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인생… 일상 속 모든 것이 수행이죠"
조선일보
김경은 기자
입력 2013.11.14 02:58
[티베트의 여성 승려 텐진 빠모… 조은수 서울대 교수와 삶을 말하다]
가난한 히말라야 여성 수행자 위해 학교 겸 수도원 세워 공부하게 도와
내가 바뀌면 세상까지 변하기 마련… 죽고 사는 데 너무 집착하지 말고 자신 안에 선한 본성을 일깨우세요
히말라야 1만3200피트 높이에 있는 작은 동굴(3m×2m)에서 12년간 수행했다. 33세 때의 일이다. 45세가 될 때까지 동굴에서 하루 3시간만 잤다. 여우의 울부짖음, 곰 발자국만이 그녀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수행을 끝내고 속세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스승(티베트의 8대 라마 캄트룰 린포체)은 그녀에게 여성을 승려로 인정해주지 않아 비구니가 되고 싶어도 되지 못하는 나라의 여성 수행자들을 위해 사원을 세우고 세계를 여행하면서 강연할 것을 권했다. 설산에서의 독거 수행과 흡인력 있는 강연으로 불자와 일반 대중에게 두루 인기가 높은 그녀의 이름은 텐진 빠모(Palmo·본명은 다이앤 페리·70). 티베트 불교에서 서양 여성으로는 두 번째로 출가한 여성 승려인 텐진 빠모 스님은 비구니계는 1973년 홍콩에서 받았다. 티베트 불교에는 비구니교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법명 '드룹규 텐진 빠모'는 '수행을 계승하는 가르침을 떠받드는 영예로운 여인'이란 뜻을 담고 있다.
세계불교여성협회의 한국지부인 샤카디타 코리아의 초청으로 지난 6일 방한한 텐진 빠모 스님은 서울 광화문의 한 호텔에서 조은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와 따로 만나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대담했다. 샤카디타 코리아는 여성 불자들을 위한 교육을 장려해 부처님의 가르침에 기반을 둔 세계 평화를 도모하고 종교 간 화합을 도울 목적으로 지난 7월 새로 만들어졌다. 조은수 교수는 본각 스님과 함께 샤카디타 코리아의 상임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텐진 빠모 스님은 세계불교여성협회 차기 회장 후보다.
텐진빠모(왼쪽) 스님에게 조은수 교수가 물었다. "한국 청소년들의 관심은 온통 수능 성적과 대학 입시에 쏠려 있어요." 스님은 "긴 인생을 먼저 보라. 당신이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세상 사람들은 관심이 없다. 자기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세상 사람들의 말에 이리저리 휘둘리다 인생을 망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덕훈 기자텐진 빠모 스님은 티베트 여승이 입는 붉은 밤색 승복을 입고 있었다. 파르라니 삭발한 머리가 새하얀 피부와 묘하게 어울렸다. 조은수 교수와 마주한 텐진 빠모 스님은 얼굴 가득 따뜻한 미소를 띠고 파란 눈동자로 조은수 교수의 두 눈과 길가에 나뒹구는 노란 은행잎, 부서질 듯 깨끗한 하늘을 바라봤다.
조은수 교수가 물었다. "오늘날 불교가 세계적으로 널리 유포되고 있는데, 사람들은 불교에서 무엇을 찾으려 하고 무엇을 기대하는 걸까요?" 텐진 빠모 스님은 "불교는 마음의 철학이다. 사람의 내면 행복을 돕는다. 남을 바꾸는 게 아니라 자신의 중심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바꾸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불교에는 대문자로 치장된 '자아', 즉 독립적인 실재 따위가 없어요. 인간을 자기 마음대로 부리는 외적인 절대자가 없다는 거지요."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게 왜 중요한가? 가족·직장·연봉 등 주위 상황은 바뀌는 게 없는데…"라는 기자의 우문(愚問)에 스님은 빙긋이 웃더니 "진정한 행복은 마음에서 솟아난다"고 했다. "비 오는 날이라 해서 우울한가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그 비마저도 아름답게 보일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 날 햇살이 퍼진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지요. 자신 안에 본래 갖춰져 있는 선한 본성을 보면 충만한 행복을 느낄 겁니다. 그 행복을 아는 사람이 결국 세상도 바꿀 거고요. 세상의 변화는 나로부터 시작합니다."
