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2

회리 강남순 『조국의 시간』 ,

(7) 회리 | Facebook

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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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is in Texas.
3te1 McShSaytp oesnsondafotr ue06g:54dgsga  · 
< 『조국의 시간』 , 인간이란 누구인가,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

1. 인간에 대하여 연구하고, 쓰고, 가르치는 것—이것은 소위 ‘인문학(humanities)’이라는 범주에 속한 영역에서 일하는 이들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는 내게 가장 힘든 시간이 있다.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가 들 때다. 인간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 양극단의 이해가 있다. 고도의 낙관적인 이해와 비관적 이해다. 이 두 가지 상충적인 인간이해는 시대적 정황에 따라서 마치 릴레이를 하듯 한 사회를 지배하는 인간이해가 된다. 서구에서 소위 ‘암흑시대’라고 하는 중세를 넘어서 근대의 문이 열리고 계몽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이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기 시작할 때는, 인간에 대한 고도의 낙관적인 이해가 지배적이었다. 인간은 ‘신과 같은 존재’로서, 신과 ‘질적 차이’가 아닌 ‘양적 차이’만이 있는 존재다. 즉, 원리적으로 보자면 인간이 신이 못될 이유는 없다. 단지 ‘양적’ 차이가 있을 뿐이기 때문에 신적 존재가 될 가능성은 열려있다.
2. 그런데 세계 1, 2차 대전을 겪고, 특히 ‘홀로코스트’를 통하여 ‘인류에 대한 참혹한 범죄(crime against humanity)'가 일어난 후, 인간에 대한 고도의 비관적 이해가 자리 잡는다. 현대 사회는 어찌보면 이 두 가지 극단적 이해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가지 상충하는 인간이해의 파라독스를 끌어안고 인간에 대하여 접근해야 함을 비로소 아프게 깨우치기 시작한 시대라고 나는 본다. 그래서 그 어떤 인간에 대하여도 절대적 ‘악마화’ 또는 절대적 ‘이상화’는 모두 위험하다. 그 어느 인간도 100% 악마적이기만 한 것도, 100% 이상적인 신적 존재일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나를 제일 힘들게 하는 문제도 바로 이 두 가지 상충적인 인간이해 사이를 오가야 하는 일이다. 이러한 인간 이해를 ‘강남순’이라는 한 인간인 나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서 그저 학문적인 주제로서 연구하고 쓰고 가르치는 것이라면, 나를 힘들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하든 나는 나 자신의 개인적 삶과 학문적 이해를 분리시키는 ‘기술이나 능력’이 별로 없는 것 같다. 
3. 우리는 과연 얼마만큼 인간에 대하여 기대하고, 기대를 접고, 절망하고, 또는 희망해도 되는가. 칸트가 씨름해온 커다란 주제를 담은 4가지 질문이 있다.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2)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3)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 그리고 4) 인간이란 누구인가. 여기서 희망에 대한 칸트의 질문 구성을 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 ‘희망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희망해도 되는가 (Was darf ich hoffen/ What may I hope)’라고 한 것이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희망을 품은 존재'라는 것이다. 단순한 망상이나 몽상과는 달리, 희망이란 ‘인간이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치열한 성찰을 하면서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의 지평’을 설정하고, 그 희망의 세계를 위한 판단과 행동을 연계시키는 부단한 시도를 통해서 비로소 '희망하는 존재'로서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무작정 단순한 바람(wish)에 ‘희망’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그 소중한 ‘희망’이라는 말을 오용하는 것이다. 
4. 『조국의 시간』이라는 제목의 책 출판 소식이 나오자마자, 개인의 SNS나 미디어를 통해서 소개되는 갖가지 개인적 또는 사회적 반응을 보고 있다. 이 반응들을 보면서 칸트의 질문, 특히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와 ‘인간이란 누구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정치인 그리고 소위 ‘지식인’이라고 하는 이들이 이 책의 출판소식이 나오자 마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맹목적 조롱과 야유로 반응을 하고, 언론은 그들의 이러한 개인적 조롱을 마치 중요한 평가라도 되는 양, 기사화하고 있다. 도대체 인간에 대하여, 한국 사회에 대하여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 
5. 2019년 8월 이후 그 짧은 시간에 70여 군데 이상의 압수수색을 당하고, 100만 건 이상의 기사의 대상이 되어온 사람이 있다. 그만이 아니라, 그의 가족 모두가 모두 전 국민 앞에 벌거벗겨지는 듯한 취급을 받았다. 가장 사적인 영역에 속하는 일기장은 물론 가족 간에 나눈 메시지까지 ‘탈정황화’되어서 그와 그 가족을 ‘악마화’하는 도구로 쓰여졌다. 2019년 8월 이후 그와 가족들에 대한 사회적-정신적 폭력과 야만적 조롱은 갖가지 방식으로 여전히 진행형이다. 나는 이러한 혐오 돌풍이 유독 한 사람에게만 향해지는 장면을 지켜보면서, 독일에서 유대인학살을 진행하고 정당화하기 위해서 유대인을 별종의 ‘괴물’로 만들기 시작한 정치인과 그들의 비인간적 프로파겐다에 무비판적으로 따르던 다수의 ‘평범한’ 독일시민들이 떠오른다. 한국의 언론, 검찰, 다수의 시민들은 노골적으로 드러난 범죄들에 대하여는 침묵, 무관심, 또는 관대함으로 넘기면서, 유독 한 사람에게만은 ‘신적 존재’와 같은 티없는 완벽함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갖가지 분석이 나오지만, 그 어느 것도 내게는 정당화되지가 않는다. ‘악은 비판적 사유의 부재’라고 정의한 아렌트의 분석만으로도, 이 특정한 한 사람에 대한 집단적 광기 어린 폭력을 이해하기 참으로 힘들다. 
