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03

정해진 수기

 

 

 

99

 

2) 광산로동자들 속에 들어가

 

김원현과 함께 조국에 돌아온 나는 서울에서 대동인쇄주식회사의 실태를 료해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인쇄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것이 조국광복 위한 결정적 투쟁에서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출판인쇄시설이라는 것과 큰 인쇄시설인것만큼 많은 좋은 선진적 로동자들과 접촉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러나 인쇄소의 실태는 우리의 기대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인쇄소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중역진은 거의가 친일파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종만씨는 거의 발언권이 없었다. 이런조건하에서 그인쇄소를 우리의 목적대로 이용한다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우선 그 인쇄주식회사에 입사하기가 곤란한 형편이였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이종만씨와 나의 형과 협의한 끝에 두분이 합작하는 형식으로 경상남도 울산군 호계리에 있는 울산철광산을 개발하도록

 

 

100

 

하였다.

당시 나의 형은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고 일제패망의 결정적 시기에 사용하기 위한 폭발물등을 준비저장할 목적밑에 여수선에서 멀지않은 광양, 순천 등지에 조그마한 폐광을 구입개발하는 척하고 있었다.

나의 형은 한 번 통이 크게 판을 벌리자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호응해나섰다.

울산철광산은 좀 개발하다가 둔 폐광으로서 매장량도 적지 않고 광질도 좋을뿐만 아니라 중앙선에서 5리밖에 떨어져있지 않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지리적으로도 유리하였다.

그런데 광산은 이종만씨의 아들 이영조가 80%의 광권을, 일본인이 20%의 광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형은 일본인 광권을 2만원으로 구입하여 이종만씨의 요구대로 이영조의 명의로

 

101

 

넘겨주는 대담한 조치까지 취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1942.4월부터 울산철광산에 투신하게 되었다.

당시 나의 친척들과 일반사회계에서도 나의 이전 행동에 대하여 걱정하거나 의아하게 생각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성대를 졸업하고 도쿄대대학원에까지 다니다가 광산에 투신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로동계급을 묶어세우고 그들 속에서 내 자신도 단련시키며 요행잘되면 크게 정치자금도 마련할 뿐 아니라 일제패주의 결정적 시기에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데 한 목 단단히 해보자는 결심을 안고 불철주야 전력을 다하였다.

잡소리들에 귀를 막으려 지어는 친우들과의 서간거래도 당분간 끊었다.

낮에는 광산갱내에서 밤에는 로동자들 속에서 살았고 또 때로는 경상남도 울산의 광산관계자들 및 호계면 주재소 수석놈과 술자리도 같이해야 했다.

광산운영비는 물론 나의 형이 대였고 기술적인 측면

 

 

102

 

이종만씨 측이 책임졌다. 광석매매 등에 대한 것은 서울신문사에 입사한 김원현이 추진하고 있었다.

나의 형과 <<양정원>>의 교장이던 윤승원도 광산에 와있곤 했다. 로동자들은 40~50명 되었고 우리고향사람들도 몇사람 왔었는데 그 중에는 <<양정원>>을 나온 젊은 동무도 있었다.

그해 여름에 나의 형이 광산에 왔었다. 그는 고향에서 울산으로 오는 도중 진주에 들려서 촉석루를 구경하였다는 것이었다. 나의 형은 임진조국전쟁때에 진주가 함락되자 적장을 끌어안고 촉석루앞 남강에 몸을 던져 원쑤를 갚았다는 젊은 관기 주 논개의 충절을 노래한 한시를 한 구 지었다고 하면서 나에게 읊어 주었는데 나는 지금도 그 시를 외우고 있다. 그 한시를 0[usro001]  다음과 같은 것이였다.

 

남강은 예나이제나 무심히 흐르고

촉석루의 산유화 지금도 들리는 듯

 

 

103

 

충절은 의암에 서리서리 어렸으니

죽었으되 영생하누나 여기 불사0[usro002] 

 

사실 <<사이영생>>(죽어서도 영생한다)는 당시 나의 형 자신의 소원이였으며 인생관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우리 형제는 달밝은 여름밤에 이시를 읊으면서 고요히 잠든 광산마을 구릉길을 걷고 또 걸었던 것이다.

그런데 큰마음을 먹고 닻을 올렸던 우리의 항로은 얼마 안 되어서 암포에 부딪치기 시작하였다. 것은 캐놓은 광석이 예견한 대로 팔리지 않은 것이었다. 따라서 자금이 돌지 못하였고 그렇다고 무한정 운영자금을 대기에는 나의 형의 지력도 모자랐다. 이러한 때에 광산에서 사고가 발생하였다. 9월초인데 갱내에 가스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날씨가 무더운데다가 환기시설이 불충분하여 생긴 가스였다.

그리하여 갱내에서 모든 로동자들이 다 나왔는데 고향에서 온 젊은 동무가 한사람 나오지 못하였다.

