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01

알라딘: 기억 전쟁 임지현 2019

알라딘: 기억 전쟁

기억 전쟁
가해자는 어떻게 희생자가 되었는가 
 
임지현 (지은이)   휴머니스트   2019-01-28

300쪽150*220mm472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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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오늘날 우리는 과거 비극의 가해자와 공범자가 희생자로 둔갑하고, 누가 더 큰 희생자인지를 놓고 희생자와 희생자, 희생자와 가해자가 경쟁하는 웃지 못할 소극을 마주하고 있다. 가해자와 희생자, 희생자와 방관자, 희생자와 희생자 사이에서, 그리고 과거에 연루된 전후세대 사이에서 복잡다단한 기억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그리고 비극의 역사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지어야 하는가?'

그동안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의 관점에서 탈민족 담론을 주도하며 한국 지식사회를 흔들어온 역사가 임지현 교수가 '기억 활동가'로 변신을 꾀하며 내놓은 책이다. 그는 '기억 연구(Memory Studies)'를 통해 홀로코스트,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을 둘러싸고 어떠한 기억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살피며, '기억'과 '책임'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또한 한국과 동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의 기억 문화를 되돌아보고, 민족과 국경에 갇힌 기억을 넘어 전 지구적 기억의 연대로 나아갈 길을 찾는 공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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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프롤로그 기억은 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이다

1부 기록에서 증언으로

1.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
2. 아우슈비츠의 아포리아
3. 홀로코스트, 법정에 서다
4. 부정론자 인터내셔널

2부 실존의 회색지대

1. 전사자 추모비와 탈영병 기념비
2. 공범자가 된 희생자
3. 희생자가 된 가해자
4. 영웅 숭배와 희생자의 신성화
5. 아우슈비츠와 천 개의 십자가
6.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서
7. 1942년 유제푸프와 1980년 광주

3부 국경을 넘는 기억들

1.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와 일본군 ‘위안부’
2. 안네 프랑크와 넬슨 만델라
3. 홀로코스트와 미국 노예제
4. 식민주의와 홀로코스트
5. 홀로코스트와 제3세계
6. 나가사키와 아우슈비츠


4부 살아남은 자의 무게

1. 경계의 기억, 기억의 경계인
2. 수난담의 기억 정치
3. 용서하는 자, 용서받는 자
4. 논리적 반성과 양심의 가책
5. 이성과 도덕이 충돌하는 야만의 역사

에필로그 연루된 주체와 기억의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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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첫문장
《편린들:전시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 1939~1948(Fragments : Memories of a Wartime Childhood, 1939~1948》은 빈야민 빌코미르스키(Binjamin Wilkomirski)의 홀로코스트 생존 수기로서, 나치의 강제수용소 두 곳을 전진하며 살아남은 1939년생 유대인 소년이 기억을 더듬어 쓴 자전적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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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나치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광대한 흑토지대가 열렸을 때 나치의 식민장관 프란츠 폰 에프(Franz Ritter von Epp)는 아프리카 식민지 거주 경험이 있는 독일인들에게 먼저 이주를 권했다. 폰 에프에게 동부전선은 아프리카였고, 슬라브인은 ‘하얀 검둥이‘였다.
- 1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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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임지현 

최근작 : <기억 전쟁>,<촛불 너머의 시민사회와 민주주의>,<지그문트 바우만을 읽는 시간> … 총 30종 (모두보기)

서강대학교에서 역사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마르크스·엥겔스와 민족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양대학교 사학과를 거쳐 현재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며,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창립 소장이다. 바르샤바 대학, 하버드-옌칭연구소, 프랑스 고등사회과학원, 베를린 고등학술원, 파리 2대학, 빌레펠트 대학, 히토츠바시 대학 등에서 초청·방문 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글로벌 히스토리 국제네트워크(NOGWHISTO)’ 회장, ‘토인비재단’과 ‘세계역사학대회’ 등 국제학회의 이사로 있다.

폴란드 근현대사와 유럽 지성사에서 출발해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로 학문적 관심을 넓혀온 그는 ‘일상적 파시즘’, ‘대중독재’, ‘국사의 해체’,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등의 독창적 연구를 통한 신선한 문제의식으로 한국 지식사회의 담론장을 흔들었다. 현재 그는 민족주의적 기억을 탈영토화해 초국적 연대를 지향하는 동아시아의 기억 문화를 탐색하는 데 학문적 실천의 주안점을 두고, ‘역사가’에서 ‘기억 활동가’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수십 편의 학술논문 외에 《마르크스·엥겔스와 민족문제》,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오만과 편견》, 《세계사 편지》, 《우리 안의 파시즘》(공저), 《역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을 펴냈고, 《근대의 국경과 역사의 변경》, 《대중독재》 1~3, 《프랑스 혁명사 3부작》 등 다수의 책을 엮고 우리말로 옮겼다. 국외에서는 《Palgrave series of mass dictatorship》 총서(총 5권)를 책임 편집했으며, 미국·일본·독일·폴란드·프랑스 등 해외 유명 저널에 50여 편의 논문을 기고했다.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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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역사 전쟁에서 기억 전쟁으로
우리는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과거 비극의 가해자와 공범자가 희생자로 둔갑하고, 누가 더 큰 희생자인지를 놓고 희생자와 희생자, 희생자와 가해자가 경쟁하는 웃지 못할 소극을 마주하고 있다. 가해자와 희생자, 희생자와 방관자, 희생자와 희생자 사이에서, 그리고 과거에 연루된 전후세대 사이에서 복잡다단한 기억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그리고 비극의 역사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지어야 하는가?’
이 책은 그동안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의 관점에서 탈민족 담론을 주도하며 한국 지식사회를 흔들어온 역사가 임지현 교수가 ‘기억 활동가’로 변신을 꾀하며 내놓은 것이다. 그는 ‘기억 연구(Memory Studies)’를 통해 홀로코스트,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을 둘러싸고 어떠한 기억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살피며, ‘기억’과 ‘책임’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또한 이 책을 통해 한국과 동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의 기억 문화를 되돌아보고, 민족과 국경에 갇힌 기억을 넘어 전 지구적 기억의 연대로 나아갈 길을 찾는 공론의 장을 마련하고자 한다.

