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손세일의 비교 평전 - (2)이승만과 김구 : 월간조선
09 2001 MAGAZINE전체기사
孫 世 一
1935년 釜山 출생. 서울大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졸업 후 美國 인디애나 대학 저널리즘 스쿨, 日本 東京大 법학부 대학원에서 修學. 「思想界」, 「新東亞」 편집장과 東亞日報 논설위원을 거쳐 1980년 「서울의 봄」 때 政界에 투신하여, 11代, 14代, 15代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동안 民韓黨 外交安保特委長, 서울시지부장, 民推協 상임운영위원, 民主黨 통일국제위원장, 國民會議 정책위의장, 원내총무를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大韓民國臨時政府의 政治指導體系」, 「韓國戰爭勃發背景 연구」, 「金九의 民族主義」 등이 있고, 著書로 「李承晩과 金九」, 「人權과 民族主義」, 「韓國論爭史(編)」, 譯書로 「트루먼 回顧錄(上, 下)」, 「現代政治의 다섯 가지 思想」 등이 있다.
(1) 書堂의 都講에서 번번이 장원
李承晩과 金九는 나이가 들면서 당시의 사대부집 아이들이나 웬만한 상민들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書堂공부를 시작했다. 목표는 물론 科擧였다.
과거는 儒敎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은 나라에서 그 經典의 시험을 통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였다. 後周(후주)의 귀화인 雙冀(쌍기)의 건의에 따라 高麗 光宗 9년(958)에 처음 실시된 이후로 과거는 우리나라의 정치·사회·문화의 발달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文官이 武官이나 胥吏(서리)를 누르고 국가권력을 장악하게 했던 文治主義는 근대국가의 기본 틀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이른바 文民優位의 原則을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일찌감치 정착시켰다는 점에서 세계의 역사에서도 특수한 경우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오직 과거에 합격하는 것만이 입신출세의 길이었고, 과거에 합격하려면 유교의 경전과 교양을 열심히 익혀야 했다. 그러한 전통이 오늘날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으면서도 공통적인 민족의 특성인 높은 敎育熱의 원천이 된 것은 흔히 지적되는 대로이다.
李承晩은 일곱 살 나던 해부터 열아홉 살이 되던 1894년에 甲午更張으로 科擧制度가 폐지될 때까지 서당공부를 계속했다. 그리고 열세 살 때부터 계속해서 科擧를 보았으나 번번이 낙방했다. 그런데 李承晩은 이 시절의 일에 대해 자서전 초고에서나 다른 글로 적어 놓은 것이 없다. 자서전 초고에는 앞으로 쓸 요량으로 적어 놓은 몇 가지 사항 중에 「學校(書堂)生活. 科擧를 위한 敎育. 10권의 詩와 2권의 書를 외웠던 일」이라고만 적어 놓았을 뿐이다.1)
그가 외웠다는 詩와 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李承晩의 공식전기인 올리버의 전기도 이 중요한 시기에 대해, 이 무렵의 한국에는 學校가 없었고 일반 가정에서는 가정교사(훈장)를 고빙하여 자기 아이들과 친척이나 친구 아이들을 가르쳤다면서, 李承晩은 李丙胄(이병주), 申興雨 형제 등과 함께 儒敎經典을 공부했고 열아홉 살이 되기 전에 四書三經의 중요한 부분을 외웠다고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고 말았다.2)
반면에 李承晩의 구술을 토대로 했을 徐廷柱의 전기에는 이 시절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으나, 이 전기는 또 저자의 상상력에 의하여 과장된 부분이 적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徐廷柱의 전기는 출판되자마자 판매금지되었는데, 프란체스카는 올리버에게 보낸 1950년 4월3일자 편지에서 이 책은 李承晩의 어릴 때에 관한 내용이 뒤죽박죽이고 우스꽝스럽게 서술된 것이 있었다고 비판하고 있다.3) 그러므로 徐廷柱의 서술을 뼈대로 하되 관련 인사들의 회고담 등에 의거하여 李承晩의 書堂시절을 살펴볼 수밖에 없다.
李承晩은 처음에 駱洞(낙동)에 있는 퇴직대신 李建夏의 서당에 다녔다. 이 서당은 李建夏가 홀로 된 형수의 외아들 範喬(범교)를 가르치기 위하여 연 서당으로서 낙동과 桃洞 등 이웃 동네의 양반집 아이들 이삼십 명을 모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곳은 어린 承龍이 다니기에 너무 멀었으므로 李敬善 내외는 집을 염동에서 서당 근처인 낙동으로 옮겼다고 한다.4)
承龍은 총명할 뿐만 아니라 훈장이 귀찮아할 정도로 파고드는 성미가 있어서 大文(고전의 본문)과 箋註(전주) 말고도 다른 아이들이 모르는 여러 가지를 빠르게 깨우쳤다.
서당에는 書徒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이들의 학업의욕을 북돋우기 위하여 치르는 종합 경시였다. 한 書徒期가 새로 시작되면 훈장은 아이들을 左靑龍과 右白虎의 두 패로 갈라서 그들의 勤勉, 講讀, 筆書 등의 성적을 낱낱이 기록해 두고, 마지막 날에는 都講을 받았다. 도강이란 그 동안 배운 글 전부를 한꺼번에 외우고 또 해석하게 하는 것으로서 이 도강에 점수가 가장 많았다. 그런데 承龍은 도강에 번번이 장원을 하여 자기편이 이기게 했다. 그래서 공부를 못하는 범교와 아울러 별명을 얻었는데, 범교는 「凡甫(범보)」요 승룡은 「龍甫(용보)」였다.
賈誼의 긴 上疏文도 외워
이 무렵의 어느 날 敬善은 서당의 초대를 받아 아들의 공부하는 모습을 보러갔다가 승룡이 「通鑑」 셋째권을 도강하여 장원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훈장에게 아들이 건성으로 외우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물었다. 훈장은 대답했다.
『저 아이는 梁太傅(양태부) 賈誼(가의)가 상소한 것뿐만 아니라 賈誼의 집안 내력까지 다 알고 있어요. 궁금하시면 물어보시지요』5)
「通鑑」이란 원래 司馬光의 「資治通鑑」을 말하는 것이다. 다만 조선시대에 서당에서 「千字文」과 「童蒙先習」을 뗀 다음에 교재로 가르쳤던 「通鑑」이란 294권이나 되는 「資治通鑑」을 50권으로 요약한 江贄(강지)의 「通鑑節要」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賈誼는 漢나라 太宗 때의 사람으로서 20여 세에 博士로 천거되어 국기를 튼튼히 하는 제반 정책을 폈었는데, 梁의 태부로 있으면서 太宗에게 국정개혁을 강력히 촉구한 장문의 상소문은 특히 유명하다.6)
李承晩이 이때의 기억을 徐廷柱에게 자세히 구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뒤에 일련의 改革運動을 전개할 때에도 賈誼의 상소문이 머릿속에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徐廷柱는 敬善이 아들 承龍이 장원을 하는 것을 목격한 것이 「通鑑」 셋째권을 都講할 때였다고 적고 있으나 賈誼에 관한 내용은 「通鑑節要」의 일곱째 권에 기술되어 있다.
내로라 하는 양반집 아이들 중에서 매번 도강에 장원을 할 만큼 뛰어났었다는 사실은 어린 承龍으로 하여금 집에서 부모들로부터 글을 배우고 글씨를 쓰면서 느꼈던 것보다 더욱 확고한 우월감과 자신감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承龍이 서당 공부를 시작한 지 이태째 되는 1882년 6월에 壬午軍亂이 일어났다. 承龍은 서당에서 글을 읽고 앉았다가 발이 저려서 잠깐 일어나 벽에 기대어 섰는데, 꽝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온 서당이 크게 울리는 바람에 방바닥에 쓰러졌다. 아이들은 모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훈장은 『아아, 어디 마른 벼락이 내리쳤나보다』 하고 말했다. 그것은 마른 벼락이 아니라 난을 일으킨 군인들이 동대문 밖 화약고에 불을 질러서 그것이 폭발한 것이었다.
軍亂이 터지자 서당은 찾아오는 어른들로 붐벼서 아이들은 공부를 할 수 없었다. 승룡은 몇몇 아이들과 같이 서당에서 나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을 쫓아다녔다. 水下洞 어느 민씨집에는 군인들이 몰려가서 집안 살림살이를 모조리 때려부수고 있었는데, 곳간 문을 열고 독을 깨뜨리자 그 속에서 돈이 쏟아져 나와 마당가에 산더미를 이루며 굴렀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그것을 주우려 하자 병정들이 고함을 쳐 그들을 물리쳤다.7)
壬午軍亂은 밀린 給料紛爭을 계기로 해서 일어난 하급 舊式軍人들의 봉기였으나 그 결과는 東北아시아 정세와 조선왕조의 운명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임오군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조선에 출병한 淸國은 이 봉기를 이용하여 再집권한 興宣大院君을 天津으로 납치한 뒤에 군대를 도성 안에 주둔시키고 본격적으로 조선의 내정에 간섭했다. 대원군의 납치와 청군의 온갖 행패는 민중들의 反淸意識을 확산시켰다.
