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보았듯이 전근대와 근대 간에는 토지와 영토에 대한 근원적인 인식의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를 전제로 한국 측의 역사적 근거를 한번 짚어보겠는데 여기서 주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이는 '반일종족주의자'인 이영훈으로, 그의 독도론에서 받아들일 점은 받아들이면서 비판해보려고 한다.

2) 독도영유권에 대한 한국 측의 역사적 근거

 이러한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비로소 전근대 조선왕조 하에서의 독도에 대한 역사적 근거가 지니는 의미가 정확하게 파악될 수 있다. 한국에서는 15세기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우산도(于山島)가 독도를 의미한다는 것에서부터 1531년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 1756년의 강계고의 기록, 1770년의 동국문헌비고의 기록, 1808년의 만기요람의 기록 등등 수많은 기록들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측의 조치에도 주목하고 있다. 예컨대 1693년 이래 안용복의 활약과 함께 1696년 일본 막부의 아베 분고노가미가 일본인이 바다를 건너 울릉도에서 전복을 캐는 것을 막는 조치를 내린 것 등을 들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높게 평가받는 것은 메이지 정부의 태정관의 결정으로, 이것은 일본의 경제사학자 호리 가즈오가 발굴해낸 자료를 통해 상세하게 분석되었다.(호리 가즈오의 "1905년 일본의 다케시마 영토 편입"을 참고하시오.) 

호리 가즈오에 따르면 1877년 3월 29일의 결정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76년 2월 조일수호조약, 즉 강화도조약을 통해서 조선이 개항한 뒤에 조선과의 국경 획정이 문제가 되자 다케시마(이때의 다케시마는 울릉도를 의미한다)의 건에 대해 일본 내무성 지리료가 문의를 하였다. 시마네 현이 조사의 주체가 되어 <일본해 내 다케시마 외1도 지적편찬방 문의>라는 보고서를 지도와 함께 제출하였다. 이 지도에 따르면 울릉도와 함께 섬의 남동쪽에 작은 '송도'가 그려져 있다. 이 송도가 지금의 '독도', 다케시마라는 게 호리 가즈오의 주장이었다. 즉 '다케시마 외 1도'는 울릉도와 독도를 의미한다. 호리 가즈오는 이 두 섬은 조선령으로 일본령이라 할 수 없다는 결론을 일본 정부가, 그것도 1876년 이후의 근대국가인 메이지 정부가 내렸다고 말한다. 

이때 메이지 정부의 판단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 앞서 언급했던 17세기 후반 무렵의 막부의 결정이었다. 막부의 결정에 따라 다케시마 외의 1도는 일본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하였다. 이로써 1차적으로는 일본과 조선 간의 영토 획정 문제가 해결되었다 할 수 있다. 한국 측은 이 문헌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데 반해서 일본 측은 "다케시마(울릉도) 외의 1도"에서 "1도"가 과연 송도(=독도)를 의미하는 것인지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다며 태정관의 결정을 무시하고 있다. 

관련해서 '반일종족주의자'로 분류되는 이영훈은 독도에 관한 그의 주장에서 이 결정문을 왜 언급하지 않느냐는 반론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면 그 문서는 우리 한국 측이 국제사회에 제시할 독도 고유영토설의 근거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답하였다. 그는 여기서 호리 가즈오의 인식을 받아들여 "울릉도와 도중 항로의 1개 섬, 곧 독도"라 표현하고 있다는 데서 일단은 한국 측의 입장과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도 왜 그는 그것이 고유영토설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주장할까? "필자가 보기에 명치정부의 실력자 오쿠보가 자신의 결정을 넘어 태정관의 지령까지 구한 것은 그 결정의 정치적 의미가 매우 중하기 때문"이라는 말로 미루어 볼 때 객관적 근거가 아니라 당시의 상황에 따른 '정치적 결정'으로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는데에 의의를 두었던 듯하다. 문제는 한국 측이 일본 측의 인식이 변화하였을 때 거기에 대응할만한 어떠한 객관적인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거나 국제법적인 조치를 미리 취했는지 여부라는 게 이영훈의 진의가 아닌가 한다. 

