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획의 새세대 청춘송가] 영화 '서울의 봄'과 역사의 본질 - 신군부 뒤의 진정한 흑막, WARmerica라는 마지막 조각
기자명 안광획 연구위원
입력 2023.12.16
‘현대판 신군부’ 윤석열 정권을 몰아내는 것은 당연하고, 나아가 현대사의 진짜 흑막인 WARmerica도 이 땅에서 축출하여 진정한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을 쟁취해야 하지 않겠는가? 전세계적 격변기와 맞물린 다가오는 총선과 앞으로 예정된 항쟁들은 이땅의 근본 모순을 해결하고 우리 민족의 오랜 열망을 쟁취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대규모 항쟁을 준비하며 ‘서울의 봄’과 ‘현대판 신군부’의 진정한 흑막 WARmerica의 실체와 몰락하는 현실을 똑똑히 알고 널리 알려 더 많은 대중들을 조직하는 것이 진보진영의 주된 과제가 될 것이다.
저자: 안광획. 통일시대연구원 연구위원.
영화[서울의 봄]과 역사의 본질 -신군부 뒤의 진정한 흑막, WARmerica라는 마지막 조각
(자료: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최근, 12.12 군사반란을 다룬 영화인 서울의 봄이 연일 화제이다. 1979년 후반부 10.26 사건*부터 시작하여 12.12 군사반란을 거쳐 전두환과 ‘하나회’를 위시한 제2의 군사파쑈정권이 들어서기까지의 과정을 극적으로 그려낸 '서울의 봄'은 입소문을 타고 흥행하여 어느새 천만 관객 돌파를 앞두고 있다. 여기에 더해, 당시 신군부 일당의 쿠데타에 맞서서 끝까지 싸웠던 김오랑 소령(사후 중령 추서), 장태완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전사 및 순직 장병 2명(정선엽 병장, 박윤관 일병)의 고군분투와 비참한 개인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높아져 이들 군인 묘소에 대한 추모와 참배도 이어지고 있다.
* 박정희가 심복이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궁정동에서 처단된 사건. 김재규의 ‘거사(?)’의 배경과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거리지만, ‘거사(?)’ 자체는 2016년 박근혜 탄핵 당시에 일정 부분 재평가된 바 있다.
어찌 보면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영화이지만 이렇게까지 '서울의 봄'이 흥행하는 것에는 크게 다음과 같이 볼 수 있겠다. 먼저, 군사독재와 5.18 학살에 대한 사죄 하나 없이 뻔뻔스러운 모습을 보이다가 세상을 뜬 파쑈독재자 전두환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두 번째로는 12.12 군사반란 단시 ‘하나회’ 일당의 쿠데타와 신군부 군사파쑈독재에서 오늘날 윤석열 파쑈정권이 검찰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검찰파쑈독재를 자행하는 이미지가 겹쳐 보이는 것이리라. 즉, 사죄와 반성 없이 떠난 독재자에 대한 단죄 및 규탄과 ‘역사는 반복된다’는 것에 대한 대중들의 뼈저린 실감이 현재의 '서울의 봄' 흥행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 '서울의 봄' 흥행과 관련하여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영화와 역사적 사실 자체에만 집중하여 역사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다는 점이다. 전두환과 하나회라는 반역자들에 대한 규탄과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 및 기억만 강조되고 그 내막과 배경, 그리고 실제 책임자에 대한 진상규명은 붕 뜬 것이다. 그래서 뭔가 ‘다루다 만 듯한’ 찝찝함이 없잖아 있다.
1. 과연 전두환과 하나회가 독단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켰을까?
(사진: 12.12 당시 미국의 쿠데타 지원 및 기획에 연루된 인사들(존 위컴, 제임스 하우스만, 윌리엄 글라이스틴)의 회고록. 이해영 교수 제공)
가장 먼저, 12.12 군사반란을 전두환을 위시한 하나회 일당이 독단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는가 하는 지적을 들 수 있다. 익히 알려진 대로, 남녘의 작전권은 한국(조선)전쟁 이래로 미국이 좌지우지하며 국군의 작전행위나 병력이동은 모두 한미연합사령관(주한미군 사령관, 이른바 ‘유엔사’ 사령관 겸임)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 즉, 국군은 전적으로 주한미군이 통제하고 지휘하는 체계이다. 더군다나, 1979년 당시는 ‘평시작전권’* 마저도 없었던 상황이다.
