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3

김용섭 학문적 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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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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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


김용섭 교수님이 돌아가셨다. 김교수님은 해방 이후 한국사학계 뿐만 아니라 한국학 분야에 미친 영향이 가장 큰 분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학이 식민주의적인 시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데에는 김교수님의 공로가 가장 컸다고 나는 생각한다.
1975년 내가 대학에 들어가던 해에 김교수님은 서울대에서 연세대로 자리를 옮기셨다. 때문에 나는 학부 시절에는 김교수님 강의를 들을 수가 없었다. 대학원에 들어간 1979년 첫 학기에 다행히 김교수님이 서울대와 연세대 대학원의 수업을 같이 하셔서 연세대에 가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강의는 한국근대사에 관한 것이었는데, 서울대에서 석박사 과정 합하여 아마도 15명 정도의 학생들이 연대에 가서 수업을 들었던 것 같다. 한국근대사에 관한 주요 논문들, 특히 일본에서 나온 논문들을 검토하는 시간이었는데, 매주 학생들이 서너편의 논문을 요약 발표를 하면, 그 논문의 의의와 이론적 배경을 설명하고 한계와 문제점에 대해 하나하나 지적하는 식으로 수업을 하셨다. 나는 그때 학문의 세계에 대해 처음으로 눈을 떴던 것 같다. 특이한 것은 그 수업에서 김교수님 책이나 논문은 한 번도 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김교수님은 자신의 생각을 우리들에게 충분히 전달하셨다. 
이후 김교수님의 책들을 열심히 읽었고, 그분이 보신 규장각의 자료들도 꺼내어 보았다. 그리고 몇 차례 김교수님의 연구실에 찾아가서 뵈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마다 교수님은 다정하게 맞아주셨고, 또 여러가지로 좋은 말씀을 해주셨다. 또 연구실을 나서서 되돌아 올 때면 꼭 엘리베이터 앞까지 배웅을 나와 주셨다. 나는 아직도 제자들이 찾아왔을 때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2011년 한국역사연구회에서 김용섭, 강만길 두 교수님의 회고록을 읽고 평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당시 일본에서 연구년을 보내고 있었는데, 각각 7백쪽이 넘는 두 분의 책을 열심히 읽고 요약과 소감을 쓴 적이 있다(박찬승, 식민사학과 분단사학 극복을 위한 분투, <역사와현실>82). 이제 삼가 김교수님의 명복을 빌면서, 그때 쓴 내용의 일부를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김용섭교수 하면 흔히 '경영형 부농' '자본주의 맹아론'을 이야기 하지만, 그분의 학문세계는 그보다 훨씬 폭이 넓고 또 깊었다. 조선후기의 농학, 조선후기 농업개혁론의 두 가지 길, 한말 일제하의 지주제와 이에 대한 개혁론 등이 그의 주된 연구 주제였다.  조금 길지만 아래의 글이 그분의 학문세계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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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조선후기 농업사연구는 왕조실록 등 관찬자료뿐만 아니라, 농서·양안·추수기·토지매매문기·절목 등 농업과 관련된 1차 사료를 분석하는 작업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1960년대 그의 연구 성과는 <조선후기농업사연구‒농업변동·농학사조‒> (1971, 일조각)로 정리되었다. 이는 훗날 더욱 증보되어 <조선후기농업사연구Ⅰ‒농촌경제·사회변동> (1995, 지식산업사)과 <조선후기농업사연구Ⅱ‒농업과 농업론의 변동‒> (2007, 지식산업사)으로 정리되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그는 농촌사회에서 신분의 차이를 넘어 농지소유에서 광범한 분화현상이 나타나고 있었고, 일부 평민층 가운데에서는 양반층 못지않게 토지를 소유한 이들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소작농민 가운데에서도 계층분화가 일어나 부농과 극빈농이 나타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여기서 그는 소작농민이 비교적 넓은 소작지를경영하여 부농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보면서 이를 경영형 부농 이라 칭하였고, 자경농민이 일부 소작지를 겸영하면서 부농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보면서 이를 지주형 부농이라 불렀다. 또한 그는 조선후기의 수전농업이 직파농법에서 이앙농법으로 전환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이를 통해 조선후기의 농업생산력이 발전할 수 있었고, 노동력이 절약되어 광작을 하는 부농도 등장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임노동을 이용한 상업적 농업도 등장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주지하듯이 이와 같은 그의 농업생산력발전론 상업적 농업론 경영형부농론 은 조선후기 사회를 정체된 사회로만 보아오던 한국사학계에 큰 파문을 던졌고, 이는 상공업에서의 자본주의 맹아론과 함께 이후 조선후기의 새로운 역사상을 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중략)