1.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면, 기억은 죽은 자와 산 자의 대화이다"
- 역사 연구의 새로운 지평으로서의 ‘기억 연구(Memory Studies)’


‘기억 연구’, ‘기억 전쟁’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아직 생소하다. 역사학 방법론이 문서와 기록을 근거로 산 자가 죽은 자를 심문하고 재단하는 데 치우쳐 있다면, 기억 연구는 산 자가 죽은 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에 응답해 죽은 자의 억울함을 산 자들에게 전해주는 영매 역할을 자임한다. 문서와 기록이 중심이 된 공식기억보다 개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적이고 친밀한 영역에 있는 풀뿌리 기억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로써 국가주의적?민족주의적 기억 문화와 실증의 이름으로 진짜와 가짜, 가해자와 희생자로 나누는 이분법에서 벗어나 역사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기억 연구에서 ’증언‘은 왜 중요한가? 기억 연구는 기존의 실증주의적 역사 방법론에 회의를 품고 이를 성찰하는 데서 시작된다. 대체로 힘 있는 가해자가 역사적 서사와 관련 문서를 독점하고 있는 데 비해, 힘없는 풀뿌리 희생자가 가진 것은 경험과 목소리, 즉 기억과 증언뿐이다. 그런데 증언은 불완전하고 감정적이며 때로는 부정확해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과 일본군 ‘위안부’나 난징대학살을 부정하는 일본 우익들에 의해 ‘실증’의 이름으로 무시되거나 그 가치가 훼손되기도 한다. 하지만 희생자들의 증언은 문서와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진정성’을 품고 있다. 저자는 “기억 연구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역사가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실증주의적 역사에 비추어 기억 연구에는 다른 무엇보다 윤리적 감수성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1961년에는 공교롭게도 이스라엘에서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재판이 열렸다. 재판을 지켜본 연구자들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증언에 주목했고, 이를 계기로 홀로코스트 연구는 문서 자료에서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서서히 중심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 기억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이히만 재판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증언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시켰다는 데 의의가 있다. 아무도 자신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지 않거나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말이다. …… 이는 훗날 역사 연구에 ‘감정의 전회(emotionalturn)’라는 패러다임적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감정의 전회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증언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실증주의적 방법론에 회의를 품고 이를 성찰하는 데서 출발했다. 문서만이 과거를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라는 실증주의의 폭력에서 증인들을 보호할 장치들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그 밑에 깔려있었다. ―〈아우슈비츠의 아포리아〉 중에서

심리학자인 도리 라우브(Dori Laub)는 …… ‘지적 기억’ 대 ‘깊은 기억’이라는 대조법을 통해 ‘사실’과 ‘진실’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통찰을 제시한다. 사건을 기록한 문서보다 부정확한 증언이 더 진정한 과거를 말해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1944년 10월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당시 “굴뚝 네 개가 폭파됐다”는 어느 생존자의 증언은 역사가들에게 거짓이라고 무시되어왔다. 이 증언은 폭파 현장에 굴뚝이 하나뿐이었던 사실과 분명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라우브는 오히려 사실과 어긋나기 때문에 이 증언이 더 진정성이 있다는 신선한 해석을 내놓았다. 라우브에 따르면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질 때, 인간은 그것을 과장되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굴뚝 하나가 사실에 부합하는 ‘지적 기억’의 영역이라면, 사실과 모순되는 굴뚝 네 개는 ‘깊은 기억’의 영역인데,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처럼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의 기억은 대개 ‘깊은 기억’에 속한다. 아우슈비츠 폭동을 목격한 생존자의 증언은 사실과 부합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어긋나기 때문에 더 진정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과 ‘진실’이 일치하지 않는 이 재현의 역설은 증언과 문서 자료의 역사적 진정성에 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아우슈비츠의 아포리아〉 중에서

2. 제대로 된 기억 문화를 위해 무엇을 질문할 것인가?
―전 지구적 기억의 연대를 위하여


누가 더 큰 희생을 치렀는지 경쟁하는 희생자 민족주의와 나치의 공범자가 피해자로 둔갑하거나 일제 침략의 역사 위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해의 역사를 덮어쓰는 등 기억의 정치가 난무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홀로코스트 생존자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들이 만나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고, 터키계 독일인들이 아우슈비츠에서 아르메니아 학살을 떠올리고, 미국의 흑인 민권운동가가 파괴된 바르샤바 게토에서 흑인 노예들의 아우성을 듣는 등 뜻밖의 장소에서 생면부지의 기억들이 만나 소통하고 연대한다. 이렇게 민족과 국경에 갇혀 있던 기억들이 서로 만나 얽히고 경합하고 연대하는 ‘기억의 지구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 제대로 된 기억 문화를 위해 무엇을 물어야 할까?
이 책에서는 ‘가해자가 어떻게 희생자로 둔갑하는가?’, ‘민족주의는 어떻게 공범자를 희생자로 만드는가?’, ‘전사자 숭배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선량한 학살자는 있을 수 있는가?’, ‘죽음을 무릅쓰고 탈영한 자들은 죽기 살기로 싸운 자들보다 비겁한가?’, ‘국적이나 민족을 기준으로 가해자와 희생자를 나누는 것은 정당한가?’ 같은 날 선 질문들을 던지며 전후 기억의 문제를 직시한다.

