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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
박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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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
· Seoul, South Korea ·
돌아오기 전부터 매달려야 했던 책출간을 위한 마지막 작업을 겨우 끝냈다. 짐정리를 이제사 하고 나니 이제 막 돌아온 기분이다.
일본에서 했던 강연에 대해 메이지가쿠인 대학에 객원교수로 계시는 서정민선생님이 블로그에 올려 주셨다. 35도나 되는 불볕더위였는데 강연과 학생들과의 대화가 끝난 후 내가 가야 했던 곳까지 차로 데려다 주셨으니 과분한 대접을 받은 셈이다. 덕분에 차 안에서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도 예기치 않았던 수확이었다.
곧바로 의기투합할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언어폭력'에 시달려 본 경험이 있어서일 터. 절대적 소수자가 되어 느껴본 고독감같은 것을 공유했던 것 같다.
한국의 안정적인 자리를 박차고 떠나신 용기에도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바꾸고자 하는 사회가 한국인 이상, 멀지 않은 시기에 다시 돌아오셨으면 좋겠다. 그 자리에 필요한 사람을 그 공간에서 내쫓는 것이 아니라 품어내는 사회. 그렇게 성숙한 사회를 새삼 꿈꾸지 않을 수 없었다.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박유하”(慰安婦問題をどのように考えるべきなのか-朴裕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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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박유하”(慰安婦問題をどのように考えるべきなのか-朴裕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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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 블록 글은 삭제됨 (W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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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하 글의 대한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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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코멘트해 준 분은 高橋源一郎선생.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의 작가다. 오랫만의 해후였다.
10 y
Satoshi Shimada
朴裕河さん、お疲れ様でした。
休暇とはいえ、フランスからの長旅の後、きっとお疲れのことだったかと拝察いたします。そんな中、とても暑い日本での講演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
講演を拝聴いたしました。
新刊の概要を知ることができ、また従軍慰安婦問題のおさらいもできた有意義な講演でした。
講演会では、テキストの読み上げがメインでしたので、朴さんの生き生きとした心の肉声を聞く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を、少し残念に思いました。
しかし、会場を移しての質疑応答の時間には、韓国からの留学生を含むみなさんの質問への応答を通して、その「声」を聞くことができて、とても良い時間を頂戴しました。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ご紹介のブログの写真、一番最後のカットに自分が写っていまし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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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y
서정민
박유하 선생님! 선생님의 멋진 강의를 페이스북에 보도할 때, 좀 더 열띤 현장감과 더 멋진 사진으로 했었으면 했는데, 급히 하고 싶어 부족한 사실보도 정도였습니다. 두고 두고 선생님이 전하고 싶은, 생각하고 계신, 그리고 저와 대화한 내용을 하나하나 한일간에서 함께 풀어갈까 합니다. 더위 잘 견디시고, 8월 서울에서든지, 다시 곧 일본에서든지 만나지요. 제 친구 시마다 선생, 그리고 학부장 나가노 선생 모두 선생님께 깊이 감사해 합니다. 페이스북 친구가 되고 나니까, 오래 만나온 친구 같습니다.
10 y
Park Yuha
서정민선생님, 더운 날 하루종일 함께 해 주시고 블로그에 올리는 귀찮은 일까지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페북의 효용을 저도 새삼 느낍니다. 8월에 오시면 연락 주세요. 다른 선생님들께 안부 전해 주시고요.
10 y
Park Yuha
Satoshi Shimadaさん、
わざわざ来て下さっていたのですね。声をかけてくださっていればよかったのに。暑い中を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またの機会があればぜひ声をかけてくだ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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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y
Satoshi Shimada
朴裕河さん、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初めて実際にお話しやお人柄の一旦に触れることができて、嬉しく思いました。
またの機会には、是非「안녕하세요?」とお声をかけさせて頂きます。
先々週三日ほどソウルで写真を撮ったりしていましたが、秋にまた行こうと思ってい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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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y
Park Yuha
Youngsook Kang '문장이 아름답다'는 칭찬을 들었어요. 그것말곤 잊어버렸네.^^ 내가 한 얘기에 대한 직접적인 코멘트라기보단 본인이 하고 싶은 얘기였어요. 반전이라던가.. 김경수샘이 출판기념모임 하자던데 그 때 봐요.
10 y
Masahiko Nishi
절대적 소수자가 되다!
10 y
Park Yuha
あ、西さんの出現。しかも韓国語!歓迎いたし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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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y
Masahiko Nishi
「究極のマイノリティになること」について考えています。
マイノリティは、マジョリティと戦って強くなろうとする。
良心的なマジョリティは、マイノリティを味方につけたがる。
ほんとうにマイノリティになるには・・・
ひたすら情報収集と想像力を武器にするしかないです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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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y
Park Yuha
Masahiko Nishi マイノリティになりたかったわけではないけど、そのように言っていただけると励まされます。それに「居場所」がないということはどこにでも居場所を見つけられるということでしょうからね。
서정민
·
‘호헌이냐 개헌이냐’하는 고정적 논의를 넘어서, 미래를 말한다. (「護憲か改憲か」という固定的な議論を越えて、未来を語る!)
「서정민 교수의 동경에세이- 종교사학자의 생각」 블로그에 오시면 더 많은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chhistory12/150172282891
내일이 일본 참의원 선거이다. 그것을 앞두고 열린 흥미 있는 심포지엄에 참석하고, 조금 전 귀가했다. 우리 대학 시로가네(白金) 캠퍼스에서 열린 심포지엄인데, 오랜만에 일본 그리스도교계가 합심하여 연 행사이다. gms히 진보적이라고 일컫는 <キリスト新聞>사와 보수적으로 불리는 <クリスチャン新聞>사가 공동주최하고, 메이지(明治)학원대학 그리스도교연구소가 후원한 행사다. 우리 대학 같은 학부 동료이자 오랜 친구인 와타나베 유코(渡辺祐子) 교수가 패널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앞에 건 제목을 달고 열린 '심포지엄'이어서 그래도 좀 거창한 정치이야기가 많이 나올 줄 알았다. 더구나 내일이 선거이고, 이 선거에 일단 승리가 예상되는 자민당이 어느 때보다 집요하게 이른바 ‘평화헌법’을 개정하려고 서두는 시점이 아닌가.
