동계 중에서는 한국을 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규정하고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부류가 나타나자 그는 윤치영, 박용만 등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정당성과 해방 당시 남로당 빨치산 등의 학살을 언급하며 학생 운동권들과 논쟁을 벌였다.

소설 「불꽃」을 비롯한 4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동생(선우연)은 서울신문 기자와 정치부 차장 등을 지냈고, 아들(선우정) 역시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하였다. 작품을 통해 휴머니즘적인 행동주의를 바탕으로 한 인간이 현실악에 대한 대결의지와, 지식인의 고민과 책임 등을 묘사했으나, 이와 같은 작가로서의 행동적 참여의식은 65년을 전후로 하여, 점차 기성체제에 대한 보수주의적 입장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1983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에 선임되었다.

사망[편집]

1980년 이후 반미주의적인 가치관이 확산되면서 학생운동권 사이에서 민족해방론이 대두되었다. 그에 의하면 대한민국 정부는 남북협상을 통해 태어날 정부를 좌절시키고 미국이 수립한 꼭두각시라는 주장이었다. 또한 6.25 전쟁미국이 고의로 남침을 유도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선우휘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필수불가결한 일이었고, 6.25 전쟁북한의 침략임이라며 반론을 제기했다. 그는 강력한 반공주의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유지하였고 이로 인하여 늘 찬반의 격렬한 논쟁과 극단적인 찬사와 극단적인 비판이 공존하는 요인이 되었다.

평소 지병인 고혈압 등을 앓았으나 만년에도 끊임없는 칼럼, 기고 활동과 논설, 강연 활동 등에 나섰다. 1986년 2월 28일 조선일보사를 정년퇴임하고, 그해 6월 자신의 소설을 드라마로 만드는 제작 과정에 참여하여 부산직할시 초량동으로 내려갔다. 6월 12일 한국방송공사(KBS) 6·25특집극 〈살아있는 전장수첩〉 녹화촬영 중[4] 그날 오전 9시경 과로와 고혈압에 의한 뇌일혈로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의 한 숙소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나이 향년 64세였다.

사후[편집]

바로 서울대학교 대학병원 영안실에 안치되었으며 86년 6월 전두환 대통령은 영결식장에 이원홍 문교부장관과 각료들을 보내고, 다시 허문도 정무제1수석비서관과 청와대 비서관들을 특별히 파견하여 조문하였다. 경기도 용인군의 용인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가 천안평안 공원묘지로 이장되었다.

1986년 6월 13일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1987년 조선일보사에서 『선우휘 문학전집』 5권을 펴냈다.

연보[편집]
1943년 9월 경성사범학교 본과 졸업
1946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1947년 인천중학교 교사
1948년 육군 정훈장교로 입대
1950년 6.25 전쟁에 참전
1958년 육군 대령 예편
1958년 서울신문 논설위원
1959년 한국일보 논설위원
1961년 조선일보 입사
1966년 일본 도쿄 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정책과정 수료
1970년 조선일보 기획심의실장
1971년 IPI 회원에 위촉되었다
1975년 국토통일원 고문
조선일보 논설위원, 편집국장, 주필
1980년 조선일보 논설고문
학력[편집]
1943년 경성사범학교 졸업
1949년 육군보병학교 1기 졸업
1951년 육군기갑학교 1기 졸업
1954년 육군정훈학교 1기 졸업
1956년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기
비학위 수료[편집]
1965년 일본 도쿄 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정책과정 수료

평가[편집]
일화[편집]

6·25 전쟁 당시 정훈장교로 참전했던 그는 지휘관이 부당한 명령을 내리자, 소주를 마시고 취한 척 가장해 쓰러졌다. 화가 난 지휘관이 욕설과 구타를 가했으나 그는 반응하지 않았고, 지휘관이 나가버린 뒤 일어났다고 한다.