이러한 성찰적 질문이야말로 민족과 국경을 넘는 기억의 터를 만들고, 전 지구적 기억의 연대를 이끌어내는 힘이다. 이로써 전후 역사를 풀뿌리 기억을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희생자의 억울함을 풀고, 역사적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10월 24일,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색다른 비(碑)의 제막식이 열렸다. …… 이 비는 특이하게도 나치의 군사재판에 희생된 오스트리아인 탈영병을 위한 기념비였다. …… 전후 오랫동안 오스트리아인들은 자신들을 ‘히틀러의 첫 번째 희생자’로 기억해왔다. 그러나 이 기억은 조작된 것이다. 통계를 보면 적어도 인구 비율상으로는 오스트리아인들이 독일인들보다도 더 적극적인 히틀러 협력자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 흥미로운 것은 오스트리아인들이 스스로를 ‘히틀러의 첫 번째 희생자’라고 규정하면서도 히틀러의 군대에 복무한 자국 병사들을 의무를 다했다거나 심지어 영웅적이었다고까지 여겨왔다는 점이다. 반면 히틀러의 군대에서 탈영한 병사들은 ‘전우를 버린 배반자’로 인식해왔다. 그런 오스트리아가 수도의 중심부에 탈영병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는 것은 어쨌거나 사회적 기억에 변화가 있었다는 징표이다. ―〈전사자 추모비와 탈영병 기념비〉 중에서

폴란드인은 때때로 소극적 방관자를 넘어 그 이상으로 행동했다. 나치점령기 폴란드에서는 숨어 있는 유대인을 밀고하거나 사라진 유대인 이웃의 재산을 탐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고, 심지어 유대인을 사냥하듯 잡으러 다니는 사람들(일명 슈말초브니치szmalcownicy)도 있었다. 더욱이 일반 범죄자를 대상으로 거리의 치안을 담당하는 폴란드인 ‘청색 경찰’의 존재는 폴란드가 개인의 차원을 넘어 조직적으로 나치에 협력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렇게 일부나마 폴란드인이 홀로코스트의 공범자였다는 사실은 희생자 민족이라는 폴란드의 역사적 이미지에 재앙이나 마찬가지였다. 파시즘에 영웅적으로 맞서 싸운 사회주의 전사들의 나라라는 폴란드의 국가적 이미지도 크게 흔들릴 것이었다. 이들에게 홀로코스트에 협력한 과거는 자기비판적 성찰의 대상이 아니라 침묵하고 말소해야 할 기억이었다. ―〈공범자가 된 희생자〉중에서

히틀러와 나치 수뇌들에게 홀로코스트의 책임을 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들에게만 책임을 전가한다면 곤란하다. 동유럽의 학살 현장에서 실제로 유대인을 죽인 것은 나치 수뇌부의 펜이나 명령이 아니라 평범한 독일 병사의 소총이었다. 구조가 사람을 학살할 수는 없다. 오직 사람만이 사람을 학살할 수 있다. 나치의 학살 기계도 현장에서 그것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사람이 없다면 작동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학살 명령을 내린 권력자뿐만 아니라 학살 기계를 작동시킨 아주 평범한 실행자에게도 책임을 묻는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평범한 독일인’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평범한 사람’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 …… 나는 (나치의) ‘101 예비경찰대대’의 평범한 아저씨들이 유제푸프에서 저지른 유대인 학살과 그에 얽힌 기억을 힘들게 돌아보는 내내 광주를 생각했다.
―〈1942년 유제푸프와 1980년 광주〉 중에서

2013년 7월 30일,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 기억 활동가들이 미국 최초로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 시립도서관 앞 공원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웠다. …… 왜 하필 글렌데일이었는지 물어야 한다. 이는 해외에서 가장 큰 아르메니아인 공동체가 글렌데일에 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아마도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에 대한 기억이 글렌데일의 아르메니아인들로 하여금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에 예민하게 반응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 일본군 ‘위안부’의 기억이 미국의 버건 카운티와 글렌데일에서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나 미국 노예제, 홀로코스트 등의 기억과 만난 것은, 이 기억이 민족의 기억을 넘어서 트랜스내셔널한 보편 기억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뗀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 일본군 ‘위안부’,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미국의 노예제,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이 실제 역사 속에서 만난 적은 없겠지만, 생존자들과 그 자손들은 글렌데일의 소녀상 프로젝트나 버건 카운티의 ‘위안부’ 기림비처럼 그 아픔을 기리는 기억 속에서 만났다.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와 일본군 ‘위안부’〉 중에서

2006년 11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에 신고 접수된 조선인 B·C급 전범 86명 가운데 83명이 ‘일본의 전쟁 책임 전가행위에 따른 피해자’로 위원회로부터 인정을 받음으로써, 한국 사회의 공식 기억에서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자가 되었다. 전범으로 몰려 처벌받은 조선인 군무원들을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자로 기억하려는 한국 사회 공식 기억의 논리는 자기방어적이다. …… 개별 가해자가 민족의 이름으로 희생자 집단에 숨어 희생자로 둔갑하는 기억의 마술은 위험한 속임수다. 식민지 피지배 민족 혹은 피점령 국가의 일원이었다는 이유로 개인의 반인도적 범죄행위에 면죄부를 줄 수는 없다..…… 국적이나 민족을 기준으로 가해자와 희생자를 나누는 기억의 코드는 위험천만하다. …… 지원병으로 나갔다 돌아오면 순사나 면사무소 서기가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제국의 제도를 타고 넘으려 했던 식민지 조선의 가난한 청년들에게 ‘친일파’ 딱지를 붙이자는 게 아니다. 조선인 군무원이든 지원병이든 개개인의 가학행위를 따지지 않고 어쨌든 식민지 조선인이므로 그들도 모두 피해자였다는 주장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들을 모두 친일행위자로 몰거나 반대로 피해자로 뭉뚱그리는 양극단은 모두 풀뿌리 기억에 대한 공식적 기억의 폭력이다. ―〈경계의 기억, 기억의 경계인〉 중에서

한국 언론이 《요코 이야기》에 과민한 반응을 보인 것은 ‘일본=가해자’ 대 ‘한국=희생자’라는 이분법이 흔들리는 상황에 당혹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책에 그려진 ‘가해자 한국인’이라는 이미지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의 역사적 정당성을 저해하는 데 대한 불편함도 있었을 것이다. …… 한국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보여준 과잉반응은 의도치 않은 결과를 낳기도 했다. 《요코 이야기》가 ‘한국 때리기’에 맛들인 일본의 우익 출판사에서 일본어로 번역·발간된 것이다. 결국, 한국의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일본 사회에서 히키아게샤 이야기(引揚者物語)의 풍요로운 문학적 유산에 가려 아무런 존재감이 없던 《요코 이야기》를 부각시킨 것이다. 동아시아의 기억 공간에서 작동하는 한일 민족주의의 적대적 공범 관계가 이렇게 그 비밀을 슬그머니 드러냈다. ―〈수난담의 기억 정치〉 중에서

