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09

[현대사 아리랑](28) 광복 전 ‘경향문학’ 거목 한설야 (상/하) - 주간경향

[현대사 아리랑](28) 광복 전 ‘경향문학’ 거목 한설야 (상) - 주간경향


(28) 광복 전 ‘경향문학’ 거목 한설야 (상)

장편 ‘황혼’은 노동문학의 정점



당신과 단 한 번 서신 왕복을 한 것이
아마도 벌써 6년 전이다
지상으로 보내는 이 한 편의 단시를
당신은 고소(苦笑)하라 나의 악수로!


당신과 민촌은 좋은 ‘콤비’다
민촌은 당신의 작가적 형님이고
당신은 민촌의 이론적 형님이다
당신의 이론을 당신의 창작에 소화시켜라


당신의 휴매니즘 부정론을 들을 만하나
너무도 원칙에만 구니(拘泥)치 말지어다
부정과 긍정을 혼혈치는 말지나
리알적 입장으로서 사회성을 탐구하여라
한 번 체한 요리는 냄새도 싫다는 격은
문학적 영양의 섭취법을 그릇한다
즐겨 쓰는 ‘생리적 역학’이다


당신은 지금 ‘과도기’를 지나서
당신의 문학적 건설기에 있으리라
가작 ‘씨름’과 새 씨름을 역박(力搏)하라
잡동사니는 ‘홍수’와 함께 청산하여라
북국의 ‘임금(林檎)’은 맛있는 과실이니
굶주린 무리에게 식량을 오력치 말고
리알리즘의 선로로 달음질하라


김용제(金龍濟)가 <비판> 1937년 9월호에 발표한 ‘한설야’라는 시이다. 빼어난 문단 선배 9명 이름을 들어 그들이 문학적으로 남다른 바탕과 좋고 나쁜 점을 꼬집고 비틀면서 추어주는 ‘문단풍자시’를 쓸 때는 두 팔 걷어붙이고 친일로 넘어가기 전이었다. <친일문학론>을 쓴 임종국(林鍾國) 말에 따르면 “40년대 문단에서 절대로 호락호락하게 넘겨 버릴 수 없는 유수한 논객이요 시인이었다.”


‘민촌의 이론적 형님’이라고 김용제가 추켜준 한설야(韓雪野)는 1900년 함남에서 태어났다. 함흥시 밖 나촌(羅村)이라는 농촌이었다. 조선왕조 끝 무렵 군수를 지낸 아버지와 농촌 태생인 어머니 사이에 둘째아들로 태어난 한설야 본디 이름은 병도(秉道)로 7, 8살부터 서당을 다니다가 소학교에 들어간 것은 11살 무렵이었다. 1914년 15살 때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있던 아버지를 따라 올라가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는데, 박헌영과 동창이었다. 4학년 때 첩어미(서모)와 싸우고 서울을 떠나 함흥고보로 전학하였다. 1919년 함흥고보를 졸업하면서부터 문학에 뜻을 두었다.


함흥법전서 동맹휴학사건으로 제적
고보를 마치던 해 일어난 3·1운동에 들었다가 몇 달 징역을 살았고, 아버지 뜻에 따라 들어갔던 함흥법전에서 동맹휴학사건을 일으켜 제적당하였다. 1920년 형을 좇아 북경으로 가서 익지(益智) 영문학교에 다니며 사회과학 공부를 비롯하였다. 1921년 잠시 서울로 왔다가 어떤 여자와 사귀다가 허방 짚고 동경으로 갔다. 일본대학 사회학과에 다녔으나 문학보다는 사회과학에 학교보다는 묵는 집에서 골똘히 사회과학을 비롯한 철학과 역사책들을 읽었다.


1923년 동경대지진을 겪고 귀국하여 북청고보 강사로 있으며 소설 습작에 골똘하였다. 1925년 <조선문단> 4호에 단편소설 ‘그날 밤‘이 발표되면서 소설가가 되었다. 이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어 살림이 몹시 어려워져 만주 무순(撫順)으로 옮겨 살았고,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들어가 이론 활동을 하였다. 이때 쓴 것이 ‘예술의 유물사론’이라는 논문이다. <조선지광> 1927년 12월호.


