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18

Seokhee Kim | Facebook 마사미(1-5)

(11) Seokhee Kim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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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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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설에는 가족 모임을 자제하는 대신, 엄마를 우리 집에 모시고 왔다. 미리 만들어 냉동시켰던 만두를 넣어 떡국을 끓였다. 좋아하시는 잡채와 갈비찜, 배추 겉절이에 나물, 그리고 전을 조금 부쳤다.

몸은 좀 불편하시지만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총기발랄하신 우리 엄마. 바이든의 정책과 주식시장 동향의 관계까지 파악하고 계시다. 모시고 오는 차 안에서 엄마가 풀어 놓는 옛날이야기에 잠잠이도 넋을 잃었다. 저녁 식사 후 웇 놀이를 하고나서 다시 엄마가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는 고양이조차 엄마에게 집중하는 것이었다.

***

엄마의 이름은 정삼. 일본식으로 마시미라 불렸다. 때는 해방직후, 신탁통치를 둘러싼 공방이 뜨겁던 서울, 종로 인근에선 심심찮게 폭동이 일어나곤 했다. 청계천이 아직 "뚜껑"을 덮기 전, 마사미는 서울 주교동으로 이사를 했다. 한의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충청도에서 올라온 첫날 이웃집 공자를 만났다. 말로만 듣던 서울깍쟁이였다.
"넌 어디서 왔니?"
"남이야 워서 왔든 니가 뭔 상관인겨?
야무지게 쏘아붙이자 머쓱해 진 공자는 공놀이를 하자고 했다. 그 공자는 몇 년 뒤에 일어난 동란 중에 실종되었다. 마사미는 이렇게 잘 돌아왔는데 우리 공자는 어디 갔을까, 말하며 공자 엄마가 눈물짓게 될 줄이야 그 때는 미처 알지 못 했다.
그렇게 시작한 공놀이가 시큰둥해 질 무렵 마사미는 혼자 큰 길로 나갔다. 사람이 물고기 떼처럼 북적거렸다. 거리의 사람들은 싸우는 사람과 몰려가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었다. 그 중에서 마사미는 몰려가는 사람들을 따라 전차에 올라탔다. 아직 서울에 전차가 다니던 시절이었다.
전차가 출발하고 얼마 안 지나서 마사미는 엄청나게 큰 집을 보고 말았다.
"다음은 미쓰비시, 화신 백화점입니다."
방송이 흘러 나왔다.
잠시 멈춘 것 같았던 몰려가는 사람들이 전차에서 내렸다. 사실 그들은 가만히 있을 때도 몰려가고 있었다. 그들이 큰집을 향해 다시 몰려갔다.
그곳은 별천지였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아름다운 풍물들. 그 순간 마사미의 눈에는 세상이 은하수처럼 보였다. 마사미는 은하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베 고쟁이 하나를 겨우 두른 마사미는 그 때 처음 마네킹을 보았다. 마사미는 마네킹 앞에 서서 말했다.
"넌 좋겠다. 고운 옷 입어서."
하지만 마네킹은 마사미의 눈을 오래 잡아두지 못 했다. 마사미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백화점 점원들의 다리, 스타킹이었다.
그녀의 다리는 매끈했지만, 마사미의 다리에는 없는 바지주름처럼 곧은 줄이 있었다. 마사미는 앉은걸음으로 다가가 그녀의 다리를 잡아당겼다. 놀라 비명을 지르더니 그녀가 구둣발을 흔들었다. 마사미는 뒤로 벌렁 나동그라졌다.
“어머~얘! 너 뭐하니?”
“언니 다리가 너무 예뻐서요.”
“저리 가!”
마시미는 달아나듯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가만히 서 있어도 사람을 실어다 주는 계단이라니!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저물녘이 되자 마사미는 다시 몰려가는 사람들을 따라 전차를 탔다. 마사미는 전차가 자기를 다시 집으로 데려다 줄 줄 알았다.
그러나 종점이라고 내린 곳은 청량리였다. 마사미는 울면서 순사를 찾았다.
"아저씨, 우리집은 주교동 19번지..엉엉"
귀가했을 땐 집이 발칵 뒤집혀 있었다. 그 뒤로도 몇 번, 마사미는 서울에서 길을 잃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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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미 (2)
오늘 아침 엄마가 남양주 본가로 가셨다. 엄마가 계신 동안, 오직 엄마와 가족을 위해 아무 생각 없이 밥하고 설거지하며 마음을 쉴 수 있었다. 만족감이 큰 연휴였다.
그 힘으로 마사미 시리즈 제 2화 이어본다.
***
온 집안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하루가 지났다. 이불 속에 누운 마사미의 눈빛은 흥분으로 총총했다. 눈을 감아도 처음 타 본 전차, 처음 타 본 에스컬레이터, 총천연색 별 무리 같던 화신백화점이 눈에 어려 잠이 오지 않았다.

