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이야기 2 -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 | 일본인 이야기 2
김시덕 (지은이)메디치미디어2020-11-25
종이책 페이지수 452쪽,
책소개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일본은 에도 시대 때 난학을 통해 유럽과의 끈을 놓지 않아 일찍 근대화되었고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우월했다며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과연 에도 시대는 진보의 시대였을까, 퇴보의 시대였을까. 이 책은 피지배민들의 삶의 방식을 들여다보며 에도 시대의 참모습을 파헤쳐본다.
목차
들어가며
서장 백성과 의사
농민의 삶과 고통을 치료해준 의사들
난학의 재평가
피지배민이 주인공인 역사를 쓸 수 있는가
과거제 없는 에도 시대
1장 백성들의 이야기
1 다시 닫힌 세계, 죽어가는 백성들
다시 한 번, 시마바라 봉기
권력에 저항한 불교 종파들
정치 실패의 결과로 찾아온 기근
피지배민들은 어떻게 정치 세력화했는가
예의 바른 농민 봉기
기근의 참상과 살기 위한 식인 행위
굶어 죽는 가족들
소나무껍질떡과 짚떡
막부가 자초한 인재
2 떠도는 사람들
실직한 무사와 닌자
47인의 사무라이
무사라면 개죽음이다
앞 못 보는 무사 자토이치
이 세상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서 재미있다
정치 전략과 참배와 댄싱 매니아
도시의 공기는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팔려가는 여성들
3 낙태, 영아 살해, 아이 버리기
모두가 결혼하는 사회는 언제 시작되었나
태어난 아이를 죽이는 마비키
그들은 왜 되돌아가야만 했는가
에도 시대의 출산 장려 정책
‘첫째는 딸, 둘째는 아들’
고물상, 출산을 돕는 기술을 개발하다
버려지는 아이들
쇼루이 아와레미노 레이
고아원을 만들다
2장 의사들의 이야기
1 가난한 백성들을 치료한 의사들
3백 년간의 퇴보와 난의학의 한계
에도 시대의 한의학
하고 싶은 공부가 있어서 의사가 되다
아프면 의사를 찾는 습관의 시작
사람은 죽지만 의학은 발전한다
후세방과 고의방
중화권과는 같고 한반도와는 다르다
백성들이 읽을 수 있게 가나로 집필한 의학서
임상의 중요성과 일본 의학의 민중화
한문을 읽지 못하는 의사들에 대한 비판
인기스타가 된 돌팔이 의사
무사이자 승려이자 의사이자 떠돌이
전쟁과 의학의 깊은 상관관계
모든 백성에게 동등한 치료를
난의학자, 천연두 치료법을 확산하다
2 선진 의학과 천연두
선진 의학이 꽃필 가능성이 꺾이다
의료로 이어진 유럽과 일본
번역과 쇄국론
일본의 파라켈수스
난학의 발전과 교호 개혁 시기
사형수들의 도움으로 해부학이 발전하다
<장지>와 <해체신서> 이전의 일본 해부학
인체 해부 실험의 물꼬를 트다
<해체신서>
천연두와 우두법
난의학이 해결하지 못한 질병, 콜레라
에도 시대 일본인의 참모습
등장인물
주석
참고문헌
찾아보기
접기
책속에서
P. 18 한국 내에는 에도 시대 일본을 조선과 비교하면서 일본이 난학을 통해 조선보다 빠르게 근대화되었다며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일본 안에도 있습니다.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처럼 유럽의 식민지가 되거나 조선과 대청제국처럼 유럽발의 정보에 둔감하지 않았고, 난학을 통해 유럽과 교류의 끈을 놓지 않았던 에도 시대 일본은 이미 그때부터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우월했다는 논리입니다. 이런 우월함이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이어져서 일본은 비유럽 국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제국이 되었다는 주장이 이에 뒤따릅니다. 접기
P. 23~24 난의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해부학 서적을 번역해서 새로운 세계관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해부와 외과 수술이 활발해질 수는 없습니다. 즉, 추상적 차원에서는 대항해 시대부터 시작된 중화 중심적 세계관에서의 탈피를 더욱 확고히 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 만인에게 큰 혜택을 주기에는 물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해부와 외과 수술에는 해부 기술과 도구, 약품 등이 필요합니다. 데지마에는 네덜란드인 의사가 있어서 외과 수술을 집도했고 일부 일본인 통역관에게 기술을 전수하기도 했지만, 이는 체계적인 의학 수업과는 거리가 멀었고, 데지마에 드나들 수 있는 일본인의 인원수에도 제한이 있었습니다. 접기
P. 97 피지배민이 저항할 가능성을 봉쇄한 무사 집단은 이제 거칠 것 없이 수탈을 시작합니다. 이들의 수탈은 주로 농촌으로 향했습니다. 무사 집단은 자신들의 정치적 거점인 3대 도시 에도, 오사, 교토나 각 번의 중심 도시에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책을 펼쳤고, 기근 때도 도시민이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정책을 베풀었습니다. 반면, 쌀을 생산하는 농민들은 평상시에도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식량만을 남기고 모두 세금으로 바쳐야 했기에 쌀을 비축해둘 여유가 많지 않았습니다. 접기
P. 201 이에 비해 에도 시대 일본에서 확인되는 마비키는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나는 노력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이제까지보다 더 잘살기 위해 선택하는 전략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각지의 다이묘들이나 지식인들은 농민들이 사치를 위해 마비키를 한다며 비판했고, 더 많은 아이를 낳아 길러서 더 많은 쌀을 생산하라고 다그쳤습니다. 물론 농민들이 그렇게 생산한 쌀은 영주들에게 바쳐지고, 잉여 집단인 무사나 지식인의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해 돈과 바꾸어졌을 것입니다. 접기
P. 367 지난 백수십 년 동안 일본과 서구권의 학자들은 <해체신서>의 번역 출판과 지볼트의 활동에서 난학이 탄생했고, 난학에서 일본의 이른바 성공적인 근대화가 시작되었다고 간주해왔습니다. 난학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한국에도 소개되어, 일본이 한반도나 중화권보다 앞서 근대화에 성공하고 제국주의 열간이 된 바탕에는 난학이 있다는 주장을 펼치는 분을 최근 자주 접합니다.