한편 그는 1970년대 이후 정년에 이르기까지 농업사연구의 일환으로서, 농서와 농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에 관해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는 조선의 농서뿐만 아니라 중국의 농서까지도 수집하여 이를 서로 대조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는 1970년 <조선후기농학사연구> (1988, 일조각)로 일차 간행되었고, 이후 증보 작업을 거쳐 <조선후기 농학사연구‒농서와 농업관련 문서를 통해본 농학사조‒> (2009, 지식산업사)로 마무리되었다. 그는 농서연구를 통해서도 조선후기에 수전농업에서 이앙법이 확대되어 가고 있었으며, 겸병광작을 확대시키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는 1970년대 이후에는 18세기말부터 19세기에 걸치는 시기를 중심으로 농업·토지문제를 중심으로 한 개혁론을 검토하였다. 이는 정약용과 서유구 등 실학파의 개혁론을 살피는 것부터 시작하여, 임술민란 이후 정부와 지배층의 삼정개혁론, 고종조의 토지개혁론, 개화파의 농업론, 광무개혁기 김성규의 농업개혁론 등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그는 당시의 농업개혁론 가운데에는 지주적 입장에서의 개혁론과 농민적 입장에서의 개혁론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하여 민란이나 농민전쟁은 단순히 삼정문란에 대응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민(民)의 사회의식·반체제의식이 역사적으로 성장하는 가운데 당시 농업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심각하게 의식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전개하고 있었던 혁명운동이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연구 성과들은 일단 <한국근대농업사연구> (1975, 일조각)로 묶였다가, 여러 편의 논문이 더 추가되면서 <한국근대농업사연구Ⅰ ‒농업개혁론·농업정책> (2004, 지식산업사), <한국근대농업사연구Ⅱ ‒농업개혁론·농업정책> (2004, 지식산업사), 그리고 <한국근대농업사연구Ⅲ ‒전환기의 농민운동> (2001, 지식산업사)로 증보 발간되었다.  
그는 또 1970년대부터 한말~일제하의 지주제에 관한 사례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는 일제의 한국침략과 강점으로 인해 빚어진 농업상의 변동을 살피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사례 연구를 모아 <한국근현대농업사연구 ‒한말·일제하의 지주제와 농업문제‒> 로 간행하였고, 이후 이를 보완하여 증보판을 냈다(2000, 지식산업사). 이러한 연구를 통해 그는 일제강점기의 농업은 일본인이 중심이 되고 일본자본주의의 지주제를 축으로 한 농업으로 재편되었다고 보았으며, 이에 따라 구래의 지주제는 더욱 강화되고 점차 일본자본주의의 방식으로 경영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구래의 봉건적인 지주제를 중심으로 한 모순구조와 농업문제가 이제는 자본주의적인 모순구조와 농업문제로 질적인 변동을 보이면서 심화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 시기 . 전개된 소작쟁의는 반제국주의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민족주의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성격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보았다. (중략)

회고록에서 그 과정에 대해 자세히 정리하고 있지만, 김용섭교수는 정년을 전후하여 자신의 저작물들을 모두 재정리하여 8권의 김용섭저작집을 펴냈다. 19세기 전반 다산 정약용은 유배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 뒤 자신의 저작물들을 모두 재정리하여 여유당집을 만들어놓고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글에 대해 마지막까지 책임을 지고 재정리를 하여 후세에 남기려 한 다산선생, 그리고 이러한 자세를 계승하려 한 김용섭교수. 두 사람의 학자로서의 자세는 후학들의 귀감이 된다고 생각된다.




