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1

‘위안부’ 운동 다시 쓰기 - 경향신문 (1-7)

사회 ‘위안부’ 운동 다시 쓰기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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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운동 다시쓰기 - 전문가 기고]⑦‘위안부’ 연구가 짊어진 두 과제…왜곡 바로잡기와 외연 확대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역사 연구는 피해자 등의 증언과 문헌자료가 중심이 되어왔다. 이러한 점에서 피해자 증언 확보는 중요하다. 연구자들 중에..경향신문ㅣ강정숙 전 한국정신대연구소 소장ㅣ2020. 07. 01 21:35

[‘위안부’ 운동 다시쓰기 - 전문가 기고]⑥일본의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서 본 정대협·정의연 운동일본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운동에 몸담은 시민들은 가슴 아픈 나날을 보내고 있다. ‘위안부’ 피해생존자 이용수님의 기자회견을 한국 보수언론이 악용하며 정의연(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 위한..경향신문ㅣ김부자 도쿄외국어대학 교수ㅣ2020. 06. 29 16:41
[‘위안부’ 운동 다시쓰기 - 전문가 기고]⑤여성인권선언, ‘이용수들’을 만나다1992년 그 어느 날 수요시위에 참석했다. 당시는 여성단체들이 돌아가면서 주관했기 때문에 책임 단체일 때는 꼭 가야 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간사였던 나는..경향신문ㅣ변혜정 전 한국여성인권진흥원장ㅣ2020. 06. 28 20:35
[‘위안부’ 운동 다시쓰기 - 전문가 기고]④‘말하기의 어려움’ 덜 수 있는 연구 향해…함께 가자전문가라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라는 거대한 코끼리의 뒷발을 더듬고 있는 일개 연구자일 뿐이다. 그럭저럭 20여년을 버틴 덕분에 전문가라는 무거..경향신문ㅣ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ㅣ2020. 06. 25 21:29
[‘위안부’ 운동 다시쓰기 - 전문가 기고]③‘위안부’ 생존자들에게 명예와 존엄을 허하라애초에 내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빨간 기와집: 조선에서 온 종군위안부 이야기>를 읽고서였다. 이 책에서 가와다 후미코는 일본에서 생..경향신문ㅣ김정란 여성학 박사ㅣ2020. 06. 24 20:43
[‘위안부’ 운동 다시쓰기 - 전문가 기고]②‘정의연 영수증’과 ‘할머니 유언장’의 의미…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우리’다“속고 살면서도, 여성인권운동가로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내가 쓰러지면 누가 알아줍니까. 모릅니다. 내가 여자 몸으로 죽을 힘을 다해 살아왔는데 왜 이..경향신문ㅣ정유진 전 일본 도시샤대 조교수ㅣ2020. 06. 23 21:00
[‘위안부’ 운동 다시 쓰기]④이용수 할머니 “정대협이 다 못했다는 건 아니다”수요시위 새로운 방식 필요한 때 구호 아닌 한·일 학생 교류 통해 제대로 된 위안부 역사 교육해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뭉뚱그려 이렇..경향신문ㅣ대구·부산 김희진 기자ㅣ2020. 06. 22 06:00
[‘위안부’ 운동 다시쓰기 - 전문가 기고]①‘여성국제법정’ 20주년, 새로운 시대의 요청에 맞는 운동 방향 고민할 때지난 5월7일 위안부 피해생존자 이용수 할머니의 문제제기가 있은 지 40여일이 지났다. 논란의 와중에서 확인한 점은 지난 30년간 위안부운동의 국민적 평가..경향신문ㅣ양미강 전 한국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 사무총장ㅣ2020. 06. 22 06:00
[‘위안부’ 운동 다시 쓰기]④‘위안부’ 없는 ‘위안부 운동’ 시대 눈앞…미래세대로 연대 확장 모색해야지난 17일 서울 종로구 옛 주한 일본대사관 앞. 민중가요 ‘바위처럼’은 이날로 1444번째 열린 수요시위에서도 울려퍼졌다. 지난달 일본군 ‘위안부’ ..경향신문ㅣ최민지·심윤지 기자ㅣ2020. 06. 22 06:00
[‘위안부’ 운동 다시 쓰기]③첫 증언 이후 30년…정부, 한·일관계와 시민단체 사이 중심 못 잡아일 상대 일관된 원칙·전략 없어 피해자들 국가에 대한 불신 커져 한·일 수교 50주년이던 2015년 12월28일. 한국과 일본의 외교장관은 일본군 ‘위..경향신문ㅣ김유진 기자ㅣ2020. 06. 16 21:27
[‘위안부’ 운동 다시 쓰기]②민족주의 관점 밖 ‘위안부 연구’ 외면한 운동…비판·성찰 사라져30년간 굵직한 성과 이어온 ‘위안부 운동’…학계로 눈돌리면 해방 후 발표된 박사 논문 12건 불과 기존 관점 벗어난 연구엔 ‘친일’ ‘매국노’ 비난..경향신문ㅣ이보라·최민지 기자ㅣ2020. 06. 14 21:09
[‘위안부’ 운동 다시 쓰기]①‘피해자 이미지’에 들어맞지 않은 목소리들은 묻혀야 했다■위안부 운동 30년 피해자에 대해 우린 너무 몰랐다 “김순악, 김순옥, 왈패,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마쓰다케, 위안부, 기생, 마마상, 식모, 엄마..경향신문ㅣ심윤지·고희진 기자ㅣ2020. 06. 1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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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운동 다시 쓰기]①‘피해자 이미지’에 들어맞지 않은 목소리들은 묻혀야 했다심윤지·고희진 기자 sharp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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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6.11 06:00 
수정 : 2020.06.15 


‘피해자’는 누구인가




■위안부 운동 30년 피해자에 대해 우린 너무 몰랐다


“김순악, 김순옥, 왈패, 사다코, 데루코, 요시코, 마쓰다케, 위안부, 기생, 마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쟁이, 개잡년, 깡패할매, 순악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순악 할머니의 생애를 다룬 영화 <보드랍게>는 그의 다양한 호칭들을 나열하며 시작한다. ‘위안부 피해자’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다양한 삶의 궤적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그들의 발언을 정확히 해석할 수 없다.


김 할머니뿐만 아니다. 정의기억연대(정의연)를 비판한 이용수 할머니의 두 차례 기자회견 이후, 한국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위안부 문제에 몰두해 있음에도 우리는 피해자를 모른다. 소녀와 할머니 사이, 복잡하고 다면적인 피해자들의 경험을 되살리는 것은 30년 위안부 운동을 돌아보고 ‘다시 쓰기’ 위해 선행돼야 할 과제다. 경향신문은 김복동·이용수·김순악·배봉기 할머니 등 피해자 4명의 삶을 살폈다.