다른 한편으로 日本은 조선 조정을 협박하다시피하여 濟物浦條約과 이른바 朝日修好條規續約을 체결하여 자국의 이익을 챙겼다. 조일수호조규 속약 1항은 仁川, 釜山, 元山의 부두를 기점으로 100리까지 일본인의 행보거리를 확정함으로써 일본상인의 서울 침투를 가능하게 만들었다.8) 또한 도성 안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여 국내 정치세력과 결탁함으로써 2년 뒤에는 甲申政變이라는 유혈의 쿠데타 사건이 일어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일본은 뭐고 청국은 뭐야?』
甲申政變은 金玉均, 朴泳孝 등 양반출신의 젊은 관료층을 중심으로 한 開化派勢力이 1884년 10월17일에 무력으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근대적 개혁을 시도한 사건이다. 이들은 淸佛戰爭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청국과 일본의 외교적 대립관계를 이용하여 그 동안 廣州와 北靑에서 양성해 두었던 親軍營 군대 등 1050명의 조선군과 日本公使館 호위병 150명을 동원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이들 개화파의 권력구상은 14개조의 政綱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 핵심은 일본의 明治維新을 모방한 立憲君主制였다. 政綱은 門閥廢止와 人民平等權의 보장, 租稅制度의 개혁, 근대적인 警察制度의 확립과 軍隊의 創設 등을 표방했다. 그러나 토지개혁 없는 地租法(지조법) 개혁조항은 그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때의 개화파의 쿠데타는 淸國 軍隊의 무력 진압으로 「3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9) 당시 서울에는 1500명의 淸國軍이 주둔하고 있었다.
갑신정변이 터지자 承龍의 식구들은 잠시나마 고대광실에서 살게 되었다. 그 집은 바로 承龍이 다니는 서당을 연 李建夏의 집이었다. 政變 통에 李建夏 일족이 충청도 아산으로 피난을 가게 되어 그 빈 집을 承龍의 식구들이 지켜 주기로 한 것이었다.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敬善은 이때에도 집에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承龍은 이때에 範喬네는 왜 피난을 가야 하고 자기네는 왜 피난을 가지 않아도 되느냐는 의문이 생기면서 範喬네와 자기네는 처지가 다르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10)
서당은 문을 닫고 있었다. 承龍은 아침밥을 먹고 나서는 어머니 몰래 집을 나와서 소란한 난리 속의 길거리를 혼자서 구경하고 다녔다. 진고개 뒤 綠川亭 쪽에서는 일본사람들이 사는 집마다 불에 타고 있었는데, 튀어오르는 기왓장의 불꽃이 굉장했다. 청국 병정들은 길거리에 몰려다니고, 군중들은 군중들끼리 몰려가 일본 사람집에서 된장통이며 비누통 같은 것을 꺼내고 있었다. 병정들은 그것들을 낱낱이 청룡도로 쳐부수어 보고야 돌려보냈다.
사람들은 구석구석에 모여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開化黨의 혐의만 받으면 죽인다느니, 말만 더듬어도 창으로 찔러 죽인다느니, 왜놈이 통나뭇단을 안고 숨어 있다가 맞아 죽어서 통나무 귀신이 되었다느니, 별의별 소리가 나돌았다. 어떤 사람은 자기 눈으로 왜년 죽이는 것을 보고 왔다면서 손짓 몸짓으로 시늉을 하기도 했다.
承龍은 한낮이 훨씬 기운 뒤에야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가 어디를 갔다 왔느냐고 물어도 대답이 없었다. 밖에 나가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더냐고 나무라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밥상을 차려 주어도 먹지 않고 방 아랫목에 가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밤이 되어 저녁을 드는 둥 마는둥하고 자리를 펴고 불을 껐을 때에 承龍은 비로소 입을 열어, 『일본은 뭐고 청국은 뭐야?』 하고 물었다. 承龍은 어머니의 설명을 건성으로 들으면서 오랫동안 이리저리 뒤척거리고 있었다.11)
李承晩은 그의 자서전 초고에서, 이때의 일과 관련하여 그저 「나는 中國사람들이 한국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고, 또 日本사람들이 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內亂을 보았고 戰爭을 보았다. 나는 여러 차례의 전투를 구경했었다」라고 간단히 메모만 하고 있다.
열 살의 조숙한 소년에게 외국인들과도 관련된 政變의 모습은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때에 느꼈다고 하는 일본은 무엇이고 청국은 무엇이냐는 물음은 일생을 두고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과제가 되었다. 範喬네와 자기네는 처지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중요한 각성이었다. 그리고 갑신정변의 주동자의 한 사람인 徐載弼이 李承晩의 스승이 되어 그를 개혁운동에 앞장서게 만드는 것은 뒤에서 보는 바와 같다.
李根秀 判書의 私塾에 다니며
政變이 끝나고 아산으로 피난갔던 李建夏의 가족들이 돌아오자 承龍의 가족은 남산 서남쪽 언덕의 桃洞으로 이사했다. 거기에는 至德祠가 있는 곳으로서 먼 친척들이 몰려 살고 있었다.
敬善은 아들을 근처에 있는 李根秀 判書의 집 서당에 보냈다. 이 서당은 李根秀가 아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연 私塾이었다. 이근수는 讓寧大君의 奉祀孫으로서 承龍에게는 항렬로 치면 조카뻘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承龍은 이 서당에서 과거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傳統的인 書堂교육을 받으며 科擧공부에 열중했다. 이 시기가 李承晩의 성장기에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李承晩이 자신의 아호를 雩南(우남)이라고 지은 것도 이 雩守峴(우수재) 남쪽 도동 시절을 기려서 지은 것이었다.
李承晩은 1956년에 李根秀와 그 부인 안동 權씨의 합장묘에 자신이 비문을 짓고 또 그것을 친필로 써서 묘비를 세우게 했는데, 이 비문은 李承晩이 자신의 서당시절에 대해 직접 적은 유일한 것이다. 원문은 한문으로 되어 있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내가 어렸을 적에 우리 집이 南大門 밖 桃渚洞(도저동)의 關王廟 동쪽 담 곁에 있었다. 여러 해 동안 이 지역에 있는 지덕사 앞의 古家私塾에서 수학하였다. 지덕사는 讓寧大君의 묘호이다.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古宅이 그 앞에 있었고, 종손 根秀 판서공이 그 집에 살았다.
판서공은 아들 丙胄군의 학업을 위하여 수원에 사는 일가 어른 可人 李承卨 선생을 교수로 모셔왔고, 북향한 긴 행랑을 강당으로 사용했다. 봄 여름에는 唐, 宋의 詩文을 읽고 詩와 賦(부)의 科文을 지었고, 가을 겨울에는 經과 史와 古文 등을 일과로 삼았다. 당시에 함께 배우는 사람은 늘 예닐곱 명이 있어서 날마다 머리를 맞대고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 떼의 물고기와 같았다.
이때에 나의 아버지는 사방을 유람하였고 우리 모자는 여종과 함께 세 식구가 한방에 거처하면서 가난한 처지에서도 편안하게 학업을 즐겼다. 부모님은 내가 학업에 전력하도록 늘 大君의 宗家에 가 있게 하여 판서공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貞敬夫人 權氏께서 특히 愛好와 撫育(무육)을 더하여 때로는 자기 먹을 것을 나에게 먹게 하며 친아들과 같이 돌보아 주셨다. 정경부인의 恩德은 참으로 잊을 수 없다. 타고난 성품이 겸손하고 온화하고 정숙하며, 행동거지가 禮法에 어긋남이 없고 말소리가 문 밖에서 들리지 않아 사람들이 다 감복하였다. 게다가 우리 어머니와는 정의가 동기 간이나 다름없었다.
그 뒤로 나는 海外에 있을 때에도 이따금 그때의 일에 생각이 미치면 뜨거운 눈물이 옷깃을 적시곤 하였다. 나는 甲午年 淸日戰爭 이후부터 詩, 書의 옛 학업을 버리고 英語와 新學問에 전심하여 비로소 世界大勢에 눈을 뜨게 되었다. 뒤에 감옥살이의 화를 입었고, 이어 美洲를 떠돌며 갖은 고초를 다 겪다가 마침내 乙酉年에 光復이 되어 美洲로부터 귀국하였다. 먼저 桃渚洞 옛집을 찾으니 桑田碧海로 변천되어 세월도 바뀌고 사람도 떠나고 祠廟와 古宅도 어디로 가버렸다. 여러 동창 친구들 중에서 오직 丙胄와 德載와 나 세 사람만이 남아 지난 일을 추억함에 感古의 회포를 금할 길 없다. 그래서 詩 한 수를 읊었다.
