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3

알라딘: 전태일 평전 조영래 2009

알라딘: 전태일 평전

전태일 평전 - 신판   
조영래 (지은이)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2009-04-15
초판출간 1983년

340쪽

책소개

<전태일 평전>개정판. 
청소년들에게 더욱 친숙하고 정감 넘치도록 형식과 내용을 바꾸었으며, 원본과 저자의 뜻이 왜곡되지 않고 정확하게 전달되도록 만들어졌다. 이 책은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노동자 전태일의 일대기다. 평화시장 어린 동심들의 고통에 항상 가슴 저려 하며, 그들을 위해 스물 둘의 젊음을 불길 속에 내던졌던 청년노동자 전태일의 삶과 투쟁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전태일 자신과 동료들이 겪고 있었던 고난의 삶과 고통스러운 노동 현실에 분노하다가, 평화시장의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의 길로 들어서는 과정 등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삶과 투쟁의 과정에서 생기는 고민, 방황, 헌신적 인간애 등을 통해 인간 전태일을 느낄 수 있다.
목차
『전태일 평전』 신판을 내면서 3

서(序) 8

1부 어린 시절
밑바닥에서 13
가출.노동.방황 19
철조망을 넘다 26
청옥 시절 31
꺾인 배움의 꿈 38
서울에서의 패배 43
식모살이 떠난 어머니를 찾아 50
동생을 길바닥에 버리다 54
직업은 있다 61
재회 68

2부 평화시장의 괴로움 속으로
'거리의 천사'에서 평화시장의 노동자로 79
다락방 속의 하루 89
평화시장의 인간조건 95
억울한 생각 104
어린 여공들을 위하여 111
재단사 전태일의 고뇌 117
충격 126

3부 바보회의 조직
근로기준법의 발견 141
재단사 친구들 145
바보회의 사상 152
아버지의 죽음과 바보회의 출발 158
노력 164
좌절 속에서 170

4부 전태일 사상
막노동판에서 본 것 181
원섭에게 보내는 편지 185
나를 따르라 195
인간의 과제 202
왜 노예가 되어야 하나 209
인간, 최소한의 요구 213
모범업체 설립의 꿈과 죽음의 예감 사이 220
번민 231
결단 237

5부 1970년 11월 13일
삼동친목회 245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 253
‘평화시장 기사특보'나던 날 264
시위 274
불꽃 283
전야 295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299

부록

1976 . 전태일투쟁은 끝나지 않는다 313
1983 . 이 아픔, 이 진실, 이 사랑 323
1983 . 태일의 진실이 알려진다니 324
1990 . 개정판을 내면서 327
1995 . 가장 인간적인 사람들의 가장 비범한 삶 331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1962년 여름, 뙤약볕이 쨍쨍 내리쐬는 어느 한낮에 전태일은 아무도 반겨줄 사람 없는 부산의 거리를 걷고 있었다.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누구인가? 전태일.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재단사라는 이름의 노동자. 1948년 9월 28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둘의 젊음으로 몸을 불살랐다. 그의 죽음을 사람들은 ‘인간선언’이라고 부른다. - 본문 중에서
전태일 사상은 각성된 밑바닥 인간의 사상이다. 그것은 오랜 침묵에서 깨어나서 이제껏 현실이 자신에게 강요해왔던 가치관을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오직 스스로 인간적인 체험에 의거하여 그 자신의 가슴으로 느끼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고 자신의 눈으로 세계를 보는, 주체적인 인간의 사상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거꾸로의 거꾸로, 사회의 거꾸로된 가치관을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거꾸로 뒤집어놓는다. 그것은 자기비하에서 자존으로, 비굴에서 긍지로, 공포와 위축에서 분노와 용기로, 의존과 자학에서 자주와 해방으로, 체념과 침묵에서 비판과 투쟁으로 전환하여가는 사상, 노예에서 인간으로 거듭나는 민중의 사상이다. -198쪽  접기 - Matilda
모든 인간은 서로서로가 떨어질 수 없는 "전체의 일부" 이다.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생각할 줄 알며, 좋은 것을 보면 좋아할 줄 알고, 즐거운 것을 보면 웃을 줄 아는 하느님이 만드신 만물의 영장"이며, 다 같이 "고귀한 생명체"로 본능과 희망을 갖춘,... 더보기 - Matilda
억눌리는 사람들이 수적으로는 아무리 많아도 조직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조직된 소수'에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이다. 그러나 거기에 앞서서 우리가 이야기하여야 할 것은 바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노예의식'인 것이다. -137쪽 - easy
현실의 사회구조와 질서 앞에 무조건 머리를 수그리고 거기에 '순응'해야만 생존이 보장된다고 느끼게 되며, 따라서 자신에 대해서는 불성실하게 되고 나중에는 부도덕으로까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그는 비판정신의 싹을 자신의 의식 속에 싹트기도 전에 잘라버리고, 사회가 강요하는 모든 명령, 모든 가치관, 모든 선전을 무조건 받아들여 ‘순한 양’이 된다. 자기 머리로 생각할 줄 모르는, 주체성을 빼앗긴 정신적 노예로서 길들여지는 것이다.
-138쪽  접기 - e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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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노동, 삶의 조건인가 생의 소모인가 - 차병직 (변호사) 
참된 연대란...인간 전태일에서 만나다 - 최영기 (노사정위원회 상임위원) 
전태일의 인간선언은 완성됐는가 _ 김현미_
- 경기문화재단 
성장의 아픔을 말한 책 - KBS 'TV 책을 말하다' 
그처럼 목숨을 바칠 순 없지만, 감히 그럴 용기조차 없지만, 그때 알았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전태일은 분명 스스로의 몸으로 작은 '촛불'이 되어 우리의 길을 밝혀 주고 있었다. - 최영미 (방송작가) 
"다시 만난 ‘아름다운 청년’"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하는 외침 앞에 진실하고자 할 때 <전태일 평전>은 영혼으로 대답한다. 노동자는 인간이라고, 절대로 차별받을 수 없는 인간이라고. 이것이 다시 읽는 <전태일 평전>의 웅변이다. - 이인영 (국회의원) 
최선은 그런 것이에요
- 이슬아 (「일간 이슬아」 저자)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장정일 (소설가, 시인) 
 - 한겨레 신문 2009년 5월 8일자 '장정일의 책속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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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겨레 신문 2009년 4월 18일 잠깐 독서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09년 5월 8일자 '장정일의 책속 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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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조영래 (지은이) 

1947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법대 재학 중 한일회담 반대, 6·7 부정선거 규탄, 3선개헌 반대 학생시위에 앞장서며,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졸업 후 사업시험을 준비하던 시기에 전태일 분신 항거를 접했다.
1971년 사법연수원에서 연수 중 공안당국이 조작한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돼 1년 6개월 투옥됐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6년 동안 수배 생활을 겪었다. 복권 후 1983년 변호사 사무실을 내고, 사회개혁가이자 인권변호사로서 몸을 돌보지 않고 헌신적으로 활동하다가 1990년 12월 폐암으로 타계했다.
유고집으로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둘 수는 없습니다』(창작과비평사, 1991), 『조영래 변호사 변론 선집』(까치, 1992) 등이 있다. 2020년, 민주주의 발전 유공자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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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전태일평전>,<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A Single Spark> … 총 6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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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청소년과 함께 읽는 우리 시대 최고의 고전
2009년 전태일기념사업회가 펴낸 개정 신판으로 돌아왔다!!!