‘피해자 증언’ 외에는 위안부 문제가 관심받기 어려웠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들은 ‘순결한 희생자’로 획일화됐다. 위안부 피해로 인해 굴절된 생애의 기록은 부차적인 것으로 남았다. 정의연을 비롯해 이들과 함께한 시민단체 운동 방식의 문제로만 치부하기는 어렵다. 전문가들은 여성인권보다는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일제에 짓밟힌 피해자상에만 반응한 언론과 사회의 위안부 문제 소비 방식도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위안부, 같은 삶은 없다


1926년 경남 양산 출신인 김복동 할머니는 ‘정신대를 가야 한다’는 면장과 군인의 협박에 못 이겨 강제 ‘공출’됐다. 1928년 대구 출생으로 가난한 육남매 집의 고명딸로 컸던 이용수 할머니는 ‘예쁜 옷을 입을 수 있다’는 친구 어머니의 말에 속아 친구와 함께 국민복을 입은 일본인 남자를 따라나섰다. 둘은 1992년 피해 신고를 한 뒤 국내외를 누비며 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김복동·이용수 할머니는 대표적인 위안부 활동가로 꼽혔지만, 그 행보는 같지 않았다. 2000년대 이후 김 할머니가 정의연과 함께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전 세계 전시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활동으로 넓히는 데 힘을 모았다면, 이 할머니는 위안부 문제 자체에 집중한 편이다. 이 할머니는 한 단체와 꾸준히 함께하기보다 정의연, 나눔의집, 대구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등 다양한 단체와 활동했다. 이 할머니가 머무는 대구·경북 지역은 특히나 시민모임이 활발한 곳이라 그는 지역에서도 위안부 문제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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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 윤여경 기자 tigeryoonz@kyunghyang.com

기록에만 있는 존재에서
할머니들 공개증언으로
실재하는 피해자로 확장


경북 경산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김순악 할머니는 ‘공장 취직’ 즉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1943년, 만 15세에 위안소로 떠났다. 해방 이후 평양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지만, 고향으로 가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 ‘이미 버린 몸’이라고 생각해 유곽 생활을 했다. 이후 기지촌 종업원, 외제 판매, 식모살이 등을 했다. 아들 두 명을 뒀지만, 남편은 없었고 가족에 대한 언급도 꺼렸다. 피해자 상당수가 1990년대 초 피해 신고를 한 것과 달리 2000년에야 피해 신고를 했다. 그는 1997년 ‘훈 할머니’로 알려진 위안부 피해자 이남이씨가 캄보디아에서 한국으로 귀국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위안부’로서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했다. 2010년 1억800만원을 사회에 기부하며 세상을 떠났다.


다수의 피해자가 10대에 위안부 생활을 했던 것과 달리, 배봉기 할머니는 만 29세이던 1943년에 위안부에 ‘공출’됐다. 그는 ‘남쪽 섬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오키나와에 있는 위안소로 향했다. 해방 이후에도 귀국하지 못했던 그는 1975년 일본 영주권 신청 과정에서 일본 언론을 통해 위안부임을 한국인 최초로 증언했다. 하지만 그의 증언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잊혀졌다. 배 할머니는 1991년 국내에 위안부 피해 등록을 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사망했다.


■어떻게 피해자와 괴리됐나


수요시위로 ‘치유’됐지만
일본 기금 수령 문제 등
‘방향’이 다르면 소외돼


1992년 1월 시작된 수요시위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주도한 행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후 고 강덕경·김순덕 할머니 등의 적극적인 참여로 인해 이들은 위안부 운동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게 됐다.


특히 일본과 한국의 연구자들이 모두 참여하고 피해자들이 원고로 증언한 ‘2000년 법정’(일본군 성노예제와 관련된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하여 열린 민중 법정)은 위안부 문제를 ‘민족의 수난’에서 보편적 여성인권의 문제로 확장한 계기가 됐다. 피해자들에게는 치유의 경험을 주었다. “우울증과 화병으로 술과 담배, 다툼으로 점철된” 김순악 할머니의 삶은 2000년 11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생활지원 대상이 되면서 달라졌다. 그는 ‘대상자 결정통지서’를 액자에 넣어 보고 또 보았다. 그에게 그것은 “나라에서 나를 ‘위안부’ 피해자라고 인정해준 것이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해 준 것”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피해자의 요구와 운동의 방향이 늘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1995년 일본 민간에서 조성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은 피해자와 피해자, 일본과 한국의 활동단체가 분열하게 된 계기였다. 당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이 기금이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며 수령을 반대했다. 기금은 ‘영혼을 더럽히는 돈’이고 이를 받으면 ‘민족을 배신하는 것’이라는 여론이 퍼졌다.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들도 정대협 입장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심미자 할머니를 비롯해 기금 수령에 우호적이었던 피해자들도 적지 않았다.


기금 수령을 둘러싼 여론 형성 과정은 2015년 한·일 위안부 피해자 합의 때에도 비슷하게 재현됐다. 정대협은 “할머니들에게 기금 수령을 막지 않았다”고 했지만, 생존 피해자 47명 중 절대 다수인 34명이 왜 기금을 수령했는지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피해자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거나 일본 정부와 가족에게 이용당했다는 여론이 형성됐다. 정유진 전 도시샤대학 조교수는 “운동단체가 기금을 수령하는 이들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은 이유는 한국 사회가 여성인권운동가로서의 피해자를 열망하기 때문”이라며 “피해자들이 국가배상금이 아닌 돈을 받으면 민족의 성원에서 배제될 것이라 우려하게 됐다”고 했다.


■다시 쓰기, 다시 피해자에서


‘소녀와 할머니’에만 초점
가난·차별로 고통받은
중간의 삶 조명받지 못해


이용수 할머니 등에 대해서는 ‘가짜 피해자’ 논란이 일기도 했다. 김복동 할머니는 2005년 일본군 군인군속자료에서 이름이 발견돼 강제동원 사실이 기록으로 입증된 피해자다. 그에 비해 이 할머니의 진술은 자주 바뀌어 일본 우익들의 공격을 받아왔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가 피해 이후 약 40~50년이 지난 이후에야 증언에 나설 수 있었던 사회적 여건 등을 생각하면, 이들의 증언이 다소 부정확한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상당수가 해방 후 50년 가까이 자신의 피해를 정의할 언어조차 갖지 못했고 1990년 이후에야 ‘위안부’를 알게 된 뒤, 인권운동가로 거듭났다는 점에서 이들의 생각이 꾸준히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한혜인 아시아평화와역사연구소 연구위원은 진술 변화는 이용수 할머니뿐만 아니라 다른 피해자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했다. ‘위안부 운동은 독립운동’이라는 설명이 유행하면 ‘내 아버지가 독립운동가라 팔려 갔다’고 진술하는 식이다. 그는 “정대협이 (시기에 따라 피해자에게) 원하는 진술을 강요했다기보다 우리 사회가 피해자들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만 정대협이 이 과정에서 특정 피해자를 앞세운 것은 문제라고 했다. 그는 “정대협 입장에서 일본의 공격을 최소화하는 방법은 ‘피해 사실이 확실한 할머니’를 앞세우는 것”이라며 “운동의 효과를 위해 어쩔 수 없는 방향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할머니들은 소외되고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피해자 중심주의’…그들의 ‘공통된 뜻’이 있다는 건 환상



