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명읽는사람·독서가
2023/02/07
[지록위마의 시대, 윤석열 정부를 평하다] - 4-1편 반론 :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정치+3노동/인권/사회+14사상/철학/역사+9
길게 글을 적었는데 좋아요만 눌리고 아무도 댓글이나 이어지는 글을 달지 않아서 많이 걱정하던 상황에 반갑게도 질문하는 글이 들어왔습니다.
https://alook.so/posts/eVtRzxe
사실 김영빈씨께서 이후에 제가 제기할 논점 중 하나를 '미리' 꺼내버리셨습니다. 다음 연재글의 주제는 공론장 혹은 의회정치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이었는데 전제주의에 대한 질문을 통해 그 부분에 대한 해명을 제기하셔서 재밌었습니다. 다만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진의 자체는 그다지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은 듯해서 고민이 됩니다. 간략하게만 답하겠습니다만 제가 이 연재글들을 통해서 해명하고자 하는 것은 "자발성"입니다.
1. 용어 조작의 어려움에 관하여
먼저 1의 논점인 한국 정당의 사당화(私黨化)가 심해졌는가에 대해서는 질문하신 의도와 맥락에 대해서는 십분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저도 이 글을 쓰는데 있어서 '사당화(私黨化)'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당화라는 표현 자체는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의미와 학술적으로 사용하는 의미가 중첩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애매한 측면이 있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사당화를 평가해야 할지가 애매한 것이지요.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보통 우리가 '삼김시대(三金時代)'라 지칭하는 보스정치가 횡행하는데 있어서 문제시했던 것은 결국 공천권(公薦權)입니다. 조직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돈줄과 인사권, 이렇게 2개만 꽉 쥐고 있어도 충분합니다. 자기 사람을 정당 조직 내부에 심어넣을 수 있을뿐만 아니라 정당의 이름으로 선거에 출마할 수 있게 정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힘입니다. 이런 힘을 장악하고 있다면 정당의 지도자는 굳이 정당 내부에 공식적인 직함을 갖지 않고도 막후에서 당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삼김정치'라는 게 무서웠던 이유는 강준만이 어디선가 지적했듯이 '지역주의'를 통해 굳이 공천권을 지니지 않았더라도, 그리고 설사 누군가를 당선시킬 힘까지는 갖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누군가를 '확실히' 떨어뜨릴 힘까지는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학술적인 의미에서 사당화라 할 때는 보통 공천권을 지도부가 독점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행사를 비밀리에 '소수의 정치적 지도자들'이 논의하여 결정할 뿐만 아니라 사실상 '당원 민주주의'에 의한 공천과정을 특정한 개인의 의사에 따라 결정하는 '사천(私薦)'으로 대체한 상황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과거 보스정치에 비해 정치적 지도자 개인이 모든 공천권을 장악하고 행사하는데 있어서 전에 비해 규제나 제한이 많이 이뤄진 것은 분명합니다. 이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자 하는 생각은 없습니다.
출처 : https://www.donga.com/news/Politics/article/all/20221227/117169600/1오히려 제가 지적하고 싶은 점은 사당화의 형태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와 같이 비밀리에 소수의 정치적 지도자가 공천권을 장악하고 행사하던 보스정치와 달리 어느 순간부터 한국 정당들은 당원보다도 대중정당을 지향하며 당 외부의 사람들이 투표를 통해 후보자를 선출하는 방식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넷 투표와 현장투표 각각에 어느정도의 가중치를 둘 것인지를 놓고 지난한 논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민주당의 경우 대의원, 권리당원의 투표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국민참여경선'을 거쳐 '완전국민경선제(完全國民競選制) 또는 오픈 프라이머리(Open primary)'로 방향을 틀었고 안철수 또한 100% 국민경선제로 치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작년부터 주장해왔습니다.이런 의미에서 당대표의 공천권을 제한했을뿐만 아니라 사실상 '박탈'해버린 현행의 제도적 조건 속에서 과거 삼김시대와 같은 보스정치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미 현실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대중들의 '여론'에 기초한 '팬클럽 정치'가 정당 내부의 자율성을 제거하고 사실상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적 지도자'들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정당을 바꿔놓았습니다. 한국의 당원 중심의 '정당민주주의'의 미진함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연구들은 넘칠 정도로 많기 때문에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정당 내부의 공천권이 개방됨으로써 보다 공개적이고 개방적이며 심지어 '민주적'이기까지 한 '완전국민경선제'를 보고 있습니다만 그 내부에는 포퓰리즘에 따른 권력의 집중화 현상, 공천권을 직접적으로 행상하지 않고 "자발성"에 기초해서 권력 행사를 하는 정치를 보고 있습니다. 이것을 계량화한 지표로 어느정도로 차이점을 드러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이고, 오히려 거기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고 봅니다.