저도 난학, 특히 난의학의 중요성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처음 접한 유럽 지식은 네덜란드가 아니라 이베리아 반도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통해 들어왔습니다. 이베리아 반도 국가들과 일본의 국교가 단절된 뒤, 새로이 소개된 유럽 학문인 난의학은 한의학을 배척하고 소멸시키지 않았고, 오히려 한의학과 공존했습니다. 그리고 네더란드뿐 아니라 러시아도 에도 시대 일본에 큰 영향을 준 유럽 국가였습니다. 난학을 절대시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전체적 맥락 속에 네덜란드와 난학을 놓고 그 가능성과 한계를 모두 살펴야 에도 시대와 그 후의 일본 사회에 미친 난학의 진정한 영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접기
===
김시덕 (지은이)
김시덕(金時?) 문헌학자이자 서울 답사가. 1975년 서울 출생. 고려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의 국문학 연구자료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HK 교수. 16~20세기 동부 유라시아 지역의 전쟁사가 주 연구 분야로, 특히 임진왜란을 조선·명·일본 간 국제 전쟁으로 바라보는 작업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고문헌을 비롯한 다양한 자료에 근거해 전쟁이 동아시아에 미친 영향력을 살피고 역사의 흐름을 추적해왔다.일본에서 펴낸 박사학위논문 <이국 정벌 전기의 세계>는 2011년 외국인 최초로 ... 더보기
최근작 :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올컬러 특별판)>,<대서울의 길>,<일본, 한국을 상상하다> … 총 3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도쿠가와 막부가 지배한 약 250여 년간의 에도 시대. 에도, 오사카, 교토 같은 대도시에서는 경제와 문화, 학문이 꽃피며 급격한 인구 증가를 달성했다. 하지만 일본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지방의 농민들은 가혹한 세금과 자연재해, 정부의 인재(人災)로 고통받는 삶을 영위했다. 에도 시대의 참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 이 책에서는 그동안 에도 시대를 말할 때 부각되지 않았던 고단하게 살아간 백성들과 그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헌신한 의사들을 무대 위로 끌어올려 당시 피지배민들의 삶의 방식과 욕망을 조망해본다.
에도 시대는 진보의 시대였는가,
퇴보의 시대였는가
한국 내에는 에도 시대 일본을 조선과 비교하면서 일본이 난학을 통해 조선보다 빠르게 근대화되었다고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 내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에도 시대 일본은 그때부터 다른 아시아 국가들보다 우월했다는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정말로 에도 시대를 진보의 시대라고 말해도 괜찮을까? 도쿠가와 막부는 자신들의 정권 유지를 위해 대 유럽 쇄국 정책을 단행했고, 그 결과 센고쿠 시대까지만 해도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며 활동하던 일본인들의 무대는 한없이 좁아졌으며 거의 동시대적으로 유럽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던 일본 내 움직임은 맥이 끊겨 버리고 말았다. 유럽에서 수많은 사회적 격변을 거치며 의학, 과학 등이 발달할 때 그 흐름에 올라타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유럽과의 직접 교류와 무역이 막힌 폐쇄된 일본 사회에서 피지배민들은 병과 기근, 막부의 실책으로 죽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근대화의 발판이 되었다고 하는 난학이 백성들에게 실질적으로 가져다준 혜택은 우두법 정도밖에 없었다. 《일본인 이야기 2》에서 저자는 농민과 의사를 비롯한 피지배민들의 삶의 방식을 살펴보며 난학을 재평가하고 에도 시대는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였는지를 논한다.
에도 시대에 일본 대다수의 피지배민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폐쇄된 에도 시대의 일반 백성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았을까? 이 책은 그간 에도 시대를 말할 때 주로 언급되어온 대도시 도시민의 삶과 화려한 서민 문화보다는, 일본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지방 농민들의 고단한 삶에 초점을 맞춘다. 평생 농사에 종사해온 그들은 막부와 지방 정부의 실책과 자연재해로 인해 쌀 부족에 시달리면 봉기를 일으키기도 하고, 양육에 필요한 일손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자신의 갓난아기를 죽이기도 했다. 아이와 여성은 인신매매되거나 팔려가는 일이 흔했다. 쌀을 만드는 농민은 굶어 죽고 무사와 도시민은 굶어 죽지 않는 상황도 자주 생겼다. 센고쿠 시대와 달리 평화의 시대라 일컬어지던 에도 시대에 정치의 중심지가 아닌 지방에서는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일까? 《일본인 이야기 2》는 에도 시대에 극히 평범했던 백성들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한편으로, 역사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변두리에 머물러 있는 개개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의 의미를 탐구해본다.