현재 생존 등록 피해자 17명
모두가 정의연 뜻 따르지도
문제에 동의하는 것도 아냐
“맥락과 역사적 상황 살펴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92)가 정의기억연대 등 위안부 단체의 운동 방향을 비판하기 전까지 ‘피해자 중심주의’는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만능열쇠’처럼 쓰였다. 문재인 정부 역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파기하며 ‘피해자 중심적 접근의 부족’을 근거로 들었다. 하지만 이 할머니의 문제제기로 피해자 중심주의는 다름 아닌 ‘피해자’에 의해 도전받게 된 것이다.

피해자 중심주의는 일본이 위안부 피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인하고 문헌 자료를 은폐해왔기 때문에 생존 피해자들의 증언이 범죄를 입증할 중요한 근거로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 의미가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논란을 거치면서 피해자들이 원하고 동의하는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바뀌면서 문제가 생겼다.

경향신문은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 활동가 등 10여명에게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해 물었다. 정치권, 학계, 시민운동계에서 이에 대한 합의된 정의는 아직 없다. 다만 “피해자의 뜻을 존중하는 운동 방식과 합의 절차가 필요하다”는 정도의 합의가 있을 뿐이었다.

‘피해자의 공통된 뜻’이 있다는 것은 이 운동이 가진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생존한 정부 등록 위안부 피해자는 17명이다. 이들이 모두 정의연의 뜻을 따르지 않고, 이 할머니의 문제제기에 동의한다고 볼 수도 없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들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유족들이 위안부 피해를 2차 증언하고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기도 한다. 사실상 동아시아 전역에 퍼졌던 위안부 피해자, 적게는 수백명에서 많게는 수만명의 요구를 하나로 요약하기는 쉽지 않다.

쉬운 해결책으로 한국 사회는 그간 알려진 몇몇 피해자와 이들과 함께하는 운동단체의 행보를 ‘피해자의 뜻’으로 해석해왔다. 최근 사태가 이용수 할머니와 정의연의 대립 구도로 단순화된 것은 이러한 위안부 문제의 소비 방식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활동 방식을 비판했던 피해자가 이 할머니 외에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처럼 크게 불거지지 못했다는 사실은,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사회가 경청해주는 피해자가 소수였다는 점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강정숙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원(전 한국정신대연구소장)은 “피해자의 다면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맥락은 거세된 채 ‘발언’에만 치중해선 피해자 중심주의적인 시각을 세울 수 없다”며 “피해자 말을 그대로 따르는 게 아니라 피해자가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살펴서 논의해 나가는 것이 피해자 중심주의”라고 말했다.

피해자가 살아 있는 현재와 세상을 떠난 이후의 피해자 중심주의에 대한 접근이 달라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지금은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실재하지만, 미래에는 이들의 뜻이 활자와 영상 등으로 재현될 수밖에 없다. 피해자를 오직 당사자에만 국한할지, 이들과 함께한 유족, 활동가, 더 넓게는 비슷한 성폭력의 역사를 살아온 시민들의 트라우마까지 포함한 개념으로 확장할지 고민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이헌미 서강대 트랜스내셔널연구소 HK+연구교수는 2019년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넘어서: 피해자 중심 해결의 원칙과 한국 사회의 현주소’에서 “(세상을 떠나는 피해자가 늘고 있는 상황에서) 피해자를 희생자로 만들어 버리지 않고 대변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정부는 피해자 중심성이라는 개념을 협소한 당사자주의에서 벗어나 사회문화적으로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6110600005&code=940100&s_code=as267#csidx7cd3fccc4d77f718b22467f82a93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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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운동 다시 쓰기]④이용수 할머니 “정대협이 다 못했다는 건 아니다”대구·부산 | 김희진 기자 hjin@kyunghyang.com

댓글72
입력 : 2020.06.22 

이용수 할머니 동행 취재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인 이용수 할머니가 지난 19일 부산에 있는 한 사찰을 방문해 도관 스님과 위안부 운동의 방향을 놓고 대화하고 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수요시위 새로운 방식 필요한 때
구호 아닌 한·일 학생 교류 통해
제대로 된 위안부 역사 교육해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 뭉뚱그려 이렇게 불리는 이들도 이름이 있다. 각자 거쳐온 세월이 다르고, 저마다의 일상을 보낸다. 그럼에도 이들은 ‘일본에 끌려간 조선의 소녀’ 혹은 ‘피해를 증언한 위안부 할머니’로 ‘납작하게’ 이해된다. 이들의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피해자이거나 아니거나, 사죄·배상을 요구하거나 ‘민족을 배신했다’(1995년 아시아 여성기금 수령에 대한 여론)고 이해되거나 하는 식이다.


지난 5월 위안부 운동에 대한 이용수 할머니(92·사진)의 문제제기도 그렇게 단순화돼 읽혔다. 정의기억연대(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대한 반대, 위안부 운동의 존폐 따위다. 더구나 정의연을 둘러싼 의혹제기 양상으로 번지면서 운동에 대한 이 할머니의 고민은 관심에서 밀려났다. 찬반과 선악, 용서와 분노 두 개의 선택지만 내미는 물음에 이 할머니의 목소리도 “수요시위 그만둬야” “정대협 없어져야”로 거칠게 압축되어 사회를 떠돌았다.


지난 19일 대구에서 이 할머니를 만났다. 김학순도, 김복동도, 길원옥도 아닌, 이용수. 1928년 대구에서 ‘놓으면 터질까 불면 날아갈까’ 고명딸로 태어난 이용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이름을 따 세례명을 ‘비비안나’로 지은 이용수 할머니다.


