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1

명예욕에 설 자리 잃은 '무시무시한' 광주 이야기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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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명예욕에 설 자리 잃은 '무시무시한' 광주 이야기[주장] <넘어 넘어> <광주일지>를 두고 벌어진 민망한 일들
15.05.22 21:42l최종 업데이트 15.05.22 21:42l
설갑수(ks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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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인 현장 보고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영문판 재발간 움직임이 일고 있다.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민주화, 인권운동사에 남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중요 기록물이 절판된 지 10년이나 지났는데도 재발간 되지 못하고 있다. 영문판의 번역편집자인 설갑수씨가 영문판 재발간과 관련한 소회를 보내왔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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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일지'(Kwangju Diary: Beyond Death, Beyond the Darkness of the Age, 설갑수 옮김, 1999)'.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자신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책을 한 번은 읽는다. 1980년 5월 광주항쟁 10일을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아래 <넘어 넘어>, 1985)가 나에게는 그런 책이었다. 자신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린 책을 다른 나라말로 옮길 기회가 온다면, 개인에게는 큰 기쁨이리라. 나는 그 기쁨을 1999년에 누렸다.

그해 5월, 나와 내 친구 닉 마매타스(Nick Mamatas)는 함께 <넘어 넘어>를 번역해 '광주일지: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Kwangju Diary: Beyond Death, Beyond the Darkness of the Age>(아래 <광주일지>)라는 제목의 책을 세상에 내놨다. 이 책은 당시 미국 UCLA대학에서 아시아태평양 기록물 시리즈(UCLA Asian Pacific Monograph Series)로 출판되었다.

<넘어 넘어>는 한국에서 출간되자마자 금서가 됐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당시 저자 명의를 빌려준 소설가 황석영부터 책을 출간한 풀빛출판사 사장 나병식까지 모두 체포해 버릴 정도로 전두환 정권이 무서워했던 책. 그러면서, 전두환 자신도 읽어봤다는 책. 그 후 합법 비합법으로 100만 부 이상 팔렸다는 책이 <넘어 넘어>다.

올해로 <넘어 넘어> 출간 30주년을 맞았다. 돌이켜보면, <넘어 넘어>가 금서이던 1980년대, 그리고 베스트셀러였던 1990년대가 이 책의 황금기였다. 반면 최근 <넘어 넘어>와 <광주일지>를 두고 아쉽고 민망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 민주주의 슬픈 자화상을 보는 듯했다. 나는 이제 더 늦기 전에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를 하면서, 어지간한 경우가 아니라면, 인물의 실명을 쓸 것이고, 존칭은 생략하겠다(관련기사 : "밖에선 <죽음을 넘어~> 영문본 절판...").

커밍스, 촘스키, 샤록을 흔들어버린 '무시무시한 이야기'

<광주일지>를 번역하게 된 개인사부터 이야기하는 게 순서일 듯하다. 내가 <넘어 넘어>를 처음 접한 것은 책이 나온 1985년 5월, 고등학교 2학년 때다. 같은 반 친구였던 최경송이 목사였던 부모님이 몰래 돌려보던 책을 자기도 읽었다며 무시무시한 책에 대해 얘기해줬다. 그 무시무시한 책이 <넘어 넘어>였다.

5월 광주항쟁에 대해 풍문 정도를 들었던 내가 던진 첫 질문은 "공수부대가 학생들을 많이 죽였겠네"였다. 그런데 경송이의 대답은 당시 나에게 충격이었다. "아니, 대학생들은 다 도망가고, 노동자들만 죽었어." 몇 주 후, 우연히 책을 구해 볼 수 있었고, 앞에서 말했듯이 <넘어 넘어>는 나를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았다.


