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10

박정미 - 조동일, [동아시아문명론>을 읽고

박정미 - 조선조 선비의 세상을 보는 감각 -조동일, <동아시아문명론>을 읽고 조동일 교수의... | Facebook

박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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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선비의 세상을 보는 감각
        -조동일, <동아시아문명론>을 읽고


 조동일 교수의 <동아시아 문명론>을 읽다가 뜻하지 않게 조선조와 그 시대를 살았던 양반선비들에 대한 내 오랜 의문이 풀리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그 어둡고 깊은 의문은 국사에 서술된 우리 조상들의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역사적 행태에서 나왔다. 그 의문은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근본시각을 결정하는 것이어서 학창시절 국사교과를 공부하기가 괴로울 지경이었다.
 아무리 약소국이라지만 사건들의 편린으로만 이해한 우리역사는 너무나 부끄러웠다. 특히 그 중  조선시대는 제대로 밥맛이었다. 
제 나라, 민족에 대한 자긍심은 일도 없이 큰 나라 중국에 절대적으로 굴종했다. 태조 때부터 임금의 첫번째 과제는 중국의 책봉을 받는 것이라니 이게 말이 되는가. 집현전 학자들마저 세종이 창제한 자랑스러운 한글을 배척하고 다른 나라의 글자 한문에 끝까지 매달렸다. 이미 망해버린 명나라에 대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내세워 병자호란을 불러일으킨 것도 모자라 나라가 망해갈 때까지 숭명반청을 읊어댔다. 수입한 중국의 신유학을 중국 지식인들보다 더 독실한 믿음으로 모시고 섬겼다.
 이런 껍데기 지식인들이 주역으로 설쳐대는 역사, 그런 매력 없는 역사를 배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조선시대의 국제정세와 문화감각과 생활감정을 가지고 조선시대를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근대인의 상식으로 보면 도저히 이해못할 행동양식이 그 시대의 패러다임을 인정하고 바라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조상들이 세계사에서 특출나게 못난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그 시대는 그런 시대였음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 잘난 유럽인들도 그랬고, 아랍인들도, 인도인들도 큰 틀에서는 다들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을 인류사 보편의 발전과정 단계에 있는 필연적 산물로 이해하게 되었다.
 조동일교수는 세계역사를 대략 네개의 거대문명권으로 구분하는데 이는 고대의 반짝이는 지혜가 중세에 들어와 보편화되면서 다수의 집단 또는 민족을 하나로 묶었기 때문이다.  
“고대문명에서 이룩한 유산을 내용이나 지역에서 대폭 확대해 참여자는 누구나 대등하게 향유할 수 있는 보편주의 가치관을 이룩한 것이 중세문명의 특징이다. 보편주의 가치관이 공동문어로 표현되고 세계종교로 구현되었다.”
한국과 일본, 월남을 아우르는 동아시아지역에서는 공자의 유학이 널리 전해진 5세기 무렵에 중세화가 시작되어 중세문명의 시대에 들어섰다. 
동아시아의 공동문어는 한문(漢文)이고 동아시아아의 세계종교는 유교와 불교이다.
 동아시아문명은 산스크리트어 힌두교-불교문명, 아랍어 이슬람문명, 유럽의 라틴어 기독교문명과 나란히 형성되고 비슷한 변천을 겪었다. 
이러한 문화적지표로 결합된 시대가 세계사의 진정한 중세라고 조교수는 본다. 사회과학에서 상식으로 전해지는 ‘중세 봉건사회’라는 개념설정은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한 채 중세를 관통한 동아시아에는 적용될 여지가 거의 없어 보편성이 없다는 주장이다.
 중국에서 마련한 유산이 중국의 범위를 벗어나고 다른 여러 민족의 동참으로 보편적인 의의를 가질 수 있게 발전해 동아시아문명이 이루어졌다. 
