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16

"니 마누라 윤락녀 만들고..." 내 인생을 망친 고영주 - 오마이뉴스

"니 마누라 윤락녀 만들고..." 내 인생을 망친 고영주 -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601596&fbclid=IwAR0gckDBDLnPxJTTapLDjmzoybxmjT_phxUz_id85TUFodpqQTN1O8_yIxg

"니 마누라 윤락녀 만들고..." 내 인생을 망친 고영주[김성수의 한국 현대사]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조작 피해자 김병진씨의 호소
20.01.08 09:16l최종 업데이트 20.02.28 09:19l
김성수(wadans)



▲ 1980년 대 보안사 근무 당시 김병진씨 가족
ⓒ 김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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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진씨는 재일동포 3세로 1980년 3월 연세대학교 국문학과로 유학을 왔다. 1983년 그는 연세대 대학원에 재학하면서 삼성종합연수원에서 일본어 강사를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결혼한 부인, 태어난 지 두 달된 아들과 함께 살았다.

1983년 7월 9일 오후 2시경 갑자기 서울 신림동 주거지 앞에서 국군보안사령부(아래 보안사, 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 수사관 4명에 의해 강제로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되었다. 그의 아내 강아무개는 훗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남편 김병진이 잡혀간 다음 날 아침부터 일주일간 수사관들이 집에 찾아와 머물며 자신을 감시했다고 이렇게 진술했다.

"그날부터 여 수사관들이 함께 동거하며 전화가 오면 감시하고, 시장에 가거나 따라오면서 감시하는 등 완전히 감금되어 감시받는 상황이 되었습니다...수사관들이 종이 쇼핑백을 놔두고 갔길래 내가 기분이 너무 나빠 발로 차고 나서 신발장 안에 처박아 두었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그게 도청장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빙고분실에서 몇 개월 동안의 협박과 가혹한 고문 끝에 보안사에서 미리 그려 놓은 기획안대로 김병진은 '북한 간첩'이 됐다. 재일동포로 일본에선 '조센징'으로 차별받고 서러운 삶을 살다가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온 모국에서는 오히려 그를 '반쪽바리'로 멸시하고 그것도 모자라 결국 간첩으로 몰아간 것이다.

김병진은 체포 당시 민간인 신분의 재일동포 모국유학생이었다. 보안사는 민간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음에도 군형법이 아니라 국가보안법, 반공법, 형법 등의 조항을 적용해 검찰에 불구속 송치했다. 위법하게 민간인을 구금해 수사한 것이다.


▲ 김병진 사건 보도기사(동아일보, 1983. 10. 19.자)

"이 나라의 재판은 형식적이야"

김병진은 당시 보안사에 연행돼 가혹행위를 당하던 무렵 한 수사관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이 나라의 재판은 형식적이야. 우리가 간첩이라고 하면 간첩이지." 그는 당시 받은 가혹한 고문을 훗날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보안사 수사관들이) 나를 세운 상태에서 (수사2계장인) 김용성이가 양팔을 잡고 길이 150cm 정도, 굵기가 지름 10cm 이상 되는 나무 몽둥이로 엉덩이, 등, 허벅지 등 전신을 수십 차례 때리고, '너 이 새끼 죽여버리겠다' '니 마누라를 윤락녀로 만들고 니 자식은 애비도 모르게 만들어 고아원에 보내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실'로 끌고 갔다. 엘리베이터실은 가로 세로 4m, 3m 되는 방이었는데, 이용실에 있는 의자 같은 게 있었고, 주위 바닥에는 수갑과 휴지통 등이 흩어져 있었다. 의자에 앉은 상태에서 팔걸이에 양쪽 팔을 묶고 (수사관인) 이아무개가 양쪽 집게손가락에 전기 코일을 감고 야전용 발전기 같은 걸 돌리며 '간다, 간다'라고 말했다.

발전기 레바를 돌리는 순간 나는 정신을 잃어버렸다. 나중에는 의자가 묶인 상태에서 바닥이 아래로 꺼졌는데 아주 캄캄하고 냉기가 있고 음습했다. 그때 이아무개가 위에서 '거기는 한강으로 통하는 곳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한강물에 흘려버린다'고 말했다."
온갖 고문에도 김병진이 간첩인 것을 밝힐 수 없었던 보안사는 그의 뛰어난 한국어 실력을 이용해 그를 보안사 일본어 통역요원으로 써먹기로 작정한다. 1984년 전두환 정권 아래서 보안사에 연행된 80%가 재일동포였고 모국어가 서툰 재일동포 때문에 일어 통역요원이 필요했던 것이다. 결국 김병진은 강제로 보안사에 특채돼 1984년 1월 1일부터 보안사 6급 통역요원으로 1986년 1월 31일까지 약 2년간 근무했다.