저서 및 작품[편집]
『아버지의 눈물』(1986)
『선우휘 문학전집』(전5권) (1987)
『강재구 소령 전기』

단편 소설[편집]
「귀신」(『신세계(新世界)』, 1955)
「화재」
「망향」
「싸릿골 신화」
「불꽃」(『문학예술(文學藝術)』, 1957)(제2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단독강화」
「오리와 계급장」(1958)
「거울」

중편 소설[편집]
「깃발 없는 기수(旗手)」(1959)
「십자가 없는 골고다」(1965)
「추적의 피날레」
장편 소설[편집]
「아아 산하여」
「성채(城砦)」
「사도행전」
「노다지」(1986)

평론집[편집]
《현실과 지식인》 등

상훈[편집]
동인문학상
육군참모총장 표창
제1회 고재욱상(高在旭賞)
평북 문화상(문학부문)을
국민훈장 무궁화장

사상과 신념[편집]
반공주의 신념[편집]

그는 공산주의사회주의가 인간의 개성을 억압하는 비인간적인 사상이라고 생각했다.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사유재산 소유에서부터 인간의 자유로운 행동과 사고를 억압한다는 것이다. 소련 군정 치하의 북한에서 월남한 그는 이러한 신념을 더욱 확신하였다.

소련군 진주에 환멸을 느껴 월남했고,고향 어른 계초 방응모를 찾아가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그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환상을 가져선 안 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신문기자가 됐다”고 밝힌 바 있다.[1] 좌익이 세를 넓혀가는 남한 사회에 실망하면서도, ‘북한 실정을 체험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좌익이 되었겠구나’ 생각하며 평생 반공을 견지했다고 한다.[1] 그는 이를 근거로 학생운동권과 논쟁을 여러 차례 벌였다.

좋은 글에 대한 생각[편집]

선우 주필은 쉬운 글이 좋은 글이며, 기자의 생명은 문장에 있다는 신념을 지녔다. ‘문장은 쓰는 사람 고유의 것’이라고 믿어 남의 글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고도 한다.[1] 일부러 어려운 문체를 쓰면서 자신의 유식함을 자랑하는 지식인들을 경멸하였다.

편집 자율권 보장[편집]

진보적인 논설위원들은, 투철한 반공론자이면서도 “내가 뭘 아나? 그건 당신이 전문가 아니야”라며 자율권을 보장해 준 선우 주필이 있었기에 자기 목소리를 내고 지면을 풍성하게 만들 수 있었다.[1] 사회주의 사상에 호감과 흥미를 느끼는 언론인들을 내심 못마땅해 하고 불쾌해 하면서도, 언론은 가치중립성을 유지해야 된다고 판단하여 사회주의적인 언론인들에게도 발언권을 주었다. 그러나 친북(親北) 사상은 반역으로 간주하여 허용하지 않았다.

선우 주필은 함석헌·안병욱·지명관 등 월남한 이북 출신 인사들을 지면에 등장시키는 역할도 했다.[1]

가족 관계[편집]

아버지 선우억
동생 선우연(鮮于煉, 1929년 ~ 1997년 , 언론인)
첫째딸 선우숙희(鮮于淑姬)
둘째딸 선우숙영(鮮于淑英)
셋째딸 선우숙임(鮮于淑姙)
아들 선우정(鮮于鉦), 언론인
첫째사위 이세화(李世和)
둘째사위 이민환 - 부산대 음악학과 교수
친족 선우기성

기타[편집]

술과 노래를 좋아하였다. 주력(酒力)도 대단했다고 한다. “한달에 한번쯤은 통음해야 머릿속 찌꺼기를 씻어내고 새출발을 할 수 있다”는 데 언행이 일치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술에 취하고도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서북청년단의 단주였던 선우기성과는 동향 출신의 먼 일족이었다. 계훈제, 문봉제 등과 가깝게 지냈다.

각주[편집]

이동:가 “윤전기 세우고 'DJ 납치사설' 쓰다 - 조선일보”. 2014년 8월 2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8월 18일에 확인함.
“선우휘씨 20주기 추모모임”. 2016년 3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2년 9월 7일에 확인함.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선우휘:Daum

참고자료[편집]
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 저 (2004년 12월 22일). 《조선일보 사람들 광복이후 편》. 서울: 랜덤하우스코리아. ISBN 978-89-5757-923-7. |id=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참고 서적[편집]