밖으로도 갈 수 없고,
위로도 올라갈 수 없었던
피지배민들의 삶의 방식을 그려내다!
과거 제도가 없었던 에도 시대에 피지배민들이 입신양명하는 길은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일본인 이야기 2》에서는 한의학과 난학의 지식인들이 어떻게 의학을 발전시키고 의사로서 이름을 날리고 가난한 백성들을 치료했는지에 관해 이야기한다. 심지어 의사들은 한자를 못 읽는 백성들을 위해 일본의 문자인 가나로 의서를 집필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의학이 점차 민중화되는 과정 속에서 네덜란드 의학, 즉 난의학을 배운 의사들 중 이름을 날리는 이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일본에서 최초로 시체 해부를 하고, 《해체신서》라는 해부학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시중 백성들을 주기적으로 위협하곤 했던 전염병인 천연두를 예방하는 데 성공한다. 이 책은 천연두뿐만 아니라 각종 병과 난산을 치료하기 위해 궁리하는 의사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어느 시대에나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의료 종사자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그리고 저자는 난학이 천연두를 물리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그 외에 딱히 백성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가져다주었다고는 보기 힘들다고 설명한다. 해부학조차도 우두법만큼 확실히 일본인의 삶에 기여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 해부학 서적들이 출간되었다고 해서 당장 일본의 치료의 수준이 비약적으로 높아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부학, 우두법을 제외한 난학의 나머지 분야는 더욱 일천한 수준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약 도쿠가와 막부가 유럽과의 관계를 끊지 않고 이어갔다면, 일본 백성들은 유럽 의학과 과학의 혜택을 좀 더 일찍, 아마 백 년에서 2백 년 정도 앞서서 받았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은 이렇게 백성과 의사를 엮어, 일본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신분계급 사다리의 위로도 올라갈 수 없었던 피지배민들이 어떻게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러면서 난학이 일본 피지배민들에게 끼친 영향을 분석하고, 역사적으로 입증된 사실에 기반한 공정한 시각으로 난학과 그 한계를 재평가함으로써 그동안 평화와 번성의 시대로만 일컬어지던 에도 시대의 본질을 들여다본다. 접기
평점분포 9.6
구매자 (2)
전체 (5)
공감순
우연히 1권을 보고 팬이 되었다. 미시사 연구의 국내 대표적 학자. 다만 일본 미시사연구를넘어 국내 미시사연구 서적도 출판했으면 한다. 아주 재밌을듯. 난 김시덕 선생의 이 말에 아주 공감한다. ˝사회는 정치적 제도에 의해서 변하는게 아니라 코로나같은 충격에 의해 더 많이 변하는 것이다˝ 구매
펜실베니아 2020-11-07 공감 (6) 댓글 (0)
내용이 풍부해서 3집이 기다려집니다
다만 인쇄시 인용부분을 빨간색으로 했는데 잉크의 농도가 옅어서 보기에 힘이듭니다
3집부터는 인용시 빨간색 잉크는 피해주시고 인용을 위해서라면 진한 검정색으로 해주시면 보기 좋을듯 구매
lawart 2020-12-09 공감 (2) 댓글 (0)
마이리뷰
구매자 (0)
전체 (21)
에도시대 민중의 이야기
일본사를 떠올리면, 오다노부나가, 도요토미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대표되는 센코쿠 시대를 떠올린다. 『일본인 이야기1』의 표지만 보고 센코쿠시대부터 메이지 유신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책으로 오해했다. 일본 근대가 궁금했기에 『일본인 이야기2』부터 읽기 시작했다. 나의 예상과는 달리 이 책은 에도시대 민중의 삶에 대한 책이었다. 일본사 책들 중에서 일본인들이 쓴 책들은 상당히 읽기 힘들다. 일본인 인명을 외우기도 힘들고 지명들의 날립으로 읽으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김시덕이 쓴 책들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서술되었기에 믿고 읽었다. 일본 근대를 알고 싶어서 읽기 시작했지만, 에도시대 일본인들의 삶을 속속들이 알 수 있어 나름데로 재미있었다.
김시덕은 글을 시작하면서부터 자신이 지배층 위주의 역사 서술에서 탈피해서 민중의 삶을 들여다보는 역사서술을 하겠다고 선언한다. 그가 소개한 에도시대 민중의 삶은 상당히 고달팠다. 내가 가르치는 한 학생은 조선을 싫어한다. 조선이 임진왜란때 멸망했다면, 개항도 빨리되고 더 잘살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조선의 백성은 살기 힘들었기에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선의 백성들은 수탈을 당했고 양반들은 배불리 먹고 살았다는 잘못된 역사교육이 이러한 엉터리 역사관을 가진 학생을 만든 것이다.
일본 지배층들은 백성들이 죽기를 면할정도의 삶을 살도록 수탈했다. 일본사를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녀석은 일본은 모두 잘살았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설명을 해주어도 들으려하지 않는 녀석에게 이 책에 소개된 '마비키(영아살해)'를 들려주고 싶다. 18세기 일본인들 사이에서 한두명의 자녀만 남기고 모두 낳자 마자 마비키(영아살해)하는 풍속이 있었다. 동화 헨젤과 그래텔을 분석하면 흉년으로 먹을 것이 없어 자녀를 버리는 행위가 중세시기에 서양에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도 인구조절과 집안 생활향상을 위해서 냉혹하게 마비키를 행했다. 중국과 조선에서도 먹고 살기 힘든 가정에서 자녀를 버리거나 살해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단순히 흉년으로 인해서 먹고 살기 힘든 것만이 아니라, 집안 생활 향상을 위해서 마비키를 행했다.