그렇기에 이영훈은 "조선왕조가 그것의 객관적 소재를 인지하는 가운데 그것을 자국의 영토로 영유하는 체제를 성립, 유지하는 섬"이라는 일본의 인식이 1904년까지만 유지되었으며 조선왕조는 그것을 차단할 수 있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독도 자체가 어디에 소재하고 있는지 객관적으로 인식하지도 못했다고 거듭해서 주장한다. 그렇기에 그는 1904년에 일본인 어부 나카이 요사부로(中井養太郞)가 "조선왕조와 독도의 이 같은 관계"를 인지하고 시네마 현 편입을 청원하고 그렇게 된 귀결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조선왕조는 이를 인지조차 하지 못했는데 그것은 정기적인 순시를 포함한 독도에 대한 영유체제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링크를 참고하시라.
일본 메이지 정부가 독도 주변의 강치 어업 활동을 통해 많은 수입을 올리고 있던 일본인 어부 나카이의 요청을 계기로 독도를 편입하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앞서 우리가 논증하였던 것과 같이 특정한 '영역'을 자본주의적이고 근대적인 영역으로, 다시 말해서 생산적이고 개량가능하며 수익창출이 되는 '토지'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 대한 일본제국주의의 최초의 침략이 독도의 편입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은 상당히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 토지를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일본인이 독도 일대를 "무주지"(無主地, terrae nullius)로 파악하고 거기서의 어업활동의 원활한 보장을 위해 자국 정부에게 편입 요청을 하였다는 점에서 제국주의적 침략이면서 동시에 근대적인 영토획득 과정이다.

조선왕조는 1876년 개항 이래 여러 서구적 근대국가들과 조약관계를 맺고 그 스스로가 근대국가로서 변모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대한제국에 이르러서도 하나의 근대국가로서 국가능력을 발휘했다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1876년 이래 1894년 청일전쟁으로 청나라가 세력을 상실하기 전까지 청의 세력권에 포섭되어 있던 조선왕조의 상황을 일부 정치외교사가들은 유길준의 표현을 빌려 "양절체제"(兩截體制)라 표현한다. 청 중심의 전통적인 조공질서와 근대국가 질서가 서로 모순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상황을 지칭하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보아도 아직 조선왕조가 전통적인 사대관계의 규정을 받고 있어 근대국가로 자립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대한제국에 이르러서도 전국적으로 통일된 조세제도 및 그것을 집행할 관료제, 그리고 상비군 체제를 확립하지 못하여 근대국가라 부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한 학술회의에서는 "근대적" 국가로 부르자 했지만 근대국가나 근대적 국가나 모두 번역하면 'modern state'로 같아 별 의미없는 구별이다.(한영우 외, <대한제국은 근대국가인가>, 푸른역사, 2006.) 이런 의미에서 조선왕조-대한제국을 근대국가라 보기는 어렵다.

이영훈이 조선왕조의 대응을 두고 "조선왕조의 울릉도에 관한 이해와 평가는 기본적으로 농업국가의 그것을 넘지 않았다. 원양어업 강치잡이의 거점으로서 독도의 존재는 관심 능력 밖"이었다고 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뼈아픈 부분이 있다. 역사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의 설득력이 이 지점에서 떨어지는 건 실제로 사실이다.

하지만 이영훈은 한 가지 사실을 자세히 말하지 않는데, 나카이 요사부로가 1904년 9월에 제기한 '리양코 섬(=독도)'의 일본 편입과 섬 대여에 관한 청원서를 받아들인 까닭은 강치 어부의 이해 때문이 아니라 러일전쟁 중이었다는 당시의 상황 때문이었다. 리양코 섬의 편입을 요구한 나카이의 신청에 대해 내무성에서는 "이 시국에 즈음하여 한국 영지라고 여기는, 아득하고 거칠며 보잘 것 없는 불모의 바위땅을 수용하여 ... 외국 여러 나라에 우리나라가 한국 병합의 야심이 있다는 의심을 더 크게 만든다"며 반대의 뜻을 밝혔지만, 외무성이 "이러한 시국이기 때문에 영토 편입을 급선무로 해야 한다. 망루를 세우고 무선 또는 해저 전신을 설치하면 적함을 감시할 때 매우 유리하고, 더군다나 외교 업무상 고려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와다 하루키, <동북아시아 영토문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임경택 역, 사계절, 2013, p.229에서 발췌인용) 

즉, 러일전쟁을 보다 효과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수단으로 독도 편입을 결행한 것이지, 본디 일본 정부는 독도가 한국의 영지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을 편입을 결정할 때도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이영훈의 지적대로 태정관의 지령에 담긴 인식이 1904년까지만 유지되다가 급변하여 영토를 편입한 게 아니라 제국주의적 침략의 전조 단계로 편입한 것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이는 러일전쟁의 성격에 관해 완전히 도외시한 주장으로 순전히 조선왕조와 독도의 관계에 대한 인식변화에서 도출되었다는 그의 주장은 동의하기 어렵다. 한국은 이영훈이 신줏단지처럼 모시는 이승만 이래로 러일전쟁 와중에 편입된 독도를 제국주의적 침략의 최초의 희생물로 인식하고 있었다.

