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우익의 평범성을 간파하다 "태평양전쟁만 안했으면 조선을 잃지 않았을텐데"
[녹색평론 김종철 읽기] ⑤
한승동 전 <한겨레>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1.09.22.
- 한 번 더 묻겠는데, '개헌 반대'에 승산이 있다고 보나?
= 되묻겠는데, 민주화 운동 할 때 한국사람들도 승산이 있어서 그렇게 했나?
2006년 2월 말에 서울에 온 일본의 작가이자 반전평화운동의 선봉장 오다 마코토(小田實, 1932~2007)를 플라자 호텔 커피숍에서 만났을 때, 당시 그가 앞장서고 있던 '일본 평화헌법 9조 지키기(개헌 반대)' 운동 얘기를 하다가 마지막으로 던진 질문에 오다는 그렇게 맞받았다. 그 인터뷰(<한겨레> 2006년 3월 1일 등재)를 주선하고 또 자리를 함께해 준 분이 김종철 선생(이하 김종철로 통일)이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말기였던 그때 일본에선, 우리식으로 표현하자면 '밤의 대통령'으로 불렸던 와타나베 쓰네오 <요미우리신문> 사장이 뜬금없이 야스쿠니 신사 참배 반대와 전범자 처벌 얘기를 해서 여론을 달구고 있었다. 일본 우경화의 대부로 불릴 만했던 우파 최대 일간지 총수의 그런 뜻밖의 얘기는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들었다. 오다는 그게 다 개헌 작업 추진을 위한 술수라고 명쾌하게 정리했다. 그대로 두면 야스쿠니 참배 등 곁가지 문제로 본줄기인 개헌 작업에 차질이 생길 것으로 보고 그것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그런 수를 썼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들의 그런 개헌 추진의 목적이 일본을 미국·러시아·중국·유럽과 같은 군수산업 강국으로 만들어 한계에 봉착한 일본 경제의 활로를 여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한국과 일본의 우익이 닮았다는 지적에 오다가 한 다음과 같은 말도 인상적이었다.
"일본 우익과 한국 우익은 닮았다. 하지만 일본 좌익과 한국 좌익도 닮았다. 세계 문제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 오다와 김종철을 연결한 것은 오다가 한일 지식인간의 연대를 위해 발간하던 잡지 <식견교류(識見交流)>였다. 거기에 김종철이 기고했고, 그 인연으로 2002년 겨울에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오다의 저서 <전쟁인가 평화인가>도 녹색평론사가 번역 출간했다.
오다는 2006년의 서울 방문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다. 승산 없어 보이던 제9조(군대보유, 전쟁 반대) 지키기는 아베 신조 정권이 평화헌법을 걸렛조각처럼 너덜너덜하게 만들었지만, 어쨌거나 그 형식은 보전하고 있다. 일본은 지금 '아베노믹스'의 실패와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뜻밖의 악재를 만나 흔들리고 있지만, 오다가 예언했던 쪽으로 착착 나아가고 있다.
일본 패전 70주년인 2015년 8월 29일 일본 효고현에서 열린 '오다 마코토를 읽는 시민 모임'에 연사로 초청받은 김종철은 당시 아베 정권이 "(전쟁) 반성은커녕 오히려 옛 '제국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갈수록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드디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안보 법안 통과를 밀어붙이며 헌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일본을 '전쟁국가'로 만들기 위해 광분"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이 사태는 동아시아의 평화에 대한 심각한 현실적 위협이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제국일본의 부활'이라는 것은 광기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시대착오적인 망상입니다."(<녹색평론> 145호)
아베와 그의 정권뿐만 아니라 그 정권을 이어받은 스가 요시히데 정권, 그리고 9월 말 자민당 총재 선거를 거쳐 늦어도 10월에는 등장할 또 다른 자민당 정권(아마도 고노 다로 정권) 역시 '시대착오적인 망상'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1993년에 낸 <녹색평론 선집 1> 머리말에서 김종철은 <녹색평론>이 "상당한 정도로 번역에 비중을 두어 왔다"면서 이렇게 썼다.