유물사관은 ‘사실(사물)’로써 출발점을 삼는다. 그 ‘사물’은 물론 의식에 의하여 영상- 관념적·논리적 개념 중에서 승인된 사물(혹은 존재)이 아니라 순수히 보통 보이는 그대로의 사실- 경험적 방법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그 ‘사물’이다. 사물(존재)은 인간 이전부터의 것으로 인간의 의식 급 감각으로부터 절대 독립 구별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신의식이라는 것은 사실 자연물질의 소산으로 물질에 따라 변천하는 것이니 요약하면 물질이 선이요 정신이 후라는 것이 유물사관의 출발점이다. 이것을 가장 과학적 방법(변증법)으로 확증한 사람은 맑스와 엥겔스였던 것이다. (…)


저 예술지상주의자 같은 관념론자들은 소위 절대이념(그것은 사물 이전의 것으로 사물을 낳은 바 근원이라고)을 가지고 현실에 임하여 현실이 이념에 배치(물론 배치될 일이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되는 때는 그들은 현실을 버리고 다만 그 이념(공상)을 따라 형이상학적 일대 허구에 빠진다. 그들은 현실에 살면서도 늘 유령과 같은 이념의 암굴 속에 빠져서 가엾게 헤맬 뿐이다.


농민의 노동자화 그린 ‘과도기’등 발표
단편 ‘그릇된 동경’ ‘그 전후’ ‘뒷걸음질’과 평론 ‘계급대립과 계급문학’ ‘무산문예가의 입장에서 김화산 군의 허구문예이론의 관념적 당위론을 말함’ ‘문예비평의 과학적 태도’ 발표.


1928년 고향 함흥으로 돌아가 조선일보 지국을 1년 동안 꾸려나갔는데 먹고살기 위한 구실이었다. 단편 ‘합숙소의 밤‘ ‘홍수’ ‘인조폭포’와 평론 ‘1928년대의 대중간의 문예관계는 어떻게 전개될까’를 발표. 1929년 농민의 노동자화를 그린 단편 ‘과도기’와 ‘새벽’ ‘한길’ ‘씨름’ 발표. 1930년 희곡 ‘총공회’ 발표. 1931년 ‘공장지대’, 1932년 ‘사방공사’ ‘365일’ ‘개답’, 33년 ‘교차선’ ‘추수 후’ ‘소작인’ 같은 소설과 ‘전기’ ‘절뚝발이’ ‘저수지’ 같은 희곡, 그리고 여러 편 평론을 발표하였다. ‘과도기’와 ‘씨름’에 대한 김기진(金基鎭) 꼲음이다.


설야의 ‘과도기’는 작자의 설명과 같이 ‘농촌의 몰락과 공장도시의 발흥과 농민의 노동자화의 과정’=조선 농촌의 현실적인 총체적 자태를 이 짧은 작품 중에서 전면적으로 반영하려고 한 작품이다. 이 같은 제재는 아무리 하여도 조그만 그릇 속에는 다 담을 수 없는 곡식과 같이 짧은 단편 가운데 실어넣을 수 없는 것이나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 작자는 이러한 의도를 성취하였다. (…) ‘씨름’에서는 새로 발흥한 공장지대의 노동자들의 성장하는 과정= 조직되는 과정을 취급하였다. 새로 조직된 노동회와 적대하여 오던 반동 그룹이 ‘명호’라는 지도자의 정정당당하고 씩씩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씨름판에서 반동 그룹의 ‘패장’을 감복시킨 것이 동기가 되어 가지고 결국 한 조직 안에 합류되는 경로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러나 작자는 결코 이 두 개의 노동자 세력의 악수를 두 패의 중심인물의 개인적 악수 관계에서 보이지 아니하고 사위의 정세가 반동 그룹으로 하여금 ‘명호’의 노동회와 합류하도록 되어 있는 전체적 관계의 가운데에서 보이어 있다. 이것은 정당한 관찰이다. 그리고 이 속편에서는 ‘명호’와 또는 ‘요시다’의 두 인물이 완연히 활동하는 인물로 독자의 안전에 나타나 있어서 ‘과도기’의 ‘창선’이 보다 훨씬 살아 있는 인간이 되었다. 다만 역시 눈에 거칠게 뜨이는 것은 각희시보(脚戱時報)의 E라는 지도자를 작중에 끌어낸 것이다. 이따위 지도자 같은 것이 없고도 이 소설은 훌륭히 될 것이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내 생각으로는 ‘씨름’이 ‘과도기’의 속편이 될 바에는 ‘창선’으로 하여금 ‘씨름’에 나타나게 하였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카프2차사건’으로 1년 옥살이
‘이론적 지도자’라는 말이 바람을 일으키던 때였다. 작품만 골똘히 쓰는 글지들을 덜떨어진 못난이로 다루며 뜨겁게 싸우던 때였다. 3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만큼 일제 짓누름이 더욱 모질고 사나워졌다는 이야기인데, 이론적으로나마 일본제국주의를 눌러보겠다는 문학예술인들의 슬픈 몸부림이었다. 평론을 많이 썼던 한설야 또한 ‘카프’ 안에서 스스로를 이론적 지도자로 여기며 변증법 이론을 즐겨 내세웠는데, 이북만(李北滿)이 쳐들어 왔다. ‘변증법만 내세우는 구호 나열식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실천’뿐’이라는 것이었다. 한설야는 그러나 작품이 받쳐주는 이론가였으므로 떳떳할 수 있었다. 오히려 박영희(朴英熙)를 조합주의로 이북만을 추수주의로 꼬집어 때리면서 노동자 출신 글지 이북명(李北鳴)을 찾아내어 노동소설이 새롭게 바뀔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