출처 : 정태일, "3김정치 전후 한국정치의 비판적 검토"에서 인용.또 다른 예로는 2004년 이후의 한국 정치의 집권여당들이 대부분 대통령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정당의 명칭이 대단히 빈번하게 바뀌었다는 현실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표는 정태일의 "3김정치 전후 한국정치의 비판적 검토"에 실린 <그림9>를 인용한 것입니다. 이 표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3김정치 이후 집권정당은 재임 대통령의 임기말이나 신임 대통령의 임기 초에 당명 변경내지 재창당을 통해 '대통령을 뒷받침하는 정당'으로서만 존재해왔지, 그 자체의 어떤 독자성 및 자립성을 갖추었다 보기는 어렵습니다.
출처 : https://imnews.imbc.com/replay/2023/nwdesk/article/6452141_36199.html윤석열 대통령도 이런 입장에서 여전히 정당을 자신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해주는 '수단'으로써만 다루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가지의 사례만 들었지만 기본적으로 이러한 현상을 앞의 3김시대의 보스정치와 구별하여 명명한다면 뭐라 해야 좋을까요? 개인적으로 고민을 해보았지만 여전히 정당을 '수단'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적 지도자의 사당화(私黨化)"라 표현했습니다. 굳이 "정치지도자"의 사당화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현상이 일종의 '구조'적인 것으로 3김과 같은 특정한 "개인"과 얽혀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치지도자 개인은 계속해서 교체되겠지만 누가 되었든 정치적 지도자가 되는 순간 그에 대한 지지와 정당의 지원이 뒷받침되는 어떤 구조적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본문에서 아래와 같이 문재인과 대립하던 이재명도 당대표에 선출되자마자 곧바로 정당과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다는 측면에 대해 논한 것입니다."또한 문재인과의 경선 과정에서 '혜경궁 김씨 의혹' 등의 다양한 문제를 드러내며 친문 세력의 비토를 받았던 이재명이 대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확고한 대선후보이자 지도자로 별다른 반발 없이 안착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정치적 대립의 조성과 그에 따른 정치지도자로의 권력 집중 현상이 얼마나 순조롭게 이뤄지는지를 알 수 있다."(출처 : https://alook.so/posts/w9tnZVk)
분명 정당제도는 보다 공개적이고 과정 또한 투명해졌고 개방적이며 민주적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속의 내용을 보면 개선된 지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당내 민주주의는 나날이 쇠퇴했습니다. 이 모든 현상은 '단점정부'로의 귀착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정당이 정당조직으로서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정치적 지도자를 뒷받침하는 '제도적 기구'로 전락하게 되어버린 것이지요.
지표로는 이러한 상황을 정확하게 캐치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오히려 질적 연구와 함께 수행되어 보완해야 한다고 보입니다. 그러한 예들이 많지만 한 가지만 꼽자면 한국정치학회 KPSA가 집단연구로 수행한 "생활정치 활성화와 정당민주주의"가 이러한 논의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참고해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지구당 폐지, 유권자의 정당조직에 대한 저신뢰, 당원의 참여활동의 저조 현상, 후원회의 문제, 유튜브 및 팟캐스트 등의 대안언론매체의 '정치개인화' 현상 등등의 문제들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이러한 현상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사당화(私黨化)라는 표현이 완전히 적절하지 않다고는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위에서 다루었던 현상을 논하는데 있어 사당화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의 사당화는 삼김시대의 보스정치와 마찬가지로 개인에게 얽매여 있지 않고 오히려 진화하여 일종의 '제도화'가 되었다는 점에서 좀더 나아간 측면이 있을텐데, 그것까지 포함하는 개념어로는 무엇이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자발성'을 더 드러낼 수 있는 개념어가 필요해 보입니다.
