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17

손민석 영화 칠드런 액트

(1) Facebook

손민석

영화 칠드런 액트는 주인공인 판사가 종교적 이유로 미성년자 자식의 헌혈을 거부하는 부모에 맞서 헌혈을 법의 이름으로 강제한 뒤의 소년의 삶을 다루는 영화이다. 

사실 영화를 보는 것보다는 원작 소설을 읽어볼 것을 추천하는데 영화의 경우에는 소년이 판사를 이성적으로 사랑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바람에 원작 소설이 갖고 있던 철학적, 법학적 맥락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소년은 판사의 결정으로 헌혈을 받아 살아났지만 죽음으로 증명하려 했던 종교적 신념을 철회했다는 이유로 가족으로부터 배제된다. 갈 곳이 없어진 소년은 판사에게 가서 자신이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에 대한 답을 구하지만, 판사는 그저 법에 따라 판결을 내린걸로 자신의 역할을 다할 뿐이지 판결 이후의 소년의 삶에 대해서는 어떠한 책임도 지려 하지 않는다. 원작 소설에서 소년은 결국 자살한다. 사회가, 법이 소년의 삶에 개입했지만 개입한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 상황에서 판사는 어떤 선택을 했어야 했는지, 사회는 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대단히 무겁고도 깊은 논의를 다루고 있어 재밌게 읽은 소설이었다.
 정치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어디선가 법의 존재이유는 정의를 찾는 게 아니라 판결을 내리는 것 자체에 있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그것이 우리의 일반적 감각 속에서 부정의라 할지라도 법은 판결을 내리는 행위 자체만으로 그 존재의의를 충족시킬 수 있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법은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게 아니라 사실상 아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이 판결을 내리지 않아 무법無法적 상황이 도래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낫다는 맥락으로 나는 이해했다. 중요한 것은 법의 판결 그 자체가 아니라 이후의 사회가 그러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응해 공동체의 유지, 통합 등에 기여하게 만들 것인가, 그 차원이 아닌가 싶다.
 장혜영 의원 관련된 논란을 보면서 나는 한국 사회가 법의 기능을 대단히 잘못 이해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계속하게 된다. 판결 이후를 고려하는 사회가 여기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법은 판결을 통해 누군가를 징치할 목적으로만 존재하는 듯이 보인다. 장혜영과 정의당을 비판하는 이들의 글에서는 증오의 악취가 뿜어져 나오며, 공동체의 통합과 유지보다는 적대를 생산하기 위한 악의만이 넘쳐난다. 그들은 이 성폭력 사건 속에서 정의가 실현되거나 피해자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될 것을 원하지 않는다. 박원순 사태를 비롯한 민주당의 여러 성폭력 문제에서 받은 알량한 자존심의 상처를 보상받으려는 치기어린 유치함만 보인다. 정의당이 박원순한테 했듯이 가해자를 파멸시키지 않으려 했다는 이유로 피해자와 정의당을 비난한다. 오직 누군가를 징치하는 것만을 법의 존재 이유로 생각한다. 판결 이후에도 삶이 이어진다는 관념이 없다. 
 알페스 논쟁 때도 말했지만 우리가 근대 사회에서 어떠한 사안에 대해 논의를 할 때는 누군가의 "자유"를 기준으로 두고 논의를 해야 한다. 성폭력 문제에서는 성폭력의 피해자의 권리와 자유가 논의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누군가를 얼마나 강하게 '처벌'할 것인가가 아니라. 애당초 친고죄가 존재했던 이유가 성폭력 피해자가 어떠한 피해를 입었는지, 어떻게 입었는지 등과 같은 신상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함이었고, 동시에 친고죄가 폐지되었던 이유 또한 마찬가지로 이 정보 유출에 대한 부담을 '선택권'이라는 명목 하에 피해자에게 지우기 때문이었는데 고소고발을 진행한 이들이나 그걸 옹호하는 이들 모두 신상 정보를 알아야 한다는 걸 이유로 들고 있으니 대체 이 나라에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는 어디로 간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치기어린 모지리들이 '광란의 축제'를 벌이기만 한다.