조선일보, 《조선일보 사람들》 (랜덤하우스중앙, 2005)
이익성, 《근대사의 역동성과 문학적 변용 선우휘》 (건국대학교출판부, 2004)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80년대편 1,2 (인물과 사상사, 2006)
김진기,《선우휘 - 개인주의와 휴머니즘》 (보고사, 1999)
김상선, 《신세대작가론》 (일신사, 1982)
선우휘, 《아버지의 눈물》 (동서문화사, 1986)
선우휘, 소령 강재구 (흑조사, 1965)
김윤식,《선우휘, 최상규》 (동아출판사, 1995)
한국문학연구회, 1950년대 남북한문학연구(평민사, 1991)
신경득, 한국전후소설연구(일지사, 1983)
선우휘, ‘불꽃’연구, 이동하 《문예중앙 1986년 봄호


외부 링크[편집]
'언론인 정도를 지킨 거인' 조선 선우휘 주필? - 미디어 오늘 2005년 01월 11일자
(환단고기의 진실) 제2부 -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윤전기 세우고 'DJ 납치사설' 쓰다 - 조선일보
언론인 선우휘 20주기 추모식 - 동아일보
선우휘씨 20주기 추모모임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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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휘 [나무위키]

최근 수정 시각: 2020-02-10 03:33:25


분류
소설가
조선일보 관련 인물
정주시 출신 인물
태원 선우씨
1922년 출생
1986년 사망
대한민국의 군인
실향민




이름
선우휘(鮮于煇)

출생
1922년 1월 3일

사망
1986년 6월 12일

첫 작품
귀신 (1955)

마지막 작품
올림픽 (1984)




제2회 동인문학상 수상

김성한
(1956)

선우휘
불꽃
(1957)

오상원
(1958)

조선일보 주필

최석채(1965~1971)

선우휘(1971~1980)

신동호(1985~1988)



1. 개요2. 일생3. 작품 목록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후 반공 소설가 겸 언론인.

2. 일생[편집]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동향인 지명관의 회고에 따르면 인근에서 유명한 수재였다고 한다. 부모들이 애들을 나무랄 때 '휘를 보라'고 했을 정도라니. 엄친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명문인 경성사범학교에 진학한다. 사범학교 졸업 후 고향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기도 한다.

해방 직후 조선일보에 입사하지만 곧 퇴직하고 인천중학교 교사가 된다. 해방 직후에 교편을 잡다가 여순사건 이후 정훈장교로 임관한다. 군인 출신 문인이며, 신춘문예 시상식에 군복을 입고 나간 걸로 유명하다. 사실 신춘문예 등단 이전에도 상을 받은 소설이 있다고 한다. 소령 시절 1957년 신춘문예에 발표한 "불꽃"이 당선되어 본격적으로 등단했다. 불꽃이 동인문학상을 받자 아예 전업으로 글을 쓰기로 한다.[1] 이후 조선일보에 재입사한다.

당시 조선일보 사장 방우영은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선우휘는 편집국장, 주필, 논설 고문 등을 지내며 그 파트너로 활동한다.[2]

실향민으로 6.25 전쟁을 겪은 세대답게 반공적이고, 또 한편으로는 휴머니즘적이다.

성향이 반공적이긴 하지만, 원래는 중도적인 성향을 가졌다. 그래서 저작 "불꽃"이나 "노다지"를 보면 해방이후의 우익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둘 다 맘에 안들지만, 좌익이 더 나쁘기 때문에 덜 나쁜 우익을 택할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행동.... 뭐 그런식으로 나오는데... 선우휘 자신의 행보를 합리화하는 논리이겠지만, 그러다가 이분은 결국 후에 남한의 군부독재도 옹호한다.

조선일보 국장도 맡았는데, 유엔에서 "한반도 중립화 통일안"이 제출된 걸 중정의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조선일보에 기재한 사건도 있었다. 이것 때문에 글을 쓴 리영희와 편집국장인 선우휘는 구속되었으나 선우휘는 그냥 풀려났고, 리영희만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받았다.