심포지엄은 도립고등학교 현장의 교사, 사립 그리스도교계 학교 현장의 오랜 경험이 있는 분, 그리고 대학교수, 현역 목회자가 패널리스트로 등장했다. 현장에서의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고 갔다. 역사교육의 문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교육통제, 젊은이들이 역사나 정치의식, 크리스천의 신앙실천 등등이다. 결코 정치적 문제에 대한 큰 담론은 없었다. 그런 정치적 테마를 염두에 두고 논의하는 현장의 이야기들이다. 참으로 한국과는 다른 분위기를 새삼 느낀다.
심포지엄에 참석하면서, 내 머릿속에는 계속 한국과 일본의 정치사회상황을 비교하는 여러 생각으로 가득 찼다. 한국은 전 국민 대 다수가 자신이 진보인지 보수인지, 좀 쉬운 말로하자면 좌인지 우인지 스스로 의식한다. 그리고 그걸 자주 표현한다. 오히려 애매한 것을 못 참는다. 좌나 우 라는 말로도 성에 차지 않으면 친북, 종부, 반대로는 보수 꼴통이라는 말로 서로가 상대를 범주화하고, 또한 그렇게 범주화 된다. 반하여 일본은 아주 소수의 좌와 아주 소수의 우가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자신이 우인지 좌인지도 잘 모른다. 별로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소수로 규정된 좌나 도한 우도 자신들이 그렇게 규정되는 것에 대해 편안한 기분은 아닌 것 같다.
한국의 크리스천은 다수의 우와 소수의 좌로 분포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의 크리스천은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다수의 좌와 소수의 우로 나뉘어져 있다. 요즘 우가 더 커진다고는 하지만, 일단 현재 크리스천 그룹 안에서는, 아직 우 라고 불리는 것이 훨씬 눈치 보이는 분위기는 맞는 것 같다. 이것은 물론 신학적 입장에 대한 좌우라기보다는, 사회정치적 성향의 좌우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다만 일본의 크리스천을 비롯한, 소수의 분명한 그룹, 즉 좌든지 우든지 성향을 드러내는 이들은 과연 일본의 미래에 대한 어떠한 꿈이나 비전을 지니고 있는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그들의 꿈이 어떻게 다르며,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아직 정확히 읽을 수가 없다. 다만 그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분명한 성향에 따라,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깊은 관심과 사명을 지닌 것 같다.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심포지엄 말미에 나 온 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가 목사인 일본의 초등학교 학생이 부모의 직업을 묻는 설문조사에서의 이야기이다. 여러 직업 항목 중에 목사가 없었다. 그래서 교사에게 질문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목사인데, 어느 항목에 해당하느냐고. 고민하던 교사가 대답했다. “음, ‘그 이외 기타’가 아닐까”. 일본 사회에서 목사라는 직업은 ‘그 이외 기타’일 수밖에 없다는 소수 정체성을 빗댄 이야기였다. 여전히 나는 한국과 일본의 여러 차이점을 생각하며 사는 시기를 아직 살고 있다.
오늘 심포지엄 시작 직전의 모습, 와타나베 유코 교수도 보인다.
서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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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박유하”(慰安婦問題をどのように考えるべきなのか-朴裕河)http://blog.naver.com/chhistory12/150171947222
서정민 블록 글은 삭제됨 (Why??)
「서정민 교수의 동경에세이- 종교사학자의 생각」 블로그에 오시면 더 많은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 대학에서 초청한 한국의 세종대학 교수 박유하 선생이 오전 오후 두 차례 강연프로그램을 가졌다. 새벽같이 대학에 나가 선생을 만나고, 오전 오후 강연과 점심, 그리고 다른 교수들과의 담소를 함께했다. 그리고 조금 전 선생을 내 차로 동경 시내 목적지에 내려 드리고, 조금 전 귀가했다.
강연의 주된 내용의 다음의 소제목들과 같다.
- 위안부는 누구인가/
- ‘위안부’와 ‘조선인위안부’/ 위안소/
- 강제연행에 대하여/ 일본군과 조선인위안부/
- 20만 명의 소녀/ 패전 후의 귀환/ 사죄와 보상을 둘러싼 갈등/
- 1965년 과거청산에 대해/ 1910년 ‘한일합병’ 조약에 대해/
- ‘죄’와 ‘범죄’/ ‘아시아여성기금’에 대해/
- ‘성노예’에 대해/
- ‘고노(河野)담화/
- 해결을 둘러싼 갈등/
- 세계의 의견/ 제국과 위안부.
많은 생각을 하게했다.
그동안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동안의 판단이 일부 지나치게 성급하게 내려졌다. 다시 천천히 문제의 핵심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 해결의 방법도 더욱 성찰해야할 이유가 상당히 제시 되었다. 여러 입장에 대한 입체적인 사고가 필요한 주제가 아닐 수 없다.
박유하 선생의 곧 출판될 이 주제에 대한 새로운 책은 다시 많은 긍정 부정의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 분명하다. 여러 관점의 생각을 진지하게 경청해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학생들이 참으로 진지하게 들어 주었다. 질문들도 아주 적절하고, 깊이 있는 내용도 많았다. 선생도 최선을 대해 답했다.
한일관계의 더욱 입체적 접근이 필요한 시점에서 의미 깊은 강연과 질의응답의 시간이 되었다. 모든 생각과 모든 관점의 가능성을 다 열어놓고 진지하게 접근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될 문제임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귀한 기회였다.
나 역시 선생과의 진솔한 토론, 앞으로 의견, 관점, 정보의 교환을 지속해 나가기로 했다.
박유하 선생의 메이지학원대학 오전 오후 강연, 질의응답 장면, 코멘트를 맡은 국제학부의 다카하시 겐이치(高橋源一) 선생, 사회와 전체 준비를 맡은 시마다 사이시(嶋田彩司)선생, 강연을 진지하게 듣는 학생들.
서정민
초겨울 일상
「서정민 교수의 동경에세이- 종교사학자의 생각」 블로그에 오시면 더 많은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chhistory12/150179905560
구름 한 점 없는 초겨울 하늘가를 바라보며 출근하다. 라디오 가득 스미요시 미키(住吉美紀)의 밝은 목소리가 명랑하다.