냉혹한 일본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권이라는 개념이 근대의 발명품이라는 생각을 한다. 농업생산력이 낮고, 자연재해에 취약했던 과거에는 인권보다는 생존이 우선시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모습은 동양과 서양의 차이가 없고, 조선과 일본의 차이가 없다. 단지, 일본의 마비키는 더욱 냉혹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일본의 역사를 알면 알 수록, 일본인들의 냉혹함에 간담이 서늘할 때가 많다. 그중에 하나가 자국민을 노예로 팔어먹는 일본인의 모습이다. 어느 윤리 교사에게 그리스 로마시대의 노예는 결혼도 할 수 없었으며, 아무런 권리가 없었던데 비해서 조선의 노비는 달랐다고 설명했다. 즉, 외거노비는 결혼을 하고 재산을 축적해서 노비를 거느리기 까지했다. 물론, 재산을 모아 신분상승도했다. 특히 세종은 임신한 노비에게 출산휴가를 주도록 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윤리교사는 "에그 그래도 조선은 같은 동족을 노비로 말들었잔아"라고 반론을 펼쳤다. 그래서 "그럼, 다른 종족을 노예로 삼아도 되고, 같은 종족은 노예로 삼으면 안된다는 말인가요?"라고 반문하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전근대 시기에 인권이라는 개념이 자리잡지 못한 상황에서 노예와 노비 중에서 어느쪽의 삶이 더 나은가?라는 질문이 부질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센코쿠시대 일본에서는 상대편 영지의 백성을 노예로 팔아버리는 것이 일상이었다. 17세기 말까지 포르쿠갈 리스몬, 남아메리카 리마에서 일본인 노예의 흔적이 보인다. 임진왜란 시기 조선인 포로가 노예시장에 나타나자, 국제 노예값이 폭락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인 노예가 사라졌다면, 일본인 노예는 그 후에도 계속 국제시장에 출몰했다. 같은 일본인이라는 관념이 형성되지 않았고, 인권이라는 개념이 없었던 일본에서 이웃 영지의 백성을 노예로 파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김시덕은 책 표지에서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라고 에도시대를 규정한다. 그는 "퇴보"쪽에 힘을 실어 에도시대를 설명한다. 센코쿠시대 유럽과 교류하며 더 많은 발전을 하였으나, 에도막부가 쇄국정책을 추진하면서 이를 포기했다. 서양의학을 더 빨리 더 많이 들여올 수 있는 기회를 에도막부가 막아섰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누구를 위한 발전인가? 센코쿠시대보다 에도시대가 퇴보했다고 주장하기에는 센코쿠시대에 벌어졌던 수 많은 잔혹한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에도막부의 안정은 전쟁의 소멸로 이어졌다. 비록 서구의 문물이 늦게 일본에 들어왔다 할지라도 에도시대를 살았던 일본의 서민들에게는 센코쿠 시대보다는 에도시대가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저자 김시덕의 책은 쉽게 쓰여져 있는 것이 매력이다. 일본인이 쓴 일본사 책들을 읽으면서 이해도 못하면서 책장을 넘겼던 아픈 기억을 떠오른다. 반면, 김시덕의 책은 일본을 이해할 수 있는 고마운 책이다. 특히 일본 지배층 중심의 역사에서 벗어나서, 피지배층의 삶을 조망하고, 간간히 조선과 중국, 서양의 역사도 비교해서 서술한 점이 무척 흥미롭다. 미처 읽지 못한 '일본인 이야기1'도 읽어 보아야겠다.
ps. 에도막부의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를 '개쇼군'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많다. '살생금지령' 때문이다. 그러나 도쿠가와 쓰나요시는 개를 살생하지 말라는 명령만 내린 것이 아니라, 버려진 아이를 거두는 정책, 백정 즉, 히닌에게 쌀을 주는 정책, 죄수 복지에 관한 정책도 시행했다. 역사를 보고 싶은 것만 본다면, 제대로 과거를 알 수 없다. 이 책을 통해서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새로운 면을 알게 된 것도 커다란 수확이다.