또한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수장될 뻔하다가 서울에 버려진 김대중에 대해서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조속한 진상조사 및 규명을 해야 한다"는 사설을 1면에 실었다. 이만하면 용자 인증. 이 두 사건 때문에 중정에 가서 물 좀 먹었다. 친동생 선우련이 박정희의 심복(대통령비서실 소속 비서관)이라서 그나마 목숨은 건졌지만, 참고로 선우휘 관련 사진을 보면 이때 중정에 끌려가서 초췌해진 모습이 꼭 나온다.[3]

저런 일화만 보면 강직한 언론인인 듯 싶지만, 독재정권을 방관, 혹은 은근히 협조적이었던 모습도 보였다.

편집국장시절 선우휘는 국제부장이었던 진보적 성향의 리영희를 조사부장으로 "강등"시켰고, 리영희에게 베트남 전쟁에 취재를 가서 국군찬양기사를 쓰라고 했으나, 리영희는 "양심상 정부찬양기사는 쓰지 못하겠다"고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선우휘는 리영희에게 노골적으로 사직을 강요했다. 리영희는 결국 조선일보를 그만두었다.

조선일보 해직기자들에 대한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는데, 아주 어이없는 답변을 늘어놓았다. 이때 그는 "왜 후배기자들에게 가만히 있느냐고 말했냐"는 해직기자 쪽 변호사의 질문에 자유언론수호선언이 “옳은 일이니까 해야 한다기보다는, '조선일보의 체면을 위해 남이 하는 만큼은 해야 한다'고 말했을 뿐”이라고 답했다.

이어 그는 "조선일보 기자들이 언론자유실천을 위해 기자협회 분회의 회보를 발간하였는데 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신문제작을 하는 일도 벅찬데 그런 것까지 한다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다”라고 말했다. 변호인이 다시 “들어가야 할 기사가 빠지든 깎이든 기자는 기사만 써내라 이 말인가”라고 질문하자 선우휘는 “그렇다”라고 명쾌하게 답변했다. 변호인이 선우휘의 글을 인용하여 “언론이 병들어 빈사상태”에 놓여도 “모든 것을 사장에게 맡기고 가만 있어야 하는가”라고 되묻자 선우휘는 “물론이다”라고 잘라 말했다. 변호인도 할 말을 잃은 듯 증언녹취록은 여기서 끝나고 있다. 아마 지명관이나 방동규와는 달리 이들 해직기자들과는 친분이 없었던 모양이다.

다만 선우휘는 태생이 태생인지라 "휴전선 이북의 김일성 도당이 있는 한 반공이 최우선"이라는 사상을 가졌고 이를 위해 남한의 군부독재를 합리화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1970-1980년대에는 심한 비난을 받았다. 10월 유신대한민국 제5공화국도 옹호했으니. 조선일보에 게재되던 선우휘 칼럼은 나중에 후배 김대중 칼럼보다 훨씬 더 친여적으로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래도 나름 운동권 후배들과 재야인사들을 감싸주려는 노력도 했다. 예를 들어 지명관 교수가 1970~1980년대 일본 《세카이》지에 가명으로 체제비판적 칼럼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을 연재할 때 "너 나쁜 짓 하는 거 알고 있다"며 에둘러 활동을 그만둘 것을 권유했지만, 그의 신변을 걱정해서 안기부 직원에게는 저자의 정체에 대해 철저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재야 인사인 함석헌백기완의 뒤를 봐주기도 했으며, 방배추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방동규 씨와 끝까지 친분을 유지한 사람이 그다.

성향이 성향이라 그런지 4컷만화 밑과 기사 한가운데에 광고를 넣자는 광고부장의 주장에 반대하여 격렬히 논쟁하다가 사장이 하라고 시키는 바람에 깨갱한 적이 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985년부터 1986년 3월까지 방송심의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했으며, 그 해 6월 12일에 KBS 한국전쟁 특집 다큐멘터리 <살아있는 전쟁>의 리포터 겸 나레이션으로 현장 방문 도중 여관에서 뇌일혈로 타계하였다.

비슷한 성향의 작가로는 이문열이 있다.

그의 아들로 선우정이 있는데, 조선일보의 일본 특파원으로 재직했었고, 2017년 기준으로 사회부장을 맡고 있다.[4] 사내에서 일본통 기자로 활동해서인지 덕력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2007년에는 아키하바라모에에 관해서 투고한 기사도 있을정도니... 참고로 아버지의 성향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같은 조선일보에 있는 사람인지라 선우정 칼럼을 보면 기본적으로 현 정부에 대해 꽤나 비판적인 서술이나 주제가 많다.