중국문명이라는 말은 고대문명을 일컬을 때 쓸 수 있지만, 중세문명은 동아시아문명이라고 해야 한다. 국가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중세문명의 본질에 배치된다.
외래문화를 멀리하고 민족고유의 문화를 온전하게 가꾸어야 한다는 주장은 중세의 힘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이다. 한문과 유교 사상을 받아들임으로써 동아시아 각국은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주권을 수호할 수 있었다. 고대의 힘으로는 진일보한 중세의 힘을 막을 수 없었다.
이 중세시대의 사람들은 두개의 소속을 가진다. 하나는 동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또 하나는 자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다. 중세는 그 두개의 소속감이 상호모순되지 않고 조화롭게 합치되는 시대였다.
한문은 동아시아의 공동문어로서 문명인으로서 반드시 습득해야할 기본이었다. 왜 세종대에 창제된 한글이 한문을 밀쳐내지 못하고 공존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공동문어와 세계종교를 문명의 지표로 삼는 중세보편주의 세상의 감각을 나는 다른 데서도 읽은 적이 있다.
“당시의 유럽은 지금의 유럽이 아니었다. 어떤 사람이든 일단 기독교도라면 모든 나라가 그의 조국이었다. 어디로 가나 그가 속한 유일무이한 교회가 있었으며 그는 그 교회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라틴어로 말했는데, 이 라틴어는 모든 교회의 언어이면서, 어느 정도 지체가 있는 유럽인의 언어이기도 했다. ----그(이탈리아 학생으로 도보여행자)는 콘스탄츠 호 근처의 성 갈 수도원으로 가서 문지기에게 인사를 했다. 누구도 그가 영국사람인지 아일랜드사람인지 독일사람인지 또는 이탈리아사람인지 묻지 않았다. 그는 수도사들에게 라틴어로 말을 걸었고, 그러면 즉시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 D.H.로렌스 <유럽사이야기> 중에서
 유럽에서도 자국어로 시를 쓰는 것은 근대의 여명이 밝아온 후의 이야기였고 중세의 지식인이라면 라틴어는 기본이었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한문으로만 통문했다고 욕하는 것은 토마스아퀴나스가 라틴어로만 글을 썼다고 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중세의 감각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시대의 문화와 정치와 지식인들을 평가해야 한다.
 동아시아문명권에서 중국은 중심부, 일본은 주변부이고, 한국과 월남은 중간부를 차지한다. 중심부는 문명권의 공유재산이 많고 사유재산이 적으며, 주변부는 공유재산이 적으며 사유재산이 많다. 중간부는 공유재산과 사유재산이 균등한 비중을 가졌다.
일본이 오래 전부터 자국의 독자적문화를 발전해온 것에 열등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것은 문명권 주변부의 고유한 특성이다. 
동아시아에서 과거제를 시행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인 일본은 공용문어인 한문을 사용하는데 가장 뒤쳐졌고 반면에 자국어로 글을 쓰는 데는 가장 앞서간 것일 뿐이다. 대신 그 반작용으로 일본은 동아시아문명권 일반의 심도깊은 철학적 사유를 공유할 수 없었다.
 근대인에게는 부끄러운 책봉체제도 동아시아문명권의 필수적 요소임을 이해한다면 다른 평가가 가능하다. 중세에는 다른 여러 문명권에서도 기본적으로 동질적인 책봉체제를 유지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정상적 논의가 가능해진다.
동아시아의 중세에는 중국에 있던 천자(天子)가 한국, 일본, 월남, 유구 등 여러나라의 국왕을 책봉했다.
산스크리트문명권에서는 중국의 천자에 대응한 전륜성왕(轉輪聖王, 차크라바르틴)이 존재했다. 부처의 대리자로 여겨진 전륜성왕은 조공은 요구하지만 각국의 왕에게 정통성을 부여할뿐 나라의 자주성을 침해하지는 않았다.