가을이 온 듯했으나 그 가을을 미처 보내기 전에 겨울이 금시 들어섰다. 물론 동경의 초겨울을 춥다고야 할 수 없지만, 코끝에 감기는 공기냄새와 자극이 다르다.
요즘 나는 안간힘을 다하여 우울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결국 이 세상에 가득 흐르는 대부분의 역사, 인간의 드라마, 삶의 여정이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허무하게 하는 것이란 것, 새삼스러운 일도 아닐 터, 그와 다른 마음과 신념의 힘으로 색조를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정치가 한심할 때, 정치를 넘어서는 생각, 사회가 각박할 때, 그 틈새를 읽는 지혜, 그리고 이렇듯 계절이 교교하도록 슬플 때, 거기에 차라리 마음을 깊이 담구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도 아직은 남아 있으리라는 미래에의 기대, 좁지만 하얀 희망, 상처투성이지만 우리를 지탱하는 신앙과 신념, 그리고 한 아름이나 그리운 이들이 가득하지 않은가.
우리 이 나이, 그리고 특히 교수라는 직업은 이런 저런 젊은 고뇌에 대한 응답을 해야 할 때가 많다. 그럴 때 마다 나는 그들의 방황에 정말 얼마나 옳은 해답을 줄 수 있을까 스스로 자신 없을 때가 더 많다. 그러나 나는 되도록 자신 있게 답한다. 무엇보다 내가 강조하는 가치는 늘 답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정답이 많을 바에야 이것이 최고의 답이라고 우기며 사는 것이다.
맑은 하늘에서 이는 싱싱한 바람은 코끝을 타고 가슴을 청량케 한다. 자동차에 내리자 밟히는 고엽(枯葉)의 감촉도 오히려 신선하다.
이런 초겨울, 그 겨울 향기 가득한 창가에서 나는 또 책을 읽을 것이고, 글을 쓸 것이다. 그리고 무엇을 이 시대, 이 역사의 클래스에서 말해야 할지를 생각할 것이다. 오늘 아내가 싸 준 주먹밥 안에는 무슨 반찬이 들어 있을지도 얼핏 생각하며, 우선 맛이 진한 커피를 한 잔 해야겠다.
초겨울이 훅 느껴지는 사진이다
End of resul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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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보다 더한 봄- 요코하마(横浜) 캠퍼스의 벚꽃
「서정민 교수의 동경에세이- 종교사학자의 생각」 블로그에 오시면 더 많은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chhistory12/150188072739
여기 저기 벚꽃 사진으로 SNS가 현란할 정도이다. 나만해도 몇 번이나 봄꽃 사진을 여기에서 함께 나누는지 모른다.
오늘 연구실에 출근했다. 가는 길에 메구로(目黒)에서 논문 마무리를 위해 집이 있는 일본으로 아예 거처를 옮긴 제자 강이레 양을 만나 함께 연구실로 갔다. 오랜만에 하루 종일 논문지도, 함께 공부하기, 주먹밥 사다가 점심 까먹기 등을 같이하며, 한국과 일본 이야기도 잔뜩 나누었다.
그리고 퇴근길에 우리대학 도츠카(戸塚)캠퍼스 그라운드 주변의 화려한 벚꽃을 보았다. 얼마 전까지의 내 사상이나 가치관에 의하면, 봄이면 봄이고, 그것은 별도로 하고, 이데올로기의 우울은 우울 그 자체였다.
즉 세상 돌아가는 꼴 새가 사나우면 봄이고, 꽃이고, 그 어떤 계절의 아름다움이고 다 허망한 것이었다.
그런데, 요즘 나는 좀 다르다. 종교도, 신념도, 이데올로기도, 세상 최고의 대단한 가치도 모두 다 물론 중요하지만, 바로 내 눈앞의 현란한 봄꽃도 아주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되었다. 세상과 자연을 관조하며, 그것이 지닌, 거스를 수 없는 위대한 질서를 깨달았다고나 할까. 오히려 계절의 교교함도 다 잊고 번민했던 내 젊은 날의 초상이 얼마나 가여운 것인가. 그토록 엄연한 생명의 진실마저 처연함으로 가득찬 절망으로 막막하게 잃어버렸던 시대, 그렇게도 꿈결 같은 바람과 향기를 모두 거슬러 몸을 살라야했던 어여쁜 동지들의 넋마저 이제는 더욱 애처롭다.
이런 봄과 꽃바람을 코밑으로 맡을 수 없다면, 우리의 이데올로기는 오히려 그냥 날리는 가화조각이나 버려진 망상에 머물 수밖에 없으리라는 생각으로, 그런 후회로 요즘 나는 가득하다. 이제는 이렇게 지독히 나이가 들어버린 것인지, 이제야 조금 세상 이치에 응할 줄 아는 것인지, 그것이 어느 쪽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 이 화사한 날이 옛 제자가 연구실을 찾아, 생생히 내 학문을 가져갔고, 소소히 연구실의 조교일도 보아주고, 함께 소박한 점심 주먹밥을 나누어 먹으며, 나는 왈, 학문이란, 역사란, 인생이란 이런 것이라고 일갈한 후, 함께 서둘러 나서는 대학 캠퍼스의 훈훈한 봄, 그 땅과 하늘은, 언제 그 어느 것보다, 목숨 걸 가치보다 양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번 봄 내내 친구들과 함께하는 현란한 계절 이야기는 사실 살아있음의 지극한 향연이며. 언제나 반복하여도 생명, 그 경건하고 생생한 보고가 아닐 수 없다, 바로 그런 것을 말한 후 다음쯤에 가서나 학문도, 생애의 가치도, 그 보다 더 붉은 피 같은 이데올로기도 차마 말 할 수 있으리라.
내가 일본에 산 이후 늘 강조하는 일상의 가치는 이런 찬란한 계절에 이르면 때맞춘 꽃향기로 실재하고, 실현되는 것이리라.
친구들, 아무리 허무하더라도 이런 시절에는 봄꽃 향기와 그 바람과 현란한 풍광에 몰입하기를 감히 권한다.