3. 전후세대는 어떻게 전쟁,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홀로코스트와 마주하는가?
―전후세대에게 ‘기억의 책임’을 묻다


역사는 지금 우리와 상관없는 과거일 뿐인가? 식민주의 제노사이드와 홀로코스트, 제2차 세계대전은 야만의 시대의 이정표일 뿐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인가? 전후 세대는 과거로 인해 만들어진 오늘의 혜택을 입고 있으므로 어떠한 형식으로든 과거와 연루되어 있다. 따라서 전후 세대에게는 과거에 벌어진 일에 대한 책임은 없지만, 지금 여기에서 과거를 제대로 마주하고 성찰하고 또 그 성찰의 기억을 지키고 끊임없이 재고해야 할 ‘기억’의 책임이 있다.
서구의 식민주의와 나치즘, 홀로코스트, 아파르트헤이트까지 언급하지 않아도 한국 사회에도 식민지배, 일본군 ‘위안부’, 베트남 전쟁, 민주화 운동 등 ‘기억의 책임'을 고민해야 할 과거의 비극들이 존재한다. 이 책은 우리가 비극에 대한 기억의 책임을 어떻게 지고 나갈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전후 세대가 함께 고민하고 지혜를 찾아가는 공론의 장을 제공한다.

기억 전쟁에서는 ‘집합적 유죄’의 논리로 가해 민족 전부를 단죄하거나 피해 민족 모두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집단 심성이 그야말로 완강하다. 독일의 전후 세대에게 홀로코스트에 대한 책임을 묻거나 일본의 전후 세대에게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는 일들이 자연스럽게 벌어진다. 이유는 그들이 독일인 혹은 일본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스라엘이나 폴란드, 한국의 전후 세대는 참으로 떳떳하다. 희생자 민족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강의 도중 학생들한테서도 그런 태도를 발견할 때가 적지 않다. 그때마다 나는 학생들에게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양민 학살에 대해 책임을 느끼는지를 묻는다. 베트남전쟁이 끝나고도 20여 년이 지나 태어난 세대이니, 까마득한 옛날 일을 책임질 수 없다고 답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면 나는 다시 묻는다. “베트남전쟁에서 벌어진 한국군의 잔학행위에 대해 자네들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왜 1945년 이후에 태어난 일본의 전후 세대에게는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끝난 일본 제국주의의 잔학한 통치에 대한 책임을 묻는가?”
―〈에필로그〉 중에서

한 독일인 친구가 털어놓은 이야기가 있다. 살아생전에 자기 어머니가 끔찍이도 소중히 여기던 어떤 도자기에 대한 기억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친구는 그 도자기가 옆집의 유대인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면서 싼값에 내놓은 물건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 모두에게 유대인 이웃이 남기고 간 그 도자기는 이 평범한 가족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나치의 범죄에 연루되었음을 보여주는 힘겨운 기억의 물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이야기를 해주는 내내 그 친구의 얼굴에서 곤혹스러움이 가시지 않았다. 친구의 곤혹스러움은 ‘연루된 주체’로서의 전후 세대가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과거의 사건과 자신의 실존적 관계를 고민할 때 생기는 딜레마 같은 것이기도 하다. 과거에 대한 성찰적 기억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 게 아닌가 한다. 그의 곤혹스러운 고민은 과거에 연루된 전후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그 비극을 기억할 책임을 어떻게 지고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로 이어진다. 전후 세대인 그의 고민이 지나간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그 곤혹스러운 과거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며 기억의 주체로서의 그, 곧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 〈에필로그〉 중에서

4. 임지현 교수의 학문 후반전, ‘기억 연구자’이자 ‘기억 활동가’로

1999년 《민족주의는 반역이다》를 출간한 이래 줄곧 역사학계에 강한 지적 자극을 던져온 역사학자 임지현. 폴란드 근현대사와 유럽 지성사에서 출발해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로 학문적 관심을 넓히며 ‘일상적 파시즘’, ‘대중독재’, ‘국사의 해체’,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등 탈민족주의 담론을 주도해온 그가 이번에는 ‘기억 연구’를 통해 진짜와 가짜, 가해자와 희생자 사이의 회색지대를 누비며, 전후세대의 역사적 책임을 돌아본다. 민족주의 기억을 탈영토화해 국경을 넘어서는 기억의 연대를 지향하며 서구 중심의 기억 연구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차원의 기억 문화를 탐색하는 데 학문적 주안점을 두고 ‘역사가’에서 ‘기억 활동가’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이 책은 …… 죽은 자들의 신원(伸?) 요청에 대한 나름의 응답이다. 지난 몇 년간 기억 연구를 진행해오면서, 역사가로서의 내 작업은 ‘기억 활동가’의 작업이라고 생각해왔다. 나 스스로를 역사가보다 기억 활동가라고 자리매김할 때도 많다. 그러나 죽은 자의 억울함과 원한을 풀어줄 ‘영매’의 수준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영매는커녕 그

발끝에도 미치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타자의 고통을 껴안고 그것을 내 정의로 삼기에는 인간이 덜 된 탓이다. 지금부터 반성한다고 해도 이미 늦은 감이 있다. 다만 가능성이 무한한 후학들이 죽은 자들의 신원 요청에 응답하는 기억 활동가로 나아가는 데 이 책이 밟고 올라설 만한 디딤돌이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 〈프롤로그〉 중에서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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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llastj  2019-10-04

중요한 문제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네이버에 연재될때부터 잘 봤는데 책으로 나와서 소장하려고 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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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쓰기


 닷슈   2019-12-27

 인권이란 개념이 없고, 세계시민이나 지구촌이라는 공통의 용어가 없던 시절. 그 땐 학살은 전쟁이나 정치, 종교의 부산물로 당연한 것이었다. 과거의 사람들은 먼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그러한 일을 잘 알지도 못했고, 오직 피해국 당사자들만 기억했다. 그들 역시 오랜 아픔을 갖고 한동안 피해를 기억하며 살았겠지만 아픈 기억은 오래 전승되지 못하고 비교적 빠르게 잊혀졌다.