신판『전태일 평전』은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사회를 올바로 바라보며, 살아가는데 힘이 되는 지혜와 용기의 사상이 담겨 있다. 이 책은 우리 사회의 삶에 대한 나침판 역할을 하며 지난 25년간 우리 시대 최고의 고전으로 자리잡아 왔다.
21세기에도 전태일은 우리의 잠자는 양심을 더욱 세차게 두들기며 한국 사회만이 아니라 지구촌 곳곳을 찾아가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치고 있다.

전태일기념사업회는 이런 시대 흐름에 맞춰 돌베게 출판사에서 펴내던『전태일 평전』을 새롭게 개정해 펴냈다. 새롭게 태어난 신판『전태일 평전』은 청소년들에게 더욱 친숙하고 정감 넘치도록 형식과 내용을 바꾸었으며, 원본과 저자의 뜻이 왜곡되지 않고 정확하게 전달되도록 만들어졌다.

『전태일 평전』은 출간 이래 25년 동안 대학가를 중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혀졌으며, 이 책을 읽고 노동운동이나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던 젊은이들이 많았다.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렀으나 『전태일 평전』의 글 속에 담겨 있는 인간적인 세상을 꿈꿨던 전태일의 순수한 마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전태일을 옳게 읽고 있는가?
-우리시대 진정한 리얼리스트 전태일

이 책은 불꽃 같은 삶을 살다 간 노동자 전태일의 일대기다. 평화시장 어린 동심들의 고통에 항상 가슴 저려 하며, 그들을 위해 스물 둘의 젊음을 불길 속에 내던졌던 청년노동자 전태일의 삶과 투쟁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전태일 자신과 동료들이 겪고 있었던 고난의 삶과 고통스러운 노동 현실에 분노하다가, 평화시장의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의 길로 들어서는 과정 등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삶과 투쟁의 과정에서 생기는 고민, 방황, 헌신적 인간애 등을 통해 인간 전태일을 느낄 수 있다. 전태일은 노동법에는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어 있으나 법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 앞에서 분신자살로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1970년 11월 13일의 일이다.

“전태일은 횃불이었다. 우리 사회의 감추어진 얼굴을 들추어 낸 횃불이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횃불이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우리는 전태일을 옳게 읽고 있는가? 저마다의 작은 욕망을 위해 읽고 있지는 않는가?『전태일 평전』은 우리가 전태일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가를 지시한다. 우리는 그의 죽음보다 그의 삶을 먼저 읽어야 한다. 그의 삶 속에 점철되어 있는 고뇌와 사랑을 읽어야 한다. 이 평전의 필자인 조영래 변호사의 삶도 함께 읽어야 한다. 그리고 전태일을 우리들의 가슴 속으로 옮겨와야 한다. 이것이 전태일을 밝은 얼굴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일이다.”
- 신영복(성공회대 석좌교수)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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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추천 - ˝1900년대 노동자의 삶 그리고 오늘˝ 같이 읽어요 
노박 2020-07-15조회수 (116)공감 (1)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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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전 월요일에 카페 스몰토크에서 상영된 <위로 공단> 공식 후기입니다. 후기 작성자는 바로 접니다. 상영회에 오신 분들이 많지 않아서 그분들 각각 말씀했던 내용을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쓰다 보니 내용이 많군요. 또 후기 대부분이 영화를 비판한 내용입니다. 영화를 먼저 본 후에 이 후기를 참고하시기를 권합니다.

 

멤버들의 의견에 반박하고 싶으면 댓글로 남겨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멤버들은 이 조용한 블로그에 찾아오지 않아요. 그렇다고 블로그 주인장인 제가 그분들의 의견을 대신해서 말할 수 없어요.

 

정말로 이 후기 속 내용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매주 월요일 저녁에 레드스타킹 독서 모임이 진행되는 카페 스몰토크를 방문해주십시오. 해치지 않아요!

새로운 한주가 시작되면 불청객처럼 ‘월요병’이 찾아옵니다. 월요일만 되면 무기력하고 피곤해집니다. 레드스타킹도 월요병의 습격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몸이 아파서 월요일 모임에 오지 못한 분들이 많았어요. 어제는 모임에 자주 오시는 분들과 함께 임흥순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위로 공단>을 봤습니다. 영화 보기 전에 멤버들은 ‘꽃보다 페미니즘’ 강연 준비 및 홍보 방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 위로 공단 >은 저마다의 꿈을 위해 열심히 묵묵히 일해 온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조명한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한국 산업화의 빛과 그림자가 집약된 1970년대 공장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합니다.

* 김진숙 《소금꽃나무》 (후마니타스, 2007)

 
영화는 평화시장 여공, 1979년 YH무역 사건, 1985년 구로공단 동맹 파업, 2005년 기륭전사 사태 등 우리가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노동 운동의 역사를 언급합니다. 이 과정에서 실제 노동 현장에서 악전고투하면서 싸웠던 수십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의 인터뷰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 중반부에 2011년 한진중공업 크레인에서 309일간 고공농성을 했던 김진숙 님의 인터뷰 장면도 나옵니다.

* [절판] 전순옥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 (한겨레출판, 2004)

* 김원 《여공 1970, 그녀들의 反역사》 (이매진, 2006)

* 조영래 《전태일 평전》 (아름다운전태일, 2009)

* 신순애 《열세살 여공의 삶》 (한겨레출판, 2014)

 여성 노동자들은 한국 노동운동 역사의 큰 축이었습니다. <위로 공단>은 노동에 관한 영화로 볼 수 있어요. 하지만 그동안 ‘노동’은 남성 노동자 중심의 일터에 어울릴만한 단어로 쓰였어요. 하지만 일터에는 여성 노동자들도 있었습니다.