이런 셈평에서 터져나온 것이 제2차 ‘카프사건’이었다. 계급문학을 내세우는 ‘카프’를 받아들이지 않는 일제가 1931년 2월부터 8월까지 얽혀 있던 70여 명을 동여갔던 것이 ‘카프1차사건’이었다. 34년 2월에서 12월까지 ‘카프2차사건’으로 잡아들인 사람이 200여 명이고 동여진 사람은 80여 명이었다. 이기영, 박영희, 윤기정, 백철, 최정희 같은 일동무 글지들과 1년쯤 징역을 산 한설야였는데, 10년을 이어오던 ‘카프’ 또한 뜯어헤쳐지고 말았다.


35년 끝 무렵 집행유예로 옥에서 풀려난 한설야는 함흥으로 가서 책방, 극장, 인쇄소 따위를 꾸려가면서 36년 단편 ‘태양’으로 손목을 푼 다음 장편소설에 매달렸다. 처음 쓴 장편노동소설 <황혼>을 36년 2월 5일부터 10월 28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하여 걷잡을 수 없는 손뼉을 받았고, 37년 장편 <청춘기>, 40년 장편 <탑>을 잇달아 선보여 소설 본바탕인 장편작가가 되었다. 40년 북경을 다녀왔고, 42년 라디오로 이승만(李承晩)이 하는 조선독립방송을 듣고 널리 퍼뜨렸다는 혐의로 붙잡혀 1년 징역을 살았다.


작가 한설야는 ‘과도기’ ‘씨름’ ‘사방공사’ ‘교차선’ 같은 문제작과 <황혼> <탑> 같은 장편소설로 해방 전 경향문학에서 가장 대모한 작가가 된다. 한설야 작품에 나오는 간도체험은 최서해(崔曙海)의 그것과는 뚜렷하게 가려지니, 과학적 생각과 역사적 앞길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뚜렷한 자기세계를 갖는 작가로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다. 겪어본 일 그것에 파묻혀 버림으로써 역사적 앞길을 잃어버리는 신경향파 소설 높이를 한 마디 들어올렸던 작가로 꼲아진다. 이론무장 또한 탄탄해서 좌익 젊은 이론가들 가운데서도 우뚝 솟는 봉우리였다. <황혼>을 보는 문학평론가 김철(金哲) 교수 꼲아매김이다.