우리 대학 요코하마 도츠카 캠퍼스의 멀리 바라 본 벚꽃군락, 흐린 봄날의 교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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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전야에 참 어려운 강연, 다녀 온 보고
2014/10/05
http://blog.naver.com/chhistory12/220142010244
내일 태풍 18호가 동경부근을 통과할 모양이다. 대학의 강의도 휴강여부를 확인하고, 움직여야 할 판이다. 오늘도 종일 태풍전야의 궂은비가 내렸다. 이 우중(雨中)에 예정된 강연을 하고 왔다. 동경 분쿄(文京)구에 있는 성공회 성 디모데성당에서 열린 관동지역 세 교구(동경, 북 관동, 요코하마교구)연합으로 주최한 강연회였다. ‘한일의 역사를 배우는 회’의 프로그램인데, 의미는 있으나, 요즘의 한일관계 파고(波高)의 높이로 보면, 썩 편안한 강연회는 아니었다. 장소는 처음 가본 성당이었는데, 동경대학 혼고(本鄕)캠퍼스, 야요이(弥生)캠퍼스와 아주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주최 측의 예상보다, 태풍과 비바람으로 인해 참석자는 좀 적은 편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진지한 토론이 가능했다.
본론 이후에 강조한 ‘한일그리스도교 관계사’는 기왕의 내 연구논의를 정리했다고 치고, 모두(冒頭)에 시간을 상당히 할애하여 친일파 이야기를 좀 했다. 강연 순서에 따라 간단히 키워드 정도로 요약, 여기에 보고해 둔다.
나는 한국 친일파의 역사를,
- 첫째 ‘근대화 친일파’로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갑신정변 주최세력), 김홍집 등등으로 설명했다.
- 둘째, ‘한일합병 친일파’로 이완용,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을사오적), ‘일진회’ 등을 들어 설명했다.
- 셋째, ‘식민통치 협력 친일파’로, 일본 귀족이 된 친일파들 필두로, 관료, 법조인, 군인, 경찰, 언론, 예술, 교육, 종교계로 분야를 나누어 설명했다. 이들을 주축으로 2009년에 『친일인명사전』수록대상 4,776명에 대한 선정 상황 등을 보충했다.
- 넷째, 해방 후 ‘기득권 친일파’을 설명했다. 즉 가장 문제가 되는 친일파가 이들인데,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 등등에서 연이어 한국현대사의 ‘메이저’가 된 친일파의 흐름을 보충했다.
다음으로 친일파의 종류를 내 나름의 방식으로 분류했다.
- 첫째, 자신의 개인적 이익과 명리(名利)를 위해 동족에게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준 ‘악질적 친일파’를 언급했다.
- 둘째,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일제에 순응한 ‘민중친일’의 예를 설명했다. 다수의 창씨개명, 징병, 징용, 근로정신대에 강제 동원된 다수의 민중들의 예를 들었다.
- 셋째는 지식인 엘리트 층 일부에서 드러나는 ‘인식론적 친일’을 거론했다. 진정 당 시대 조선이 일본과 하나 되어야만 하고, 바로 그것이 조선의 살길이라는 인식을 지닌, 지식층 일부의 예를, 그들의 직접적 논급을 통해 설명했다.
이어 최근 자주 거론되는 해방 후 친일파의 특징 분류도 적나라하게 소개해 주었다.
- 첫째, 소수지만 친일의 행적을 반성한 ‘인간적 친일파’.
- 둘째, 친일행위에 대한 책임전가를 하고 어찌할 수 없었음을 항변하는 ‘인간이하의 친일파’,
- 셋째, 친일은 오직 반공을 위한 고뇌에 찬 결단이었고, 만일 이러한 자신들을 친일파로 몰아 비판, 공격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빨갱이일 것이라고 열을 올리는 ‘동물이하의 친일파’도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친일파의 심리분석을 통해, 특히 지식인층의 친일 인식과 행위의 단계를 구분해 주었다.
- 첫째, 강제적, 압박을 받아 마지못해 나서는 단계,
- 둘째, 자발적으로 솔선하여 나서는 단계,
- 셋째, 일본인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일본국에 충성을 다하는 단계, 넷째, 주변의 일본인들도 염려할 정도로 광분(狂奔)하여 선두(先頭)에 나서는, 초 적극적 단계 등으로 구분이 가능하다고 예를 들어 주었다.
한국현대사에서 친일파의 문제는,
- 역사적 문제라기보다는 현재적 문제라고 지적했다.
-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바로 그들이 ‘파워집단’,
- ‘주축’의 자리에 있지 못했던 시기는, 거칠게 나누면, 김대중, 노문현 정권 시대 10년 정도를 겨우 거론할 수 있다고 했다.
- 그래서 해방 후의 친일파 기득권 세력은, 이 시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고, 이른바 ‘뉴 라이트’가 적극적으로 태동된 배경이라고 알려주었다.
결국 해방 후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문제는
- 이들이 그대로 ‘메이저’가 되었다는 데에 있다고 했다. 그것은 한국 내부적으로 이들에 대한 역사적 정리, 최소한의 참회와 자숙이 없었다는 점,
-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된 데에는 일본의 적극적인 역사에 대한 책임고백이 없었다는 점에 더 큰 근원적 문제가 집결된다고 지적했다.
- 그리고 다 아는 이유이지만, 해방 후 한반도는 차분한 역사적 문제의 정리보다는 원색적인 이데올로기의 대결, 외세가 작용한 극한의 좌우대립에 함몰되었다는 점을 설명했다.
- 그래서 친일파들의 숨을 곳과 그들의 당당한 역할, 역학구도가 마련된 것에 더욱 직접적인 문제가 있다고 일러두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를 하였다.
- 한국의 해방 후 현대사는 거의 대부분 ‘친일파’의 기득권 역사가 이어져 내려 왔음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왜 한일 관계 역시 바람직하게 전개되지 못했을까 하는 나의 문제제기였다.
- 친일파들이 주도하는 한국과, 그들 친일파의 지근거리의 일본은 적어도 기득권 세력 간이라도 한일관계가 친밀하게 전개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친일파 그들은 일본에 가까운 이들인 바이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문제를 던지고 스스로 대답해 주었다.