 

104

 

나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고향에서 온 다른 한동무를 데리고 갱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젊은 고향동무를 업고 나오는데 가스에 칸테라 불이 꺼지고 나마져 발을 헛드이여 수직갱을 30-터 정도 동반에 이리저리 맞으면서 떨어졌다. 구출작업에 의하여 나와 고향의 한 동무는 구출되었다. 젊은 동무는 별 대책을 세워도 끝내 소생하지 못하였다.

참으로 기가 막히였다. 누구에게도 말할수 없는 큰 뜻을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고 시작했던 일인데 성사는 커녕 고향사람까지 희생시켰으니 분통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양정원>>을 졸업한 동무로서 우리들의 사업을 다소나마 더 돕자고 숨막히는 가스 안에서도 취후에까지 남아서 일하다가 희생되였던 것이다. 그때 나의 형과 <<양정원>>의 교장 윤승원도 광산에 와있었다. 광산마을 뒤산 양지바른 곳에 그를 안장하여 애도의 뜻은 표하였으나 어찌 찌져지는 듯한 가슴과 그에 대한 죄스러운 생각을 가실 수

 

 

105

 

있었겠는가?

이런 사고가 생긴 후 재정난도 있어서 광산에서 철수하였다.

이와 같이 나는 실천투쟁의 불길 속으로 나왔던 첫 걸음에서 고배를 마시였다. 이것은 뜻만 크고 사회적 경험이 부족하고 특히 자기가 하고 있는 사업부문의 실정에 너무도 어두운데 기인하였다고 생각한다.

 

 

106

 

3) 위대한 수령님의 충직한 전사가 되려고

 

1942 9월에 고향에 돌아온 나는 고통스러웠다. 주변의 여론도 좋지 못하였고 나의 형에 대해서도 미안하였다. 그러나 항상 나를 고무해준 것은 나의 형이였다. 형은 우선 은행부채를 정산하기 위하여 타면에 있던 자기 소유의 토지를 전무 팔았다. 이리하여 나의 형에게는 보성에 있는 약 5만평이 토지만이 남게 되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일제기관에 복무할 수는 물론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당시의 정세하에서 직업이 없이 지낼 수도 없었다.

당시 나의 형은 보성군소재지에 있는 보성인쇄주식회사의 사장으로 있었다. 나는 형과의 협의 끝에 회사의 전무취체역이라는 직책을 지니고 형의 대리로 시업하기로 하였다.

 

 

107

 

이 인쇄소는 명색이 회사이였지만 로동자 15명에 인쇄기 몇 대를 가지고 있는 조그만한 기관이였다. 그러나 이 기관은 나에게 합법적 직업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1943. 1월부터 1945 3월까지 이 기관에서 일하게 되었던 나는 우선 인쇄소 로동자들을 교양하는데 류의하였다. 나는 두주일에 1번 정도 집에 돌아가고 평상시에는 거의 인쇄소에서 숙식하면서 로동자들과 접촉하였다. 로동자들의 가정방문도 자주 하여 생활상 애로도 풀어주었고 여름마다 율포에서 해수욕 놀이를 조직하여 회사전체 성원이 즐기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로동자들을 민족적으로 계급적으로 각성시키는 한편 나는 2달에 1차례 정도 자재구입을 구실로 광주, 서울, 부산,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동지들과 만나고 있었다.

 여기서 잠간 울산철광산의 뒤처리 문제에 대하여

 

 

 

 

108

 

언급한다면 1943 9월에 자재구입차로 부산까지 가 나는 울산철광마을 뒤산에 묻고 온 교향의 젊은 동무에 대한 의리로 그의 묘소를 1년만에 찾아보려고 울산까지 갔다.

광산마을에 들려보니 광산형편이 달라졌던 것이다. 광산이 20만원에 모기관에 팔렸다는 것이였다. 나는 그길로 서울로 올라가 이영조를 만나 나의 형이 구입한 20%의 광업권과 투하한 운영비 4만원을 받아가지고 집에 돌아와 형에게 전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형에 대한 재정적 손실을 보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울에 가서 오랜 동지들을 다시 만나게 된 나는 1943 9월부터 김원현, 임상준 등이 이미 관계하고 있던 보성육영회에 이사로 참가하여 주로 고학하고 있는 대학생들을 규합하는데 로력하는 동시에 학도병 응모를 거부케하는 투쟁등을 전개하였다. 당시 일본 교또에서 관서대학에 다니고 있는 나의 매재 안용섭

 

 

 


 

****************************

4. <울산철광산> 로동자들 속에서 (1942. 1 ~ 1942. 12) (27)

 