6. 숨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모든 일상사가 관찰되고, 탐문되고, 조롱거리가 되는 삶을 그는 어떻게 버티고 있는가. 도처에 CCTV를 설치해 놓고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는 것 같은 ‘감옥에서의 삶’을 살고 있을 그의 매일의 삶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숨 막힌다. 이러한 정황에서 그는 하루씩 살아내고 있다. 이런 그에게 유일한 자유의 공간, 여전히 살아있는 존재임을 상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글쓰기’의 공간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본다. 에드워드 사이드(E. Said)는 “나는 나의 글쓰기에서 고향을 발견한다”라는 말을 했다. 그 어느 특정한 지리적 공간에서도 ‘고향성’을 느끼지 못하는 내가 이 구절을 처음 만났을 때, 마치 그리웠던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그래서 나는 이 사이드의 구절과 함께 다음과 같은 구절을 덧붙여 써서 프린트하여 나의 서재 벽 보드에 붙여놓았다 : 
◆ 나는 나의 글쓰기에서 고향을 찾는다. 
(I find home in my writing)
◆ 나는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쓴다. 
(I write to give meaning to my life).
◆ 나는 의미를 쓴다 
(I write my meaning).
7.   2019년 8월 이후 사실상 ‘사회적 감옥’ 속으로 떠밀어져 유배된 사람이 자신의 삶에 의미부여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무엇이었을까. 일기든, 편지든, 자서전이든, 회고록이든, 학술논문이든 여타의 ‘쓰기’란 감옥의 삶에서 유일하게 자유를 경험하게 하는 공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는 유일한 살아있음의 의미부여를 하고, 그 소중함을 확인하고 상기시키는 방식이 나는 ‘쓰기의 공간’이었을 것이라고 상상해본다. 글쓰기의 공간을 통해서 마구 짓밟혀지고 있는 자신의 삶에 비로소 의미부여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8. 지금은 내가 텍사스에 있으니 『조국의 시간』을 직접 읽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내용이 무엇이던가에 상관없이, 이 책의 출간은 ‘조국’이라는 한 사람의 정치적 여정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고 나는 본다. 1년 반 이상 하루도 빠짐없이 혹독한 아픔과 고통의 시간을 지내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글을 써 내려온 그 과정 자체가, 삶의 정황에서 우리 각자에게 ‘인간이란 누구인가’에 대하여,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에 대하여 소중한 의미를 던진다고 나는 본다.  그의 글쓰기 공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통제불능의 사건들 속에서의 절망감, 나에게  던져지는 다층적 폭력과 조롱과 야유를 견디어 내는 것의 의미, 지독한 절망감과 출구없음의 칠흙같은 어두움의 느낌과 씨름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됨의 의미를 상실하지 않고 지켜내기 위한 부단한 ‘희망에의 의지’를 담아낸 공간이라고 나는 본다. 