- 이들 한국의 친일파들이야 말로 의리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없을 망종(亡種)들임을 알려주었다.
- 이들이 친일을 한 것은 일본을 진정 좋아하고, 이해했다 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현실, 실존에서 가장 유리하고 사리(私利)와 타산(打算)에 맞는 대상이 일본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 언제라도 일본에 대해서도 배반의 칼날을 꽂을 수 있는 존재들임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해방 후의 그들을 그대로 현재적 친일파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치 않다고 해 주었다.
이런 논리에 근거, 아직 한일관계는 그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관계 형성 이전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전제했다.
- 즉 1965년에 한국의 수많은 민중, 의식 있는 이들의 반대를 짓누르고 한일협정을 체결한 당사자들은 앞서 살핀 바대로 과거로 보면, 절대적인 친일파 그룹이었다는 것이다.
- 물론 이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서는 언제든지 일본을 배신하고, 반공주의자로, 민족주의자로 위장할 수 있는 준비가 다 되어있는 자들이었음을 알려주었다.
- 이렇게 보다면, 아직도 일본 전후(戰後)의 국가사회는 일제 하 한국에서 진정한 ‘민족 아이덴티티’를 지니고, 민족독립운동에 주축이 되었던 한국인들, 그들 지도자들과는 한국 독립 후 새로운 관계형성을 아직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점이다.
- 구체적으로 본다면, 상해임시정부 주체들과 일본은 아직도 화해협력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새로운 관계형성도 하지 못한 상태라고 해 두었다.
- 다만 수많은 다른 문제가 가득 산적한 것은 사실이지만, 앞으로 북한과의 국교정상화 과정, 그리고 한국의 통일이 미래적으로 가능하다면, 통일된 한국정부와 한일의 새로운 관계 지평을 다시 형성할 때, 그 모든 것을 새롭게 창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남아 있으리라고 여운은 남겨주었다.
이것이 오늘 강연 전반부 나름 진솔하게 토로한 친일파 담론의 핵심적 요약이다. 이는 강연의 기승전결(起承轉結)과 보면, 기에 해당하는 것이고, 시간상으로도 2시간 강연 중 채 한 시간이 안 되는 시간을 할애한 부분이었지만, 나로서는 나름 처음 꺼낸 이야기, 진솔히 나누고자 한 내용들이 함축되어 있다.
좀 일찍 도착한 강연회장, 성공회 동경교구 성 디모데 성당인데, 100년 넘은 성당 역사에다, 건축도 반세기가 훌쩍 넘은 곳으로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했다. 청중이 모이기 전, 내가 연단에 오르기 전이다.
땅속깊이
친일파를 시기별로 분류하는 건 익숙하지만, 친일가담목적과 가담적극성에 따라 분류하신 게 인상적이네요. 가담목적과 가담적극성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에 놓여 있어서, 둘을 따로 분류할 것이 아니라 서로 합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이 되네요.현대 친일파의 이율배반적 태도를 지적하신 것도 좋았지만, 글의 마지막 부분이 더 많이 다가오네요. 통일한국시대 이후에야 비로소 진정한 한일관계의 정상화가 가능한 것이 아닌가라는 부분요.그런 의미에서, 현재 극단으로 치닫는 한국의 반일감정(혹은 일본의 혐한감정)이 저로서로 매우 우려스럽네요. 과거 독일의 히틀러가 반유대주의를 기반으로 전체주의 국가수반 전면에 등장한 것처럼, 이러한 반일(혹은 혐한)감정이 한일 양국의 전체주의적 사고를 확산시킬 위험성이 있다는 측면에서요.친일(혹은 친한)과 반일(혹은 혐한) 사이에 적극적 평화주의(=폭력적 민족주의에 대한 강력한 저항)가 있음을, 그리고 이 적극적 평화주의야말로 한일양국 뿐 아니라, 평화적인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과도 맞닿아있음을 한일 양국민이 알아가는 날이 올까요.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고민도 바로 이 지점은 아닐까하는 건방진 생각을 해 보네요.2014.10.6. 14:01신고[출처] 태풍전야에 참 어려운 강연, 다녀 온 보고|작성자 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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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
언제는 넉넉하고, 언제는 엄격한 내 기준
http://blog.naver.com/chhistory12/220033108164
나는 사람들의 말이나 글, 행동을 판단할 때의 기준이 그때그때 다르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일관성이 없다. 언제는 불같이 화가 나다가도, 또 어느 때는 그 정도야 이해해야지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기준이 영 없는 것이 아니다.
학자가 연구를 하고 논문을 써서 발표를 할 때는 아주 자유롭게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의 생각이 나와 영 다르더라도, 토론의 격전장이 마련되지 않는 한 나와 다르다는 것만으로 비난하지는 않는다. 특히 그 학자, 그 사람에 대해서는 대단히 부드럽고 관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학자들의 논문이 주로 실리는 학술지에 대해서는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는다. 물론 혹 학술논문의 게재 심사를 맡을 때는, 논지가 분명한지, 자료가 엉망으로 엉키지는 않았는지, 사실관계가 잘못되지는 않았는지, 표절은 없는지 등등에 대해서 심사자의 입장으로 꼼꼼히 살핀다. 혹은 독자의 입장에서도 읽을 때도 철저해야 함은 물론이다. 물론 관련분야에서.
그러나 이에 반해, 정치지도자의 글, 말, 행동에 대해서는 촘촘하고 엄격한 잣대를 갖다 댄다. 그것과 함께 관련된 대중 언론매체의 내용에 대해서도, 내가 보아도 예민하다. 왜 그런가라는 기준은 단 한 가지다. 학자의 논문과 연구는 전문가 집단을 향한 것이지만, 정치가와 언론인의 말과 글은 다수의 대중, 고난의 민중들에게 영향을 직접 미친다는 사실 때문이다.