참고로 당질(5촌 조카)이 탤런트 선우재덕이다. 쉽게 말해 선우휘와 선우재덕의 아버지는 사촌이라는 말.[5]

3. 작품 목록[편집]

불꽃 - 아버지가 일제 연간에 살해된 동굴에서 아들은 북한군에 살해된다는 이야기, 얼핏보면 4류 반공물 같지만, 현실 상황에 소극적인 주인공이 역사를 거치면서 성장하고 그 성장의 순간에서 죽는다는 점이 포인트. 반공만 아니면 다른 진영에서도 만들어도 될만큼 수작. 백윤식이 주인공으로 나온 TV 문학관은 좀 병맛이고[6] 유현목의 영화판은 진정한 수작[7]

싸리골의 신화 - 어느 날, 강 노인은 국군 낙오병을 숨겨주고 북한군이 쳐들어왔는데도 1명도 안 죽었다는 경이로운 동화이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대략 몇 명 죽는다.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이만희의 걸작, 강민호의 데뷔작이며 박준규 아버지 박노식이 악질 군관으로 나온다.

추적의 피날레 - 군 정보부의 공작으로 위장 월북했다가 간첩으로 돌아온 주인공은 자신에게 월북을 명한 장군은 죽었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명예를 찾으려는 주인공의 노력과 주인공을 이용해서 권력을 다지려는 장군의 대결이 포인트, 여기 나오는 나쁜 장군은 50년대에 있었던 김창룡 준장이다.[8] 선우휘는 김창룡에 대해 "그래도 불쌍한 인물"이라 평한다.


망향 - 실향민이었던 선우휘의 향수병이 드러난 작품이다.

희극배우 - 글로써 먹고 사는 문인으로써의 생각이 드러났다. 결말에서 주인공이 간통을 저질렀는지 의심되는 묘사도 있다.

묵시 - 어떤 연설가는 친일을 하기 싫어서 벙어리인 척 한다는 내용의 단편. 민욱과 전무송 주연으로 TV 문학관에서 방영했다.

테러리스트 - 서북청년단의 좌절을 다뤘다. 같은 북한 출신으로 공감이 간듯[9] 선우휘가 가장 아끼는 작품.

오리와 계급장 - 서북청년단으로 온갖 만행을 저지른 사람들과 악질 빨치산들이 자신들이 남과 북에서 버림받자 시골에서 오리를 키우면서 살아가는 이야기 여기서 동네 사람들에게 권력을 보여주려고 초빙해서 나오는 대령은 군인인 작가 자신임. 전쟁후 어제의 용사들의 찌질함과 애잔함이 극단적으로 나오는 작품. 대령은 그나마 계급장이라도 있어서 먹고 살지만 나머지는..

거울 - 일제강점기에 고문당한 이발사는 자신을 고문했던 형사를 만나 죽이려고 하지만, 아들을 보고 그냥 풀어준다는 이야기. 특이하게 독백으로만 구성된 소설이다.

한국인 -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아들의 씨를 남기려고 면회를 요청하는 가족들을 군인이 대하는 것. 당시로써는 흔한 일이었을것이다.

ONE WAY - 특수전을 맡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다룬듯.

깃발 없는 기수 - 해방 이후, 공산당을 응징한다는 내용으로 나오지만 사실 서북청년단의 내면을 다루었음. 원작은 미완성 하명중이 나온 영화판 감독이 임권택이다.

단독강화 - 낙오된 국군과 인민군의 동거. 정동환, 장항선 주연으로 TV 문학관이 더 유명하다.

외면 - 연합군 포로 수용소를 무대로 일본 장교와 미국 법무관의 시각으로 본 조선인 포로 감시원의 비극을 그린 작품, 김진태 주연의 문화방송 번안판이 있다.