보안사에 체포되기 전 김병진은 삼성종합연수원에서 일본어 강사를 하면서 월수입이 80만 원 정도였다. 그러나 그가 보안사에 강제근무하면서 받는 월급은 고작 14만 원이었다. 그의 아내는 생활이 어려워 결국 결혼반지를 팔기도 했다.

보안사는 이렇게 '값싼' 통역요원인 김병진을 풀어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의 아내가 임신했다. 그는 둘째 출산을 위해 아내와 함께 일본에 다녀와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퇴근 후 보안사 간부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간절히 부탁했다. 그 결과 그의 퇴직이 허용되었는데 "둘째 아이만 낳고 다시 보안사로 돌아온다는 조건"이었다.

우수상 받은 일본판, 압수된 한국판


▲ 김병진씨가 펴낸 책 <보안사>
ⓒ 김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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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2월 1일, 김병진은 마침내 가족들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고문받는 비명이 들리는 악몽 같은 보안사로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목숨을 걸고 자신이 겪은 고초를 담아 일본어판과 한국어판 <보안사>라는 책을 펴냈다. 일본어판 <보안사>는 1988년 아사히신문사 아사히저널 논픽션 우수상을 받았다.

그러나 1988년 한국어판이 나왔을 때 노태우 정권은 책 8000부를 모두 즉시 압수하고 김병진에게 지명수배를 내렸다. 책을 펴낸 출판사 또한 압수수색을 받았고 사장 역시 지명 수배되었다. 김병진은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으로 기소중지 당했으며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기 전까지 국내 입국이 금지됐다.

김병진은 그의 책에서 2년간 직접 보안사에서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서빙고 대공분실에서 고문과 회유로 조작되던 재일동포 간첩사건의 '끔찍한' 진상을 폭로했다. 수사관의 실명을 고스란히 적은 이 책은 그 후 간첩조작사건의 재심 재판에서 주요 증거가 됐다. <보안사>를 재심 재판에 증거로 제출해 무죄판결 받은 이들 중에 고맙다며 그에게 연락한 이들도 4명이나 되었다.

김병진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도망가면서 다른 재일동포들이 여러 면에서 후원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래서 그는 일본으로 도망 오기 전 '감싸줄 선배들이 많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아내를 안심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현실은 반대였다.

<보안사> 출간이 한국에서 큰 화제가 되고 있는데도 어떤 이들은 "김병진이 수많은 사람들 고문했다, 김병진이 밀고해서 잡힌 사람들이 많다"며 심지어 1970년대에 잡힌 사람들이나 그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 안기부에서 조사받은 사람들까지 김병진의 밀고 때문이라는 노태우 정권의 선전공작으로 그는 '가족까지 살해하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일본에서 책이 나오자 보안사의 추적이나 감시가 표면적으로는 잠잠해졌다. 그러나 보안사는 한국의 가족들 특히 김병진 아내의 형제들에게 전화해 노골적으로 협박하기도 했다. 네 살짜리 아들과 갓 태어난 딸을 지키려고 하루하루 불안에 떨던 그의 아내는 정신 불안과 유선염이 있어도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마음대로 병원에 갈 수도 없었다. 동네 지인들이 그것을 알고 그의 아내를 병원에 데려가기도 했다.

김병진에 대한 지명수배, 여권 발급 금지 처분은 그 후 15년간 계속되었다. 김영삼 정부 때 그는 탄원서를 여러 번 청와대 앞으로 올렸다. 그러나 번번이 묵살되었고 겨우 받은 회신은 청와대에서 국방부, 국방부에서 법무부로 이첩했다는 "성의 하나 느끼지도 못한 종이쪽지"였다. 김대중 정부 때가 되어서 비로소 김병진의 귀국이 허락됐으나 숱한 삶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2008년 그는 병원에서 '노동력 상실' 진단을 받았다.

노무현 정부 시절, 과거사 정리에 대한 국가 차원의 시동이 본격적으로 걸렸다. 2009년 11월, 필자가 몸담고 있던 진실위는 사건 발생 26년 만에 '국가폭력의 피해자 김병진씨에 대해 국가는 사과하고 명예 회복을 위한 조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그 후 한국 정부는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으로 김병진과 그 가족에 대해 오로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응어리진 한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 김병진씨
ⓒ 김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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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진은 진실위 규명 결정 이전에 주위 권유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으나 결과는 참담했다. 법원은 "국가의 불법행위는 인정되지만 공소시효가 지났다"며 패소 판결을 내렸다. 법원 논리라면 노태우 정권 때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어야 하지만 당시 수배 당하고 입국이 금지된 상황에서 그가 노태우 정권을 상대로 소송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지난 2일 전화 인터뷰 중 그는 내게 이렇게 하소연했다.