주진오
2sllg1c tSteOscnSiepdmtoobeeranii sat lot08r:33eds  · 
저의 은사이신 김용섭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셨다는 슬픈 소식을 어제 저녁에 들었습니다. 1931년생이시니까, 올해로 90세를 살다 가셨어요. 빈소는 서울대 병원에 차렸다는데, 아직 부고 기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코로나19로 인해 유족들이 문상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선생님께서는 현재 활동하는 역사학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국사학계의 ‘숨은 신’이라고 까지 했었지요. 하지만 ‘학자는 논문으로 말해야 한다’는 소신을 평생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대중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분이기도 했어요. 
선생님께서는 제가 입학하던 1975년에 마침 서울대에서 연세대로 오셨습니다. 이미 선친의 추천으로 선생님의 불후의 명저 [조선후기농업사연구] 두 책까지 읽었던 저는, 당연하게 선생님을 지도교수로 신청을 했지요. 그 후 석사와 박사 지도교수도 물론 선생님이셨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학문을 제대로 계승발전 시켰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제자가 되고 말았어요. 그래도 엄격한 지도를 따르다 보니, 이만큼이라도 역사학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선생님과 있었던 이야기들이 정말 많았는데요. 언젠가 한번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아무리 코로나19 상황이라 하여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역사학자의 가시는 길이 이래도 되는지 안타깝네요. 오늘 하루만 조문이 가능하다고 하는데, 유족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인사는 꼭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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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주관장님이 김용섭 선생님 제자시군요. 역시나!
 · 2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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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윤
2sllg1c tSteOscnSiepdmtoobeeranii sat lot11r:14eds  · 
< 부음 >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한국사왜곡을 바로잡는데 결정적 초석을 놓은 한국근대사 연구의 태두 김용섭 선생님(연세대 사학과 전 교수)께서 10월 20일 심야에 운명하셨습니다. 
선생님의 학문적 성취와 뜻을 기리며, 깊이 애도합니다. 
"조선은 근대로의 이행이 자생적 힘으로 불가능했다"는 일제의 식민지반봉건사회론을  실증적으로 극복하고, 토지대장 분석을 통해 조선의 농업자본 맹아론을 확립한 그의 <조선 후기농업사연구 1,2>는 말 그대로 학문적 금자탑이었습니다. 
(그 분의 수업은 학부와 대학원 시절 가장 큰 기쁨이자 보람이었고, 이 청맹과니에게  역사에 대한 눈을 뜨게 해준 강의였습니다. 유일하게 한 번도  결석하지 않은 수업ᆢ. 
부음을 접한 뒤 동학들의 후일담을 들어 알게 된 일화. 요시찰 대상 학생들 자취방에 고기나 먹거리를 사들고 찾아가 격려하셨더군요. 물론 티 나지 않게. 그 무지막지한 전두환 독재 시절 상상 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 분의 저작은 사회과학 써클  커리큘럼(사구체 논쟁 등)의  필독서 중 하나였지요.)
연구직에 있는 후학들이 선생님의 학문적 엄밀성을 더욱 갈고 닦으리라 기대합니다.
북녘 가족들의 소식을 오매불망 기다리셨다는데, 끝내 상봉하지 못한 채 눈 감으신 게  애닯습니다. 학자이자 선비의 길이 어떤 것이라는 걸 한 평생 실천으로 보여주신 김용섭 선생님 영전에 향 한 자루 사릅니다. 