 하지만 인권이 발명되고, 세계시민적 시각을 갖게 된 오늘날은 다르다. 반세기가 넘어 직접 가해자나 피해당사자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음에도 각 나라들은 이를 기억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며 터부시한다. 재밌게도 분명히 일어난 같은 사건에 대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반응은 극명히 다르다. 가해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의 가해를 부정하고, 오히려 가해과정에서 자신들의 잘못으로 입은 피해를 부각시킨다. 피해국은 피해자로써 이런 가해자의 행위 자체와 이후의 반성없는 모습을 용서하지 못하며 피해를 받는 과정에서 나타난 자신의 가해자적 모습을 숨기고 부정한다. 이처럼 양자는 같은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기억으로 인해 마찰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이 책의 제목 기억전쟁이다. 기억전쟁은 반세기전 대학살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겪었던 동아시아와 유럽에서 첨예하다.

 근데 이 기억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 우선 부정론자들의 등장이다.



1. 부정론들

 역사적 사건을 부정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단도직입적 부정론이다. 그냥 부정하고서 보는 것이다. 그런일은 절대절대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는 혐의의 부정론이다. 소문에 의해 피해 상대방에게 오히려 혐의를 씌우는 것이다. 이로써 피해당사자들을 격한 감정에 빠뜨려 흐뜨러트리는게 목적이다. 문제는 이들은 남에게 혐의를 잘 씌울지언정 자신의 가해혐의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일어난 세월호 사건에서 유족들에게 돈을 많이 받아내려 끝까지 저렇게 군다라는 것,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들을 향해 돈을 벌러 갔다라는 식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하며 악의적 혐의를 씌우는게 대표적이다.

 마지막은 가장 중요한 것인데 실증적 부정론이다. 실증주의는 글자그대로 피해자들이 당한 피해를 입증할 만한 물질적 증거의 부재를 문제삼아 피해를 부정하는 방법이다. 글자그대로 과학적 접근 방법에기에 당사 피해해자 가해자가 아닌 제 3자가 보기에 이 부정론의 파급력은 상당하다. 주요학문의 방법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은 한국의 주요 전쟁피해자들을 향해 그런 행위를 한 정부공식문건이 없다라는 식으로 일변한다(실제론 있다. 숨기고 있을 뿐.)

 문제는 그럴듯해보이는 이런 실증주의가 힘있는 자의 논리라는 것이다. 가해자들은 전쟁당시 강한 정부와 군대로 관련 문서를 스스로 생산했지만 피해자들을 그렇지 않다. 그들은 그저 끌려가서 당했을 뿐이고 그로인해 쓰라린 경험에 대한 감정과 목소리, 충격에 의한 불분명한 기억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피해의 문서를 내놓으란게 실증주의 부정론의 목소리인 것이다.

 게다가 실증주의 부정론자들은 정작 자신들이 그런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는 문서엔 역시 관심이 없다. 전형적인 내로남불식인 것이다.



2. 냉전과 민족주의

 올바른 기억을 방해하는 기억전쟁의 또 다른 요소는 냉전과 민족주의다. 일본은 동아시아의 최대 전범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소련등 새로운 냉전질서로 인해 주요 피해당사자인 한국과 대만, 동남아시아의 여러 자본주의 국가들은 미국에 의해 억지로 일본과 손을 잡아야만 했다. 이로인해 피해 기억은 냉전이라는 오랜 기간 수면아래에만 존재했다. 냉전이 끝난 후, 각국의 피해문제는 수면위로 올라왔지만 이제는 중국 대 미국, 일본이라는 새로운 축에 의해 다시 억압당하고 있다. 박근혜와 아베의 무리한 위안부문제 해결 시도는 미국과 중국에 의한 이런 새로운 대결축에 의해 다시 피해자들의 기억이 억압당한 사례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독일은 일본 같은 전범국이지만 서유럽은 당시 연합국에 의해 무참히 폭격당한 민간의 피해를 그리고 동독 지역은 소련적군에 의해 입은 무차별한 여성성폭행과 인적 손실의 기억을 냉전의 논리에 의해 오랜시간 감춰야만 했다. 아군에 의한 피해였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전쟁중 전사자나 희생자에 대한 신화로 피해의 기억을 억압한다. 거의 모든 국가는 그체제를 막론하고 죽아간 자들을 자세한다. 즉, 전사자 숭배와 전쟁미화의 시도로 국가를 언제든 동원체제로 유지하려는 것이다(그것이 경제든, 전쟁이든) 하여튼 이와 같은 논리로 전후 한국에서는 희생자는 잊혀지고 독립투사들만이 부각되었다(제대로도 아니다. 진영논리에 의해서 일부만, 그리고 이용했을 뿐이다) 전후 일본 역시 전쟁 중 희생자들을 강조하여 자신들의 가해자로서의 역사성, 그리고 피해자들의 기억을 망각했다.



3. 각 나라들의 기억들

그렇다면 이런 냉전과 민족주의, 부정론에 의해 뒤틀린 각 나라들의 기억을 어떠할까.

먼저 가해자들을 살펴보자



가.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냉전논리에 의해 서독은 서유럽은 연합국의 무차별한 폭격에 의한 민간피해를 동독은 소련적군에 의한 막대한 피해를 묻어왔다. 하지만 통일 이후 이러한 희생 기억이 수면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좋았지만 문제는 이런 희생자들을 나치치하 유대인의 고통과 동일시하기 시작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전형적인 역사성의 망각이다.

 이탈리아 역시 파시즘 정권을 합법적으로 일으키고 전쟁에 참여했음에도 역사성을 망각했다. 자신들을 파시스트들에게 이용당한 희생자로 여기며 일반 대부분의 이탈리아인들은 협조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희생자로 면죄부를 획득했다. 거기에서 한술 더 떠 잔학학 나치즘에 비해 자신들의 파시즘은 한층 유순했으며 모든 도덕적 끔찍한 일은 독일군이나 동성애자 마약중독자, 새디스트가 한 것으로 치부한다.