위안부 운동 방향에 대한 이 할머니의 말에는 단선적이지 않은 메시지들이 담겼다. 지난 한 달 반 한국 사회가, 각 진영의 입장에서 읽어낸 할머니의 말에 대해, 이 할머니는 다소 결이 다른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수요시위에 대해선 “시위를 이어가되, 다른 방법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정대협이 무조건 다 못했다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이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거칠게 떠돌던 그간의 말에 담겨 있던 할머니의 본뜻이 스며 나왔다. 이 할머니는 2차 기자회견에서도 “운동을 끝내자는 건 아니다”라고 밝혔지만 이후 방향과 고민은 잘 다뤄지지 않았다.


기자회견에 등장한 이 할머니의 “팔렸다” “속였다” 같은 말 뒤에는 정의연을 향한 분노만 농축되어 있다기보다, 30년 위안부 운동에 대한 아쉬움, 속상함, 걱정, 불안, 초조, 답답함, 섭섭함이 모두 담겼다. 30년 동안 ‘위안부’ 운동에 참여한 당사자이자, 문제 해결이 누구보다 절실한 인권운동가의 다층적인 심정이 얽힌 것이다. 소녀 또는 할머니로만 축약해 보지 않을 때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이다. 사회가 여전히 갈등과 대결 양상에 주목하는 동안 이 할머니는 운동이 가야 할 방향을 구체화하는 일에 착수했다. 대구에서 부산까지 이용수 할머니와 약 8시간 동안 동행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사죄·배상 구호뿐인 시위에 지쳐…‘위안부’ 문제의 실상 더 알려야”




정대협이 위안부 문제를 전 세계에 증명하려던 노력은 고맙지만
위안부 문제의 역사 등을 시민에게 알리고 가르치는 활동은 부족
미래세대인 한·일 학생들이 제대로 배우면 해결해주리라 믿어


오전 11시30분 동대구역. 코로나19 탓에 마스크를 쓴 이용수 할머니를 만났다. 인사를 건네는 이 할머니는 지난달 25일 기자회견 때와 비교해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 할머니는 살던 집을 떠나 약 한 달 전부터 대구 시내 한 호텔에서 머문다. 기자회견 이후 혼자 지내기 불안했다. 상황은 할머니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고, 기자들이 집에 찾아오기도 했다. 이 할머니와 함께 차를 타고 대구 동구의 한 식당으로 향했다. 황태국을 먹던 이 할머니가 대뜸 말했다. “빨리 왔으면 부산에서 맛있는 걸 먹었을 텐데. 밥 먹고 부산으로 가십시다. 시간 괜찮지요?” 그 길로 계획에 없던 부산행이 시작됐다.


차를 타고 이동하던 이 할머니는 2차 기자회견 후 “걱정이 더 많아졌다”고 말했다. 앞으로 위안부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결정을 내려야 했다. 매주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가 1444차에 달하는 동안, 할머니는 ‘문제 해결’이 더 멀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은 사죄하고 배상하라’ 외침은 선명하지만 “구호뿐인 시위” 같았다. 일본도, 한국 학생도 위안부 문제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없다고 봤다. 수요시위에 ‘반일’ ‘토착왜구’ 표현이 난무하고, 일본에선 한국을 우기기만 하는 거짓말쟁이 취급했다.


“모르잖아요. 일본 학생들도 그렇고, 한국 학생들도 그렇고. 왜 맨날 한국은 일본보고 사죄하고, 배상하라카나. ‘위안부’는 또 뭐냐. 이걸 알려줘야지요. 그냥 ‘위안부’라고만 하면 뭘 알 수가 있어요? 천날만날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해봤자 남는 게 구호 빼고 더 있냔 말이에요. 일본에선 (증거가) 아무것도 없는데 한국이 자꾸 거짓말한다케요. 제대로 알려줘야 사람들이 ‘아, 그렇구나’ 하고 깨닫고 해결이 되지요. 그러니까 그게 참 잘못됐지 않나 싶어요. 시위를 하면서 많이 느꼈어요.”


지치기도 했다. 그는 미국, 일본, 프랑스 등 전 세계를 누비며 피해를 증언했다. 국제무대에서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그렇지만 이제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단 생각이 들었다. 본인이 직접 증언에 나서고, 시위에 나가지 않더라도 미래세대가 위안부 문제를 접하고 배울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야겠다 싶었다. 피해자가 남지 않았을 훗날의 운동 방향을 고민하게 된 것이다. 녹음이 스쳐가는 창밖을 바라보다 이 할머니가 말했다.


“내가 200살까지 살겠나(웃음). 아이고. 싸워도 조금 힘이 들겠어. 기운이 펄펄 나고 그래야 하는데 좀 피곤하더라고.” 연단에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김복동 할머니 장례식장에서 “200살까지 살아서 반드시 일본의 사죄를 받겠다”고 자주 말하던 이 할머니였다.


“하고 싶은 말은 쌓였는데~ 한마디 말 못하고 떠나버린 당신을~.” 휴대전화 연락처 목록을 쭉 살펴보던 이 할머니가 ‘공항의 이별’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이 할머니는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한다. 할머니의 18번은 ‘여자의 일생’. 요즘 좋아하는 노래는 ‘보약 같은 사람’. “행복하게 살려면 노래를 듣고, 즐기고, 부를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부산으로 가는 차에서 트로트 가락이 울려퍼졌다.


사람과 어울리기도 좋아하고, 호쾌하게 웃고, 짓궂은 농담도 주고받는 이 할머니이지만 과거 기억이 불쑥 찾아오기도 한다. 더운 날씨에도 담요를 덮은 채 이 할머니는 검지 마디를 만지며 이야기를 꺼냈다. “어렸을 때 거기 갔을 때 전기고문을 당했거든. 손가락이 갑자기 막 비틀어지곤 해. 쥐가 나고.” 요즘도 쥐가 나는 탓에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다. 한참 이야기를 하고 노래를 흥얼거리던 이 할머니의 눈이 슬슬 감겼다. 오른손으로 턱을 괴었다. “아이고 잠 올라칸다.”


한 시간 넘게 달려 오후 2시쯤 도착한 부산 해운대구 좌동. 시내에 있는 한 절이었다. 이 할머니가 알고 지내던 스님을 만나는 자리라고 했다. 영문도 모른 채 따라 내렸다. 스님 두 분과 익숙한 듯 농담을 주고받던 이 할머니가 분위기를 바꿔 이야기를 꺼냈다. “스님, 제가 이제 교육방침이라든지, 어제도 다른 사람과도 이야기를 해봤는데….” 앞으로의 위안부 운동의 방향, 위안부 교육을 한다면 어떻게 이어나가면 좋을지 이야기하는 자리였다. 이 할머니는 기자회견 후 운동의 방향을 선명하게 제시하기 위해 되도록 많은 이들과 만나 여러 의견을 듣는 중이라고 했다.