- 접기
강나루 2021-07-21 공감(38) 댓글(25)
----
일본인 이야기 2 서평
전작 <일본인 이야기 1>은 가톨릭을 중심으로 전국시대 말기부터 도쿠가와 막부가 세워지는 시기까지를 다루었다. <일본인 이야기 2>는 도쿠가와 막부가 세워진 다음 시기, 즉 에도 시대를 다룬다. 시리즈 제2권의 부제는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이다. 이러한 부제가 붙은 이유는 1권 내용과 연결되어 있다. 1권은 16~17세기 가톨릭과의 접촉이 일본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발전시켰는지에 대해서 다루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가톨릭 세력을 탄압하며 가톨릭이 자랄 수 없게 아예 싹을 잘라버렸다(물론 그 와중에도 살아남은 아주 극소수의 카쿠레키리시탄들이 있었다). 1권은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오다 노부나가의 손자인 오다 히데노부의 포교 사례에서 보듯이 당시 일본 지배층 구석구석까지 가톨릭 신앙이 침투되어 있었던 상황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사 집단의 권력 독점을 위해 일본의 국가 성장을 멈추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일본인 이야기 1>, 393p)
이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저자는 “센고쿠 시대에 유럽과 동시대적으로 교류했던 일본은 자기 집안과 지배층의 정치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국가의 발전을 정지시키기로 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결정에 따라 갑자기 유럽과 단절했습니다. 여러 항구에서 유럽인들과 자유롭게 교류했던 때와 비교하면, 나가사키의 데지마와 정치 수도인 에도에서만 네덜란드와 교섭하게 된 변화는 발전이 아니라 퇴보입니다.”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책은 “네덜란드를 제외한 그 밖의 유럽 세력을 추방하고 유럽으로부터의 고립을 택한 일본이 어떻게 2백 년간 퇴보했으며, 지배층이 초래한 이 퇴보 상태에서 일본의 피지배민들이 어떤 움직임을 취했는가”라는 문제의식 하에서 에도 시대 일반 농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3권은 주로 난학의 군사학적 측면과 상인들의 이야기라고 한다)
에도 시대에 크게 주목을 끄는 요소 중 하나가 난학의 발달이다. 일본의 발전을 논할 때에 난학이 중요하게 거론된다. 그러나 저자 김시덕은 난학, 더 정확하게는 난의학은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다며, 실제 에도 시대에서 난학의 영향력은 극히 제한적이었음을 강조한다. 잠시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지리학 서적과 해부학 서적은 지적 차원에서 에도 시대의 일부 지식인에게야 도움이 되었겠지만, 실제로 백성의 삶을 더 낫게 만들었는가 하는 차원에서는 한계가 뚜렷했습니다. 지리학 서적을 읽거나 그 내용을 입에서 귀로 전해 들어서 해외의 정보가 백성들 사이에 퍼지기는 했어도, 막부가 원양 항해가 가능한 대형 선박을 만들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여전히 표류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난의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해부학 서적을 번역해서 새로운 세계관을 얻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해부와 외과 수술이 활발해질 수는 없습니다.”
기술의 발전이 수반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지식의 수용은 무용지물이다. 쇄국의 영향으로 가장 크게 질이 떨어진 분야가 의학이었다. 전국시대, 자선 정신과 유럽식 육아법을 바탕으로 세워진 고아원, 최신 수준을 자랑한 외과 수술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에도시대에 옛말이었다. 그런 와중에 난의학이 의학 발전에 영향을 미쳤지만, “에도 시대에 난의학이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한 병은 천연두” 정도였다. 난학이라는 새로운 지식은 실용적으로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 듯하다. 일본의 퇴보는 항해술에서도 발견된다. 위 인용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양 국가와 왕성한 교류를 펼쳤던 시대의 일본은 먼 바다까지 항해할 수 있는 배를 건조할 기술력을 갖추었다. 그러나 도쿠가와 막부가 출항을 엄격하게 금지하면서, 대형 선박 제조술은 로스트 테크놀로지가 되었다.
이처럼 도쿠가와 막부가 지배하던 에도 시대는 전체적으로 진보라기보다는 퇴보의 시대였다. 일본이 퇴보하게 된 데에는, 오직 지배층의 안정만을 중시했던 논리가 깔려있다. 앞서 말했듯이, 도쿠가와 막부는 정권에 위협 세력이 될 수 있는 가톨릭의 싹을 잘라 버리고 시작했는데, 비단 가톨릭뿐만이 아니라 조도신슈, 니치렌슈와 같은 “도쿠가와 막부라는 현실의 지배 체제보다 종교를 우위에 두는 모든 종교 체제를” 진압하면서 시작된 “군사 독재 정권”이었다.
이 책의 주요 주제는 바로 이러한 쇄국으로 인하여 “물질적 혜택, 특히 의료 혜택을 박탈당한” 에도 시대 피지배민의 이야기이다. 1장 ‘백성들의 이야기’는, 에도 시대 경제적 착취를 당하며 살았던, 지배층에 의해 저항의 논리를 빼앗겼음에도 저항하였던 농민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2장 ‘의사들의 이야기’는 평범한 사람들을 치료하는 에도 시대 의사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의술과 의학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그리고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의사들의 삶은 깊은 울림을 준다. 그리고 2장에서 쇄국 이후 쇠퇴한 일본 의학과 제한적이었던 난의학의 성과를 지적하면서, “퇴보의 기간 중에 괴로워하고 죽어간 사람들, 그리고 퇴보를 회복하기 위한 불필요한 노력”에 안타까워한다. 그가 난의학의 성과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네덜란드를 제외한 모든 유럽 국가와의 관계 단절을 선택함으로써 일어난 쇠퇴와 그 결과 피해를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씁쓸할 뿐이다.
<일본인 이야기>는 일본사 통사 책이 아니다. 중요한 부분을 선택하여 일본인의 참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책 뒷면 소개 문구를 인용하면, “그동안 에도 시대를 말할 때 부각되지 않았던” 역사를 부각하였다. 그래서 이 책만으로는 일본사나 에도 시대 전체상을 아는 데에 한계가 있다. 이러한 한계는, 이계황의 <일본근세사>(혜안)나 일본사학회의 <아틀라스 일본사>, 그리고 아사오 나오히로의 <새로 쓴 일본사> 등을 읽으며 채워나갈 수 있겠다.
