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17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새지기의 생존자’였다 [본헌터㉛]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새지기의 생존자’였다 [본헌터㉛]

‘빠리의 택시운전사’는 ‘새지기의 생존자’였다 [본헌터㉛]
고경태입력 2023. 10. 16

[본헌터][역사 논픽션 : 본헌터㉛] 황골 공회당의 세화
내 사유체계를 무너뜨렸던 1966년 추석 문유 대부와의 만남


황골 공회당 창고에서 살아나왔지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 헤어졌고, 나는 서울 종로구 연건동 외할아버지집에 맡겨졌다. 4·19 직전이던 1960년 4월초 경기중학교 입학당시의 모습이다. 아직 명찰도 달지 않았다. 본인 제공

*편집자 주: ‘본헌터’는 70여년 전 국가와 개인 사이에 벌어진 집단살해사건의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다. 아무데나 버려져 묻힌 이들과, 이들의 행방을 추적하며 사라진 기억을 찾아나선 이들이 주인공이다. 매주 2회, 월요일과 수요일 인터넷 한겨레에 올린다. 극단 신세계가 글을 읽어준다.

내 이름은 세화다.

세계평화를 소망하며, 아버지가 지어주었다. 세상은 평화랑 정반대였다. ‘세계평화’는 태어난 지 얼마 안돼 전쟁의 칼날 위에 섰다. 가스실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유태인 아이의 처지가 나와 같았다. 내가 갇혔던 황골의 작은 공회당 창고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였다. 손가락 하나로 삶과 죽음이 결정됐다. 그날로부터 73년, 내가 여태껏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이 기적이다.

나는 방황했다. 그리고 반항했다. 정해진 코스를 거부했다. 1977년부터 한국민주투쟁위원회(민투) 맹원을 거쳐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의 전사가 되었다. 1979년 무역회사인 대봉산업의 해외지사 근무원으로 독일 뒤셀도르프에 이어 프랑스 파리로 갔고, 얼마 안돼 남민전 사건이 터졌다. 나는 직장을 잃었다. 한국에 돌아올 수 없었다. 거대한 파도가 내 인생을 덮쳤다. 생존해야 했다. 파리에서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나는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은 황골에서 시작되었다.
1948년 12월, 나는 색동옷을 입고 돌 사진을 찍었다. 거친 운명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본인 제공

2008년 가을 과거 국가폭력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기관의 한 조사관이 전화를 했다. 참고인 조사 요청이었다. 황골 새지기 사건을 조사하면서 홍 선생님이 그 집안 사람이라고 들었습니다. 당시 사건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내 삶의 기나긴 폭풍은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라는 책에 담겨있다. 1995년 나는 이 책으로 한국에 돌아올 가능성을 보았다. 책에도 썼지만, ‘빠리의 택시 운전사’였던 나는 일찍이 황골 새지기 민간인 학살사건의 생존자였다. 그 조사관은 생존자로서 나의 진술을 듣고 싶어했다. 그러나 나는 그날에 관해 아무 기억이 없었다. 사건 당시 만 세살이었다. 어떤 기대치를 가지고 연락한 그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거절했다. 아는 게 별로 없어요. 조사에 응하지 않겠습니다.



이제서야 다시 말하는 것은, 더 많이 알게 돼서가 아니다. 내 발언이 세상에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안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1947년 12월 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내 기억의 불빛은 1951년 서울 종로구 연건동 298-9 외할아버지 집에서부터 켜져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헤어져 서로 떠났고, 나 홀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서 자랐다.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 계속 몰랐다면, 그냥 얼렁뚱땅 대학 졸업하고 세상에 무관심한 채 편하게 살았을 것이다.

아버지 승관은 1년에 한 두 번은 나를 찾아와 충남 아산군 염치면 대동리 황골로 데려갔다. 그곳에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가 있었고 작은 아버지를 비롯한 일가 친척이 살았다. 서울대 금속공학과 1학년에 다니던 1966년 9월 추석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남양 홍씨 집안의 문자 유자(문유) 대부를 만났다. 황골에서 묵던 작은 아버지 집 동네에서 개울 하나를 건너야 하는 곳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내 삶의 뿌리를 송두리째 드러낸 충격적인 비밀과 진실에 눈뜨게 됐다.