이슬람문명권에서는 예언자 무하메드의 대리인인 칼리파가 문명권 전체의 천자노릇을 해왔다.
 마찬가지로 중세유럽에서는 예수의 대리자로 인정되는 총대주교가 왕과 황제를 책봉하고 신권을 행사하여 정통성을 부여해왔다.
 책봉은 임명이 아니다. 국왕은 정복, 찬탈, 계승 등의 방식으로 스스로 권력을 장악했다. 국왕이 임명되는 경우는 없다. 임명되는 자는 국왕이 아니다. 국왕은 스스로 국왕이 되어 책봉받을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한다.
 이렇듯 각 문명권마다 천자와 국왕사이의 정치권력의 배분관계는 조금씩 다르지만 책봉은 통치자가 이미 스스로 얻은 지위를 공인하는 행위였고, 이를 통해 중세문명권의 주권국가로 승인하는 행위였다.
 책봉체제는 하나의 문명권을 이루는 근본제도였는데 근대가 되자 책봉체제가 무너지고 여러 민족국가로 나누어졌다. 책봉체제하  중세인은 이중의 소속관계를 가졌지만 근대로 들어서자 동아시아라는 공동의 영역은 없어지고 자국인만 남았다.
근대인은 책봉체제가 동아시아문명의 공유 영역이 아니고 불평등한 국제관계였다고 이해한다.
근대 중국은 책봉체제에 포함된 전 영역을 자기네가 지배했다고 여긴다. 근대 일본은 책봉체제에서 일찍 벗어난 것이 자랑스럽다고 여긴다. 근대 한국은 중국과의 책봉관계를 사대주의 때문이라고 하고 부끄럽게 여긴다.
하지만 책봉은 문명권 전체의 공동문어를 사용하면서 이루어진 국제관계였다. 책봉체제가 무력의 강약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형태가 아님을 입증하는 사례는 당나라 말기와 북송시대 북방민족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또 15세기 명(明)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월남의 여조가 자청하여 책봉을 받은 사례도 특기할 만하다.
  조선은 중세인의 감각으로 이해해야 한다. 중세를 중세 그대로 바로 볼 수 있어야 아직 미완인 근대의 과제를 이해할 수 있고 근대를 넘어선 다음 시대를 준비할 수 있다.
“중세인이 근대인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나무라는 것은 부당하다.”
조동일교수의 이런 항변을 인정한다면 재조지은을 말하며 명(明)을 숭상한 조선중기 지식인들의 행태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시대 민주당정권 고관대작들이 우루루 중국에 몰려가 만절필동(萬折必東)까지 운운하는 것은 도저히 묻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최근 들어 586정치인들의 퇴행적 정치를 비판하며 조선을 재조명하는 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조선을 현대의 선비질, 중세의 잔재로 현실을 어지럽히는 지적미숙아들을 통해 평가해서는 안된다. 조선을 지금 북한에 남아있는 북조선의 행태를 통해서 바라보는 것도 금물이다. 나쁜 후손들이 조상을 욕되게 하는 전형으로 보인다.
우리가 근대화에 뒤쳐져 나라를 빼앗기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철저하게 반성하고 복기해야 하지만, 그것이 조선시대에 시대를 초월한 인식수준과 능력치를 요구하는 것이라면 멈추고 살펴 볼 일이다. 이 또한 쓰잘데기 없는 역사적 망상이기 때문이다.
14 comments
Sejin Pak
중세의 유럽 국가들의 바티칸과의 관계가 책봉이라고 부른다해도 조선의 중국과의 관계처럼 조공을 바치는 것은 아닌 것 아니었나 생각되는데요. 영어로 tributary relation이라고 하는데, 유럽의 중세의 경우, 그런 이야기 들어본적이 없습니다만 제 전문이 아니라서 모르겠습니다
Reply11 h
박정미
Sejin Pak 다른 문명권과는 달리 바티칸은 제국의 성질을 가지지 않은 점에서 특이성이 있지요.
즉 교황은 종교의 수장이기만 하고 자기 자신이 황제가 아닌 점에서 칼리파, 차크라바르틴, 천자와 달랐습니다. 그래서 국가간 무역에 버금가는 조공무역이 성립될 수 없는 변칙이 있었지요.
조동일교수는 조공을 수탈체제가 아닌 동일문명권의 동질성을 다지는 상징적 교역관계로 이해하기 때문에 책봉체제의 필수요소로 크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Reply10 hEdited