물론, 그 '뒤흔들린 경험'은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넘어 넘어>가 기록한, "군인들이 나라 지키라고 준 총으로 제 나라 백성 쏴 죽이고, 똑똑하고 정의롭게 보이던 대학생들은 도망가고 민중이 최후에 남았던" 광주항쟁의 진실은 한국의 한 세대를 뒤흔들어 버렸다. 내 친구 최경송은 지금도 경기도 과천에서 지역운동을 하고 있다.

이러저러해서 대학 졸업 후, 미국에 공부하러 왔다. 그리고 서점에 갈 때마다, 아쉬움이 생겼다. 1990년대 초, 중국의 천안문 항쟁 직후라서, 서점에는 천안문 학살에 대한 책이 넘쳐나고 있었다. 실록부터, 분석서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아시아에서는 적어도, 광주항쟁이 현대 민중항쟁의 원조 격인데, 천안문 항쟁처럼 국제 사회에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외면받는 것이 안타까웠다. 1995년 전두환과 노태우가 내란과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되어 해외 언론에 한국 민주화와 광주항쟁이 재조명을 잠시 받을 때, 나는 <넘어 넘어>를 번역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또한, 1995년 5월 당시 진보월간지 <말>이 <넘어 넘어>를 실제 집필한 사람은 황석영이 아니라 이재의(당시 광남일보 논설위원)였다는 기사를 보도했다(이재의가 주도적 역할은 한 것은 사실이나, <넘어 넘어>를 그가 단독 집필한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아래에 다루겠다). 그해 12월, 당시 <말>의 미국 통신원이었던 김민웅 목사(현 경희대 휴마니타스 교수)를 통해 이재의와 연락이 닿았고, 풀빛출판사와 영어판 판권 계약을 했다.

<넘어 넘어>는 번역하기에 녹록한 텍스트가 결코 아니었다. 운동권 글투답게, 대부분 문장에서 주어는 생략되었고, 수동태가 태반에, 과장된 어법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번역 과정에서 이러한 생생한 분위기를 영어권 독자들이 이해하는 한도 안에서 최대한 살리고 싶었다.

이 복잡한 과정에서 탁월한 편집자 마매타스의 역할은 매우 중대했다. 작업 초기에는 번역 문장 하나하나를 두고 서로 다퉜다. 고성과 욕설이 오가기를 몇 차례, 그러면서 몇 가지 원칙이 정해졌고, 작업은 신속히 진행됐다. 이 과정 탓인지, 마매타스는 그 후 다큐멘터리 제작에서 편집자·소설가로 진로를 바꾸었고, 현재 버클리에 있는 출판사의 책임 편집자다.

번역 작업의 속도가 붙었으나, 일의 심적 부담은 줄어들지 않았다. 아마도 <넘어 넘어>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낱말은 '구타'일 것이다. 같은 낱말을 계속 반복하는 것은 영어 어법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군인이 민간인을 구타했다"라는 말을 수없이 다른 낱말로 옮겨 써야 했다. 통닭구이, 원산폭격 등 광주 시위대가 거리에서 당한 고문도 옮기기 힘든 부분이었다. 직역 대신 의역으로 고문을 묘사하려니, 희생자가 직접 겪은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몸으로 고통이 느껴졌다.

그러나 가슴 벅찬 순간이 더 많았다. 나는 번역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당시 새로 나온 광주항쟁 관련 자료를 통해 사실 확인을 병행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광주일지>는 주석도 많고, 이재의의 동의로 본문을 다시 쓴 부분도 있다. 그런 탓에 <넘어 넘어>의 80%가 <광주일지>라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주석은, 1980년 5월 21일 오후 5시경 시민군이 전남대 병원 옥상에 설치한 2대의 LMG 기관총에 대한 것이다. 그날, 계엄군 발포 직후, 시민들은 무장하기 시작했다. 12층 병원 옥상에 설치한 2대의 기관총은 계엄군이 임시 사령부로 사용했던 4층 도청건물을 위협할 수 있는 무기였다. 항쟁 나흘 만에, 시민들이 처음으로 확보한 전술적 고지였던 셈이었다. <넘어 넘어>는 시민군이 도청을 향해 기관총을 발사하고, 그것이 계엄군의 후퇴를 재촉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자료를 통해 그것은 잘못된 기술이었음이 드러났다.