1979년 유럽으로 간지 얼마 안돼 남민전 사건이 터지면서 나는 직장을 잃었다. 한국에 돌아올 수 없는 처지였고, 파리에서 택시 운전대를 잡았다. 1992년 가을 프랑스 난민으로 살던 시절 파리 교외의 작은 아파트에 아버지가 찾아왔다. 가운데는 아들 용빈, 오른쪽은 아버지 승관. 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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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나고 인민군에 끌려갔다가 거제포로수용소에 넘겨졌던 문유 대부는 반공포로 석방으로 황골에 돌아온다. 그러나 고향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아버지와 문유 대부가 이런 이야기를 나눌 때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알아채지 못했다. 대화가 조금 더 무르익고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1950년 9월 미군의 인천상륙작전 뒤 인민군이 물러갔다. 문유 대부만 마을에 없었다. 그해 추석에 부인과 어린 아들을 포함한 도합 열네명의 가족이 공회당에 갇힌 뒤 새지기에 끌려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고 했다.

오촌 당숙 승우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아버지 승완은 죽지는 않았으나 공회당에 끌려가 몽둥이 찜질을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그렇게 하여 황골 새지기에서 80여명이 죽었다. 반공교육의 영향권 아래 있던 나로서는 이게 뭔가 싶었다.



더불어 알게 된 내 어린 시절. 일본에서 돌아와 아나키스트 활동을 하다 전쟁과 함께 도피생활을 하며 부인과 아이들을 황골에 맡겼던 아버지. 문유 대부의 가족처럼 공회당 창고에 끌려갔던 어머니와 나, 돌쟁이 동생 민화.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 동네 아주머니 누군가 나를 지목하며 했다는 말. 쟤 아버지는 빨갱이 아니에요. 살았다. 그러나 얼마 뒤 홍역으로 세상을 떠난 동생 민화. 민족평화를 소망하며 지었다는 그 이름 민화. 내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어머니의 고립감과 환멸.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문유 대부는 그럼에도 그 악의 소굴 같은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집밖에 나가면 가해자들 천지였다. 새로 장가 들었고 딸 셋을 낳았다. 아내는 가해자 집에 가서 품앗이를 했다.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가족들의 넋이라도 지켜야 한다며 고향을 지켰다. 갈 데도 없었다.

문유 대부는 왜 내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내가 서울대 교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일까. 어디에도 하소연할 수 없었는데, 앞으로 뭔가 힘이 생길 것 같은 청년에게 의지하고 싶었을까. 그날부터 내 방황이 시작됐다. 대학을 다니기 싫어졌다. 낙제를 했고, 결국 그만뒀다. 몸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술 대신 담배를 하루에 세 갑씩 피웠다. 음악에 몰두했다. 모든 말들이 엉터리 수작처럼 들렸다. 가장 싫어한 소리는 라디오에 나오는 아나운서들의 청아한 목소리였다. 그 누구하고도 말을 섞기 싫어 물 한 모금을 입 안에 물고 다녔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 물음표가 비대하게 몸집을 키워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1966년 추석의 그 만남은 내 사유체계의 바탕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형해화시켰다.

1992년, 파리에서 망명 중인 아들에게 아버지가 찾아왔다. 나는 물었다. 왜 그때 동네 아이들까지 싹 다 죽였을까요? 1950년 9·28 수복 직후 황골처럼 가족 단위로 마을 사람들을 학살한 경우는 드물다. 한국전쟁에서 이런 류의 학살은 주로 1951년 1.4후퇴 직후 벌어졌다. 아버지는 구원(舊怨)과 텃세와 이권을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묵혀왔던 사적 감정, 가문끼리의 기싸움, 그리고 가구 수에 비해 좁은 땅. 숨기고 있던 알력이 이데올로기 대립과 전쟁이라는 기회를 틈타 순식간에 타올랐다고 했다. 단순한 복수가 아니었다. 상대 집안 씨를 말려야 했다. 그래야 그 집과 땅을 통째로 차지할 수 있었으니까.

1969년, 학과를 바꿔 다시 대학에 들어갔다.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1970년 11월 내 인생에서 두번째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은 반독재를 넘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했다. 그리고 1975년 4월8일 대법원의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한 사형선고와 18시간 뒤의 사형집행. 도무지 박정희 정권의 무도함을 용납할 수 없었다. 나는 자꾸만 황골의 공회당에 동생과 함께 갇혀 떨고 있는 나를 바라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나는 남민전에 들어갔다. 삐라를 뿌리러 거리를 쏘다녔다.

