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13

박정미 더글러스 머리, [유럽의 죽음> 을 읽고 23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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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유럽이 자기 땅에서 유배되고 있다
-더글러스 머리, <유럽의 죽음>을 읽고

유럽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문은 백 년 전부터 나돌았다.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이 20세기 초에 이미 음울한 예언처럼 전세계 지식인들 사이를 떠돌았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예언은 현실화 되어 유럽은 빈사상태로 호스피스병동에 누워있다. 유럽의 3대 맹주인 독일, 프랑스, 영국을 비롯한 유럽전역이 죽음을 앞 둔 한탄과 비명소리로 가득하다.
 
2010년 독일의 전 상원의원인 틸로 자라친의 <독일이 사라지고 있다>를 필두로, 2017년에 영국인 저자의 이 책 <유럽의 죽음>이 베스트셀러로 떠올랐고, 2014년에 출간되었지만 최근에 국내번역된 에릭 제무르의 <프랑스의 자살> 역시 대히트를 쳤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유럽이 죽어가는 것은 자살에 다름없다고 진단하고, 자기 목을 조르는 손으로는 유럽의 좌파정치를 주로 거론한다.
그들 모두 자국내 여론지형에서 우파로 분류된다지만 자라친은 독일사민당출신이고 이 책의 저자 더글러스머리의 경우도 읽어본 바에 따르면 자유주의적 사고에 충실한 인물로 보인다. 정치적 올바름에 거짓아첨하거나 평판을 걱정하기보다는 자유주의적 이상을 지키기 위해 정확히 현실을 드러내려는 노력으로 보였다.
유럽에서 파시즘과 인종주의는 우리나라의 친일적폐논란과 같이 정치적도구로 악용된다. 파시즘이 역사에서 멀리 물러날수록 더 많은 자칭 반파시스트들이 정치적 이익을 위해 반파시즘 팔이에 나서는 것은 유럽도 마찬가지다.
인종주의자나 파시스트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누구든지 엄청난 정치적, 사회적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하지만 이런 낙인을 부당하게 덮어 씌우는 측은 아무런 사회적 정치적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다.
나는 정치게임의 불리한 지형에 굳이 선 사람의 말은귀담아들으려고 한다. 최소한 거기에는 어떤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전근대성에 고통당하는 유럽

유럽은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계 무슬림으로 거의 점령당하다시피 하고 있다는 것이 작가의 인식이다. 상징적인 장면은 중세유럽의 할아버지격인 샤를 마르텔의 영묘가 있는 파리 북부 도시 생드니에서 벌어지고 있다.
샤를 마르텔이 742년에 투르푸와티에전투에서 이슬람세력의 유럽침공을 막아낸 이후 유럽은 이슬람세력과 거리를 두고 살았다. 하지만 1300여년이 지난 지금 생드니 유역은 무슬림과 이슬람문화로 가득 차있다. 자신의 사후에 이슬람과의 전쟁에서 졌나보다고, 샤를 마르텔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다.
생드니는 지역인구의 30퍼센트가 무슬림인데, 나이가 어릴수록 무슬림 비중은 커져서 지역의 카톨릭학교 학생의 70퍼센트가 무슬림일 정도다. 프랑스라기보다는 북아프리카의 도시 같은 생드니에 다른 지역사람들은 가기를 두려워한다.
2016년 지금 생드니에서는 신부들이 얼마 안되는 신자들을 위해 미사를 집전하는 동안 성당 바깥에서는 중무장한 군인들이 신부들과 프랑스 왕들의 무덤을 지켜야 한다.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작가 라스파유의 말마따나 기로에 서서 고뇌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인종주의를 묵인함으로써 자신의 인간적 존엄을 포기하고 싶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다시 무엇을 할 것인가? 그와 동시에 모든 사람과 모든 민족은 자신의 미래와 과거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차이와 정체성을 보전할 성스러운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영국은 지난세기 식민지였던 파키스탄 등 서남아시아계 무슬림이주민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 거기에 인종주의를 피하려는 필사적인 자기검열 때문에 더 문제는 복잡해진다.
2011년 파키스탄계 무슬림남성 아홉명으로 이루어진 갱단이 런던 중앙형사법원에서 11~15세 아동을 성폭력과 인신매매한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 일은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옥스퍼드셔에서 벌어졌지만, 많은 이들이 인종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을까 두려운 나머지 범죄를 신고하지 못했고, 언론도 선례를 따르면서 묻힐 뻔했다. 게다가 범죄가 드러난 후에도 이슬람혐오로 불릴까봐 그냥 <아시아계>라고 보도되었다.
그보다 더한 사례도 있다. 영국 로더럼시에서 벌어진 1997년부터 2014년까지 아동 1400여명에 대한 강간과 그루밍사태도 파키스탄계 갱단이 저질렀다. 이 또한 지역의회와 지역경찰들이 <인종주의자>로 비난받을까봐 초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2015년 새해전야 독일 쾰른에서 벌어진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중앙역 앞 메인광장과 쾰른 대성당 거리에서 이천명에 달하는 남자들이 무리를 이루어 현지 여성 천이백명을 대상을 성폭력과 강도행각을 벌였다. 경찰은 마찬가지 이유로 가해자들의 신원을 가리려고 노력했고 가해자들의 인종적출신을 가리려고 노력했다.
이런 사건들은 그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데, 이는 일부 이민자들, 특히 이슬람문화에 젖은 남자들의 독특한 문화적관념과 태도, 즉 여성, 특히 비무슬림여성과 다른 종교와 인종, 성소수자에 대한 중세이전의 시각을 보여준다.