"한국의 법체계가 이해 안 된다.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는 법이다. 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이 한국 국가기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는데도 한국에서 법적으로 내가 구제나 보상받을 길이 전혀 없다. 이해가 안 간다. 어디에다 하소연해야 할지..."
노무현 정부에 이어 등장한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이명박 정부 시절 과거사 정리는 홀대를 받았다. 2011년 필자는 잠시 한국을 방문한 김병진씨를 서울에서 만나 그의 참담한 사연을 담은 기사("내 아내 윤락녀 만든다고 협박해놓고, 사과도 없어")를 쓴 적이 있다.

하지만 당시 '용산참사'에도 눈 하나 깜박하지 않던 대통령이라 그저 바위에 계란 던지는 절박한 심정이었을 뿐 기대는 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이명박 정부는 그의 피해구제를 위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 후 박근혜 정부 시절에 우리는 아예 꿈을 접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그는 뭔가 답이 오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졌다. 그는 지난 2일 자신의 요즘 심정을 이렇게 밝혔다.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도 어느덧 3년, 수구세력들의 방해가 있다 한들 과거사법 하나 국회에서 처리를 못 하고 있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2020년 올해는 꼭 결과를 내주시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억울한 사람들 소식은 언론을 통해 많이 접합니다. 아직도 한국에선 억울한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저희 가족을 포함해 응어리진 한들은 아직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추재엽과 고영주


한편, 1983년 김병진이 보안사에 불법 구금 되었을 당시 보안사 요원 추재엽의 고문을 목격했다. 그런 추재엽이 2002~2006년, 2007~2010년, 그리고 2011~2013년까지 서울시 양천구청장을 역임했다. 특히 2011년에는 당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가 추재엽의 구청장 당선을 위한 지원 유세에 나서기도 했고 그 덕분인지 그는 구청장 3선에 성공했다.

추재엽은 당시 재판 증인을 서기 위해 국내에 잠시 머무르던 김병진을 겨냥해 양천구민들에게 "북한 간첩 김병진을 출국금지 시켜 조사하라"는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이 일로 곤욕을 치른 결과인지 김병진은 뇌경색으로 3개월 동안 입원하기도 했다. 그 후 후유증이 심해 재활에 2~3년 걸렸고 아직도 약간의 언어장애와 보행에 불편함이 남아 있다. 무고와 허위사실 유포 혐의 등으로 기소된 추재엽은 2012년 10월 11일 당선무효형을 선고받고 1년 3개월 동안 구속됐다.

1983년 김병진의 피의자신문조서를 작성했던 공안검사는 서울지검 고영주였다. 1980~90년대 대검과 서울지검 공안부에서 "재일교포학생 간첩"을 전담하듯 했던 고영주는 이명박·박근혜 시절 대표적 극우 인사로 언론탄압의 선두에 섰다. 이명박 정부에서 사학분쟁조정위원회 위원과 방송문화진흥회 감사를 맡았던 고영주는 박근혜 정부에서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위원장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을 지냈다.

27년여 동안 공안검사로 활동한 고영주는 2006년 친북진상규명위 자문위원으로 출범식에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고영주는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공안기관들이 공안사범자들에게 고문을 가해서 공산주의자라는 자백을 받은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80년대 당시 공안사범들은 아주 자랑스럽게 스스로 자신들이 공산주의자라고 밝히며 검사들과 논쟁을 하고자 했었다"고 주장했다.

2013년 1월에는 500여 명이 참석한 보수단체 신년하례회에서 고영주는 "문재인 (대선) 후보는 공산주의자"라고 말하며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면 우리나라가 적화되는 건 그야말로 시간문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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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er 대표계정 입니다.
꼬리꼬리
2020.01.08 11:31