시민군은 기관총을 쏘지 않았다. 그것은 위협용이었다. 나는 기관총을 쏘지 않아서 광주가 더 위대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기관총을 쐈다면, 계엄군도 피해를 보았겠지만, 도청 주변의 시민들도 총탄을 피하기 힘든 상황이었을 터였다. 항쟁 첫 나흘 동안, 공격하는 계엄군과 방어하는 시민의 폭력성은 계속 격화되고 있었다. 쌍방은 모두 흥분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유리한 상황이 도래했음에도, 상황을 더는 악화시키지 않은 것은 시민들이었다.

애초 폭력의 피해자였던 이들이 유리한 상황에서 스스로 사용할 수 있었던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광주 시민들이 무기를 든 이유는, 그러지 않고서는 다른 대안이 없는 정당방어였다는 사실을 발포하지 않은 기관총은 증언하고 있었다.

번역이 마무리된 1996년, 미국과 영국의 여러 출판사들에 원고를 보내 출판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했다. 첫 반응은 한결같았다. 도대체 이런 사건이 언제 있었으며, 이 학살이 사실이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인 시카고대학 교수 브루스 커밍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넘어 넘어>가 사실에 대한 기록임을 한국학의 대표적 교수로서 보증하는 편지를 써서 출판사에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그때까지, 커밍스와 나의 관계는 그가 연사로 나온 콘퍼런스의 청중으로서 악수 한 번 한 게 전부였다. 커밍스가 나를 기억할 리 없었다. 그런데도 커밍스는 출판사에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줬고, 책의 편집에 대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그 조언 중에 하나가 광주항쟁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는 서문을 넣으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기왕이면 그 서문을 커밍스가 썼으면 좋겠다고 민망하게 매달렸다. 커밍스는 그 뻔뻔한 청을 흔쾌히 받아줬다.

그뿐만 아니었다. 커밍스는 MIT(매사추세츠 공과 대학)의 놈 촘스키(Noam Chomsky)를 소개해 줬다. 원고를 읽은 촘스키는 몇 차례 미국 출판사들에 <광주일지> 출판 필요성을 설명하는 편지를 써줬다. 또한 <광주일지>에 한국의 독재 정권을 계속 지원한 미국의 대한정책에 대한 글을 넣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도 해줬다.

촘스키의 충고를 따르는 일은 뜻밖에 쉽게 풀렸다. 같은 해, 저널 오브 커머스(Journal of Commerce) 탐사기자인 팀 샤록(Tim Shorock)이 광주항쟁 당시 미국 국무부와 주한 대사관 사이에 오간 전문, 소위 체로키 파일(Cherokee files)을 정보공개법으로 입수, 폭로한 것이다. 샤록에게 <광주일지> 원고를 보낸 며칠 후, 그의 신문사로 전화했다. 그리고 체로키 파일에 기반을 둔 원고를 부탁했다. 샤록은 <광주일지> 원고를 읽어보고 결정하겠노라는 밋밋한 답을 줬다.

그가 원고를 다 읽을 즈음 다시 전화했다. 전화를 받은 샤록의 목소리가 의외로 흥분되어있었다. 답변은 간단했다. "<광주일지> 원고 읽으며, 많이 울었다. 특히, 접대부들이 '부상자를 위한' 헌혈을 거부당하자 통곡하는 장면에서 많이 울었다. 체로키 파일에 대한 원고를 써주겠다." 솜씨 좋은 저널리스트답게, 샤록은 체로키 파일을 항쟁 10일 기간으로 재구성한 값진 원고를 써줬다.

