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필경
6h
런 아저씨,
더 이상 고통이 없는 세상으로 꼭 가십시요!
2013년 3월 27일 베트남 중부지방에서, 나는 초로의 베트남인에게 정말 힘든 이야기를 들으며 증언하던 모습을 찍던 내 카메라 뷰파인더에 눈물을 흠뻑 묻혔다.
『저는 올해 62세입니다. 그 일은 15살 때 있었습니다. 새벽 5시 쯤, 우리 마을 사방에서 폭격 소리가 들렸어요. 당시 워낙 폭격이 많아서 집집마다 땅굴을 판 방공호가 있었어요. 우리 식구도 땅굴로 들어갔어요.
점차 폭격 소리와 총소리가 우리 마을로 가까워오면서 엄청나게 커졌어요. 동시에 아기 울음소리, 여인들의 고함과 비명 소리가 땅굴로 들려왔어요. 그러다가 총소리는 우리 마을을 지나면서 점점 멀어졌어요.
오후 4시쯤 멀리 있는 마을에서 다시 총소리가 들려 왔어요. 그러면서 점차 우리 마을 쪽으로 다가 오기에 우리는 다시 땅굴에 들어갔어요. 땅굴로 다가오는 군인들이 ‘여기 비씨가 있다 비씨’(VC, 베트콩의 약자)하는 발음에 한국군인줄 알았어요.
그들은 우리 가족을 발견하고..., 땅굴 밖으로 나오라고 했어요. 나갔더니 우리를 논두렁 쪽으로 끌고 갔습니다. 논두렁에는 우리 마을 25가구 가족들이 이미 끌려 나와 있었습니다.
한국군은 우리에게 조용히 엎드려 있으라고 했어요. 그러고 나서 우리를 빙 둘러 쌌어요. 좀 있다가 한 사람이 고함을 치자 총소리가 들려오고 수류탄이 날라 왔습니다. 요란한 소리와 더불어 안개가 낀 것처럼 포연이 자욱했어요.
자욱한 포연 사이로 머리가 깨져 뇌수가 흐르는 사람, 배가 터져 창자가 나오고, 팔과 다리가 잘려 나가 널브러진 모습이 보였어요. 그 가운데서도 노인들은 자식을 찾고 특히 엄마들은 아이의 이름을 불러대고 살아있는 아이들은 공포의 울음을 울어대는, 차마 인간으로서는 들을 수 없는 참혹한 소리들이 포연 속을 채우고 있었어요.
그 때 내 발목 쪽에 수류탄이 떨어졌어요. 순간적으로 일어나 세 걸음 정도 뛰어나갔을 때 수류탄이 터졌어요. 파편이 온 몸에 박히고 나는 기절을 했습니다.
한 밤에 깨어났어요. 살아남은 사람들이 우리 가족을 집으로 옮겼더군요. 주위를 둘러보니 어머니는 하반신이 절단 되었고, 누이동생은 머리가 깨져있었습니다. 누워 있는 데 밤 12시까지 여동생의 비명이 너무나 끔찍이 이어졌습니다.
얼마 있다가 비명이 멈추자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이 동생을 거적에 둘둘 말아 나갔습니다. 그들이 다시 우리 집에 되돌아 왔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도 거적에 둘둘 말려 나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다시 기절했습니다. 깨어나니 나는 가족이 없는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나를 거두어 키워주었습니다.』
베트남 중부 지방 대부분은 언제나 무성한 야자수를 빼면 우리나라 전라도와 매우 닮은 느낌이 든다. 나지막한 산 아래 펼쳐진 너른 논과 그 사이를 가로지른 실개천 그리고 드문드문한 마을이 정감 있고 평온하다.
<베트남평화의료연대>는 매년 학살지역을 찾아 진료활동을 한다. 진료단을 4팀으로 나누어 팀마다 하루를 학살지역을 찾아 학살 생존자의 증언을 듣는다.
우리는 진료지 푸옌성 뚜이 호아에서 북쪽으로 4시간 걸려 간 답사지 빈딘성 떠이손현 따이빈사로 가서 런 아저씨의 증언을 들었다.
베트남 주민과 자료에 따르면, 1966년 2월 중순 3일 동안, 우리나라 면 정도의 따이빈사 15개 마을에서 1700여명의 주민들이 한국군에게 목숨을 잃었다. 한 마을에서는 한 시간 만에 380명 전원 다시 말해 생존자 한 명도 없었다.