홍좃표, 황교활이가 그때 다 잡아 쳐넣고 개쥐뢀 떨고, 여좃규 같은 빤사 놈들이 사형 때리고...그게 지금 자위하개당이고. 이해 안가지? 틀딱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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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gle 대표계정 입니다.
us frankline
2020.01.13 21:13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대한민국은 전쟁중입니다. 다만, 북의 요청으로 잠시 휴전상태입니다. 전쟁의 시작과 끝은 오직 이념의 차이로 민주화냐/공산화냐가 문제였던 시절에 잘못입국이되었고, 그 빌미를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입니다.
간첩 1명으로 인해 국가의 피해는 엄청날수도있고 민주주의 체재가 무너질수도 있는 그러한 환경은 간첩은 좌파, 주사파, 사노맹, 종북자, 공산주의자들의 세상을 저지 하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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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er 대표계정 입니다.
아폴로 11호
2020.01.13 11:10



정귄유지를 위해 수많은 간첩을 만들어 낸 자해공갈당은
지금까지도 반성의 반자도 모른다
이번 415 토착왜구들 청소의 날에 깨끗하게
청소하여 국기를 바로 세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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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er 대표계정 입니다.
KAN GDC
2020.01.08 20:43 · 수정됨 · 공유됨(1)

 1983년 7월 9일, 재일교포 유학생 신분으로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인권침해를 당했던 김병진씨

김병진씨는 재일교포 3세 모국 유학생이었다.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이던 1983년 7월 9일 오후 2시경 그는 서울 신림동 집 앞에서 국군 보안사(현 기무사) 수사관들에 의해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연행되었다.

 

그리고 그 어둡고 싸늘한 지하실에서 같은 해 10월 초까지 약 3개월간 간첩혐의로 장기 조사를 받았다. 보안사는 그를 영장 없이 장기간 불법 구금한 상태에서 잔인한 고문과 가혹행위를 하며 진술을 강요했던 것이다. 그 후 그는 '공소보류' 처분을 받고 1984년 1월 1일 보안사 대공처 수사과 소속 군무원으로 강제 임용되어 1986년 1월 31일까지 약 2년간 근무했다.

 

보안사의 구금은 불법체포감금죄에 해당하고 그에게 가혹행위를 한 것은 폭행·가혹행위죄에 해당한다. 더욱이 보안사는 1983년 10월 19일 이 사건 조사 결과를 언론에 일방적으로 발표하면서 김병진씨에 대한 피의사실을 공판 청구 전에 공표함으로써 그는 물론 가족의 명예와 인권을 침해하였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2009년 11월 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확인한 바 있다. (관련기사 : 간첩 혐의 유학생 어떻게 보안사에서 일하게 됐나)

 

당시 진실화해위는 보고서를 통해 "국가는...신청인(김병진씨) 및 관련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권고하였다. 그러나 그 후 이명박 정부는 김병진씨에게 전혀 사과하지 않았고 그가 받은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다음은 지난 23일 서울시내 한 사무실에서 김병진씨와 나눈 인터뷰 전문이다.

 

"진실규명 이뤄졌는데도 구제나 보상 받을 길 전혀 없어"

 

 1983년 7월 9일, 재일교포 유학생 신분으로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인권침해를 당했던 김병진씨

- 1983년 일본에서 모국으로 공부하러 왔다가 당시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해서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렸다. 그 후 말로 다 할 수 없는 엄청난 고생을 했는데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몸서리칠 것이다. 지금도 후유증이 있나?

"3년 전 병원에서 '노동력 상실' 진단을 받았다. 지금도 그 당시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고 숨도 잘 안 쉬어진다. 보안사 요원에 의해 연행될 당시 생후 두 달 반 된 아들이 있었는데 나도 나지만 조국이라고 찾아온 나라에서 아내가 어린 젖먹이와 홀로 받은 고통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1986년 딸아이가 태어났는데 당시 불안한 상황에서 아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받은 고통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프고 말도 다 표현할 수 없다."

 

-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목적은?

"과거사 사건에 관한 구술증언을 위해 방문했다. 엉터리·거짓 역사가 아닌 올바로 된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이 우리가 후손들에게 남길 수 있는 중요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 보안사에서 수감 중 혹은 그 후에 강제로 일하면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1988년 <보안사>라는 책을 저술했다. 그 후 한국입국 금지, 그 책에 대한 노태우 정권의 금서 조치, 책 8천 권 압수, 출판사 사장 수배 등으로 시달렸는데 2009년 진실화해위에서 진실규명 된 후에 한국정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았나?

"손해배상 소송을 했는데 시효 3년이 지났다고 법원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원 논리라면 노태우 정권 때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어야 한다는 말인데 당시 수배당하고 입국이 금지된 상황에서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국의 법체계가 이해 안 된다.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는 법이다. 내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이 한국 국가기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이루어졌는데도 한국에서 법적으로 내가 구제나 보상 받을 길이 전혀 없다. 이해가 안 간다."