어떻게 할 것인가? 일본 도꾜에 다시 돌아와서 학구생활을 계속하면서 일선 투쟁의 길을 찾기 위하여 모대기고 있던 나는 우연한 기회에 김원현 동무의 연줄로 리종만씨(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 의장단 성원으로도 있었음)를 만나게 되었다. 그 때는 1941 10월경이었다. 그는 당시 조선의 이름난 광산업자로서 평양에서 대동광업전문학교를 설립 운영하는 등 사회사업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1940년경부터 일본총독부와 그와 결탁한 배신적인 회사중역진의 모략책동에 의하여 광산권과 기타 리권이 일본총독부와 그 앞잡이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일본의 언론계에 호소하여 정치적으로 풀어볼 길이 없겠는가 하고 일본 도꾜에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제의 조선민족자본말살정책과 그 앞잡이들의 매국적 배신행위를 격분에 넘쳐 폭로규탄하고 성실한 젊은 조선청년들에게 크게 기대한다고 하면서 우리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서울에서 제일 큰 인쇄시설인 대동인쇄주식회사가 자기의 소유이니 그것을 맡아서 해보라고 권고하였던 것이다.

우리들은 일제의 강도적 략탈행위와 그 앞잡이들의 매국적인 소행에 민족적 격분을 느끼면서 만약에 인쇄시설을 장악하게 되면 선진적인 로동자들을 각성시키고 묶어세울 수 있을 것이며 혁명적대사변이 도래할 경우 아주 유리하게 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구원할 방도를 론의하였다.

그러던 중 1941. 12월 초에 일제가 미제의 하와이 진주만을 불의에 습격 폭파하였으며 이리하여 태평양전쟁이 발발되었다.

전세계가 더욱더 전쟁의 불길 숙에 휩쓸려 들어가고 일제는 그 불전 속에서 타죽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 우리들은 일제를 타도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일준의 주저도 없이 착수하자는 생각으로부터 곧 고향에 나와서 형과 혐의 토의한 끝에 도꾜에 다시 돌아와서 리종만씨의 호텔비용 약 5,000원을 청산해준 다음 도꾜제대 대학원을 중퇴하고 1942. 1월 조국에 돌아왔던 것이다.

큰 뜻을 간직하고 김원현 동무와 함께 조국에 돌아온 나는 서울의 대동인쇄주식회사의 실태를 료해해보니 다른 광산들과 마찬가지로 인쇄소도 우리의 기대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인쇄소의 선권을 장악하고 있는 중역진은 거의 친일분자들이였으며 리종만씨는 거의 발언권이 없었다. 이런 조건에서 우리의 목적대로 리용하기는 커녕 우선 그 인쇄주식회사에 입직하기가 곤난한 형편이었다.

내가 이런 형편을 반영시키자 리종만씨는 경상남도 울산구 호계면 달천리에 자기가 개발하다가 놔둔 철광산이 있는데 매장량도 많고 품질도 좋으니 그것을 개발해보지 않겠는가고 권고하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 약간 주저하였다. 그러나 나의 형이 일제의 멀지 않은 패망을 확신하고 1941년 가을에 려수선(전주~려수)가까이에 있는 전라남도 광양군에 금광 폐광을 구입하여 개발하는 척하면서 일제 패망의 결정적 시기에 후방교란에 사용할 폭발물들을 저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울산 철광산이 중앙선(서울~충주~경주~부산)에서 5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지점에 있으니 일제의 대동아전쟁의 후방교란에도 아주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하면서 리종만씨와 합작을 하여 철광산의 개발운영을 해보지 않겠는가고 제기하자 나의 형은 아주 좋은 지점이라고 하면서 한번 통이 크게 해보자고 적극적으로 지지 호응해나섰다.

그런데 이 철광산은 리종만씨의 소유가 아니라 리종만씨의 아들 리영조가 80%의 광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광권의 20%는 일본인의 소유였다.

나의 형은 일본인 소유의 광권을 당시의 돈 2만원으로 구입하여 리종만씨의 소원대로 리영조의 명의로 넘겨주는 대담한 조치까지 취하였던 것이다.

이런 준비사업들을 끝낸 다음 나는 1942. 4~9에 월산철광개발운영에 형의 대리인으로 투신하게 되었다.

당시 나의 친척들은 물론 일반사회에서도 나의 이러한 행동에 대하여 걱정하거나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로동자들을 각성시키고 묶어세워 일제의 침략전쟁의 후방을 교란시키거나 일제가 패주할 때 그 퇴로를 차단하여 무리죽음을 주는데 한목 단단히 해보자는 결심 밑에 들려오는 이러저러한 잡소리에 귀를 막았으며 지어는 친우들과의 서신거래도 끊고 광산에 투신하였던 것이다.

낮에는 광산갱내에서 밤에는 로동자합숙에서 살았으며 또 때로는 경상남도청의 광산관계관리들 및 울산군 호계면 주재소 주석놈과 술자리도 같이하였다.

광산의 운영비는 물론 나의 형이 대었고 기술적인 측면은 리종만씨의 사위 등 측근자들이 책임졌다. 광석의 판로는 서울에서 매일신문사 기자로 사업하게 된 김원현이 책임지고 개척하기로 하였다.