 친고죄를 폐지한 건 단순히 가해자를 징치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유가 여럿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 문제를 인식하는 방식을 바꾸고 피해자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본질이었다고 생각한다. 친고죄는 친족 사이에서 범한 재산 범죄, 피해법익이 극히 작아 공익에 직접적인 영향이 없는 모욕죄, 비밀침해죄 등에 적용된다. 성폭력이 이러한 사안들과 동일하게 다뤄져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의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단위의 문제로 받아들여졌다는 사회적 맥락, 가족의 명예 등과 같은 신상정보의 유출 문제 등의 맥락 속에서 논의가 진행되었는데 정치적 목적을 이유로 이 많은 맥락들이 거세되고 그저 페미의 위선으로 소비되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가 2012년 3년 간의 상담일지 3,729건 중 친고죄로 인한 문제가 드러난 451건을 분석해 만든 유형을 보면 친고죄가 피해자에게 고소를 결정하게 함으로써 중압감을 준다고 파악된 경우가 37.3%, 고소 및 합의에 관해 가해자 측에 의한 2차 가해가 이뤄진 유형이 27.2%, 피해자에게 결정권이 있다보니 수사 및 재판기관의 소극적 대응이 이뤄지는 게 13.3%, 고소기간이 1년 미만이라 기간이 몇 년인 다른 사건에 비해 짧아 여러 문제가 생기는 유형이 12.7% 등으로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이 문제들이 피해자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는 데 있어 도움이 안된다고 보았기에 논의가 진행되었다는 걸 잊어서는 곤란하다.
 친고죄 폐지론자들이 우려했던 게 바로 피해자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혹은 피해자의 의사를 무시한채로 고소고발이 진행되는 것이었는데 그 우려를 사실로 입증시켜준, 페미니즘, 페미니스트, 정의당, 피해자 등을 비난하는 이들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논거로 폐지론자들의 우려를 사용한다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나는 자유의 파탄이라 해석하고 있다. 법의 판결 이후의 피해자의 삶을 보장해야 할 사회가 존재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 내에 존재하는 적대를 이유로 피해자를 공격하는 일이 일어나는 이런 곳을 사회라 부를 수 있을까? 공동체라 부를 수 있을까. 영화 칠드런 액트의 원작 소설이 내게 흥미롭게 다가왔던 건 문예쪽에 문외한이라 확답하기는 어렵지만 한국에서 그정도의 깊이로 사회문제를 다룬 작품이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영국 사회는 그래도 그정도 수준은 되는 사회였다. 우리 사회의 수준은 어디쯤에 왔을까? 나는 한국 사회가 선진 사회라는 주장에 단 한번도 동의한 적이 없고 한동안은 계속 그럴 것 같다.
Comments
권경애
저도 칠드런 액트 원작 소설로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 Reply · 2 w
손민석
이언 매큐언 소설들은 참 무거운 주제들을 흥미롭게 다루는 게 있어서 소설을 즐겨 읽지 않는 저조차도 볼 만 하더군요. 나중에 관련해서 평을 해주시면 감사히 배우겠습니다.
 · Reply · 2 w
권경애
이 글보다 깊이있는 평은 어려울 듯 한데요~.
이언 매큐언, 참 좋아하는 작가에요~
 · Reply · 2 w
손민석
권경애 부끄럽습니다. 항상 글에서 많이 배웁니다.
 · Reply · 2 w
권경애
저도 손민석님 글에서 많이 배웁니다~
 · Reply · 2 w
Write a reply…

Park Yuha
잘 읽었어요. 내가 하고 싶었으나 길게 쓸 엄두를 못 냈던 얘기를 잘 써 주었네요.
 · Reply · 2 w
손민석
박유하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 Reply · 2 w
Park Yuha
손민석 좋은 글이니 좋게 읽은 거지요.^^
 · Reply · 2 w

No comments:

Post a Comment

Note: Only a member of this blog may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