2023년 5월13일 충남 아산시청 광장에서 열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아산지역 발굴유해 봉안식에 참석해 헌화했다. 이날 황골 새지기에서 발굴된 2구도 세종 추모의 집에 안치됐다. 고경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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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념이 투철한 사람이 아니었다. 민족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니었다. 사르트르와 까뮈의 책을 읽으며 어느 새인가 실존주의에 경도되었다. 황골의 공회당에서 살아나온 아이는 부조리에 저항하지 않고서는 못 견디었다. 그렇다. 다시 복구한 내 사유체계의 줄기에 저항이 자리잡았다. 나는 늙어서도 말과 글에서 불온성을 지우지 못했다. 기존 체제에 대한 반항, 주류 가치관에 대한 의문과 회의. 나는 지금도 끊임없이 회의하는 존재다.

어떤 명분으로도 전쟁이 일어나선 안되는 이유는, 황골 새지기에서와 같은 일이 다시 벌어져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교양이다. 누군가는 ‘계몽’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계몽이라는 번역어는 주체와 대상을 나누는 것 같아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계몽’(enlightment)의 본래 뜻은 ‘이성의 빛’이다. 이성의 빛을 잃는 순간, 우리는 인간임을 포기하게 된다. 맹자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을 말했다. 다른 말로 하면 똘레랑스다.

우리는 이성의 빛을 품고 있는가. 황골 공회당 창고에 갇힌 아이는 아직도 불안한 눈초리로 세상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이다.

<다음회에 계속>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글쓴이 소개>
사회부 기자.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를 맡고 있다. <유혹하는 에디터>, <굿바이 편집장>, <대한국민 현대사>라는 책을 썼다. 2000년 베트남전 시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에 관한 미군 비밀문서를 최초 보도했고 <베트남전쟁 1968년 2월12일> 한국어판과 일본어판, 베트남어판을 냈다. 베트남전에 이어 이번엔 한국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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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동안 부역자들 씨 말리겠다며 젖먹이까지 끌고 갔다

등록 2020-06-23 
옥기원 기자 사진
옥기원 기자
https://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950518.html
[6·25전쟁 70년] 학살, 잠들지 않는 기억

  • 1951년 ‘아산 부역혐의 학살사건’
  • 일제 폐탄광서 쏟아진 비녀·구슬…
  • 발굴 유해 대다수가 여성·어린이
  • 아산·천안 곳곳에 ‘보복살해’ 흔적

2018년 봄 충청남도 아산 배방읍 설화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지에서 어린이 장난감으로 보이는 구슬이 발견됐다. 이곳에서는 6·25전쟁 당시 사망한 208명의 여성과 아이 등의 유해가 발굴됐다. 주용성 사진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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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 한반도는 적의로 가득 찬 생지옥이었다. 적의 가족이기에 또는 적을 이롭게하거나 동조할 수 있다는 우려만으로 학살이 이뤄졌다. 전세가 역전되자 반대편에서 보복에 나섰다. 피해는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고, 친척끼리도 총부리를 겨눴다. 그런 야만의 세월 동안 이뤄진 민간인 학살로 최소 1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념 차이에서 시작한 한국전쟁은 사실 거대한 보복전쟁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을 맞아 <한겨레>는 수많은 민간인 학살 가운데 덜 알려진 여성과 아이들이 희생된 사건에 주목했다. 참혹했던 사건과 함께 유해발굴사업 현주소, 2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역할과 올바른 과거청산 해법 등을 2회에 걸쳐 싣는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구슬과 비녀.

아이들이 죽던 겨울은 많은 눈이 내렸다. 1951년 1월이었다. 동네 친구들과 구슬치기를 하던 아이들이 엄마 손에 이끌려 폐탄광 부지까지 왔다. 겁을 먹은 아이들은 차마 울지 못했다. 온양경찰서 소속 경찰과 치안대의 엠(M)1·카빈이 200여명의 주민들을 향해 불을 뿜을 때, 엄마들이 아이들을 치마폭에 감쌌다. 아이들은 구슬을 손에 꼭 쥔 채 엄마와 함께 죽었다. 아이들은 사회주의가 뭔지 알지 못했다. 엄마와 아이들이 죽은 자리에서 비녀와 구슬이 발굴됐다. 이들은 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충남 아산시 배방읍 중3리 마을회관에서 20분 넘게 풀숲을 헤치고 도착한 야산 중턱. ‘부역혐의 사건’이라는 철제 표시판 하나가 이곳이 민간인 학살 현장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른바 아산지역 부역혐의 학살사건이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조사단’은 2018년 2월 말부터 4월 초까지 이곳에서 한국전쟁 당시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 208구를 수습했다. 조사 결과 어른 150명의 유해 중 131구(85%)가 여성이었고, 58구가 어린이 유해였다. 부녀자들이 착용한 (은)비녀 89점과 어린이 장난감, 학살에 사용된 M1·카빈총 탄피도 다수 발견됐다.

