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20

염무웅 - 서경식 선생이 어제저녁 갑자기 별세했다는 소식이

염무웅 - 예리하면서도 감성적인 문장으로 우리의 나태와 둔감을 일깨우던 서경식 선생이 어제저녁 갑자기 별세했다는 소식이... | Facebook

예리하면서도 감성적인 문장으로 우리의 나태와 둔감을 일깨우던 서경식 선생이 어제저녁 갑자기 별세했다는 소식이 뜬다. 사람의 생이 기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글의 발신(發信) 지점이 너무나 독특하고 귀중한 것이었기에 30년을 조금 넘긴 그의 문필생활은 대체 불가의 상실감으로 가슴을 메게 한다.
그의 고단했던 삶을 뭐라 위로할 길이 없구나. 저세상에서나 편히 쉬시라.
(다음은 2012년 4월 <다산포럼>에 썼던 칼럼이다. 그를 추모하는 뜻에서 여기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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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의 질문이 우리에게 뜻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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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목소리의 등장>
방송작가인 고 박이엽(朴以燁) 선생의 맛깔스런 번역으로 서경식(徐京植)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작과비평사 1992, 개정판 창비 2002)가 출판된 지 꼭 20년이 된다. 처음 책이 나왔을 때 다수 독자들의 주목을 끈 것은 실은 그 책의 내용보다 저자가 유명한 서승⦁서준식 형제의 아우라는 점이었다. 그 형제들은 박정희 시대의 국가폭력을 상징하는 대표적 희생자들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알다시피 그들은 재일동포 2세로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고국에 유학을 왔다가 1971년 대통령선거를 1주일 앞두고 ‘간첩’혐의로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 끝에 결국 20년 가까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이렇게 형들을 군사정권의 손아귀에 빼앗긴 채, 아들들의 석방을 애타게 기다리던 부모의 잇단 별세로 더욱 암담한 기분이 된 서경식은 훌쩍 유럽으로 떠난다. 후일 그는 자신의 첫 저서가 탄생하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983년 암울한 마음으로 유럽 여행에 나선 나는 거기서 만난 많은 예술작품들과 대화했다. 그것은 자신이 갇혀 있는 세계에는 ‘외부’가 있다는 발견이었고, 타자의 역사 속에서 스스로를 발견하려는 대화이기도 했다. 그것을 어떻게든 기록하고 싶다, 내 마음속에서 일어난 사건을 표현하고 싶다는 갈망에서 발표할 곳도 없이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디아스포라의 눈』, 한승동 옮김, 한겨레출판 2012, p.221)
그렇게 쓰여진 ‘무명의 재일조선인’ 원고가 우연히 어느 저명한 정치평론가의 소개로 출판에 부쳐지고, 이듬해에는 다른 한 눈밝은 한국인 번역자에게 발견되어 한국어판으로 나오게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집필부터 출판⦁번역까지의 전 과정에서 볼 때 김윤수 교수의 지적대로 “통상적인 의미의 미술기행 —느긋하고 한가롭게 미술관을 돌아다니며 감상한다거나 전문적인 시각으로 작품해설을 늘어놓은 책”이 아니다. 그러나 미술전문가의 저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혹은 전문가의 틀에 얽매일 필요가 없는 우울한 방랑객의 시선 때문에 이 책에서 맛보게 되는, 작품에 자유롭게 접근하는 자세와 다양한 인문학적 소양,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통의 역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예리한 감수성은 좁은 의미의 전문성을 압도하는 매력으로서 독자를 사로잡았다. 이제 서경식은 형들의 아우가 아닌 그 자신의 이름으로 이 땅의 문화계에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한 사람의 저자가 지적 발언자로서 사회적 무게를 획득해가는 과정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관계하는 것 같다. 서경식의 책이 처음 출간된 1992년 무렵은 국내외적으로 중대한 전환기였다.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 사회주의가 몰락했을 뿐만 아니라 남미와 아시아의 많은 군사독재 정권들이 물러났고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새로운 수탈체제가 세계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세계적 조류와 조금 달리 해금 이후 수많은 이념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고 통일운동의 열기가 지축을 흔드는 듯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둔다면 서경식 미술기행의 섬세한 문체는 당대발복(當代發福)을 갈구하는 독서 대중의 조급한 마음에 미지근하게 비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사유는 우리 민족의 역사적 상처에 끊임없이 호소하면서 그것과의 교감을 잃지 않으려 하는 것임에도 당대의 지배적인 이념적 구획에는 잘 포섭되지 않는 미묘하고 독특한 ‘미학’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1세기 들어 김대중 정부가 마감될 무렵에야 그의 두 번째 저서 『청춘의 사신(死神)』(김석희 옮김, 창비 2002)이 출간된 것은 그런 사정을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그런데 이때부터 지금까지 10년째 그 나름의 ‘서경식 붐’이 이어지고 있다. 내 책상 위에 꺼내놓은 그의 책들만 하더라도, 앞에서 거명한 것 이외에 다음과 같은 목록을 더 제시할 수 있다.