*‘평시(DEFCON 상 4~5단계)에도 작전행동과 병력이동을 할 수 있는’ 이른바 ‘평시작전권’은 민주화 이후인 1994년 12월에 국군에게 이양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기만적인 것에 불과하다. 1994년 평시작전권 이양 당시 평시 위기관리 권한을 비롯해 작전계획 수립, 합동훈련 계획 및 실시, 정보관리 등으로 이루어진 6개항의 연합권한위임사항(CODA)을 한미연합사령관인 주한미군 사령관의 권한으로 남겨 두어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미군이 국군을 통제하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미국이 국군의 작전권을 통제하는 현 군사체계에서는 전두환을 위시한 하나회 일당이 미국의 허가 없이 독단적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영화에서는 전두환(작중 ‘전두광’) 개인의 권력의지와 이에 근거한 독단적 결단으로 쿠데타가 단행되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
“피곤해서 12월 12일 사건을 규정하는데 부주의하게 서술했다... (중략) 나는 조심스럽지 못하게 ‘사실상 쿠데타 (coup in all but name)’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정확한 상황이 무엇이든 간에, 기존 정부조직이 실제 남아있기 때문에 전형적 쿠데타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 사건이 계획된 것이 아니었으며 쿠데타 시도가 아니라는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이를 믿지는 않지만, 보다 확실한 상황이 파악될 때까지 단정하지 않는 게 우리 이익에 최선이라고 생각한다.”(글라이스틴이 당시 미국 국무부에 보낸 전문 중 일부, 1980.12.13.)
“(전두환 하나회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는 하극상을 일으킨) 그 시각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 워컴 주한미군 사령관은 노재현 국방부 장관과 김종환 합참의장과 함께 용산의 유엔군사령부 벙크에서 새벽까지 군지휘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12.12 군사반란과 관련한 미국 기밀해제 문서)
아니나 다를까, 12.12 당시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묵인・지원이 있다는 것이 이미 사실로 드러난 바 있다.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이던 존 위컴(John Wickham)과 주한미국대사 글라이스틴(William Gleysteen)이 회고한 바와 같이, 주한미군과 미국은 12·12 이전부터 하나회 일당의 쿠데타 계획을 사전에 포착한 바 있다. 그러나, 이들은 쿠데타 음모를 저지하지 않고 ‘북의 남침이 우려된다’는 명목으로 12.12를 묵인해 버렸으며, 쿠데타 방지 또는 진압을 위한 작전 승인이나 하나회 반대 세력의 ‘역 쿠데타’ 계획을 모두 거절해 버렸다. 물론, 이들은 자신들의 회고록에서 “비록 전두환 일당의 쿠데타 계획에 대해서 매우 불쾌했으나 달리 대안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변명을 내뱉었으나, 어찌 되었든 미국의 한(조선)반도 전략에 따라 전두환과 12.12 쿠데타를 지지한 것이다.*
*존 위컴 저, 김영희 역, 12.12와 미국의 딜레마(중앙M&B, 1999), 윌리엄 글라이스킨 저, 황정일 역, 알려지지 않은 역사(중앙M&B, 1999) 등
더군다나,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의 이력을 보면 과연 ‘불쾌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저들의 변명이 통하는지도 의문이다. 존 위컴은 베트남 침략전쟁(1955~1975) 시기 1기병사단 7기병연대 소속 장교로 파병되었는데, 이미 그 때 전두환, 노태우 등 하나회 일당과 깊은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베트남전 이후엔 국군 요직에 하나회 일당들이 자리를 차지했고, 특히 위컴이 1979년 5월에 주한미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뒤에는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79년 3월 임명)과 자주 접촉하였다.*
*곽동기, 「제국주의 미국 – 10.미국의 노골적인 한국정치 개입」, 우리사회연구소, 2016.06.08. 참조