 오스트리아는 독일, 이탈리아에 비해 전쟁범죄에서 비교적 자유로워보인다. 독일에 적극 협조한 이탈리아와는 달리 오스트리아는 강제로 합병되어 전쟁범죄에 어쩔수 없이 참여하게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어쩌면 아시아의 다른 국가와 유럽국가들은 한국을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합병은 강제적이지 않았다. 실제로 1차대전 후 힘이 많이 빠진 당시 많은 오스트리아 국민들은 막강한 독일의 마르크경제에 병합되기를 희망했다. 그들의 적극성은 놀라울 정도인데 인구 700만중 나치당원이 무려 50만에 달했다. 거기에 더욱 적극가담자로 할 수 있는 나치 친우대의 비율은  본국인 독일의 8%를 아득히 상회하는 14%의 수준이다. 이런 전쟁범죄로 오스트리아 공산당이 주도한 전후 인민법원은 나치가해자와 공범자를 처벌했다. 하지만 이후 공산당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그 재판의 정당성 마저 부정하면서 재판의 처벌자들을 희생자화시킨다. 이를 통해 가해자들마저 희생자가 되는 오스트리아 전 인민의 희생자화가 완수된다.



나. 일본

 일본은 감히 미국에 대들다 원폭을 맞은 관계로 가해자임에도 희생자가 되기에 매우 좋은 조건을 맞이한다. 거기에 미국과 소련의 냉전구도하에서 미국 자본주의 진영의 한축으로 영입되면서 피해자인 다른 아시아 국가와도 손쉽게 화해하면서 국제적인 빚마저 강제 청산한다.

 이런 호기로 일본은 비교적 다른 전범국가들에 비해 손쉽게 가해의 기억을 부정하고 피해의 기억을 강화하는 코스프레가 가능했다. 그들은 군함도 같은 가해의 장소는 손쉽게 부정하면서도 나가사키나 히로시마등 피해자 코스프레가 가능한 부분을 문화재화하고 강조한다.

 특히 2차대전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전체에 피해를 입히는 만행이었음에도 단지 태평양전쟁으로 이를 칭하거나 미국과의 대결만을 강조함으로써 자신들의 가해행위를 가린다. 또한 전쟁의 패배과정에서 만주와 시베리아 한반도 등지에서 퇴각하지 못해 발생한 피해의 기억을 독일처럼 탈역사화하고 피해만을 강조하면서 국민이 협조한 전쟁범죄의 역사성도 지워버린다. (대표적인 예가 문제의 책 요코이야기다) 당시와 같은 총력전 체제에서는 아래로부터의 햅조없이는 전쟁수행이 불가능한 만큼 가해국가의 희생자는 총력전체제의 공범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가해자들이 그렇다면 피해자의 기억은 어떨까?



다. 폴란드

 폴란드는 독일이나 소련처럼 전쟁 당사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치와 소련에 의한 피해와 유대힌 홀로코스트로 무려 500-600만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폴란드는 아주 공정?하게 피해자의 수를 유대인 300만 폴란드인 300만으로 나누는데 유대인 피해자가 실제론 더 많은 것으로 생각된다. 폴란드의 전후 기억은 단순해서 폴란드인 자체도 유대인처럼 나치독일과 소련에 의한 피해자로 자신들을 생각한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폴란드에도 2차대전 나치의 전쟁범죄에 가담한 상당한 가해의 사실이 있다는 점이다.

 폴란드 내에서 유대인의 희생자수는 무려 300만으로 유럽의 어느나라보다도 가장 많다. 그리고 이는 단지 나치독일 뿐만 아니라 유대인 색출에 있어 폴란드 인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예다. 아무리 나치라도 점령국인 폴란드내에서 풀뿌리 식으로 유대인을 색출하려면 현지주민의 고발과 협조가 필수적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폴란드는 이 가해자로서의 기억을 가린다.

 냉전 역시 폴란드의 기억을 흐뜨러트린다. 폴란드는 전후 사회주의 국가로 편입되면서 자기땅에서 발생할 홀로코스트를 그 자체로 기억히가보다는 사회주의체제의 정통성을 확보하는데 이용한다. 나치는 국가사회주의지만 경제 체제는 자본주의 였기에 홀로코스트를 사회주의 입장에선 자본주의의 잘못된 부산물로 전용하기 쉬웠던 것이다. 폴란드의 민족주의도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을 흐뜨러트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숫자경쟁이 이루어졌고, 홀로코스트 내에 폴란드인 희생자 성지가 세워지기도 했다. 홀로코스트 자체보단 자신들의 희생을 더 강조하는 느낌이다.



라. 유대인

유대인은 전후 홀로코스트에 대한 피해자 입장을 꾸준히 견지했을 것 같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이는 이스라엘의 건국과 관련한다. 시오니스트들은 이스라엘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강한 민족주의와 영웅주의가 필요했다. 때문에 시오니스트들에게 유럽으로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역사는 영웅이나 지배자, 정복자, 주체적 인간이 없는 그야먈로 자비를 구걸하는 비겁한 역사에 불과했다. 때문에 유럽에서 비겁하게 빌붙어 살다 죽음을 맞이한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은 시온주의를 부정하고 팔레스타인 이주를 거부한 민족의 배반자에 불과하게 된다. 이 같은 시각은 북미로 이주한 유대인 공동체에서도 견지되었다. 스스로 구대륙을 떠나 신대륙을 개척한 유대인 공동체들은 자신들의 정착이 승리이자 영웅의 이야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은 자신들과 동일시 될수 없는 패배자에 불과했다

 이 같은 홀로코스트 피해자에 대한 인식 기류가 변화한 것은 1961년 아이히만 재판때부터이다. 여러개의 다각도 카메라와 가해자들과 피해자들의 증언이 뒤얽힌 이 재판에서 많은 사람들은 유대인 피해자에 대한 강한 공감, 그리고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에 휩싸이게 된다. 이후 유대인들의 입장은 극적으로 변화하여 영웅적 시온주의에서 홀로코스트 피해자들과 자신들을 동화시키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스라엘의 국가존재이유도 홀로코스트로 인해 정당화되기 시작하였다.