결코 학자들에게 스스로도 연구자로서, 같은 연구 밥을 먹는 제 식구라서 관대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기를 나 스스로도 자주 각성한다. 다만 학자들에게도 내 생각의 엄격함이 작용될 때가 있다. 학자가 원초적인 순수연구나 논문작업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책입안,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프로젝트를 담당할 경우는 완전히 달라야 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면, 나는, 이른바 ‘뉴 라이트’ 계열의 역사학자들이 자신들의 논문을 쓰거나 학술적 책을 쓰는 것까지 따라다니며 시비 걸고 싶지는 않다. 물론 학술토론의 장에서 함께 논쟁해야 할 기회가 있을 때는, 가차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생각을 담아 ‘교과서’를 쓰는 일에 대해서는 과민할 정도로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난다. ‘교과서’의 집필은 학자들 간의 논의에 머무는 일이 아니라, 학생들, 대중들에게 심대한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또 다른 생각 하나는 SNS 상에서의 생각차이 문제이다. SNS에 대한 나의 이해는, 기본적인 예의만 지킬 수 있다면, 생각과 토론의 자유가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 그것이 어떤 특정한 목적으로 동원된 세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 작위적인 의도로 점철되지 않았을 경우를 전제하고 하는 이야기이다. 나의 SNS상의 친구는, 적지는 않은 편이다. 그러나 그 중에는 정말 도무지 용납할 수 없을 정도로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이 더러 있다. 친구삼은 것이 후회될 정도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한 번도 서로 맺은 친구를 내 손으로 끊어 본적이 없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감내해야 하는 공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이 또한 내 글을 그렇게 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서로 용납하지 않고는 좋은 소통이 불가능하리라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사유와 가치관에 대한 나의 생각과 소통방식은, 내 제자들도 잘 알지만, ‘스펙트럼’이다. 양극 사이에서 생각과 입장은 상당히 큰 진폭으로 유영(遊泳)할 수 있어야 되고, 그것이 인문학적 사고의 출발이라고 여긴다. 특히 학자가 자신의 독특한 논지를 지니고, 소신을 지키며, 거짓되지 않은 자료에 의거했다면, 해석의 기준이 다르다고 해서, 그를 매도할 필요는 절대로 없다고 생각한다. 나와 생각이 달라도 되도록 격려하고 정중히 존중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나와 다른 논자와 학적 토론의 장에서 부딪히면, 여지없이 논쟁하며, 가능하면 결판이 날 때까지 토론한다. 즉 그런 특별한 논의의 장 이외라면, 학자의 자유로운 영혼, 양심, 글쓰기 등등이 결코 다른 환경적 조건에 의해 위축되지는 말아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아무리 한 학자의 사고에 어떤 문제가 있어도 그것을 무조건 제한시키는 것, 혹은 일률적 방향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되도록 제제가 가해지는 것이 더 큰 병폐라는 것이 기본적인 내 생각이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그러한 학자라도 다수의 대중과, 특히 고난의 민중에게 직접적 영향을 직접적으로 미치는 현실참여로 나아갈 때에는 철저히 비판하여, 보통의 상식과 통념, 약자에 대한 겸손한 가치관을 지녔는지를 검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이래서, 나는 내가 보기에도 이 때 저 때 기준이 다르고, 보기에 따라서는 생각이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찬찬히 돌이켜 보니, 그런 나름의 기준은 있다.
이렇게 보면, 내가 잘 대해주고, 넉넉한 마음으로 잘 지내는 동료, 선후배 학자들의 생각에 다 동조하는 것이 물론 아니다. 그리고 나의 적지 않은 SNS 친구들의 생각에 다 ‘좋아요’ 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 때 그 때 다 다르다. 다른 이들도 나를 그렇게 볼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나에게 있어서도 학자로서의 소신이나, 자존심은 천하보다 귀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누구에 의해 제한되거나, 내가 원하지 않는 권위의 영향을 받을 수는 결코 없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다른 학자들에게도 그러한 자유는 지켜지기를 소중히 바란다.
이 맘 때 계절에 내가 일본에서 지내며 참 좋아하게 된 꽃이 수국, 곧 일본에서 부르는 말로는 ‘아지사이’(アジサイ)이다. 대학에, 우리 동네가 ‘아지사이’ 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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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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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친구의 타임라인의 글과 사진
http://blog.naver.com/chhistory12/220038750687
오래된, 학회와 역사연구의 동지이자, 페이스 북 친구기이기도 한 김승태 박사의 타임라인에서, 그 역시 다른 페이스 북 친구 김남현 씨의 포스팅을 공유한 글과 사진을 우연히 보았다. 어제 오후부터 가슴이 아프고 쓰리다. 나도 간혹 한국의 베트남 전쟁사를 이제는 정면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본에서 과거 일본의 어두운 역사를 진실에 입각하여 연구하는 학자나 연구자를 나와 우리는 모두 존중한다. 독일에서 과거 나치의 잔혹한 역사를 가감없이 탐구하는 관점과 연구자를 나와 우리는 칭찬한다. 미국에서도 이제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역사를 반성적으로 연구하는 흐름이 공고하다.… See more
이제 우리도 가슴 아프게 이 시대, 그 전쟁의 역사를 다루어야 한다, 고백적으로 말이다. 여기에 수록된 자료가 정말 이대로는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훨씬 크다.
이 글과 사진을 본 어제 주일 오후부터 나는 무척 우울하다, 거의 말을 할 수가 없다. 다음에 그 내용을 그대로 가져왔다.
[한겨레21], [오마이뉴스]에 올라왔던 인터뷰 내용
우리나라 교과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첨부된 사진은 한국군이 사망한(혹은 한국군에 의해 참혹하게 희생된) 베트남 여성의 시체를 보고 웃고 있는 사진입니다. 참혹하기 그지없습니다.
우리가 배웠던 국사 교과서에는 나와 있지 않은 이런 다소 불편한 내용들을 포함한 '대한민국사'라는 책은 국방부에서 장병들에게 읽지 말라고 권고한 불온도서 목록에 포함됐다고 합니다. 일본의 역사왜곡에 그렇게 반대하는 우리나라, 우리 국민들은 이를 알면서도 모른척 하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있는 것일 겁니다.
왜곡된 역사를 배워서 우리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
'우리가 이렇게 왜곡된 역사로 교육을 하니까(받으니까) 애국심이 생기고, 이런 일들을 더 뭍어두려 하겠구나?'
'그래서 일본이 왜곡하는 거구나?'
'그래서 일본의 왜곡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우리들이 얻은 역사왜곡의 이득을 일본이 얻으면 안되니까?'