마사미는 다음 날도 아침밥 숟가락을 내려놓기가 바쁘게 밖으로 달려 나갔다.
“삼아~, 삼아~!”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지만, 마사미의 발길을 돌리지는 못 했다. 삼이라는 아이는 대관절 뉘집 아이인가? 나는 마사미인데?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는 마사미를 ‘삼이’라 부르셨다. 마사미는 골목길을 벗어나 달리는 동안 '삼이'가 되었다.
큰 길이 가까워 오자, 삼이의 고무신은 두 곱으로 바빠졌다. 아아, 저 멀리서 전차가 나를 향해 오는구나, 전차야 기다려라, 삼이 사마가 간다!

이른 시간, 오늘은 어쩐지 전차를 마음대로 타면 혼쭐이 날 것만 같다. 삼이는 재빨리 흰 치마와 저고리를 깨끗하게 차려입은 아주머니 한 분을 찾아내어 살그머니 치맛자락을 붙잡은 채 전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쏜살같이 사람 틈을 비집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다음 정거장은 미쓰비시, 화신백화점입니다.”

마사미는 기대로 부푼 가슴을 누르며 전차에서 튀어 나갔다. 날이 저물도록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내렸다. 이런 좋은 놀이터가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저녁이 되자, 그녀는 어김없이 서울 어딘가를 걸으며 순사를 찾았다.

그러기를 몇 번. 이제는 제법 자유롭게 전차를 타고 다닐 줄 알게 된 어느 날 아침, 아버지는 삼이의 목에 무슨 팻말 같은 걸 걸어주셨다. 거기에는 큰 글씨로 ‘주교동 19번지’, 그리고 혹시나 멀리 갈 때를 대비하여 오빠가 사는 ‘북창동’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길을 잃어도 안심이었다. 그저 순사를 찾아 팻말을 보여주며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달라 하거나, 주교동 19번지를 들이대면 그만이었다.

그 무렵, 해방 이후의 서울에는 자주 미군의 지프차가 돌아다녔다. 화신백화점에도 이따금 눈이 파란 놈, 머리가 노란 놈들이 왔다. 삼이는 어디선가 배운 말을 써먹어 보았다. 쪼꼴렛 기브미!
토지개혁, 유상매수, 무상분배, 어려운 단어들이 어른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봄을 지나, 초여름이 왔다. 여전히 종로통을 내 집 마당처럼 휩쓸고 다니던 6월이었다. 25일 새벽, 동란이 터졌다더니 28일 새벽에는 이미 서울 시내가 점령되고, 그날 한강 대교가 폭파되었다. 피난 갈 틈도 없었다. 인민군들이 남자들을 잡아간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버지는 벽장 뒤에서 천정으로 이어진 비밀공간에 숨었다. 인민군들이 한밤중에 들이닥쳤다. 그들이 잠자고 있던 마삼이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
“이 애민아이, 아바이는 어데 갔나 말하라우.”
마삼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없어요.”
인민군의 총부리에 밀리며 삼이는 동네 통・반장 집을 찾아다녀야 했다. (계속)
*사진은 화신 백화점 일대, 노면전차가 다니는 모습(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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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미(3)