"번역물은 물론 점차로 줄여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겠으나 아직까지 녹색운동이 일천한 우리 사회에서 전통적인 문화 및 정치 논리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하는 녹색의 논리를 선양하는데 해외의 성과를 주목한다는 것은 필요한 일일 것이다. 예를 들면, 그리 역사가 깊다고는 할 수 없으나 어떻든 서구나 북미 혹은 일본이나 인도의 사회과학계에서는 단순한 환경경제학을 넘어 이제는 심지어 생명경제학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대두되어 비교적 정밀한 체계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음에 반해, 아직 국내 사회과학계의 이 방면에 대한 공식적 관심은 거의 한심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녹색평론>에는 일본에 관한 이야기나 일본인이 쓴 글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필자가 이 글에서 얘기해 보도록 '하명' 받은 주제가 바로 그와 관련된 것인데, 이 머리말은 그 배경설명이라 할 만하다. 그의 바람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국내 필자들이 점차 많아졌으나 일본인의 글 또는 일본 관련 글들은 번역문을 포함해서 별로 줄어든 것 같지 않다. 김종철이 일본에 특별히 관심이 많아서였을까? 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함부로 얘기하기가 민망하지만, 일단 그래 보인다. 왜 그랬을까? 이 소박한 의문이 이 글의 문제의식이자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한번 블레이크의 문학에 경도되기 시작한 나는 그 이후에도 그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으로 보이는 시인, 작가, 평론가들을 차례로 발견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이들은 한마디로 '근대'의 어둠에 맞서서 '삶-생명'을 근원적으로 옹호하는 일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의 작품을 조금이라도 더 읽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영문학에 대한 나의 흥미는 상당기간 유지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러한 문학을 읽고 생각함으로써 나는 이른바 압축적인 산업화로 인해 온갖 인간적인 비극과 재난을 겪고 있는 한국사회의 문제를 인류사회 전체가 공통적으로 경험해 온 곤경의 일부로 보는 사고습관에 다소간 익숙해질 수 있었다."
2019년에 낸 김종철 문학론집 <대지의 상상력> '책머리에'에 나오는 구절인데, 김종철은 그런 사고습관이 길러지지 않았다면 <녹색평론> 발간 작업에 열중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하듯 말했다.
이 "압축적인 산업화로 인해 온갖 인간적인 비극과 재난을 겪고 있는 한국사회의 문제를 인류사회 전체가 공통적으로 경험해 온 곤경의 일부로 보는 사고습관"에 이 글의 문제의식과 이어지는 많은 실마리들이 담겨 있다. 김종철이 그런 사고습관을 기를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그가 윌리엄 블레이크와 그의 연구자들이 사용했던 언어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한국 유수의 영문학도였음에도 김종철은 외국어 사용의 원천적 한계를 누차 지적하면서 자신의 영어 실력을 스스로 낮추고 자조했지만, 그의 영어 해독력은 당대 한국사회 기준으로는 최고 수준에 속했음이 분명하다. 오다 마코토와의 인연에서 보듯 김종철의 일본어 해독력에 대해서도 그렇게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그 많은 일본 자료를 찾아내고 읽고, 번역까지 한 것은 우선 그가 일본어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은 "온갖 인간적인 비극과 재난"을 한국사회에 안겨 준 산업화, 곧 "인류사회 전체가 공통적으로 경험해 온 곤경"을 바로 앞서 겪은 선험자, 선행자였다. 김종철이 블레이크 문학에 경도되면서 그 자신도 평생 과업으로 삼은 "'근대'의 어둠에 맞서서 '삶-생명'을 근원적으로 옹호하는 일", 즉 서구 근대 산업기술문명이 낳은 폐해에 맞서 소농 중심의 순환적 생명공동체 '복원'을 꾀하는데 일본은 눈여겨봐야 할 선행 사례였을 것이다.
