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ilo Kalia's post[聖토요일의 미학] 나는 <십자가와 부활의 미학>에서 성토요일에 관해 한 꼭지 썼다(1장 19). 그러나 미흡하고 찝찝한 마음 가시질 않아 성토요일이 한 시간도 남지 않은 시각에 글을 올린다. 이 글은 『성령과 트라우마』, 2장)에 근거한다. 성토요일은 성금요일과 부활절 사이에 끼어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수난주간, 월~금까지 경건 훈련에 열을 올리다가 토요일은 쉬거나 부활절을 준비하면서 미리 부활을 맛보고 싶어한다. 벌써 많은 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마음이 가 있다. 성토요일은 완전히 생략되어 그저 부활절 전날이 되었거나, 지옥에서의 성자의 죽음과 죄에 대한 정복 활동을 당연시함으로써 이미 부활을 예견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성토요일의 신학을 전개한 신학자는 기독교 미학자로 알려진 큰 사상가 한스 우어즈 폰 발타자(Hans Urs von Balthasar)이다. 전통적으로 수난과 부활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어지는 매끄러운 과정으로 설명되었다. 발타자는 이런 설명에 저항하는 신학을 제시한다. 교회는 성토요일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거의 도외시했는데, 이 날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죽음과 삶을 목격하고 증언하는 현장이다. 우리는 제일 먼저, 영원한 구원의 열매를 얻을 순간을 기대하면서 잠깐의 고난을 참으라고 주장하는 신학적 성급함과 종교적 초조함을 물리쳐야 한다. 성토요일을 간과하고 부활절로 가는 것은 부활절의 의미조차 망실하게 한다. 성금요일과 부활절 사이, 중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성토요일에 그리스도는 지옥에 내려가신다(descent into hell). 고통의 독특한 측면을 드러내는 성토요일은 십자가의 관계에서만 해석될 수 없듯이 부활과의 관계 속에서만 해석될 수도 없다. 지옥에서의 하느님 경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너머에 있는 죽음 경험이다. 성토요일은 죽음 너머까지 미치는 고통에 관해 증언한다. 성자는 지옥에서 지옥의 심연에 있는 죽은 자들과 함께 죽었다. 지옥은 버려진 땅과 같은 곳이다. 지옥은 삶의 흔적이 없는 곳, 가능성도, 움직임도 없는 곳이다. 성자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수동적인 곳이다. 여기서 성자는 자신이 성부와 완전히 분리된 환상들, 그리고 만물이 하느님과 분리되는 환상들을 경험한다. 지옥의 정복과는 무관하게 지옥에는 적극적인 승리가 없다. 예수는 부활한 자로 지옥에 내려간 것이 아니라. 죽은 자로 지옥에 내려갔다. 십자가에서 경험한 죽음은 지옥까지 이어지며, 이는 성자의 사명과 하느님의 구원 모두에 대해 다른 해석을 드러낸다. 십자가의 죽음이 능동적 죽음과 수난의 경험이라면, 죽은 자로서 지옥에 내려간 성자의 경험은 수동적 수난으로서, 죽음의 풍경과 죄의 실상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낸다. 이것은 극도의 암흑이자 버려짐이며 소외이다. 성자는 그곳에서 겉으로만 버려진 모습으로 세상 죄를 감당한 것이 아니라. 몸소 지옥에 내려가 버려짐을 경험한다. 성금요일과 부활 주일 사이, 그 중간에서의 삶은 죽음에서 솟아나며, 그 삶 안에는 죽음을 계속 품고 있다. 그 중간은 죽음에서 삶으로 곧장 이어지는 길을 방해하고, 나머지, 혼돈, 지친 사랑, 졸졸 흐르는 무기력 등, 그 중간의 시공간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어휘들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죽음의 고통이 콸콸 흐르는 세상의 현실임을 응시하게 한다. 그러므로 발타자는 성토요일이 가진 독특한 진실이 있다면 바로 죽음이 남아 있다는 진실임을 강조한다. 수난과 부활을 설명하는 익숙한 논리 속에서 죽음을 해석한다면 죽음의 진실이 왜곡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 사이, 그곳에는 빛도, 생명도, 말도 없다. 