보름달이 이울기 시작했다. 인민군은 등 뒤에 총칼을 들이대며 1통에서 시작해서 10통까지 통장 집으로 안내하라 위협했다. 손바닥처럼 환한 골목길이었지만 마사미는 삥글삥글 맴을 돌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놈의 애민아이가 길을 잘 못 가르쳐 준다고 등 뒤에선 서슬이 퍼렇지만, 가만히 보니 죽일 눈치는 아니었다. 마사미는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야! 왜 때려요? 아프단 말이에요!! 통장 집이 어딘지 어두워서 못 찾겠단 말이에요!”
동이 트도록 뒤통수를 맞아가며 돌아다니다 결국은 통장 집 한 곳을 알려주었다. 통장이 끌려 나오자, 동네 어느 집에 젊은 남자가 있는지 대라고 했다.

이렇게 잡혀간 남한의 젊은이들은 인민군에 편입되었고, 후에 다시 한국군의 포로가 되기도 했다. 제네바 협정에 의하면 정전 이후에 북한으로 보내져야 했지만, 본래 국적이 한국이었던 그들은 어디로도 돌아가지 못한 채 브라질이나 다른 남미국가로 건너갈 운명이었다. 모두들 자신이 쥔 패가 무엇인지 판단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몇 번이나 달이 차고 이울었다. 삼이는 길섶의 풀벌레 소리가 듣기 좋아 대청에 나가 앉곤 했다. 다시 보름달이 떴을 때, 아버지는 조용한 목소리로 곧 인민군이 물러갈 거라고 하셨다. 이틀 뒤인 열이레 하현달이 뜨던 날, 정말 국군이 서울로 돌아왔다. 삼이는 사람들이 태극기 흔드는 걸 보았다. ‘9.28 (서울수복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미리 어디선가 인천상륙작전에 관한 소식을 들으셨던 것 같다.
난리야 나든 말든, 사람이야 죽든 말든, 날은 점점 추워져 갔다. 중공군이 내려온다는 소문이 마른 들의 불처럼 번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남쪽으로 떠나기 시작했다. 이웃집 공자네도 건너 골목 원자네도 모두 떠났다. 삼이는 그 후로 그녀들을 만나지 못 했다.
아버지도 이번엔 피난 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가만히 있다가는 다 죽을 거 같다.”
새엄마를 맞은 지 1년도 안 되었을 때였다. 아버지는 가족 중에서 삼이와는 열일곱 살 차이나는 정이언니를 제일 먼저 피난시켰다. 아버지는 이불 속청을 쭈욱 찢어 새끼를 꼬았다. 그리고 화신백화점에 걸고 다니던 목걸이보다 더 굵고 단단한 끈 한 쪽을 삼이의 허리에 꽁꽁 동여매고, 나머지 한 쪽을 당신 허리에 묶었다.
“삼아, 이제부터는 절대 혼자 다니면 안 된다.”
기차를 타러 갔다. 여객 열차는 이미 없었다. 화물열차 지붕에 사람들이 올라탔다. 장정들이 바깥쪽으로 앉고 노인과 여자, 아이들을 안 쪽으로 앉혔다. 장정들은 떨어지는 사람이 없도록 서로가 팔을 엇갈려 잡으며 담요를 이어 잡아 바리케이트를 쳤다. 움직일 틈 없는 기차 위에서 삼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나 오줌 마렵단 말이야!”
화물열차는 움직이고 있었다. 아주머니 한 분이 양푼을 하나 꺼내 내밀었다. 삼이는 열차 위에서 그릇을 요강삼아 오줌을 누었다. 삼이는 오줌을 누며 화신백화점 가는 길에도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은 역시 싸우거나 몰려가거나 둘 중 하나라는 걸 생각했다.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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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미 (4)

