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8

[이진순 칼럼] 이러자고 촛불 든 건 아니다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이진순 칼럼] 이러자고 촛불 든 건 아니다 : 칼럼 : 사설.칼럼 : 뉴스 : 한겨레


[이진순 칼럼] 이러자고 촛불 든 건 아니다

등록 :2020-11-17 17:57수정 :2020-11-18 02:10

불행과 고난을 버티게 하는 힘은 실낱같은 희망이다. 지금은 돈이 없어도, 집이 없어도,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해도, 조금만 참고 견디면 지금보다 나아지리란 희망이 있을 때 사람은 초인적인 성실성과 인내심을 발휘한다. 그러나 희망에도 유효기간이 있다. 희망이 물거품이 되고 번번이 외면당할 때 희망은 좌절이 되고 슬픔을 넘어 분노가 된다.

2016년 12월3일 저녁 서울 종로구 광화문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서 거리를 시민들이 가득 메운 채 촛불을 들고 ‘박근혜 퇴진’을 외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이진순│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6년 전, 세월호 참사로 딸을 잃은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46일간 단식농성을 벌였다. 당시 문재인 민주당 의원은 열흘 동안 그 곁에서 동조 단식을 했다. 그가 대통령이 된 지금, 청와대 앞에서 세월호 생존자 김성묵씨가 한 달 넘게 단식농성 중이다. 요구사항은 6년 전 유민 아빠 때와 큰 차이가 없다. 철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세월호 조사를 맡아온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의 활동이 내달 10일로 종료되고, 5개월 뒤엔 세월호 관련 공소시효도 만료된다. 여전히 사건의 진상은 오리무중이다. 세월호 유가족이 진상규명을 요구할 때마다 정부는 “사참위 조사와 검찰 수사를 지켜보자”고 했다. 지켜보다가 시간이 다 갔다. 지난 2일 박근혜 전 대통령의 기록물을 공개하고 사참위의 시효를 연장해달라는 국회 청원에 10만명 넘는 시민이 참여했다. 아직 정부 여당에서는 반응이 없다.

4년 전, 테러방지법 통과를 막기 위한 국회 필리버스터가 있었다. 총 192시간27분이라는 세계 최장기 기록을 세우며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야당 의원들은 “다수당이 되면 제일 먼저 테러방지법을 폐지하겠다”고 공언했고 민주당은 이를 총선 공약으로 내세웠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되었지만, 테러방지법 폐지안을 제출한 정당은 없었다. 21대 국회에 와서 민주당 이병훈 의원의 테러방지법 개정안이 나왔다. 테러의 정의를 확장해서 ‘감염병에 대한 검사와 치료를 거부하는 행위’도 테러 행위로 간주한다는 내용이다. “테러방지법은 영장 없는 국민사찰을 허용하고 헌법상의 기본권을 제한한다”며 필리버스터를 주도했던 정당에서 테러방지법을 한층 강화하는 안을 내놓은 것이다.

2년 전, 24살의 하청업체 청년노동자 김용균씨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용균씨의 모친 김미숙씨를 만난 자리에서 “생명과 안전을 이익보다 중시하는 제도를 만들겠다”고 약속했고, 이해찬 당시 민주당 대표는 “다시는 그런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처벌 강화와 관련 입법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뒤이어 ‘김용균법’이라 불리는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위험의 외주화를 막겠다던 약속은 파기되었다. 책임져야 할 원청회사의 업종 범위는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김용균법에 김용균씨나 구의역 김군의 일터는 해당되지 않았다.

지난 8월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민동의청원이 제출되었다. 제안자는 김용균재단의 김미숙씨였다. 9월7일 이낙연 신임 민주당 대표도 국회 연설에서 “해마다 2000여명의 노동자가 희생되는 불행은 막아야 한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빨리 처리되도록 소관 상임위가 노력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최근 민주당은 기업 부담을 고려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대신 산안법 개정을 추진하는 안을 검토 중이다.

장철민 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산안법 개정안은 원청기업의 책임자를 처벌하는 대신 과징금을 대폭 올리는 쪽을 택했다. 동시에 3명 이상, 혹은 1년 동안 3명 이상 노동자가 사망한 경우 과징금을 최고 100억원까지 물게 한다는 내용이다. 김용균씨가 사망한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지난 9월 화물차 운전기사가 또다시 기계에 깔려 숨졌다. 2년 사이 두 명이 숨졌지만, 민주당 산안법안의 그물망 밖이다. 1년에 3명, 100억이란 기준이 대체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1년에 5명, 1000억이라고 해도 원청-하도급의 사슬 속에서 하루 5.5명이 산재로 숨지는 현실을 바꾸지 못한다.

불행과 고난을 버티게 하는 힘은 실낱같은 희망이다. 지금은 돈이 없어도, 집이 없어도,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해도, 조금만 참고 견디면 지금보다 나아지리란 희망이 있을 때 사람은 초인적인 성실성과 인내심을 발휘한다. 그러나 희망에도 유효기간이 있다. 희망이 물거품이 되고 번번이 외면당할 때 희망은 좌절이 되고 슬픔을 넘어 분노가 된다.

4년 전 이맘때를 기억한다. 아스팔트 냉기가 등골을 타고 올라왔지만 추운 줄 몰랐다. 이참에 썩어빠진 정치를 확 뒤엎으리라는 기대가 있었으니까. 지금 이런 세상 보려고 촛불 든 게 아니다. 촛불에 담긴 희망을 담보로 권력을 얻었다면, 촛불에 담긴 열망을 하나하나 이루는 데 그 권력을 써야 한다. 콘크리트 지지층에 기대어 오만하고 안일했던 권력이 어떤 결말에 이르는지도 똑똑히 기억해둬야 한다. 누구 편에 선 개혁인지 분명히 하지 못한다면 공수처 신설이나 검찰개혁도 허망하다. ‘정권 재창출’은 개혁의 결과이지 목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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