나의 형과 <<양정원>>의 교장 윤승원도 광산에 와있었으며 고아산로동자는 약 40~50명 되었는데 그중에는 <<양정원>>의 졸업생들도 있었다.

그해 여름 나의 형은 고향에서 울산광산으로 오는 도중에 경상남도 진중 들려 촉석루를 구경하였는데 임진조국전쟁 당시 진주가 함락되자 왜장을 글어안고 촉석루 밑남강에 몸을 던져 원쑤를 갚았다는 주론개의 충절을 노래한 한시를 지었다고 하면서 나에게 읊어주었는데 나는 지금도 그 시구절을 외우고 있다.

남강은 예나 제나 무심히 흐르는데


 

촉석루의 산유화(山有花) 노래 은은히 들리는 듯

충절은 의암(義岩)에 푸르게 덮혔으니

죽어서도 영생하노나 여기 불사주(不死주?)

사실 그 당시 <<死而永生>>(죽어서도 영생한다)는 나의 형과 그리고 나 자신의 소원이였으며 인생관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큰 뜻을 품고 닻을 올렸던 우리의 항로는 얼마 안 되어서 암초에 부딪쳣던 것이다. 캐놓은 철광석이 예견한대로 빨리 팔리지 않은 것이였다. 이미 운영비로 2만원을 댄 나의 형은 무한정 자금을 대기에는 재력이 모자랐다. 이러한 때에 설상가상으로 사고가 발생하였다. 9월 초에 갱내에서 까스가 발생하였다. 무더운 날씨에다가 환기시설이 불충분하여 까스가 빠져나가지 못하였다. 오행 인명피해는 면할 수 있었으나 불어나는 지하수를 퍼낼 길이 없었고 재정난에 부딪쳐서 관산운영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였다.

이리하여 큰 포부를 안고 하강을 버리고 실천투쟁에 나섰던 우리들은 사회물정에 너무도 어두었기 때문에 첫 걸음에서 고배를 마시게 되였던 것이다.

 

5. 보성 인쇄주식회사 전무취체역으로  ??? (1943. 1 ~ 1944. 3) (28~29)

1942 9월에 고향에 돌아온 나는 고통스러웠다. 주변의 여론도 좋지 못하였고 나의 형에게 재정적 손실을 준 것으로 하여 죄스럽기도 하였다. 그러나 항상 나를 리해해주고 고무해준 것은 나의 형이였다. 큰 일을 하려면 일시적 실패도 있는 법이라고 하면서 우선 은행부채나 청산한 다음 더 보람있는 일을 해보자고 오히려 나를 격려하는 것이였다. 나의 형은 이웃면에 있던 토지들을 전부 팔아 은행의 빛을 정리하고 다시 고향인 희천면 내에 있는 토지 약 5만평만이 남게 되었다. 나의 형을 도와서 가사 정리를 끝마친 나는 1943년에 들어서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제기관에 복무할 수는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하여 당시의 정세에서 합법적 직업이 없이 지낼 수도 없는 일이였다.

당시 나의 형은 보성군 소재지에 있던 보성인쇄주식회사의 사장으로 있었다. 그리하여 나의 형과의 협의 밑에 이 회사의 전무취체역으로 직책을 지니고 형의 대리인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이 인쇄소는 말이 주식회사이지 로동자 15명 정도에 족답인쇄기 몇 대를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인쇄소였다. 그러나 나에게 합법적 직업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는 위장처를 보장해주는 기관으로 되였다.

1943. 1 ~ 1945. 3(28~30)기간에 이 기관에서 일하게 된 나는 우선 로동자들을 고양하고 묶어세우는데 착수하였다. 나는 2주일에 하루정도 집에 돌아가고 평상시에는 거의 인쇄소에서 숙식하면서 로동자들과 접촉하였다. 로동자들의 가정방문도 하였고 생활 상 애로도 풀어주었으며 여름철에는 매해 회천면 소재지 률포에서 해수욕놀이를 조직하여 회사 전제 직원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에 로동자들은 점차 조선 민족의 얼을 가슴에 새기게 되였으며 계급적 각성도 갖게 되어갔다.

1943 5월경에 자재 구입 차로 부산까지 가게 되였던 나는 나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놓은 울산에 무심코 들리였는데 울산철광산의 형편이 완전히 달라졌었다. 울산철광산이 20만원에 모기관에 팔려서 대대적으로 개발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길로 서울에 올라가 리영조를 만나 나의 형이 투자한 도합 4만원을 받아가지고 고향에 돌아와 나의 형에게 전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형에게 끼친 재정적 손실을 보상할 수 있었던바 나의 마음은 훨씬 후련해졌다.