영등포에서 출발한 기차는 앞뒤로 화통을 달고 남쪽을 향해 달렸다. 너무 많은 사람이 올라타 기차도 무리를 한 탓인지, 군포 쯤 도착했을 때는 기차 화통에 불이 붙었다. 모두들 일단 기차에서 내려 무작정 걸었다. 사람들로 발 둘 곳이 없어 아버지가 눈 앞에 보이지 않았다. 그저 허리에 매단 끈이 끄는대로 흘러가듯 걷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고~ 사람 죽네~내 허리 끊어져! 끈내끼 풀어 줘!"
삼이는 울며 외쳤지만 강처럼 몰려가는 사람들 틈에서 제 몸을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건 불가능했다. 그 와중에 누군가가 서로 흩어져 걸어야 폭격을 맞지 않는다고 외쳐댔다. 아비규환이었다. 당시 북한에는 공군이 없다시피 했으므로 폭격기는 대부분 미군 비행기였다.
사람들은 곧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는 대열을 벗어나 산길을 선택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산길에 절이 하나가 보였다. 아버지는 스님에게 합장을 하고 자초지종을 말한 뒤에 물었다.
"스님, 여기가 한 수원쯤 됩니까?"
스님은 난처한 얼굴로 한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이고 시주님, 잘 못 오셨습니다. 저기 불 난 거 보이시시요? 여기는 군포입니다."
밤새 걸어 제자리로 돌아온 셈이었다.
절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이번엔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기차길 철로를 따라 걸었다. 생전 험한 일 한 번 하지 않고 약방에서 침 놓고 약 짓던 아버지였다. 오산 쯤 갔을 때 아버지는 병이 나고 말았다.
사람들이 피난을 떠나 텅 빈 어느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는 좀처럼 일어나지 못 했다.
그러는 사이 중공군과 인민군이 마을로 들어왔다. 삼이가 머물던 집 앞에도 인민군이 지키고 서 있었다. 대청에 서서 내다보면 총 들고 담장 밑에 선 군인이 보였다. 삼이보다 그닥 커 보이지 않는 소년병이었다.
집을 떠날 때 식구들은 각자 자기 몫의 미숫가루와 쌀, 고추가루와 소금, 그리고 모포를 짊어지고 나왔다. 쌀은 아직 있었지만 찬거리는 따로 구해야 했다. 풀 한 포기 없는 겨울이었다.
새엄마는 삼이에게 양푼을 주며 건건이를 얻어오라고 시켰다. 생전 처음 나가보는 동냥이었다. 아무도 음식을 나눠 주려 하지 않았다. 빈 손으로 돌아오는 길에 또래 아이가 바가지에 먹을 걸 얻어가는 걸 보았다. 삼이는 섬광처럼 번득이는 지혜를 느꼈다. 얼른 돌아와 바가지를 들고 다시 나갔다. 사람들은 양푼에 동냥하는 사람에겐 먹을 것을 나누어 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새엄마는 어린 삼이에게 땔감을 해 오라고 했다. 아버지는 맨날 삼이를 등에 업고 걸으시다 병이 났고, 새엄마는 새엄마라고 안 나갔다. 그러니 어떡하겠는가? 아버지가 죽이라도 드시려면 나무를 하러 가야했다.
도끼로 팰 수도 없고 수레에 실을 수도 없고, 삼이는 잔가지를 꺾어 어깨에 졌다. 힘 없는 여자아이가 구할 수 있는 땔감이라 봐야 작은 가지 정도였지만, 그조차 이미 다 주워갔는지 구하기가 힘들었다. 나무에 붙은 가지는 웬만해선 잘 꺾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산너머에서 나무를 하는데 가지가 또옥 또옥 부러지는 게 너무 쉬운 것이었다. 삼이는 사나흘 더 거기 가서 나무를 해 왔다. 나무는 아궁이에서 새빨갛게 타올랐다. 기운을 좀 회복한 아버지가 나무를 보고 물었다.
"삼아, 그 나무 어디서 했니?"
''예, 아버지. 요 산 너머요. 이 나무는 똑똑 잘 부러지는 게 엄청 쉬웠어요.''
아버지가 조용히 말했다.
''막내야. 너 이제 거기 나무하러 가지 마라.''
''아니, 왜요, 아버지?''
"그거 배나무다."
그것은 남의 집 과수원이었다.
(사진은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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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미 (5)

