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onSeok Heo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일본사>서평
일본은 예로부터 한국인에게 가깝고도 먼 나라이다. 조선을 강제 병합한 제국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 중 가장 먼저 서구열강과 함께 근대화를 이루었지만, 아시아 태평양 정쟁에 패배한 이후 미국의 지원 속에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부채를 기반으로 한 일본의 거품경제는 끝내 붕괴하여 저성장이 만연해졌고 현재는 저출산-고령화 등으로 역동성과 안정성 모두 무너진 ‘한 물 간’ 국가라는 것이 대다수 한국인이 공유하는 일본관이다. 그러나 현대 일본의 다양한 면을 소개하기에는 이 같은 일본관은 불충분하다고 여겨진다.
이와는 다른 시선으로 이 책은 한국인이 통념적으로 받아들이는 일본의 이미지와 역사를 살핀다. 흔히들 우리는 19세기 들어 압도적 문물로 무장한 서구열강에 의해 위기를 맞기 이전까지 조선과 일본은 전체적인 국력에서 비슷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조선과 일본의 운명을 가른 역사적 대분기로 많은 사람들은 19세기 근대화의 기치를 내건 ‘메이지 유신’ 에 주목한다.
그러나 한 나라의 경제성장은 무에서 유로 창조한다는 개념보다는 시간의 흐름에 따른 지식과 물적 토대의 축적 속에 분기점을 맞아 결실을 맺는다는 개념에 더 가깝다. 1993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더글러스 노스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이르기까지 제도의 ‘연속성’에 의해 연결되어 있기에 중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서구문화와 정치제도, 과학기술의 도입 등의 메이지 유신은 무사정권의 봉건제적 유산의 청산을 포함한 과거와의 ‘결별’ 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막부시절부터 근대화의 미시적 요소들을 간직하며 그 기반을 다져왔기에 비약적인 성장이 가능했다. 근대성의 정의를 ‘정치권위와 시장 간의 긴장’, ‘경제의 분업화와 전문화’, ‘인적-물적 지원 이동성의 확대’ 등의 특징으로 내릴 수 있다면 일본 근대화의 발아는 근세(중세와 근대 사이)인 ‘에도 막부’(江戸幕府)로부터 본격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일본 에도막부 시기의 생활문화사이자 경제사의 개론서로 불릴 정도로 군더더기 없다. 또한 어렵지 않은 문체로 서술되어 있어 일본사를 다룬 책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에도시대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민간/시장의 발전을 이끌었던 ‘제도적 요인’ 이다. 초대 막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필두로 다수의 성곽 축조, 도심을 연결하는 운하망과 농수로 조성, 이동에 편리한 간선도로 확충 등 경제성장을 위한 대규모 사회적 인프라 확충이 수도인 에도에 집중되었다. 일본권력구조의 정점인 천황과 달리 쇼군의 통치위임 근원은 무력이자 실력이었다. 즉 제한적 권위의 막부는 권력누수현상이 닥칠 경우, 다이묘로부터 통치권이 위협당할 수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에 그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 강구되었다. 그 수단으로 쇼군이 다이묘에게 군역의 의무이외에 사회간접자본과 관련한 토목공사에 인력과 자재 등을 제공토록 하는 ‘천하보청’(天下普請) 과 1년을 단위로 각 번의 다이묘들에게 그들의 가족을 에도에 인질로 남겨둔 채 일정기간 에도와 번(지방)을 오가게 강제한 ‘참근교대제’(参勤交代制) 의 존재를 들 수 있다. 그에 소모되는 비용은 전적으로 다이묘가 부담해야 했지만, 에도까지의 교통로의 개보수가 이루어지고 주변의 여관 등 숙박을 위한 시설의 조성과 물자이동에 도움을 주는 유통-물류업 등의 주변 산업이 태동하면서 민간의 수익이 늘기 시작했다. 즉 부유층의 의무적인 소비지출을 강제한다는 측면에서 부의 환류 및 경제 활성화 등의 낙수효과가 직접적이고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정치체제로서 에도막부는 분명 신분제와 봉건제에 입각한 전근대 권위주의 착취형 사회이지만 그러한 정치체제 속 서민들에 대한 ‘포용적’ 경제제도가 작동하였기에 막강한 중앙권력과 지방 영주가 부과한 통일된 질서 속에서 민간상업 활동의 자유와 재산권의 보장이 이루어졌다. 경제적-물적 토대의 축적 속에 사회구성원들이 문맹률을 낮추도록 하며 실용적 직업교육을 담당하는 테라코야(寺子屋), 주쿠(塾) 등의 교육기관은 일본의 근대적 계몽을 위한 정신적 토양이자 초석이 되었다. 에도막부의 관학이었던 주자학이 학문의 영역에서 독점하지 않았기에 제한적 쇄국정책 속에서도 과학적 분석을 기초로 하는 서양의 귀납적 사고가 의학 등 실생활에 적용되었고 유학에서는 실증적 연구과 고증을 중시하는 고문사학파 등이 후대에 이어지면서 도덕적 통치보다 경세제민, 이용후생을 강조하는 실용적 경제사상이 국가경영에 작용하였다. 시장규모의 확대와 상인계층의 성장에서 알 수 있듯이 에도막부의 지배계급은 무사지만 서민-상인계층이 생산과 소비를 담당하는 주체로서 사회기능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 유교적 농본주의의 세계관으로부터 탈피하여 상업의 사회적 중요성도 커지기 시작하며 그에 따른 사회적 가치나 준칙도 요구되었다. 이 책에서는 그 일례로 주자학을 비판한 ‘오규 소라이’(荻生徂徠)나 제업즉수행(諸業卽修行) 등의 상인도를 설파한 ‘이시다 바이간’(石田梅岩)을 소개한다.