그렇게 <광주일지>가 1999년에 세상에 나왔다. 책이 나올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넘어 넘어>가 한국의 많은 젊은이를 흔들어버린 것처럼, 마매타스, 커밍스, 촘스키, 그리고 샤록도 흔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광주항쟁이 제기한 인권, 민주, 평화라는 보편적 가치에 이들이 감동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진상을 처음으로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기록한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증보판이 내년 5월 간행된다. 지난 1985년 5월 초판 간행 당시 책의 표지와 수첩의 모습 (팜플릿 캡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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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집필자 못 정해 <넘어 넘어> 증보판 무산... 사적 공명심의 피해자는?

이제는 다소 어렵고, 다소 민망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지난해 7월, <넘어 넘어> 출간 당시, 전청연(광주전남민주주의청년연합) 회장이었던 정상용과 이재의의 주도로 <넘어 넘어> 증보판 간행위가 결성됐다. 책 발행 35주년인 올해에 증보판을 내기로 하는 게 목적이었다(관련기사 : "5·18 폄하 예상은 했지만 박근혜정부 들어 극심").

알려진 대로, 1985년 당시 <넘어 넘어>는 황석영 명의로 나왔다. 유명인사 이름으로 나와야 집필진과 <넘어 넘어> 프로젝트를 추진한 전청연을 보호할 수 있다는 게 풀빛출판사 사장 나병식의 생각이었다. 이재의는 <광주일지> 서문에서 이 부분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출판사는 여러 유명인사에게 이름을 빌려줄 것을 간청했으나, 이를 흔쾌히 받아들인 사람은 황석영 혼자라고 했다. 황석영은 육필증거를 만들기 위해, 타자본 <넘어 넘어>를 원고지에 베껴 썼다.

이재의의 서문에 따르면, <넘어 넘어> 집필은 조양훈, 최동술과 같이한 공동작업이었다. 자료수집에도 적잖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돌이켜보면, 영어판 <광주 일지>에 적어도 그 두 사람을 공동저자로 넣는 게 옳았다. 저자를 황석영에서 이재의로 바꾼 이유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복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넘어 넘어>의 많은 부분은 소준섭(현 국회도서관 해외자료조사관)이 1981년 수배 중 광주에서 쓰고, 이듬해에 지하 출간한 <광주백서>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일치한다. 사실상 <넘어 넘어>의 뼈대가 <광주백서>인 것이다. 그러나 1985년 <넘어 넘어> 집필과 출판에 관여했던 사람 누구도 이런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소준섭은 <넘어 넘어> 증보판 간행위 참가를 고사했다.

결국, 30주년 증보판은 나오지 못했다. 대표필자를 정하지 못해, 증보판 발행이 지연되고 있다는 게 광주시 인권 옴부즈맨이자 간행위 실무자인 안종철의 전언이다. 전두환의 엄혹한 독재 속에서도 나왔던 책이, 30년 지난 공적 다툼에 30살 생일상도 못 차려 먹고 있다. 알려지는 게 두려워 유명인사 이름을 빌려 간신히 나온 책이 뒤늦게 이름 내고 싶은 사람들 다툼에 복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심정도 이해한다. 공이 있으면 상도 받고, 칭찬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도 책이 복간된 후의 이야기이다.

이렇게 서로 공명심에 치우치다 보니, 소준섭 같은 이의 공헌을 인정할 여유도 이유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내 언사가 지나친가? 나도 이 처참한 상황을 달리 표현할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사적 공명심의 피해는 <광주일지>도 입었다.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나는 이재의에게 다음을 수차례 간곡히 부탁했다. 책은 비영리 기관에서 나왔고, 그 누구도 경제적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 다만 책의 영속성을 위해, 광주의 적당한 기관이 저작권 계약을 통해 <광주일지>를 발행해달라고 말이다. 그러나 몇 년 후에 내가 들은 풍문은 광주에서 <광주일지> 해적판을 찍는다는 것이었다. 그 풍문이 사실임을 2005년 한국 방문 시, 광주시 관계자의 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필요해서 몇 부 찍어서 해외에도 보냈다"고 했다.

