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1

(동학사상 다시읽기) 제5강: 해월 최시형, 새로운 도덕을 열다 - 광주 한살림 김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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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사상 다시읽기) 제5강: 해월 최시형, 새로운 도덕을 열다
- 광주 한살림 김진희
1월 마지막 주, 갑작스럽게 잡힌 가족여행 일정과 수업이 겹쳐 아쉽게도 수업을 듣지 못했다. 새별(조성환) 선생님의 수업을 듣기 전에 전날부터 김용옥 선생의 특강을 들으며 약간의 기름칠을 해두었다. 김용옥 선생 역시 최고의 철학자이자 실천가였던 최시형 선생을 높이 샀다. 김용옥 교수의 강의도 좋았지만, 천생 학자인 우리 새별 수업의 깊이가 나는 더 좋다.
오늘의 주인공 해월 최시형 선생은 동학의 2대 교조로 경주 동촌 황오리에서 1827년 가난한 농사꾼 아들로 태어났고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다. 제지소 등지에서 일하다가 화전민 생활을 하던 해월은 35세였던 1861년 천도교 1대 교조인 수운 최제우를 찾아가 동학에 입도하고, 2년 뒤인 1863년 2대 교조가 됐다. 관의 탄압을 받던 해월은 체포될 때까지 무려 36년간 첩첩산중으로 숨어다니며 동학을 이끌었다.
해월은 1대 교조 최제우의 시천주( 하늘님을 모시고 있는 인간, 내 안에 하늘님이 있으니 내가 곧 하늘님)로 하늘님을 정의했다면 최시형 선생은 萬物莫非侍天主(만물막비시천주), 하늘님을 모시고 있는 만물이 모두 하늘님이라며 인간에 머물렀던 하늘님을 세상만물로 확장시켰고, 이 생각을 기반으로 모든 이와 모든 물체를 대했다고 한다. 그의 법설을 정리한 『해월신사법설』「待人接物 대인접물」 편에는 이러한 그의 생각을 잘 나타내주는 시(?)가 있다.
"제비의 알을 깨지 않아야 봉황이 날아오고,
초목의 싹을 꺾지 않아야 산림이 무성하다.
꽃가지를 꺾으면 열매를 따지 못하고,
폐물을 버리면 부를 쌓을 수 없다.
온갖 날짐승도 각각 그 부류가 있고
온갖 털벌레도 각각 그 목숨이 있다."
- 『해월신사법설』「待人接物 대인접물」 이규성, 『최시형의 철학』,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11
그는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경물'이라는 철학용어를 사용함으로 써 유학과의 차이를 만들어 냈다.(敬物則德及萬方矣, 경물즉덕급만방의, 만물을 공경하면 덕이 만방에 미친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1990년 원주에 해월 선생 추모비를 세우고 함께 이를 위해 애쓴 이들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 편지를 보면 무위당 선생이 왜 최시형 선생을 높이 샀는지, 해월이 어떤 분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추모비를 세운) 회원들 각자는 천도교 신도가 아니라 천주교 신자, 기독교 신자, 불교 신자, 유교를 받드는 사람도 있어요. 요(要)는 예수님이 기독교만의 예수님이 아니라 모든 이의 예수님이고, 석가모니 부처님이 모든 중생의 부처님이지 불신도만의 부처님이 아닌 것처럼, 우리 해월 최시형 선생님도 마찬가지로 모든 이의 선생님이시더란 말이예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해월 선생은 삼경(三敬)을 설파하셨어요.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의 이치를 볼 때에 인간과 천지만물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한울님으로 섬기고 공경하시고 가셨기에 모든 이웃이라는 말로 하였고, 벗이란 말은 삼경의 도리로 볼 때에 선생님께서는 도덕의 극치를 행하셨기 때문에 일체와의 관계가 동심원적 자리, 절대적 자리에 서계셨기 때문에 벗이라는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최보따리라는 말은 방방곡곡 어디를 가시나 지극히 간단한 행장으로 보따리를 매시고 다니셨기에 일행을 지긋이 한자리에 머무실 수 없이 설법하고 민중들과 같이 하셨으므로 최(崔)보따리라고 했습니다.
이 한마디 법설에는 해월 삼경(三敬)의 일체의 도리가 다 들어있고 이렇게 하태(下台) 전면에 쓰게 된 것은 산업문명에서 탈출하여 앞으로의 지구, 나아가서 우주의 일체의 존재가 공생할 수 있는 도리가 여기에 있음으로 이렇게 썼습니다. - 1990년 4월 17일 장일순"
- 김삼웅, "모든 이웃의 벗 최보따리 선생님을 기리며"(오마이뉴스. 2019.01.18.)에서 재인용.
새별은 『해월신사법설』 제2 「천지부모」 에서 부모와 조상만을 모시던 유학의 질서를 깨고 천지를 부모와 같다고 한 해월의 사상적 확장은 사유 구조상 중국철학과 유사한 측면도 있지만 중국은 천학(하늘철학)보다는 도학(도덕철학) 전통이 강하기 때문에, 중국철학과도 다른 새로운 개념을 창조해낸 것이라고 강조하셨다.
해월은 동아시아사상사에서 '경물'(존재에 대한 공경)이라는 철학용어를 최초로 사용함으로써 지구적 윤리, 지구적 도덕 개념을 만들어 기존의 윤리개념을 확장시켰다.
이것은 향벽설위하는 기존의 제사법을 비판하면서 '향아설위'를 설파하고 조상을 위한 제사보다 조상의 피와 정신을 이어받은 내 안에 깃든 '한울님'을 모시는 것이 중요함을, 매끼의 식사를 하며 고마움을 느끼는 일상의 제사의 중요함을 이야기했다. 이렇게 내 안에 깃든 한울님을 중심에 두는 것은 오래된 과거를 중시한 유학의 과거주의와 달리 현재를 살고 미래를 이끌어가는 주역을 중시하는 관점으로 미래적이다. 여기에 '아이를 때리는 것은 곧 한울님을 때리는 것입니다.' 라는 말씀이 더해져서, 천도교 창시자인 손병희의 사위 방정환이 '어린이날'을 만든 기반이 되지 않았을까?
수운이 내 안의 신령함이 내 몸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내유신령 외유기화"라고 했다면, 해월은 '이천식천'을 기화의 일종으로 보아 다른 종을 섭생하는 것을 만물의 기화로 해석했다. 이는 자연의 상호부조의 행위이지 파괴적인 살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자연을 물질로써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하늘을 먹어 스스로 <새로운 하늘>이 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해월의 사상, 사람만이 한울님이 아니라 물물천(物物天) 사사천(事事天), 즉 물건마다 다 하늘이고 일마다 모두 하늘이라는 만물 존중의 경물(敬物)사상을 무위당 선생은 오늘에 되살리고 싶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새별이 수업 초반에 천도교 이론가 황상 이종린의 말을 인용하면서, "한살림의 학이 흔들리고, 망각해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는 언급은 현재의 나에게는 너무나 뼈아프다.
"오늘날 농업의 부진은 농학의 불완전함에 그 원인이 있고, 상업의 부진은 상학의 불완전함에 그 원인이 있다." 이종린, <의무교육에 대하여>, <천도교회월보> 제1호, 1910.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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