우리에게 ‘그 일’을 증언하신 런 아저씨(Nguyễn Tấn Lân)는 온 몸에 파편을 박혀 기절한 다음 살아남았다.
‘그 일’ 이후 47년간 누이와 어머니의 비명은 자신의 귀에서 떠나지 않았고, 수없이 많은 파편 가운데 어떤 것은 살과 뼈 속에 파묻혀있고 어떤 것은 핏줄 안에서 맴돌며 통증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밤에 통증이 더 심해 잠을 잘 수 없었는데, 그 통증을 잊기 위해 밤새도록 논두렁에서 달렸다고 한다. 런 아저씨에게는 ‘그 날, 그 일’을 평생 한 순간도 떠나지 않았다.
런 아저씨의 고향인 떠이빈사 고자이 마을에는 큰 위령비가 있고 그 뒤에는 모자이크로 만든 그림 벽면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한국군이 한 ‘그 일’의 기억을 담아 놓았다. 동네 사람을 모아 놓고 총 쏘고 수류탄 던지고, 특히 여자를 윤간한 후 불태우고…
47년 전 ‘그 일’을 이야기 하신 후 런 아저씨의 눈가에 맺힌 눈물은 다시 진료지 숙소로 돌아오는 4시간 동안 통곡할 수 없는 슬픔으로 억눌렸다. 그 수많은 원혼의 파편은 내 몸 구석구석 감돌아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고통으로 남을 것 같았다.
이 마을 사람들은 아무리 전쟁이라지만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왜 죽임을 당했나?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일은 두려운 행위이며 가볍게 처리할 일이 아니지 않는가?
일제는 만주에서, 백두산에서 조선인들을 함부로 그렇게 했다.
해방 후 친일파들은 민중들을 일제에게 배운 대로 함부로 그렇게 했다.
한국전쟁에서 서로가 상대방 생명을 함부로 그렇게 했다.
한국전쟁을 경험한 한국군은 베트남에서 함부로 그렇게 했다.
베트남 전쟁을 치른 우리 참전 군인들은 광주에서 함부로 그렇게 했다.
한국에 대해 씻을 수 없는 증오심을 평생 간직한 런 아저씨는 한국에서 이렇게 멀리 찾아 준 우리를 다정하게 맞아 주시고 마지막으로 신신당부했다.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마세요, 제발!
한국 사람들을 남조선 사람이니 북조선 사람이니 구별하지 하지 말고 그냥 조선 사람으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2015년 4월,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피해자 최초로 한국을 방문하여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었고 서울과 대구, 부산 등에서 한국 시민들과 간담회를 갖고 평화의 시간을 함께 했다.
증언 장소 앞에서 가스통 노인들이 증언을 방해하려고 득실거리자 런 아저씨는 “전쟁도 치열했지만, 평화도 치열하구나.”라는 말을 남겼다.
한국에 다녀 간 뒤 2016년에 ‘런 아저씨’는 가해자인 한국 사회에 과거 반성 아래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원하는 장문의 편지에서 이렇게 끝맺었다.
“저는 이제 인생의 황혼녘을 걷고 있습니다. 앞으로 몇 번의 봄이 더 남아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용서함으로써 과거의 짐을 벗고 가벼워지는 날이 너무 멀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과거의 상처를 잘 아물게 해서, 우리의 아들딸 그리고 손주들에게는 보다 평화로운, 더 좋은 세상을 남겨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편지는 우리 사회의 웬만한 지식인들 보다 말과 글의 내면에 훨씬 더 기품이 서려 있다.
‘런 아저씨’의 말과 글에 나타난 격조는 비극적인 삶에서 비롯한 다양한 경험들을 심오하게 내면화 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런 아저씨가 겪은 비극을 베트남전쟁에서 한국이 저지른 야만적 학살과 분리하여 생각한다면 역사를 왜곡하는 오류에 빠진다.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베트남전쟁의 근원적인 시대정신 즉 베트남 인민의 저항정신을 이해해야 한다.
30년에 걸친 베트남전쟁은 인류 역사상 어느 전쟁에서도 볼 수 없었던 유형의 전쟁이었다. 모든 인민이 왜 싸워야 하는 가를 자각한 전쟁, 다시 말해 인민 자신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저항전쟁이었다. 왜 싸워야 하는지 모른 채 끌려간 삼국지에 나타나는 그 시대의 병사들이나, 비행기를 몰고 ‘천황만세’를 강요당하며 자살 돌진한 일본 병사와 달라도 너무나 다른 차원이었다.