발굴 작업에 참여한 홍수정 4·9통일평화재단 조사실장이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제 때 폐탄광 구덩이에서 수십구의 유골이 뒤엉켜 발견됐고, 예쁜 은비녀와 꽃단추, 아이 신발 등도 함께 나왔어요. 다른 유해발굴 현장에서는 건장한 남성 유골이 대다수인데 이곳에선 여자와 아이들의 유골이 주로 발견돼 현장 관계자들도 많이 놀라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충남 아산 배방읍 설화산 폐탄광터에서 발견된 은비녀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제공

지난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아산지역 부역혐의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실규명 결정을 했다. “1950년 9월 말부터 1951년 1월 초까지 김석남(金石男, 사건번호 다-117) 등 최소 77명 이상이 인민군 점령시기 부역했다는 혐의와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온양경찰서 소속 경찰과 치안대(대한청년단, 청년방위대 및 향토방위대, 태극동맹)에 의해 배방면 남리 배방산(성재산) 방공호, 배방면 수철리(세일) 폐금광, 염치면 대동리(황골) 새지기, 염치면 산양1구(남산말) 방공호, 선장면 군덕리 쇠판이골, 탕정면 용두리1구 뒷산, 그리고 신창면 일대 등에서 집단살해되었다.” 발굴된 유해는 진실화해위의 조사 결과보다 실제 피해가 더 컸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아산과 천안 일대의 민간인들이 설화산으로 끌려와 집단학살됐다. 주변 마을과 거리가 떨어져 있어 학살 행위가 잘 드러나지 않고, 폐탄광 부지에 많은 구덩이가 파여 있어 주검을 묻기 쉬운 장소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홍남화 전 민족문제연구소 아산지회장은 “진짜 부역 활동을 한 남성들은 다 도망간 뒤 남은 부인과 가족들만 억울하게 희생된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학살 현장”이라고 했다.



임현재씨가 설화산 민간인 학살 사건의 피해자 유해가 발굴된 터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옥기원 기자

이 마을에 평생 살았다는 임현재(84)씨는 “어머니와 살던 예전 집이 폐탄광으로 가는 길목에 있어서 줄줄이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는 여자와 아이들의 모습을 봤다”며 “한참 뒤 총소리가 빗발쳤고 군인들이 줄줄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릴 때 어머니와 나는 겁에 질려 불을 끄고 이불 속에 숨어 있었다”고 말했다. “수년이 지난 뒤 소 먹일 풀을 베러 뒷산에 갔을 때 흙더미에서 쏟아지는 사람 유골을 보고 놀랐던 기억도 있고, 동네 개가 뒷산에서 사람 뼈를 물고 온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아산지역 부역혐의 학살사건의 시작은 1950년 9월27일이었다. 인민군이 퇴각하자 충남 아산 염치면(현 염치읍)에는 대한청년단, 태극동맹 등 우익단체를 중심으로 마을 치안대가 급조됐다. “부역자들의 씨를 말리겠다”며 동네 주민들을 불러 모은 치안대는 낫과 삽 등을 이용해 부역 혐의자와 가족 등 80여명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학살은 3일 동안 계속됐다. 시신들은 마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새지기 부역혐의자 학살사건’이었다. 군경이 아산 지역에 배치된 시점은 10월1일이었다. 치안 부재의 상황에서 주민들에 의한 사적인 집단살해가 벌어진 것이었다.



6·25전쟁 당시 학살당한 피해자 후손과 이들의 좌익 혐의를 밀고하고 살해하는 데 앞장선 가해자 후손이 집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살고 있다. 전쟁 이전에는 두 집터와 주변 땅 모두가 피해자 가족 소유였지만, 가족이 몰살당한 뒤 대부분의 땅을 가해자 가족이 빼앗았다. 옥기원 기자

당시 사건을 목격한 마을 주민 이아무개씨는 2008년 진실화해위 조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희생자들은 젖먹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줄 세워져 마을 공동묘지 새지기로 끌려갔다. 죽이려고 가는 사람보다 죽으러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았는데도 아무도 반항하지 못했다. 끌려가던 중 젖먹이를 업은 여자아이가 무성했던 콩밭으로 몸을 굴려 숨어 있다가 살아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끔찍한 상황에서 살려고 하니까 젖먹이조차도 울지 않아 들키지 않고 용케 살았다. 끌려간 사람들은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죽을 만큼 몽둥이에 맞은 다음 구덩이에 던져져 흙으로 덮어졌다. 미처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꿈틀거리며 생매장되었다.” 처형과 상관없는 주민들은 희생 장소로 몰려가 구경했다고 한다.

