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04

손민석 - 류상영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화]

손민석 - 류상영 선생의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화>(논형, 2022)의 서평글을 쓰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읽고 있다.... | Fac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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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상영 선생의 <박정희와 김대중의 대화>(논형, 2022)의 서평글을 쓰기 위해 처음부터 다시 읽고 있다. 이 책의 미덕은 저자가 김대중과 박정희를 대화시킨다는 가상적 상황을 연출하면서도 다양한 사료들을 발췌하여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다는 점이 아닌가 한다. 류상영 본인이 생각하는 박정희와 김대중에 대한 이해도 있지만 그러한 이해를 강요하기보다는 독자로 하여금 제한적인 사료나마 살펴보게 하여 그야말로 '대화'에 참여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박정희와 김대중의 생애를 적절하게 비교하면서 그들의 여러 선택을 그 개인적인 성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기보다 한국사의 분기점처럼 다루고 있다는 점 또한 이 책이 지닌 미덕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가정이 없다면 역사적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는 점은 이미 수량경제사가 도입될 때 있었던 논쟁에서 확인되었다. 우리가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 자체가 '그것이 없었다면'이라는 가정을 도입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에 가정은 없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곤란하다. 이 책은 그러한 역사적 가정이 연구자 개인의 자의적인 판단에 기초하기보다 박정희의 거울쌍으로서의 김대중, 김대중의 거울쌍으로서의 박정희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역사적 사실의 의미를 녹진하게 풀어내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고 한다면 두 정치인을 '사상가'로서 다루지는 못하고 현대사의 전개만을 파악하는데 급급하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다소 깊이감이 떨어지고 그저 서로 대립되는 사실과 의견을 나열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은 류상영 본인이 박정희와 김대중을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일익을 담당한 사람들로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인 듯하다. 다시 말해서 박정희가 조국근대화의 사명을 수행했다면, 김대중은 박정희의 업적이 파탄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그것의 한계를 극복하며 새로운 발전경로를 설정하여 그 업적을 비판적이면서도 발전적으로 계승하였다는 게 류상영의 이해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진정한 주인공은 박정희와 김대중이 아니라 "한국의 현대사" 그 자체이다. '한국의 현대사'가 박정희와 김대중이라는 걸출한 인물들을 활용하여 어떻게 연속적인 발전을 이룩해왔는지를 살펴보는 저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와 같은 군부 권위주의 독재 시절의 역사를 어떻게 균형 있게 파악할 것인가? '공칠과삼'과 같이 잘못한 점과 잘한 점을 나열하여 놓고 그 경중을 따지는 행위는 이제 그만해야 한다. 공칠과삼은 마오에게 정치적으로 피해를 입었던 "피해자" 덩샤오핑이 말했기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지, 보수우파세력들이 지금 와서 박정희를 옹호하려 공칠과삼 운운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판단 근거가 자의적이지만 사리에 맞지 않는다. 이 책은 앞서 말했듯이 '한국 현대사' 자체를 연속적인 차원에서 독해하고 있기에 '부조적 수법(浮彫的 手法)'이라 불릴 수 있을 정도로 특정한 지점만을 강조하였다. 그것으로 인해 이 책에 대한 어떤 '불편함'을 느낄 이들도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저자 본인도 인정하고 있듯이 박정희의 인권 침해에 대한 부분은 비록 김대중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서술되기는 하나 다소 누락되는 지점들이 있다. 이런 점에서 저자는 보수우파와는 반대되는 어떤 편향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편향성을 편향이라고 하여 거부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정말로 문제가 되는 지점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통합과 화해라는 저자의 지향점이 지닌 편향성이다. 한가지 질문을 던져보자면 김대중과 박정희를 "대등하게" 비교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우리의 앞으로의 시대는 김대중이 만들어놓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간의 병행적 발전', 즉 "민주적 시장경제"의 건설 방향일 수밖에 없다. 혁명을 하지 않는 이상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간의 병행발전에 기초하여 어떠한 방식으로 민주주의적 폐해와 시장경제적 폐해를 조화롭게 해소할 것인지를 논의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박정희와 김대중 중 누가 더 높게 평가받아야 하는지는 이미 명백하다. 김대중이다. 그런데 박정희와 김대중이 "대등하게" 비교되고 있으며 그들 간의 '화해'와 '통합'이 논의되고 있다는 현실 자체가 어떠한 편향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김대중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시점에서 박정희가 김대중만큼 높게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시사하는가?
