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01

제3장 민족의식의 기원 민족주의론: 11주 임지현

제3장 민족의식의 기원

민족주의론: 11주
임지현
20세기부터 한국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민족’의 개념 안에서 살았다. 자신을 ‘한국인’이라
고 인식하는 한 모든 구성원들은 민족주의자가 되었다. 민족주의는 한국사회에서 부정할 수
없는 정도의 힘을 가졌다. 이에 따라 정치적 성향(방향)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념적 정당성을 민족주의에서 구하려 했다. 물론 민족주의자가 되지 않는 것이 비정상적일
한국의 역사를 볼 때 이는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또한 민족주의는 그 자체로서 완벽한
모습을 갖추지 못한 2차적 이데올로기의 모습을 보였는데 이러한 민족주의가 문제가 되는
경우는 민족주의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 민족주의와 결합되는 타 이데올로기가 그
문제를 발생시키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또한 민족주의는 단순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회
변동의 핵심적인 정치,사회 운동이기도 했다. 여기서 화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바는 ‘오늘날 한국 민족주의의 스펙트럼은 어떠하며, 어떠
한 민족주의를 지향해야 하는가’이다. 이를 위해서는 민족주의의 역사성에 대한 제대로 된
성찰이 요구된다. 그런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데올로기로서 발전한 한국의 민족주
의사학은 오늘날 한국 사학계의 주류로서 우리 사회에 이념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념적 정당성은 인식론적 가치를 당위적으로 확보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의 가장
큰 문제점은 민족주의사학이 ‘민족적 형식’을 과도하게 강조한 나머지 민족 자체를 초역사
적, 자연적 실재로 잘못 전제한다는 것이다. 남한에서의 레드컴플렉스와 북한에서의 양키컴
플렉스 모두 민족주의를 이용한 체제유지이데올로기로서의 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냈었다. 이
를 극복하기 위해 화자는 민족적 형식의 관념적 질곡에서 해방되는 것을 그 방안으로 제시
한다. 화자는 한국의 역사에 대해서 기존의 민족주의 사학의 해석과 그 방향을 달리한다. 화자
가 보기에 고려 이전 삼국시대에는 ‘민족’(단일민족)의 개념이나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고 민
족체 역시 형성되지 않았다. 물론 타 국가(중국,일본)들 보다는 조금은 더 유사성이 존재했었
지만 그것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간 역사적 경계를 지울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기존의 민족주의 사학은 이 세 국가의 ‘민족성’에 의한 자주적 통일이 아닌 외세의 힘을 빌
어 발생한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 ‘외세의존적 반민족적 사건’이라 규정한다. 하지만 이는
화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던 ‘한민족’의 개념을 현대의 시각에서 부당
하고 과도하게 전제한 것이다. 그리고 화자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통해 삼국의 주민들이 공
유하게 된 역사적 경험과 이전부터 존재하던(희미했지만) 언어적 유사성을 토대로 ‘한국 민
족’의 민족체 형성의 중요한 계기가 발생했다고 본다. 하지만 민족구성의 객관적 요소로 분
류되는 언어,문화,혈통 역시 ‘장기지속’될 뿐 불변은 아니며 장기적으로는 변동하는 것이다. 또한 통일신라와 발해, 즉 남북국시대 역시 화자의 입장에서 볼때는 다시 한 번 생각되어
야 할 시대이다. 주류인 민족주의사학이 보기에 남북국시대는 원래 하나여야 할 발해와 신
라가 대립으로 인해 ‘분리되어버린’ 역사이다. 하지만 화자가 보기에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는 발해와 신라 사이에는 민족적 통일성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발해의 주체인 고구려유
민과 말갈족이 신라와 한국 민족체에 편입될 필연적 이유가 없었으며, 이탈할 가능성이 편
입될 가능성만큼이나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을 볼 때, 민족주의사학이 가지는 과잉
된 민족의식에서 발생한 가정들은 민족을 초역사적 실재로 전제하는 면에서 비현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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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러한 단일민족에 대한 집착은 민족체가 가지는 경계(boundary)에 대한 개념이 아닌