새지기 사건은 부역자 처벌이 표면적 이유였지만, 내막에는 집성촌 내 친척 사이의 구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치안대는 홍사학씨가 부역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 3대에 걸친 대가족 14명을 살해했다. 학살 주도자는 홍사학씨와 같은 홍씨 집안의 홍○○ 홍○○ 형제로, 동생은 인민군 점령기에 좌익 쪽에서 활동하다가 9·28 수복 직전 우익으로 전향해 좌익 혐의자를 체포하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이들 홍씨 형제는 당시 마을 유지였던 홍사학씨 집안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홍사학과 그의 가족을 집단살해한 홍씨 형제는 홍사학의 남은 집과 땅, 세간살이를 모두 차지했다. 이때 마을의 채씨와 이씨 가족 수십명도 마을 공동묘지에서 몰살당했다.

“세상이 언제 또 바뀔지 알고 그런 걸 말해.” 목격자인 이아무개(87) 할아버지는 70년 전 사건에 대해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사소한 감정으로 수십명의 일가족이 죽임을 당했던 그 미친 세월에 대해 말하는 것은 또다른 원한의 씨앗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학살을 자행한 가해자들은 모두 숨졌지만, 가해자 후손과 일부 살아남은 피해자 후손들이 지금도 한마을에서 마주 보고 살고 있다. 홍사학씨와 같은 문중인 홍남화 전 민족문제연구소 아산지회장은 “전쟁이 만든 좌우익의 갈등이 하루아침에 일가족을 몰살하고 친인척을 원수로 만들었다”며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지만 다시는 이런 아픔이 재발하지 않게 진실이 규명되고 기록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10일 홍수정 4·9통일평화재단 조사실장이 한국전쟁 당시 마을 주민 간 학살이 자행된 충남 아산시 염치읍 새지기의 유해 매장지 일대를 설명하고 있다. 옥기원 기자

새지기 사건은 홍사학씨 양자 홍민선(74)씨가 2006년 진실화해위에 진상규명을 신청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지난해 5월엔 유해발굴공동조사단이 발굴 작업도 진행했다. 당시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박꽃님씨는 “마을 주민들 간의 갈등이 남아 있어 주민 중 누구도 유해가 매장된 장소나 당시 상황을 말해주지 않아 발굴팀이 매우 고생했다”며 “유해 발굴 추정지가 마을 공동묘지와 밭으로 사용되면서 유해들이 많이 훼손돼 예상보다 적은 수의 유해가 발견됐다”고 설명했다. 발굴팀은 한달 남짓의 작업 끝에 훼손 상태가 심한 팔, 허벅지뼈 일부를 찾았고 조사 결과 한국전쟁 당시 사망한 7명의 유해인 것으로 판정됐다.

아산 지역의 유해 매장지는 8곳으로 추정된다. 이 중 배방읍 설화산과 탕정면 용두1리, 염치읍 새지기 등 3곳만 발굴이 진행됐다. 염치읍 새지기에선 7명의 유해가 발굴됐지만, 탕정면 용두1리에서는 도로 공사 등으로 일대가 훼손돼 유해가 발견되지 않았다.



충남 아산 배방읍 설화산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지에서 한국전쟁 당시 사망한 수십구의 유해가 발견됐다. 주용성 사진작가 제공

하지만 배방읍 성재산같이 유해가 나올 가능성이 있는 현장도 남아 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김희열(85) 할아버지는 “북한군이 시켜서 (성재산에서) 방공호를 팠고, 국군이 아산을 수복한 뒤 그곳에 많은 사람이 묻혔다. 부역혐의자들이 줄줄이 잡혀가는 모습을 보고 총소리도 들었다”고 증언했다.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누리집에 게시된 ‘아산 부역혐의 사건’ 보고서에도 “성재산 방공호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이를 목격했다”는 다수의 증언이 담겼다.