마. 중국과 한국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만행은 냉정논리와 민족주의에 의해 억압되었다. 이를 위로 일깨운 계기는 베트남전이었다. 베트남 반전운동은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억압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는데 시작은 모순되게도 아사히 신문의 일본기자 혼다 가쓰이치였다. 혼다는 베트남전을 취재하며 드러난 민간인 학살과 여러 만행을 보며 자신들의 전쟁에서도 이러한 흔적이 있지 않았을까라는 당연한 의문에서 르포를 시작하였다.

 그는 일본의 만행중 대표적인 사건인 난징대학살에 주목하였고 여러 취재끝에 만행을 폭로한다. 그의 르포는 아직 냉전중에기에 동북아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일본내에서는 보수주의자들이 난징사건의 역사적 의미를 축소하기 위해 날뛰었고 급기야 사건을 일본 좌파들의 선전전책으로 축소하려 했다. 가장 분개해야할 중국의 마오정부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난징대학살에 관심이 없었다. 냉전체제 하에 주적인 미국 자본주의로 괜시리 일본 군국주의로 화살을 돌려 체제의 역량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일본군 학살 피해자보단 국민당 반동세력에 의한 피해자, 그리고 혁명적 순교자들이 우선시되었다.

 한국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북한과의 전쟁, 그리고 냉전으로 한국에서의 피해자 기억은 철저히 억압되었다. 독립투사와 한국전쟁의 희생자들이 영웅으로 국가중심의 경제개발에 이용되었으며 일본식민지에 의한 피해는 냉전과 경제개발이 어느정도 정리된 90년에 이르러서야 터져나왔다. 한국 역시 폴란드처럼 일본 전쟁과 식민지에 의한 피해자로서의 의식만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가해국인 일본의 태도가 독일과는 전혀 다른 만큼 이 이상으로의 의식 발전이 어려운 상태다.

 하지만 폴란드의 경우처럼 한국은 일본의 장기간 식민지배를 받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갔고, 전쟁에 끌려가서 일본의 전쟁범죄에 협력한 과거가 있다. 실제로 87명정도의 일본군 소속 한국인이 전범재판 끝에 유죄로 인정받았음은 적극적 협력의 반증이 될 수 있다.



4. 앞으로 기억이 나아가야 할 길.

과거의 분명한 기억은 전후 각국의 경제, 외교적 지형이 새롭게 그려지거나 민족주의 혹은 인종에 의해 억압받았다. 이러한 억압된 기억들이 90년대 들어서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 냉전의 종식과 비슷하게 등장한 공적영역에 힘입은 바 크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적영역에서의 기억조차 자신이 좀더 큰 피해자라는 제로섬 게임에 빠진 상황이다. 실제로 폴란드는 유대인과 자신들 중 어느쪽이 더 큰 피해자인가라는 점에서 민감하게 굴고 있으며 책에 등장하는 아르메니아 인들은 일본군 성노예 같은 피해에 공감하면서도 자신들의 피해가 질적으로 더 높다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설상가상으로 홀로코스트에는 인종주의적 요소나 민족주의적 요소도 가미된다. 유대인 홀로코스트의 피해는 실제로 막심하지만 지구 역사상 존재해온 그 어떤 홀로코스트보다 피해가 비극적이고 크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코스트에 유럽과 북미사회가 주목하는 것은 이것이 같은 백인을 대상으로 한 만행었기 때문이다. 즉, 같은 문명인들간의 잔혹범죄였기에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유럽과 북미는 그리 큰 시간차이가 나지 않음에도 벨기에의 콩고민 학살(1000만명), 호주의 테즈메니아인 절멸사건, 미국의 선주민 제노사이드(1800만명)등의 홀로코스트에 철저히 무관심하다. 그네들이 나치의 하켄 크로이즈엔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임에도 일본의 전범기인 욱일기에 탈역사적이게도 디자인적으로만 접근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비문명 야만인간의 학살엔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예로 2차대전후 일본군이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를 점령후 네덜란드 여성을 성노예로 삼은 것은 큰 문제가 되었지만 다른 아시아 국가들 여성들의 피해에 서구사회는 무관심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책은 원론적인 답을 제시한다. 과거의 기억은 지배적인 사회, 문화적인 코드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되고 영향받을 수 밖에 없다. 즉 민족이나 계급, 인종, 젠더, 세대등 특정 이념에 기초한 경우 피해의 기억은 오염될수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요코이야기의 경우처럼 아무리 생생한 기억이더라도 맥락을 탈역사화하는 것을 극도록 경계해야 한다. 결국 풀뿌리 기억은 철저히 역사적 맥락하에 모든 이념을 넘어서는 평화와 인권의 개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은 용서다. 이미 전쟁범죄의 피해 당사자와 가해자는 대부분 한 많은 세상을 등졌다. 기본적으로 용서는 피해당사자가 가해자로부터 받아야 하는 것이기에 그들이 대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용서는 이미 어려운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그들과 민족공동체라는 이유로 대신 사과하고 대산 용서하길 원한다. 그러나 섣부른 용서와 화해는 억울한 피해자를 망각하게 만듬으로써 피의 얼룩을 모른체하는 거짓평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책은 용서와 화해라는 말보다는 양자가 서로 과거의 끔찍한 과거를 아프게 인정하고 끊임없이 직시하며 살아가는 것을 제시한다. 그래야 그와 같이 일이 적어도 다시 일어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기 때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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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사이   2019-03-20