일찍이 임화는 이 소설을 ‘실패작’으로 규정한 바 있지만, 그것은 임화 자신이 지닌 이른바 ‘성격과 환경의 조화’라는 매우 모호한 기준에 의한 것이었다. 한설야는 임화의 이런 비판에 대해 “산다는 것은 환경과 타협하거나 또는 환경에 추수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환경과 싸우는 데에(…) 아니 도리어 살아갈 수 없을만치 거칠고 사나운 환경에 있어서는, 싸우는 그것만이 오직 생(生)이라는 말로, 려순의 성격 창조에 무리가 없음을 주장한 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란 반드시 한설야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황혼>이 발표되던 1930년대 후반의 우리 소설은 전체적으로 통속화의 경향을 드러내고 있었다. 카프의 해산과 군부 파시즘의 강화라는 전반적 정세의 악화 속에서 문학의 직접적·정면적인 대응보다는 간접적·우회적 대응이 피치 못할 현실이었고, 소설의 통속적 경향이란 이러한 현실의 한 소산이었던 것이다.

현대사 아리랑

광복 전 ‘경향문학’ 거목 한설야 (하)



카프 대표작가 이기영(하)


카프 대표작가 민촌 이기영(상)

그러나 굳이 이러한 현실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한설야의 <황혼>이 1930년대 민족해방운동에 있어서의 국내 노동자 집단의 삶과 의식을 구체적인 현실을 매개로 하여 형상화한 노동소설의 한 정점에 선 작품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김성동 | 194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세에 출가, 10여 년간 스님으로 정진했다. 1978년 소설 <만다라>로 ‘한국문학 신인상’을 수상하고, 소설집 <집> <길> <국수> 등을 냈다. 현재 경기 양평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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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전 ‘경향문학’ 거목 한설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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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11월 문화예술인 중 맨 처음 월북



북한의 농민들이 모여 토지개혁에 대해 좌담회를 하고 있는 모습. 한설야는 농민·노동소설에 주력했다. | 김국후 <평양의 소현군정> 인용

“1962년에 파문을 일으켰던 작가 한설야 사건이 있었다. 그는 일제시대에 ‘과도기’라는 작품을 써서 문단에 나온 작가인데, 나는 그의 작품을 평률리(평북 안주군) 리 민주선전 실장을 하면서 도서실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간도에서 이민을 갔다가 되돌아 온 주인공 가족의 눈을 통해서 한 어촌이 몰락해 가는 과정을 쓰면서 식민지 사회의 허구성을 폭로한 이 소설과, 자본가의 생태를 노동자의 눈으로 객관적으로 묘사한 노동장편소설 <황혼>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내가 있던 평양 초대소에서 한설야의 집이 가까워서 그에 대해서 관심을 안 가질 수 없었다.”


남파 공작원 김진계 이야기를 보고 문학가 김응교가 쓴 <조국>에 나오는 대문이다. <조국>에는 한설야만 아니라 이기영·이태준 같은 작가며 김두봉 같은 독립투사, 그리고 정순덕 같은 지리산 항미빨치산들 이야기가 담겨 있어 여간 값진 적바림이 아니다. 김진계가 들었던 한설야 이야기이다.


이기영, 안막·최승희 내외와 함께
보통강가에 있는 그의 집은 양식으로 지어져서 대궐처럼 웅장했고, 입구에는 두세 명의 건장한 경비원이 항상 지키고 있었다. 사회안전부 소속의 지도원의 말에 따르면 한설야의 책은 유럽이나 소련에서 모두 번역되어 인세가 매일 국제은행의 구좌에 예금되는데,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는 한설야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날, 지도원이 한설야의 집에서 녹음했다는 테이프 얘기를 내게 해주었다.
녹음된 내용은, 처음엔 남쪽은 자신들을 낳아주고 길러준 고향산천이 있는 곳이라는 고향타령이었다. 그래서 친절하고 따뜻하고 간곡한 마음이 없겠냐, 뭐 그런 얘기였고, 그 다음엔 도쿄세라는 일본 노래를 한설야가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녹음된 내용의 뒷부분이었다. 뒤에는 현재 북조선 사회는 정상적인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며, 무식하기 짝이 없는 김일성이 유일사상체계를 자신의 우상숭배로 이용하고 있다는 무시무시한 말이 녹음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게 정말입니까?”
내 물음에 지도원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한 선생뿐 아니라, 최승희, 신불출 같은 반동패거리들의 목소리도 모두 녹음되었습니다.”
“예?”
나는 깜짝 놀랐다. 그들은 모두 둘째가라면 서러울 인민의 문화영웅들이었다. 특히 한설야는 국가에서 총리급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녹음기에 녹음된 내막은 이렇다고 들었다.