(*빈소 : 서울대병원 2호실. 21일 하루만 조문 가능하나, 상주와 가족들께서 조문을 최대한 사양하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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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군
선생님의 수업 듣던 때가 기억나는데...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 Reply · 2 d
장미현
t21Smg Ohgpoctdeonoicbetru lsalftgsoh 10u:Sur39ed  · 
12년 전 지팡이를 집고 방기중 선생님 장례식장에 
힘겹게 들어오셨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편히 쉬세요, 선생님.
한국농업사 대가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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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업사 대가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 별세
(서울=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한국농업사의 대가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가 20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서울대 사범대 사학과를 졸업한 고인은 당시로서는 척박한 한국농업사 연구에 평생을 투신하며 '조선후기농업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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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g Deuk Oak
2sllg1c tSteOscnSiepdmtoobeeranii sat lot11r:34eds  · 
한국농업사의 대가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가 20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아래 박찬승 교수님의 글(2011)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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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조선후기 농업사연구는 왕조실록 등 관찬자료뿐만 아니라, 농서·양안·추수기·토지매매문기·절목 등 농업과 관련된 1차 사료를 분석하는 작업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1960년대 그의 연구 성과는 조선연구‒농업변동·농학사조‒ (1971, 일조각)로 정리되었다. 이는 훗날 더욱 증보되어 조선후기농업사연구Ⅰ‒농촌경제·사회변동 (1995, 지식산업사)와 조선후기농업사연구Ⅱ‒농업과 농업론의 변동‒ (2007, 지식산업사)로 정리되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그는 농촌사회에서 신분의 차이를 넘어 농지소유에서 광범한 분화현상이 나타나고 있었고, 일부 평민층 가운데에서는 양반층 못지않게 토지를 소유한 이들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소작농민 가운데에서도 계층분화가 일어나 부농과 극빈농이 나타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여기서 그는 소작농민이 비교적 넓은 소작지를경영하여 부농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보면서 이를 경영형 부농 이라 칭하였고, 자경농민이 일부 소작지를 겸영하면서 부농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보면서 이를 지주형 부농이라 불렀다. 
또한 그는 조선후기의 수전농업이 직파농법에서 이앙농법으로 전환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이를 통해 조선후기의 농업생산력이 발전할 수 있었고, 노동력이 절약되어 광작을 하는 부농도 등장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임노동을 이용한 상업적 농업도 등장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주지하듯이 이와 같은 그의 농업생산력발전론 상업적 농업론 경영형부농론은 조선후기 사회를 정체된 사회로만 보아오던 한국사학계에 큰 파문을 던졌고, 이는 상공업에서의 자본주의 맹아론과 함께 이후 조선후기의 새로운 역사상을 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중략)
한편 그는 1970년대 이후 정년에 이르기까지 농업사연구의 일환으로서, 농서와 농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에 관해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는 조선의 농서뿐만 아니라 중국의 농서까지도 수집하여 이를 서로 대조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는 1970년 조선후기농학사연구 (1988, 일조각)로 일차 간행되었고, 이후 증보 작업을 거쳐 조선후기 농학사연구‒농서와 농업관련 문서를 통해본 농학사조‒ (2009, 지식산업사)로 마무리되었다. 그는 농서연구를 통해서도 조선후기에 수전농업에서 이앙법이 확대되어 가고 있었으며, 겸병광작을 확대시키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는 1970년대 이후에는 18세기말부터 19세기에 걸치는 시기를 중심으로 농업·토지문제를 중심으로 한 개혁론을 검토하였다. 이는 정약용과 서유구 등 실학파의 개혁론을 살피는 것부터 시작하여, 임술민란 이후 정부와 지배층의 삼정개혁론, 고종조의 토지개혁론, 개화파의 농업론, 광무개혁기 김성규의 농업개혁론 등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그는 당시의 농업개혁론 가운데에는 지주적 입장에서의 개혁론과 농민적 입장에서의 개혁론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하여 민란이나 농민전쟁은 단순히 삼정문란에 대응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민(民)의 사회의식·반체제의식이 역사적으로 성장하는 가운데 당시 농업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심각하게 의식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전개하고 있었던 혁명운동이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연구 성과들은 일단 한국근대농업사연구 (1975, 일조각)로 묶였다가, 여러 편의 논문이 더 추가되면서 한국근대농업사연구Ⅰ‒농업개혁론·농업정책 (2004, 지식산업사), 한국근대농업사연구Ⅱ‒농업개혁론·농업정책 (2004, 지식산업사), 그리고 국근대농업사연구Ⅲ‒전환기의 농민운동 (2001, 지식산업사)로 증보 발간되었다.