이런 상황 속에서 쿠데타 음모는 하루아침에 나오지 않고 미국의 지시와 전두환과 위컴의 공모 아래 착착 계획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불쾌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 무색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미국이 전두환과 하나회 일당을 육성해 온 정황도 잘 드러나 있다. 남녘 육군사관학교가 한국(조선)전쟁 시기인 1950년 6월 1일 정규 4년제 과정으로 자리 잡은 이래로, 미국은 육사 출신 장교들을 미국으로 유학시켜 네바다주 군사훈련소에서 6개월~1년 기간 동안 특별군사훈련을 받게 했다. 이에 따라 육사 정규과정 첫 기수(11기)였던 전두환과 노태우, 정호용 등은 1956년 미국에서 특수군사훈련을 받았다. 또한, 전두환은 1959년 12월에 또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노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브랙(Fort Bragg) 특수전학교에 입학하여 특수전과 심리전을 공부했고, 1960년에도 조지아주 포트 베닝(Fort Benning) 레인저학교에서 유학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전두환과 하나회 일당이 미국의 군사지휘체계에 길들여진 것은 물론 숭미주의적 사고관과 사상의식도 뿌리 깊게 형성되었으며, 미국 역시 저들을 깊이 눈여겨 보았으리라. 여기다가 자신들이 5·16쿠데타를 통해 대리인으로 내세운 박정희 역시 전두환과 하나회 일당을 깊게 신뢰하고 전두환을 ‘양아들’로까지 여긴 점도 미국이 전두환을 주목한 한 요인이었다.
여기에다가 베트남전 당시 존 위컴과 전두환 및 하나회 일당 간의 유착관계가 형성되면서, 미국은 전두환, 노태우 등을 박정희를 이을 후계자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처단된 후 거행된 박정희 국장에서의 미국 국무장관 사이러스 밴스(Cyrus Vance)의 기자회견(1979.10.31.) 내용이다. 당시 장례식에 참석하고자 서울로 떠나던 밴스는 기자들에게 “박정희의 후계자를 선출하는 방법에 대해 미국이 상담할 것을 요청받으면 의견을 주는 것을 주저하지 않겠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이며, 아마도 그들이 우리와 협의하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그들과 의견을 나눌 것이다.”란 발언을 남겼다. 미국은 이미 박정희 이후 자신들의 대리인으로 내세울 후계자를 결정했음을 시사한 것이다. 여기에서 ‘후계자’는 ‘그들’로 두루뭉술하게 표현되지만, 앞서 소개한 전두환 및 하나회-존 위컴 간 유착관계와 오랫동안 미국이 하나회 일당을 육성해 온 정황을 유추해 보면 사실상 전두환을 위시한 하나회 일당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12.12는 전두환 개인의 독단적 판단과 정치적 야욕으로 자행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미국의 지시와 지원 속에서 철저히 계획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2.12와 5월 광주학살을 거쳐 전두환이 공식으로 대통령직에 앉은 직후 존 위컴이 남긴 발언은 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박정희 피살 이후 가장 성공적인 미국의 한국 정책 가운데 하나는 '전두환 정권'의 수립이다.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고, 그 보람도 크다."
2. 왜 미국은 12.12를 일으켰는가?
그렇다면 왜 미국은 12.12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전두환과 그 일당을 후계자로 내세웠을까? 이는 당시의 국제정세와 한(조선)반도 정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진: 이란 이슬람 혁명)
1979년~1980년 국제정세는 매우 복잡했다. 서아시아에서는 이란에서 친미 괴뢰정권이던 팔라비 왕조가 호메이니를 앞세운 무슬림 세력과 이를 지지하는 대중들에 의해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축출되었다. 무슬림 교리와 반제국주의를 전면에 내걸은 호메이니 신정부는 이전 시기 무하마드 모사데크 총리가 시도했다가 서방 제국주의 세력과 왕족들의 축출로 실패한 석유산업 국유화를 단행했고, 미국 및 서방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이란 이슬람 혁명의 여파는 1979년 제2차 석유파동과 전세계적 경제침체로 이어졌다.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중동지역에서의 패권 매개체를 상실한 미국은 비상이 걸렸다. 이란을 시작으로 아시아-아프리카 일대에서 친미 괴뢰정권 붕괴 및 반제자주화 물결이 급속히 퍼져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은 아시아-아프리카에서의 친미 괴뢰국가들의 붕괴를 막고 각 나라들이 연대하지 못하도록 이간책동을 벌이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예: 사우디 아라비아를 통한 시아파-수니파 갈등 극화, 후세인 정권 사주를 통한 이란-이라크 전쟁 유발(1980년) 등.
