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5

채현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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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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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국
채현국 이사장.jpg
작가 정보
출생1935년
대구광역시
직업학교법인인
문화운동가
국적대한민국 대한민국
학력서울대학교 철학 학사
부모채기엽(부)

채현국(1935년 ~ )은 대한민국의 전 기업인 이자 문화운동가이다. 서울대학교 철학 학사를 마쳤으며, 과거 흥국기업의 총수이자 현재 대한북레터협회와 효암학원의 이사장이다.

생애[편집]

아버지 채기엽(1907~1988)은 1952년 서울에서 연탄공장을 차렸고 1956년 흥국탄광을 설립했다. 채기엽은 강원도 사북탄광을 개발할 때 큰 일을 했다. 사북역 광장에 있는 '채기엽 선생 공덕비'가 이를 증명한다.

채기엽은 이후 무역·목축·임산·조선·해운 등 다방면으로 사업을 늘렸고, 경남대학교의 전신인 옛 해인대학이 기틀을 마련하도록 지원했다. 그후 양산시 웅상에 현재의 효암학원을 설립했다. '효암'은 채기엽의 호다.[1]

1961년 당시 중앙방송 연출 1기로 취업을 하지만 군사정권의 나팔수 역할에 지나지 않던 방송국에 환멸을 느껴 3개월만에 방송국을 나오게 된다. 1962년부터 본격적으로 아버지의 사업을 돕게 되어 주업종이던 흥국탄광을 발판으로 ,흥국조선, 흥국흥산, 흥국해운, 흥국화학 등 분야를 확장 그룹으로서 성장을 시켜 사업가로 크게 성공을 하게 된다 실재 언론인 임재경은 2008년 한겨레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했다. "가정 연료의 주종이 연탄이었던 60년대에 채기엽-채현국 부자의 탄광은 개인 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에 들 정도로 커졌다. 이렇게 벌어들인 돈으로 독재정권에 항거하던 수많은 민주인사들에게 직간접적으로 도움을 주었고 수십채 이상의 집을 후원하였다 전국 소득세 10위 거부가 되지만 1973년, 재산을 모두 분배하고 사업을 정리했다. 성공한 사업가였지만 뒤에서는 박정희·전두환 정권 때 핍박받는 민주화 인사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활동자금을 지원했다. 1988년부터 효암학원의 이사장으로 취임해 효암고등학교와 개운중학교를 뒤에서 돌보고 있다.[2]

현재는 아버지 채기엽의 호를 딴 효암학원 이사장과 대한북레터협회의 이사장으로 재임하고 있으며 2014년 새해에 한겨레와의 인터뷰로 인해 대중들에게 크게 알려지고 호응을 얻게 되어 이 시대 젊은 세대들에게 가장 존경 받는 멘토 중 하나로서 강의를 통해 세상과 만나고 있다. [3]

어록[편집]

  • "노인들이 저 모양이란 걸 잘 봐두어라…노인 세대를 절대 봐주지 마라" <한겨레 인터뷰 中>
  • "재산은 세상 것이다. 이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서 잘한 것뿐이다. 그럼 세상에 나눠야 해, 그건 자식한테 물려 줄 게 아니다."

[4]

학력[편집]

경력[편집]

각주[편집]

  1.  https://news.v.daum.net/v/20150112191904563
  2.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5&no=557825 ‘꼰대’ 거부하는 채현국·신영복·호세 무히카 이런 ‘단호박 할배’들은 처음이다
  3.  http://www.upkorea.net/news/articleView.html?idxno=50340 Archived 2016년 3월 4일 - 웨이백 머신 365일 36.5도의 따뜻한 세상 만들기 '북레터 365 운동’ 업코리아 2015.08.24.
  4.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82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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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국
최근 수정 시각: 2021-02-27 03:29:41


분류 1935년 출생대구광역시 출신 인물인천 채씨서울대학교 출신대한민국의 진보주의자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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蔡鉉國
1935년[1] ~

1. 개요
2. 생애
3. 어록
4. 이야깃거리

1. 개요[편집]
학교법인 효암학원의 이사이자 이른바 '건달 할배', '나무 할아버지', '풍운아'로 알려진 진보 성향의 인사. 본관은 인천(仁川)[2].
2. 생애[편집]
1935년 경상북도 대구부(현 대구광역시)에서 아버지 채기엽(蔡基葉)[3]과 어머니 여산 송씨 송원영(宋源榮)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25 전쟁이 끝나자마자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으며 졸업 후 1960년 중앙방송(현 KBS) PD로 입사했으나,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권력의 나팔수로 살기 싫어 PD를 때려치우고 부친과 함께 강원도 삼척시 도계에서 흥국탄광을 운영, 한때 개인소득세 납부액이 전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거부가 되었다. 아래 뉴스타파 영상에도 나오지만 당시 광부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위한 병원을 따로 운영했고 무상이었다고 한다. 그분들의 아이들을 위해 학교도 세우셨는데 교사 월급에도 1/3을 투자하셔서 광부 모임이 아직도 내려오고 있다. 사업을 접으실 때는 일반적인 퇴직금의 3배를 주셨다고. 다만 본인은 나눠준 게 아니라 돌려준 거라고 표현하였다.