桃園故舊散如煙
복사골 옛 벗들 연기처럼 흩어졌네
奔走風塵五十年
분주했던 풍진 50년
白髮歸來桑海變
백발로 돌아오니 산과 물 변했구나
東風揮淚古祠前
옛 사당 앞에서 동풍에 눈물짓는다
아! 부모님 선영은 북녘에 있어서 아직도 성묘드릴 길이 없다. 다만 정경부인 묘소가 근교에 있기에 한 조각 돌로써 옛일을 추억하고 은혜를 느끼는 뜻을 표하고자 丙胄군과 협의하여 몇 줄 적어 비를 세워 기념하는 바이다.
丙申年 宗末 承晩 삼가 지음>12)
宗末이란 글자 그대로 일가의 제일 말단이란 뜻이다.
이 글은 어려서 입은 은혜와 정의를 기념하고 싶은 뜻에서 지은 비문이기는 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비문에는 일정한 격식이 있고 내용은 고인의 행적을 칭송하는 것인데 비추어, 李承晩의 이 비문은 「비문」으로서는 너무나 파격이 아닐 수 없다. 貞敬夫人 權씨와 자기 어머니 金씨부인의 정의가 동기 간이나 다름없었다는 말은 金씨 부인이 판서집 일을 거들어 주기 위해 그 집을 드나들면서 權씨 부인과 자별하게 지낸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또한 일찍이 「독립정신」을 한글로 저술하고, 대통령이 되어서도 한글에 대하여 각별한 애착을 가지고 한글전용을 법제화하고 맞춤법 간소화에 대해서 자기 주장을 구체적으로 개진하기까지 했던 李承晩이 왜 비문은 한문으로 지었는지 알 수 없다. 평소에 漢詩를 즐겨 짓고 글자 한 자 한 자에 세심한 신경을 썼던 그였으므로13) 이 비문을 작성하는 데에도 많은 정성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이 되고 나서 서당에서 같이 공부했던 李根秀 판서의 아들 丙胄를 초대 舊皇室財産管理委員長으로 임명한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훈장 李承卨은 육순이 넘은 노인이었다. 그는 늙도록 한 번도 벼슬길에 올라 보지는 못했으나 學識도 풍부하고 성품도 너그러워서 훈장으로서는 적격이었다. 興宣大院君도 李承卨을 초빙하여 뒤에 高宗이 된 둘째아들 載晃(재황)을 가르쳤다는 말도 있다.14)
청지기한테서 나비 그림과 소리 배워
承龍은 根秀 판서의 아들 曰壽(왈수:丙胄의 아명)와 또 그 친척되는 아이 乙龍 등과 함께 위에서 본 비문의 내용과 같은 글공부를 했다. 서당공부는 科擧 준비가 주된 목적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承龍은 서당의 글공부 말고도 색다른 관심과 재능을 나타내었다. 그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혼자서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글을 읽다가 쉬는 시간에도 다른 아이들과 함께 밖에 나가 놀지 않고 구부리고 앉아서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나비며 꽃이며 또 더러는 훈장의 얼굴 같은 것도 그렸다. 그가 가장 많이 그리는 것은 나비였다. 그것도 나는 나비, 앉은 나비, 호랑나비, 흰나비 등 모양과 종류가 가지가지였다.
훈장은 그림 그리는 것을 그만두라고 몇 차례 일렀으나 承龍은 듣지 않았다. 敬善이 서당에 들렀던 길에 아들의 이 괴벽을 훈장에게서 듣고 꾸짖었으나 역시 듣지 않았다. 훈장은 여가의 심심풀이로는 반드시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아 나중에는 내버려두었다. 이처럼 承龍은 어려서부터 고집이 세었다.
어느 날 밤 글공부가 끝난 뒤에 承龍은 낮에 그리다 둔 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었다. 주인집에서 내어온 무를 숟갈로 바닥이 나도록 긁어먹고 있던 훈장은 그 껍데기를 내밀며 『옜다, 이거 承龍이 먹어라』 하고 주어 보았다. 承龍은 덤덤한 표정으로 일어서서 그것을 받아 가지고는 자리에 앉아 한 손에 그것을 쥔 채 다시 그리던 그림을 계속했다. 그토록 열중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承龍은 어느 날 그렇게 몰입했던 그림 그리기를 갑자기 그만두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이들이 자기를 『李나비! 李나비!』 하고 부르기 때문이었다. 그 동안 承龍은 이집 청지기 崔應源에게서 그림을 배워 왔었는데, 그 최응원의 별명이 「최나비」였던 것이다.15)
청지기와 같은 별명으로 불리는 것이 싫어서 좋아하던 그림그리기를 그만 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몰락한 양반집 소년 承龍에게도 그만큼 신분에 대한 차별의식이 뚜렷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人間 李承晩 百年④」은 徐廷柱의 증언이라면서 承龍이 서당시절에 「南나비」로 통칭되던 나비 화가 南啓宇(남계우)에게서 나비 그림을 배웠다고 적고 있으나,16)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이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李承晩은 평소에 五園 張承業의 그림을 좋아했다고 한다.17)
열두 살 나던 해 봄까지 承龍은 「通鑑」 열다섯 권을 완전히 익혔다. 이어 「論語」로부터 시작하여 「孟子」, 「大學」, 「中庸」의 四書를 배우는 한편 글씨 공부도 열심히 했다. 承龍이 하루빨리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로 출세하는 것만이 선조들에 대한 도리라고 믿는 敬善 내외는 아들의 과거공부를 더욱 독려했다.
그러나 재주 있고 호기심 많고 한번 집착하면 밤낮을 가리지 않는 성품의 소년 承龍에게는 공부만이 모두가 아니었다. 물론 학과에도 게으르지는 않았고, 글씨와 詩 짓기는 언제나 서당 아이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었다. 독특한 필체의 李承晩의 글씨는 대단한 명필로 꼽히는데, 그는 평소에 秋史 金正喜의 글씨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18) 뒷날 李承晩은 미국에 있을 때에도 붓글씨 연습을 부지런히 하여, 신문지나 못 쓰는 편지 겉봉에까지 붓글씨 연습을 한 것이 지금도 이화장에 보관되어 있다.
같이 공부하던 申肯雨 형제들이 「三國志」를 읽어보라고 주자 承龍은 보름 동안 학과 시간 말고는 그 책을 읽는 데 몰두했다. 그는 이어서 「水滸誌」, 「剪燈新話」 등의 소설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어떤 책은 부모와 훈장의 눈을 피해 청지기 방에 가서 몰래 읽기도 했다.
청지기 방에 가서 읽은 책은 「西廂記(서상기)」였다. 「西廂記」는 元나라 王實甫(왕실보)가 쓴 희곡으로서 나그네 선비 張君瑞(장군서)와 재상의 遺兒(유아) 崔鶯鶯(최앵앵)의 사랑을 그린 걸작이다. 「춘향전」도 이 「西廂記」의 典故(전고)를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선조 이후의 문인으로서 부모 몰래 「西廂記」를 읽지 않은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西廂記」를 다 읽고 나자 承龍은 그림 선생이기도 했던 청지기 崔應源으로부터 소리를 배웠다. 「西廂記」의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난 承龍은 옆에서 嶺南調의 歌詞(가사)를 읊조리고 있는 청지기의 노랫소리에 한참 동안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戎馬(융마)는 關山北(관산북)이오…』 하는 杜律의 1절이 오자 『나 그것 좀 가르쳐 줘』하고 졸랐다고 한다.
그리하여 소년은 바로 종이를 가져다가 그 가사들을 청지기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기 시작하여 며칠 뒤에는 그것에 표지를 두텁게 해가지고 날마다 밤만 되면 이 청지기 방에 와서 어린 목청을 뽑고 있었다는 것이다.19)
봄에 풀꽃이 자랄 때쯤이면 承龍은 또 그 풀꽃들을 뿌리째 옮겨다가 서당 앞 마당가에 심어 두고 그것을 가꾸는 데 정성을 쏟았다. 꽃이 피고 거기에 나비와 벌이 날아와 앉을 무렵까지는 날마다 흙을 파다가 풀꽃뿌리를 북돋우고 물을 주었다. 할 일이 없는 때에는 그냥 그 앞에 가서 꽃잎사귀들을 손가락 끝으로 스치며 왔다 갔다 하기도 하고 쪼그리고 앉아서 골똘히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리하여 훈장으로부터 『꽃귀신한테 반한 녀석 같으니라구!』 하는 말을 듣기도 했다.20)
훈장 李承卨은 承龍을 무척 귀여워했고 承龍도 훈장에게 짓궂은 장난을 할 만큼 스스럼이 없었다고 한다. 같은 「承」자 항렬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더 친근감을 느꼈었는지 모른다. 훈장은 바둑을 좋아하여 손님만 오면 사랑방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그럴 때면 承龍은 어깨너머로 바둑을 구경했다. 어느 날 承龍은 바둑에 열중해 있는 훈장의 바둑통을 치우고 그 자리에 타구를 갖다 놓았다. 훈장은 그런 줄도 모르고 바둑알을 집으려고 손을 뻗쳤다가 낭패를 보았다.21)
대통령 재임 때의 李承晩의 바둑 실력은 7급 정도였다고 趙南哲 8단은 평가했다. 李承晩은 서당 시절 말고 일생 동안 바둑을 배웠을 만한 기회가 별로 없었으므로 만일에 서당에서 배운 것만으로 7급 정도의 바둑 실력을 갖게 되었다면 그것은 承龍의 호기심과 재주와 열성의 또 하나의 증거가 될 만하다.