그는 또 1970년대부터 한말~일제하의 지주제에 관한 사례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는 일제의 한국침략과 강점으로 인해 빚어진 농업상의 변동을 살피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사례 연구를 모아 한국근현대농업사연구‒한말·일제하의 지주제와 농업문제‒ 로 간행하였고, 이후 이를 보완하여 증보판을 냈다(2000, 지식산업사). 
이러한 연구를 통해 그는 일제강점기의 농업은 일본인이 중심이 되고 일본자본주의의 지주제를 축으로 한 농업으로 재편되었다고 보았으며, 이에 따라 구래의 지주제는 더욱 강화되고 점차 일본자본주의의 방식으로 경영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구래의 봉전적인 지주제를 중심으로 한 모순구조와 농업문제가 이제는 자본주의적인 모순구조와 농업문제로 질적인 변동을 보이면서 심화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 시기 전개된 소작쟁의는 반제국주의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민족주의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성격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보았다. (중략)
회고록에서 그 과정에 대해 자세히 정리하고 있지만, 김용섭교수는 정년을 전후하여 자신의 저작물들을 모두 재정리하여 8권의 김용섭저작집을 펴냈다. 19세기 전반 다산 정약용은 유배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 뒤 자신의 저작물들을 모두 재정리하여 여유당집을 만들어놓고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글에 대해 마지막까지 책임을 지고 재정리를 하여 후세에 남기려 한 다산선생, 그리고 이러한 자세를 계승하려 한 김용섭교수. 두 사람의 학자로서의 자세는 후학들의 귀감이 된다고 생각된다.
한국농업사 대가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 별세(종합) | 연합뉴스
YNA.CO.KR | BY 연합뉴스
한국농업사 대가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 별세(종합) | 연합뉴스
한국농업사 대가 김용섭 연세대 명예교수 별세(종합), 임동근기자, 산업뉴스 (송고시간 2020-10-21 09:15)
Comments
Seongnae Kim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Reply · 2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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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adimir Tikhonov
21 erOgrctoaubelcgr tsSSratcpoth 1n5h:seoder2eud5r  · 
I am deeply saddened to learn that Prof. Kim Yongseop (Yonsei University), a senior historian of Korea, passed away yesterday.  I turned to his monumental three-volumes history of Korean agriculture on many occasions while writing my outline of Korean history in Russian. I feel deeply obliged to his outstanding scholarship which defined much in the direction of Korean historical studies throughout the 1960s to 1990s. Prof. Kim was born in 1931. Since the late 1960s- early 1970s, he - together with Prof. Kang Man'gil - pioneered the post-colonial historiographical tendency focused on uncovering the proto-capitalistic features ('sprouts of capitalism') in early modern Korean society and economy. He particularly emphasized the appearance of commercially managed estates in Late Choseon agriculture. Proto-capitalism in Late Choseon Korea remains a controversial topic (it was a society where a large share of surplus was centrally extracted and redistributed by the state, after all), but in any case, the work of Prof. Kim deepened enormously our understanding of how early modern agriculture in Korea looked like. Prof. Kim will be warmly remembered by his disciples and colleagues, and by everybody else who, like me, benefitted from his research work. 

김영
21 erOgrctoaubelcgr tsSSratcpoth 2n3h:seoder1eud6r  · 
<민족과 민중의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신 김용섭 선생님을 기리며>
소생은 1970년에 대학에 입학하여 2학년을 마친 다음해인 1972년에 해병대에 입대하여  군복무를 마치고 1975년도에 3학년으로 복학하였다.