"독도는 일본의 한국 침략에대한 최초의 희생자이다. 일본의 패전과 함께 독도는 다시금 우리의 품에 안겼다. 독도는 한국 독립의 상징이다. 이 섬에 손을 대는 자는 우리 민족의 완강한 저항을 각오하라. 독도는 다만 몇 개의 바위 덩어리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영예의 닻이다. 이것을 잃어버리고 어떻게 독립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일본이 독도를 탈취하려는 것은, 곧 한국에 대한 재침략을 의미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와다 하루키, 2013 : 246-247에서 재인용)

 이런 맥락에서 일본이 실질적으로 점유하고 있어 중국과의 관계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센카쿠 열도의 편입과정과 차이점을 보인다. 와다 하루키에 따르면 일본의 센카쿠 열도 편입은 1884년의 오키나와의 상인 고가 다쓰시로(古賀辰四郞)가 아호우 새, 즉 알바스트로스(albatrus)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그 깃털을 얻기 위해 이 일대를 일본에 편입하고 개척할 수 있는 허가권을 내달라 청원서를 낸 게 계기가 되었다. 이때까지도 일본국은 앞서 독도의 편입과정에서 오쿠보 등의 일본 당국이 거부한 논리를 그대로 반복하여 청을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이때도 외무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의 조선과 청의 결탁을 막으려는 '정치적 판단'에 기초하여 결정이 내려졌다. 이후에도 고가의 호소가 이어지자 마침내 1895년 1월 14일에 일본 정부는 '무주지'이자 '무인도'라는 점을 확인하고 편입하게 된다. 이때 당시 일본은 청일전쟁을 치르고 있었지만 이 문제를 청과 상의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앞서 다루었던 '무주지'에 대한 제국주의적이고 근대적인 편입 과정의 한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군사적 목적으로 침략을 행하며 편입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는 게 와다 하루키의 지적이다.(와다 하루키, 2013 : 225-227)

영토의 편입이라는 대단히 정치적인 문제를 순전히 논리의 문제로 해결할 수 있다는 이영훈의 인식이 지닌 천진난만함과는 별개로 그가 태정관의 결정을 단순히 일본의 실력자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의 '정치적' 결정이라며 평가절하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영토문제는 이해관계의 충돌을 다루는 사안이고, 이해관계의 충돌을 다루는 건 정치의 근본적인 역할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모든 정치학 교과서들의 '정치'에 대한 정의는 이해관계의 충돌과 대립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우리는 여러 이해관계의 대립의 해소로서의 정치적 결정들 중 일부에 법적인 형태를 부여하여 객관적인 '제도'로 고정시킨다. 근대적인 의미의 법이란 사적인 의지가 공동체의 일반의지로 승화되어 보편성과 객관성을 획득하는 과정을 전제로 성립한다. 국가적 결정의 의의란 그렇기에 한 민족공동체의 일반의지를 담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것을 가볍게 여기며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는 것이라며 무시한다면 국제법 운운하는 논의를 하기 어렵다. 우리 개인들은 한 공동체의 일반의지에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동의를 명시하지 않더라도 "이미" 무조건적으로 일반의지에 동의하고 있다는 게 루소의 <사회계약론>이 우리에게 설파하는 바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일반의지에 따라 정립된 법규를 공동체의 구성원들 개별에게 일괄하여 적용하기 어렵다. 개별의지가 동의하지 않았다고 하면 법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와 별개로 한국인들은 전근대 중화제국의 천하체계에 포섭되어 있던 조선왕조가 토지라는 영역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한번쯤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전근대에 한국이 영유하고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근대적 의미의 영토로 반드시 편입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달리 생각할 여지가 많다. 전근대 시절의 토지에 대한 인식을 근대로까지 확정하여 "고유한 영토"라 주장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타국의 불법성에 대한 비판과 함께 무력 등의 여러 수단을 동원한 영토쟁탈전으로 이어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이러한 인식의 생성과 발전의 필연성을 "제국주의"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지만 국제법이 발전하고 여러 국제기구들이 존재하여 전쟁을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현 시대에서 이러한 영토쟁탈이 긍정되기란 어려울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어떠한 방식으로 끝나든 그 여파가 장기지속되리라 예상되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이다. 

다시금 제국주의에 비견되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현 상황에서 "고유영토"라는 '허상'을 비판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필요한 작업이다.
 