평화시장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어린 여공들은 ‘공순이’라고 불렸습니다. 중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상경한 어린 여공들은 대부분 ‘시다(수습생)’로 취직했습니다. 사실 ‘공순이’는 좋은 의미의 말은 아닙니다. 그녀들은 ‘공순이’ 소리를 들으면서 아침부터 밤 10시까지 일을 했습니다. 여성 노동자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루는 데 중심축이 돼왔지만, 그로 인해 억압과 희생을 강요당하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 중반 구로단지 근로자의 60%가 여성 근로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오빠나 남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가난을 피해 전국 각지에서 상경한 15~16세 전후의 미혼여성들이었습니다. <위로 공단>은 묵묵히 일해 온 여성 노동자들의 눈물과 땀방울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정확히 말하자면, <위로 공단>은 여성 노동자들을 위한 영화로 볼 수 있어요.

여성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라 너무 기대를 많이 한 탓일까요? <위로 공단>은 여성 노동자 이야기를 생생한 인터뷰와 감각적인 영상으로 풀어낸 뛰어난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여성 영화’라는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한 한계가 보였습니다. 레드스타킹은 <위로 공단>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방향으로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소재는 좋았으나 전체적으로 영화가 실망스럽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이 영화 중간중간마다 얼굴에 하얀 천 또는 눈가리개를 쓴 두 명의 여성(여공 또는 자매)이 등장합니다. 그녀들은 말없이 녹색이 우거진 숲을 걷거나 황량한 장소(공장 옥상, 여공들이 묵었던 오래된 여인숙) 한가운데서 우두커니 서 있기도 합니다. 이 두 명의 여성은 꿈과 행복에 눈이 멀어 일만 했던 여성 노동자들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감독은 여성 노동자의 삶을 미술적 장치들과 결합하여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관객은 이 영화 속에 삽입된 감독의 의도적인 미술적 장치를 해석합니다. 하지만 환상(또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영화 속 미술적 장치에 거부감을 느낀 분들이 많았습니다. 진○ 님은 영화가 시작되는 장면이 무섭게 느껴졌다고 말했습니다. 마치 한 편의 ‘공포영화’를 본 듯한 느낌이었다는군요. 히피 님은 미술적 연출에 치중한 감독의 연출 방식을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예술적 감수성이 엿보인 연출 방식에서 ‘감독의 자아도취’가 느껴졌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얼굴에 하얀 천이 덮인 두 여성의 모습을 보고, 감독이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 영감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화 속 여성의 모습과 마그리트의 그림을 비교해보시죠.

상○ 님은 노동운동 관련 사건들을 간략히 언급한 영화의 연출 방식이 아쉽다고 말했습니다. 기○ 님은 노동 운동가, 대중 모두가 불만족을 느낄 수 있는 영화라고 평했습니다. 관객이 한국노동운동사에 관한 배경지식 없이 영화를 본다면 영화를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히피 님은 이 영화가 여성노동자의 수난을 훑어 내리는 데 급급했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여성 노동’이 어떤 구조적인 문제에 놓여 있는지 어떤 권력과 위계 관계 속에서 차별받고 있는지 짚어내는 것을 교묘하게 피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영화의 보여주기식 연출에서 감독이 생각하는 위로가 무엇인지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영화에 세상을 떠난 노동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굿(무속의 종교 제의)을 치루는 장면이 나옵니다. 은○ 님은 이 장면도 비판했습니다. 아마도 감독은 무당 굿 장면을 통해 노동자들의 죽음을 애도하는 메시지를 보여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 님은 노동자들의 ‘한’을 풀어주는 무당 굿이 ‘한국적인 정서’에 잘 들어맞는 ‘한국적인 위로’에 그쳐서 아쉽다고 말했습니다.

혜○ 님은 여성 노동자들의 인터뷰가 여성 노동자들의 감정 표출에 치중되는 바람에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의식이 눈물에 의해 희석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은○ 님은 이 영화에서 진취적이고 주도적으로 보여야 할 여성 노동자들이 ‘패배와 좌절’을 겪은 것만 보여준 것에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또, 이 영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두 명의 여성’이 ‘치마를 입은 여성’으로 묘사된 장면을 지적했습니다. 이는 남성의 시선에 의해 ‘박제화된 여성성’입니다. 젠더 인식이 부족한 남성 감독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는 문제의 장면이었습니다. ○정 님은 영화 엔딩 자막에 공개된 감독의 헌사를 비판했습니다. 

“40년간 봉제공장에서 일한 어머니, 백화점 의류매장과 냉동식품 코너 판매원으로 일한 여동생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 

○정 님은 여성 노동자를 ‘어머니’, ‘여동생’으로 일반화한 감독의 표현이 거슬렸다고 말했습니다. 파업 시위 도중에 큰 부상을 입어 세상을 떠났거나 직업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여성 노동자들이 있습니다. 이분들 모두 결혼을 했을까요? 개인의 건강권과 생명권에 달린 파업에 동참한 여성 노동자를 여성의 주체적인 목소리와 삶 자체를 희미하게 만드는 ‘어머니’와 ‘여동생’으로 한정해서 표현한 헌사에 젠더 고정관념(gender stereotypes)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레드스타킹은 여성 노동권 문제를 환기할 수 있는 여성 영화가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로 공단>처럼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면 안 됩니다! 여성 노동권 문제를 제대로 건드린 여성 영화를 만들려고 했다면 남녀 노동자 간의 경제적 불평등을 일으킨 구조적 문제를 보여줘야 했습니다. <위로 공단>은 여성 노동자들의 눈물 섞인 하소연을 보여주는 데 치중했습니다. 스크린을 구경한 관객들은 여성 노동자들이 처한 암울한 현실에 일시적으로 공감하고, ‘위로’를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잊히죠. 여성 노동권 보장은 (남성 중심) 노동 운동가나 좌파 정치 운동가들만이 다룰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페미니스트들이 여성 노동운동사와 여성 노동자 인권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면 여성 노동에 대한 기존의 (남성 중심) 시각을 개선할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cyrus 2018-04-11 공감 (26)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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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전태일의 생일이다. 그는 1948년 8월 26일 대구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청계천 7가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과 함께 분신한 그의 최후 때문인지 그를 서울 출신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1954년 대구를 떠나 서울로 올라왔으나 극심한 가난 때문에 제대로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지금은 폐교되어 사라진 남대문 초등공민학교(후에 남대문초등학교로 변경, 폐교되었음)에 편입하여 처음으로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학교생활은 전태일에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던 시간이었지만, 학업을 중단하고 생계를 위한 노동 현장에 투신해야 했다. 1963년 대구의 청옥 고등공민학교(현재 명덕초등학교) 야간반에 잠시 다녔으나 이 또한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전태일이 남긴 메모 중에 ‘존경하시는 대통령 각하’로 시작되는 글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려다 불발에 그친 탄원서다. 그래도 이 메모는 아주 중요하다. 대통령의 장기 독재집권과 인권탄압보다도 경제성장을 공적으로 더 앞세우는 사람들이 있다. 전태일의 메모는 여공과 미성년자들까지 흘린 피땀 위에 이뤄진 ‘한강의 기적’을 알 수 있는 생생한 증언이다.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못 받으며 더구나 2만 여명을 넘는 종업원의 90% 이상이 평균 연령 18세의 여성입니다. 기준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써 어떻게 여자에게 하루 15시간의 작업을 강요합니까? 또한 2만 여 명 중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들은 평균연령 15세의 어린이들로써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기에 있는 이들은 회복할 수 없는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인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저 착하디 착하고 깨끗한 동심들을 좀 더 상하기 전에 보호하십시오. 근로기준법에선 동심들의 보호를 성문화하였지만 왜 지키지를 못합니까?