▲ <신新들의 마을>(이시무레 미치코 지음, 서은혜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 ⓒ녹색평론사
녹색평론사가 그 3부작 중 제2부('신들의 마을')를 번역 출간한 이시무레 미치코의 <고해정토(苦海淨土)>가 그려낸 규슈 구마모토 지역의 유기수은 공해병 '미나마타'의 비극이 그 전형일 것이다. 김종철에게 미나마타 비극은 서구 근대 산업기술문명이 이룩한 성취의 역설이자 그 종착지였다. 이시무레 미치코의 <고해정토>는 그에게 그 디스토피아의 암울한 실체와 함께 탈 근대·산업화, 생명공동체 복원의 실마리, 실낱같은 희망의 근대 극복 가능성을 가장 밑바닥으로부터 끌어올린 사례의 하나였을 것이다.
원폭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나리타 공항 건설 과정의 '산리즈카 투쟁'과 유기농 운동, 미군 기지화와 베트남 반전평화 운동 등도 그에겐 주요 선행 사례들이었을 것이다.
일본은 한국 근대화 및 산업화, 그리고 그 폐해의 선행 사례였을 뿐만 아니라 그 동일체였다고도 할 수 있다. 서구 근대 산업화가 침략과 식민지 경영 등 제국주의 팽창과 불가분의 관계로 동시에 진행됐듯이, 그 서구를 모방한 일본의 근대화·산업화도 유사한 길을 걸었고, 일본 제국주의 팽창은 한반도 병탄 및 식민지배와 불가분의 관계로 동시에 진행됐다. 한국(한반도)의 근대화·산업화도 그 산물이었다. 일본의 2차 세계대전 패전과 함께 그 악연은 청산돼야 했으나, 전후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지배자로 군림한 미국에 의해 좌절됐다. 미국은 냉전의 시작과 함께 제국일본의 청산이 아니라 그 유사체제의 부활 내지 복제 쪽('역코스')을 택했으며, 분단된 한국을 그 복제체제의 하위체제로 재복제했다. 그런 면에서 일본과 한국은 미국의 쌍둥이 식민체제라고도 할 수 있다.
일제 전범들에 면죄부를 주고 그들을 전후체제의 주역으로 복귀시킨 미국은 한국에서도 그것을 복제했다.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미일 안보조약 체결, 1965년 한일협정은 그 제도적 장치였다. 김종철도 누차 얘기했듯이, 한일협정을 통해 일본 자금으로 한국 근대화·산업화를 본격화한 박정희는 만주국 군관학교를 나온 일제 관동군 장교였고, 그 만주국의 설계자는 "만주국은 내 작품"이라고 호언했던 기시 노부스케였다. 그 두 사람의 만주에서의 활동 시기가 겹치지는 않지만, 그들의 인연은 전후 일본과 한국 정경유착의 근간이었던 '만주 인맥'으로 이어졌다. 자민당 장기집권으로 귀결된 일본 전후체제의 근간인 '보수합동'(1955년 체제)을 미국 지원 아래 주도한 인물이 기시였고, 그의 뒤를 이어 한일협정을 마무리한 것이 그의 친동생 사토 에이사쿠였다. 기시와 사토의 외손자 아베 신조가 일본 역대 최장수 총리 기록을 수립할 때까지 전후 일본의 최장수 총리 기록은 사토가 갖고 있었다. 아베가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 집안의 끈은 그의 동생 아베 노부오 방위성대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도쿄올림픽 때 화제가 됐던 골판지 의혹의 주인공 아베 히로노부 미쓰비시상사 패키징 사장은 그들의 형이다.
한국 근대화·산업화의 시발이 바로 서구 근대의 모방자 일본제국의 침략과 식민지배였다. 일본 패전 뒤 그런 관계는 미국에 의해 다시 유사체제로 복원됐으며, 이시무레 미치코가 그린 미나마타의 비극을 낳은 전후 일본체제와 지배권력도 한국에서 닮은 꼴로 복제됐다.
그것을 빤히 들여다 보고 있었을 김종철이 일본의 선례들과 거기에 맞서 싸우며 대안체제를 모색했던 일본 내의 시도들과 그 주역들을 눈여겨본 것은 당연했다.