단지 그리스도가 지옥으로 내려간 사건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고 승리한 자로 지옥에 내려가지 않았다. 죽음의 영역으로 내려간 그가 죄인들과 믿지 않는 이들 모두를 불러 모은 것도 아니었고, 죄인들의 사슬을 끊은 것도 아니었다. 그곳에는 승리도, 어떤 행동도 없다. 지옥에 내려간 성자는 죽은 자들 중 한 명이었다. 발타자는 구원에서 지옥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독특한 시각을 발전시키기 위해 지옥에서의 죽음이라는 어두움을 적나라하게 담은 모습을 포기하지 않는다. 2000년대 초반 <예술신학>, <기독교 미학>을 말했을 때 그것은 부르주아들의 신학이 아니냐는 비판이 거셌다. 예술신학은 부르주아, 부자, 권력자, 무늬와 흠과 결이 없는 매끈함을 추구하는 아름다움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분에게는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와 죽은 자로서 지옥에 내려가 죽은 자들과 함께 계신 성토요일은 <예술신학>이 꽃피는 땅이다. 성토요일의 미학은 인간이 경험하는 죽음이 강력한 실재임을 미친 듯 증언하는 일이다. 고통을 간과하는 공허한 부활절 선포보다는 아직 부활절 선포 없는 고통과의 연대가 부활의 작은 싹을 보듬고 있는 것이다. 발타자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지옥의 경험이 하느님의 비극이 아니라 하느님의 존재를 온전히 드러내는 하느님의 사랑 이야기라고 믿는다. 그러나 지옥의 심연까지 확장된 이 사랑은 늘 외치는 승리하는 사랑이 아니다. 지옥의 혼돈을 헤치고 길을 만들어내는 기진맥진한 사랑이다. 이 점이 성토요일의 신학에 대한 발타자의 기묘한 해석이다. 그리스도가 지옥으로 내려가신 사건에 대한 고백은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라는 부르심이며, 오늘날 곳곳에 숨겨져 있는 고난과 고통의 현장에 참여하며 연대하라는 부르심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리스도는 지옥을 지나 걸어가신다. 십자가에 달리신 이는 자기 상처를 통해 세상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죽음 이후의 공간에 계속 남아계신다. 그리스도는 길 없는 길을 따라 걸어가는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발자취를 남기지도 않고, 출구도, 시간도, 존재도 없는 지옥을 통과해 간다. 길, 진리, 생명, 길 없음, 말 없음, 출구 없음, 이것은 지옥의 길을 걸어가는 하느님의 연약한 모습이다. 성토요일은 균열, 단절, 쪼개짐이다. 예수는 지옥의 길을 걸었고, 그 결과 그는 우리가 딛고 걸어갈 길이 되었다. 성토요일은 파멸과 소생을 잇는 한가닥 실이다. 이 실은 죽음(성금요일)과 지옥(성토요일)이 가진 무시무시한 힘을 버텨낼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다. 죽음에서 부활로의 변화에 대해 발타자는 기도의 형태로 말한다. “지옥 구렁을 가로지르는 밧줄이 너무 짧기에, 우리는 둘을 연결시킬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이것을 하느님 손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하느님의 손가락만이 우리의 깨어진 조각들을 맞추어 온전한 모양을 이룰 것입니다.” 북음에서 생명의 부활로의 전환, 이것은 승리한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남은 사랑의 이야기에 대한 증언이다. 이 사랑은 모든 혈관이 터지고 낡은 세계가 소멸했을 때 마지막까지 쏟아져 나온 사랑, 이제 사랑 그 자체를 위해 아무것도 없는 암울함을 뚫고 성부를 향해 가는 길을 만들어 가는 성자의 그 사랑이 남긴 유산이다. 죽음에서 움직이는 것은 사랑이 남긴 지친 유산이며, 이것은 이제껏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새 창조를 향해, 무기력하게, 멍한 채로, 힘겹게 졸졸 흘러간다. 성토요일의 지친 사랑은 신학적으로 아름답고 힘차게 표현되어야 한다. 이것이 성토요일의 미학이 해야 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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