한설야의 집은 넓었고 놀기가 좋아서 항상 많은 문화일꾼들이 모여서 회의도 하고 토론도 했다. 특히 남쪽에서 올라온 문화일꾼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이곤 했는데, 모인 사람들은 한설야와 무용가 최승희, 최승희와 안막 사이에서 난 안성희(安聖姬), 만담가 신불출(申不出) 등이었다. 그들은 매일 저녁마다 모여서 남쪽 고향을 그리워하고, 여느 간부들은 건강을 위해서 술안먹기운동을 하고 있는 데 반해, 그들은 양주를 먹으면서 금지된 일본 노래와 남쪽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한설야의 집 식모(상급 간부의 집에는 국가공무원인 가정부를 두었다)가 사회안전상 댁 식모와 함께 장을 보다가 “한 선생님이 새벽 네 시까지 술을 드셔서 한잠도 못잔다”고 우연히 말한 게 발단이 되어 사회안전부 지도원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지도원은 식모에게 이태리제 소형 녹음기를 주어서 그들의 말을 전부 녹음하도록 시켰다. 저녁에 식모는 술상을 차리는 척하면서 녹음기를 행주에 싸서 창틀에 올려놓았고, 그들의 목소리는 소형 녹음기에 모두 담겨져서 사회안전부에 넘겨졌던 것이다. 당연히 이들은 모두 숙청되었다.


인민 문화영웅으로 총리급 대우
한설야가 평양으로 간 것은 1945년 11월 끝무렵이다. 이기영, 안막·최승희 내외와 함께였으니, 문화예술인 가운데 맨 처음 월북이었다. 8·15를 맞아 서울에서는 문화예술 모임이 생겨났는데, 임화가 의장을 맡은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와 이기영, 한설야가 세운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이었다. ‘문건’ 쪽에 선 문인으로는 김남천, 이태준, 안회남, 김기림, 박태원, 조벽암, 이용악, 이서향, 이원우, 민병균 같은 이였고, ‘예맹’ 쪽 문인은 박팔양, 한효, 송영, 엄흥섭, 이북명, 이동규, 이찬, 김북원, 박영호, 홍순철 같은 이들이었다. 조선공산당 중앙이 시키는 대로 두 동아리는 ‘조선문학가동맹’이 되는데, 머릿수에서 ‘문건’ 쪽이 앞섰다. 이름을 ‘문학가동맹’으로 할 것인가 ‘문학동맹’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거세찬 토론 끝에 부쳐진 표겨룸에서 43 대 28로 ‘문학가’를 내세운 ‘문건’ 쪽이 이겼던 것이다.


북으로 간 이기영은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이 되고, 안막은 부위원장, 한설야는 ‘북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 문화부장이 되었다. 이때 한설야 나이 46살이었고 이기영은 50이었다. 한설야와 민촌 이기영 월북을 임화 동아리와 문단 목대 차지싸움에서 엎어짐으로써 설 자리가 없어진 데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한쪽 눈길을 딱 잘라 대받는 글이 있다. 바로 민촌 손자인 이성렬이 쓴 <민촌 이기영 평전>에 나온다.


민촌 등의 월북은 이를 문단 내부의 틀 속에 한정해서 볼 것이 아니라 당시 정국의 큰 흐름에 비추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미군정은 조선인의 자치의 싹을 짓밟고 점령군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점차 노골화하면서 친일 관료 식민 경찰, 일제 군인 등 반민족적 인사를 재 고용함으로써 지하로 잠적했던 친일분자들이 하나둘씩 기어나와 다시금 세력을 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생사가 걸렸으므로 서로 똘똘 뭉쳐(나중에는 북에서 밀려 내려온 세력과도 연대하여) 민족세력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오히려 이들이 판을 주도하며 마구 테러를 자행하기에 이른다. 이제는 거꾸로 민족세력이 생사를 걱정해야 할 판이 된다. 당시에 이렇게 사태가 전개될 것을 예측하기는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민촌 등이 김일성 노선(친일세력의 제거, 후일의 토지개혁 등)에 동조하여 월북한 측면에는 이런 재미없는 사태의 전개가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문단 내의 파벌싸움에 패하여 월북했다고 한다면 다른 많은 비 카프계 문인들과 그 외의 수많은 양심적 인사들의 월북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월북·납북 문인들 숙청에 앞장섰다”


한설야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교육문화상,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장, 세계평화이사회 이사, 조선평화옹호전국민족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면서 냅다 몰아치던 한설야가 쓸려없어진 것은 1962년 10월이다. 김진계 증언에도 나오듯이 김일성을 꼬집는 말을 한 것이 드러나면서 복고주의자 및 자유주의자로 불도장이 찍힌 것이다.