  • 『소년의 눈물』(이목 옮김, 돌베개 2004)
  • 『디아스포라 기행』(김혜신 옮김, 돌베개 2006)
  •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박광현 옮김, 창비 2006)
  • 『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철수와영희 2009)
  • 『언어의 감옥에서』(권혁태 옮김, 돌베개 2011)
  • 『나의 서양음악 순례』(한승동 옮김, 창비 2011)
  • 『디아스포라의 눈』(한승동 옮김, 한겨레출판 2012)
<서경식이 자신에게 물었던 것>
서경식에게 문제의 출발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었다. 마치 입양 사실을 모르고 자라던 아이가 우연히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자기 인생의 뿌리에 대한 의혹으로 괴로워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일본 사회의 다수자가 누리는 존재의 자명성이 자신에게 결여되어 있음을 수시로 경험한다.
가령, 소년시절의 독서편력과 성장담을 기록한 책 『소년의 눈물』(p.111~4)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들이 나온다. 어머니와 함께 중학교 면접시험에 간 ‘나’는 전교생 중에 “재일조선인 학생은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통보받는다. 어느날 학교로 가는 전차 안에서 일터로 향하는 할머니들이 조선말로 이야기하는 장면과 마주치는데, 승객들의 시선은 일제히 할머니들에게 쏠리고 ‘나’는 아는 할머니가 말을 걸어올까 봐 가슴을 졸이며 뒷자리로 피해간다. 영어수업 시간에 “I am a Japanese”라는 문장을 배우고 앞자리 학생부터 선생님 입모양을 흉내내며 발음 연습을 하는데, 차례가 가까워올수록 ‘나’는 긴장이 고조되어 입을 열지 못한다. 선생님의 거듭된 독촉에 겨우 “하지만 저는 일본인이 아니라…”고 대답한다.
사회적 소수자로서 겪은 이 모든 쓰라린 경험들이 가시가 되고 몽둥이가 되어 그를 혹독하게 의식화시켰고, 그런 경험의 누적은 그로 하여금 다수자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고정관념에 맞서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그가 글에서 견지하고자 하는 지적 독립성의 원천은 다름아닌 그의 사회적 소외였다.
당연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전제를 다시 한번 의심하고, 보다 근원적인 곳까지 내려가서 다시 생각해보는 것, 간단히 답을 얻을 수 없는 답답함을 견디며 끊임없이 묻는 것, 자신을 기존관념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기어이 정신적 독립을 얻어내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된 지적 태도라고 나는 믿는다. 지금처럼 어지럽고 위기에 처한 시대에는 더욱더 그러한 태도가 요구될 터이다.(『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p.😎
이처럼 독단과 독선에 얽매이기를 거부하는 자유의 정신으로 서경식은 어떤 주제의 글을 쓰든 그것을 자기 집안의 고난의 내력에 관련지어 반추하고 재일조선인의 수난의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 그 의미를 추궁한다. 이를 통해 그는 일차적으로 일제강점기에 자의 또는 타의로 일본에 건너간 재일조선인의 정체성 문제를 파고들지만, 그의 시야는 거기 머물지 않고 중국의 동북지방(만주)과 소련의 연해주에 거주하던 조선인 문제에까지 확장되고 더 나아가 추방과 유랑의 운명에 고통받는 전 세계의 모든 디아스포라에게로 향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의 저서(『고통과 기억의 연대는 가능한가』, p.24~33)를 통해, 1910년에 대만과 조선이 일본 헌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이법지역(異法地域)으로 규정되었고 그 결과 대만인과 조선인은 헌법적 권리의 박탈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 1922년 조선호적령의 실시로 조선인의 일본 전적(轉籍)이 금지되고 이로써 조선인과 일본인의 혈통적 구별이 제도화되었다는 것, 그래서 형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일본 거주지의 동사무소에 출생신고를 한 것이 아니라 우편으로 본적지인 충청남도 논산에 신고를 해야 됐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패전 후인 1947년 외국인등록령이라는 법령이 만들어져 그때까지 일본국민으로 살아오던 재일조선인들이 일순간에 무국적자가 되었고, 새삼 외국인등록이 강제될 때 국적을 ‘조선’으로 신고한 것은 당시에는 아직 ‘대한민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생기기 이전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1965년 한일협정의 체결로 인해 신분상의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조선적’을 ‘한국적’으로 바꾸는 소동을 또 한번 치르게 되었다는 것도 절대다수의 한국인은 거의 모르고 지내는 사실이다.