전태일의 분신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장시간노동에 시달리던 평화시장 여공들의 실상을 지식인과 정치권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노동자들의 죽음은 전태일로 그치지 않았다.

1979년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이던 YH무역 김경숙을 거쳐 박노해 시인이 ‘손무덤’이라는 시의 소재로 삼을 정도로 저임금과 장시간의 노동으로 시달리던 경동산업 노동자들의 89년 집단분신으로 이어진다. 이들은 노동자로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죽음을 택해야만 했다.

전태일의 희생이 근로자들의 근로조건 개선과 함께 민주화에 기여한 것으로 뒤늦게나마 인정됐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전태일 기념관을 세우자는 얘기가 나오면 그 사람들은 뭐라고 할까. 여기서 말하는 ‘그 사람들’은 뉴라이트를 의미한다. 뉴라이트는 역사 교과서가 경제성장기의 노동운동을 조명하는 점을 불편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전태일의 분신을 박정희 시대의 폐해로 짚지 않는다. 전태일이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비관해서 자살했다고 주장한다. 전태일의 분신에 ‘숭고’가 붙고, 역사적 의미를 찾으려는 현재의 평가를 부정하고 나선다.

 

워마드는 전태일을 비하했다. 그들은 전태일의 분신을 모욕적으로 비하한 ‘태일하라’는 혐오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참고] 전태일을 모욕한 워마드의 행위는 전태일을 ‘좌빨’로 규정하여 무시한 일베의 행위와 다름없다. 1960년대 여공들은 낮은 연령과 여성, 가난이라는 세 가지 요소에 의해 생활환경이 극히 열악했다. 전태일은 불평등한 노동구조 속에서 크게 고통받는 여공들의 모습에 가슴 아파했던 사람이다. 만약 전태일이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여성 노동운동에 앞장섰을 것이다. 그의 여동생 전순옥은 오빠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어받아 평화시장 노동자 자녀들을 돌보는 탁아소와 여성노동자들을 위한 공동체를 운영했다. 전태일은 당연하고 정당한 주장을 알리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도 말하지 못했고, 누구도 듣지 않았던 근로자들의 절망과 분노를 대변했다. 지금도 노동권은 노동자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전태일이 꿈꾸었던 ‘사람이 일할 만한’ 노동현장은 아직 생기지 않았다. 여전히 죽음의 무게마저도 차별하는 땅에서 전태일의 업적을 외면하는 것은 마땅히 누려야 할 인간다운 자유를 갈구한 그의 정신을 무시하는 일이다. 전태일 정신을 깎아내리는 자들에게 묻고 싶다. 편하게 물려받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는지를.

[참고] <넘지 말아야 선을 넘은 그녀들에게 인간의 도리가 있는가?>

(만화애니비평님의 글, 2016년 8월 23일 작성,

http://blog.aladin.co.kr/775792147/8715469)

 

 

 

 

cyrus 2016-08-26 공감 (30)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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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조영래 지음, 아름다운 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 출판사업부) 펴냄(초판~2차 개정판 : 돌베개 펴냄))’은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며 근로기준법 해설 책과 함께 자신의 몸에 불을 붙여 자살한 전태일의 이야기와 생전에 남긴 기록을 고(故) 조영래 변호사가 정리해 기록한 평전입니다.
 
중3때 처음으로 읽었던 책이었는데 역사로만 접하던 전태일의 행적을 처음 구체적으로 만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다 지금 우연한 기회로 신판을 통해 다시 한 번 읽으면서 그 때 잊고 있던 혹은 지나쳤던 부분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난 그는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시절을 보냈습니다. 대구와 부산, 서울을 오가며 배고픔과 싸워야 했지요. 한때 가난으로 서로 헤어지기도 했고요. 물론 학교를 아예 안 다닌 건 아닙니다. 특히 1963년, 그의 나이 열다섯이었을 때 1년간 다녔던 청옥고등공민학교(가정 사정 등으로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다닌 학교, 청옥은 야간학교였습니다.)때의 기억을 그는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로 치고 있습니다.
 
그러다 2년 뒤인 1965년 가을 평화시장에 있는 삼일사에 취직을 하면서 당시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일해야 했던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인생을 결정 짓게 됩니다.
 
좁디좁은 닭장 같은 작업 현장에서 일을 해야 했던 60년대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사장이나 상사인 재단사, 재단보조 등에게 한마디도 못하고, 낮은 임금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결과로 여러 가지 병을 얻는 건 부지기수였고, 치료도 받지 못하고 쫓겨났었고요.
 
물론 처음부터 분신자살을 한 건 아니었습니다. 재단사가 되면서 많은 직공의 편이 되어 주었고, 동료들을 모아 모임 ‘바보회’(후에 ‘삼동친목회’로 개칭)를 만들기도 했죠. 그러다 사업주와 정부의 노동 담당 부서가 서로 결탁되어 있다는 무서운 현실을 알게 되면서 그의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집니다. 심지어 노동자의 작업 환경과 복지가 보장된 회사를 세울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죠.
 
그가 노동운동에 필연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순합니다. 근로기준법대로 지켜지지 않는 당시의 노동환경 때문입니다. 그 환경에서 고통 받는 같은 노동자를 구하기 위해 그는 고군분투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수단으로 죽음을 택한 거죠.
 