(사진: 60~70년대 조미대결. 푸에블로호 나포, EC-121 격추, 판문점 도끼사건 순.)
(사진: 부마항쟁, 10.26 사건)
특히, 당시 한(조선)반도 정세는 미국에게 있어서 매우 불리했다. 푸에블로호 사건(1968.01.)-EC-121 사건(1969.03.)-판문점 도끼사건(1976.08.) 등 미국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북에 대한 군사적 도발을 감행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또, 자신들이 5·16쿠데타를 통해 ’대리인‘으로 내세운 박정희와의 관계도 점점 틀어지는 상황이었는데, 1969년 베트남전 패배 직후 발표한 ‘닉슨 독트린’의 연장선상으로 미국은 남녘에 대해서 주한미군 철수를 공포했고, 이에 반발한 박정희는 ‘자주국방’을 부르짖으며 핵개발을 추진한 것이다. 그러자 미국은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를 내세워 박정희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7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박정희 정권과 미국 간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 우리가 제거하려는 까마귀(박정희)를 대체할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백로를 찾을 수 없을 것”
“전두환의 군부 내 지지세력으로 인해 그의 제거 자체가 힘들 뿐 아니라 그렇게 된다 해도 누가 그를 대신할 강자가 될 것인지도 문제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알려지지 않은 역사(중앙M&B, 1999) 참조)
여기에다 남녘에서의 반독재 민주화투쟁도 미국의 한(조선)반도 전략에 큰 타격을 주었다. 특히 1979년 YH무역 사건-김영삼 국회 제명-부산-마산 민중항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상황들은 그야말로 남녘 민중들의 박정희 정권에 대한 분노가 정점에 달한 상황이었다. 미국은 ‘엇나가고 있던’ 박정희도 골칫거리였지만, 한편으로는 민중에 의한 군사독재 종식과 민주정부 수립도 큰 우려였다. 당시 미국 기밀문서를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미국은 김대중-김영삼 등으로 대표되는 ‘양김(兩金)’이나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주도하는 학생운동 및 노동운동 세력을 ‘믿을 수 없는 세력’ 내지는 ‘극좌 혁명세력’으로 여기고 있었다. 반독재 민주화투쟁으로 군사독재가 무너지고 민주정부가 세워지게 되면 당연히 반미자주 노선과 북과의 평화통일을 적극 추진할 것이고, 이는 곧 미국의 동북아 패권 최전선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미국은 ‘눈엣가시’인 박정희를 토사구팽시키고*, 그 자리에 민주정부가 아닌 ‘후계자’ 전두환을 세워 군사독재를 이어 나갈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미국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를 사주해 10.26 사건을 일으켰고, 이어서 ‘후계자’ 전두환을 내세워 12.12 군사반란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즉, 12.12는 당시 전세계적인 정치 변동과 맞물려 미국의 동북아 패권 전략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었다.
* 10.26 당시 미국에 의한 박정희 토사구팽 정황은 후술할 제임스 하우스만의 회고에서도 잘 드러난다. 비록 그는 말미에서 “아무리 그래도 미국이 김재규를 사주할 엄두를 냈겠는가?”고 얼버무리지만, 이승만 하야 직전 상황과 10.26 직전 상황이 비슷하게 돌아갔다는 회고에서 미국이 박정희를 어떻게 평가하고 토사구팽을 기획했는지 유추할 수 있다.