근대국가가 가지는 국경(frontier)의 개념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역사사실을 당대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역사인식의 기본자세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 화자는 고려의 후삼국통일에서 ‘민족체 수준에서의 통합을 향한 중요한 진전, 구심적 역
할’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고려의 통일 이후로 한반도 내, 과거 삼국의 주민들이 하나
의 역사적 공동체로서 천 년 이상 존속되었고 민족체의 경계가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하지
만 민족체의 통합이란 민족구성의 객관적 측면(언어, 문화, 혈통 등)에서 일정 수준의 동질성
이 형성되었다는 것이지 모든 주민들이 적극적인 민족의식, 혹은 귀속의식(민족구성의 주관
적 측면)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고려 민중의 외세에 대한 투쟁 역시 화자가 보기엔 민족주의사학이 과도하게 평가해
버린 면모 중 하나이다. 화자는 당시 고려의 주민들이 외세에 반해 투쟁한 이유가 굳건한
민족의식이 아닌 ‘향촌의 자위적 측면, 수호의식’이라고 말한다. 비록 농민들이 당시 민족전
통의 발생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었겠지만, 이 사실이 농민들의 적극적 민족의식까지 보
장하는 것은 아니다. 농민들의 집단 자의식이 적극적 민족의식의 수준에 이르기 위해선 1)봉
건적 신분제가 철폐되고 ‘우리’의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새로운 질서에 기초해 민족공동체
가 발생했어야 했고, 2)민족의 수직적 통합을 정당화할 수 있는 다른 이데올로기가 필요했
다. 하지만 당시 고려사회에서는 이러한 두 가지 모습이 둘 다 발생하지 못했다. 물론 몽고
와 같은 이질적 집단의 침입이 고려인들 사이에 내부적 동질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는 계
기가 되긴 했을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와 같은 책의 편찬, 그리고 삼국부흥운
동이 이후 역사에서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볼 때 고려후기부터는 어쨌든 민족체적 경계
가 대체로 완성되고 민족체적 결속력도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해졌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를 고려 민족의 ‘국민적 결속, 일체감’으로 비약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한국사의 특수성은 크게 ‘민족적 일체감’과 ‘중앙집권적 국가정치체제’이다. 조선사회를 보
면 알 수 있듯이 조선사회는 유럽의 봉건사회와 비교해봤을 때 훨씬 더 중앙의 권력이 강하
고 중앙집권적인 모습을 보인다. 조선에선 조선왕조의 독자성을 강조하는 여러 모습들이 포
착된다. 그런데 조선사회에서 발견되는 ‘사대’와 ‘자주’의 공존의 모습을 볼 떄 민족체의 완전
한 형성과 공고화에 대해 말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당시 조선 왕족, 상류계층에서 발생
한 정통성 확보나 신화 만들기가 민족체 형성에 기여한 점만을 일방적으로 주장한다면 이는
‘민중-민족’의 개념을 배제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그런데 근대적 시민사상 이전에선 민족에
대한 논의를 할 때 대중(민중)은 필연적으로 배제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러한 민족의식의
형성에 참여할 만큼 정치적인 권한을 가지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엔 관료와 민중이
협력하기보다는 대립하는 관계였다고 보는 것이 맞으며, 이는 전근대적 중앙집권화가 가지
는 한계로 보인다. 화자는 14세기 영국의 경우에도 민족의식에 대한 주장이 없었다는 것을
예로 든다. 민족주의는 역사주의와 낭만주의에 기초해 발생하지 않았고, 신고전주의와 계몽사상에 의
해 발생했다. 근대 민족주의가 이상형으로 잡은 것은 바로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이나 로마
공화정의 시민공동체적 삶이었으며, 이를 근대적 조건에 맞추어 복원하려는 시도가 바로 근
대 민족주의의 발생 원인이었다. 프랑스혁명은 이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낸다. 프랑스혁명을
통해 근대 민족주의가 발생할 수 있었던 원인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봉건사회의 신분제 철
폐’와 ‘인민주권사상으로 민중을 민족의 틀에 합류’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조
건들을 무시한 채 민족주의를 원시종족주의(Nativism)이나 원초적 충성심과 동일시 한다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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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혁명으로 역사에 나타난 민족주의를 회고적 보수의 틀에 다시 가두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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