큰 충격이었다. 그 광주시 관계자의 말은 결국 제 공명심에 책 좀 찍어 여기저기 뿌렸다는 말 이상은 아니었다. 사실, 비영리 기관과 정식계약을 맺고 책을 발행하는 것과 해적판 제작 사이의 생산비 차이가 얼마나 나겠는가? 자신의 명예와 광주의 전통을 갉아먹는 광주시 관계자의 단견에 두고두고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미국에서 주로 대학교재로 매년 200부 이상 팔리던 <광주일지>는 2006년 UCLA의 아시아태평양 기록물 시리즈가 중단됨에 따라 절판됐다. 그 후, 나는 미국에서 새로운 출판사를 구해보려고 몇 번 마음을 먹었으나, 그뿐이었다. 한마디로 흥도 안 나고, 환멸만 느껴졌다. 무엇보다, 광주항쟁에 감화를 받아서 번역과 기고에 참여한 3명의 미국인 앞에 면이 서지 않았다. 물론 우리 4명은 <광주일지> 발간 전후로 좋은 친구가 되었지만 말이다.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영문 번역서인 <Kwangju Diary: Beyond Death, Beyond the Darkness of the Age>(By Lee Jai-eui/ Translated by Kap Su Seol and Nick Mamatas, 1999 UCLA Asian Pacific Monograph Series)의 저작권자인 설갑수(46)씨. 그는 현재 미국 뉴욕에 거주 중이며 MSCI(Morgan Stanley Capital International) ESG Research 애널리스트로 근무하고 있다.
ⓒ 설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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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도서관 소장 5·18 기록물 영문판도 해적판... 기가 찼다"

최근 박원석 정의당 국회의원이 <광주일지> 재발간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참 고마운 일이다. 지난 5월 13일, 뉴욕에 잠시 들린, 박 의원의 비서관 조태근과 재발간 문제를 의논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조 비서관이 국회도서관에서 대출해 가져온 <광주일지>도 해적판이었다. 일단 떠돌기 시작하면 통제 불능이란 게 해적판이라지만, 다시 한 번 기가 찼다.

박원석 의원은 <광주일지> 재발간을 위해 크라우드 펀딩이라도 할 기세다. 다시 한 번 고마운 일이다. 그렇지만 책의 영속성을 고려한다면, 그 방법이 최선은 아닌 듯하다. <넘어 넘어>이건 <광주일지>건, 그 주인은 광주이고, 더 나아가서는 한국 민주주의이다. 그래서 나는 광주의 책임 있는 공적 기관이 이 두 기록물을 맡아, 영속성을 보장해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관련기사 : 광주의 진실, 미국인들의 심장에 새길 수 있을까?)

자랑스러운 역사기록물을 개인들이 맡고 있으니, 잡음만 많고, 보존도 안 된다. 물론 책임 있는 기관이 나서준다면, 나를 포함한 <광주일지> 집필진 4명은 그 보전의 당사자이자, 시민의 한 사람으로 힘을 보탤 것이다.

흔히들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민주주의가 훼손됐다고 말한다. 나도 그 말에 동의한다. 그러나 수구 정권이 민주주의를 훼손하기 전에, 우리가 민주주의를 방치하지는 않았을까? <넘어 넘어>와 <광주일지>의 역사를 보고 있노라면, 80년 광주라는 집단기억을 우리 스스로가 지우고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다.