내가 느끼기에는 한국인의 '습속'이나 그에 기초하여 형성된 "정체성"이 김대중이 제시한 '민주적 시장경제'와 제대로 된 상호작용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 다시 말해서 박정희의 '한국적 근대'에 의해 주조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한국 유일의 자유주의자" 김대중이 제시한 '민주적 시장경제'라는 제도와 불협화음을 내고 있다는 점에 천착해야 한다. 우리는 박정희라는 '습속'에 갇혀 살고 있기에 김대중을 보고도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이 좀더 깊이 있는 저작이 되려 했더라면 "박정희"라는 인간의 정체성이 한국인의 정체성에 끼친 영향을 좀더 복합적으로 드러냈어야 했다. 김대중은 왜 그리도 오랜 기간동안 "전라도 빨갱이"로 몰려서 한국사회에 거부되었고 심지어는 1997년 IMF 금융위기 당시에도 김종필 등을 끌어안아 겨우 승리할 수 있었는가? 그리고 왜 김대중 이후에 노무현과 문재인 세력은 김대중과 그 후계자들을 "청산"하였는가? 단순히 지역주의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이런 질문들을 저자가 염두에 두고 책을 썼더라면 더 깊이 있는 저작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투쟁과 분열을 너무 크게 보아 통합과 화해만을 강조하는 바람에 다소 아쉽다고 한다면 내가 류상영 선생의 역작을 조금 박하게 평가하는 것일까?
"왜 우리는 김대중을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혹은 못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여 박정희와의 대화를 통해 "박정희적인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로 논의를 확장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한다. 나는 박정희의 글들을 읽으면서 '내 안의 박정희'를 상당히 많이 느꼈다. 예전에 이 말을 했다가 진보적인 이들한테 많은 비난을 받은 적이 있는데 박정희의 글을 읽어보면 그가 "가장 보통의 한국인"이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박정희를 모르고는 한국인을 설명할 수가 없다고 확신한다. 386세대도 실상은 박정희의 자식들 아니던가? 그렇기에 박정희가 남긴 습속을 넘어서야 그 다음을 논할 수 있다. 아무튼 책을 읽으면서 느낀 바를 짧게 적었지만 이 책은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어 술술 읽힌다는 장점과 함께 저자의 역량이 돋보인다. 나도 끝까지 읽고 나면 생각이 또 달라질 수 있겠다. 많은 이들이 읽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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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 김승호
    노무현의 서사란 게, 한때 그 서사에 나름 몰입했고 지금도 소정의 애정을 가진 입장서 이런 말 하는 게 좀 겸연쩍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게 있지만,
    정치적 진영구분 차원에서야 노무현은 당연 김대중과 맞닿겠지만, 노무현 서사 자첸 기실 박정희 서사와 정서적 공명점에서 서로 맞닿는 부분이 있단 생각이,말씀하신 부분 관련해 들긴 합니다.
    이 책 추천해 주셔서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서로간 주요 쟁점에 대한 상호간 반박 역반박의 디베이트식 구성을 기대한 점에 있어선 약간 빗나간 듯한 감은 있지만, 그러한 부분이 주효한 덕에 말씀하셨던 것 처럼 둘이 함께 처해 있던 당대 전반에 대한 폭넓고 정갈한 서술이 가능했던 듯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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