제목미상2 - 언론계 파티장에서 어설픈 영어로 미 고문단 장교에게 아는 척을 하던 주인공이 화장실에서 자책하는 내용이다. 자기 이야기 같음

좌절의 복사 - 언론사 국장 역시 자기이 모종의 사건으로 코렁탕중정에 끌려간 부하 직원 석방을 위해 중정 부장에게 협박 공갈(...)치고 석방된 부하를 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배신자 아닌 배신자로 살게될 부하에 대한 회한을 느낀다는 작품. 국장은 과거에 어설프게 독립운동가 잔당으로 체포되었다가 친척의 도움으로 풀려난 적이 있고 한국전 당시 빨치산 귀순자가 실수로 자신의 이전 동지들을 죽게 하자 자살하는 걸 목격한 경험이 있다.

노다지 - 구한말부터 한국전쟁까지 어느 집안의 일대기를 다룬 대하 소설 선우휘판 "나의 청년시절"에 필적하며 반일&반공 첩보물로, KBS에서 번안 방영한 바 있음. 원작에 나오는 수인은 작가의 오너캐.

추가바람

[1] 당시 시상식에는 육군참모차장이었던 장도영도 와서 선우휘를 격려했다.[2] 방우영의 양할아버지 방응모는 선우휘와 같은 정주 출신이었다. 덕분에 연고주의가 매우 강했던 선우휘는 조선일보에 이전부터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3] 그래도 박정희는 선우휘의 기개는 높게 샀던 모양인지, 선우휘에게 청와대 감사원장 자리를 권했다. 선우휘는 그 권유에 일본하이쿠 한 토막을 인용해서 대답했다. "들에 핀 꽃이 아름답다 해서 집안에 옮겨 심으면 아름다울 리 있겠습니까?"[4] 2019년 기준으로 편집국 부국장직을 겸한다.[5] 2012년 4월 25일자 MBC 예능 황금어장 - 라디오스타에서 선우재덕이 밝혔다.[6] 이를테면 나중에 북한 장교로 나오는 연호가 중일전쟁 중 탈영 때 강간을 한다는 원작에도 없는 이야기가 나온다던가 등.[7] 전우 시즌2에서 용감한 국군 장교로 나온 강민호가 악질 북한군으로 나온다. 단 이 캐릭터는 일본군 학도병 때는 개념있는 청년으로 나온다.[8] 극 마지막에도 다른 사람에게 저격당해 죽는다.[9] 단 선우휘는 서북청년단 자체는 대단히 싫어해서 거리를 항상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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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휘 소설에 나타난 종교적 이상주의의 변모 양상 연구

Cited 0 time in Web of Science Cited 0 time in Scopus
Authors
임진하
Advisor
김종욱
Major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Issue Date
2017-08
Publisher
서울대학교 대학원
Keywords
선우휘종교적 이상주의서북 민족주의고난사관탈식민분단지식인
Description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2017. 8. 김종욱.
Abstract
본 연구는 선우휘 소설에 나타나는 종교적 이상주의의 변모 양상을 탐구하였다. 대표적인 월남 지식인인 선우휘는 서북 지역 출신으로서의 정체성이 매우 분명했다. 그의 소설 역시 서북 민족주의의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특히 서북 민족주의 운동에서 구심점의 역할을 했던 기독교가 그의 소설에 미친 영향은 상당하다. 민족의 역사적 고난을 극복하는 성경의 예언자상과 이를 통해 회복되는 보편적 공동체의 이상은 선우휘의 소설 세계 전반을 관통한다. 본고는 선우휘 소설에 나타나는 종교적 색채를 서북의 종교적 이상주의와의 연관성 속에서 살펴봄으로써 그 의의를 적극적으로 재평가하고자 하였다.
주지하듯이 월남 지식인들에게 있어 기독교는 반공주의와 결합하여 남한의 지배 이념을 강화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신생 후진국의 지식인으로서 선우휘에게는 냉전 논리만큼이나 탈식민이라는 과제 역시 절실했다. 이것은 주체적 행동을 제한하는 조건이기도 했던 바, 이 시대적 과제에 대응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선우휘는 종교적 이상주의를 바탕으로 소설 창작에 임했다. 역사의 장에 개입하고자 하는 욕망에 따른 작업이었기에 그것은 분명한 정치성을 띠고 있었으나, 그 정치성은 고정되거나 확정되어 있지 않았다. 역사적 상황이 변화함에 따라 선우휘 소설에서 종교적 이상주의가 나타나는 양상은 지속적으로 변모했다. 주체의 해석에 따라 종교적 이상과 역사적 현실은 유동적으로 접속했고, 거기에는 다양한 행동의 계기가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본고는 그 역동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선우휘 소설을 새롭게 조명해보고자 하였다.
본 논문은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고 총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2장에서는 1965년 이전까지 선우휘가 창작한 소설에서 종교적 이상주의가 나타나는 양상을 분석했다. 