박근혜 정권이 광주항쟁을 주제로 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사실상 금지곡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한국의 가녀린 민주주의 전통 앞에 사랑은 저버리고, 명예와 이름만 찾는 우리네 마음속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미 오래 전에 금지곡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마음이 무겁기만 한 광주항쟁 35주년 주간이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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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drpark) 프로필베스트 댓글ohmynews 대표계정 입니다.광개토대왕(drpark)2015.05.23 10:14
5.18 영령에게 받칩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너무도 맑은 5월의 아침 입니다.
하지만 푸르른 하늘과는 달리 너무도 답답한 오늘....
우리가 예전부터 투쟁의 현장에서 너무도 자주 불렀고 지금도 부르고 있는
님을위한 행진곡 가사를 음미하면서
지금의 답답함은 비단 오늘의 일만은 아니였구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답글1공감56반대20
산물들(kmynw) 프로필ohmynews 대표계정 입니다.산물들(kmynw)2015.05.23 10:45
@광개토대왕(drpark) 주먹을 불끈 쥐고 공감에 한 표 찍었습니다.

답글공감0반대0
하얀 새 프로필naver 대표계정 입니다.하얀 새2015.05.24 14:29
차분하면서도 절박함이 느껴지네요.
역사를 통해서 교훈을 얻고 미래를 향해 바르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료의 보존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가치있는 자료들은 한 나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한 귀중한 재산이기도 하지요. 어려운 시기에 혜안을 가지고 힘들게 정리해주신 책을 우리 스스로 잘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고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속히 해결되면 좋겠습니다.

답글2공감4반대2
하얀 새 프로필naver 대표계정 입니다.하얀 새2015.05.24 14:43
@하얀 새 한반도 땅 위에서의 동과 서의 분열은 역사의 진실을 직시하고 서로 이해하고 상처를 보듬는다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분열을 이용하려는 무리들에게 나와 이웃들의 행복한 삶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우리는 끝없이 진실을 보존하고 지키려는 노력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거짓에 나와 자손들의 삶이 이용당하고 파괴당하지 않으려면 말이지요...

답글공감0반대0
하얀 새 프로필naver 대표계정 입니다.하얀 새2015.05.24 14:35
@하얀 새 더불어 우리의 소중한 정신적 자산이 잘 전승되어 온 세상에 한국인의 드높은 의지를 알랄 수 있는 계기가 되고 5.18의 정신이 한강변의 기적에 이어 또 하나의 민족적 긍지로써 자리매김될 수 있는 날이 속히 다가오길 바래 봅니다.

답글공감0반대0
yungnamcolony 프로필twitter 대표계정 입니다.yungnamcolony2015.05.24 01:36
대북송금특건으로 민주진영을 둘로갈라놓아, 영남수꼴의 영구집권을 가능케하고, 또 영남패권-호남말살-경상도독식정책을 실시하여
민주진영을 지역적으로도 둘로 갈라노았다.
진영을 둘로나누고, 지역으로 또 갈라노으니
민주세력이 집권하는것은 불가능하다.
집권당시 노무현이 호남에가서
지역차별-지역홀대한것을 무릅꿀코 사죄해도 시원찬은데
박정희-이효상-김기춘-전두환...을 받들어 영남독식-호남말살정책을 강화 했으니
쯧쯧..

답글공감3반대4
똥똥똥똥(tiandi21c) 프로필ohmynews 대표계정 입니다.똥똥똥똥(tiandi21c)2015.05.23 23:15
독재국가 비밀경찰국가에나
해적판이 있지 않겠는가.
아니면 법에 위배되는 정보나
세금을 포탈하기 위해 있든가.

본글에서 밝힌봐와 같이
자료와 기록에 따라
정확한 저자와 기록자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면
이에 따라 서문과 본문 추후기록에서 정확히 밝히는 것이
진실이라 생각한다.

명예는 정확한 진실을 밝히는 사람 앞에는
저절로 따라 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더군다나 순진하였으므로 희생을 감당한
광주시민들의 죽음 앞에서
사사로운 명예를 취할수 있겠는가.

감히 죽은자가 산 자들을 살리기 위해
죽은자들이라면
이를 인정한다면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죽음을비겁하게 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답글공감10반대2
똥똥똥똥(tiandi21c) 프로필ohmynews 대표계정 입니다.똥똥똥똥(tiandi21c)2015.05.23 19:50
평양 할매 정신 좀 차리소.