그때 김용섭 선생님(이하 '선생님'으로 줄임)은 서울대 사학과를 떠나 연세대 사학과로 오셨다. 
선생님의 학문적 목표는 식민사관의 정체성이론과 타율성이론을 극복하고, 우리 역사의 자율적 내재적 발전논리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경성제대에 뿌리내린 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의 영향을 받은 교수들이 포진하고 있는 서울대 사학과에서는 이런 작업을 계속하기가 어려웠다. 선배 교수들이 노골적으로 "민족사학을 그만하자"라고 협박하거나, 이병도처럼 일본 천리대학에 다녀오지 않겠느냐고 회유를 했다. (김용섭 회고록 《역사의 오솔길을 걸으며》770~771면)
선생님은 당시 그곳에서는 도저히 식민사학의 극복작업은 힘들다고 판단하고, 연탄가스 사고로 별세한 민족사학자 홍이섭 교수의 후임으로 연세대에 부임하셨다.
우리는 구세주를 만난 것이었다. 한국근대사를 지배사적 시각이나 정태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기층 민중인 농민의 입장에서 동태적으로 해명하시는 선생님의 강의는 유신체제와 군부독재 하에서 괴로워하던 우리들에게는 가문 날에 시원한 소나기를 만난 격이었다.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나면 가슴이 뿌듯했고, 진리와 정의에 대한 용기가 솟아올랐다. 계속 공부를 하려는 학생들에게는 학자의 모범을 보여주셨고, 사회변혁 운동을 하려는 학생들에게는 친애민중적 시각을 고취해주셨다.
소생은 전공이 한국사학이 아닌 한국문학이었지만 국문학을 민족문학사적 시각과 민중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역사적 안목을 가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선생님의 학문적 영향에 힘입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소생의 졸저 《조선후기한문학의 사회적 의미》(1993),《망양록연구》(2003),《한국한문학의 현재적 의미》(2008)는 선생님의 학문적 자장 안에서 이루어졌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학문은 올바른 관점을 갖는 것이 중요하지만 실증적 자료와 논리에 근거해야 하며, 치열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선생님은 실제로 1년 365일을 연구실에 나오셔서 연구하셨고, 우리 제자들의 질문과 고민을 언제나 진지하게 들어주셨다. 
이러한 학문적 열정과 제자 사랑이 쌓여 '김용섭 신화'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21 erOgrctoaubelcgr tsSSratcpoth 1n6h:seoder2eud3r 



<고 김용섭 선생님(1931~2020)의 학문적 성과>
- 박찬승 교수(한양대, 한국사)
김용섭의 조선후기 농업사연구는 왕조실록 등 관찬자료뿐만 아니라, 농서·양안·추수기·토지매매문기·절목 등 농업과 관련된 1차 사료를 분석하는 작업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1960년대 그의 연구 성과는 《조선후기농업사연구》(1971, 일조각)로 정리되었다. 이는 훗날 더욱 증보되어 《조선후기농업사연구Ⅰ》‒농촌경제·사회변동 (1995, 지식산업사)와 《조선후기농업사연구Ⅱ》‒농업과 농업론의 변동‒ (2007, 지식산업사)로 정리되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그는 농촌사회에서 신분의 차이를 넘어 농지소유에서 광범한 분화현상이 나타나고 있었고, 일부 평민층 가운데에서는 양반층 못지않게 토지를 소유한 이들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소작농민 가운데에서도 계층분화가 일어나 부농과 극빈농이 나타나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여기서 그는 소작농민이 비교적 넓은 소작지를경영하여 부농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보면서 이를 경영형 부농 이라 칭하였고, 자경농민이 일부 소작지를 겸영하면서 부농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보면서 이를 지주형 부농이라 불렀다. 