<일본어라는 언어의 감옥에서>
그러나 서경식은 자신의 국적이 ‘한국’임을 거듭 확인하면서도 자신의 아이덴티티는 재일‘조선인’이라고 주장한다. 이때의 ‘조선’은 결코 어떤 정치적 의미의 국가개념이 아니고 일제강점기에 중국으로 러시아(소련)로 또 일본으로 이산(離散)하기 이전의 하나였던, 또 해방후 한반도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열하기 이전의 하나였던 민족을 가리키는 기호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일본‘국가’의 법적 배제와 사회적 차별 속에서 위태롭게 살아온 서경식이 ‘국어’ ‘국민’ 같은 국가주의적 귀속을 표상하는 개념들에 동조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북간도에서 태어나 평양과 서울에서 공부하다가 일본에서 옥사한 시인 윤동주(尹東柱)는 그에게 조선인의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이 가장 비극적으로 구현된, 어쩌면 가장 순결하게 구현된 모델과도 같은 존재이다. 하지만 윤동주와 자신 사이에 결정적 차이가 있음도 서경식은 놓치지 않는다. 윤동주는 한반도 바깥에서 태어났음에도 모어가 조선어였고 그 모어의 공식적 사용이 금지된 상황에서도 남몰래 모어시(母語詩)를 썼으며 바로 그런 비밀스런 모어 사랑이 그를 죽음으로 인도했을지 몰랐다. 반면에 서경식의 경우 모어의 탈환에 필사적으로 나섰던 형들은 모국에게서 가혹한 처벌로 보답받았고 그 자신은 일본어를 통해 형성된 아이덴티티의 모순을 끝내 벗어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소년의 눈물』이라는 그의 책이 다른 이유가 아니라 “일본어 표현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일본 에세이스트 클럽상’을 받게 되었을 때, 그는 수상식 인사말에서 다음과 같이 묻는다: “나는 모든 것을 일본어로 생각하며 모든 것을 일본어로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일본어라는 ‘언어의 벽’에 갇힌 수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언어의 감옥에서』, p.61)
<봉인된 증언>
서경식이 되풀이해서 여행을 떠나는 것은 말하자면 그런 수인적 지하생활로부터의 절망적인 탈출 시도였다. 인간 영혼의 꿈의 결정체이자 비상(飛翔)의 흔적인 동서고금의 위대한 예술작품들과 접촉하는 동안 그는 인류가 겪은 시련과 고통의 미학적 결과물들인 그 작품들이 자신과 같은 외로운 유랑자의 피폐한 영혼에 말을 거는 것으로 느꼈고, 거기서 승화된 아름다움과 좌절의 아픔을 보았다. 그에게 예술은 차별과 모욕, 강제와 박해의 공동운명에 짓눌리며 힘겹게 살아간 사람들 또는 그것에 저항하다 무참히 죽어간 사람들이 남긴 봉인된 증언이었다. 그러므로 봉인을 뜯어 보통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풀어내는 것을 서경식은 문필가의 의무로 받아들였다. 쁘리모 레비의 삶과 죽음을 꼼꼼하게 추적한 끝에 적어놓은 다음 문장은 그 비관주의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깊은 울림을 준다.
죽어가는 증인들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불길한 징조에 최대한 민감하게 반응해 방죽이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하는 한, 홍수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이치에 맞는다.(『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p.287)
내가 읽어본 서경식의 저서들 중에서 기록자의 의무에 충실하면서도 문학적 완성도라는 면에서 높은 성취에 이른 작품은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이다. 방금 나는 ‘작품’이라는 말을 썼는데, 그것은 서경식의 다른 저서들이 ‘기행문’ ‘에세이집’ ‘강의록’ 따위로 분류될 수 있는 데 비해 이 텍스트는 ① 레비의 무덤을 찾아가는 여행, ② 서경식 자신의 힘든 개인사, ③ 나치 집단수용소에서의 레비, ④ 레비의 귀향과 자살 등 크게 네 겹의 스토리를 정교한 ‘중층적 서사구조’(이 용어는 서경식이 레비의 어느 작품을 분석하면서 사용한 개념이다) 안에 촘촘하게 짜 넣음으로써 수준 높은 문학에 도달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1996년 1월 1일, 나는 밀라노에서 또리노로 향하는 보통열차 안에 있었다.”는 첫 문장에서 시작하여 “내일은 또리노를 떠나는 날이다.”는 마지막 문장으로 끝나기까지의 액자소설적 구성은 액자 안에 담긴 것이 끔찍한 인간파괴의 참상임에도 그것을 아련한 여수(旅愁)의 정서로 감싸고 있어, 놀라운 예술적 훈향과 치떨리는 아픔을 함께 맛보게 한다.