9. 사이드가 '지식인'의 자리가 어디여야 하는가에서 말한 것 처럼, 나는 나를 ‘주변부에 머무는 사람’으로 나의 공적영역에서의 자리매김을 한다. 여기서 ‘주변부’라고 하는 것은 ‘중심부’와 의도적으로 ‘비판적 거리 두기’를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맹목적으로 누구 ‘편’을 들기 위해서 나의 생각을 펴거나, 칼럼과 같은 공적 글쓰기를 하지 않고자 한다. 특정 정치집단, 종교집단, 또는 개별 정치인을 위한 집단적 동맹 그룹에 들어가서 무작정 편들기에 동승하는 것은 나의 학문적 입장 뿐 아니라, 개인적 성향에도 맞지 않는다. 나의 인식과 사유와 분석이 지닐 수 있는 한계나 인식의 사각지대에 대하여 성찰해야 하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관찰하고, 느끼는 바를 담담하게 밝히는 것 뿐이다. 여타의 글쓰기란 나의 삶에 의미부여를 하는 행위이며, 내가 ‘나 됨’을 담아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모든 글이란 오해와 오역에 노출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글쓰기에 대한 불신을 가졌고, 스스로 쓰기를 거부했다. 그렇기에, 나는 누구나가 내 글에 공감할 것이라는 기대를 전혀 하지 않는다. 누구나 자기만큼 읽기를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읽기란 자서전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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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리
3te0 McShSaytp oesnsondafotr ue18g:30dgsga  · 
Ik Jae Song
3te0 McShSaytp oesnsondafotr ue15g:55dgsga  · 
이렇게 <조국의 시간> 출간을 조롱한 이들에 대해 조성식 전 월간 <신동아> 기자는 ‘중용과 시중-그 입 다물라!’라는 장문의 글을 통해 일침을 가했다. “한편으로는 얼마나 고마운지.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걸 알게 해주니”라고 끝을 맺은 조 전 기자의 촌철살인 글을 소개한다. 조 전 기자의 일침이야말로 진 전 교수와 같은 이들의 입을 오매불망 쳐다보는 대다수 언론들과의 ‘기계적 균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사진제공=뉴시스>
멸문지화의 고통 속에 “가족의 피에 펜 찍어 썼다”는 사람에게, 정말 인간미라고는 없어 보이는 자유기고가 진모라는 자는 “가지가지 한다”고 비아냥대고, 검사 출신으로 “검경수사권 조정은 사기극”이라고 사기 쳤던 김모라는 국회의원은 “그러다 밤에 오줌 싼다”라고 조롱했다. 한때 진씨의 촌철살인을 좋아하고 김 의원의 책을 한달음에 읽었던 사람으로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앞으로도 비슷한 부류의 막말 대행진이 이어질 것이다. 뭐 모지리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 쓸 필요는 없지만, 이 말만은 해주고 싶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최소한의 품위와 격식은 갖추자고. 난 지금껏 검찰 돌격대처럼 나대는 진모, 서모 부류에 대해 한 번도 대놓고 비난한 적이 없다. 아무리 엉터리라도 비판의 자유는 존중해줘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검언연합군이 주입한 확증편향에 빠져 사실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시대정신인 검찰개혁의 당위성과 검찰권력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깜깜이인 그들에게 분노보다는 연민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독하게 싸우더라도 우리가 같은 인간이라는 점, 이념과 의견 차이는 꽤 심각한 듯해도 종이 한 장 두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역지사지로 상대방 처지를 조금이라도 헤아리면 그렇게까지 매몰차게 잔인하게 대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더욱이 사실이 흔들리고 진실이 안갯속을 헤매는 상황이라면. ‘윤석열 검찰’을 겪고 보니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일 중 하나가 검찰 공소장을 100%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한때 ‘정의로운 검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기자 무리 속에 끼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지경이다. 지금도 무개념으로 검찰 논리에만 치중하거나 양비론 우산 속에 무게 잡거나 안주하는 기자들이 안쓰러울 뿐이다.
어른과 아이가 싸우면 아이를 배려하면서 나무라든지 말리든지 해야 한다. 격투기에서 체급이 다른 선수끼리 붙어 판정으로 갈 때 채점 기준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몸무게 가벼운 사람에게 가산점을 주는 거나 비슷한 이치다. 중도나 중용은 무조건 한가운데 서는 것이 아니다. 가운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균형이 중요하다. 공자가 중용의 조건으로 말한 시중(時中)이 바로 그것이다. 시중은 상황에 따라 중심이 이리로 저리로 흔들리면서 균형을 잡는 것이다. 그래서 ‘움직이는 중도’라고도 한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중이다. 어느 한쪽을 때리든, 양비론을 펴든 균형은 잡아야 한다. 그리고 비판은 좋은데, 제발 좀 천박하고 야비한 언행은 삼가자. 언론사 간판 내걸고 그런 걸 기삿거리라고 그대로 받아쓰는 기자들이 불쌍하지도 않은가? 그러니 자중하고 그 입 다물라. 책 냈으면 축하는 못하더라도 빈말이라도 애썼다고 덕담이라도 건넨 다음 내용을 가지고 때리는 게 순서이지 않나? 언론에 지식인이라고 소개되는 자들이 얼마나 기본 소양이 없는지, 이거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어휴, 한편으로는 얼마나 고마운지. 저렇게 살면 안 된다는 걸 알게 해주니.
      * 신문기사에서 발췌(어느 신문이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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