북에서 펴낸 작품으로는 46년 ‘혈로’와 ‘모자’, 51년 ‘승냥이’, 56년 <설봉산>, 60년 <사랑> 같은 것이 있다. 특히 김일성이 일제와 싸웠던 것을 그린 장편소설 <역사>로 1951년 ‘인민상’을 받았는데, 48년 쓴 단편 ‘개선’은 대표적인 김일성 장군 자랑소설이었다. 공화국 정권이 세워지면서 북에서는 김일성 장군 자랑문학이 쏟아져 나왔는데-시에는 조기천(趙基天) 장편서사시 ‘백두산’과 이찬(李燦) ‘김일성 장군의 노래’, 이정구(李貞求) ‘물결 속에서’, 박세영(朴世永) ‘애국가’ ‘햇볕에 살리라’, 이원우(李園友) ‘아침마다 부르는 합창시’가 있고, 소설로는 강훈(姜勳) 단편 ‘장군님을 맞는 날’이 대표적이다.


한설야 문학관을 보여주는 글이 있다. 1929년 <조선지광> 2월호에 나오는 ‘신춘 창작평’이다. ‘무엇을 어떻게 썼느냐?’는 제목으로, 이른바 소설의 내용문제와 형식문제라는 고전적 명제를 다루고 있다.


이것이 작품평에 있어서 제일의적인 것을 우리는 누누이 말하여 왔다. 어떤 분은 전자를 가리켜 ‘내재적 비평’, 후자를 가리켜 ‘외재적 비평’이라는 신조어를 붙여가지고 갑론을박격으로 한참 싸우고 혹은 분리설 혹은 절충론까지 들더니 지금은 그도 다 자연도태되고 만 모양이다.


우리는 이 양자의 중요성을 잘 안다. 그러나 특히 전자를 역설하여 왔다. 왜? 우리는 후자에 있어서는 전통적 유산을 많이 가졌으므로 실제에 있어서는 어느 만한 수준을 보지하고 있지만 전자에 있어서는 현실에 대한 역사적 인식이 상천(尙淺)하여 이른바 그 ‘무엇’을 파악하기가 곤란하므로 또 사실에 있어 그것이 가장 중요함으로 이것을 더욱 고조하고 역설하여 왔던 것이다. 이하의 평도 이 의미에 불과하다. 일체 선험적 관념과 주관적 구성을 떠나서 사회적·객관적·구체적·계급적 시각에서-.


문예총 부위원장으로 이기영을 곁부축하였던 정률(鄭律, 본명 정상진, 1918~ )이 한 말을 이성렬이 적은 것이다.
“이태준, 한설야 등이 연회석에서 늘 여자들을 희롱하고 즐겨도 민촌은 여자들에게 눈길 한 번 주는 법이 없었다고 하였다. … 한설야가 이태준, 김남천 등에 대하여 아주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한설야와의 대화에서 직접 들었는데 한이 민촌에 대하여는 어쩌지 못한 것은 민촌이 워낙 고정한 분으로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무섭고 슬픈 이야기가 나온다. 참과 거짓은 알 수 없지만 끔찍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정률은 거기서 김일성 우상화와 월북, 납북 문인들의 무자비한 숙청이 모두 한설야와 그의 조역자인 홍순철, 안함광, 엄호석들의 소행임을 고발하고 있다. 한은 자신의 출세를 도모하기 위하여 자기보다 우수한 작가들을 짓밟았다고 하였다. 이태준, 임화, 김남천, 이광수, 김동환 등의 문인과 최승희 등의 예술인들을 그가 충분히 구원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의 운명에 관하여 무관심한 채 이들에 대하여 문학예술인들의 모임에서 악담을 퍼부었다는 것이다.”
김진계가 말한 뒷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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