지난 5월 첫번째 기자회견을 할 때 이 할머니의 문제의식은 뚜렷했다.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존의 운동 방식을 그대로 이어가는 건 유효하지 않은 전략이라고 판단했다. 할머니의 문제제기는 ‘폭로’가 되어 정의연 ‘부실 회계 의혹’ 등으로 번져 나갔지만, 이 할머니 본인은 운동방식을 바꿔보자고 던진 화두였다. 스님과 할머니의 대화가 끝난 후 기자는 이 할머니에게 앞으로 위안부 운동이 가야 할 길에 대해 물었다. 할머니는 “지금은 좀 힘들고 괴롭지만, 앞으로 방식을 바꿔 운동이 이어지길 바란다”며 “수요시위를 안 할 수는 없지만 다른 방식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대협이 못했단 소리를 하는 게 아니에요. 처음에 세계에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데 잘했잖아요. 그 사람들 다 잘해보겠다고 그렇게 한 것 아니에요. 그걸 생각하면 참 수고했고 고맙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면서 ‘위안부’ 문제의 역사가 어떤지, 어째서 한국은 일본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지, 이걸 더 알려줬어야지요. 위안부를 세계에 알리는 데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어요. 한 10년만 알리고, 20년은 해결하는 방법도 고민해서 다른 방식도 더 했어야 하는데. 그게 좀 세월이 야속하다는 거지요. 좀 그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뿐이지, 다른 것은 생각한 적이 없어요.”


그동안의 운동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외에 증명하고, 전 세계 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활동으로 넓히는 데 집중했다면, 정작 위안부 문제의 역사와 한국이 일본에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라며 요구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등 내용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가르치는 활동은 부족했다는 취지다. 이 할머니는 더불어민주당 윤미향 의원 개인에 대해선 “마음은 안됐어요. 열심히 했잖아요. 그런데 욕심을 덜 부렸으면 됐을 텐데…”라며 정계 진출에 여전한 서운함을 표했다.


이 할머니가 앞으로 바라는 위안부 운동의 길은 무엇일까. 이 할머니는 ‘교육’에 방점을 뒀다. ‘사죄하고 배상하라’ 같은 ‘납작한’ 구호에서 벗어나 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제대로 알리고,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교육의 장이 더 필요하다고 봤다. 그는 지난 기자회견부터 ‘한·일 청소년의 교류’를 강조했다.


한·일 학생들이 자주 만나서 가까워지고, 자연스레 서로의 역사를 배울 수 있어야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차가 좁혀진다는 취지다. 이 할머니는 한·일 젊은이들의 교육 얘기를 할 때마다 “내가 좀 더 배웠으면, 더 올바른 생각으로 할 텐데”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 할머니는 시민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위안부 문제를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영구적인 장소로 ‘위안부 역사 교육관’을 마련하고자 한다. 이 할머니는 “‘정신대’가 아닌 ‘위안부’ 역사 교육관에서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도록 교육하고 싶다”며 “미래세대인 한·일 학생들이 제대로 배우면 문제를 해결해주리라, 나는 믿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위안부 문제는 성폭력의 문제이기도 하다”며 “교육을 시작으로 세계의 평화 문제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했다. 이 할머니는 두루뭉술한 계획을 넘어, 시민사회에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완전한 계획이 확정되면 기자들에게 알릴 것”이라며 “저도 오랫동안 싸워왔잖아요. 이제 너무 힘들어요”라고도 했다.


이 할머니와의 한나절 동행을 마치기 전 ‘세상이 할머니를 어떻게 불러주길 바라는지’ 물었다. 그는 ‘할머니’도 ‘어머니’도 아닌, ‘여성 인권운동가’가 좋겠다고 답했다.




“저는 자칭해서 여성인권운동가라고 하거든요. 그렇게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사실 ‘위안부’라고 하는 것은 참 쑥스러워요. 또 ‘성노예’라고 하기도 하는데, 내가 왜 그런 더러운 이름을 붙여서 들어야 하나 싶어요. 때로는 ‘위안부’라는 이름도 왜 내가 들어야 하나, 참 서러워요. 그렇지만 ‘위안부’라는 이름은 바꾸면 안 돼요. 왜냐하면 일본이 ‘위안부’를 만들었는데 책임이 있잖아요. ‘위안부’ 이름을 바꾸면 일본이 지은 죄가 없어지니까 우리가 감당하고 말지. 그러니까 (가장 좋은 건) 나를 여성인권운동가라고 불러주면 좋겠어요. 김학순이가 시작했고 위안부 운동 방식을 바꾸면서 마감하려는 이용수니까, 그래서 여성인권운동가 이용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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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운동 다시쓰기 - 전문가 기고]③‘위안부’ 생존자들에게 명예와 존엄을 허하라
김정란 여성학 박사

입력 : 2020.06.24 20:43 수정 : 2020.06.25

[‘위안부’ 운동 다시쓰기 - 전문가 기고]③‘위안부’ 생존자들에게 명예와 존엄을 허하라

애초에 내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빨간 기와집: 조선에서 온 종군위안부 이야기>를 읽고서였다. 이 책에서 가와다 후미코는 일본에서 생을 마친 배봉기씨의 비극적 일생을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국가도 시민사회도 어느 누구도 돌보지 않은 배씨의 생을 한 일본 작가가 온정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고 기록으로 남겼다는 사실이 아프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배씨는 고향 방문도 가족 상봉도 못한 채 일본에서 숨졌다.

뒤늦은 송구함으로 연구를 시작한 뒤 나는 이 주제가 매우 무겁다는 것을 알게 됐다. 복잡한 여러 층위의 문제가 녹아 있었다. 친일파가 청산되지 못한 한국 현대사의 우여곡절, 그런 역사적 부정의에 대한 국민 다수의 울분, 그래서 친일과 반일로 양분되는 사고방식의 심화, 조선의 순결한 처녀 혹은 식민피해의 상징으로 성역화되는 동시에 탈성화되는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를 여성의 성적 피해 문제로 제기하는 것의 어려움, (할머니들을 오랫동안 괴롭혔던) 성적 피해를 빌미로 여성을 낙인찍고 비난하는 성문화의 강고함. ‘위안부’ 운동이 과녁으로 삼았던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죄와 배상’ 말고도 우리 사회에 내부적으로 얽힌 문제는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난제들이었다.

이 주제로부터 최대한 멀리 있고 싶었다. 그러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글은 간혹 소환됐고, 지금도 때로는 정파적으로, 때로는 탈맥락적으로 소비되고 있다. 
내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아직도 피해자의 ‘명예회복’에 대해 운운하는 관점의 후진성이다.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줘야 한다는 주장은 수요시위나 추모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주장됐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법’도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즉 피해자들을 ‘명예가 실추된 자’로 상정하는 것이다. 이용수씨의 기자회견에서도, 이후 여러 전문가들의 토론과 기고문에서도 피해자의 ‘명예회복’이 거론됐다.