“물론 (10.26)사건의 전말을 보면 사건의 미묘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시 한미 관계는 마치 1954년 7월 이승만 대통령이 美양원 합동회의에 가서 미국 지도자를 훈계하듯 강경 연설을 한 뒤 미국 정부의 이 대통령에 대한 신임이 급격히 떨어진 때와 비슷한 양상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대통령은 휴전 후 미국을 방문하면서 내셔널 프레스클럽, 샌프란시스코 연방클럽, 필라델피아 재향군인회, 로스앤젤레스의 세계문제협의회 등의 연설을 위해 올리버 박사에게 원고를 쓰도록 부탁했다.
올리버의 회고록에 따르면, 올리버 박사가 원고를 써 올릴 때마다 별로 고치지 않고 '좋다'고 했다.
그러나 양원합동회의 연설문은 스스로 썼다. 올리버 박사는 여러 번 사정하다시피 그 원고를 한 번만 보여 달라고 했다. 백악관 만찬 후 블레어하우스에서는 단 한 자도 고치지 않을 테니 그저 한 번만 읽어보게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그 원고가 든 가방을 끌어안으며 아무 말도 않은 채 완강한 거부 태도를 보였다.
올리버의 기록에 의하면 그것은 꺾을 수 없는 고집의 표시였다고 한다. 이승만은 7월 28일 드디어 의사당에 나가 "미국이 한국에서 대(對)공산주의 전쟁을 벌벌 떨면서 그만두게 됐다"고 비난하고 "어리석게도 휴전에 동의했다"느니 "한국이 다시 공격받기 전에 워싱턴은 소련의 기습 공격을 받을 것"이라는 등의 일장 훈시를 했다.
그날 이 대통령의 연설은 많은 박수를 받기는 했으나 미국 지도자들은 더 이상 이승만과는 얘기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결론짓게 됐다.”(제임스 하우스만 저, 정일화 역,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한국문원, 1995) 19~20쪽
3. 한국 현대사의 곡절에는 늘 미국이란 흑막이 있었다
– 그 중심에 있던 육군대위 제임스 하우스만
가운데가 하우스만. 좌측 존 무쵸 미 대사. 우측 윌리엄 로버츠 미 군사고문단장. 하우스만이 미 군사고문단으로 활동하며 군사작전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이 촬영된 시기는 1949년이다.
미국이 현대사 격변의 순간에서 남녘 정치에 개입한 것은 비단 12.12뿐만이 아니다. 잘 알려져 있듯이, 해방 직후부터 미국은 우리 민족의 자주적인 민주개혁과 통일독립정부 수립 열망을 총칼로 짓누르고 이승만을 ‘대리인’으로 내세워 분단체제를 구축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내세운 ‘대리정권’이 민중의 강력한 항쟁으로 위기에 봉착했을 땐 시기에 따라 ‘대리정권’을 지원해 민중항쟁을 탄압거나, 위기탈출 차원에서 ‘대리정권’을 토사구팽하고 새로운 ‘대리인’을 내세우거나 변혁열망을 무마시킬 기만책을 내세웠다. 4.19혁명 당시 미국의 압박에 의한 이승만 하야, 5·16쿠데타, 5.18 민중항쟁에서의 학살 지원, 6월항쟁에서의 6.29 선언 등 굵직굵직한 격변에는 늘 미국이 있었다.
특히, 현대사 속 격변에서 핵심을 차지한 자가 있었으니, 바로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usman)이다. 하우스만은 미군정 강점 시기인 1946년 7월 28일에 38도선 이남으로 건너와 ‘국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 창설을 지원하는 임무를 맡아 1개월 동안 춘천 소재 제8보병연대 연대장을 지냈다. 이어, 서울로 올라와 러셀 D. 배로스(Russel D. Barros) 대령 휘하에서 ‘조선경비대’ 집행국장 겸 고문관으로 활동하면서 남녘 ‘국군’ 창설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세간에 잘 알려져 있는 ‘국군의 아버지’란 별칭에서 볼 수 있듯, 하우스만은 ‘국군’ 창설 과정에서 미국의 입맛에 맞게 일제 관동군・만주군 출신 친일 매국노 군인들*을 친미분자로 세탁시켜 주요 간부로 세우는 한편 독립군 출신이나 진보 성향 군인들은 창설 과정에서 전적으로 배제하고 ‘숙군’시켜 버렸다. 여순항쟁 당시 ‘남조선로동당 소속’ 군인이던 박정희(만주군 소위 역임)를 변절시킨 뒤 그를 미국의 ‘대리인’으로 키운 것도 하우스만이었다.