김정흠
그때는 중국이 선진문명이었으니까요
지금은 미국이 선진문명이고
선진문명을 받아들여서 우리의 문명으로 발전시킨게 한국이죠
Reply6 h
박정미
김정흠 그런 제대로 된 역사적 자긍심을 되살리는게 우리 역사학계의 과제인것같습니다. 말도 안되는 국뽕 말고요.
Reply3 h
김정흠
박정미 당연한 말씀입니다
Reply3 h


Paul Shin
지금 시대의 지적 미숙아들을 어떻게 계몽하거나 권력에서 배제하는 일이 역사적 과제가 되었군요.
Reply6 h
박정미
신평 지금의 심리적 내전상태는 중세와 근대의 싸움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Reply3 h


Kim Allen
한자와 책봉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으로 만절필동과 근대화가 늦은 걸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때도 중국왕조는 계속 바뀌고, 중시 철학도 바뀌고, 국가들은 중국과 싸웠습니다
Reply3 h
박정미
김정일 우암 송시열은 중세인이었습니다. 만절필동은 중세인의 신앙고백이었다고 이해합니다.
문명권의 중간부가 중심부보다 사회적 문화적으로 더 깊이 문명의 핵심에빠져들어 헤어나오기 어려운 것도 세계사적 보편성 측면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동아시아는 중세인 채로 근대의 힘에 도전을 받았고 그 결과 중심부 중국은 반식민지, 중간부 월남과 조선은 식민지로전락한 반면 주변부 일본은 문화적 짐이 크지 않아 근대제국으로 재빨리 변신할 수 있었다는 것을 조금은 감안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흥선대원군과 그 아들을 비롯한 구한말 지배계층의 전혀 핀트를 못잡은 대응은 비판받아 마땅하지만요.
Reply3 h


Hyuk Cho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공감이 있습니다. 제가 가진 틀과는 일부 차이도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한화(Sinification/중국화) 되었던 것을 부끄러워 하는데 저는 상반되는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걸 위에서 중세라는 시대로 이해하자고 하는데, 역사라는 틀을 가진 분의 글이므로 동의는 할 수 있으나 저는 달리 사용합니다. 저는 문명화 과정으로 이해합니다. 동아시아?의 문명어가 한자였던 것이고, 그래서 한자문명권이라는 용어를 쓸 수 있습니다. 반도는 2중 문명화 과정을 겪은 것입니다. 한자문명화와 근대 문명화. 한화에서 중국화를 부인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근대문명화 과정에서 서양화와 미국화를 부인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한화는 중세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종교적이지 않습니다. 한화의 혜택은 국가를 조직하는 영감과 방법을 배운데 있습니다. 위에서 예로 들은 과거도 그 한 제도가 되겠지요. 루이14세 이전에 서양에 국가가 없었습니다. 왕과 왕실은 있었죠. 왕이 임명하는 관리가 생긴 것입니다. 왕의 침실 담당 관리, 수건 담당 관리...... 한화된 인족은 '조정'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조정을 운영하는 기초와 방법이 경과 서이며, 방법론이 주례와 같은 '예'였습니다. 당연히 관리가 되기 위해서는 교양이 필요했고, 그 수준을 측정해서 관리로 임용을 했습니다. 그 효용을 아직도 인정해서 '고시'라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겠죠. 근대라는 시기도 특정한 역사적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역사적 단계나 시대가 두부모 썰듯이 나누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전근대 속에 근대가 자라듯이, 근대 속에 포스트모던이 공존합니다. 미래가 비정상이란 이름으로 숨겨져 있겠지요. 좋은 글로 제가 가진 관점을 가늠할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Reply1 h
Hyuk Cho
중국에서 언어 대신에 어언이라고 하는데, 음미해 볼 만 합니다.
Reply55 m
박정미
Hyuk Cho 역시 선배님의 혜안에는 탄복을 금할 수 없습니다. 선배님과 조동일교수의 논지는 전혀 배치되지 않습니다. 선배님의 탁월한 인문학적 혜안과 역사의식에 언제나 놀랍니다.
다만 조교수는 제도적선진화뿐만 아니라 문명적 가치관의 확립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습니다. 조교수는 유교 단독이 아니라 유불선이 합체해서 동아시아적인 내면을 이루었다고 봅니다.
또한 저는 이 글에서 조교수가 과거를 해석한 것에 국한지어 거론했습니다만 근대 이후 포… See more
Reply25 mEdited


Chee-Kwan Kim
중국사를 공부하면서 흥미로웠던 대목 중 하나는, 이민족왕조가 들어설 때마다 어김없이 (그 정도는 다르겠습니다만) 한족 문화에 흡수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한족의 문화적 성취도는 뛰어났고, 그러한 기반 위에 동아시아의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근대민족국가로서의 정신적 물질적 정체성이 구한말까지도 확립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일본과 조선의 시차는 상당했습니다.
Reply16 m
박정미
김치관 앞의 다른 댓글에서도 말씀드렸는데 조교수의 견해에 따르면 그 또한 세계적 보편성으로 해명할 수 있습니다.
중세문명권 주변부는 문명의 짐이 그렇게 무겁지 않아서 독자적사고와 민족문화에 더 빨리 눈을 뜨고 다음의 근대시대로 가볍게 넘어갈 역량을 비축하게 됩니다.
유럽문명권의 영국과 동아시아문명권의 일본을 비교해보면 충분히 설득력있는 견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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