잔인했던 학살의 흔적은 70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끌려온 사람들이 학살된 공동묘지는 수풀이 무성했고, 부역혐의자들을 파묻었다는 폐탄광 구덩이들은 모두 유실돼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을 입구 팔각정에서 만난 주민들은 “동네 뒷산에서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항상 마음이 불편했는데, 유해를 발굴하고 위령제를 지내서 이제야 마음의 짐을 조금 덜었다”고 말했다.

홍남화 전 지회장은 “당시를 증언할 수 있는 어른들이 몇명 살아 계시지 않아 진실을 규명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며 “더 늦기 전에 이념 학살의 아픈 역사를 규명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유해들을 발굴하는 것이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토대”라고 강조했다.

아산(충남)/옥기원 기자 ok@hani.co.kr




화보보기48
[화보] 6·25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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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6·25 한국전쟁 70년 : 학살, 잠들지 않는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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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익 방앗간 쓴다고, “국군 환영” 외쳤다고…좌익도 우익 집단학살

등록 2020-06-23 
옥기원 기자 사진
옥기원 기자

[6·25전쟁 70년] 학살, 잠들지 않는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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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장마>에서 완장을 찬 좌익 청년들이 우익 인사들을 학살하는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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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전국 곳곳에선 인민군의 비호 아래 지방 좌익세력의 우익세력에 대한 집단학살 사건도 발생했다. 전선이 남북으로 이동하면서 좌익과 우익세력이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반복됐다.

특히 남한 중심부에 위치한 충남은 교통·군사의 요충지로 좌우익 세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가 컸던 지역이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충남지역 적대세력 사건 조사보고서를 보면, 충남지역에서만 인민위원회 등 좌익에 의해 대한청년단과 국민회 등 우익단체 활동을 한 민간인 2천여명이 학살됐다.

대부분은 지역 반동세력을 처단한다는 명목이었지만, 경찰 등 우익 가족이라는 이유로 학살이 된 사례도 있었다. 서천군 문산면에서는 양정목(당시 24살)씨와 그의 동생이 경찰 형제라는 이유로 살해됐다. 당시 인민위원회는 1950년 8월 초 양씨 형제와 함께 경찰관 15명을 붙잡았는데, 형제가 경찰이니깐 더 악랄했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형제 경찰 등 3명을 총살하고 나머지는 풀어줬다. 논산 부적면에선 마을 이장(안종구·당시 30살)의 형이 국민회장 활동을 한 우익 집안이라는 이유로 안씨 일가 13명이 몰살당하는 일도 있었다. 안씨의 형과 동생, 그들의 부인 등은 국군의 서울 수복으로 인민군이 퇴각하던 1950년 9월28일 마을 뒷산 골짜기에서 전깃줄로 손이 묶인 채 총살당한 뒤 매장됐다. 서천군 종천면에서는 마을 두곳의 방앗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우파와 좌파로 갈렸는데, 인민군 점령기에 좌파 방앗간 세력이 우파 방앗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집단 살해한 사건도 발생했다.

우익 활동과 큰 관련이 없는 민간인들이 살해당한 사건도 있었다. 1950년 9월29일 공주 유구면(현 유구읍)에서는 인천상륙작전으로 국군이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국군 환영 만세”를 외치던 마을 한문선생님 정종현(당시 43살) 등 8명이 마을 인민위원회에 붙잡혀 다리 밑에서 살해됐다. 사흘 뒤 경찰에 의해 수습된 이들의 시신에서는 창에 찔린 자국과 총상의 흔적이 발견됐다.



대한민국통계연감을 보면 한국전쟁 기간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학살당한 민간인은 12만2천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군경 등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10분의 1 수준이다.

한국전쟁 시기에 인민군과 국군을 오가며 노역(방공호) 작업을 한 아산 배방면(현 배방읍) 김희열(85·당시 15살)씨는 “전쟁 전 마을 주민들을 괴롭히던 이장과 우익세력(가족)이 좌익한테 죽임을 당한 뒤 전세가 역전된 다음 우익세력들이 더 악랄하게 좌익에 보복하는 일이 벌어졌다”며 “마을 주민들은 혹시나 좌우익 갈등에 휘말릴까 봐 하루하루를 숨죽이고 살았다”고 했다.

안경호 4·9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은 “광복 후 국가건설을 둘러싼 남북 지배자들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이와 무관한 민간인 수십만명의 안타까운 희생이 발생한 것”이라며 “과거사를 청산하고 국민화합을 위해서라도 좌우를 막론한 진상규명과 유해발굴 조사가 진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옥기원 기자 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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