◇난민인지 이주민인지 혼란스러운 유럽

2011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외국에서 태어나 잉글랜드와 웨일스에 거주하는 사람은 지난 10여년간 300만명이 늘어났고, 런던거주자 가운데 스스로를 백인영국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44.9퍼센트에 불과했다. 2014년 외국태생의 여성들이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이루어진 출산의 27퍼센트를 차지했고, 신생아의 33퍼센트가 적어도 부모 중 한 명이 이민자였다.
유럽인들의 낮은 출산율과 지나치게 많은 이민, 특히 무슬림이민의 높은 출산율 때문에 유럽사회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전세기 말과 금세기 초 유럽각국정부는 국민의 동의를 얻지 않은 채 대규모이민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추진했다. 고령화사회에서는 이민증가가 필요하므로 이민자유입은 나라에 이익이 된다, 이민은 문화적 다양성을 통해 문화를 발전시킨다는 것이 정부측의 주요논거였고,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세계화 때문에 대규모이민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최후의 이론적 보루로 내세웠다.
역설계과정과 마찬가지로 정부는 이민에 관한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증거>를 찾아내 홍보하는 식이었다. 바람직하지 않다고 간주되는 상황에 대해서는 <증거가 전무하다>거나 <일화적 증거>에 불과하다고 치부되고 주택과 교육기반시설 등 우려되는 명백한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이론상의 추정>일뿐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많은 수의 젊은 이민자를 수입한다고 해서 인구 고령화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민자들 또한 노인이 되고 그들 역시 똑 같은 권리를 기대한다면 <피라미드방식의 사업>이 그렇듯이 점점 더 많은 젊은 이민자를 들여와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유럽각국의 이주민 정책이 잘못 됐다면 정책을 바꾸면 된다. 하지만 유럽에 밀입국하는 제3세계 사람들은 모두 난민을 표방하고 있어 그 변별이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다.
반란이 일어나고 정부가 불안정한 나라들, 특히 에리트레아, 아프가니스탄, 시리아뿐만 아니라 파키스탄처럼 유럽강대국의 동맹으로 정부가 안정된 나라에서도 이주자들이 몰려왔다. 생활수준이 일정 정도 이상인 사람들만이 이주를 감행할 수 있다는 것도 고려해봐야 한다. 진짜로 가난한 사람들은 밀입국알선업자에게 줄 돈이 없다.
그리고 이런 이주자 물결은 독일총리 메르켈이 텔레비전생방송 중에 레바논을 탈출한 팔레스타인태생의 소녀를 울리고 뒤이어 세살짜리 시리아소년의 주검이 터키해변으로 밀려온 2015년을 기점으로 둑이 터지듯 밀려왔다. 죄책감과 부끄러움이라는 전반적인 감정이 유럽과 북미전역에 퍼지면서 정작 이주민가족들을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모든 현실적인 문제들이 밀려나고 이민자 유입의 부정적인 면을 거론하기만 해도 편협성과 불관용, 외국인혐오와 인종주의자라는 비난을 듣는 사회적 분위기가 자리잡았다.
결국 여론 앞에 백기를 든 메르켈은 2015년 베를린에서 외국언론 앞에서 이렇게 발표했다.
“유럽 전체가 움직이고 각국이 피난처를 찾는 난민들에 대한 책임을 분담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보편시민권은 유럽 및 그 역사와 하나로 결합됐습니다. 만약 유럽이 난민문제 해결에 실패한다면 보편시민권과 유럽의 밀접한 연계가 깨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상상하는 유럽은 사라질 겁니다.”
그리고 독일이 활짝 문을 열자, 1995년 셍겐 협정으로 국경의 칸막이를 없앤 유럽대륙은 난민을 앞세워 밀려오는 이주자의 물결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다문화정책의 실패, 통합의 실패