2015년 8월 효고현의 '오다 마코토를 읽는 시민모임' 강연에서 김종철이 거론한 인물들은 그런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그는 먼저 일본 근대, 메이지 유신의 선각자로 칭송받는 일본 최고액권 1만 엔짜리 지폐의 얼굴 후쿠자와 유키치를 "조선이나 중국인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재앙과 비극과 불행의 사상적 씨앗을 뿌린 장본인"으로 비판하면서 "이 탈아입구론의 근저에 있는 사고구조가 여전히 일본 사회 속에 만만치 않게 살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등장시킨 인물이 오구라 기조(小倉紀蔵) 교토대 철학 교수다. 서울대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이 '한국철학' 전문의, 한국을 잘 안다는 이른바 '지한파' 철학자를 김종철이 거론한 것은, 그가 일본 월간지 <중앙공론>에 기고한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으로 본 한국사회의 본질"이라는 글 때문이었다. 오구라는 당시 재벌가의 횡포에 대한 한국의 비등한 비판 여론을 의식한 한국 1심 법원의 재벌 상속녀에 대한 유죄 판결을 두고 한국사회가 근대적 합리성이 아니라 국민 감정이 지배하는 '전근대적' 사회라고 해설했는데, 김종철은 그것을 굳이 그렇게 해석한 오구라에게서 한국에 대한 '경멸적인 뉘앙스'를 느꼈다. 여론이 재판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세계 일반의 현실인데, 그것을 굳이 한국사회 후진성의 증표로 해석한 오구라를 김종철은 일본 지식인의 한국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과 연결지어 생각했던 것이다. 오구라는 <조선사상 전사(全史)>도 썼고, 그 책이 번역돼 나온다는 얘길 들었는데, 한국을 잘 알고 호의적으로 이해하는 듯하면서도 흔히 경멸조의 하대와 편견을 깔고 있는 일본 보수 지식인 특유의 근거 없는 우월감에서 그 책 내용이 자유로울지 궁금하다. 박근혜 정부 때 주한 일본 대사 2년 근무를 포함해 12년간 한국에서 외교관으로 생활한 뒤 귀국해 문재인 정부를 아예 '빨갱이 정권'으로 매도하며 한국을 지적장애를 지닌 금치산자 정도로 취급하는 <한국인으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의 저자 무토 마사토시같은 사람들이 일본에는 수두룩하지만, 김종철은 그런 사람들은 거론할 가치도 없다고 여긴 듯하다. 그가 그 강연에서 두 번째로 거론한 사람은 한국에서도 그의 베스트셀러 번역서가 여럿 있을 정도로 잘 알려진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다. 기본적으로 보수우익 인사지만 한국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편인 그를 나름의 합리성을 지닌 지식인으로 본 김종철이 문제 삼은 것은 그의 책 <멸망하는 국가, 일본은 어디로 가는가> 때문이다. 그 책에서 다치바나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군국주의자들의 어리석음을 개탄하며 태평양전쟁만 일으키지 않았다면 미국에 참패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김종철이 놀란 것은, 그래서 그 전쟁만 하지 않았다면 패전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만주와 식민지(조선)도 잃지 않았을 것이라며 아쉬워한 대목이었다. 한국인 입장에서 황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발언을 일본의 일급 지식인이라는 자들이 버젓이 공개적으로 하면서도 무엇이 잘못됐는지 감조차 잡지 못하는 일본 지식계의 풍토는 너무 고질적이고 일상화된 것이어서 이런 지적이 새삼스러울 정도다.