(2) 兩班되기 위해 아버지 졸라 집에 書堂차려
金九의 서당 공부는 李承晩의 경우보다 훨씬 눈물겨운 동기에서 시작되었다. 昌巖은 열두 살이 될 때까지 모두가 농군인 金씨 집성취락에서 농삿일도 거들지 않고 자랐다고 하는데, 이는 좀 특이한 일이다. 이무렵 아버지 淳永은 都尊位로 있었으므로 그럭저럭 생활을 꾸려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때까지 昌巖은 國文을 익혀 이야기책 정도는 읽을 줄 알았고, 漢文도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千字文」을 배우고 있었다.
昌巖이 열두 살이 되어 글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어느 날 집안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몇 해 전에 집안에 새로 혼사를 치른 집이 있었는데, 그 집 할아버지가 새 사돈을 보려고 서울 갔던 길에 사다 둔 총대우(말총으로 짜서 옻칠을 한 갓)를 밤중에 쓰고 나갔다가 이웃 동네 양반들에게 들켜 갓을 산산이 찢겼고, 그때 이후로 金씨네는 다시는 갓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昌巖은 정색을 하고 어른들에게 물었다.
『그 사람들은 어찌해서 양반이 되었고, 우리 집안은 어찌해서 상놈이 되었습니까?』
『砧山(침산) 강씨의 선조는 우리만 못하지만 현재 進士가 세 사람이나 있지 않느냐. 鼈潭(별담) 이진사 집도 그렇다』
『진사는 어떻게 해서 되는가요?』
『進士 及第는 학문을 연마해서 큰 선비가 되면 과거를 보아서 되는 것이니라』
이 말을 들은 昌巖은 글공부를 하겠다고 결심하고 아버지 淳永에게 서당에 보내달라고 졸랐다. 淳永은 아들이 기특하고 애처로웠으나 언뜻 결심을 하지 못했다. 텃골에는 서당이 없었기 때문이다.
『동네에 서당이 없고, 다른 동네 양반 서당에서는 상놈을 잘 받지도 않거니와 받아 주더라도 양반집 아이들이 멸시할 터이니, 그 꼴은 못 보겠다』 하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늦게 외아들을 보아 자식사랑이 각별했던 淳永은 마침내 집안 아이들과 인근 친구의 아이들 몇 명을 모아 자기 집에 서당을 열었다. 受講料로는 쌀과 보리를 가을에 거둬서 주기로 하고 이웃 淸水里의 李生員을 훈장으로 모셔왔다. 李생원은 신분은 兩班이나 글이 짧아 양반들 서당에서는 고빙하는 사람이 없어서 결국 昌巖과 같은 아이들의 훈장이 된 것이었다. 훈장을 맞이하던 날의 가슴 설레던 감회를 金九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선생님 오시는 날, 나는 너무 좋아서 머리 빗고 새옷 입고 마중을 나갔다. 저 앞에 오십여 세나 되었음직한 키 큰 老人 한 분이 오신다. 아버님이 먼저 인사를 하고 나서 『昌巖아 선생님께 절하여라』 하시는 말씀대로 절을 공손히 하고 나서 그 선생을 보니 마치 神人이라고 할지 上帝(하나님)라고 할지 어찌나 거룩해 보이는지 感想을 다 말할 수 없더라>22)
이렇게 하여 가난한 淳永의 집 사랑이 공부방이 되었고, 훈장의 식사도 淳永의 집에서 대접했다.
개학하던 첫날 昌巖은 「馬上逢寒食」 다섯 글자를 배웠다. 소년은 뜻은 알든 모르든 관계없이 너무나 기뻐서 밤에 어머니의 밀 메갈이를 도우면서 외우고 또 외웠다. 그는 새벽 일찍 일어나서 누구보다도 먼저 훈장 방에 가서 글을 배우고 도시락 망태기를 메고 멀리서 오는 아이들에게 그 배운 것을 가르쳐 주었다.
「馬上逢寒食」이란 唐代의 시인 宋之問의 「途中逢寒食(길에서 한식을 맞다)」이라는 유명한 詩의 첫 구절인데, 이 詩는 朝鮮時代에 서당에서 唐詩를 가르칠 때에 맨 먼저 가르치던 것이다.
淳永의 집에서 석 달을 지낸 뒤에 書堂은 인근 山洞의 申존위 사랑으로 옮겨 갔다. 淳永은 가난한 형편에 너무나 부담이 되어 申존위에게 서당을 넘겼던 것으로 추측된다. 昌巖은 도시락 망태기를 메고 산고개를 넘어 서당에 다녀야 했는데, 가며 오며 昌巖의 입에서는 글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昌巖보다 學習 정도가 앞선 아이들도 없지는 않았으나 배운 것을 외우는 데에는 언제나 昌巖이 가장 뛰어났다. 그만큼 그는 열심이었다.
쫓겨가는 訓長과 눈물로 이별
그러나 반년이 지나지 않아 昌巖의 서당공부는 중단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申존위와 훈장 사이에 반목이 생겨서 결국 훈장을 내 보내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훈장이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는 것이었으나, 사실은 申존위가 아둔한 자기 아들보다 昌巖의 실력이 훨씬 앞서는 것을 시기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일이 있기 전에 매달 보는 都講을 앞두고 훈장은 昌巖에게 구차한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昌巖이 늘 우등을 했으니까 이번에는 글을 일부러 못 외우는 것처럼 하고 훈장이 물어도 모른다고 대답하라는 것이었다. 昌巖은 훈장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申존위의 아들이 장원을 했다고 하여 닭을 잡고 술상을 차려 내어오기까지 했었다. 그랬는데도 결국은 그 훈장을 申존위가 해고하고 만 것이었다. 이 일을 회상하면서 金九가 『이것은 참으로 소위 상놈의 행실이다』23)라고 적고 있는 것도 그의 양반 콤플렉스를 보여 주는 한 보기라고 할 것이다.
훈장은 어느 날 아침 일찍 昌巖이 아침도 먹기 전에 그의 집에 와서 작별인사를 했다. 소년은 정신이 아득하여 훈장의 품에 매달리면서 큰 소리로 울었다. 훈장도 눈물이 비오듯 했다. 훈장과 작별하고 나서도 소년은 밥도 먹지 않고 울기만 했다.
이러한 昌巖의 태도가 혈기 넘치는 淳永의 가슴을 얼마나 쓰라리게 했을 것인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얼마 뒤에 淳永은 李생원과 같은 돌림 선생을 모셔다가 아들의 공부를 계속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淳永은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져서 몸을 전혀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昌巖의 공부는 다시 중단되고 말았다.
워낙 가난한 살림이었으므로 醫員과 藥을 대느라고 가산은 이내 탕진되었다. 淳永은 네댓 달 뒤에 반신불수로 다소 호전되었다. 입이 비뚤어져 발음이 분명하지 못하고 한쪽 팔과 다리는 여전히 쓰지 못했으나 반쪽이라도 쓸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돈이 없어서 고명한 醫員을 불러오지 못하자 마침내 淳永 내외는 비장한 결심을 했다. 無錢旅行으로 문전걸식을 하면서 고명한 의원을 찾아 치료를 받아 보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집과 솥까지 다 팔아 버리고 昌巖은 큰집에 맡기고 길을 떠났다.
昌巖은 사촌들과 같이 송아지 고삐를 끌고 산허리와 밭두렁에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사촌들은 농가에서 농삿일을 하고 자라면서 서당에 다닐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昌巖에게 공부를 시키려고 애쓴 淳永의 자식 생각은 특기할 만하다. 뒷날 金九는 『나는 시골에서 나고 자랐으나 農軍들의 「김매는 소리」 나 「목동 갈까보다 소리」 한 마디 불러 본 적이 없었고, 기껏 한다고 해야 詩나 風月을 읊은 것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있는데,24) 이는 그가 어릴 때에 농삿일을 전혀 하지 않고 자랐음을 말해 준다.
