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카셀대 소녀상 기습 철거…"日 철거압박 정황 뚜렷"
송고시간2023-03-10

이율 기자기자 페이지

토비아스 슈누어 독일 카셀대 총학생회장
(카셀=연합뉴스) 이율 특파원 = 캠퍼스 안에 평화의 소녀상을 영구 설치하는 사업을 주도한 토비아스 슈누어 독일 카셀대 총학생회장이 8일(현지시간) 연합뉴스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2022.7.10 yulsid@yna.co.kr
(베를린=연합뉴스) 이율 특파원 = 독일 카셀 주립대학에 총학생회 주도로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된 지 8개월 만에 기습 철거됐다.
9일(현지시간) 재독시민사회단체 코리아협의회에 따르면 카셀대 총장 측은 이날 오전 이 대학 총학생회가 지난해 7월 세운 소녀상을 기습 철거했다.
독일 카셀대 학생들, 캠퍼스에 평화의 소녀상 영구설치
(카셀=연합뉴스) 이율 특파원 = 독일 카셀대 학생들이 캠퍼스에 영구설치하기로 결의한 평화의 소녀상. 2022.7.8 yulsid@yna.co.kr
한정화 코리아협의회 대표는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는 총장 측과 이를 반대하는 총학생회 측이 대치 중이었고, 관련 협상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일방적으로 기습 철거에 나서다니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기습 철거의 배후에는 일본 측의 지속적인 철거 압박이 있었던 정황이 뚜렷하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코리아협의회는 이와 관련 내주 카셀대에서 대규모 규탄집회에 나설 예정이다.
앞서 카셀대 총장측은 지난해 9월부터 총학생회 측에 소녀상을 철거하라고 통보한 바 있다. 지난해 9월 소녀상 후원자 명판을 전달하기 위해 카셀을 찾았다가 이같은 상황을 파악한 정의기억연대는 당시 총장의 철거 통보 배경에 일본 정부의 지속적 철거 요구가 있었다고 전한 바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7월 카셀대에 소녀상이 세워진 이래로 총장에게 지속해서 철거를 요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카셀=연합뉴스) 이율 특파원 = 캠퍼스 안에 평화의 소녀상을 영구 설치하는 사업을 주도한 토비아스 슈누어 독일 카셀대 총학생회장이 8일(현지시간) 연합뉴스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2022.7.10 yulsid@yna.co.kr
(베를린=연합뉴스) 이율 특파원 = 독일 카셀 주립대학에 총학생회 주도로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이 설치된 지 8개월 만에 기습 철거됐다.
9일(현지시간) 재독시민사회단체 코리아협의회에 따르면 카셀대 총장 측은 이날 오전 이 대학 총학생회가 지난해 7월 세운 소녀상을 기습 철거했다.
독일 카셀대 학생들, 캠퍼스에 평화의 소녀상 영구설치(카셀=연합뉴스) 이율 특파원 = 독일 카셀대 학생들이 캠퍼스에 영구설치하기로 결의한 평화의 소녀상. 2022.7.8 yulsid@yna.co.kr
한정화 코리아협의회 대표는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는 총장 측과 이를 반대하는 총학생회 측이 대치 중이었고, 관련 협상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일방적으로 기습 철거에 나서다니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기습 철거의 배후에는 일본 측의 지속적인 철거 압박이 있었던 정황이 뚜렷하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코리아협의회는 이와 관련 내주 카셀대에서 대규모 규탄집회에 나설 예정이다.
앞서 카셀대 총장측은 지난해 9월부터 총학생회 측에 소녀상을 철거하라고 통보한 바 있다. 지난해 9월 소녀상 후원자 명판을 전달하기 위해 카셀을 찾았다가 이같은 상황을 파악한 정의기억연대는 당시 총장의 철거 통보 배경에 일본 정부의 지속적 철거 요구가 있었다고 전한 바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7월 카셀대에 소녀상이 세워진 이래로 총장에게 지속해서 철거를 요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기습철거된 카셀대 소녀상
카셀대 총학생회는 지난해 7월 총학생회 본관 앞 신축공원에 평화의 소녀상을 영구설치했다. 독일 대학 캠퍼스 내에는 첫 설치 사례다. 총학생회는 이를 위해 부지 사용에 대해 대학측의 허가를 받았고, 학생 의회에서 소녀상 영구존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학생들의 뜻에 감동한 소녀상 조각가 부부 김운성·김서경 작가는 이들에게 영구대여 형태로 평화의 소녀상을 기증했다.
카셀대 총학생회가 소녀상을 세우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은 지난해 초다. 베를린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운 코리아협의회에 연락해서다.
토비아스 슈누어 당시 카셀대 총학생회장은 베를린 소녀상을 철거하려고 시도한 일본정부의 태도가 소녀상을 세우는 계기가 됐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위안부 동원을 자인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부정하는 일본의 태도에 대해 "항상 자국의 역사에 대해 비판적으로 인식한다면 역사적 과오를 반복하지 않고, 이로 인해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었다.
독일 카셀대 평화의 소녀상 영구설치 제막식
(카셀=연합뉴스) 이율 특파원 = 독일 카셀대 총학생회와 시민들이 카셀대 캠퍼스내 평화의 소녀상 영구설치 제막식에서 막을 들어 올리고 있다. 2022.7.8 yulsid@yna.co.kr
yulsid@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카셀대 총학생회는 지난해 7월 총학생회 본관 앞 신축공원에 평화의 소녀상을 영구설치했다. 독일 대학 캠퍼스 내에는 첫 설치 사례다. 총학생회는 이를 위해 부지 사용에 대해 대학측의 허가를 받았고, 학생 의회에서 소녀상 영구존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학생들의 뜻에 감동한 소녀상 조각가 부부 김운성·김서경 작가는 이들에게 영구대여 형태로 평화의 소녀상을 기증했다.