2. 역사적 유비가 아니라 사회유형으로서의 전제주의
1의 맥락과도 마찬가지의 의미에서 '전제주의(專制主義)'라는 용어는 어떠한 가치평가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얘기를 잠시 하자면, 제가 주변의 좌파 혹은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자본주의가 망한다는 얘기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국의 좌파들은 1970~80년대 무렵에 이미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너무나도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기에 그들의 역사관과 세계관에서 한국 자본주의의 자립화와 선진화를 설명해낼 계기를 끄집어내기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과거 좌파였던 이들이 대규모로 전향해 뉴라이트라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사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저는 자본주의도 그렇거니와 한국의 발전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잘 내리려 하지 않습니다.
부정적으로 평가하더라도 현재의 한국의 선진국화 현상을 설명하는 차원에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본적으로 한국의 민주주의가 나름 공고해졌으며 일견 선진국의 그것에 비견될 수준으로까지, 적어도 지표에 있어서는 도달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정말로 지향하던 민주주의인가에 대해서는 아마 대부분의 인사들이 부정적인 답변을 내놓을 것입니다. 정치적 양극화, 대립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언급한 연구들에서도 자주 지적되기에 생략하겠습니다.
"일찍이 헤겔이 <역사철학강의>(김종호 역, 삼성출판사, 1992)에서 아시아 사회에서는 오로지 전제군주만 자유롭다고 했을 때 아시아의 여러 학자들은 하나같이 아시아적 전제군주는 유교적 윤리든 뭐든 계속해서 신하들에게 견제받기 때문에 그는 결코 자유롭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헤겔이 말한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헤겔의 말처럼 전제군주는 "혼자"만 자유롭다. 왜냐하면 모든 이들이 전제군주에 의탁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게 짜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중국사, 한국사 등의 연구자들은 전제군주에 대한 견제가 근대의회 못지 않게 강력했다, 권력남용이 어려웠다, 전제적인 지배가 이뤄지지 않았다 등의 주장을 하지만 헤겔은 그것 자체가 부자유의 상태, 노예의 평등, 노예의 자유라고 보았다. 헤겔을 비판하며 아시아 연구자들이 말한 전제군주에 대한 규제는 유럽에서 나타난 근대사회처럼 국가와 개인의 자유가 일치되지를 못하기 때문에 온갖 도덕적, 제도적 규제를 통해 국가(=전제군주)를 제한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군주 아래 노예들의 평등을 누리면서 저 전제군주만 견제하면 자유로워 질 수 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사실상 반대로 전제군주 하나만 자유로운, 만인이 노예적 상태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출처 : https://alook.so/posts/w9tnZVk)
굳이 헤겔의 역사철학강의를 언급하며 전제주의에 대해 이리 설명한 것은 아래의 인용문과 같은 '오해'를 미리 견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자신이 노예인지도 모르는 '자발적인 노예 상태'을 해명하는데 있어 헤겔의 개념은 상당히 중요한 준거점을 제공해줍니다.
"한국의 정치체제의 반민주성, 반자유성이 너무 지나쳐서 (최소한 현재 문제되는 필리핀, 폴란드, 헝가리 급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도저히 칭할 수 없는 수준이면, 한국 정치의 병폐와 더해서 전제주의로 칭하는 게 적합할 수 있습니다." (출처 : https://alook.so/posts/eVtRzxe)
다시 말해서 '전제주의'라는 표현은 반反민주성, 반反자유성이 "지나치다"는 현상을 지적하려 만든 표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굳이 전제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권위주의라든지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라든지 아니면 말씀하신 위임민주주의라는 개념도 이미 존재합니다. 위임민주주의는 본문에서 언급한, '관료적 권위주의'를 개념화한 오도넬이 주조한 개념으로 1974년 이후 제3의 민주화 물결 속에서 나타난 신생국가들의 대통령제 민주주의가 온전한 의미의 대표제라 보기도 그렇다고 권위주의라고 보기도 어려운 상태에 놓인 것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 민주주의의 선진화를 지적하면서 위임 민주주의 개념의 적용을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다소 맞지 않습니다. 한국은 제3의 민주화 물결에 속하는 국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앞서 있기 때문입니다. 오랜기간 결함있는 민주주의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거기에는 트럼프 정부기의 미국 등의 선진사회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너무 층위가 넓은 듯합니다.