昌巖은 공부를 하지 못해 서러운 데다가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리워서 견딜 수 없었다. 마침내 그는 부모를 따라 나서서 信川으로, 安岳으로, 長連으로 같이 떠돌아 다녔다. 長連에 머물 때에 昌巖의 할아버지 大喪이 다가왔다. 淳永 내외는 昌巖을 長連 재종조의 누이되는 친척집에 떼어 두고 텃골로 돌아갔다. 그 친척집도 물론 농사를 지었다. 昌巖은 그 집 주인이 九月山에 나무를 하러 갈 때면 같이 가야 했다. 어린 昌巖이 나뭇짐을 지고 다니면 마치 나뭇짐이 걸어가는 것 같았다고 한다.
나무하러 가는 일은 昌巖에게 무척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고통은 그 동네 큰 書堂에서 밤낮으로 책읽는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昌巖은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淳永 내외가 長連으로 다시 오자 昌巖은 텃골로 돌아가 공부를 하겠다고 졸랐다. 淳永의 병세는 호전되어 한쪽 팔과 다리도 조금 자유스러워지고 기력도 회복되어 갔다. 그리하여 淳永은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 하는 아들의 열성에 못 이겨 다시 텃골로 돌아오게 되었다.
아들 공부 위해 길쌈품 파는 어머니
淳永의 식구들은 텃골로 돌아오기는 했으나 衣食住를 스스로 마련하기가 어려웠다. 친척들이 조금씩 추렴하여 겨우 살 곳을 장만해 주었다. 그리고 昌巖도 다시 서당에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서당공부는 여간 고생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책은 빌려서 읽었고, 먹과 붓값은 곽씨 부인이 김품과 길쌈품을 팔아서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이미 열다섯 살이 된 昌巖의 안목으로 볼 때에 만나는 훈장들이 모두 고루해서 마음에 차지 않았다. 그들은 대개 양반집 아이들은 가르치지도 못하고 상놈집 아이들을 상대로 천자문 정도를 가르치는 사람들이었다. 昌巖은 어느 훈장은 벼 열 섬짜리, 어느 훈장은 다섯 섬짜리 하고 수강료의 다소로 훈장들의 학력을 평가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훈장들의 마음 씀이나 일처리가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없어 보였다. 昌巖의 서당공부가 뜻대로 진척되지 않자 淳永은 아들에게 말했다.
『밥 빌어먹기는 장타령이 제일이라고, 너도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時行文(실용문서)에나 주력하려무나』
淳永다운 권고였다. 昌巖은 아버지의 권고에 따랐다. 그리하여 土地文券, 呈訴狀(정소장), 祭祝文, 婚書文, 書翰文 등을 틈틈이 연습하여 무식한 金씨 문중에서는 상당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문중 사람들은 昌巖이 앞으로 존위 하나는 할 자격이 있다고들 촉망했다. 昌巖은 자신의 한문실력이 겨우 몇 글자 엮어 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는 생각하고 있었으나 뜻은 존위 따위에 있지 않았다.
「通鑑」이나 「史略」을 읽으면서 『王侯將相(왕후장상)의 씨앗이 어찌 따로 있으리오!』라는 陳勝(진승)의 말이라든가, 칼을 뽑아 뱀을 베었다는 劉邦(유방)의 행동, 빨래하는 부인에게 밥을 얻어먹었다는 韓信(한신)의 사적 등을 읽을 때에는 昌巖은 자신도 모르게 두 어깨가 들썩거려졌다.25)
陳勝의 말이란 陳(진)나라 사람 陳勝이 吳廣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을 때에 무리를 선동하면서 했던 유명한 말로서,26) 고려시대에 崔忠獻의 노비로서 봉기한 萬積도 이 문구를 인용했을 정도로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권력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킬 때에 곧잘 인용되던 말이다.
昌巖은 어떻게 해서든지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이런 아들을 보고 淳永은 이름있는 훈장을 찾아가 배우게 하지 못하는 것이 괴로웠다. 그는 아들이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하려고 백방으로 마땅한 훈장을 찾아 보았다. 그런데 텃골에서 동북으로 십리되는 鶴鳴洞에 鄭文哉(정문재)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昌巖의 큰어머니와 재종 남매 간이었는데, 상민이면서도 지방에서 꽤 알려진 선비였다. 그 정씨 집에는 여기저기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어 詩와 賦를 짓고, 한쪽에는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淳永이 정씨에게 특별히 부탁하여 昌巖은 수강료 없이 免費學童으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昌巖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다. 매일 도시락 망태기를 메고 험한 고개와 깊은 계곡을 쏜살같이 넘나들어 서당에서 기숙하는 아이들이 일어나기도 전에 도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科文을 짓기 위한 공부의 초보인 大古風 十八句27)를 익혔고, 漢唐詩와 「大學」 「通鑑」을 배웠으며, 글씨 연습은 종이를 살 돈이 없어서 粉板(분판: 분을 기름에 개어서 널조각에 발라 결인 것)에다 했다. 뒷날 金九도 李承晩과 마찬가지로 글씨를 많이 썼는데, 떨리는 듯하면서도 기운찬 그의 독특한 필체는 義氣나 憂國의 내용과 함께 높이 評價된다.
昌巖의 서당 공부는 이처럼 궁색하고 불안정했다. 그러나 그러한 환경에 좌절하지 않고 계속된 어린 시절의 형설의 향학열은 金九로 하여금 일생을 통하여 교육에 특별한 열의를 갖게 하는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3) 13세에 나이 올려 科擧에 응시
承龍은 열세 살 되던 해에 과거에 응시했다.28) 이때에 承龍이라는 兒名을 버리고 承晩으로 이름을 고치고 雩南이라는 아호도 지었다. 과거는 열다섯 살부터 볼 자격이 있는 것이었으나, 高宗 24년(1887)의 과거는 王世子嬪의 冠禮(成人式)에 따른 慶科 庭試였으므로 王世子와 동갑인 열네 살까지 응시할 수 있게 했었는데, 承龍은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한 살을 올려서 응시한 것이었다. 敬善은 그만큼 아들이 立身出世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고, 또 아들의 실력을 어지간히 믿었던 것 같다. 承晩은 儒生의 衣冠을 갖추고 과거장인 景武臺로 갔다. 경무대는 景福宮의 북문인 神武門 밖의 후원에 해당하는 지대이다.
과거장에는 청운의 뜻을 품은 젊은 유생들뿐만 아니라 늙은 선비들까지 구름처럼 모여 들었다. 이때의 庭試에 응시한 사람이 무려 15만8578명이나 되었다는 사실29)은 왕조 말기의 정치적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과거가 얼마나 흠망의 대상이 되고 있었는지를 말해 준다.
徐廷柱는 이때의 과거장의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처음으로 치르는 과거의 인상이 李承晩에게 그만큼 뚜렷이 남아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일 것이다. 응시자들은 이삼십 명씩 그들이 나온 地方이나 書堂 또는 門閥의 이름을 적어 장대 끝에 매어단 사각형의 유지등 밑이나 유지 우산 밑에 모여 궁궐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이러한 한 무리를 「接」이라고 했는데, 接마다 응시자뿐만 아니라 책과 紙筆墨을 들고 따라온 하인들까지 섞여서 큰 혼잡을 이루었다. 또 구석구석에는 장국밥과 설렁탕 장수들이 차일을 치고 있었다.
원래 科擧場에는 응시자 이외의 사람의 접근을 엄금하고, 만일에 함부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붙잡아 水軍으로 삼았었다. 그러던 것이 壬辰倭亂 이후로 시험장의 단속이 소홀해지자 권세 있는 양반자제들은 서책을 든 사람이나 시험지를 베끼는 사람 등의 隨從人을 데리고 들어가기가 예사였다. 그리하여 朝鮮後期의 각종 과거장에서는 이들 수종인들 때문에 큰 혼잡을 이루어 밟혀 죽거나 다치는 등의 사고가 잇따랐다.
드디어 神武門이 열렸다.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몰려가 다시 勤政殿으로 통하는 안문 앞에 섰다. 포졸들은 눈을 번쩍거리며 감시를 하고 있었다.
『대궐 안에서 그렇게 높은 나막신을 신으면 되오?』 하고 한 포졸이 굽 높은 나막신을 신은 承晩을 보고 힐난하듯 말했다.
사람들이 勤政殿으로 가는 안문 앞에서 꽤 오랫동안 기다린 뒤에야 멀리서부터 『고개 숙여라!』하고 소리치는 大殿別監과 武藝別監을 앞세우고 임금의 玉轎가 나타났다. 그 뒤로 王世子의 가마가 따랐다.