그러나 그들의 명예가 회복되어야 할 만큼 손상되었는가에 대해서 나는 의구심을 갖는다. 더욱이 일본의 공식적 사죄와 배상이 있을 때라야 그들의 명예가 회복된다는 주장은 더욱 받아들이기 어렵다.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줘야 한다는 주장은 그들의 명예 ‘상실’을 전제함으로써 이미 그들이 담보하고 있는 존엄과 명예를 오히려 박탈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연 ‘위안부’ 피해자들은 명예가 실추된 존재인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존엄하고 명예로운 존재라는 점을 말하고 싶다. 성폭력이 발생하는 상황에서 명예롭지 않은 유일한 당사자는 가해자이다. 따라서 성폭력을 여성의 명예 실추와 연관시키는 사고방식은 도전받아야 한다. 이러한 성차별적 사고는 상해의 본질을 왜곡하거나 수치심을 피해자에게 떠넘김으로써 가해자 처벌의 기회를 축소할 위험을 안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들은 “더럽혀졌다” 혹은 “그들의 명예를 손상시켰다”고 여기는 가족과 사회로부터 추방과 살해, 차별에 직면해왔다.

유엔인권소위원회 특별보고관 게이 맥두걸은 ‘위안부’ 문제에 대한 보고서(1998)에서 성폭력을 여성의 명예 침해로 규정하는 법률의 한계를 지적했다. 성폭력을 개인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공동체(가문, 지역, 민족 등)에 대한 명예 혹은 소유권 침해로 정의하는 여러 나라의 법률을 언급하며 이를 성차별이 사법체계에 의해 법제화된 예로 비판했다.

가족의 명예를 실추한 것으로 간주돼 오빠에게 죽임을 당한 인도의 강간 피해자들이 이런 경우일 것이다. 세르비아인들이 인종청소를 한다며 보스니아 여성들을 집단 강간한 것도 여기에 해당한다. 타 민족 여성을 공격하는 것이 그 민족에 대한 효과적인 공격이라는 사고는 침략을 감행하는 쪽과 침략을 당하는 쪽의 남성들이 공유하는 가부장적 사고이다. 이것은 여성이 남성의 집합체에 속한다는 사실을 전제로 여성에 대한 폭력이 남성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으로 의미화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여성의 몸은 이러한 논리 속에서 남성들 간의 싸움이 일어나는 전쟁터가 되어왔다.

우리 사회는 이러한 사고로부터 자유로운가?

태국에 살고 있던 ‘위안부’ 피해자 노수복씨가 한국대사관을 통해 가족을 찾아달라고 호소한 것이 1984년의 일이다. 한 신문사가 특파원을 보내 사연을 연재했고 마침내 노씨는 40년 만에 고국에서 가족과 상봉하고 태국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그녀가 전후 태국의 한 수용소에서 온몸으로 귀향을 거부했던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다른 이들이 모두 귀국의 꿈에 부풀어 있을 때 노씨는 목숨을 걸고 맨발로 달려 수용소를 탈출했던 것이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그토록 처절하게 귀향을 거부하게 했을까? ‘위안부’였던 많은 조선 여성들은 왜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을까? 돌아온 여성들은 왜 피해 사실을 수십년간 밝히지 않고 침묵했을까?

이것은 우리 사회 내에 존재하는 여성 비하와 성적 낙인에 대한 성찰의 문제가 ‘위안부’ 문제에 깊이 얽혀 있음을 보여준다. ‘환향녀’를 ‘화냥년’으로 멸시하고 집단적으로 배제하는 문화적 태도는 비단 조선시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위안부’ 생존자들이 오랫동안 침묵했던 이유는 성폭력이 가해자의 범죄로 여겨지지 않고 피해자의 죄, 수치, 명예 상실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이런 관점은 여전히 극복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성범죄 현장에서 명예를 잃은 것은 범죄자뿐이다. 그러니 피해자를 비난하지 마라. 피해자들에게 애초 상실된 적이 없는 명예와 존엄을 허하라. 더 이상 생존자들이 명예를 회복하지 못했다고 여긴 채 한스럽게 돌아가시게 해선 안 된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6242043005&code=940100&s_code=as267#csidx03b39e46cef3d1392596cee3890e7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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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운동 다시쓰기 - 전문가 기고]⑤여성인권선언, ‘이용수들’을 만나다
변혜정 | 전 한국여성인권진흥원장

입력 : 2020.06.28 20:35 수정 : 2020.06.28 
[‘위안부’ 운동 다시쓰기 - 전문가 기고]⑤여성인권선언, ‘이용수들’을 만나다

1992년 그 어느 날 수요시위에 참석했다. 당시는 여성단체들이 돌아가면서 주관했기 때문에 책임 단체일 때는 꼭 가야 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간사였던 나는 쏟아지는 업무로 수요시위가 과외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거의 매일 발생하는 성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알리는 차원에서 함께했다. 한동안은 위안부 피해자를 자주 만나 그녀들의 이야기를 가장 잘 듣는 사람만이 위안부 관련 운동·연구·정책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평시 성폭력 문제에만 집중했다.

2018년 피해자들의 다양한 목소리에 관심 있는 연구자·운동가로서 여성가족부 산하기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건강 치료와 맞춤형 지원사업’ 책임자가 되면서 다시 생각이 많아졌다. 특히 준비되지 않은 ‘위안부문제연구소’ 사업을 위탁받으면서 ‘위안부’ 그녀들은 누구인지, 왜 문제인지, 또 어떠한 사과를 어떻게 받아야 하는지 섬세하게 고민을 나누는 자리를 갖고 싶었으나 쉽지 않았다. 방법은 시간이 있을 때마다 살아계신 어른들과 남은 가족을 뵙는 것이었다.

위안부 관련 기관 등을 방문하던 중에 치과 비용을 받기 위해 피해를 등록(2018년)하셨다는 어른(미공개)을 만났다. 당신의 등록 사실을 알게 된 딸이 엄청 화를 냈다고 하시면서 손주나 사위에게는 말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 창피한 일을 굳이 사위가 알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자주 만나 당신 잘못이 아니며 창피한 일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피해자의 다양한 욕망과 그 가족 이야기를 듣는 치유 사업을 하자고 여가부에 건의했지만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나 역시 살아계신 피해자를 자주 뵙기보다 돌아가신 분의 장례식장만을 찾으면서 너무 염치가 없었다. 어느 날 이용수 여성인권운동가가 찾아오셨다. 좋아하신다는 국밥을 시켜놓고도 그간의 하고 싶은 말씀을 하느라 거의 드시지 못했다. 그날 만난 이용수는 1992년 친구의 피해를 대신 말한다고 증언했던 피해자 이용수가 아니라 당신 말대로 여성인권운동가였다.