또한 그는 조선후기의 수전농업이 직파농법에서 이앙농법으로 전환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이를 통해 조선후기의 농업생산력이 발전할 수 있었고, 노동력이 절약되어 광작을 하는 부농도 등장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임노동을 이용한 상업적 농업도 등장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주지하듯이 이와 같은 그의 농업생산력발전론 상업적 농업론 경영형부농론 은 조선후기 사회를 정체된 사회로만 보아오던 한국사학계에 큰 파문을 던졌고, 이는 상공업에서의 자본주의 맹아론과 함께 이후 조선후기의 새로운 역사상을 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편 그는 1970년대 이후 정년에 이르기까지 농업사연구의 일환으로서, 농서와 농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에 관해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는 조선의 농서뿐만 아니라 중국의 농서까지도 수집하여 이를 서로 대조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는 1970년 《조선후기농학사연구》(1988, 일조각)로 일차 간행되었고, 이후 증보 작업을 거쳐 《조선후기 농학사연구》‒농서와 농업관련 문서를 통해본 농학사조‒ (2009, 지식산업사)로 마무리되었다. 그는 농서연구를 통해서도 조선후기에 수전농업에서 이앙법이 확대되어 가고 있었으며, 겸병광작을 확대시키고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는 1970년대 이후에는 18세기말부터 19세기에 걸치는 시기를 중심으로 농업·토지문제를 중심으로 한 개혁론을 검토하였다. 이는 정약용과 서유구 등 실학파의 개혁론을 살피는 것부터 시작하여, 임술민란 이후 정부와 지배층의 삼정개혁론, 고종조의 토지개혁론, 개화파의 농업론, 광무개혁기 김성규의 농업개혁론 등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그는 당시의 농업개혁론 가운데에는 지주적 입장에서의 개혁론과 농민적 입장에서의 개혁론이 있었음을 확인하였다. 그는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하여 민란이나 농민전쟁은 단순히 삼정문란에 대응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민(民)의 사회의식·반체제의식이 역사적으로 성장하는 가운데 당시 농업체제의 구조적 모순을 심각하게 의식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전개하고 있었던 혁명운동이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연구 성과들은 일단 《한국근대농업사연구》 (1975, 일조각)로 묶였다가, 여러 편의 논문이 더 추가되면서《한국근대농업사연구Ⅰ》‒농업개혁론·농업정책 (2004, 지식산업사), 《한국근대농업사연구Ⅱ》‒농업개혁론·농업정책 (2004, 지식산업사), 그리고《한국근대농업사연구Ⅲ》‒전환기의 농민운동 (2001, 지식산업사)로 증보 발간되었다. 

그는 또 1970년대부터 한말~일제하의 지주제에 관한 사례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는 일제의 한국침략과 강점으로 인해 빚어진 농업상의 변동을 살피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사례 연구를 모아《한국근현대농업사연구》‒한말·일제하의 지주제와 농업문제‒ 로 간행하였고, 이후 이를 보완하여 증보판을 냈다(2000, 지식산업사). 이러한 연구를 통해 그는 일제강점기의 농업은 일본인이 중심이 되고 일본자본주의의 지주제를 축으로 한 농업으로 재편되었다고 보았으며, 이에 따라 구래의 지주제는 더욱 강화되고 점차 일본자본주의의 방식으로 경영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구래의 봉전적인 지주제를 중심으로 한 모순구조와 농업문제가 이제는 자본주의적인 모순구조와 농업문제로 질적인 변동을 보이면서 심화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 시기 전개된 소작쟁의는 반제국주의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민족주의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성격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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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 펴낸 회고록《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에서 그 과정에 대해 자세히 정리하고 있지만, 김용섭교수는 정년을 전후하여 자신의 저작물들을 모두 재정리하여 8권의 김용섭저작집을 펴냈다. 19세기 전반 다산 정약용은 유배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 뒤 자신의 저작물들을 모두 재정리하여 여유당집을 만들어놓고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글에 대해 마지막까지 책임을 지고 재정리를 하여 후세에 남기려 한 다산선생, 그리고 이러한 자세를 계승하려 한 김용섭교수. 두 사람의 학자로서의 자세는 후학들의 귀감이 된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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