임금과 王世子가 근정전에 올라 좌정하고 懸題板(현제판)에 제목을 건 다음에야 응시자들은 근정전 앞마당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거기에 들어가서도 儒生들은 별감의 호령으로 고개를 숙인 채 현제판의 글 제목을 재빨리 베껴야 했다. 유생들은 저마다 글제를 베껴 가지고 나와서는 정성을 다하여 답안지를 작성했다. 머리가 허연 시골 노인들이 진땀을 흘리고 있는 광경은 옆에서 보기에도 불쌍하여 못 견딜 지경이었다.
15만 8578명 응시에 5명 及第
불쌍하기는 承晩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낙방했다. 애당초 급제를 기대한 것이 무리였다. 이날의 庭試에서 급제한 사람은 南光熙 등 다섯 사람밖에 되지 않았다.30) 承晩이 과거를 볼 무렵에 와서는 과거제도는 타락할 대로 타락해 있었다. 과거장에 산더미처럼 쌓인 답안지는 제대로 채점도 되지 않았다. 15만8000여 명의 응시자들의 답안지를 그날로 채점해서 다섯 사람을 급제시켰다는 것은 과거제도가 얼마나 形骸化해 있었는지를 말해 준다. 급제자가 미리 정해져 있기도 하고 시험관들에게 바치는 금품에 따라 급제가 결정되기도 하는 그런 형편이었다.
이 무렵의 科擧制度의 가장 큰 폐단은 이른바 借述(차술)이었다. 借述이란 과거장에서 다른 사람의 製述을 비는 것을 말한다. 차술은 다른 사람을 위해 답안지를 제술해 주는 이른바 代述과 함께 원래는 가장 엄하게 금해서 이를 어기는 자는 杖 100에 徒(도: 징역) 3년의 형을 부과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朝鮮朝 後期에 이르러 단속이 허술해지자 권세 있는 양반집 자제들이 글 잘하는 사람 네댓명을 科擧場에 데리고 들어가 각각 제술하게 하여 잘 된 것을 골라 제출하기도 하고, 글 잘하는 사람이 과거장 밖에서 제술하여 과거장의 胥吏나 軍卒의 손을 빌어 응시자에게 전달하기도 하며, 심지어 응시자가 과거장을 빠져나와 집에 가서 제술해 오는 경우도 있게 되었다.31)
그런데 李承晩도 자신은 낙방하면서 몇몇 권세 있는 양반집 자제의 日次儒生 시험 때에 대신 제술을 해주어 그들이 진사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32) 자존심 강한 李承晩이 자기는 낙방하면서 다른 사람을 위해 代述을 해준 것이 사실이라면 거기에는 피하기 어려운 어떤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법을 거리낌없이 자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 무렵의 과거장에서는 그만큼 차술과 대술이 예삿일이 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런데 뒤에서 보듯이 金九도 과거장에서 차술을 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成三文 같은 忠臣 되는 것이 소원
과거제도가 이처럼 타락하여 실력만으로는 급제의 희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承晩은 과거시험이 있을 때마다 응시했다고 한다. 아마도 敬善 내외의 간절한 기대와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承晩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응시하게 했을 것이다. 1948년 5월에 制憲國會 議長이 된 李承晩이 상도동의 至德祠를 찾아가는 길에 노량진의 死六臣墓 앞을 지날 때에 동행한 李維善에게 『나는 과거보러 다닐 적에 급제하면 成三文 같은 충신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지』하고 술회했고, 1955년에는 死六臣의 墓碑를 세우게 했는데,33) 李承晩이 서당시절에 지조의 선비 成三文을 숭앙했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朝鮮朝의 과거는 式年試와 각종 別試로 구분되어 있었다. 式年이란 子, 卯, 午, 酉年을 말하는 것으로서 3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게 되어 있는데, 식년시에서는 33명씩 급제시켰다. 각종 別試는 거의 해마다 시행되었다.34) 承晩이 처음 응시한 1887년부터 과거제도가 폐지되는 1894년까지는 25회에 이르는 각종 과거시험이 시행되었다. 이 가운데에서 2차 시험에 해당하는 殿試나 권력층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謁聖試(알성시)와 日次儒生 應製試(응제시) 등을 제외하고 李承晩이 응시할 수 있었던 과거는 11회쯤 시행되었다.35)
과거의 일정은 길게 마련이었다. 밤까지 계속되어 엿장수와 장국밥 장수들이 한몫 톡톡히 보고 끝날 무렵이면 흔히 四大門이 굳게 잠긴 뒤였다. 그렇게 되면 사대문 밖에 사는 응시자들은 모두 성벽을 넘어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과거장에서 주는 표를 보이면 성벽을 넘는 것이 허용되기는 했으나 캄캄한 밤에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景福宮 뒤에서부터 南大門까지 걸어와서 다시 성벽을 타고 넘어 桃洞골까지 돌아가기란 낙방한 承晩으로서는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4) 밥 해먹을 좁쌀 지고 科擧보러 海洲로
金九는 열일곱 살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과거를 보았다. 鄭文哉에게서 글을 익힌 지 2년째 되는 때였다. 그리고 그것은 李承晩이 科擧를 처음 본 것보다 5년 뒤의 일이다. 壬辰年(1892년) 慶科를 해주에서 실시한다는 공포가 있자 鄭文哉는 그 사실을 淳永에게 알려 주면서 말했다.
『이번 科擧에 昌巖이를 데리고 갔으면 좋겠는데, 글씨를 분판에 쓰는 것같이만 쓰면 제 답안지는 쓸 만하지만 종이에 연습하지 않으면 처음이라서 잘 못 쓸 것이네. 狀紙에 좀 쓰게 해 보았으면 좋겠는데, 老兄은 빈한한 터라 장지를 마련할 도리가 없겠지?』
장지란 두꺼운 한지의 일종으로서 과거 답안지로 쓰이던 종이를 말한다. 과거 답안지는 과거장에서 한 번 쓴 글자를 긁어내면서 수정할 수 있도록 특별히 두껍고 질이 좋은 종이를 썼다. 그런데 이때에 昌巖이 科擧를 볼 수 있을 만큼 실력을 쌓았다고 鄭文哉가 판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淳永과의 다음과 같은 대화로도 알 수 있다.
『종이는 내가 주선해 보겠지만 글씨만 쓰면 되겠나?』하는 淳永의 말에 鄭文哉는 『글은 내가 지어 줌세』하고 대답하고 있다.36)
이처럼 金九의 科擧應試는 아예 借述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鄭文哉의 말에 淳永은 크게 기뻐하여 천신만고로 장지 다섯장을 샀다. 昌巖은 기쁘고 감사하여 筆師의 가르침대로 정성을 다해 흰 종이가 꺼먼 종이가 되도록 글씨 연습을 했다.
과거날이 다가왔다. 과거 비용을 마련할 수 없는 昌巖 부자는 좁쌀을 등에 지고 鄭文哉를 따라 해주로 갔다. 淳永이 이전부터 알고 있던 房(계방)집에 묵으면서 과거날을 맞았다. 과거장의 풍경은 앞에서 본 景武臺의 풍경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규모와 행색이 다를 뿐이었다. 宣化堂(선화당) 옆 觀風閣 주변 사방에는 새끼줄을 둘러치고, 응시자들로 하여금 열을 지어 과거장으로 들어가게 했다.
道袍를 입고 검은 베로 만든 儒巾(유건)을 쓴 선비들이 흰 베에 「山洞接」이니 「石潭接」이니 하는 접이름을 써서 장대 끝에 매달고 큰 종이양산을 들고 자기네 접자리를 먼저 잡으려고 힘이 센 사람을 앞세워 들어가느라고 크게 혼잡했다. 응시자 말고도 이런저런 일을 맡은 隨從人이 따라 들어가기는 지방의 과거장도 마찬가지였다.
昌巖은 과거장으로 들어서면서 늙은 儒生들이 이른바 乞科(걸과)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관풍각을 향하여 새끼줄 그물 밑으로 머리를 들이 밀고 『소생의 이름은 아무개이옵는데, 먼 시골에 살면서 과거 때마다 참여하여 금년에 칠십 몇 살이올시다. 이 다음은 다시 과거에 참여하지 못하겠습니다. 初試라도 한 번 합격하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하며 진정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큰 소리로 외치고, 또 어떤 사람은 목을 놓고 울었다. 昌巖은 그것이 비굴해 보이기도 하고 가엾게 여겨지기도 했다고 한다.