아버지는 기운을 차린 뒤 다시 채비를 했다. 문밖에는 인민군 소년 두 명이 번갈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트막한 담 너머로 주먹밥 두 개를 내밀었다.
“군인동무. 고생 많수. 배 안 고프우? 이거라도 좀 들어요.”
소년은 침을 꼴깍 삼키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 조로 움직이는 나이 많은 소년이 험상궂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보우, 군인 동무. 고향 떠나 다들 고생 많수. 나도 자식 키우는 사람이우. 고향 부모님 생각해서라도 한 개씩 들어요.”
소년들은 못 이기는 척 주먹밥을 받아 들고 허겁지겁 먹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미군의 폭격이 시작되었다. 건너편 집 담벼락에 총알이 줄줄이 박혔다. 아버지는 삼이를 끌어당겨 담벼락 아래 몸을 숨겼다. 소년병 하나가 먹던 주먹밥을 팽개치고 냅다 뛰어나가더니 비행기를 향해 총을 쏘았다. 무모한 저항이었다. 아버지는 기겁을 했다.
“그 총이 가 닿기나 하우? 죽고 싶지 않으면 얼렁 이리 와!”
소년은 총을 쏘며 비행기를 따라 사라졌다. 공교롭게도 그곳은 미군 비행장이 있는 오산이었다.

그날 밤, 으슥하게 어둠이 내릴 무렵 아버지의 재촉을 등불 삼아 길을 나섰다. 북쪽으로 올라가서는 큰일이기에 큰길을 따라 이동했다. 낮에는 눈을 피해 숲속에 숨어 잠도 자고 밥도 지었다. 밥을 지을 때는 땅을 파고 나뭇가지로 지붕을 덮어 되도록 연기가 나지 않게 했다. 땔감은 주로 싸리나무가지를 사용했다. 싸리나무는 탈 때 연기가 잘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번은 풀숲에서 중공군을 만났다.
아버지가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삼이도 아버지를 따라 손을 번쩍 들었다. 아버지가 일본말로 이야기를 건넸다.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갑자기 중공군이 박스 하나를 가지고 왔다. 그 박스 안에는 쪼꼬레트에, 비스케트에, 건빵에, 사탕 같은 것들이 가득 들어 있었고, 삼이는 그걸 먹으면서 세상 한 번도 못 먹어 본 걸 먹는 것처럼 행복했다. 아버지가 중공군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는 지금도 알지 못 한다.

중간에 피난행렬을 만나기도 하고 미군을 만나면 제무시(군용트럭 GMC를 당시에는 그렇게 불렀다. 사진 참조 - 글쓴이 주)를 얻어타기도 했다. 미군도 만나고 러시아 놈도 만나고, 중국 놈도 만났으나, 용케도 피난길은 계속되었다. 물어 물어, 광천까지 갔다. 광천에서 배를 타고 안면도로 들어갔다. 그리고 휴전이 될 때까지 안면도에서 지냈다. 전쟁을 모르는 섬 안면도에는 인민군도 한국군도 들어오지 않았다.
봄이 오고 여름이 왔다. 바닷가 흰 모래밭에는 붉은 해당화가 끝없이 피었다. 삼이는 해당화 핀 바닷가에서 저녁놀 지켜보는 게 좋았다. 저녁놀이 질 때면 배고픔보다 강렬한 슬픔이 밀려왔다. 삼이는 꺽꺽 울면서 해당화 씨를 먹었다. 슬픔도 배고픔도 꼭꼭 씹어서 넘겼다.
엄마가 그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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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YM Lee
쌤...책 내셔야겠네요. 너무 재미있고 또 저희 어머니 이야기 생각나서 슬프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 Reply · 6 h
Seokhee Kim
YM Lee 많은 기록이 있지만 저희 엄마처럼 가볍게 이야기 하는 분은 별로 안 계실 거 같아요. 저는 그 부분이 소중하게 느껴져요. 책을 내려면 제가 좀 부지런해야 할 건데 말이죠..
· Reply · 6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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