‘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으면서 지금의 나라면 전태일처럼 목숨 바쳐 불의와 싸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다양한 활동과 분신자살에 이르는 과정을 읽으면서 말하기 힘든 답답함과 연민을 느꼈습니다.  생전 기록을 통해 그의 삶을 돌아보는 책 ‘전태일 평전’, 한번 읽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겉모습은 번드르르한 평화시장 3층 건물 내부에 빽빽이 들어차 있는 작업장들에 처음 들어가 보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그 질식할 듯한 탁한 공기와 그 지저분하고 어두침침한 분위기에 놀라게 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비좁은 작업장 안에 평당 4명 정도의 노동자가 밀집하여 일하고 있는데다, 그나마도 각종 작업 설비와 비품과 도구들이 꽉 들어 차 있어서 의자에 앉은 노동자들은 앉은자리에서 몸 한번 돌려볼 수도 없는 답답한 생활을 해야 한다.
- p99 2부 ‘평화시장의 괴로움 속으로’에서
 
전태일에게는 참으로 바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나라였다. 약한 자도, 강한 자도, 가난한 자도, 부유한 자도, 귀한 자도, 천한 자도, 모든 구별이 없는 평등한 인간들의 ‘서로간의 사랑’이라는 참된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는 세상, ‘덩어리가 없기 때문에 부스러기가 존재할 수 없는’ 사회, ‘서로가 다 용해되어 있는 상태’, 그것을 그는 바랐다. 부유하고 강한 자들의 횡포 아래 탐욕과 이해관계로 얽힌 ‘불합리한 사회현실’의 덩어리 – 인간을 물질화 하는 ‘부한 환경’ - ‘생존경쟁이라는 이름의 없어도 될 악마’의 야만적인 질서, 그것이 분해되기를 그는 바랐다.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들이 그 잔혹한 채찍으로부터 구출되기를 그는 너무나도 절절하게 바랐다.
- p284 5부 ‘1970년 11월 13일’에서
 

Blueman 2015-02-19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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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또 읽어도 감동적인 인간사랑 정신입니다. 지금 시대에 필요한 덕목이다 싶어요  구매
산새 2009-08-03 공감 (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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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 근로개선을 외치며 전태일이 분신했다. 이 책은 많이 배운 사람만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가난하고 배운 것 없는 전태일은 동료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보았다. 내 이웃을 사랑한 청년의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지금도 뜨겁게 다가온다  구매
caesar 2015-09-14 공감 (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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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을 이렇게 늦게 읽었다니 참 내가 한심하다.  구매
areuke 2010-05-15 공감 (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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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가 불우했다고 지금 과거를 원망한다면 불우했던 과거는 영원히 너의 영역의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니냐  구매
RAINTIME 2017-01-25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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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다 읽지 못했습니다만, 바보회를 조직하고, 노동운동에 헌신한 전태일 열사의 삶.
본 받을 점이 많습니다. 꼭 읽어 보십시오.
추천합니다.  구매
김밥초밥알밥 2018-01-16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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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전태일인가

전태일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봤지만 그에 대해 알지는 못했다. 나는 그저 노동자들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분신한 노동자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물론 맞긴 하다) 이 책을 보고서 그의 그 행동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알게 되었다.

전태일은 22살 평생을 가난하게 살고 주린 배를 채워본 일이 거의 없고 최종학력이라곤 고등공민학교 1년을 채 못마친게 전부다. 흔히 말하는 이런 밑바닥인생이지만 그의 현실인식능력과 생각은 내가 여태껏 읽은 다양한 책들의 저자들과 맞먹거나 그 이상이었다.

전태일은 기독교인이었다. 그의 수기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신앙적인 표현을 봤을때 어느정도 신앙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태일이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힘든 결정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가 가난한 형편과 힘든 노동 가운데 성경을 얼마나 읽었는지 얼마나 신앙생활을 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수기에서 드러나는 그의 생각과 사상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그것과 흡사가 아닌 동일했다.

"나를 죽이고 너희에게 가마"

 이 한 문장으로 충분하다. 그는 이 땅의 노동자들의 예수 그리스도였다.

바보회를 조직하고 활동하지만 근로기준법이라는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현재의 우리에게도 똑같다. 복음을 전하지만 그 복음이 필요하면서도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다. 근로기준법을 알리고 진정서를 내고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전태일의 행동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3년간의 공생애를 연상시킨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한번 더 질문하게 되었다.

 "왜 전태일이 이런 일을 했을까"
 
이 질문에 사람들은 '전태일이 그런 상황을 봤으니까'라고 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현실을 몰랐나? 왜 전태일만이 그럴 수 있었는가가 이 질문의 핵심이다. 자기 자신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의를 위해, 사랑을 위해, 약자를 위해 살 수 있는 사람이 왜 하필 전태일이었는가.

난 그에게서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서 본 똑같은 생명력을 보았다.

사람의 심장을 뛰게하는 생명이 아닌 그의 영혼을 뛰게 하는 진짜 생명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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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사무 2009-05-23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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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지지 않은 횃불이 되어! 새창으로 보기 구매
사계절에서 펴낸 인물 이야기<<청년 노동자 전태일>>을 읽으면서 나는 울었다.  

태일이 마지막 길에서 남긴 한마디 말 때문이다.

"배가 고프다."

 
가난을 안고 살았지만, 자신 보다 더 가난한 어린 여공들에 대한 연민의 정이 끓어 넘쳤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차비로 풀빵을 사서 여공들에게 나누어 주고,

자신은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통행금지에 걸려 경찰서에서 밤을 지새기를 여러 날!

아무리 몸부림쳐도 해결되지 않는 평화시장 노동 환경의 개선을 위해

스스로 마지막 불꽃이 되는 길을 선택한 태일의 이야기는 눈물 없이는 읽지 못한다.

평화시장~ 참으로 아이러니한 이름이다.

누구를 위한 평화일까?

태일이 꿈꾸었던 모범 기업체의 설립!

그가 꿈꾸었던 유토피아는 끝내 오지 않았고,

그가 간 이후의 세상도 설움이 여전하다.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전태일이 자신의 몸을 불태웠던 사건을 만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 전태일의 연민, 삶에 대한 사랑을 읽기 위해서다.

다함께 행복한 사회를 가꾸기를 원했던 그의 꿈을 만나기 위해서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 책을 살려낸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이 책을 읽은 것이 자유롭게 허락된 오늘이 있게 되었다.