그러나 10월 유신 이후 이대로 가다간 또 권력과 얽혀 앞잡이가 될 상황이 올까 우려했고, 개인적으론 돈 버는 맛에 중독되어가는 자신이 걱정돼서 사업을 정리하고 자유인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군사정권 시절에는 도피생활을 하던 민주화 인사에게 자신의 집과 회사를 은신처로 내주었고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김지하나 기타 여러 유명 인사들에게 자금을 제공했는데, 당시 피해다니던 양반들 중 이 분에게 신세지지 않은 사람은 보기 힘들다 할 정도였다고 한다.

87년 6월 항쟁 이후인 1988년, 경상남도 양산시에 있는 효암고등학교와 개운중학교를 거느린 학교법인 효암학원의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단 월급은 받지 않는다고 한다. 효암(曉岩)은 부친 채기엽의 호이다.


3. 어록[편집]
주옥 같은 어록들로 유명하다.

  • “봐주지 마라.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너희들이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까딱하면 모두 저 꼴 되니 봐주면 안 된다.”
  • "늙으면 지혜로워진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농경 시대의 꿈 같은 소리입니다. 늙으면 뻔뻔해집니다."
  • “지식을 가지면 '잘못된 옳은 소리'를 하기 쉽다.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는 것'만 고정관념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평생 그 해답을 찾기도 힘든데, 나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린 ‘정답’이라니…”
  • (이사장님의 교육철학은 어떻게 되십니까?) "난 교육철학이라는 말을 쓰는 것부터 상당히 거부감을 느낍니다. 모든 교육철학과 교육학은 집권자의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서, 그 영향을 받아서 된 응용학문의 성질이 실제 역사에 강합니다. 권력이 미치는 한에서 그들이 원하는 쪽에서 전달되고 전파되지, 그들이 원치 않는 사실과 철학은 전파되지도 전달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국가를 위해서 살아야 하고 국가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잖아요. 새빨간 거짓말이거든. 처음부터 국가라는 것은 이 사회에서 인간이 살기 위해 만든 조직이야. 인간이 살기 위해서 만든 조직이지, 그 조직을 위해서 인간이 살지 않아. 이건 자명한 이야기인데 모든 국가 권력이 그렇게 우리를 생각하게 만든 겁니다. 그러니 교육철학이라는 말을 제가 좋아할 리가 있겠습니까? (중략) 단순, 소박한 겁니다. 함께 살기. 함께 사는 것. 그게 얼마나 즐거운지를, 그게 바로 생명이 갖는 기적 같은 힘인데, 그것도 발랄하게 못 느끼게 하는데 무슨 가르치고, 배우고 할 게 있습니까?"
4. 이야깃거리[편집]
서울대학교 학창시절에 연극부 활동을 했는데, 여기서 만난 이가 바로 연기자 이순재로 같은 나이라 친한 친구 사이라고 한다. 거기에 고건 전 총리와도 친한 사이다.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은 채현국을 가리켜 “채현국은 거리의 철학자, 당대의 기인, 살아있는 천상병”이라 평하기도 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前 대표를 지지하는 사회 각계인사들의 모임 '더불어 포럼'에서 채현국 이사장이 상임고문을 맡았다고 한다.

그것이 알고싶다 2016년 11월 26일 방영분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 때 최태민의 행적 중 일부를 증언하며 최태민이 승려 시절 어느 학교에 나타났을 때의 이야기를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 학교의 초대 교장이 자신의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웠는데, 학교를 건립하는 데 재산을 너무 쏟아 교사들에게 월급도 주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워졌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승려였던 최태민이 나타나 교사들의 밀린 월급을 지급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하자 교장이 매우 감사하며 아예 교장 자리까지도 넘겨주려고 했는데, 정작 그 학교에 최태민의 구미가 당길 만한 이권이 없자 그대로 잠적해버렸다고 한다.

[1] 인천채씨대동보 4권 67쪽에는 1937년 3월 16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2] 30세 현(鉉) 항렬.
[3] 족보명 채종기(蔡宗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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