여담. 1권 달리 2권에서는 참고문헌이 수록되어 있다. 1권에서는 후주만 달려 있었다. 아마 참고문헌도 넣어달라는 요청이 꽤 있었나 보다. 늘 흥미로운 책과 연구를 많이 소개해주니, 참고문헌이 생긴 것은 반길만한 소식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번 독서를 통해 얻은 소소한 수확은, 후쿠자와 유키치가 <문명론의 개략> 9장에서 비판하는 도쿠가와 시대 학문과 종교에서의 ‘권력의 편중’을 보다 잘 이해하게 된 것이다. 후쿠자와는 일본의 신도나 일본 학문, 특히 유학은 권력자와 지배층을 위한 학문과 종교였지, “독일개인(獨一個人)의 기상(individuality)”을 고취하지 못했다고 광범위한 비판을 날린다. 이는 복수의 중심 속에서 자유의 기상이 발달할 수 있었다는 그의 서양 문명 이해와 맞닿는 비판이다. 도쿠가와 막부는 저항의 가능성을 제거하면서 시작된 정부였다. 이렇게 싹 다 정리했으니, 남은 것은 위협적이지 않은, 다시 말해 체제에 순응적인 종교들 뿐이었을 터이다. “종교는 사람 마음의 내부에서 기능하는 것으로서, 가장 자유롭고 가장 독립적이며, 털끝만큼도 남의 제어를 받지 않고, 털끝만큼도 다른 힘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세상에 살아 있어야 마땅한데 우리 일본에서는 곧 그렇지 않다(<문명론 개략>, 소명출판).”라는 후쿠자와의 일본 종교 비판은 이러한 맥락 위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본 서평은 부흥 카페 서평 이벤트(https://cafe.naver.com/booheong)에 응하여 작성되었습니다."
- 접기
김민우 2020-11-15 공감(12) 댓글(0)
----
일본인 이야기 2
앞에서 유럽으로부터의 고립을 자초한 에도 시대 일본이 퇴보했다고 적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유럽이 전 세계에서 가장 치열하게 내부적으로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무한 전쟁을 위해 국가 체제를 혁신했으며, 혁신을 통해 이루어낸 역량을 유럽 바깥으로 발산해서 전 세계를 식민지화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9-)
하지만 로닌들이 사회 정세를 어지럽힌 최대 사건은 1702년에 발생한 아코 사건 , 즉 47인의 무사가 주군의 복수를 위해 적대자를 살해한 사건입니다. (-149-)
또 몇몇 난학자들이 네덜란드어를 번역한 임파선, 췌장, 쇄골, 인대, 신경, 동맥, 정맥, 정신착란, 혹성, 지평선, 원소,수소, 탄소, 질소, 원자,물질, 법칙, 시약, 용적, 연소, 산화, 환원, 온도 ,결정, 증류, 여과, 포화, 장치 같은 한자어 단어를 오늘날까지도 쓰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240-)
구리랴마 고안은 의사로서 직접 해부를 진행했기 때문에 남이 열어준 신체 내부를 관찰하기만 한 야마와키 도요보다 훨씬 많은 사실을 홗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확인했던 대표적인 장기가 췌장입니다. 췌장은 한의학의 오장육부설에 없고 서양의학서에서도 기술이 애매했기 때문에, 구리야마 고안은 췌장을 확인하고도 그것이 장기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후 <해체신서>가 번역되고 췌장의 존재가 알려진 뒤에 이루어진 도적 주베이의 사체해부에서는 그 장기가 췌장임이 확인되었습니다. (-350-)
저자 김시덕님은 고려대 일본어학과를 나와 일본의 국문학 연구자료관에서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본과 한국의 역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으며, 한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진 임진왜란에 대한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었다. 여기서 이 책 <일본인 이야기>는 기존의 일본 정사와 차별화하고 있었다. 그건 보편적인 일본사가 정사에 의존하였다면, 이 책은 일본인, 즉 일본에 살았던 서민의 관점에서 일본사를 엮어 나가고 있다. 특히 일본이 쇄국정책을 풀고 ,에도 시대에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의술이 발전한 일본은 동아시아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앞서 나가기 시작하였고, 그과정에서 일본의 과학기술은 높은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을 보듯,그들이 쉽게 서양에 자신의 나라를 문호개방을 한 것은 아니었다.전염병과 기근, 사무라이에 의해 조직된 테러,그러한 일본 사회의 여러 변수들이 스스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사회적 여건과 일맥상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에 자신의 나라의 문을 개방하였다.
<일본인 이야기 2>는 그중에서 일본의 난학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지금의 네덜란드를 화란국이라 부르던 때가 잇었다. 난학을 난의학이라고 하고 있으며, 네덜란드의 의술을 받아들인 일본은 그 과정에서 네덜란드 의학서 <해체신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한의학과 다른 난의학의 특징을 찾아나가고 있었다.하지만 난의학이 일본 사회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바로 일본 사회에 접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한의학 일색의 동양 의술을 가지고 환자의 병을 다루고 있었으며, 우리가 췌장이라 부르는 장기를 알게 된 것도 <해체시서>를 번역하고, 일본인들의 사체를 해부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성과였다. 즉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또다른 역사를 분석하고, 해체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사회적 모순,국가의 영향력, 더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가치와 역사를 병행하여 이해할 수 있었다.