보나파르티즘을 지적하신 건 반갑지만 저는 보나파르티즘은 행정부 수반이 의회를 우회하여 대중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상당히 넓은 의미의 범주를 포함하는 개념어로 보고 있기에 보나파르티즘의 하위 유형으로 전제주의를 설정하지, 전제주의를 보나파르티즘으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보나파르티즘은 파시즘부터 시작해서 권위주의,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 푸틴주의, 시진핑주의, 대중 포퓰리즘 등의 광범위한 '근대적 독재'를 포괄하는 개념어입니다. 전제주의가 보나파르티즘의 하위 유형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개념을 만들고 사용하는 저조차도 아직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앞서 정당구조의 개방, 공개 등을 통해 공천과정에서 보다 투명해지고, 보다 공개적이게 되었으며, 민주성까지 갖췄다지만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후퇴하였다는 '역설'을 지적한 바와 같은 의미에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국가와 개인의 중간영역으로서의 '시민사회'에 속하는 정당의 자율성과 독립성 등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점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전제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가자면 전제주의를 흔히 권력자의 자의적이고 무제한적인 권력 행사로 오해해서는 곤란합니다. 오항녕의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2010)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그리고 앞서 인용문에서 "아시아의 여러 학자들은 하나같이 아시아적 전제군주는 유교적 윤리든 뭐든 계속해서 신하들에게 견제받기 때문에 그는 결코 자유롭지 않았다고 반박했다."다고 했듯이 전근대 전제군주는, 특히 유교적인 전제군주는 사족들에 의한 다양한 견제장치들이 존재했습니다. 그것을 역사학자 오항녕은 '문치주의(文治主義)'라 표현합니다. 실상 중국의 송왕조 이후의 유교화된 지역들은 대부분 언관, 사관 등의 언론매체의 성격을 지닌 국가기구들에 의해, 그리고 민간의 사족들에 의해 전제군주가 끊임없이 견제당하며 그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어렵게 만든 '정치문화'를 지니고 있습니다. 민중사 연구로까지 확장되는 이 유교적 정치문화론은 박훈의 사대부화 현상, 조경달의 유교적 정치문화론 등으로 많은 연구가 이뤄진 분야입니다. 즉, 전제주의라 해서 무조건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게 아니라 일정한 견제장치가 존재하는거죠.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습니다. 서구적인 의미의 '제도화'가 되지 않았어도 정치적 지도자의 '자의성'을 문치주의를 통해 견제해왔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언론의 자유 등이 대단히 폭넓게 보장된 문치주의는 현대에도 적용될 수 있겠고, 언론의 자유지수가 높다고 해서 문제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헤겔이 이것을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이미 18세기 여러 유럽인들은 유교적 전제군주를 계몽군주제의 표상으로 보며 찬양하기도 했고, 전제군주 아래 만인이 평등한 상태에 놓여 있는 아시아 사회의 '선진성'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헤겔도 그런 조류를 알고 그렇기에 헤겔은 그러한 중국인들의 평등성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노예의 자유"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갈했던 것이고, 마르크스 또한 '총체적 노예제'라는 표현으로 아시아 전제국가를 묘사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이건 개인과 국가 간의 '통일성'에 의존하여 자유가 확대되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전제군주에 사회 전체가 의존하는 '총체적 노예' 관계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시아 사회의 특질을 해명하기 위해 19세기 유럽 지식인들은 사회유형을 아시아형과 유럽형으로 나눠서 분석하였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것을 보다 세밀하고 체계화하여 제시하였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중국사 연구자인 칼 비트포겔(Karl A. Wittfogel) 이래 체계화되어 사회유형론으로 최근까지 강력한 지적 흐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아래의 링크글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중국은 전제국가인가? 중국을 전제국가라 말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하여! : 아다치 게이지의 <중국의 전제, 일본의 봉건>(박훈 역, 빈서재, 2023) 서평글"
출처 : https://contents.premium.naver.com/historia9110/historia91/contents/230114025200047xjhttps://contents.premium.naver.com/historia9110/historia91/contents/230114025200047xj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사회유형으로서의 전제국가'론은 아시아에 대한 '멸시'를 드러낼 수 있는 어떠한 정치적 "위험성"이 존재합니다. 그것을 경계할 필요는 있지만 사회유형으로서의 전제국가론은 나름 많은 부분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개인과 국가 사이에 중간적 영역으로서의 '(사회)공동체'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유형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전제국가는, 박훈은 이것을 '군현사회'라 표현합니다만, 이전의 글에서 그리고 이 글에서도 지적했듯이 사회적 중간단체들의 독자성과 자율성을 형해화하고 '익명'의 개인이 아무렇게나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는 단체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보통 기득권, 특권 등이라 매도하며 중간영역의 자율성을 박탈해버리지요. 유럽과 일본은 전근대 봉건제 사회 하에 이러한 사회적 중간단체로서의 공동체가 광범위하게 존재했던 사회입니다.