자기네 접이 있는 곳으로 와 보니까 선생과 접장들이 자리잡고 앉아 글짓는 사람은 짓기만 하고 글씨 쓰는 사람은 쓰기만 하고 있었다. 이렇듯 지방의 科擧場에서도 借述과 代述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는 하더라도 昌巖이 처음부터 借述을 전제로 하고 과거에 응시하면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는 사실은 李承晩의 경우보다도 더 의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답안지에 아버지 이름 적어
昌巖은 선생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제가 아니라 제 아버님 명의로 답안지를 작성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기회가 많지 않겠습니까!』
昌巖은 자기보다도 아버지가 급제하여 양반이 되는 것이 더 소망스러운 일로 생각했던 것이다. 鄭선생은 昌巖의 말에 감동하여 昌巖의 요청을 쾌히 받아들였다. 昌巖의 이러한 효성은 옆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도 갸륵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이들의 대화를 들은 어떤 접장이 『가상한 일이다. 네가 글씨가 나만 못 할 터이니 네 아버지 답안지는 내가 써 주마. 너는 공부를 더해서 후일 네 과거는 네가 짓고 쓰도록 해라』하며 써주었다.
이처럼 법에 저촉되는 일인데도 그것이 孝道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美德으로 간주될 수 있었던 것은 朝鮮時代의 비뚤어진 家族主義의 한 단면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昌巖은 鄭선생이 짓고 접장이 써준 淳永 명의의 답안지를 새끼줄 그물 사이로 試官 앞을 향해 쏘아 들여보냈다.
그리고 나서 昌巖은 과거장의 광경을 보면서 과거에 관한 이런 말 저런 말을 얻어들었다. 通引(수령의 잡심부름을 하는 사람) 놈들이 試官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과거 답안지를 한 아름 훔쳐갔다고도 했다. 또 과거장에서 글을 짓고 쓸 때에는 남에게 보이지 말아야 하는데, 그 이유는 글을 지을 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글을 보고 가서 자기의 글로 제출하기 때문이라는 말도 들었다. 돈만 있으면 과거도 벼슬도 할 수 있다는 괴이한 말도 들었다. 글을 모르는 부자들이 巨儒의 글을 몇 백량 몇 천량씩 주고 사서 及第도 하고 進士도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昌巖은 과거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위의 몇 가지 이야기만 들어보아도 과거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하고 여겨졌다는 것이다.
과거의 결과는 물론 낙방이었다. 이때의 심정을 金九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심혈을 다하여 장래를 개척하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인데, 선비의 유일한 진로인 과거의 꼬락서니가 이 모양인즉, 나라일이 이 지경이면 내가 詩를 짓고 賦를 지어 科文六體에 능통한다 하여도 아무 선생 아무 접장 모양으로 科擧場의 대서업자에 불과할 것이니 나도 이제 다른 길을 연구하리라 결심하였다>37)
과거에 급제하는 것만이 兩班이 되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에 昌巖은 열심히 서당 공부를 했었다. 그러나 昌巖이 해주 과거장에서 깨달은 것은 그가 지금까지 그토록 열성을 다하여 추구해온 身分上昇의 꿈은 부패한 科擧制度를 통해서는 이룰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좌절감을 느꼈을 것이다.
(5) 열여섯 살에 동네의 동갑나기와 결혼
承晩은 열여섯 살 때에 같은 동네에 사는 동갑의 陰城 朴氏와 혼인했다. 朴씨 부인과의 혼인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承晩에게 모든 것을 걸고 있는 敬善은 아들의 점을 쳐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에 나타난 점괘는 『봉사한테 장가들어야 출세한다』는 것이었다. 이 점괘 때문에 걱정하던 敬善의 눈에 띈 것이 외가에 의지하여 지내는 朴씨 처녀였다. 처녀는 아버지 朴白契와 어머니 李씨 사이의 장녀로 경기도 시흥군 五峰山 기슭의 고천마을에서 태어났는데 두 돌이 되기 전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런데 젊은 과부를 업어간다는 말에 겁이 난 어머니 李씨는 딸을 데리고 서울의 친정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 친정집이 바로 도동의 關王廟 곁에 있었던 것이다. 朴씨는 오른쪽 눈언저리에 푸르스름한 반점이 있었으므로, 그것으로 「봉사」라는 점괘를 때우려 했던 것이라고 한다.
이 혼담을 듣고 承晩이 매우 놀란 것은 당연했다. 처녀가 정말로 봉사인지 아닌지 궁금했던 그는 처녀 집 부근에 숨어서 확인하기로 했다. 그것을 눈치챈 처녀는 한동안 문 밖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골탕을 먹이자는 생각이었다. 承晩은 잠복을 계속했다. 사흘이 지나자 처녀는 「안됐다」는 생각과 함께 한편으로는 「볼 테면 보라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물동이를 이고 우물께로 나갔고, 밖을 지키던 承晩은 처녀가 봉사가 아님을 확인하고 돌아왔다고 한다.38)
朴씨 부인은 뒤에서 보듯이 활달하고 당찬 성품이었다. 그것은 현존하는 사진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이들 부부의 사이는 李承晩의 첫 번 渡美 때까지는 좋았던 것 같다. 朴씨 부인은 뒷날 『우리 내외는 결혼한 뒤에 한 번도 말다툼한 적이 없었다』고 양자 恩秀에게 말했다고 한다.39)
唐詩 낭송 때에는 동네 아낙네들도 몰려
承晩은 혼인한 뒤에도 계속 서당 공부에 열중했다. 承晩이 혼인하던 해에 훈장 李承卨이 돌아가고 뒤를 이어 마을의 늙은 선비 石樵(석초) 金生員이 훈장이 되었는데, 그는 특히 詩를 즐기고 술을 좋아했다. 그는 敬善과는 남달리 뜻이 맞아 거의 날마다 같이 앉아서 詩를 읊고 술잔을 기울였다. 이 훈장 밑에서 承晩은 申應雨, 申肯雨, 申興雨 삼형제와 주인 아들 丙胄 등과 더불어 해마다 夏至에서 7월까지는 오로지 詩만 공부하여 이 방면의 많은 것을 깨우쳤다. 뿐만 아니라 꽃필 무렵이나 녹음철에는 承晩은 훈장과 훈장의 친구들을 모시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며 자신의 회포를 詩로 읊기도 했는데, 다음과 같은 시구는 李承晩이 광복 후 귀국해서까지 기억했다.40)
〈萬樹桃花屋數隣
일만 남긔 복사꽃 서너 가호 이웃집
好酒登宴紅作友
술 즐겨 베푼 잔치
名亭隔樹綠爲隣
붉어진 얼굴 멋진 정자 푸른 녹음 이웃을 하리>
여름밤이면 갓 상투를 튼 홍안의 유생들은 서당 마당에 싱싱한 풀내 나는 모깃불을 피워 놓고 唐詩를 낭송했다. 그들은 마루에 걸터앉기도 하고 마당에 서기도 하여 좋아하는 당시를 목청을 돋우어 읊었다.
또 가령 한 사람이 모깃불 무더기를 끼고 돌면서 『娥媚山月歌(아미산월가)라』하고 나직이 詩 제목을 대면 모두가 그 뒤를 따라 돌면서 『아미산월이 半輪秋(반륜추)하니 影入平羌江水流(영입평강강수류)를…』하고 소리를 맞추어 읊어 넘겼다. 몇 사람이 한 줄을 외우면 나머지 몇 사람이 그 다음 줄을 차례로 받아 넘기기도 했다.
「娥媚山月歌」란 李白이 스물다섯 살에 고향인 蜀(촉)을 떠나면서 지은 유명한 七言絶句로서,41) 조선시대에 서당에서 가장 널리 암송되던 唐詩의 하나였다.
<娥媚山月半輪秋
아미산에 걸린 반쪽 가을 달
影入平羌江水流
평강강 강물에 그림자 비쳐 흐른다
夜發淸溪向三峽
청계를 떠나 밤에 삼협으로 가며
思君不見下州
그대를 생각하나 보지 못하고 유주를 내려간다>
이 짧은 詩에는 地名이 다섯 군데나 나오는데, 朝鮮朝의 儒生들은 이런 中國의 地名들을 바로 가까이 있는 것처럼 친근하게 느끼며 그들의 낭만을 불태웠었다.
여름밤의 唐詩 낭송은 젊은 儒生들의 낭만뿐만이 아니었다. 싱그러운 풀잎마다 달빛이 쏟아져 내리는 밤이면 마을 아낙네들까지 이 唐音 소리를 들으려고 서당 담 밖으로 모여들었다. 承晩은 그 중에서도 목소리가 가장 크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가 먼저 詩 제목을 이끌어 내거나 혼자서 읊어 넘길 때에는 서당 담에 붙어 있던 아낙네들은 서로 옆구리를 찌르며 소근거렸다는 것이다.42)
承晩은 열아홉 살 되던 1893년까지 계속해서 과거를 보았다. 그동안 「詩傳」, 「書傳」, 「周易」 등의 經書도 거의 완전하게 익혔다. 그리하여 이 무렵까지의 그의 儒學經典이나 詩文공부는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던 것같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가치판단이나 행동준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일로도 짐작할 수 있다.