*백선엽(관동군 간도특설대), 정일권(만주군), 김석원(일본군), 유재흥(일본군), 채병덕(일본군), 백인엽(백선엽 동생, 일본군) 등.
뿐만 아니라 하우스만은 남녘 정국을 좌지우지했다. 미군정~이승만 괴뢰정권 당시 일개 육군 대위에 불과했던 그가 국무회의에 들어가 회의를 주도하고, 이승만과는 경무대(청와대 전신)에서 함께 지내며 주요 현안을 토론하던 사실은 미국 주도 남녘 정치권에서의 그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하겠다. 또한, 현대사 속 각종 학살만행(일명 ‘빨갱이 사냥’)에도 관여하여 제주 4.3항쟁-여순항쟁 등에서의 ‘초토화 작전’은 하우스만이 주도한 것이었으며, 한국(조선)전쟁 때 한강인도교 폭파를 명령해 수많은 서울시민들을 희생시킨 것도 하우스만이었다. 여기다가 하우스만은 학살 과정에서 희생자들의 머리를 방부처리한 뒤 자신이 직접 이를 들어 보이며 신원을 확인하고 자랑하는 잔인성과 악취미를 보여주기까지 했다.
(자료: 제임스 하우스만의 방첩대(CIC) 활동과 5.16, 12.12 지원 및 계획 개념도)
하우스만의 행적은 전쟁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하우스만은 방첩대(CIC)* 한국 책임자를 역임하며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와는 경쟁하는 한편, 방첩대 조직을 움직여 정치/군사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남녘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4.19 혁명 당시에도 하우스만은 송요찬 당시 계엄사령관을 통해 이승만에게 미국으로부터의 ‘토사구팽’을 알리며 하야를 종용했다. 5·16쿠데타를 적극 지원한 것도 하우스만이었다. 45일 전(1961.03.01.)부터 쿠데타 계획을 알고 미국에 보고하면서도 장면 내각의 군사고문 요청을 거절하며 사실상 장면 내각의 몰락을 묵인했고, 자신이 여순항쟁 때부터 핵심 ‘대리인’으로 육성해 온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인 6월 18일에 찾아와 지지를 요청하자 하우스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정부, CIA, 군 당국자 등을 설득하여 미국이 박정희 군사정권을 지지하도록 이끌었다.
*방첩대(CIC) 출신으로 유명한 자가 바로 김구를 살해한 안두희이다. 남북연석회의 참여 이래로 단정반대, 통일정부 수립에 힘썼던 김구를 미국이 제거하려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안두희가 CIC 출신인 것을 감안할 때 결국 김구 피살 역시 하우스만이 개입했다 볼 수 있다.
(자료: 하우스만 사망 보도. 동아일보 1996.10.07.)
“제임스 H.하우스만, 유엔군 사령관 특별고문 – 신생국가에서 오늘날 대한민국까지의 부침(浮沈) 동안 옆에서 큰 도움을 준 영원한 친구에게. 1981.07.01. 노태우
특히, 12.12 당시에도 하우스만은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10.26~12.12 당시 하우스만은 남녘에서의 40년간 오랜 활동 경력을 바탕으로 존 위컴 주한미군 사령관과 윌리엄 글라이스틴 미국대사 등에게 전두환과 하나회 일당, 쿠데타 음모에 대한 막대한 정보를 제공했고, 이들과 미국이 전두환 일당을 새로운 후계자로 결정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제5공화국’이 들어선 뒤인 1981년 7월 1일에 하우스만은 오랜 남녘에서의 활동을 끝내고 미국으로 귀국했는데, 이때 노태우가 하우스만과 함께 찍은 사진이 든 감사패(위의 인용 참조)를 준 것은 하우스만이 남녘 정치변동에 끼친 막대한 영향력과 12.12 당시의 활동이 어떠했는가 잘 보여준다.