이렇게만 말하면 또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 사는 게 다 비슷비슷합니다. 전근대 아시아 사회라 해서 공동체가 없는 것도, 개인이 없는 것도 아니었듯이 대체로 서로 의존하여 무리를 이루고 산다는 의미에서 전근대 사회 어느 곳에서나 '공동체'가 존재했고, '개인'도 존재했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의 논의에서 '전근대' 공동체라 하는 것은 보통 5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시켰을 때를 의미합니다. 어떤 '인적인 결합체'가 공동체로 규정되기 위해서는 1) 구성원 간의 '평등성'. 구성원 상호 간에 권리의무의 일정한 차별은 존재할 수 있어도 한 개인이 타인을 신분적으로 지배해서는 안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유럽의 봉건영주조차도 공동체의 한 구성원에 불과했습니다. 2) 가입, 탈퇴의 불가능성. 1)의 전제조건을 전제로 '인적인 결합체'가 자발적인 가입의사와 무관하게 생득적으로 강한 귀속의식을 느끼는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3) 단체의 법인격성. 이 귀속의식을 전제로 하여 인적 결합체는 하나의 독자적인 권위체 혹은 '법인격'으로서 성립해야 합니다. 4) 공동체 존속을 위한 물적 토대로서의 공동의 재산과 그것이 공동체 구성원의 삶과 연결되어 특정한 기능을 수행해야 합니다. 5) 이 공동기능의 존재와 수행이 필수적입니다. 이렇게 해야 하나의 공동체로서 자립적이고 독립적인 영역으로서 국가조차 함부로 개입하여 해체시키거나 개인이 함부로 이탈, 유입되어 공동체를 형해화하지 못합니다. 이런 조건 위에서만 인적인 결합체가 '공동체'로 규정될 수 있고 유럽 및 일본은 그러한 공동체들이 다수 존속하며 근대국가로 이행했습니다.
너무 엄격한 개념규정인 듯하지만 어찌됐든 핵심은 공동체가 국가와 그리고 개별적인 개인으로부터도 독립하여 자신만의 독자적인 질서를 형성하고 그에 따라 공동체 구성원들을 규율하며, 하나의 집단이라는 귀속의식과 경제적인 토대에 기초해 재생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입-탈퇴의 불가능성만 제외한다면 근대적 공동체도 대체로 이러한 개념규정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근대적 대표제란 이러한 복수의 공동체들, 시민사회의 영역에 기초하여 확장되어 갑니다. 과연 이러한 의미의 공동체가 한국에 존재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오히려 그런 공동체가 생길 여지마저 없애버리는 게 한국 사회의 특질입니다. 이런 사회에서의 정치가 어떠한 형태로 이뤄질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 해명하고자 하는 게 이 연재글의 목표입니다. 전제주의라는 용어는 그런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선진화와 무조건적으로 배치되지 않습니다. 그것의 선진화를 보면서도 그 한계점을 비판하기 위한 개념틀이라 보시면 될 듯합니다.
3. 결론을 대신하여
개인적으로 몇년째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역사이론에 관한 연구서 하나 출간 준비중인데 그 원고를 쓸 때만 하더라도 이러한 전제주의적인 특질은 '정상적'인 근대사회의 전개 속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전근대 전제주의는 근대화된 현대의 한국 사회에서 나타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박근혜 이후의 문재인, 윤석열 등의 정치를 보면 과연 전제주의가 사라졌다고 볼 수 있는가? 오히려 전제주의는 근대에서도 재생산되는 하나의 현상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자아내게 됩니다. 이 확신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전달될지는 의문스럽지만 그런 관점에서 한국 정치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분석해보려는 게 이 연재물 시리즈의 목표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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