 

- 당시 보안사 수사관들이 불법 구금 조사를 하면서 사모님을 윤락녀, 아드님을 고아로 만들겠다고 협박했는데 그 후 가해자들에 대한 조사가 있었나?

"진실화해위에서 조사했지만 가해자인 보안사 수사관들 중 딱 1명만 조사에 임했고 대부분 가해자들은 조사를 피했다. 그러나 조사받은 그 보안사 수사관조차 나에 대한 고문이나 가혹행위 등을 전면 부인했다. 가해자들 중 해외로 도망간 수사관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민주적인 정권이 들어서 법적·제도적 정비되었으면 "

 

 1984년경 김병진씨가 서울 보안사 직원 아파트에 살던 당시의 가족사진

- 2009년 진실화해위는 선생님 사건 관련 정부에 대한 권고문에서 "피해와 명예를 회복시키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그동안 한국정부에서 그러한 조처를 취했다고 보는가? 국가나 기무사에서는 사과했나?

"2009년 당시, 진실화해위 활동 종료 후 국가 책임부서에서 일괄적으로 처리한다고 통보받았다, 그런데 진실화해위 활동은 2010년 12월에 끝났는데 지금껏 두 달이 되도록 한국정부로부터 아무런 사과나 조처를 한다고 통보받은 적이 없다. 물론 가해자나 한국 정부의 사과도 전혀 없었다. 지난해 한국에 와서 기무사를 방문하고 사과를 요구했지만 오히려 문 앞에서 냉대만 받았다."

 

- 이명박 정부 하에서 진실화해위 위원장이 이영조씨로 바뀌고 진실화해위에 여러 가지 파란이 많았는데 현 정부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과거 법정에서 억울하게 유죄판결을 받은 분들은 지금 재심청구 등을 통해 힘들지만 국가의 보상이 최소한 법적으로 가능하다. 그러나 내 사건처럼 피해자가 재판도 없이 불법연행·구금·고문을 받은 분들에 대해서는 현재 한국의 법체계 아래 피해자가 전혀 법적대응을 할 수 없는 구조다. 부디 앞으로 민주적인 정권이 들어와서 내 사건과 같이 국가가 저지른 인권유린 사건에 대해 피해자들이 구제받을 수 있는 법적·제도적 정비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국민의 인권이 법적·제도적으로 보장된 민주국가 아닌가. 그동안 한국에서 간첩조작으로 낙인찍힌 재일교포가 100여 명인데 이런 법적·제도적 맹점 때문에 명예회복은 극소수인 단 3명만 되었다.

 

내 삶의 반생은 한국정부에 의해 망가졌다. 잡혀 들어가고, 고문받고, 강제로 보안사에서 근무하면서 억울하게 나처럼 고문 받는 피해자들의 비명을 들어야 했고 그들의 비참한 모습을 봐야 했다. 또 나와 같이 피해를 당한 처자식에게 어떻게든지 내가 보답을 해야 할 텐데… 그럴 힘이 없어서 안타깝다."

 

- 그래도 재일교포로서 모국에 하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면?

"한국의 과거사 정리는 끝난 것이 아니라 중도 좌절되었다. 언제든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때는 꼭 재일 한국인, 재일교포들의 아픔과 어려움에 대해 한국정부가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진실화해위의 활동이나 역할 등 그 존재가 일본에서는 홍보가 잘 안 됐다. 그리고 알았더라고 생활고 때문에 또는 가해자인 한국 정부에 대한 원망으로 조사 신청을 못 하거나 안 한 재일교포 분들도 많다. 억울하게 간첩조작사건의 피해자가 되었더라도 피해 신청을 위해 한국을 방문하기 쉽지 않은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여러 가지 재일교포들의 애로사항을 향후 한국정부가 헤아려 주고 적절한 조치를 해주었으면 한다. 재일교포도 한국국민인 것을 명심해 달라.

 

일본에서 매일 한국에 관련된 뉴스를 보면 기쁜 소식 보다는 답답한 뉴스가 많다. 우리 후손들이 오늘 절망하기보다는 희망을 갖고 미래를 꿈꿀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주어야 하지 않나. 그러기 위해선 잘못된 역사를 반성하고 바로잡는 모습을 우리가 후손들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일본으로 귀화한 재일교포 이충성 축구선수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사회는 극도의 경쟁체제와 심한 사회적 배타성 때문에 나와 조금만 다르면 그냥 '왕따' 시켜버리고 배척한다. 좀 더 약자들의 아픔과 고통에 민감하고 포용해 주는 인정 넘치는 따듯한 조국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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