- 접기
깐도리 2020-11-13 공감(7) 댓글(0)
Thanks to
공감
진보 혹은 퇴보의 시대 새창으로 보기
직장 생활을 하다 대학원으로 파견을 가게 되었다. 그때 지리학 강의 도중 한·중·일 삼국이 서양 학문을 받아들일 때 우리나라는 지리학을 제일 먼저 받아들였으며, 중국은 천문학, 일본은 해부학(의학)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다고 했다. 서양학자들이 우리나라에 지리학을 가장 먼저 소개한 이유는 중화사상 즉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교과서가 사민필지(지리)가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 이야기할 일본인들은 왜 해부학(의학)을 가장 먼저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그 기원은 난학에서 출발한다. 형장에서 인체를 처음 해부해 본 스기타 겐파쿠와 같은 의학자들은 인체구조가 중국의 의학서와는 달랐지만, 난학과는 일치하는 것을 보고 해체신서 등을 발간한다. 즉 난학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이처럼 이때까지 읽은 대부분의 책은 난학에 대해서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일본인 이야기 시리즈의 저자는 난학은 진보가 아니며, 퇴보였다는 다소 충격적인 글로 책을 시작한다.
난학에 대한 저자의 주장은 새로운 시각에서 작성된 것으로서 다소 수긍이 가는 부분도 있었다. 임진왜란 때의 일본, 에도시대의 일본. 이때의 일본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조선통신사 등의 내용과 달리 경제적으로 조선을 압도했으며, 특히 군사력에서는 명나라나 청나라 오스만 튀르크와 함께 세계 3대 강국으로 불릴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쇄국정책은 서양 전체가 아닌 네덜란드의 문물만 받아들였기에 이전에 비해 분명 제한적이었다. 그리고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는 부유했지만, 백성들의 삶은 굉장히 고달팠다. 조선에 비해 일본의 세율은 매우 높았으며, 봉건제 자체가 가지는 모순점도 컸다. 피지배 계층의 일본인의 인권은 매우 낮았으며, 어느 정도 계급이 되면 일반 백성을 함부로 죽일 수 있었다. 사쓰에이 전쟁도 영국인을 함부로 죽였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았는가. 이 책을 통해서 근대 이전 에도 시대의 일본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저자의 이야기를 모두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몇 가지 예로 마비키와 조선의 인권을 예로 들까 한다. 이는 갓난아이를 산채로 죽이는 풍습으로 일본에서는 성행했지, 다른 나라는 몰라도 조선에서는 성행했다고 보기 힘들다. 저자는 조선 시대 북방의 예를 들었으나, 조선시대 북방이 어떤 곳이었나? 삼남 지방의 천민이 강원도나 황해도 이북으로 이주하면 면천을 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벼슬까지 주었다. 그만큼 살기 힘든 곳이라 일반 백성은 가지 않으려고 했고, 도망친 사람들이 주로 가는 곳이었다. 조선은 경제력은 낮았으나, 환과고독으로 불리는 사회적 약자의 구휼에 최선을 다하는 나라였다. 그리고 조선의 천민들과 백성들의 인권은 지금보다는 낮았지만, 당시에는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조선 시대의 공노비의 출산휴가가 며칠인 줄 아는가? 100일로서 지금의 기준인 90일보다도 더 높은 수준이었다. 조선에서는 노동력을 제공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을 위해서 솔정(보호자)까지 부역을 면해주고, 기근이 들면 곡식을 내려주었다. 나이 80이 넘는 사람이라면 천민이라도 면천해주고, 벼슬을 주었다.
형조에서 전지하기를,
"경외공처(京外公處)의 비자(婢子:노비)가 아이를 낳으면 휴가를 백일 동안 주게 하고, 이를 일정한 규정으로 삼게 하라." 하였다.
傳旨刑曹 : 京外公處婢子産兒後, 給暇百日, 以爲恒式 (『世宗實錄』 1426년 4월 17일)
형조에 전교하기를,
"경외의 여종[婢子]이 아이를 배어 산삭(産朔)에 임한 자와 산후(産後) 1백 일 안에 있는 자는 사역(使役)을 시키지 말라 함은 일찍이 법으로 세웠으나, 그 남편에게는 전연 휴가를 주지 아니하고 그전대로 구실을 하게 하여 산모를 구호할 수 없게 되니, 한갓 부부(夫婦)가 서로 구원(救援)하는 뜻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이 때문에 혹 목숨을 잃는 일까지 있어 진실로 가엾다 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사역인(使役人)의 아내가 아이를 낳으면 그 남편도 만 30일 뒤에 구실을 하게 하라." 하였다.
敎刑曹: "京外婢子孕兒臨産朔與産後百日內, 勿令役使, 已曾立法。 其夫全不給暇, 仍令役使, 不得 救護, 非徒有乖於夫婦相救之意, 因此或致隕命, 誠爲可恤。 自今有役人之妻産兒, 則其夫滿三十日後役使。(『世宗實錄』 1434년 4월 26일)
그리고 조선의 천민들은 주인이 함부로 죽일 수 없었다. 자신의 노비를 함부로 죽이면 처벌을 받는 나라가 조선이었다.