그런데 요즘 나는 ‘또 다른’ 이용수를 만난다. 그 이용수는 그간 하고 싶었던, 누구도 하지 못했던 피해자의 설움과 분노를 쏟아내면서 운동의 방향과 방법에 대해 비판했다. 배움이 짧아서 그 방법이 구체적이지 않다고 안타까워했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겸손’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알던 이용수는 국제사회에 위안부 문제를 제기한 공식적 여성인권운동가였다면 2020년 이용수는 화려한 옷도 입고 싶고, 배고플 때 밥도 먹고 싶고, 화나면 화났다고 말하는 평범한 여성 시민으로서 우리 내부의 ‘부정의’를 솔직하게 말하고 있다. 다양한 욕망을 가진 여성, 인간으로서 이제는 당신 뜻대로, 주체적인 사람으로 살겠다는 자기 정의를 선언한 것이다. 여성, 인간, 선언!

요즘 계속 새로운 ‘이용수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제 와서 갑자기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인간으로서 느꼈던 그간의 당연한 의문을 과거처럼 참지 않고 말하기 시작했다. 위안부 영화나 증언집에서 재현되는 것만이 그녀들의 진실이 아니다. 소녀, 어머니, 할머니, 어르신, 여성인권운동가로 호명되지만 여전히 성노예를 거부하며 사위가 알면 부끄러운 피해자, 상처가 많으신 여성 노인의 삶이 ‘이용수들’의 현실이다.

결국 당사자로서 새로운 ‘이용수들’은 위안부 문제가 특정 시기의 특별한 문제가 아니라 지금도 진행되는, 함께 풀어야 할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전쟁은 여성을 어떻게 필요로 하는지, 성폭력은 왜 여전히 발생하는지, 젠더·빈곤·민족의 문제는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그럼에도 당신의 메시지를 비난하거나 변명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과하기를 촉구한다. 물론 사과하고 싶다고 아무 때나 막무가내로 자기식대로 하는 것은 사과가 아니라 (가해) 권력을 실행하는 것이라며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진정한 사과는 성찰하고 기억하며 함께하는 것이다.

어쩌면 일본의 사과보다 더 중요한 것은, 피해 증명 이외에는 그녀들의 그 어떤 것에도 관심 없었던 국가·운동·언론이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이용수들’의 고통을 듣는 것이다. 그래야 그녀들이 그동안의 무거웠던 짐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살 수 있다. 이것이 남아 있는 우리가 그녀들과 함께 살아가며 그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이며 바로 우리가 배워야 할 새로운 ‘이용수들’의 ‘여성인권선언’이다. 이용수는, 우리가 더 많은 ‘이용수들’을 마주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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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운동 다시쓰기 - 전문가 기고]⑥일본의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에서 본 정대협·정의연 운동김부자 도쿄외국어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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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0.06.29 16:41 수정 : 2020.06.30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운동에 몸담은 시민들은 가슴 아픈 나날을 보내고 있다. ‘위안부’ 피해생존자 이용수님의 기자회견을 한국 보수언론이 악용하며 정의연(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 구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을 포함한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과 증언 및 연구의 30년 성과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듯한 사태로 치닫고 있기 때문이다. <반일종족주의>가 한국 이상으로 베스트셀러(40만부)에 오른 일본에서는 TV에서도 이번 사태를 ‘제2의 양파(조국) 사건’으로 크게 보도하고 있다. 이들 뉴스의 출처가 한국 보수언론의 일본어판인 데서도 나타나듯 국경을 넘은 ‘보수연대’가 진행되고 있다. 이 사태를 가장 기뻐하는 이들은 일본의 가해책임을 해제하고 싶어하는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다. 정대협·정의연 30년과 일본군성노예제를 심판하는 여성국제전범법정(2000년 법정) 20년의 재검증 논점은 많지만, 지면 관계상 일본의 ‘위안부’운동·2000년법정과 정대협·정대협 운동과 민족주의 및 페미니즘의 관계를 중심으로 돌아보고자 한다.


■일본의 ‘위안부’운동·2000년 법정과 정대협


가해국 일본에 대하여 ‘위안부’ 문제 해결을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정대협이었다.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는 1970년대부터 알려졌지만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여론이나 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1990년 6월 “위안부는 민간업자가 데리고 다녔다”는 일본 정부의 국회 답변을 계기로, 이 발언에 항의하는 한국 여성들(이후의 정대협)이 일본을 방문했다. 그 과정에서 몇 차례 강연회가 열렸고, 같은 해 12월 처음으로 일본 여성들의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이 탄생했다. 1991년 12월 김학순님이 일본을 방문해 들려준 증언의 충격이 일본의 운동과 연구의 방향을 결정지었고, 이는 이듬해 1992년 1월에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의 군 관여 공문서 자료 발견과 이후 일본군의 관여와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 공표(1993년 8월)로 이어졌다. 정대협과 피해자의 등장은 일본에서 운동과 연구의 시작에 결정적인 촉매로 작용했다.


‘2000년 법정’으로 이어지는 두번째 문제제기를 한 것도 정대협과 피해자들이었다. 1994년 2월, 한국의 피해자와 정대협이 일본 검찰에 ‘위안부’ 제도의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고소·고발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의 운동진영은 운동의 분열과 약화가 초래될 것이라며 회의적 반응을 보였다. 이는 전후의 일본이 ‘쇼와 천황’을 포함해 과거의 침략전쟁과 식민지배 책임을 추궁하지 못한 것과 관련되어 있다.


문제제기에 대한 응답은 2000년 법정으로 나타났다. 1998년 6월에 창립된 인권단체 ‘VAWW-NET(바우넷)저팬’의 마쓰이 야요리 대표가 가해국 여성의 책임 아래 단순한 국제공청회가 아닌 책임자 처벌=심판의 장으로서 ‘피해자를 비롯한 여성을 주역으로 하는 국제전범법정’을 제안했다. 2000년 법정은 도쿄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 당시 불문에 부쳐진 ‘천황의 면책, 식민지의 배제, 성폭력의 불처벌’을 여성과 시민의 힘으로 다시 심판하고 젠더 정의의 관점에서 식민주의를 극복하고자 했다. 정대협은 이 제안에 가장 먼저 찬동하여 피해 8개국의 대표로서 2000년 법정을 성공으로 이끄는 강력한 추진자가 되었다. 2000년 법정 이후 현재까지 일본의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은 정대협과 협력해왔지만 그들의 운동방침에 무비판적이지는 않았으며 이상과 같은 독자성을 각기 지녔다.