임지현의 계속된 작업은 내게 줄곧 관심의 대상이었다. 폴란드 근대사에 대한 관심이나 아마 거기에서 많은 부분 비롯되었을 '민족주의'의 반동성에 대한 저술들이나 기억연구자라고 이름붙인 최근의 작업도 그러하다. (그가 최근 작업한 집시 전시회에 못가본게 참 아쉽다.) 그의 저술들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가 알고 있던 역사, 당연하게 해석되었던 역사에 대해 물음을 던지게 되고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성찰을 필수적으로 하게 된다.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해석의 프리즘(민족주의든, 사회주의든 무엇이든)을 벗겨내고 사실(그 사실조차도 가끔은 의심스럽지만) 그 자체에 대해 천착할 때 종종은 혼돈스럽고 '진실'은 저 너머 어딘가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 <기억전쟁>은 그의 많은 책 중에서 생각의 단초, 성찰의 계기를 가장 많이 제공하고 있는 저술이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많은 사건들은 대부분 홀로코스트와 같은 '학살'과 '전쟁'과 관련이 있다. 유대인 학살에서부터 2차대전, 폴란드와 동구에서 벌어졌던 살육들, 일본군에 의한/에 대한 많은 죽음들. 거기에는 그 학살을 주도한, 국가이든 군대이든 간에 하나의 집단과 그들의 이데올로기(또는 집단화된 신념)이 존재하고, 추후에 그것을 기억하는 한 개인들 또는 역사가들이 있다. 임지현은 그 이전 저술들과 마찬가지로 집단화된 해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을 기억하는 개인들, 그 개인들의 내면, 집단적 가치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개별자들의 내면에 더 주목하고 있다. 중심부의 해석을 벗어나 끊임없이 주변화한 시선으로 보기, 주변에 선 개인의 위치와 내면에서 응시하기. 집단 학살에 대한 역사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 학살을 겪어온 개인의 내면과 의식에 더 신뢰가 간다. 내가 프리모 레비나 스베틀라나 알렉세에비치의 책 같은 것에 더 이끌리는 까닭이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브라함 헤셀이 전하는 일화, 그리고 이와 관련된 시몬 비젠탈의 일화다. 기차안에서 랍비에게 폭력을 가했던 상인의 이야기, 랍비를 못 알아본 상인은 그를 자리에서 쫓아냈으나 추후에 그가 존경받는 랍비인줄 알고 용서를 구한다. 그러자 그 랍비는 "나는 그를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할 수가 없다. 기차 안에서 그는 내가 누군지 몰랐다. 그러니가 그는 내가 아니라 어느 이름없는 사람에게 죄를 지은 셈이지. 그러니 나 말고 그 이름없는 사람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는 게 옳다."



이 이야기에서 죽어가는 나치 친위대원은 죽기 직전 자신의 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자 수용소의 다른 유대인인 비젠탈을 불러달라 요청하고 그 앞에서 자신이 참여했던 유대인 학살에 대해 사죄하고자 한다. 자신의 행위를 두고 도저히 편히 죽음을 맞이할 수 없으니 다른 유대인에게라도 용서를 구하고 싶었던 것. 비젠탈은 그의 용서에 대한 간청에 아무 응답도 하지 않고 병실을 나온다. "그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을 용서할 권리를 위임받지 않은 상황에서 비젠탈이든 요제크든 또다른 누구든 그들을 대신해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누군가가 저지른 죄를 용서할 지 말지는 전적으로 피해 당사자가 결정할 일이다."



"용서는 때로 폭력적이다." 그것은 오롯이 그 폭력 행위를 당한 바로 그 개인이 할 수 있는 권리이지 누가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살인자에게 자식을 잃은 부모 역시 해당 살인자에게 용서를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서도, 집단과 집단의 관계에서도, 위안부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용서에서도, 독일국가가 유대인에게 용서를 구할 때도, 누군가를 대신하여 용서를 하고 사과를 하는 것은 거짓 화해이자 기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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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사랑   2019-10-01

식민지배의 불법성은 한일간의 역사 인식에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다. 식민지배의 불법성이 인정되면 식민지 시기에 벌어진 강제동원 및 일본군 위안부, 식민지 수탈 등에 대한 사죄와 배상 청구의 정당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 해석의 문제가 사법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면 증거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홀로코스트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도 예외는 아니다. “관련 기록이 있느냐” 또는 “사실관계가 의심할만한 구석이 없이 명백한가”라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이런 경우 기록이  아닌 생존자의 기억(증언)은 명백한 증거로 인정 받지 못할 수도 있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은 히틀러의 명령서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홀로코스트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증언 가운데 세세한 부분의 오류를 지적하며 증언의 신뢰도를 깍아 내린다. 이러한 내용을 잘 표현한 영화가 바로 레이첼 와이즈의  “나는 부정한다(Denial)”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주장 역시 같다. 일본군이 개입되어 강제로 동원했다면 일본군의 명령서가 존재할 텐데 이런 명령서는 발견되지 않았고, 그래서 ’위안부’에 대한 일본군의 개입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위안부’ 생존자들의 기억과 증언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임지현의 ‘기억 전쟁’은 이러한 과거 역사에 대한 기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생존자의 기억보다 문서의 기록이 우선시되는 실증의 문제에서 시작해서, 역사의 가해자가 역사의 피해자로 둔갑하게 만드는 기억 그리고 누가 더 큰 희생자인지를 경쟁하는 상황까지 복잡한 기억의 전쟁을 다루고 있다.

‘기억전쟁’은 독일 나치에 의해 자행된 홀로코스트에 대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기억을 통해 반인륜적 비극의 기억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왜곡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이를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라고 정의하는데 가해자였던 오스트리아는 자신을 나치의 첫 번째 피해자로 둔갑시키고, 유대인 학살에 동조했던 폴란드는 나치와 스탈린주의에 의한 자국민의 희생을 더 강조하며 자신을 피해자로 위치시킨다. 

이 책은 읽기에 따라서는 우리에게 다소 불편한 주제도 다루고 있다. “우리는 온전한 피해자인가?”라는 민감한 질문도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피해자로 정의하면 확고한 도덕적 정당성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과도한 도덕적 정당성은 자책의 자리를 점점 좁게 만들고 자신의 도덕적 성찰을 어렵게 만든다고 충고한다.

저자는 식민주의 제노사이드나 홀로코스트에 대해 전후 세대는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책임은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기억의 책임을 통해 홀로코스트와 일본군 ‘위안부’, 식민주의 제노사이드와 같은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국제적 기억 연대가 가능하고 더 나아가 이런 비극의 역사적 반복을 막을 수 있다.

‘기억 전쟁’과 더불어 홀로코스트를 다룬 자전적 소설인 ‘운명’도 같이 읽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임레 케르테스가 자신의 강제수용소 경험을 토대로 쓴 ‘운명’은 당시의 홀로코스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헝가리의 반유대주의는 최소한 홀로코스트의 방관자 내지는 소극적(?) 부역자였다. 같이 읽어보는 것도 ‘기억 전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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