<민족문학⦁한국문학⦁조선문학>
어느 책에서나 서경식의 문장은 치열한 문제의식으로 가득차 있어, 독자를 편히 앉아있게 놔두지 않는다. 세계를 가득 채운 모순과 불의에 대항해 함께 싸울 것을 촉구하는 글에서 우리가 주저와 갈등을 경험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 점에서 나는 그의 글에 적잖은 불편과 뜨거운 공감을 동시에 느낀다. 다른 책들도 그렇지만, 특히 그의 최신의 저서 『디아스포라의 눈』은 대지진과 원전사고 이후의 일본 사회를 비판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어서, 큐우슈우(九州)지방 한 귀퉁이를 잠깐 구경한 것 이외에 일본을 살펴볼 기회가 없었던 나 같은 사람에게는 공부되는 바가 많았다. 그런데 이 책의 한 장은 나의 직업과 직접 관련된 내용으로서, 그에 대한 답변 삼아 짧게라도 내 생각을 피력하지 않을 수 없다.
2007년 12월 지난날의 민족문학작가회의가 한국작가회의로 명칭을 바꾼 것은 언론 보도로 어느 정도 알려진 사실이다. 상당 기간의 내부적 토론과 적잖은 진통을 거친 끝에 회원들의 투표로 그렇게 결정되었는데, 서경식의 글 「한국문학의 좁은 틀을 넘어서」는 바로 그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그의 주장과 의문은 다음의 문장에 요약되어 있다.
나는 ‘한국문학’이라는 말이 ‘대한민국이라는 한 국가에서 유통되는 문학’이라는 극히 한정된, 평범한 의미밖에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문학’이란 말은 ‘민족문학’이라는 말보다 협소한 개념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래서 묻고 싶은데,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건국 이전의 문학은 한국문학인가? 고인이 된 작가나 월북작가, 디아스포라 작가도 거기에 포함되는가? 재일조선인의 시나 소설은 한국문학인가, 아니면 일본문학인가?(『디아스포라의 눈』, p.216)
사실 이 문제는 일찍이 1996년 ‘문학의 해’를 기념하는 심포지엄에서 재일동포 작가 이회성(李恢成)이 제기한 바 있었고, 이에 대한 견해를 나는 계간 『한국문학』(1996년 겨울호) 에 발표한 바 있었다.(염무웅, 『문학과 시대현실』, p.572~8에 재수록) 이회성과 서경식의 주장의 차이점은 전자가 일본어로 쓰여진 자신의 작품이 ‘범민족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인 데 비해 후자는 ‘한국문학’이 한반도 남쪽 문학에 국한된 협소한 개념으로서 대한민국 이전 및 대한민국 바깥의 ‘민족’문학을 포괄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 자신도 작가회의의 명칭에서 ‘민족문학’이 떨어져나간 것이 심히 아쉽기는 하다. 그러나 서경식의 주장에도 동조하기 어려움을 느낀다. 간단히 말하면 ‘대한민국’은 한반도 남쪽에 실존하는 국가의 공식명칭이지만, ‘한국’은 한편으로 그 대한민국의 약칭으로 통용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대한민국 국가기구의 작동범위를 넘어서, 때로는 그것과 무관하게 때로는 그것에 저항하면서, 삶을 꾸려가는 더 광범한 인간공동체를 가리키는 기표인 것이다. 나 자신으로 말하면 일제강점기 말년에 태어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우리 세대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는 ‘한국’이 단순히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미치는 영토적 범주로서가 아니라 그 이상의 좀더 영속적이고 보편적인 실체로 입력되어 있다. 1948년 이후 이 땅에서 태어난 세대들은 자신의 삶의 터전이자 자신의 정체성의 근원으로서 한국 아닌 그 어떤 ‘외부’를 상상하는 일이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양복⦁양식⦁양옥에 대비된 한복⦁한식⦁한옥의 ‘한’(韓)은 단지 1948년 이전의 ‘조선’뿐만 아니라 1910년 이전의 ‘조선’에도 맞먹을 만한 어떤 항구성을 이제는 지니게 되었다고 인정되는 것이다.