내도 노무현이 좋다 생각하고 말하지만.
광주를 말하면서 노무현 추도식에 사람이 적었다고 욕해서는
광주와 노무현을 싸잡아 욕하는 것 빡에 더 되겠소.
서로 화합하도록 해야지...

답글2공감9반대2
똥똥똥똥(tiandi21c) 프로필ohmynews 대표계정 입니다.똥똥똥똥(tiandi21c)2015.05.23 19:57
@똥똥똥똥(tiandi21c) 그런데도 불구하고 탄압자가 반성도 사과도
일면의 양심도 없다면
피해입은 사람이 먼저 사과한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사회가 아닐것이오.
오랜 세월이 지나면 반성이나 사과나 화해가 의미없을지도 모르오.
이런것을 세월이 해결해준다고 말하지만.
복수심과 원한이 눈에 안보일뿐 사라질리가 없을것이오.
땅에서 해결이 안되면 죽어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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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똥똥똥(tiandi21c) 프로필ohmynews 대표계정 입니다.똥똥똥똥(tiandi21c)2015.05.23 19:54
@똥똥똥똥(tiandi21c) 김대중과 노무현은 정치적 견해도 거의 동일하며
한반도에 대한 판단도 동일할것이오.

많은 국민들이
상식적인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남과 북이 동의하면 통일이 될것이라. 생각하오.
평화적 통일이 되어야 할것이오.

그가 상식적인 사람들이라면 정치인이라면
과거의 잘못에 대해 무조건 화해는 주장할수 없을것이오.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잘못에 대해 충분한 사과를 요구할수 있으며
이를 기반하여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하오.
그렇다고 해서 역사적 심판을 외면할수 없는 것도 당연한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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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똥똥똥(tiandi21c) 프로필ohmynews 대표계정 입니다.똥똥똥똥(tiandi21c)2015.05.23 19:48
잘못된것은 잘못된것이라 하는데
이를 국가라 해서 탄압하고 위장하고 이들을 희생시키는
그런 국가를 국민들이 용납해서는 안되는것이다.

그런 국가는 애초에 인정이 되지 않는것이다.

자기를 옭아매는 국가를 순순히 인정하는 국민들이 어디있겠는가.
있다면 독재국가뿐이다.

자신들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폭력과 물리력을 동반하여
자신들의 국가를 성립시킨 국가뿐인것이다.
이런 국가는 그놈들이 패망하면 패망할것이다.
당연하게도 국민들이 순순히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민들인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로 성립된 국가가 가봐야 얼마나 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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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할머니(joo43454) 프로필ohmynews 대표계정 입니다.평양할머니(joo43454)2015.05.23 15:19
광주는 왜 5.18에 항거했는가?서글프다. 어쩌다가 광주가 지역주의 중심도시가 됐냐?노무현 광주추도식에 불과 20명이 참석했더군요. 그것도 지자체장과 정치인은 한명도 없었습니다.광주는 왜 피를 흘렸습니까? 박지원을 위해서 피를 흘렸습니까? 박지원은 오늘 봉화마을도 안갔습니다.빨리 박지원,김한길이 죽어야 합니다.박지원이 죽어야 광주정신은 되살아납니다. 5.18 때 박지원은 광주에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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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할머니(joo43454) 프로필ohmynews 대표계정 입니다.평양할머니(joo43454)2015.05.23 13:37
문재인님, 제발 불독처럼 밀고 가세요. 그게 노무현정신입니다. 김한길, 안철수, 박지원 이런놈들 다 한물간 놈들입니다. 내년 총선에 모두 잘라내세요. 그래야 그놈들이 굴복하던지 아니면 자진탈당할 겁니다. 탈당을 유도해서 당에 협조 안한놈들 전부 몰아내버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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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NICKNAME 프로필naver 대표계정 입니다.NO_NICKNAME2015.05.23 10:53 · 공유됨(1)
518 광주재판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검찰이 바로 채동욱(이건 정말 몰랐던 놀라운 사실)
-채동욱이 5.18 검사라 불리고 있는 이유