번역하면

 [usro002]


====



99쪽


2) 광산로동자들 속에 들어가


김원현과 함께 조국에 돌아온 나는 서울에서 대동인쇄주식회사의 실태를 료해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인쇄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것이 조국광복 위한 결정적 투쟁에서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출판인쇄시설이라는 것과 큰 인쇄시설인것만큼 많은 좋은 선진적 로동자들과 접촉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러나 인쇄소의 실태는 우리의 기대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인쇄소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중역진은 거의가 친일파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종만씨는 거의 발언권이 없었다. 이런조건하에서 그인쇄소를 우리의 목적대로 이용한다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우선 그 인쇄주식회사에 입사하기가 곤란한 형편이였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이종만씨와 나의 형과 협의한 끝에 두분이 합작하는 형식으로 경상남도 울산군 호계리에 있는 울산철광산을 개발하도록



100쪽


하였다. 

당시 나의 형은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고 일제패망의 결정적 시기에 사용하기 위한 폭발물등을 준비저장할 목적밑에 여수선에서 멀지않은 광양, 순천 등지에 조그마한 폐광을 구입개발하는 척하고 있었다. 

나의 형은 한 번 통이 크게 판을 벌리자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호응해나섰다. 

울산철광산은 좀 개발하다가 둔 폐광으로서 매장량도 적지 않고 광질도 좋을뿐만 아니라 중앙선에서 5리밖에 떨어져있지 않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서 지리적으로도 유리하였다. 

그런데 광산은 이종만씨의 아들 이영조가 80%의 광권을, 일본인이 20%의 광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형은 일본인 광권을 2만원으로 구입하여 이종만씨의 요구대로 이영조의 명의로 


101쪽


넘겨주는 대담한 조치까지 취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1942.4월부터 울산철광산에 투신하게 되었다. 

당시 나의 친척들과 일반사회계에서도 나의 이전 행동에 대하여 걱정하거나 의아하게 생각한 사람이 적지 않았다. 

성대를 졸업하고 도쿄대대학원에까지 다니다가 광산에 투신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로동계급을 묶어세우고 그들 속에서 내 자신도 단련시키며 요행잘되면 크게 정치자금도 마련할 뿐 아니라 일제패주의 결정적 시기에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데 한 목 단단히 해보자는 결심을 안고 불철주야 전력을 다하였다. 

잡소리들에 귀를 막으려 지어는 친우들과의 서간거래도 당분간 끊었다. 

낮에는 광산갱내에서 밤에는 로동자들 속에서 살았고 또 때로는 경상남도 울산의 광산관계자들 및 호계면 주재소 수석놈과 술자리도 같이해야 했다. 

광산운영비는 물론 나의 형이 대였고 기술적인 측면



102쪽


이종만씨 측이 책임졌다. 광석매매 등에 대한 것은 서울신문사에 입사한 김원현이 추진하고 있었다. 

나의 형과 <<양정원>>의 교장이던 윤승원도 광산에 와있곤 했다. 로동자들은 40~50명 되었고 우리고향사람들도 몇사람 왔었는데 그 중에는 <<양정원>>을 나온 젊은 동무도 있었다. 

그해 여름에 나의 형이 광산에 왔었다. 그는 고향에서 울산으로 오는 도중 진주에 들려서 촉석루를 구경하였다는 것이었다. 나의 형은 임진조국전쟁때에 진주가 함락되자 적장을 끌어안고 촉석루앞 남강에 몸을 던져 원쑤를 갚았다는 젊은 관기 주 논개의 충절을 노래한 한시를 한 구 지었다고 하면서 나에게 읊어 주었는데 나는 지금도 그 시를 외우고 있다. 그 한시를 반0면  다음과 같은 것이였다. 


남강은 예나이제나 무심히 흐르고

촉석루의 산유화 지금도 들리는 듯



103쪽


충절은 의암에 서리서리 어렸으니 

죽었으되 영생하누나 여기 불사0에 


사실 <<사이영생>>(죽어서도 영생한다)는 당시 나의 형 자신의 소원이였으며 인생관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우리 형제는 달밝은 여름밤에 이시를 읊으면서 고요히 잠든 광산마을 구릉길을 걷고 또 걸었던 것이다. 

그런데 큰마음을 먹고 닻을 올렸던 우리의 항로은 얼마 안 되어서 암포에 부딪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캐놓은 광석이 예견한 대로 팔리지 않은 것이었다. 따라서 자금이 돌지 못하였고 그렇다고 무한정 운영자금을 대기에는 나의 형의 지력도 모자랐다. 이러한 때에 광산에서 사고가 발생하였다. 9월초인데 갱내에 가스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날씨가 무더운데다가 환기시설이 불충분하여 생긴 가스였다. 

그리하여 갱내에서 모든 로동자들이 다 나왔는데 고향에서 온 젊은 동무가 한사람 나오지 못하였다. 