일본 유명 저널리스트요 지금도 잘 나가는 원로 평론가 다하라 소이치로(田原 総一朗) 같은 이도 다르지 않으며, 사실상 일본 근현대사를 창출했다는 말까지 듣는 일본의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도 러일전쟁 때부터 일본이 빗나가기 시작했다며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근대와 산업화를 예찬했다. 시바는 결과적으로 동학농민 학살과 청일전쟁, 의병 및 독립전쟁 압살, 을사늑약, 한일합방 등 조선·중국 침략을 정당화한 점에서는 다치바나나나 다하라와 다름없다. 그 강연에서 김종철이 문제 삼은 또 한 사람은 천황제하의 군국일본을 '무책임의 체제'로 비판한, 전후 최고의 일본 민주주의 사상가로 추앙받은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다. 그는 학도병으로 징집돼 평양과 경성(서울)에서도 근무한 적도 있지만 일본의 전쟁 책임론을 논하면서도 평생 조선 식민지배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일본 지식인들이 일본의 전쟁 책임을 얘기할 때 그 전쟁은 대개 1931년 만주침략('만주사변')부터 1945년 패전까지의 전쟁인데, 그들은 이를 '15년 전쟁'이라 부른다. 말하자면 일본 지식인들이 일본의 전쟁 책임을 얘기할 때 1876년 강화도 침략 이후 동학농민 학살과 청일전쟁, 을사늑약, 민비(명성황후) 시해, 조선 병탄, 3.1운동 탄압 등 조선 침략 만행은 아예 거론 대상으로도 삼지 않는다는 얘기다.
1990년대 초 사회주의권 몰락 이후 '리버럴' 세력의 급속한 퇴조 속에 등장한 우익 아베 정권 이후 노골화하고 있는 일본의 가속적인 보수반동화는 이런 일본 지식계 전락의 원인이자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얘기를 할 때 김종철의 놀라운 '특기'가 발휘되는데, 그것은 이런 복잡한 사건이나 흐름들을 간결하면서도 구수한, 막힘없는 사람 이야기로 압축해서 풀어내는 점이다. 그 짤막한 이야기로 복잡한 사건의 핵심을 정확하게, 재미나게 정리해 버린다. 명석한 두뇌에다 타고난 '이야기꾼'이기도 했지만, 그 짧고 재미난 요약을 위해 그는 많은 자료들을 읽고 비교검토하며 숙고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듯 김종철의 일본, 일본인 이야기, 번역은 근대 산업기술문명 비판과 소농 중심의 탈근대 생명공동체 복원이라는 근원적, 문명사적 갈래와 현실정치·경제 체제 비판이라는 또 한 갈래로 그 내용을 대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둘은 결국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한 줄기다. 한국 근현대사가 일본의 그것의 복제이면서도 시민사회 대응의 차이 등으로 아주 같지는 않았으나 탈근대적 과제는 다르지 않다고 김종철은 보지 않았을까.
일본 지식인들이 일본의 전쟁 책임을 얘기할 때 그 전쟁은 대개 1931년 만주침략('만주사변')부터 1945년 패전까지의 전쟁인데, 그들은 이를 '15년 전쟁'이라 부른다. 말하자면 일본 지식인들이 일본의 전쟁 책임을 얘기할 때 1876년 강화도 침략 이후 동학농민 학살과 청일전쟁, 을사늑약, 민비(명성황후) 시해, 조선 병탄, 3.1운동 탄압 등 조선 침략 만행은 아예 거론 대상으로도 삼지 않는다는 얘기다.
1990년대 초 사회주의권 몰락 이후 '리버럴' 세력의 급속한 퇴조 속에 등장한 우익 아베 정권 이후 노골화하고 있는 일본의 가속적인 보수반동화는 이런 일본 지식계 전락의 원인이자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얘기를 할 때 김종철의 놀라운 '특기'가 발휘되는데, 그것은 이런 복잡한 사건이나 흐름들을 간결하면서도 구수한, 막힘없는 사람 이야기로 압축해서 풀어내는 점이다. 그 짤막한 이야기로 복잡한 사건의 핵심을 정확하게, 재미나게 정리해 버린다. 명석한 두뇌에다 타고난 '이야기꾼'이기도 했지만, 그 짧고 재미난 요약을 위해 그는 많은 자료들을 읽고 비교검토하며 숙고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듯 김종철의 일본, 일본인 이야기, 번역은 근대 산업기술문명 비판과 소농 중심의 탈근대 생명공동체 복원이라는 근원적, 문명사적 갈래와 현실정치·경제 체제 비판이라는 또 한 갈래로 그 내용을 대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둘은 결국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한 줄기다. 한국 근현대사가 일본의 그것의 복제이면서도 시민사회 대응의 차이 등으로 아주 같지는 않았으나 탈근대적 과제는 다르지 않다고 김종철은 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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