■정대협 운동은 민족주의 일색인가.


<경향신문> ‘위안부 운동 다시 쓰기’ 기획기사에서 강조된 바를 보자 하니 한국에서는 정대협을 ‘민족주의 프레임’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이용수님은 정대협의 민족주의를 비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지금 그 점이 쟁점화되는 것일까? 
한편 일본에서 정대협은 ‘반일 내셔널리즘’이라 낙인 찍혀 있다. 1990년대에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이하 국민기금)의 이사를 지낸 오누마 야스아키 교수, 페미니스트 우에노 치즈코 교수 등이 그렇게 지칭하였고, 이번 사태에서도 일본 언론은 윤미향 의원을 ‘반일의 최선봉’이라 부르기까지 한다.


이와 관련해 다음 세 가지를 생각하고 싶다. 

첫째, 정대협 운동의 목표에 일본정부의 사죄와 배상 실현이 포함되어 있는 이상 ‘내셔널한 틀’ 안에 놓일 수밖에 없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란 제국 일본이 아시아 국가들에 대하여 지배-피지배, 침략-피침략의 식민주의에 근거한 내셔널한 틀 안에서 자행한 전쟁범죄였다.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도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을 묻는 성격을 띠니 내셔널한 틀이 전제됨은 당연한 일이다. 정대협이 국민기금과 한일 ‘합의’(2015년)에 반대한 것은 ‘반일’세력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조치가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배상(법적책임)이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대협 운동을 단순히 ‘반일 내셔널리즘’이라 단정하는 것은 지나치다.


또한 민족주의를 일반화해 비판하는 것은 제국의 지배에 대한 피지배민족의 저항조차도 민족주의를 구실 삼아 배격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결국은 피지배민족의 저항하는 힘을 박탈하게 된다. 민족의 피해회복을 지향하는 운동이 민족주의와 무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페미니즘 연대와 자기 변혁


둘째, 운동의 방법론에서 정대협은 ‘위안부’ 문제와 전시 성폭력을 없애기 위해 국경을 초월한 ‘페미니즘적 연대’를 추구했다. 정대협은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위안부’운동을 알리고 세계적인 여성인권평화운동으로 드높임으로써 세계사에 공헌했다. 미국과 유럽연합을 비롯한 세계 곳곳의 의회에서 대일 ‘위안부’ 결의가 채택(2007년 이후)된 것도 그 일례이다. 뿐만 아니라 정대협은 2012년에 ‘위안부’ 피해자의 뜻을 받들어 나비기금을 설립하고 콩고민주공화국과 우간다 등 전시 성폭력 피해 극복을 위한 협력사업을 펼쳤다. 정대협은 운동의 방법론 만이 아니라 목표에서도 세계의 전시성폭력 재발 방지를 목표로 하는 운동으로 성장했다.


셋째, 정대협 운동은 30년 동안 끊임없이 자기 변혁을 이뤄왔다. 일본의 많은 논자들처럼 1990년대의 운동만으로 정대협을 판단하는 것은 일면적 시각이다. 예를 들어, 2000년 법정에 이르는 과정에서 ‘위안부’ 제도의 역사적 배경으로 공창제를 지적한 일본 측에 대하여 한국 측의 문제제기가 있었다. 이는 ‘위안부’와 공창을 구별하고 싶었던 당시 정대협의 가부장적 여성관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학문적 논쟁은 현재도 진행 중).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정대협은 미군기지촌여성, 성매매여성운동과 연계하는 등 한국사회의 성매매·성착취를 문제 삼는 페미니즘운동으로 자기성장을 이어갔다. 기지촌 출신 여성이 수요시위에서 당당하게 발언하고 연대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이는 일본을 훨씬 앞서가는 운동이다. 그러한 흐름은 기지촌 여성 연구로 알려진 한국의 대표적 페미니스트의 한 사람인 이나영 교수가 지난 4월 정의연 신임 이사장으로 취임한 데서도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쇠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이지 말라


어떤 운동이든 그렇듯 정대협 운동에도 모순이나 갈등, 알력, 실패는 있을 것이다. 정대협 운동은 피해당사자를 중심에 두는 운동이지만 다양한 상황에 놓여있는 피해당사자의 요구를 모두 대변하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한국사회와 언론이 정대협·정의연의 30년 운동사를 ‘민족주의’라는 한마디만으로, 혹은 이용수님의 이번 기자회견만으로, 운동의 회계상 실수를 침소봉대 확대시켜서, 운동과 증언과 연구의 전면부정으로 치닫는 것은 위험하다. 운동의 변천 과정 중 일부밖에 보려 하지 않는 비판은 한국에서 시작되어 세계사를 변화시킨 운동에 대해 교각살우(矯角殺牛), 즉 쇠뿔을 바로잡으려다 소를 죽이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정의연은 한국사회의 누구보다도 피해자들과 대면해왔고 바로 그 때문에 이용수님의 강한 비판을 받았다는 본뜻을 새겨 그 분과의 관계를 포함한 30년간의 운동과 방법론을 자성적으로 돌아보면서, 한국사회와 함께 한층 더 자기 변혁을 실현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이용수님의 기자회견 발언인 “(일본정부로부터) 사죄와 배상은 백년 천년이 지나도 받아내야 한다”는 소망도 함께 실현해 가기 바란다.


■다양한 피해자의 목소리 듣기


‘위안부’ 생존자가 모두 떠나실 수 있는 현시대에 한국사회가 이 문제의 해결을 바란다면 다양 한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100여명의 증언을 담아낸 8권의 《증언집》 중 단 한 권이라도 읽어주었으면 한다. 이 증언집들은 정대협 운동을 통해 증언을 성실하게 대면하게 된 연구가 만들어낸 세계사적 자산에 다름없다. 그리고 미래세대를 위해 가령 방송사들이 연구자나 운동단체와 협력하여 피해자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증언기록 아카이브(영상 포함)를 인터넷상에 만드는 것은 어떨까? 그랬을 때 비로소 이 분들이 “주체성과 존엄성을 가진 피해생존자”(양현아 교수)임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현재 한국 피해자의 목소리를 일본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증언 4집》의 일본어판 번역에 참여하였고, 또한 한국과 일본에서 ‘위안부’ 피해에 어떻게 귀 기울여왔는지를 편집한 《성폭력 피해를 듣다》를 올 가을 일본에서 출판할 예정이다.(번역: 강혜정)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6291641011&code=940100&s_code=as267#csidxef0ca4412fc2c47a54611c951ff955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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