유럽은 초기에 이주민들 고국의 다양한 관습과 문화를 그대로 포용하며 존중하고자 하는 다문화정책을 표방했지만 이는 역으로 사회통합을 저해했으며 이주민과 원거주민의 문화적 사회적 괴리현상은 심각해졌다.
메르켈은 2010년 포츠담에서 “다문화사회를 건설해서 서로 나란히 살면서 즐겁게 지낸다는 접근법은 실패, 그것도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총리는 이 때문에 “더욱 더 통합이 중요하다”라고 주장했다. 독일사회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독일의 헌법과 법률과 따라야 하면 또한 독일어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메르켈이 금기시되던 다문화주의 비판의 물꼬를 트자 뒤이어 영국의 캐머런, 프랑스의 사르코지, 오스트레일리아, 스페인의 총리들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사르코지는 “사실 유리의 모든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정체성에만 지나치게 몰두하면서 그들을 환영하는 나라의 정체성에는 충분히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습니다.”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그들이 비판한 것은 국가가 후원하는 정책으로서의 다문화주의였다. 국가가 거주민들로 하여금 같은 나라에서 평행세계를 살 것을, 특히 그들이 지금 살고 있는 나라의 것과 정반대의 관습과 법률 아래 살 것을 장려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지도자들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법치와 일정한 사회적규범을 적용하는 ‘포스트다문화사회’를 호소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다문화주의는 통일된 정체성으로 이어지기는커녕 정체성들의 균열을 낳았고, 피부색이나 정체성에 무감한 사회를 만드는 대신 갑자기 정체성이 모든 담론을 지배하게 했다. 일종의 선심성사업(pork barrel)정치가 사회에 들어왔다. 갖가지 정체성 집단을 대변한다고 스스로 주장하는 각종 단체와 이익집단이 급조되어 공적자금을 지원받고 정치적야망이 있는 사람들의 스펙으로 작용했다. 이는 정부의 실패인정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단체가 다문화주의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로 작용하기도 한다
.

이후 유럽에서는 <명예살인>과 여성할례가 문제화되면서 다문화주의에 있어 ‘관용의 한계’를 둘러싼 논쟁으로 모아졌다. 자유주의 사회는 관용없는 자들을 관용해야 하는가?
일찍이 이런 질문에 관해 시리아출신 이주민학자인 바삼 티비는 <핵심문화>를 옹호하는 정책으로 나가야 한다고 제안했다. 국민들이 법치와 정교분리, 인권 같은 근대 자유주의 국가의 핵심개념에 대한 믿음으로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슬람의 신성모독죄와 위협의 내면화

지난세기 1989년에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를 둘러싸고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신성모독죄를 규정한 파트와를 적용, 사형선고를 내린 이후 유럽사회에서 이슬람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되었으며 유럽사회 지식인들은 반대견해를 표명할 때는 목숨을 걸 것을 요구받았다.
이슬람은 근대적 정교분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종교다. 하지만 그 많은 무슬림 이주민들을 받아들이면서 어느 누구도 새 이주자들이 반유대주의와 동성애자 때리기의 증대로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누구 하나 이슬람 신성모독이 21세기 유럽에서 가장 심각한 문화, 안보문제로 대두될 것임을 예측하지 못했다.
이를 경고한 사람들은 비방을 받거나 왕따를 당하거나 박해받거나 살해당했다. 진실이 드러난 뒤에도 피해자들은 거의 공감을 받지 못했다. 언론들도 공포와 비겁함, 위협의 내면화가 결합한 결과 투명한 보도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인종주의를 반대하는 유럽에서 정작 반유대주의가 고조되고 있는 것은 젊은 무슬림들이 주도하고 있는 현상이다. 프랑스에서 유대인은 전체 인구의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인종주의적 공격피해자의 절반가까이를 차지했다.
대규모 테러공격, 2004년 마드리드, 2005년 런던, 2015년 파리에서 이어진 이슬람 테러리스트의 공격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진실을 감추려는 정부당국자들의 비상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2007년 런던도심 테러사건에서 노동당정부의 내무장관인 재퀴 스미스는 “ 이런 공격을 <이슬람테러>라고 규정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평화의 종교인 이슬람 신앙에 위배된 행위를 했으므로 <반이슬람활동>이라고 규정하는게 더 적절하다”는 얼빠진 소리를 했다.
이제 상시적인 테러의 위협에 시달리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당하는 유럽사람들은 자신들의 관용과 개방과 품위가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선거에서 우파정당의 득세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무서운 것은 한번 방향을 전환한 여론의 흐름은 더 앞으로 나갈 것이다.
◇유럽인들의 피로, 자기확신의 결여

