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병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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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전쟁(抗日義兵戰爭, 영어: anti-Japanese movement)[1]은 일본 제국에 항거하는 의병전쟁이다. 동학농민운동에서 시작하여 일본의 국권 침탈에 반대하여 을사의병(乙巳義兵), 정미의병(丁未義兵)으로 이어졌고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 이후 항일무장독립운동 세력의 근간이 되었다.
| 구분 | 시기 | 계기 | 의병장 | 특징 |
|---|---|---|---|---|
| 갑오 · 을미의병 | 1895~1896 | 을미사변, 단발령 | 유인석, 이소응, 허위 | 동학 농민군 잔여 세력 가담 |
| 을사의병 | 1905~1907 | 을사 조약 체결 |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 | 평민 의병장의 출현과 활동 |
| 정미의병 | 1907~1910 | 고종 퇴위, 군대 해산 | 이인영, 홍범도 | 해산 군인 합류→의병 전쟁 |
해설[편집]
우리역사넷[편집]
일제의 주권 침탈에 대해 각계각층에서는 일제와 을사 5적을 규탄하고, 조약 폐기를 위해 다양한 형태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안중근은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사살하였고, 장인환과 전명운은 외교 고문이었던 스티븐스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하는 등 격렬히 저항하였다.[2]의병 전쟁도 을사조약을 계기로 확산되었다. 이 때, 민종식, 최익현 등 양반 출신 의병장을 비롯하여,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의 활약이 두드러졌다.[2]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 항쟁은 한층 고양되었다. 해산 군인이 합류하면서 의병의 전투력이 강화되고, 활동 영역도 간도와 연해주 등 국외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규군의 화력에 비해 열세였고, 의병을 주도한 양반 유생층과 평민 의병과의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2]
의병은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13도 창의군을 결성하고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으나, 실패하고 말았다(1908). 이를 계기로 의병은 소규모 유격전을 전개하였고, 일부는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군이 되었다.[2]
의병 전쟁은 외세의 침략에 대항한 대표적인 구국 운동이었다. 민족의 강인한 저항 정신을 표출하였다는 점과 국권 회복을 위한 무장 투쟁을 전개하여 일제하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의 기반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2]
한편, 여러 종류의 사회단체도 설립되어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초기에는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좌절시킨 보안회와 입헌 정치 체제의 수립을 목적으로 설립된 헌정 연구회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을사조약 이후에는 대한 자강회와 대한 협회, 신민회 등의 단체들이 국권 회복을 위한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2]
이 중에서 신민회는 국권 회복과 공화 정치 체제의 국민 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은 비밀 조직이었다. 신민회는 국내에서 문화적, 경제적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면서 점차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의 건설 등 군사적 실력 양성을 꾀하였으나, 105인 사건으로 해체되었다.[2][3]
의의[편집]
집권층이 부패하고 무능한 상태에서 외세가 침략하여 국가와 민족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분연히 일어난 구국 운동의 대표적 형태였고, 민족의 강인한 저항 정신을 표출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더 나아가 의병 전쟁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무장 투쟁을 주도했다.
일제 식민지 체제 아래에서 항일 무장 독립 투쟁의 기반을 마련하여 항일 민족 운동사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의병 전쟁은 국제적으로도 의의가 크며 20세기 초 많은 약소국들이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고통스러워 할때, 일제 침략에 대항하여 무장 투쟁을 전개한 의병 전쟁은 세계 약소 민족 독립 운동사에서도 커다란 의의를 가지는 일이였다.
갑오 · 을미의병[편집]
동학농민운동의 세력을 기반으로 하여 1895년 처음으로 의병이 일어났다(을미의병). 을미의병(乙未義兵)은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게 시해 당한 것(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에 항거하여 충청도 유성에서 문석봉의 유성의병에 의해 발생하였다. 이때의 의병들을 거느린 의병장은 유인석과 이소응이 대표적이며 이들은 유학자를 중심으로 일반 농민들까지 그 구성이 다양하였다. 지방의 도시를 공략하여 친일 관리와 일본인을 처단하였다. 고종의 해산 권고 조칙으로 자진해산하였다.[4]
을사의병[편집]
이후 1905년에 일본의 강압에 의한 을사조약(乙巳條約)에 대해 최익현, 민종식, 신돌석 등이 주축이 되어 을사의병이 일어났다. 을사의병(乙巳義兵)은 평민 출신의 의병장인 신돌석과 그동안 참여하지 못한 유생과 지사들이 대거 가담한 의병이었으나,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패해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정미의병[편집]
1907년 의병이 일어나는데 이를 정미의병이라 한다. 정미의병(丁未義兵)은 일제에 의한 고종의 강제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령에 반발하여 일어났다. 정미의병은 해산 군인들이 합세하여 일어났으므로, 그 파급력이 거대했다. 또한 이인영은 13도의 의병을 통합해 서울 진공 작전을 계획하고 각 대사관에 국제 교전 단체로 인정해줄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 진공 작전은 이인영의 부친상 때문에 해산하였다. 이후 경술국치(1910년)까지 의병이 지속되었으나,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만주지방 등지로 그 활동무대를 옮겨 항일무장독립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정미7조약은 조약문에서 보듯이 입법·행정(2조)·사법(3조)·관리임명(5조) 등 통치권 전반에 걸친 탈취행위였고 2년 전에 강제체결된 을사 5조약을 한층 강화하여 대한제국의 나머지 주권마저 박탈하는 조약이었다.[5][6]
참고 문헌[편집]
각주[편집]
- ↑ 국권회복운동 (1999년 12월 22일). “항일의병전쟁” (PDF). 《국사편찬위원회》. 2022년 1월 10일에 확인함.
-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해설 인용
- ↑ 국사편찬위원회. “항일 의병 전쟁과 애국 계몽 운동”. 《우리역사넷》. 2022년 1월 9일에 확인함.
- ↑ 국사편찬위원회 (1999년 12월 22일). “항일의병전쟁 - 갑오·을미의병”. 《우리역사넷》. 2022년 1월 10일에 확인함.
- ↑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907년, 往電.
- ↑ 국사편찬위원회 (1999년 12월 22일). “정미의병”. 《우리역사넷》. 2022년 1월 10일에 확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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