선우휘는 피식민 경험과 한국 전쟁을 약소민족의 수난으로 인식했고, 이를 극복하는 일을 사명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적극적 행동의 주체로 거듭나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에 내적 논리를 마련해준 것이 동향 출신인 함석헌의 기독교적 역사관이었다. 함석헌의 고난사관을 통해 선우휘는 탈식민과 분단 극복이라는 민족적 과제에 세계사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교적 이상에 근거를 둔 행동은 현실 정치에 대한 부정에서 출발하는 까닭에, 거기에는 정치적 영역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계기와 그로부터 고립될 수 있는 계기가 동시에 존재했다.

3장에서는 1965년 이후 달라진 역사적 조건 속에서 종교적 이상주의에 내재한 정치적 가능성이 새롭게 전개되는 양상을 분석했다. 한일협정과 베트남 전쟁 파병이 화두였던 1965년 무렵 선우휘는 탈식민과 분단 극복이라는 역사적 전망이 퇴조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을 비쳤다. 

이 시기 발표된 작품들은 종교적 이상과 현실의 접점을 다시 모색하는 과정에서 선우휘가 이상에 대한 내적 충실성에 집중하면서 현실 대응력을 잃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역사의 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위해 요청했던 신념이 자기배반으로 귀결된 것이다. 말년의 선우휘 소설에는 이와 같은 자기모순에 대한 인식과 이를 처리하기 위한 고투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 이러한 성찰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다름 아니라 이상과의 괴리가 점차 심화되어가는 현실 그 자체였다. 종교적 이상과 역사적 상황은 서로가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는 가운데 끊임없이 재검토되었고, 이에 따라 둘의 관계 역시 재조정되었던 것이다. 선우휘 문학이 보여주는 것은 곧 그 접점에 대한 치열한 모색의 자취이다.
Language
Korean
URI
http://hdl.handle.net/10371/138022
Files in This Item:
베트남전쟁과 선우휘의 변모




우리말글

약어 : 우리말글

2014, vol.63, pp.353 - 378

DOI : 10.18628/urimal.63..201412.353

발행기관 : 우리말글학회

연구분야 : 한국어와문학

Copyright © 우리말글학회
김종욱1


1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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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그동안 한국문학사에서는 베트남전쟁을 비판적으로 다룬 작품들을 높이 평가해 왔다. 그렇지만, 50여 년 전 한국군이 베트남전쟁에 처음 개입한 직후의 문단을 살펴보면, 이러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966년 『중앙일보』에 연재된 선우휘의 「물결은 메콩강까지」는 그 대표적인 예이다. 「물결은 메콩강까지」는 [조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재직하던 선우휘가 필화 사건으로 물러난 후 발표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삶의 무기력을 벗어나기 위해 베트남에 종군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주인공이 베트남으로 가는 길에 들른 일본에서는 J.P.사르트르를 비롯한 반전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반전운동가들과의 논쟁을 통해 참전의 정당성을 확인받으려고 시도하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한다. 작가는 이러한 실패를 감추기 위해 국가주의를 내세우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이성적인 판단 대신에 종교적인 신념을 내세운 S.키에르케고르의 논리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물결은 메콩강까지」는 이처럼 선우휘가 문학적 원천이었던 사르트르와 결별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함께 선우휘는 1960년대 초반까지 권력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던 현실비판적 지식인의 자리에서도 벗어나기 시작한다. 선우휘의 문학적 변모를 월남민 의식뿐만 아니라 베트남전쟁을 계기로 한 국가주의 의식과 관련시켜 설명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키워드


선우휘, 베트남전쟁, 희생, 죄의식, 국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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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tailed Inform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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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휘의 세계관과 윤리