 

마지막 가는 길에 함께 했던 친구들에게 이르기를~

"... 자네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네. 뭐니뭐니 해도 사람이란 부모에게 잘못하면 안 돼... 너희 부모들께 효도하고, 그러고 조금 시간이 남으면 우리 어머님께도 날 대신해서 효도를 해주게... 우리가 하려던 일, 내가 죽고 나서라도 꼭 이루어주게. 아무리 어렵더라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네. 쉽다면 누군들 안 하겠나? 어려울 때 어려운 일 하는 것이 진짜 사람일세. 내 말 분명히 듣고 잊지 말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책 위로 눈물이 뚝 떨어진다.

아, 먹먹한 이 느낌!

 

지금은 태일이 살았던 시대와 같은 극악한 노동환경에서는 벗어났다 하더라도,

세상은 여전히 노동자의 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사업주라면, 함께 사업장을 일군 식구들을 정말 잘 챙겨줄 텐데... 하는 생각을 해 보면서도,

사람의 욕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걸까? 하는 생각을 또 해 보게 된다.

 

갑과 을이 없는 사회,

그들이 있기에 우리가 행복한 사회,

전태일의 꿈을 함께 이루어 가는 그런 사회가 오길 바란다.

 

22살이었던 전태일은 내가 태어나던 해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치며

장렬히 불타 올랐다.

수십 년이 지난 세월 동안

꺼지지 않는 횃불이 되어 우리 가슴에서 뜨겁게 다시 타오른다.

그가 한 일이 헛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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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샘 2015-01-17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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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2004-05-27 16:31
 
 나의 친한 벗이 말하기를, 자신이 살아온 나날 중에서 들었던 가장 상처가 되는 말은 고등 학교 다닐 적 어느 선생님의 우연한 다음과 같은 한마디였다고 한다.

“너희들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공사장에서 일하는 인부가 되거나 그런 인부의 아내가 될 것이다.”

친구의 아버지는 건축업을 하시는 인부였다. 친구의 아버지는 우직한 농사꾼이셨지만 자식들의 학업을 위해 시골에서 농사를 접고 서울로 상경하시었었다. 배움이 없고, 가진 기술이 없어 공사장 막일로 아내와 자식들을 건사하셨지만, 부지런하시고 정직한 분이셨다. 그런 아버지를 사회에서 패배한 낙오자 정도로 일갈하는 선생님에게 친구는 뭔가를 보여 주고 싶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고, 기분이 퍽 가라앉음을 느꼈다. 이 글은 전태일 자신인 ‘나’를 아는 모든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에 대해 고(告)함이다. 전태일은 독자인 나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리는 사람이기에,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전태일에게, 그리고 이 평전을 기술하기 위해 혼신을 다한 조영래의 사랑과 투쟁과 지혜에 깊은 감동을 느낀다.

노예로서의 고통과 굴욕으로 가득 찬 지루한 나날을, 아무런 의의도 보람도 기쁨도 없는 껍데기의 삶을 애걸하며 또 애걸하며 비루하게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이 절대로 변화될 수 없는 영구불변한 현실이라는 미신에 쉽게 사로잡혀 있는 약한 자인 나에게 “인간의 존엄을 버리지 않고 인간다운 대접을 요구하며 싸우는 것은 바보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었다. 

왜 밑바닥 인생들은 항상 밑바닥 생활을 하게 되는가? 왜 눌린자는 계속 눌리어 살아가는가?

여기 고통 받는 한 사람의 의식을 살펴보자. 그가 태어났을 때 고통에 찬 현실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이 현실 속에서 자라나면서 그는 그 현실이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하여 자신에게 강요된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사실은 바로 ‘인간’이 그것을 만들었다는 것을 똑똑히 보지 못하게 된다. 이 거대한 힘에 비하여 볼 때, 자기 자신은 너무나도 약하고 초라하고 무력한 존재로 느껴진다. 조만간에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현실의 사회 구조와 질서 앞에 무조건 머리를 수그리고 거기에 순응해야만 생존이 보장된다고 느끼게 되며, 따라서 현실 앞에서 위축되고 기가 죽어서 비굴해진다. 현실에 대한 모든 비판은 그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천만한 무모한 짓으로 되며, 자신에 대해서는 불성실하게 되고 나중에는 부도덕으로까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그는 비판 정신의 싹은 자신의 의식 속에 싹트기도 전에 잘라버리고, 사회가 강요하는 모든 명령, 모든 가치관, 모든 선전을 받아들여 순한 양이 된다.

전태일이 위대한 것은 순한 양이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든 가정에서 자랐으면서도, 스스로 “불행한 과거를 원망한다면 그 과거는 너의 영역에서 영원한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정도로 불우한 환경 때문에 좌절하거나 타락하지 않고 오히려 불우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그들의 처지를 개선해주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

장기표 씨의 후기에서 “인간이 명석하다는 것은 선천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고 말하는 것은 이 부분과 맥락을 같이 한다.   

전태일을 보면서 민주화를 생각한다. 민주화란 무엇일까? 이 글에서 조영래 씨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흔히 수없이 많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한 줌도 못되는 소수의 억압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다고 말하며 또 그러한 사례를 수없이 본다. 영화 같은 데서 수많은 노예들이 채찍에 시달리며 묵묵히 중노동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볼 때 어째서 저 많은 노예들이 불과 몇몇의 감독자들에게 굴종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어 본다. 인간 사회가 형성된 이래 이러한 실태는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그러한 요소들이 사회적 민주화의 장애가 되고 있는 나라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원인을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말한다. 특히 들어볼 만한 설명은 억눌리는 사람들이 수적으로는 아무리 많아도 조직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조직된 소수’에게 지배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앞서 이야기해야 할 것은 억압받는 사람들의 노예 의식인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 노예 의식을 벗어던지고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정당한 권익을 위하여 주장하고 투쟁할 결의에 차 있다면 그들의 조직화는 시간 문제일 것이며 조만간에 그들은 ‘조직화된 다수’로서 ‘조직된 소수’인 억압자들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것이 바로 민중 운동의 전진이며, 이것이 바로 민주화이며, 어떻게 보면 이것이 바로 진보인 것이다.


사실 그 사람이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세.
그 때에 절은 모자가 하고 있는 것일세.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얼마나 불쌍한 현실의 패자냐!
얼마나 몸서리치는 사회의 한 색깔이냐!