이제까지 인류의 모든 전쟁은 한 줌도 안 되는 지배자의 이익에 따른 명령을 맹목적으로 수행한 전쟁이었다. 베트남전쟁 역시 미국 국방성과 군수산업체가 결합한 군산복합체의 이익에 따른, 이른바 명백한 침략 전쟁이었다. 한국은 미국에 빌붙어 돈벌이 하러 참가한 전쟁이었으니, 우리는 이런 비윤리적인 전쟁에 참전한 것에 대해 뼈 속까지 반성해야 한다.
베트남 인민은 프랑스 제국주의 폭력 앞에 민족의 독립과 자유가 말살 당하는 것을 보았고, 미국 제국주의 십자군이 누이와 어머니를 능멸하는 것을 생생히 보았다. 그래서 인민은 자신 가족의 존엄과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상상할 수 없는 지독한 폭력에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저항했다. 어떠한 희생도 마다하지 않은 ‘숭고한 전쟁’이었다.
큰 산일수록 골짜기도 깊은 법이다. 베트남인들이 겪은 고통은 정신을 깊게 만들었다. 그들의 말과 글은 슬픔의 크기만큼 정신을 드러내었다. 슬픔은 자유에 대한 열망과 한 뿌리에서 자라난 가지였다. 죽음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가치 때문에 당한 고통을 통해 정신의 크기를 드러냈다. 강렬한 고통에 정신적 상처를 크게 입었음에도, 슬픔을 통한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이 베트남인들의 탁월함이고 고귀함이다.
베트남인들은 쏟아지는 피눈물 속에서 가해자를 응시했다. 고통의 그런 감수성이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게 하는 힘을 길렀다.
아직도 위선적인 이념의 탈을 쓰고 서로 겨누는 총부리에 증오심만 가득한 우리 민족은 베트남인의 저항정신을 소중한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나는 런 아저씨의 증언과 편지에서 다음을 느꼈다.
“삶의 깊이는 학식이나 사회적 지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슬픔의 자기반성’에서 드러난다.
어둠 속에서 빛의 고귀함을 알 수 있다.
정신의 밝음은 고통의 깊이에서 두드러진다.”
런 아저씨가 돌아가셨다.
한국은 수많은 베트남인에게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주고도 아직 한 마디의 용서를 건네지 않았다.
정녕 우리는 그 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사과할 수 없는가?
우리의 윤리는 저 천박한 일본의 윤리를 닮으려는가?
***
다음은 베트남 현지 <한베평화재단>이사 권현우 선생이 보내온 소식입니다.
지난 20년간 수많은 한국 시민들에게 평화의 마음을 나눠주셨던 빈안학살 생존자 응우옌 떤 런님이 11월 7일(토) 오전 향년 6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너무도 갑작스럽고 가슴 아픈 런 아저씨의 부고입니다. 차오르는 슬픔 속에서 런 아저씨가 한국 시민들에게 나눠주신 평화의 씨앗 하나하나를 다시금 되새겨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한베평화재단을 통해 조화와 부조금을 전할 수 있습니다>
+ 조화비 및 부의금 보낼 곳: 우리은행 1005-603-308131 예금주: 한베평화재단
+ 문의: 전미화 회원모금팀장 010-9268-2814 / kovietpeace@gmail.com
1. 조화비는 1개 7만원.
2. 송금시 본인 성명과 함께 꼭 “부의” 혹은 “조화”를 표기.
3. 조화를 보낼 분은 이메일 혹은 전화로 신청인의 이름(한국어, 영문명) 혹은 단체명을 알려주세요.
4. 베트남 장례문화에 따라 발인일부터는 조화와 조의금을 가족들이 받지 않습니다. 런 아저씨의 발인은 9일(월) 오후 2시입니다. 베트남 현지에서 조화와 부의금을 모아 빈딘성에 전하는데 별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때문에 조화비는 8일(일) 오전 12시(점심)까지, 부의금는 8일(일) 밤 12시까지 보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49Philsik Shin, Lee Woosang and 47 others
8 comments4 shares
Like
Comment
Share
Comments

이주형 삼가 선생님 명복을 빕니다.
1
Hide or report this
No comments:
Post a Comment
Note: Only a member of this blog may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