카셀대 총학생회가 소녀상을 세우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은 지난해 초다. 베를린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운 코리아협의회에 연락해서다.
토비아스 슈누어 당시 카셀대 총학생회장은 베를린 소녀상을 철거하려고 시도한 일본정부의 태도가 소녀상을 세우는 계기가 됐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위안부 동원을 자인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부정하는 일본의 태도에 대해 "항상 자국의 역사에 대해 비판적으로 인식한다면 역사적 과오를 반복하지 않고, 이로 인해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었다.
독일 카셀대 평화의 소녀상 영구설치 제막식(카셀=연합뉴스) 이율 특파원 = 독일 카셀대 총학생회와 시민들이 카셀대 캠퍼스내 평화의 소녀상 영구설치 제막식에서 막을 들어 올리고 있다. 2022.7.8 yulsid@yna.co.kr
yulsid@yna.co.kr
제보는 카카오톡 okjebo
독일인들의 후안무치, 카셀대 위안부동상 철거를 환영한다.
일본군위안부 동상을 세우고서 지들은 일본과 다르다고 자위하고 그걸 또 선전한다.
독일군 위안소의 특징은 타국 여성을 강제로 위안부로 삼은 것이 첫째다. 그와 달리 조선은 일본의 일부였고 강제로 여성을 위안부로 동원했다는 증거는 없다. 둘째, 일본군은 하급 부대에서 업자와 암묵적 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위안소를 설치하고, 관리했지만, 독일은 최고 지도부로부터 계획을 입안, 설치와 관리가 조직적 체계적이었다.
아래는 하타 이쿠히코, {위안부와 전쟁터의 성}.
제2차대전 때 위안소를 운영한 나라는 일본과 함께 독일이 대표적이다. 위안소의 수까지 두나라가 비슷하다. 1942년 현재, 일본이 약 400개소, 독일이 500개소였다.
독일군 위안소
목표: 성병대책, 비밀누설의 방지, 강간에 의한 혼혈의 방지 등.
전시의 매춘통제: 1939년 9월 9일 독일 내무장관은 국방군 군인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가창을 금지하고, 창녀집(Bordell)은 모두 경찰의 관리하에 두고, 위생상의 감독을 받도록 하는 지령을 내렸다.
1940년 7월, 브라우힛츠 육군 총사령관은 프랑스, 네덜란드 등 서방 점령지의 독일 점령군에 대해 성병예방을 위해 독일 군인의 이용에 적절한 창녓집을 지정하고, 그 이외의 이용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는데, 폴란드, 독소 개전 후의 동방 점령지에도 마찬가지 조치가 취해졌다. 해군도 군항에 군이 관리하는 위안소를 두었다.
국방군 위안소의 설치: 독일 본국에서는 특히 군 전용의 위안소는 설치되지 않았다. 국방군 위안소와 친위대(SS)용의 위안소는 점령지에 개설되어, 지구 사령관의 감독하에서 전선의 중대장이 군의관 협력하여 운영을 맡았다. 입장료는 2-3마르크, 고급 위안소는 5마르크로 병사가 민간의 창녀집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싼값으로 운영되었다. 전체 점령지에 있어서의 위안소는 500개 이상(1942년)이었다.
검진: 제일차대전에서 2백만 명의 성병 병사를 내는 쓰라린 경험을 가진 독일은 성병예방을 중시했다. 위안부는 군의관과 현지인 의사에 의해 주 2회의 검진을 받고, 성병에 걸리면 바로 입원시켰다. 효과는 만족할 만한 것이었다고 43년 1월 27일자의 국방군 총사령부 보고는 자찬하고 있다.
위안부의 징집: 서방 점령지에서는 종래 있었던 매춘부를 군의 관리하에 두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동방 점령지, 특히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매춘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설해야 했고, 위안부는 종종 강제 징용되었다.
독일 본국을 위한 강제노동을 거부한 젊은 여성은 대신에 위안소에서 일하게 했다. 유대인 여성도 마찬가지였다.
인종문제: 인종법에서 “열등한 인종”과의 성적 교류는 금지되고 있었지만, 그다지 지켜지지 않았다. 예를 들면, 39년 10월, 바르샤바의 호텔 단속으로 40명의 독일 장교의 방에서 34명의 유대인 여성이 발견되었다.
독일위안소의 이용규칙을 보면, (1) 강제등록제, (2) 경영자와 위안부의 몫은 50대50, (3) 이용요금의 통제, (4) 콘돔 사용과 사후의 소독, (5)알콜 지참 금지, (6) 폭력의 금지, (7) 헌병에 의한 감시, (
위안부의 외출 제한 등, 어디에서 보고 익힌 것은 아닌가 싶을 만큼 일본의 예와 매우 닮았다. 단, 독일군처럼 성병의 치료를 게을리한 여성을 처벌하는 규정은 일본군에게는 없었고 오히려 성병에 걸린 병사 쪽이 강등처분 등을 받았다.
구태여 차이를 들라면, 독일군의 경우는 최고위급의 명령으로 규율하고, 운용과 규칙이 철저한 효율주의로 일관하였던 것에 대해, 일본군은 현지 부대의 상당히 낮은 급, 그것도 수송 관계를 제외하면 업자와의 비공식적 담합에 맡겨지고, 운용도 상당히 느슨했던 것 같다는 점이다. 따라서 장래 독일의 보상문제가 제기될 경우에는, 일본 달리 국가보상만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
Note: Only a member of this blog may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