6·25 전쟁이 나서 大田으로 피난했을 때의 일이다. 국회 의장단인 申翼熙, 張澤相, 曺奉岩 세 사람이 李承晩을 찾아가 국민이 고난을 당하고 특히 서울을 사수하겠다고 한 약속을 어겼으므로 대통령으로서 국민들에게 사과성명을 발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했다. 그러자 李承晩은 대뜸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거절했다.
『내가 唐 悳宗이란 말인가?』
당나라 悳宗이 자기의 잘못으로 백성을 戰亂 속에 이끌어 넣고 막대한 피해를 입히게 되자 이른바 罪己詔(죄기소)를 내려 스스로 사과했다는 古事를 두고 한 말이었다. 이때에 그것을 가장 강력히 진언한 사람은 曺奉岩이었는데, 李承晩은 상기된 얼굴로 양팔을 벌려 보이며 『과인이 덕이 없어……하고 말인가?』하면서 흥분했었다는 것이다.43)
이 에피소드는 李承晩의 中國 古典에 대한 지식의 정도만이 아니라 그의 君王意識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
(6) 아버지 권유따라 觀相 공부
과거에 낙방하고 큰 좌절감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 昌巖은 앞으로의 진로문제에 대해 아버지 淳永과 상의했다.
『제가 어떻게든지 공부를 해가지고 입신양명하여 姜가, 李가에게 당한 압제를 면할까 하였더니, 그 유일한 방법이라는 과거장의 폐해가 이와 같은즉, 제가 비록 巨儒가 되어 學力으로는 姜씨, 李씨를 제압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孔方(공방·「엽전」의 다른 이름)의 마력이 있는데 어찌하오리까. 또한 거유가 되도록 공부를 하려면 다소의 금전이라도 있어야 되겠는데, 집안이 이토록 가난하니 앞으로 서당 공부를 그만두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아들의 말에 淳永도 수긍했다. 공방의 마력이란 돈의 위력을 뜻하는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淳永은 아들에게 권했다.
『너 그러면 風水 공부나 觀相 공부를 해 보아라. 風水에 능해 명당에 조상을 모시면 자손이 福祿을 누리게 되고, 觀相을 잘 보면 선한 사람과 君子를 만날 것이다』
昌巖은 아버지의 이러한 말이 매우 이치에 맞는 말이라 생각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공부해 보겠습니다. 書籍을 얻어 주십시오』하고 아버지에게 부탁했다.44)
이렇듯 昌巖이 이때에도 아버지의 권고를 「매우 이치에 맞는 말」이라면서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은 그가 얼마나 아버지 淳永의 영향을 받고 성장했는가를 말해 주는 또 하나의 실례이다.
淳永은 아들에게 우선 「麻衣相書」 한 권을 빌려다 주었다고 한다. 金九가 「麻衣相書」라고 기억하는 책은 정확하게는 「麻衣相法」이었을 것인데, 그 책은 「達摩相法」과 함께 觀相學의 두 경전으로 꼽히는 책이다. 「達摩相法」은 佛敎系, 「麻衣相法」은 道家系의 관상학 경전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상학 책이 그 당시 해주 텃골과 같은 지방에서 그토록 쉽게 구할 수 있을 정도로 보급되어 있었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석 달 동안 들어앉아 自己觀相 관찰
관상공부를 했던 때의 일을 金九는 다음과 같이 매우 인상적으로 적고 있다.
<나는 독방에서 相書를 공부했다. 상서를 공부하는 방법은 먼저 거울을 마주하고 자신의 상을 보면서 부위와 名辭(개념을 뜻함)를 익힌 다음 다른 사람의 상에 이르는 것이 첩경이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의 상보다 내 상을 잘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두문불출하고 석 달 동안이나 내 상을 觀相學에 따라 관찰하였다. 그런데 어느 한 군데도 貴格이나 富格 같은 좋은 상은 없고, 얼굴과 온몸에 賤格과 貧格과 凶格밖에 없다. 앞서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相書를 공부했는데, 오히려 그보다 더한 비관에 빠지게 되었다. 짐승과 같이 살기 위해서나 살까, 세상에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그런데 「相書」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相好不如身好 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이 생겼다. 이제부터는 외적 修養은 어찌되든지 내적 수양에 힘써야만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 먹으니까, 종전에 공부를 잘하여 科擧를 하고 벼슬을 하여 賤한 身分에서 벗어나 보겠다던 생각은 순전히 虛榮이요 妄想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마음 좋지 못한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 있는가 自問해 보니 역시 막연하였다>45)
그래서 昌巖은 그만 相書를 덮어버렸다는 것이다. 세상의 많은 자서전 중에서 이토록 처절한 告白은 그다지 흔하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인격 형성기의 金九의 큰 苦惱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金九가 그토록 감명받았다고 인용한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하는 구절이 「麻衣相法」에 없다는 사실이다. 「麻衣相法」에는 비슷한 내용으로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人生의 富貴貧賤은 대개 相貌(상모)와 氣色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善行을 하면 吉祥(길상)이 이르고 惡行을 하면 災殃(재앙)이 이르는 것이니, 形貌(형모)의 좋고 나쁜 것을 살피기에 앞서 마음 바탕을 먼저 살핀 뒤에 상모로써 吉凶을 논해야 한다>46)
이런 구절을 昌巖이 「白凡逸志」에 있는 것과 같은 말로 기억하고 「마음좋은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은 깊이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일가 아이들 가르치며 兵書 외워
관상 공부를 포기한 昌巖은 다음으로 地家書(風水地理에 관한 책)를 읽었으나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당시에 風水地理에 관한 책은 중국 東晉의 郭璞(곽박)이 쓴 「葬書」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昌巖이 이때에 본 地家書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자신의 관상에 크게 실망하고 觀相 공부를 포기한 昌巖이 다시 아버지가 권유한 風水 공부를 해보려는 마음을 먹은 것도 그의 효성을 짐작하게 한다.
그는 이어 「孫武子」, 「吳起子」, 「三略」, 「六韜(육도)」 등의 兵書를 읽었다. 어떤 동기에서 이런 兵書들을 읽었고, 또 어떻게 구해서 읽었는지에 대해서는 「白凡逸志」에 언급이 없다. 그리고 金九는 이 무렵 자기 집에 「東國明賢錄」이라는 책이 있었다고 했는데,47) 이는 淳永이 웬만큼 책을 읽는 사람이었음을 말해 준다. 昌巖의 학식 수준으로 이들 병서의 내용을 독학으로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孫武子」나 「三略」을 외울 정도로 열심히 읽었던 것은 뒷날 인천 감옥을 탈출한 그가 방앗간에 숨어서 그것을 암송하고 있는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48)
병서 중에서 관심 있게 보았던 대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고 金九는 적고 있다.
<태산이 앞에서 무너져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泰山覆於前 心不妄動)
병사들과 더불어 고락을 함께 한다.(與士卒 同甘苦)
나아가고 물러섬을 호랑이와 같이 한다.(進退如虎)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 지지 않는다.(知彼知己 百戰不敗)>49)
이처럼 昌巖은 難解한 兵書를 1년 동안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일가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 스스로 실의에 빠져 있으면서도 일가 아이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던 것은 그의 열성과 함께 金씨 집성취락에서는 그만큼 昌巖이 촉망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昌巖이 내용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면서도 兵書를 탐독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가 관심 있게 보았던 대목이라고 인용한 위의 구절들이 병서의 정수라고는 할 수 없으며 인용도 부정확한 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병서들이 昌巖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짐작하게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병서를 탐독한 경험은 뒤에서 보듯이 그를 東學農民軍의 선봉장이 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과정에서 그가 외교활동에 더 주력하는 임시정부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武裝鬪爭이나 테러리즘의 정치적 효력에 큰 비중을 두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科擧 낙방이 指導者로 성장하는 계기 돼
李承晩은 일곱 살 때부터 열아홉 살 때까지 12년 동안, 그리고 金九는 열두 살 때부터 열일곱 살 때까지 5년 동안 科擧 준비를 위한 공부를 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人格形成期에 이들이 깨우친 中國 古典에 대한 지식은 비록 수준은 달랐으나 두 사람 다 一生을 두고 큰 정신적 자산이 되었다. 그리고 과거제도가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상황에서 李承晩과 金九가 科擧에 급제하기를 기대했던 것 자체가 사실은 무모한 일이었다.
과거에 실패한 두 사람은 큰 좌절감에 빠졌다. 그러나 그 좌절감은 부패한 王朝社會에 대한 혐오와 抵抗意識으로 변하여 두 사람으로 하여금 사회변혁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게 했다. 그런 점에서 科擧에 낙방한 것이 오히려 두 사람이 새로운 시대의 指導者로 급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失意에 빠져 있던 李承晩과 金九가 한 사람은 東學에 入道하여 東學農民戰爭의 선봉장이 되고 또 한 사람은 新學問을 익혀 獨立協會의 改革運動에서 급진 과격파로 활약하는 과정을 뒤이어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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