왜곡된 역사가 아닌 정말 제대로된 우리의 역사를 배우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미 왜곡된 교육을 받은 자로서, 그것이(저의 사관은 참.. 염치없는 교육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 후대의 아이들에겐 되물림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반성할 점은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아래는 베트남 학살 관련 한겨례, 오마이뉴스의 기사 내용입니다.
살아남은 노스님의 증언
"1969년 10월14일, 베트남 남부 판랑지역에서 남한 군인들이 린선(Linh Son)사 스님들을 향해 총기를 휘두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이공의 보고에 따르면 남한군 한명이 린선사에서 베트남 여성을 희롱하다 주지승에게 쫓겨나자 이에 격분, 동료들을 몰고 와 총기를 난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은 이 사건으로 71살의 주지승, 69살의 노승, 41살의 여승, 15살의 행자승 등 4명이 사망한 사실을 베트남 정부가 공식 인정했다고 보도했다.(<인민군대>지 1969. 10. 24)"
....
당시 유일한 생존자인 푸(78) 스님과 현장 목격자인 응웬티유엔한(45)을 만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내내 필자를 짓누르곤 했던 불안이, 부인하고만 싶었던 이야기가 눈앞에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
아이건 산모건 사정없이.
"따이한 군인들이 먼저 스님들을 향해 총을 쏘았어요. 이어서 살려달라며 달아나는 여자 보살님에게도 총을 쏘았지요. 그리고는 시체를 모두 불태웠어요." 유엔한의 증언이다. 당시 겨우 15살이던 그는 두려움에 질려 고함도 지르지 못하고 숨어만 있었다고 고백한다. 린선사는 모두 다섯 스님이 거처하는 자그마한 절이었다. 그때 푸 스님은 주지스님보다 먼저 마을에 내려가 초상집에서 독경을 읽고 있었다. 증언의 대부분은 유엔한을 통해 이뤄졌고, 그 절의 유일한 생존자인 푸 스님은 말이 없다. 당시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사람들은 그때 그 학살의 주인공인 따이한의 후예들을 살뜰히 배려한다. 시원한 차를 내오고, 과일을 깎아 권하고, 파파야를 먹느라 지저분해진 입을 닦으라고 물까지 받아다 줄 때는 울컥 눈물이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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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
한국군은 잔혹한 대량학살을 일삼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조차 가급적 직접적인 교전은 피하려 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전선도 없고 적이 누군지도 모르는 베트남전에서 베트콩의 근거지를 수색, 파괴한다는 작전상의 명분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학살행위를 정당화시켜 주었다. 필자가 가지고 있는 기록은 그 내용이 워낙 끔찍해 자세히 밝히기에 부담이 없지 않았지만, 그 일부를 여기에 소개한다.
1965년 12월22일, 한국군 작전병력 2개 대대가 빈딘 성, 퀴년시에 있는 투이프 군, 프 호아 사(使), 턴지앙 촌에 500여발의 대포를 발사한 뒤 "깨끗이 죽이고,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파괴한다"는 구호 아래 수색소탕작전을 펼쳤다. 그들은 이 마을에서 12살 이하 22명의 어린이, 22명의 여성, 3명의 임산부, 70살 이상 6명의 노인을 포함, 50여명이 넘는 양민을 학살했다.
". 랑은 아이를 출산한 지 이틀 만에 총에 맞아 숨졌다. 그의 아이는 군화발에 짓이겨진 채 피가 낭자한 어머니의 가슴 위에 던져져 있었다. 임신 8개월에 이른 축은 총알이 관통해 숨졌으며, 자궁이 밖으로 들어내져 있었다. 남한 병사는 한살배기 어린아이를 업고 있던 찬도 총을 쏘아 죽였고, 아이의 머리를 잘라 땅에 내동댕이쳤으며, 남은 물통은 여러 조각으로 잘라내 먼지구덩이에 버렸다.
그들은 또한 두살배기 아이의 목을 꺾어 죽였고, 한 아이의 몸을 들어올려 나무에 던져 숨지게 한 뒤 불에 태웠다. 그리고는 12살 난 융의 다리를 쏘아 넘어뜨린 뒤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넣었다."
판랑에서 헤어진 지 이틀 만에 퀴년시를 조사중인 "나와 우리" 일행에게서 전화가 왔다. "찾았어요! 당시 따이선 현 인민위원회 주석 말이에요." 1966년 3월19일과 20일 이틀간에 걸친 "베트남 중부 각 성의 전쟁범죄조사회의"에서 남한 군대의 죄악상을 낱낱이 밝혔던 응웬탄퐁을 이르는 말이다. "손에 들고 있는 이 자료가 점점 두려워지는군요. 어쩌면 우리는 이 자료를 더 보충해야 할지도 몰라요. 빈딘성을 중심으로 이 자료에 소개된 네 지역말고도 한국군의 학살현장이 더 있다고 하는군요." 당시 응웬탄퐁의 보고에 따르면 66년 1월23일부터 2월26일까지 약 한달 동안 맹호부대 3개 소대, 2개 보안대대, 3개 민간자위대에 의해 이 지역에서만 모두 1200명의 주민이 학살됐고, 그중에는 한명도 남김없이 몰살당한 가족이 8가구나 됐다. 또한 1535채의 가옥과 850만t에 이르는 양식이 불태워졌고, 649마리에 이르는 물소가 총탄에 맞아 죽거나 불태워졌다.
이러한 수색소탕작전은 일차적으로 융단폭격 등으로 작전지역을 공개하고, 한국군 등 지상군이 현장에 투입되어 마을에 남아 있는 주민들을 즉결처분한 뒤 집을 불사르고 불도저 등으로 마을 전체를 밀어버리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생존자들의 한국군에 대한 증언에서 공통되는 점은, 무차별 기관총 난사, 대량살육, 임산부 난자살해, 여자들에 대한 강간살해, 가옥 불지르기 등이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국군들의 양민학살 방식을 정리해보면 몇 가지 공통된 유형이 나타난다.
-주민들(대부분이 여성과 노인, 어린이들)을 한데 끌어모은 뒤 다시 몇개의 그룹으로 나눈 다음 기관총을 난사해 몰살시킨다.