도시화가 진전되고 시장 내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전면적으로 화폐가 유통되었는데 생산력의 증대와 유통망의 확충이 맞물리면서 근세 일본경제의 질적 고도화와 양적 팽창을 추동했다. 조선에서 전래된 연은분리법인 ‘회취법’(灰吹法)은 일본 내 귀금속 생산량을 증가시켰는데 이를 바탕으로 막부는 기존 계급별로 상이한 화폐질서를 답습하되 화폐 주조권과 유통권을 독점하는 통일성 없는 화폐경제를 유지하였다. 견실한 지방자치가 작동한 이상, 오사카를 비롯한 일본 서부일대에 정착한 은 본위 체제를 완전히는 바꾸지 못해 지리적-경제적인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더불어 중국과 조선 등 대외부문으로의 은 유출이 이루어지는 경제의 구조적 변화 속 화폐경색이 이뤄지며 미곡가격이 하락하였는데 이는 막부의 재정악화를 초래하게 된다. 막부는 재정보충을 위해 화폐순도를 떨어트리는 가치절하의 화폐개혁을 남발하게 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시장의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 같은 흐름 속에 서구열강의 개항요구 등의 외부적 위협은 막부의 정치적 권위의 실추와 몰락의 길을 앞당긴다. 즉, 이원적 화폐유통의 과정 속에서 은화와 금화를 교환하는 금융서비스 등의 발전과 이에 관련한 상업-금융 자본의 성장 속에 막부가 단행한 시장통제 정책은 실패했다. 이는 정권붕괴의 내부적 요인으로 지목된다.
조선은 일본과 비교해 무엇이 부족했는가? 먼저 근대화에 유리한 국가의 문화나 사고관이 지리적 요인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다. 생물학자이자 역사연구자인 피터 파친 교수는 이질적인 ‘변경’(邊境)의 존재가 사회구성원을 하나로 묶어주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일본은 위도 상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육로교통을 가로막는 산의 존재와 도심을 중심으로 하는 큰 강의 부재는 조선과 달리 지리적 통합에 불리하였다. 13세기 여몽연합군의 침공 이외의 외부적 위협의 부재는 응집력 있는 중앙권력의 창출보다는 지방 세력의 군사적-경제적 경쟁의 공간을 창출했다. 반면 조선은 지리 특성상 항상 중국대륙에 인접 및 개방되어있어 만주, 거란, 여진 등 외부변경의 위협에 중앙권력을 중심으로 상시 대비토록 하여 한가로이 지방 세력이 경쟁할 공간을 창출하지 못했다. 지리학적인 관점에서는 일본은 봉건제와 지방자치에, 조선은 중앙집권제와 관료제에 친화성을 더 보이게 된 것이다. 이렇듯 양국의 역사적, 지리적 요인은 매우 상이해 직접적인 비교는 무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역사가 기본적으로 불확실성이 가득한 문제를 두고 해결과정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과거 선조들이 시대적 문제와 요구를 마주함에 있어 어떠한 태도와 자세를 지녔는지 사유할 필요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과거 에도막부를 왕래한 조선통신사에 대한 기록을 살펴봐도 일본인이 소개한 난학(蘭學) 등에 중화(中華)의 세계관에 사로잡힌 우리 선조는 개방적이 보다는 폐쇄적이고 배척하는 태도를 취했다. 우리의 미성숙을 환경 탓으로 돌리려는 태도는 객관적인 자기성찰보다는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은 주자학을 중심으로 양반에게 경제적 특혜를 보장하며 상공인이나 서얼을 배재한, 동질적인 국가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흉작으로 기근이 발생하면 환곡제도 등을 통해 미리 저장해둔 곡물을 방출함으로써 농민들의 생존위기를 미연에 방지하여 사회질서와 평화를 유지하였다. 18세기 이후에는 시비법과 이앙법의 보급, 가족 노동력을 이용한 소농경영의 확립과 지주제의 발달은 농업생산력의 향상을 가져왔다. 후기 농촌 장시와 객주, 경강상인 등 포구상업의 등장과 상평통보 등 동전의 유통도 나타나 이 같은 모습은 자본주의 맹아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과 달리 도시에 거주하는 비농업인구비율이 현저히 낮았고 도시화가 정체됨에 따라 시장의 대량생산을 증가할 수요가 뒷받침되지 못했다. 19세기 이후에는 늘어나는 인구 압력을 견디지 못하여 식량생산이 인구증가를 하회하는 ‘맬서스 함정’ 에 빠지며 농촌 경제가 위축되고 환곡제도 등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자 조선정치체제의 위기로 이어졌다. 시장권력이 정치권력보다 커져 내부모순이 축척되어 몰락한 에도막부랑은 다른 흐름이었다.