유럽의 정신적지주인 기독교가 세속주의와 진화론 등 비판적 사고 때문에 생명력을 잃은지 오래다. 하지만 이를 대신해 생에 의미를 채울 새로운 종교와 사상은 정립되지 않았으며, 그 이 빈 공백을 이성보다는 계시를 앞세우는 전근대적 이슬람 종교가 밀고 들어오고 있다
유럽대륙에서 기독교적인 믿음과 신앙을 잃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보다 더 큰 파급효를 낳는다. 유럽사회는 도덕적, 윤리적 관점에 구멍이 생겼을뿐만 아니라 그 토대를 이루는 이야기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전후의 인권문화는 마치 신앙처럼 이야기되며 그 자체가 기독교적 양심의 세속적형태를 실행하려는 시도다. 하지만 이 문화는 그 토대를 이룬 기독교가 무너지면서 인권의 언어조차도 온통 불확실성과 의문의 바다로 빠지게 되었다.
20세기 말에 이르러 유럽인들은 일정한 피로감을 느끼게 되었다. 유럽인들은 이미 종교와 반종교, 신앙과 비신앙, 인간의 합리주의와 이성의 신앙을 시험해보았다. 독일관념론철학에 이어 마르크시즘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정치적, 철학적 기획을 거의 모두 창시한 바 있고 이를 끝까지 밀어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제1, 2차 세계대전이었고 지금 유럽인들은 갈 길을 잃은 것이다.
이제 대륙의 철학자들은 진리의 정신과 거창한 질문에 대한 탐구에 고무되는 대신 질문을 피하는 법에 매료되고 있다. 철학자들이 관념뿐만 아니라 언어도 해체하자 그 결과로 모든 고정된 것들 것들에 대한 불신이 들어섰다.
유럽의 예술 역시 진리와 의미에 대한 당대의 해답을 제출할 능력을 상실하고 표류하고 있다. 기술적 야심은 크게 위축되었고, 예술의 도덕적 야심도 그 뒤를 따라갔다. 이런 변화는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접근법이 존경(나도 저렇게 할 수 있다면)에서 경멸(어린애라도 저 정도는 하겠다)로 바뀐 과정에서도 드러났다.
통합신봉자들은 시간이 흐르면 유럽에 오는 모든 사람들이 유럽인과 비슷해질 것으로 가정한다. 하지만 이런 가정은 유럽의 자기의심과 자기불신의 문화 때문에 다른 이들을 설득하지 못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로마의 멸망은 반복되는가

그 찬란한 고대의 빛 로마가 게르만족의 침입에 의해 무너지고 중세의 암흑시대가 시작되었다. 믿을 수 없는 역사의 역행이지만 실제로 역사는 그렇게 천년 동안이나 흘러갔다. 지금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불길하게 바라보는 이유다. 유럽은 수명이 다한 로마처럼 공허하고 이슬람이민자들은 훈족에 쫓긴 게르만처럼 끝도 한도 없이 밀려온다. 역사는 이 시대를 민족의 이동과 뒤섞임으로 전세계가 열병을 앓는 시기로 기록하겠지만 그 끝이 어떻게 끝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역사는 반복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고 종교적 다양성은 옹호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여성평등, 정교분리, 성소수자보호, 다양성을 부정하는 교리를 인정해야 하는가? 자유주의의 반대를 자유주의로 옹호해야하는가? 이슬람교는 양성평등에 관한 근대적 견해를 공유하지 않았다. 계시보다 이성이 우위에 있다는 견해도, 자유와 해방에 관한 견해도 공유하지 않았다. 즉 고대 그리스와 로마로부터 이어져 기독교로 촉진되고 계몽주의의 불꽃을 통해 정련된 유럽의 보기 드문 합의의 정신은 이제 유럽에서 생존의 시험대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인근로자, 국제결혼자, 불법체류자 등 국내 체류 외국인이 230만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유럽이 몸살을 앓다 못해 죽어가는 지금 강 건너 불 보듯 볼 수 만은 없는 이유다.

이 책은 주로 유럽각국의 이주자정책을 타겟으로 삼고 있지만, 그 와중에 드러난 유럽의 문화, 정치, 종교, 심리, 삶의 의미를 모색하는 저자의 깊고 진지한 탐색을 통해 나는 이 시대의 전모를 들여다본 느낌이 들었다.
내가 대학시절에는 캄캄한 골방에서 <자기 땅에서 유배된 사람들>이라는 책을 읽었다. 알제리독립운동가 프란츠 파농이 프랑스의 압제에 시달리는 식민지인들의 현실을 고발한 책이다.
하지만 이제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인들은 유럽본토에서 이슬람에 의해 가스라이팅 당하고 자기 정체성마저 흔들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제는 유럽인들이 옛 식민지인들에 의해 자기 땅에서 유배되고 있다.
역사는 이렇게 뒤집어지지만, 책을 덮은 지금 결코 좋은 느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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