   -재단사 일자리에서 쫓겨난 전태일이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가 어느 인부를 보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아의 좁은 환상에 집착하여, 그 속에 밀페되어 껍질을 쌓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아무 것도 참으로 사랑할 수 없으며 아무것도 참으로 소망할 수 없다. 일상 생활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많은 것을 희망하고 많은 것을 사랑하는 것처럼 착각한다. 부와 권력과 명예와 미모의 이성과...... 그러나 그것들은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을 더욱 빈곤하게 만들고 더욱 처절한 고통과 고독의 심연으로 몰아넣는 허구의 욕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탐욕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전태일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다”라고 썼던 것이다.       -2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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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aru 2015-05-07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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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어야 한다

전태일, 그의 이름을 들을 때마다 어떤 육중한 무게감이 항상 나를 짓눌러왔다.  전태일에 관한 한국 현대사의 인식은 자신의 목숨을 불살라 뜻을 관철했던 무서운 `역사'로 자리매김 했던가?    그래서 그의 이름은,  같은 노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불리워질 수 없고  언급할 수 없는 `신화'로 나의 내면에 가라앉아 있었던 듯 하다.   그래서였을까?  흔쾌히 <전태일 평전>을 펴들 용기를 내지 못했다.  스물 두살 나이에 평화 시장의 비인간적인 노동조건을 목도하고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자신의 온 몸을 불구덩이 안에 가둬버린 사람.  아무래도 그를 읽어내는 일은 세상과 화해하며, 조화롭게, 성실하게, 잘 적응하여 살아가고 있는 유순한 이의 마음을 결국 갈아엎고야 말 것이란 두려움을 안겼다.  한 권의 책이라고 무턱대고 펴들 수만은 없다.  책 한 권이 역사를 변형시키는 무게를 갖는 것은 그러한 책에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자를 독자로 맞이하였을 때이다. 

 

전태일 그가 죽고 40년이 흘렀다.  지난 2010년 11월 13일은 그의 분신 40주기였다.  살아 있다면 전태일은 이제 환갑을 맞았을 나이다.  그의 40주기를 맞아, 전태일이 분신했던 서울 종로구 청계6가에는 그의 이름을 딴 다리 하나가 생겼다.  많은 시민들은 `버들다리'라는 평범한 이름대신 "전태일 다리" 로 개명할 것을 허락하였다.   40년 전 평화시장의 한 복판 이었던 그곳에서 전태일은 온 몸을 불태우며,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근로 기준법을 준수하라' 는 지극히 상식적인 문장들과 최후의 유언같은 `내 죽음을 헛되어 말라'는 말을 세상에 토해내고 분신했다.  그의 전신은 순간 숯처럼 시커멓게 타올랐으며, 온 살결이 화상으로 터쳤다.  그리고  얇은 눈꺼풀은 뒤집혔고,  입술은 퉁퉁부르터서 이제 그의 형체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비롯, 세상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 되고야 말았다.  그럼에도,  전태일은 그 `몰골'을 하고서도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주장을 토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누가, 스물 두살의 이 파릇한 청년을, 불구덩이 속에 집어 넣었으며,  무엇이 이 청년의 절박한 외침을 불러왔는가? 

 

전태일은 가난했다. 평생 헐벗고 굶주렸다. 그가 성모병원의 누추한 병상에서 한 마지막 유언은 `배가 고프다'는 것이었다.  분신 하루 전날 라면 한끼를 먹은게 다였던 그는 그 말을 이 지상에 남겨두고 세상을 떴다.  어린 시절 재단기술자였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 때문에 전태일은 초등 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고, 가족 모두가 굶주렸던게 일상사였다.  인생을 비관한 아버지의 술주정과 폭력 등에 못이겨 그의 어린 시절은 가출과 노동, 방황의 연속이었다.  어린 시절 전태일의 직업은 신문팔이, 구두닦이, 손수레 뒤밀이, 삼발이 장사였다.  부유한 집안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부모의 후원아래 사랑받으며 공부할 나이에,  그는 세상의 밑바닥에서 주린 배를 안고  가난과 굶주림을 학습했고 그런 아이에게 던져지는 뭇 사람들의 멸시와 무관심을 경험했다.  그가 어떤 성품을 지니고 있건 상관없이, 그의 미래가 어떻게 꽃피울지 관심조차 없이, 단지 가진게 없다는 이유 하나로 천대와 비웃음이 그의 삶을 이미 규정해버렸다. 

 

가난했기에 학교를 제대로 다녀본적도 없었다. 그러나, 전태일은 배움에 대한 열망을 자신의 짧은 삶 안에서 불태웠던 사람이다.  그의 학력이란 가정 형편이 어려운 이들이 다녔던 고등공민학교의 1년간이 전부였다. 그의 수기에서 `청옥시절'로 표기되는 이 기간 동안, 그는 스물 두해 지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일할 때, 그는 입버릇 처럼 `대학생 친구가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되뇌인다.  하루 14시간 혹은 하루 16시간의 노동에 혹사당하면서도, 그는 대학에 대한 꿈을 잃지 않았고, 거금을 모아 검정고시를 위한 통신강의록을 구입하기도 한다.  훗날 그가 법대생이 독해할 수 있을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독학하고, 노동현실의 부당함을 스스로 깨우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분신의 순간, 근로기준법 책을 품에 안고 있었다.  그 책엔 수많은 밑줄이 쳐지고, 페이지마다 손때가 묻어 있었을 것이다.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비참한 노동 현실의 돌파구만큼이나 지식과 배움은 전태일에겐 간절한 무엇이었다.  

 

196,70년대 평화 시장엔 수많은 피복공장들이 난립해 있었다. 여기에 속한 공장주들은 시장법에 따라 발족한 평화시장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관청과 노동자를 상대하며, 업주들의 대변인기관 노릇을 했다. 평화시장 피복 노동자는 재단사, 미싱사, 시다, 등으로 구성 되었는데 총 작업장 수가 800여개, 근로자 수는 2만 여명에 달했다.  그 가운데 미싱사와 시다는 대부분 여공들로서 대부분 가정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12살에서 15살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이들은 철저한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 처해 있었다.  8평 정도 되는 작업장에 수대의 재봉대와 시다판들이 가뜩이나 비좁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 틈서리에서 핏기 잃은 창백한 얼굴의 종업원 수십명이 끼어 앉아 일을 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1.5미터.  악명높은 평화시장의 다락방. 전태일과 그의 어린 시다들은 이런 환경속에서 하루종일 혀리조차 펴지 못하고, 제대로된 건강 검진 한 번 받아보지 못한 채 일해야 했다.  명절 성수기엔 밀려드는 물량으로 업주들은 잠이 안오는 약이나 주사를 종업원들에게 놓기까지했다.  그렇게 하루 14시간씩 몇 년을 일해도 어린 시다들에게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나이를 먹어 병든 몸을 안고 공장을 떠나기 일수였다.  1970년대 한강의 기적을 일구었던 노동자들의 현실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었던가?  