104쪽


나는 앞뒤를 가리지 않고 고향에서 온 다른 한동무를 데리고 갱안으로 달려들어갔다. 젊은 고향동무를 업고 나오는데 가스에 칸테라 불이 꺼지고 나마져 발을 헛드이여 수직갱을 30메-터 정도 동반에 이리저리 맞으면서 떨어졌다. 구출작업에 의하여 나와 고향의 한 동무는 구출되었다. 젊은 동무는 별 대책을 세워도 끝내 소생하지 못하였다. 

참으로 기가 막히였다. 누구에게도 말할수 없는 큰 뜻을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고 시작했던 일인데 성사는 커녕 고향사람까지 희생시켰으니 분통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양정원>>을 졸업한 동무로서 우리들의 사업을 다소나마 더 돕자고 숨막히는 가스 안에서도 취후에까지 남아서 일하다가 희생되였던 것이다. 그때 나의 형과 <<양정원>>의 교장 윤승원도 광산에 와있었다. 광산마을 뒤산 양지바른 곳에 그를 안장하여 애도의 뜻은 표하였으나 어찌 찌져지는 듯한 가슴과 그에 대한 죄스러운 생각을 가실 수 



105쪽


있었겠는가?

이런 사고가 생긴 후 재정난도 있어서 광산에서 철수하였다. 

이와 같이 나는 실천투쟁의 불길 속으로 나왔던 첫 걸음에서 고배를 마시였다. 이것은 뜻만 크고 사회적 경험이 부족하고 특히 자기가 하고 있는 사업부문의 실정에 너무도 어두운데 기인하였다고 생각한다. 



106쪽


3) 위대한 수령님의 충직한 전사가 되려고


1942년 9월에 고향에 돌아온 나는 고통스러웠다. 주변의 여론도 좋지 못하였고 나의 형에 대해서도 미안하였다. 그러나 항상 나를 고무해준 것은 나의 형이였다. 형은 우선 은행부채를 정산하기 위하여 타면에 있던 자기 소유의 토지를 전무 팔았다. 이리하여 나의 형에게는 보성에 있는 약 5만평이 토지만이 남게 되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일제기관에 복무할 수는 물론 없는 것이고, 그렇다고 당시의 정세하에서 직업이 없이 지낼 수도 없었다. 

당시 나의 형은 보성군소재지에 있는 보성인쇄주식회사의 사장으로 있었다. 나는 형과의 협의 끝에 회사의 전무취체역이라는 직책을 지니고 형의 대리로 시업하기로 하였다.



107쪽


이 인쇄소는 명색이 회사이였지만 로동자 15명에 인쇄기 몇 대를 가지고 있는 조그만한 기관이였다. 그러나 이 기관은 나에게 합법적 직업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1943. 1월부터 1945년 3월까지 이 기관에서 일하게 되었던 나는 우선 인쇄소 로동자들을 교양하는데 류의하였다. 나는 두주일에 1번 정도 집에 돌아가고 평상시에는 거의 인쇄소에서 숙식하면서 로동자들과 접촉하였다. 로동자들의 가정방문도 자주 하여 생활상 애로도 풀어주었고 여름마다 율포에서 해수욕 놀이를 조직하여 회사전체 성원이 즐기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로동자들을 민족적으로 계급적으로 각성시키는 한편 나는 2달에 1차례 정도 자재구입을 구실로 광주, 서울, 부산,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동지들과 만나고 있었다. 

 여기서 잠간 울산철광산의 뒤처리 문제에 대하여 





108쪽


언급한다면 1943년 9월에 자재구입차로 부산까지 가 나는 울산철광마을 뒤산에 묻고 온 교향의 젊은 동무에 대한 의리로 그의 묘소를 1년만에 찾아보려고 울산까지 갔다. 

광산마을에 들려보니 광산형편이 달라졌던 것이다. 광산이 20만원에 모기관에 팔렸다는 것이였다. 나는 그길로 서울로 올라가 이영조를 만나 나의 형이 구입한 20%의 광업권과 투하한 운영비 4만원을 받아가지고 집에 돌아와 형에게 전하였다. 이리하여 나는 형에 대한 재정적 손실을 보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서울에 가서 오랜 동지들을 다시 만나게 된 나는 1943년 9월부터 김원현, 임상준 등이 이미 관계하고 있던 보성육영회에 이사로 참가하여 주로 고학하고 있는 대학생들을 규합하는데 로력하는 동시에 학도병 응모를 거부케하는 투쟁등을 전개하였다. 당시 일본 교또에서 관서대학에 다니고 있는 나의 매재 안용섭도




****************************

4. <울산철광산> 로동자들 속에서 (1942. 1 ~ 1942. 12) (27세)