요컨대 ‘민족문학’ ‘한국문학’ ‘조선문학’은 단순히 이론적 분별을 요하는 개념적 문제라기보다 19세기 중엽 이후 오늘까지 진행된 민족의 이산(離散)과 남북분단의 현실을 언어적으로 반영한 복잡한 자기분열의 표현이다. 물론 우리는 ‘한국’의 국가주의화가 가져올 퇴행의 위험을 경계해야 하고, 마찬가지로 ‘조선’의 과도한 민족주의화에 따르는 시대착오적 배타주의도 극복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디아스포라의 존재는 긍정적인가? 그렇다. 그건 분명 긍정적이다”(『디아스포라의 눈』 p.113)라는 서경식 같은 소수자의 목소리가 한반도의 남북 어느 쪽에서나 충분히 존중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의 그런 불안정한 위치는 언젠가 통일 한반도에 도래할 평등하고 평화로운 다민족⦁다언어⦁다문화사회의 형성을 위해 불가결한 주춧돌 노릇을 할 것이다. 그때 그 사회에 붙일 이름이 ‘한국’일지 ‘조선’일지 또는 제3의 어떤 것일지— 그것은 그 해방된 사회의 형성을 위해 투쟁하고 헌신한 사람들이 그때 가서 스스로 결정할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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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범, 정승국 and 256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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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seop Han
선생님, 고맙습니다...
김준태
@서경식 선생님! 고이 잠드소서! 좋은 세상에서 아름다운 生과 평화를 비로소 누리소서!! 손 모아 합장!! (서경식 선생님의 일생을 이렇토록 간절하게 깊게 다가가서 올려주신...염무웅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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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Heehwan Lee
선생님, 잘 읽었습니다. 고난에 찬 소수자의 삶을 살다가신 고 서경식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김찬성
업친데 덥친격으로
일제침략과 박정희의 독재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조작한 간첩사건의 최대 피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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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unock Ham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염무웅선생님, 감사합니다.
이삼교
선생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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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용식
서경식 선생님의 영면을 기원합니다
백승휘
서경식 선생님 편히 잠드십시요. 염무웅 교수님, 잘 읽었습니다. 묵직하게 가슴을 때리네요.
Charlie Hong
삼가 고인의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손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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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염 무용 선생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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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석 
Follow
선생님 글 잘 읽었습니다
서경식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장계순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Sam-Huan Ahn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조작극의 희생자가 없기를 축수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각성과 실천적 노력이 또한 아울러 필요하겠습니다.
4
최병훈
먼저 서경식 그의 명복을 빕니다.
모든 사람은 세상에 나오자 마자 자신의 운명을 부여 받게 되지요. 그것은 선택이 아니지요. 그 운명이 이유없이 자신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가하게 될때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게 되지요 그 고통이 가혹하면 할 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에 묶여서 플려나지 못하고 세상을 원망과 절망속에서 마감하게 되지요. 우리가 말하는 이승을 떠도는 수많은 원혼들이 바로 이들이지요. 그들은 이승에서 풀지 못한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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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연
아...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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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효
잘 읽었습니다. 서경식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허재원
'죽어가는 증인들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불길한 징조에 최대한 민감하게 반응해 방죽이 무너지는 것을 막지 못하는 한, 홍수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쪽이 이치에 맞는다.' - 이 부분이 예언적입니다.
2
김경락
선생님 글 감사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Jeongho Park
곡절 많은 세상에서 올곧게 살아가신 삶을 잘 정리해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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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욱천
삼가고인의명복을빕니다
김지영
황망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그간의 발자취를 따라가봅니다
Wan Kim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서경석 선생님의 책<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읽고 있는데 서거 소식을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통해 고인을 더 깊게 통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Seungryul Lee
갑작스런 비보입니다. 언어의 감옥, 실존의 감옥에서 벗어나 저 세상에서나마 편히 쉬시길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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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
잘 읽었습니다. 마음이 저릿저릿합니다. 그리고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를 주문합니다.
Kyungsoon Lee
서경식 선생님의 저작물 속에 녹아있는 고통의 미학을 이토록 잘 설명해 주시다니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나는 누구인가를 찾아 부단히 성찰해 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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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찬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김수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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