결론: 한국현대사의 진정한 흑막 WARmerica를 넘어
(자료: 영화 'WARmerica의 운명'중)
이렇듯, 12.12 군사반란은 남녘에 대한 식민지배와 동북아 패권전략을 잃지 않으려던 미제국주의의 의중 아래 철저히 계획되고 실행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대사 속 각종 곡절에도 언제나 미국이 있었다. 미국은 남녘 식민지배 및 동북아 패권 전략에 따라 자신들의 ‘대리인’을 내세워 민중들의 반제자주 투쟁과 민주화 투쟁을 탄압해 왔고, 위기에 봉착했을 땐 ‘대리인’을 토사구팽하고 기만적인 ‘새 체제(장면내각, 6.29선언 등)’를 내세워 민중들의 변혁 열망을 무마하거나 새 ‘대리인’을 내세워 위기탈출을 시도해 왔다. 즉, 미국이 있는 한 이 땅의 자주독립과 참된 민주주의, 평화통일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은 항상 좌절과 탄압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고 있다. 전세계적 범위에서 미국 중심 일극패권은 날이 갈수록 몰락해 가고 있고, 세계 각지에서 반제자주와 새 세상을 바라는 민중들의 투쟁은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 특히, 이 땅에서도 격변기는 다가오고 있다. 나날이 고도화되는 북의 핵무력과 조-중-러 연대 앞에 미국의 동북아 군사패권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고, 남녘에서도 미국이 ‘대리인’으로 내세운 ‘현대판 신군부’인 윤석열 검찰파쑈독재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와 저항도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전과 같이 미국의 의중에 따라 우리 민족의 열망이 좌절되는 시대도 저물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현대판 신군부’ 윤석열 정권을 몰아내는 것은 당연하고, 나아가 현대사의 진짜 흑막인 WARmerica도 이 땅에서 축출하여 진정한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을 쟁취해야 하지 않겠는가? 전세계적 격변기와 맞물린 다가오는 총선과 앞으로 예정된 항쟁들은 이땅의 근본 모순을 해결하고 우리 민족의 오랜 열망을 쟁취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대규모 항쟁을 준비하며 ‘서울의 봄’과 ‘현대판 신군부’의 진정한 흑막 WARmerica의 실체와 몰락하는 현실을 똑똑히 알고 널리 알려 더 많은 대중들을 조직하는 것이 진보진영의 주된 과제가 될 것이다.
다큐멘터리 "워메리카의 운명" 공동체 상영신청(클릭하시면 신청 페이지로 이동)
[안광획의 새세대 청춘송가] 최근의 역사전쟁에 대한 단상 - 기록영화 《건국전쟁》 논란을 보며
안광획 연구위원 webmaster@www.tongiltimes.com
하우스만의 행적은 전쟁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하우스만은 방첩대(CIC)* 한국 책임자를 역임하며 중앙정보국(CIA) 한국지부와는 경쟁하는 한편, 방첩대 조직을 움직여 정치/군사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남녘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4.19 혁명 당시에도 하우스만은 송요찬 당시 계엄사령관을 통해 이승만에게 미국으로부터의 ‘토사구팽’을 알리며 하야를 종용했다. 5·16쿠데타를 적극 지원한 것도 하우스만이었다. 45일 전(1961.03.01.)부터 쿠데타 계획을 알고 미국에 보고하면서도 장면 내각의 군사고문 요청을 거절하며 사실상 장면 내각의 몰락을 묵인했고, 자신이 여순항쟁 때부터 핵심 ‘대리인’으로 육성해 온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인 6월 18일에 찾아와 지지를 요청하자 하우스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정부, CIA, 군 당국자 등을 설득하여 미국이 박정희 군사정권을 지지하도록 이끌었다.
*방첩대(CIC) 출신으로 유명한 자가 바로 김구를 살해한 안두희이다. 남북연석회의 참여 이래로 단정반대, 통일정부 수립에 힘썼던 김구를 미국이 제거하려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 안두희가 CIC 출신인 것을 감안할 때 결국 김구 피살 역시 하우스만이 개입했다 볼 수 있다.