Authors
이정석
Issue Date
2010
Publisher
현대문학이론학회
Keywords
Culture; Resentment; A student soldier; Conservative liberalism; 학병세대,교양,원한의 주체론,구도자적 영웅
Citation
현대문학이론연구, no.42, pp.215 - 235
Journal Title
현대문학이론연구
Number
42
Start Page
215
End Page
235
URI
https://scholarworks.bwise.kr/ssu/handle/2018.sw.ssu/15274
ISSN
1598-124X
Abstract
선우휘는 전후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식민지 체험을 중심으로 전후문학 작가 선우휘의 문학을 논해 보고자 했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선우휘는 정치의 영역을 철저히 부정하고 일체의 정치를 윤리로 환원함으로써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윤리적 인간학을 반공 이데올로기를 합리화하는 근원적 지반으로 정초시킨다. 이때, 그가 정초한 윤리는 역사적 현실을 초월한 소박한 인륜의 차원에 뿌리를 두고 있는 동시에, 일본 식민지시대 학창문화라는 특정한 역사적 맥락과 결부되어 탄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매슈 아널드(Matthew Arnold)의 교양(culture)개념과 불과분의 관계를 가진다. 그는 현실세계의 구조적 문제점을 배제한 채 개인의 도덕적 변화와 정신의 완성이 현실적 모순과 부조리를 지양하는 근원적 힘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도덕적 미덕과 선한 삶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태도는 필연적으로 공공영역과 개인의 권리를 부정하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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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ird University College > ETC > 1. Journal Art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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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병, 전쟁 연쇄 그리고 파병의 논리 -선우휘의 「물결은 메콩강까지」(1966)를 중심으로-

사이間SAI

약어 : 사이間SAI

2018, no.25, pp.155 - 193

DOI : 10.30760/inakos.2018..25.005

발행기관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

연구분야 : 한국어와문학

Copyright © 국제한국문학문화학회

장세진1
1한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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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선우휘의 「물결은 메콩강까지」는 베트남 전투병 파병이라는 당대의 사회적 이슈와 관련하여 상당히 직접적인 친정부적 프로파간다의 성격을 띤 작품이다. 이글에서 주목한 것은 이 작품이 파병을 찬성하는 근거로 전형적인 냉전 논리인 반공주의를 동원할 뿐만 아니라 이에 더해 과거 아시아․태평양 전쟁에 학병으로 참전한 경험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우휘의 텍스트를 단지 베트남 파병이라는 개별적인 사안 뿐만 아니라 한일협정 체결이 상징하는 ‘65년 체제’라는 보다 포괄적인 맥락에서 읽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당시, 학병은 1960년대 한일협정 반대 국면을 거치면서 민족의 수난과 역사의피해자로 스스로를 일관되게 상상하게 만드는 아이콘이었다. 수난자로서의 피해의식이 공론장에 팽배해 있는 가운데, 이 정서를 파병 국면으로 연결시킨 것이 바로선우휘의 「물결은 메콩강까지」였다. 

이 텍스트의 내적 논리에 의하면, 미국 편에서서 베트남전에 가담하는 것은 과거의 전쟁들-아시아․태평양전쟁, 한국전쟁-에서와 마찬가지로 역사에 의해 개인이 원하지 않는 운명을 맞이하는 일이 된다. 

한 발 더 나아가, 이 텍스트는 운명을 감내하는 영웅적인 비극의 윤리를 베트남전쟁을 배경으로 설파했다. 물론, 이 시기에 학병 체험을 정면으로 다루며 쓰여진학병수기들의 경우, 기본적으로 반전(反戰) 평화의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반전은 과거 전쟁들에 국한해서였고, 현재 진행 중인 베트남전쟁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65년 체제’가 반(反)식민의 저항적 민족주의의 정서를 최대치로 이끌어낸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결국 반일민족주의로 협소하게 고착된다. 이로써 현재의 아시아를 대상으로 한 신식민주의에 적극 가담한스스로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되는 결과가 된다.

키워드
베트남전쟁, 선우휘, 관전사(Trans-War History), 파병, 아시아˙태평양전쟁, 65년 체제, 학병, 운명, 비극, 반일민족주의, 신식민주의, 정치의 미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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