어떻게 할 것인가? 일본 도꾜에 다시 돌아와서 학구생활을 계속하면서 일선 투쟁의 길을 찾기 위하여 모대기고 있던 나는 우연한 기회에 김원현 동무의 연줄로 리종만씨(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 의장단 성원으로도 있었음)를 만나게 되었다. 그 때는 1941년 10월경이었다. 그는 당시 조선의 이름난 광산업자로서 평양에서 대동광업전문학교를 설립 운영하는 등 사회사업도 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1940년경부터 일본총독부와 그와 결탁한 배신적인 회사중역진의 모략책동에 의하여 광산권과 기타 리권이 일본총독부와 그 앞잡이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일본의 언론계에 호소하여 정치적으로 풀어볼 길이 없겠는가 하고 일본 도꾜에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제의 조선민족자본말살정책과 그 앞잡이들의 매국적 배신행위를 격분에 넘쳐 폭로규탄하고 성실한 젊은 조선청년들에게 크게 기대한다고 하면서 우리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면서 서울에서 제일 큰 인쇄시설인 대동인쇄주식회사가 자기의 소유이니 그것을 맡아서 해보라고 권고하였던 것이다.

우리들은 일제의 강도적 략탈행위와 그 앞잡이들의 매국적인 소행에 민족적 격분을 느끼면서 만약에 인쇄시설을 장악하게 되면 선진적인 로동자들을 각성시키고 묶어세울 수 있을 것이며 혁명적대사변이 도래할 경우 아주 유리하게 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구원할 방도를 론의하였다.

그러던 중 1941. 12월 초에 일제가 미제의 하와이 진주만을 불의에 습격 폭파하였으며 이리하여 태평양전쟁이 발발되었다.

전세계가 더욱더 전쟁의 불길 숙에 휩쓸려 들어가고 일제는 그 불전 속에서 타죽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게 된 우리들은 일제를 타도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일준의 주저도 없이 착수하자는 생각으로부터 곧 고향에 나와서 형과 혐의 토의한 끝에 도꾜에 다시 돌아와서 리종만씨의 호텔비용 약 5,000원을 청산해준 다음 도꾜제대 대학원을 중퇴하고 1942. 1월 조국에 돌아왔던 것이다.

큰 뜻을 간직하고 김원현 동무와 함께 조국에 돌아온 나는 서울의 대동인쇄주식회사의 실태를 료해해보니 다른 광산들과 마찬가지로 인쇄소도 우리의 기대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인쇄소의 선권을 장악하고 있는 중역진은 거의 친일분자들이였으며 리종만씨는 거의 발언권이 없었다. 이런 조건에서 우리의 목적대로 리용하기는 커녕 우선 그 인쇄주식회사에 입직하기가 곤난한 형편이었다.

내가 이런 형편을 반영시키자 리종만씨는 경상남도 울산구 호계면 달천리에 자기가 개발하다가 놔둔 철광산이 있는데 매장량도 많고 품질도 좋으니 그것을 개발해보지 않겠는가고 권고하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에 약간 주저하였다. 그러나 나의 형이 일제의 멀지 않은 패망을 확신하고 1941년 가을에 려수선(전주~려수)가까이에 있는 전라남도 광양군에 금광 폐광을 구입하여 개발하는 척하면서 일제 패망의 결정적 시기에 후방교란에 사용할 폭발물들을 저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나는 울산 철광산이 중앙선(서울~충주~경주~부산)에서 5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지점에 있으니 일제의 대동아전쟁의 후방교란에도 아주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하면서 리종만씨와 합작을 하여 철광산의 개발운영을 해보지 않겠는가고 제기하자 나의 형은 아주 좋은 지점이라고 하면서 한번 통이 크게 해보자고 적극적으로 지지 호응해나섰다.

그런데 이 철광산은 리종만씨의 소유가 아니라 리종만씨의 아들 리영조가 80%의 광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광권의 20%는 일본인의 소유였다.

나의 형은 일본인 소유의 광권을 당시의 돈 2만원으로 구입하여 리종만씨의 소원대로 리영조의 명의로 넘겨주는 대담한 조치까지 취하였던 것이다.

이런 준비사업들을 끝낸 다음 나는 1942. 4~9에 월산철광개발운영에 형의 대리인으로 투신하게 되었다.

당시 나의 친척들은 물론 일반사회에서도 나의 이러한 행동에 대하여 걱정하거나 의아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로동자들을 각성시키고 묶어세워 일제의 침략전쟁의 후방을 교란시키거나 일제가 패주할 때 그 퇴로를 차단하여 무리죽음을 주는데 한목 단단히 해보자는 결심 밑에 들려오는 이러저러한 잡소리에 귀를 막았으며 지어는 친우들과의 서신거래도 끊고 광산에 투신하였던 것이다.

낮에는 광산갱내에서 밤에는 로동자합숙에서 살았으며 또 때로는 경상남도청의 광산관계관리들 및 울산군 호계면 주재소 주석놈과 술자리도 같이하였다.

광산의 운영비는 물론 나의 형이 대었고 기술적인 측면은 리종만씨의 사위 등 측근자들이 책임졌다. 광석의 판로는 서울에서 매일신문사 기자로 사업하게 된 김원현이 책임지고 개척하기로 하였다.