조은수 교수가 며칠간 곁에서 지켜본 텐진 빠모 스님은 "외부 세계에 끊임없이 반응하고 웃고 사랑을 보내면서 또한 그 속에 거대하고 고요한 바다와 같은 마음의 중심이 도도히 흐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텐진 빠모 스님 역시 피와 땀이 흐르는 인간이긴 마찬가지. 1943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텐진 빠모 스님은 굽 높은 구두에 화사한 옷을 차려입고 재즈 클럽에 가서 춤추는 걸 좋아한 평범한 소녀였다. 하지만 열세 살 무렵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우리 인간은 모두 죽을 것이며,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모두 늙어갈 것이고 병을 앓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모든 인간이 덫에 걸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이 끔찍한 상황을 사람들은 어떻게 모르고 살아갈 수 있는 걸까?"라고 끊임없이 되물었다. 18세 때 도서관에서 우연히 불교서적 '흔들림 없는 마음'을 읽고 평생 나아갈 길을 찾았다. 인도로 건너가 1964년 갓 스물한 살 때 불교에 귀의한 것이다.
조은수 교수가 물었다. "우리는 이 복잡한 현재 세계에서 어떻게 외부의 현란한 변화와 유혹 속에서 자신의 본성을 지키고 고요하면서도 진실하고 그리고 행복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을까요?"
봄 해빙 후 동굴 바깥에 흠뻑 젖은 소지품들을 내어 햇볕에 말리고 있는 텐진 빠모 스님. /김영사 제공스님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불쑥 인도 델리의 교차로 이야기를 꺼냈다. "거기에 가면 빨간 신호등마다 영어로 'relax'(마음의 긴장을 풀어라)라고 쓴 팻말이 달려 있어요. 운전대를 잡고 가다가 그 단어를 보고 잠시나마 호흡을 가다듬으라는 뜻이에요." 스님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들은 내게 물어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느냐고. 살고 죽는 문제는 중요한 일이지만 여기에 집착하는 건 무의미해요."
스님은 "머리카락을 깎고 장삼을 입지 않아도 일상에서 얼마든지 수행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운전하다가, 세수하다가, 설거지하다가 내면에 집중하면 돼요. 방법도 쉬워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자신의 호흡을 관찰하면 됩니다. 자기 삶에서 뭐가 중요한지 생각하면 삶이 달라져요."
텐진 빠모 스님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강연한 기금을 모아 2000년 북인도 따시종 근처에 '동규 갓찰 링' 사원을 세웠다. 히말라야 지역의 가난한 여성들을 거둬 공부를 가르치고, 원하는 이들은 비구니가 될 수 있게 이끄는 학교 겸 수도원이다. 남성에게만 허용되는 어려운 불교 문헌들을 여성들도 읽을 수 있게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 등 불교 고전어와 영어를 가르친다. 또 티베트의 독특한 학문 수련 방법인 토론(디베이트)을 가르쳐서 비구니들이 손바닥을 마주치면서 각자의 의견을 말하며 논의할 수 있게 도와준다.
텐진 빠모 스님이 여성 교육에 매진하는 까닭은 "자신이 펼쳐야 할 영역은 스스로 개척하고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여성은 자신이 비구니라는 자긍심을 갖고 수행에 더 매진해야 해요. 진정한 깨달음은 여성 혹은 남성으로서 자신을 긍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니까요." 스님은 "이번 방한 일정이 끝나면 히말라야로 돌아가 그동안 해온 교육을 계속할 것"이라며 지난 12일 저녁 델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1/14/20131114000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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