-주민들을 한집에 몰아넣고 총을 난사한 뒤 집과 함께 죽은 자와 산 자를 통째로 불태운다.
-아이들의 머리를 깨뜨리거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거나 사지를 절단해 불에 던져넣는다.
-여성들을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빠져나올 때까지 군화발로 짓밟는다.
-주민들을 마을의 땅굴로 몰아넣고 독가스를 분사해 질식사시킨다.
한국군의 대량학살이 자행된 곳에는 아이들의 입에 캔디나 케이크가 물려 있었다. 노인들의 입에는 담배가 물려 있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마을사람들을 안심시키면서 한곳으로 모으는 한 수단이었던 듯하다.
과연 그대들에게 진정한 반성은 있는가
우리에게도 베트남전은 잊고 싶은 전쟁이다. 한국은 1964년 의료지원단과 태권도 교관 등 270여명을 사이공 남쪽 붕타우에 파견함으로써 베트남전에 군사적인 개입을 시작했다. 이후 65년에서 73년까지 약 30만명의 전투부대를 "베트남 정부의 요청"이라는 미명 아래 베트남전선에 투입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들도 4960여명이 전사했고 10여만명이 부상당했다. 그러나 한국군은 또한 적군인 베트남인을 4만1450명이나 죽이는 전승(?)을 거두기도 했다. 아군 사망자수의 10배에 이르는 적군을 전사시킨 것이다. 그것도 공식적인 통계상으로만!
이제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종전 24년을 맞는 이 순간에도 지구상의 한켠에서는 새로운 총성이 울려온다. 한국에서는 코소보에서의 인권을 외치는 목소리도 높다. 20세기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21세기의 또다른 상처 하나를 낳고 있는 것이다.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상처받은 "오늘"을 치유하는 과정이 없이는 우리에게 미래가 없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양심에 칼을 대는 아픔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할지라도.
역사는 우리에게 의문부호 하나를 던져놓는다. 과연 그대들에게 진정한 반성은 있는가.
호치민.판랑=구수정 통신원
[출처] 한겨레21
베트남 마을에 있는 한국군 '증오비'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 기억할 것'...
출처 : 베트남 마을에 있는 한국군 '증오비' - 오마이뉴스
우리는 영원토록 뼛속 깊이 새길 것
베트남 꽝응아이(Quang Ngai)성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만행을 기록한 비문이 여러 개 있다. 이 중 한 증오비(또는 죄악증거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있다.
하늘에 가 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한국군들은 이 작은 땅에 첫 발을 내딛자마자 참혹하고 고통스런 일들을 저질렀다.
수천 명의 양민을 학살하고, 가옥과 무덤과 마을들을 깨끗이 불태웠다
그들은 36명을 쯩빈 폭탄구덩이에 넣고 쏘아 죽였다.
다음날인 12월 6일, 그들은 계속해서 꺼우안푹 마을로 밀고 들어가 273명의 양민을 모아놓고 각종 무기로 학살했다.
14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들은 비단 양민학살 뿐만 아니라 온갖 야만적인 수단들을 사용했다.
그들은 불도우저를 갖고 들어와 모든 생태계를 말살했고, 모든 집을 깨끗이 불태웠고, 우리 조상들의 묘지까지 갈아엎었다.
건강불굴의 이 땅을 그들은 폭탄과 고엽제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불모지로 만들었다.
선띤현 띤선사 푹빈촌에서는 1966년 10월 9일(음력 9월 27일) 릉동막사에 있던 청룡 3대대 소속 1개 소대가 마을로 밀고 들어와
집집마다 땅굴을 뒤져 주민들을 체포하여 픅빈학교 운동장으로 끌고 가
주민들을 땅에 엎드리게 한 뒤 수류탄과 기관총을 쏘아 모두 8명의 양민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너른 마당 위에 말끔하게 서있는 위령비의 앞면에는 그 때 상황을 설명하는 내용이 적혀있고,
뒷면에는 빨간 글씨로 희생된 사람의 명단과 사망 당시 나이가 함께 적혀있다.
놀랍게도 대부분 갓난아이들과 여자 그리고 노인들이었다.
한국군들이 마을로 밀고 들어오면서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댔고, 주민들은 총알을 피할 수 있는 땅굴을 찾아 몸을 숨겼다고 한다.
한국군들은 마을 곳곳의 땅굴을 수색하여 모두 땅굴 밖으로 나오라고 지시한 후
땅굴 밖으로 기어 나오는 사람들을 차례대로 쏘아 모두 145명의 양민들을 학살하였다고 한다.
유이쑤이엔현 쑤엔터사에서는 1969년 2월 21일에 한국군 때문에 마을에서 도망갔던 34명의 주민들이 설 차례를 지내려 돌아 왔다가 학살당하였으며,
4월 6일에는 74명의 주민들이 모래둔덕으로 끌려가 총살당했고 시체는 포탄구덩이에 던져졌다고 한다.
학살당한 민간인들의 유족이나 그 피해자는 베트남 정부에서 주는 보조금도 받지 못하고 있다.
전사로 활동하다 희생되면 그 유족은 열사보조금을 받을 수 있지만,
민간인인 경우 우리도 일본강점기 시절 일본에 의해 살해된 민간인에게 어떠한 보조금도 해줄 수 없었던 것처럼 단 한 푼도 받을 수 없어 삶이 매우 힘들다고 한다.
베트남전쟁 참전은 정치적 논리에 의하여 박정희가 제안하고 미국이 승인하여 이루어졌다.
그 결과 군사독재는 더욱 강화되었고 사회 전체가 병영 사회화되었다.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려 하지 않고 전쟁을 정당화 하였으며, 참전 군인은 고엽제로 인해 후손까지 이르는 피해를 보았다.
우리는 참전한 대가로 돈을 벌고 그 결과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였다.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만든 것이다. 우리도 일본에 의한 피해자였던 사실을 기억하고 지금도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제라도 베트남에 대하여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보상을 포함한 포괄적인 협조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중대한 국제법 위반행위다. 그러나 참전한 군인이 학살자는 아니다. 그들 역시 피해자일 뿐이다. 가해자는 그 나라를 침략한 제국주의 국가와 그 종속국가이다
[출처]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CD=A0001116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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