최유원(崔有源)이란 사람이 그의 종을 때려서 죽였으므로 형조에 명하여 이를 국문(鞫問)하게 하고, 인하여 말하기를,
"형률에, ‘주인으로서 노예(奴隷)를 죽인 자는 죄가 없다. ’고 했으니, 이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분별을 엄하게 한 것이며, 또 ‘주인으로서 노비(奴婢)를 죽인 자는 장형(杖刑)을 받는다. ’고 했는데, 이는 사람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노비(奴婢)도 사람인즉 비록 죄가 있더라도 법에 따라 죄를 결정하지 않고, 사사로이 형벌을 혹독하게 하여 죽인 것은 실로 그 주인으로서 자애(慈愛) 무육(撫育)하는 인덕(仁德)에 어긋나니, 그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有崔有源者打殺其奴, 命刑曹鞫之, 仍曰: "律云: ‘主殺奴隷者, 無罪。’ 此則嚴上下之分也。 又云: 「主殺奴婢者, 服杖罪。」 此則重人命也。 奴婢亦人也, 不依法決罪, 而酷加刑杖以死, 實違其主慈愛撫育之仁, 不可不治其罪也。" (『世宗實錄』 1430년 12년 3월 24일)
학교에 다닐 때 배운 역사가 지금 보면 거짓인 것이 정말 많다. 앞서 말했듯이 조선통신사로 대표되는 조선의 앞선 문물은 거짓이었으나, 막장 수준으로 배웠던 조선의 인권은 오히려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후기의 사회 이미지는 기상이변으로 세계적으로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던 시기였음을 감안해야할 것이다. 이를 감안하고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 접기
천재폭발 2020-11-09 공감(2) 댓글(0)
Thanks to
공감
일본인 이야기 2 새창으로 보기
오늘날까지 형성된 일본인이라는 상식에 기대어 생각하여보면, 어쩌면 그 독특한 모습은 대부분 에도시대라 불리우는 긴 시간의 흐름속에서 형성되고 다져지며 또 (일부)계승되어진 결과라고 생각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일본어로 '에돗코' 라는 단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에 역사와 문학 그리고 대중매체를 통해서 보여지는 에도시대의 모습은 분명 옛 봉건제 속에서도 특이했던 것... 마치 지방분권적 행정 속에서도 보여진 '중심점'에 대한 자부심과 동경의 가치가 녹아있다.
실제로 당시 세계적 밀집도를 자랑하기까지 성장하는 에도의 모습은 오늘날 인구와 자본이 집중되어진 '수도'로서의 역활과 성장의 모습을 따른다. 때문에 그 속에서 보여지는 많은 사회적 모습과 함께 드러나는 문제점에 있어서도 어쩌면 그 많은 부분에 있어 도심지를 바라보는 시점에 서서 이해할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도시의 공기는 사람을 자유롭게 해준다" 라는 중세 독일의 격언처럼 에도 시대에도 도시의 공기는 사람을 자유롭게 만들었습니다. 그 자유의 대가로 위생적으로 문제가 있는 도시에서 건강을 잃는 것이였지만, 많은 피지배민은 가문과 마을의 전통에 얽매이며 농촌에 살기보다 건강을 잃더라도 자유롭게 사는 쪽을 택했습니다.
172쪽
다만 문제점은 오늘날의 도심지와 수도로서의 역활과는 사뭇 다른 '도쿠가와 막부'의 에도는 중세의 도심지로서, 보다 독특한 차이점이 드러난다는데 있다. 예를 들어 당시 건축술과 소재의 한계가 낳은 목조건물의 밀집은 화재에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다. 그렇기에 에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화재라는 재해(또는 인재) 에 고통을 받고 또 이를 예방하는 방법(또는 미신을 더한 믿음)을 만들어내었으며, 더욱이 본질적으로 개인적인 재산(물건)을 축척하지 않는 (대체로 서민들이 택한) 생활방식을 선호하게 된다.
또한 신분간의 차이가 만들어낸 거리와 마을... 그리고 그 와중의 교류와 질서를 만들어낸 일본의 예법은 또 어떠한가? 이처럼 천하의 안정을 낳은 신 막부의 체제 속에서 자리잡고, 또 성장하는 에도와 일본은 과연 과거와는 다른 어떠한 일본인을 만들어 내었을까? 어쩌면 이 책은 그 순간의 시대가 만들어낸 일본인의 단면을 진단하는 하나의 책이 되어줄 것이라는 감상을 만들어내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이 되어진다.
때문에 안정 속에서 번영하는 도시, 그러나 막상 그 속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에도의 도심지와 그 밖의 지방의 봉토... 중심과 외곽이 만들어낸 차이 뿐만이 아닌, 체제의 한계가 만들어낸 빈곤의 모습 또한 눈에 들어온다. 그 뿐인가? 여느 화려함과 활기를 상징하는 (중앙) 문화의 이면에서, 발생한 '시마바라의 난' 과 같은 대규모 반란 사건이 일어나는 이유를 따지고 보면, 역시나 도쿠가와 막부가 선택한 '통치'와 '통제'가 어느 사회 공동체에 큰 부담과 불공정함으로 드리웠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어느 체제가 형성되고 또 전통의 이름으로 다져지기까지 에도는 커다란 통치에서 세세한 질서유지에 이르는 많은 부분에서의 '메뉴얼'을 완성시키는 중심이 되어왔다. 여느 영주와 사무라이의 삶의 방식, 백성으로서의 삶의 방식... 그리고 그 한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자들이 선택한 전문가로서의 길' 이 만들어낸 의학과 상업 그밖의 다양한 발전사가 눈에 들어오게 되기까지! 이처럼 비록 한 시대의 '에도'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 순간의 빛과 어둠에 대한 보다 리얼한 역사를 마주 할 수 있다는 점에 있어서, 나는 이전과 이후의 (역사)서술에 대해서도 큰 기대를 품게 되었다.
- 접기
No comments:
Post a Comment
Note: Only a member of this blog may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