(자료: 하우스만 사망 보도. 동아일보 1996.10.07.)
“제임스 H.하우스만, 유엔군 사령관 특별고문 – 신생국가에서 오늘날 대한민국까지의 부침(浮沈) 동안 옆에서 큰 도움을 준 영원한 친구에게. 1981.07.01. 노태우
특히, 12.12 당시에도 하우스만은 사건의 중심에 있었다. 10.26~12.12 당시 하우스만은 남녘에서의 40년간 오랜 활동 경력을 바탕으로 존 위컴 주한미군 사령관과 윌리엄 글라이스틴 미국대사 등에게 전두환과 하나회 일당, 쿠데타 음모에 대한 막대한 정보를 제공했고, 이들과 미국이 전두환 일당을 새로운 후계자로 결정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제5공화국’이 들어선 뒤인 1981년 7월 1일에 하우스만은 오랜 남녘에서의 활동을 끝내고 미국으로 귀국했는데, 이때 노태우가 하우스만과 함께 찍은 사진이 든 감사패(위의 인용 참조)를 준 것은 하우스만이 남녘 정치변동에 끼친 막대한 영향력과 12.12 당시의 활동이 어떠했는가 잘 보여준다.
결론: 한국현대사의 진정한 흑막 WARmerica를 넘어
(자료: 영화 'WARmerica의 운명'중)
이렇듯, 12.12 군사반란은 남녘에 대한 식민지배와 동북아 패권전략을 잃지 않으려던 미제국주의의 의중 아래 철저히 계획되고 실행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대사 속 각종 곡절에도 언제나 미국이 있었다. 미국은 남녘 식민지배 및 동북아 패권 전략에 따라 자신들의 ‘대리인’을 내세워 민중들의 반제자주 투쟁과 민주화 투쟁을 탄압해 왔고, 위기에 봉착했을 땐 ‘대리인’을 토사구팽하고 기만적인 ‘새 체제(장면내각, 6.29선언 등)’를 내세워 민중들의 변혁 열망을 무마하거나 새 ‘대리인’을 내세워 위기탈출을 시도해 왔다. 즉, 미국이 있는 한 이 땅의 자주독립과 참된 민주주의, 평화통일에 대한 대중들의 열망은 항상 좌절과 탄압을 면치 못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고 있다. 전세계적 범위에서 미국 중심 일극패권은 날이 갈수록 몰락해 가고 있고, 세계 각지에서 반제자주와 새 세상을 바라는 민중들의 투쟁은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 특히, 이 땅에서도 격변기는 다가오고 있다. 나날이 고도화되는 북의 핵무력과 조-중-러 연대 앞에 미국의 동북아 군사패권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고, 남녘에서도 미국이 ‘대리인’으로 내세운 ‘현대판 신군부’인 윤석열 검찰파쑈독재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와 저항도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전과 같이 미국의 의중에 따라 우리 민족의 열망이 좌절되는 시대도 저물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현대판 신군부’ 윤석열 정권을 몰아내는 것은 당연하고, 나아가 현대사의 진짜 흑막인 WARmerica도 이 땅에서 축출하여 진정한 자주독립과 평화통일을 쟁취해야 하지 않겠는가? 전세계적 격변기와 맞물린 다가오는 총선과 앞으로 예정된 항쟁들은 이땅의 근본 모순을 해결하고 우리 민족의 오랜 열망을 쟁취할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대규모 항쟁을 준비하며 ‘서울의 봄’과 ‘현대판 신군부’의 진정한 흑막 WARmerica의 실체와 몰락하는 현실을 똑똑히 알고 널리 알려 더 많은 대중들을 조직하는 것이 진보진영의 주된 과제가 될 것이다.
다큐멘터리 "워메리카의 운명" 공동체 상영신청(클릭하시면 신청 페이지로 이동)
[안광획의 새세대 청춘송가] 최근의 역사전쟁에 대한 단상 - 기록영화 《건국전쟁》 논란을 보며
안광획 연구위원 webmaster@www.tongiltimes.com
No comments:
Post a Comment
Note: Only a member of this blog may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