나의 형과 <<양정원>>의 교장 윤승원도 광산에 와있었으며 고아산로동자는 약 40~50명 되었는데 그중에는 <<양정원>>의 졸업생들도 있었다.

그해 여름 나의 형은 고향에서 울산광산으로 오는 도중에 경상남도 진중 들려 촉석루를 구경하였는데 임진조국전쟁 당시 진주가 함락되자 왜장을 글어안고 촉석루 밑남강에 몸을 던져 원쑤를 갚았다는 주론개의 충절을 노래한 한시를 지었다고 하면서 나에게 읊어주었는데 나는 지금도 그 시구절을 외우고 있다.

남강은 예나 제나 무심히 흐르는데

촉석루의 산유화(山有花) 노래 은은히 들리는 듯

충절은 의암(義岩)에 푸르게 덮혔으니

죽어서도 영생하노나 여기 불사주(不死주?)에 

사실 그 당시 <<死而永生>>(죽어서도 영생한다)는 나의 형과 그리고 나 자신의 소원이였으며 인생관이였던 것이다.

그런데 큰 뜻을 품고 닻을 올렸던 우리의 항로는 얼마 안 되어서 암초에 부딪쳣던 것이다. 캐놓은 철광석이 예견한대로 빨리 팔리지 않은 것이였다. 이미 운영비로 2만원을 댄 나의 형은 무한정 자금을 대기에는 재력이 모자랐다. 이러한 때에 설상가상으로 사고가 발생하였다. 9월 초에 갱내에서 까스가 발생하였다. 무더운 날씨에다가 환기시설이 불충분하여 까스가 빠져나가지 못하였다. 오행 인명피해는 면할 수 있었으나 불어나는 지하수를 퍼낼 길이 없었고 재정난에 부딪쳐서 관산운영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였다.

이리하여 큰 포부를 안고 하강을 버리고 실천투쟁에 나섰던 우리들은 사회물정에 너무도 어두었기 때문에 첫 걸음에서 고배를 마시게 되였던 것이다.


5. 보성 인쇄주식회사 전무취체역으로  ??? (1943. 1 ~ 1944. 3) (28~29세)

1942년 9월에 고향에 돌아온 나는 고통스러웠다. 주변의 여론도 좋지 못하였고 나의 형에게 재정적 손실을 준 것으로 하여 죄스럽기도 하였다. 그러나 항상 나를 리해해주고 고무해준 것은 나의 형이였다. 큰 일을 하려면 일시적 실패도 있는 법이라고 하면서 우선 은행부채나 청산한 다음 더 보람있는 일을 해보자고 오히려 나를 격려하는 것이였다. 나의 형은 이웃면에 있던 토지들을 전부 팔아 은행의 빛을 정리하고 다시 고향인 희천면 내에 있는 토지 약 5만평만이 남게 되었다. 나의 형을 도와서 가사 정리를 끝마친 나는 1943년에 들어서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고 생각하게 되었다. 일제기관에 복무할 수는 물론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하여 당시의 정세에서 합법적 직업이 없이 지낼 수도 없는 일이였다.

당시 나의 형은 보성군 소재지에 있던 보성인쇄주식회사의 사장으로 있었다. 그리하여 나의 형과의 협의 밑에 이 회사의 전무취체역으로 직책을 지니고 형의 대리인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이 인쇄소는 말이 주식회사이지 로동자 15명 정도에 족답인쇄기 몇 대를 가지고 있는 조그마한 인쇄소였다. 그러나 나에게 합법적 직업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는 위장처를 보장해주는 기관으로 되였다.

1943. 1 ~ 1945. 3(28~30세)기간에 이 기관에서 일하게 된 나는 우선 로동자들을 고양하고 묶어세우는데 착수하였다. 나는 2주일에 하루정도 집에 돌아가고 평상시에는 거의 인쇄소에서 숙식하면서 로동자들과 접촉하였다. 로동자들의 가정방문도 하였고 생활 상 애로도 풀어주었으며 여름철에는 매해 회천면 소재지 률포에서 해수욕놀이를 조직하여 회사 전제 직원들과 즐거운 한 때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에 로동자들은 점차 조선 민족의 얼을 가슴에 새기게 되였으며 계급적 각성도 갖게 되어갔다.

1943년 5월경에 자재 구입 차로 부산까지 가게 되였던 나는 나에게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놓은 울산에 무심코 들리였는데 울산철광산의 형편이 완전히 달라졌었다. 울산철광산이 20만원에 모기관에 팔려서 대대적으로 개발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길로 서울에 올라가 리영조를 만나 나의 형이 투자한 도합 4만원을 받아가지고 고향에 돌아와 나의 형에게 전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형에게 끼친 재정적 손실을 보상할 수 있었던바 나의 마음은 훨씬 후련해졌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

Note: Only a member of this blog may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