3) 고유영토론이라는 일본의 환상

 일본은 러시아에 대해서도, 그리고 한국에 대해서도 '고유영토'를 되돌려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센카쿠 열도에 대해서는 중국의 '고유영토' 주장에 대해 그 지역 또한 일본의 '고유영토'라 주장하고 있다. '고유영토'이기에 돌려받아야 한다는 인식은 필연적으로 '고유영토'를 "불법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한국, 러시아 등에 대한 비판으로, '고유영토'를 위협하는 중국에 대해서는 위기의식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일본이 이렇게나 강경하게 주장하는 "고유영토"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와다 하루키는 '고유영토'라는 용어의 번역어를 찾기 어렵다고 말한다. 영어로 한다면 'Japan proper', 즉 '일본 본토'인데 여기에는 홋카이도, 혼슈, 시코쿠, 규슈 등이 포함될뿐 예컨대 오키나와는 포함되지 않는다. '고유의 일본'을 의미한다면 근대에 접어들어 편입된 홋카이도도 제외되어야 마땅하다. 그렇기에 일본 외무성은 '고유영토'라는 표현을 "원래"의 일본 영토를 의미하지 않고 "선조로부터 전래되어 온 땅을 물려받은 곳으로, 지금까지 한번도 외국의 영토가 된 적이 없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와다 하루키, 2013 : 32) 외국에 한번도 점령된 적이 없다는 말의 의미는 홋카이도의 경우 선주민으로서 거주하고 있던 아이누족을 무시하는 처사로 여기서부터 개념의 혼선이 생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앞서 정의하였던 전근대의 영토와 근대의 그것을 구별해야 한다. 아이누족은 주권이 없는, 따라서 영토라 주장할 수 없는 '무주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다. 근대적인 일본이 그것을 편입하여 자국의 영토로 삼는 행위는 정당하다. 이후에 홋카이도가 소련이라든지 미국 등에 의해 점령되지 않았기에 홋카이도는 한번도 다른 나라의 영토가 된 적이 없고 계속 일본의 영토였던 토지라는 의미에서 '고유영토'가 된다.

여전히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측면이 있는데 "아직껏 한번도 외국의 영토가 된 적이 없는 영토"라는 의미의 '고유영토'라고 한다면 식민지가 되었던 한반도는 통째로 고유영토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미국, 러시아, 중국 등의 세계의 거의 모든 국가들도 이러저러한 영역의 변화 속에서 '고유영토'라 부를만한 지역을 거의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예컨대 미국의 텍사스는 멕시코의 '고유영토'로 미국이 멕시코에 반환해야 한다는 주장도 성립할 수 있다. 천황의 만세일계(万世一系)라는 관념과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관념은 이 지점에서 공명하며 일본 내셔널리즘의 핵심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천황을 중심으로 '만세일계'의 연속적인 공동체를 구성하여 '타국의 영토가 된 적이 없는 영토' 위에서 살아가는 일본이라는 관념은 민족의 '순수성'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진다. 일본 내셔널리즘을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당장 GHQ의 점령이 떠오르지만 미국의 영토가 된 것은 아니니 여전히 '고유영토' 개념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고유영토' 주장에 반발한 중국, 한국 등도 '고유한 영토' 등에 대해 운운하지만 실상 한국, 중국 등에서 논하는 '고유영토론'은 일본의 그것과는 결이 달라서 서로 통하지가 않는다. 일본의 이러한 '고유영토' 개념은 북방 4도의 영토 문제와 관련하여 러시아(당시에는 소련)와의 협의 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자의적이며 정치적인 성격이 강한 용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일본이 이러한 자의적인 개념을 갖고 주변국들과의 영토분쟁을 이어가는 과정에서 오히려 한국, 중국 등의 내셔널리즘을 자극하여 그들로 하여금 '고유한 영토'를 주장하게 한다는데 있다. 한국, 중국 등의 역사발전단계를 고려한다면 여전히 농업사회의 성격을 강하게 지니며 천하체계 속에 머물러 있던 상황에서 확보한 영역을 근대주권국가의 영토로 전환하는 과정은 일정한 '비약'과 '단절'을 포함하고 있다. 이 단절, 비약 등을 우리가 무시한다면 해결점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고유한 영토라는 관념을 해체하고 현실에 맞추어서 어떠한 방향으로 이웃국가와의 영토분쟁을 해소하고 공동의 번영을 향한 평화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고유한 영토'에 관한 지난 세기의 분쟁이 얼마나 "정치적"이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동북아의 영토분쟁의 근원에는 "미국"이 자리하고 있다.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의 전후 처리 문제가 냉전의 전개와 겹치면서 미국의 국익에 맞춰 왜곡되고 변용되는 과정을 짚지 않는다면 영토분쟁은 해소하기 어렵다는 게 이 글의 주장이다. 3부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