4. -이석기 및 채동욱 사태에 즈음하여 재조명하는 1980년 5월 19
http://www.study21.org/518/photo/5-19.htm


5. 5.18 인민군 검사 채동욱과의 역사논리 전쟁 돌입
http://www.study21.org/518/photo/historical-debate.htm

- 섬뜩한 구호- 전두환 찢어죽이라!! 전두환씹어 먹자!!
- 이게 민주화구호인가 아니면 식인종 구호인가?

세상에 000찢어죽이라! 000 씹어 먹자이런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은
정상적인 사람의 심성을 가진 것이 아닌 것으로 이런 구호는 북한인민군이
쓰는 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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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NICKNAME 프로필naver 대표계정 입니다.NO_NICKNAME2015.05.23 10:55 · 공유됨(1)
@NO_NICKNAME 부산저축은행 금융비리 사건 관련자 호위무사 채동욱
- http://www.study21.org/518/agitator/ilgo-almuni.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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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NICKNAME 프로필naver 대표계정 입니다.NO_NICKNAME2015.05.23 10:54 · 공유됨(1)
@NO_NICKNAME 미제승냥이 찢어죽이자 등으로 쓰이는 구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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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NICKNAME 프로필naver 대표계정 입니다.NO_NICKNAME2015.05.23 10:51 · 공유됨(1)
. KBS가 보여주지 않은 힌츠페터의 5.18 영상 장면 .

https://www.youtube.com/watch?v=kvWusCfZiPM

이 동영상에서 5초부터 14초까지가 바로 힌츠페터의 영상물 원본에는 있으나,
KBS가 `푸른 눈의 목격자`에서 삭제한 장면들이다.
`오월 그 날이 오면` 제작자가 힌츠페터의 영상물을 편집하였을 때는
이 장면을 삭제하는 대신 흑백 처리하였다.
군용트럭 적재함에 올라탄 김대중 계열의 목포 별동대가 총을 들고 있는 장면,
즉 5월 20일에 이미 무장세력이 출현하였음을
보여주는 이 장면들이 가장 중요한 장면일테데, 어째서 `푸른 눈의 목격자`
다큐 제작자는 역사의 진실을 아는 단서가 되는
이 중요 장면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주지 않고
역사 속에 묻히게 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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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NICKNAME 프로필naver 대표계정 입니다.NO_NICKNAME2015.05.23 10:51 · 공유됨(1)
@NO_NICKNAME 하였던 것일까?

3. 목포 별동대 관련 자료는 http://www.study21.org/518/video/5-20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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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NICKNAME 프로필naver 대표계정 입니다.NO_NICKNAME2015.05.23 10:48 · 공유됨(1)
1.1980년 광주 5.18에 왔던 북한특수군들 두목들 3명
=약 10일 전에 새롭게 발견한 증거물
- 역사학자들은 과연 하느님이 존재하는구나 경탄한다는 문제의 그 사진사진)
2010년 북한 5.18 기념식 로얄석에 차례대로 착석한 것이 발견되다!
-재판에 가장 명확하고 강력한 증거가 사진과 CCTV 동영상임
- 2014년은 재판결정의 최고 권한을 가진 판사/검사들도 CCTV 증거로 아작난 해였음
- 창원지법판사 한명은 주차장에서 차량훼손으로 보복하는 장면이 CCTV에 찍혀 옷벗음
-제주지검 검사장은 바바리맨 같이 여고생 성추행했는데 보통의 경우는 경찰신분으로
검찰을 아예 검거조차 불가능하지만
- 말없는 CCTV 증거가 너무나 결정적이어서 옷 벗음

http://www.systemclu

답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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