나는 변화하는 세계의 흐름 속에서 고립적이고 편협한 사고에 빠져서는 시대적 문제와 요구에 대응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조선왕조나 일본 에도막부 역시 지배계층들이 예로부터 구축해온 세계관과 기득권의 집착 끝에 몰락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던 것이 아닐까. 물론 일본 에도막부는 중국 유학과 서구학문의 일본식 변용과 개방적인 사고 및 활동을 가능케 하는 제도적 기반이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근대화의 성취를 일찍 쟁취했다. 하지만 근대 일본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사고나 심리가 조선보다 무엇이 다르고 나았는지를 넘어 그를 형성한 지리적 조건이나 우연적 상황의 차이로 근본적인 양국의 역사적 경로가 갈리는 것인지 이 책에서는 그에 대한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그동안 우리가 견지해온 일면적인 일본관에 경종을 울리는 동시에 한국인에게 역사적인 근대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이 가지는 함의는 적지 않았다. 우리가 몰랐던 일본의 모습을 외면하기보다 마주하고 성찰하려는 자세가 공동체의 더 나은 미래를 구축하는데 필요하다. 과연 과거로부터 우리는 어떠한 미래를 그릴 것인가.
참고문헌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일본사>-신상목
<대체로 무해한 한국사>-김재호
「슬로우 뉴스」<근대화, 왜 일본은 선공하고 조선은 실패했나>-임명묵
Comments
Keiko Okazumi
私もあまり自国の歴史に詳しくなくてお恥ずかしいのですが、許さんが色々学んでくださって嬉しいです。
日本は江戸時代初期はまだまだ農村社会で、士農工商という階級社会でした。江戸時代中期以降、士農工商のうちの商人が台頭し、商業が盛んになり、貨幣経済の発展を見るようになったようです。裕福な商人から武家が借金をして、士農工商とは言っても、商人階級の方がお金の力を蓄えたようです。階級社会に緩みができ、江戸幕府が開国に舵を切ったことにより、外国との貿易が始まり、近代化への道を歩み始めたようですね。
日本の歴史では、江戸時代が面白いかもしれませ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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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onSeok Heo
Keiko Okazumi よくご存知でいらっしゃるんですね。私は朝鮮の歴史も興味ありますが、日本の江戸時代は経済史も学んだ学ぶほど面白い点がよくあるみたいです。日本をうまく理解するにはこんな歴史も勉強する必要があるんじゃないかと思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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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iko Okazumi
YoonSeok Heo
私は江戸時代の庶民の文化に興味があります。食文化とか、人間関係とか。ある意味、今よりもずっと豊かな生活だったのではないかと想像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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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修禎
Keiko Okazumi 私も江戸時代が好きです。 それで江戸時代を扱った小説やドラマも愛好します。 宮部みゆき先生の江戸時代の連作小説も好んで読んでいます。😚 江戸時代は勉強するほど驚異で興味深いです。 今日も健勝する一日をお過ごしくださ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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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iko Okazumi
許修禎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許修禎さんもお元気でお過ごし下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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