 

"다 같은 인간인데 어찌하여 빈(貧)한 자는 부(富)한 자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까.  왜 가장 청순하고 때묻지 않은 어린 소녀들이 때묻고 부한 자의 거름이 되어야 합니까?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  전태일의 1970년 초 작품 초고에서  

 

 

 전태일은 거대한 인간 시장인 평화 시장의 어두운 작업장에서, 저 처절한 노동의 현실을 목격하며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 노동자의 권리, 노동자의 인권은 업주들이 스스로 챙겨주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스스로 요구해야할 권리임이 마땅하다고 말이다. 그런 전태일에게 근로기준법의 발견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만연되는 현실의 부당함을 근로기준법은 철저히 부정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근로기준법은 노동자가 정당한 급여와 근로 여건과 건강과 휴식과 자존감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명백히 쓰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은 정반대였지만, 근로기준법만 지키면 모든 부정의가 정의로 환원되고야 마는 이 역설.   그는 근로기준법을 연구하며, 노동자를 규합하고 노동 현실을 고발할 것을 결심한다.   전태일은 1969년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와 1970년 `삼동친목회'를 조직하여 평화시장의 노동자 동료들을 규합하고 노동청과 근로관독관을 찾아다니며, 근로 조건의 개선을 요구했다.  그러나, 업주와 관료의 카르텔은 확고했다.  그가 손에 든 근로기준법은 그저 유식한 법조항에 지나지 않았고, 현실에서 힘을 발휘할 수 없는 휴지조각이었다.   그러나 전태일의 강고한 저항은 언론을 통해 평화시장의 실체가 보도 되는 성과를 올리기에 이른다.  

 

그가 꿈꾸었던 세상은 정직한 노동에 정당한 대우가 보장되는 사회였다.  부한 자들이 가난한 이들을 노예취급 하지 않는 세상,  모두가 인간으로서 공정하게 부가 분배되고,  소중한 노동자의 땀이 결실이 되어 돌아오는 그 순리의 세상이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내며 노동자를 착취하고 억압하지 않아도, 업주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보여주고자 했다.  노동자에게 은전과 자비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상식적인 대우만 해도, 업주와 노동자가 모두 다 잘 살 수 있음을 그는 증거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기엔 현실은 너무 척박했다.  비록 배우지 못했지만, 전태일은 이것이 인간의 도리임을 알고 있었다. 평화 시장의 돈만 밝히는 그 업주들처럼이 아니고,  언젠가 철학자 칸트가 역설했듯이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는 걸,  그는 사람의 도리로서 깨우치고 있었던 것이다.   

 

전태일은 어느 순간,  재단사로서 성공한 미래의 청사진을 버린다.   그토록 평범하고 쉽고 이기적인 길을 버린다.   언제까지나 계속될지 모를 저 어린 시다들의 노동을 목격했던 그로서, 그는 내면의 양심의 소리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가 요구했던 근로조건의 개선은 관료와 업주들의 결탁으로 진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약속을 어겼고, 끝없이 노동자인 자신과 그들의 동료들을 조롱하고 있었다.  세상은 하루 14시간의 살인적인 노동속에서 피어보지도 못하고, 시들고 있는 어린 시다들에게 그다지 관심을 보이질 않았다.  그는 그 어린 동생들을 위해, 이 땅의 처절한 노동 환경의 부당함을 고발키 위해,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했다.  세상의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평화시장의 어린 노동자들의 인간답지 못한 삶을 알려야했다.  그는 성자처럼 모두를 위해 혼자 희생하기로 마음먹었다.   분신 몇 달 전 어느 기도원에서 써내려갔을 일기는 여전히 세상의 모든 노동자들을 숙연케 한다.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간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理想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나님, 궁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전태일의 1970년 8월 9일 일기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최초의 노동자 항의 집회가 예정된 청계천 광장으로 자신의 동료들을 먼저 내려보낸 후,  한쪽 품에 근로 기준법 책을 안고 10분후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다.  전태일이 몇 발자국 발을 내딛자마자, 갑자기 그는 불길에 휩싸였다.  그가 한쪽 품에 끼고 있던 근로 기준법 책도 함께 불타올랐다.  그리고 그 화염의 한가운데에서 그는 목놓아 부르짖는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을 쉬게 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

그리고 최후 성모병원의 어느 누추한 병상에서,  그의 곁을 지키던 어머니와 동료들에게 외마디 당부를 하고 스물 두살 슬프고 아름다운 생을 마감하였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전태일은 그렇게 이땅에 영원한 노동자의 친구이자, 오빠이자, 형으로서 남겨졌다.  전태일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 비인간적인 노동현실을 고발했고, 어린 나이에 피지 못하고 시들고 있던 어린 노동자들을 감싸안았고,  부당한 착취와 억압과 직무유기에 능한 업주와 관료들의 비리를 증거했다.  자신의 살과 함께 태워진 근로기준법 책을 통해 근엄한 법조항이 고통받는 노동자를 위해 어떤 역할도 하지 못함을 세상에 알렸다.  전태일의 분신은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신화가 아니며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800만 비정규직이 처한 오늘의 현실이자, 사회 곳곳에서 착취와 억압아래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모든 노동자들의 일상이다.  그래서 전태일의 외침은 아직도 유효하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어서 혹사당해서는 안 된다.  근로기준법은 지켜져야 하며, 법을 지키는 것은 민주국가의 기본이다.   인간은 수단이 아니며 목적이어야 한다.  정의란 이렇게 단순하고, 명쾌한 법이다.  전태일의 수기는 인권변호사이자 깨어있는 양심이었던 고 조영래 변호사의 집념으로 쓰여졌다.  독재에 항거하며 투옥과 수배를 반복했던 그는, 수배시절 인간애로 넘쳐나던 청년 노동자 전태일을 발견했다. 그의 손에 의해 다시 쓰여진 전태일의 삶은 항상 가난한 자들과 권력에 휩쓸리던 사람들의 변호에 앞장서던 그의 삶과 닮아 있다.   

 

전태일과 조영래의 만남은 생전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나 입버릇처럼 생전 전태일은 대학생 친구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결국, 죽어서야 그는 믿음직한 친구 한 명을 얻고야 만 것인가.



201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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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츠비 2010-12-07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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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새창으로 보기 구매
지난번 쌍용자동차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문득 이 책이 떠올랐다.   일에는 귀천이 없다는데  노동자들도 모두 평등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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