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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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信연구소 오늘, 22.08.15(월) >
-8.15광복절에 오구라 기조 교수의 '조선사상사' 연구를 돌아보다-
어제 한국기독교협의회 한반도평화포럼 예배를 마치고 오늘은 다음주에 있는 한국양명학자 대회를 위한 글을 마무리하고자 앉아있는데, 77주년 8.15 광복절을 그냥 지나가기가 죄송해서 지난 6월에 있었던 한국헤겔학회에서의  오구라 기조 교수 책서평(이종철교수)에 대한 저의 토론문이 있어 여기 가져옵니다. 한반도 포럼에서 만난 일본 거류민 교회 조영철 목사님과 박현숙 교수님과의 사진과 함께.
한국 헤겔학회 6월 월례 발표회, 22.06.18(토). 줌회의 
<이종철 교수님의 “오구라 기조 교수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와 『조선사상사』 논평”을 읽고>
 1. 
   먼저 이런 기회를 통해서 이종철 교수님은 물론 헤겔학회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고 감사합니다. 헤겔학회야말로 일찍부터 ‘재세이화(在世理化)’, 리理(이성/정신)를 통해서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자리매김하고, 규정짓고자 한 분에 대한 학회이니, 오늘 오구라 기조 교수가 그의 책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나 『조선사상사』를 가지고, 한국을 철저히 유교적 도덕 지향의 국가로 보면서 그 도덕 지향의 유교적 리理로 한국의 모든 것을 밝혀보려는 시도의 책을 다루는 것은 짐짓 마땅해 보입니다. 
 2. 
   그런데 사실 제가 맡은 역할의 일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것을 우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먼저 저는 지금까지 동아시아 유교 문명과 기독교 문명의 대화를 학문적 주제로 삼아오면서 거기서 특히 유교 문명을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듯이 좁은 민족국가적 개념에서 중국 한족(漢族)의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외래로부터 받아온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보다는 훨씬 더 과거 고대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는 더 근원적인 그룹에 의해서 기원을 새롭게 볼 수 있고, 그 전개와 확장에서도 단지 중국인에 의해서 정리된 것 이상으로 고대 한국인을 비롯한 동북아 민중들의 토착적 삶과 깊이 연결되어 전개된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구라 교수도 이종철 교수님도 이러게 모두 제가 동의하지 않으면서 새롭게 보고자 하는 지금까지의 이해를 기본으로 하고서 논의를 펼치기 때문에 저의 입장은 시작부터 다를 수밖에 없고, 그러나 저의 다름에 대한 논증은 오늘 짧은 논평이나 한 두 시간의 이야기로 언술 되기 어려우므로 일종의 벽 앞에 서있는 느낌입니다.
3. 
   따라서 저의 논평은 어떤 잘 정리된 구조의 것이라기보다는 이종철 교수님이 쓰신 논평문의 페이지를 따라가면서 생각나는 질문, 논의, 비판점 등을 단편적으로 제기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먼저 첫 페이지에서 이 교수님은 오구라 교수가 한국을 유교적 ‘도덕 지향성’의 나라라고 보고 도덕을 명분으로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형세라고 한 것에 동의하시면서 “나는 한일 간의 징용공을 둘러싼 논쟁을 ‘근본주의 도덕과 극우 종족주의’의 싸움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라고 하셨는데, 그 내용을 우선 좀 더 알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이 문장에서 받은 첫인상이 한일관계에 대해서 굉장히 ‘우익적인’ 견해를 밝히신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구라 교수의 두 책이 물론 이 교수님이 지적하신 대로 한국 사람보다도 더 지대한 관심과 공부로 한국이라는 나라를 꿰뚫고, 한국사상사 전체를 통사적으로 살펴본 것이라는 점에서 감사와 감탄을 불러온다는 것에 일면 동의합니다. 그는 한국에서는 체육선수도 도덕적이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고, 한국에서 경멸의 대상으로 사용하는 ‘놈’이 의미란 “자신보다도 도덕적으로 열등한 인간을 가리킨다”라고 하면서 일본인들과는 다른 한국인들의 도덕지향적 성격을 참으로 적나라하게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아직도 이 두 책을 읽으면 제일 거슬리는 것은, 그가 스스로 도덕 지향적이지 않다고 한 일본인이어서 그런지, 그럼에도 20세기의 한일병탄에 대해서까지 어떤 ‘불의’에 대한 감각도 없이, ‘사죄’의 마음도 없이 그냥 두 나라 사이의 일반적 관계의 일로 보는 것 같은 의혹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혹이 들 때는 이러한 모든 그의 작업이 저에게는 또 하나의 왜곡과 침략으로 보이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가 이완용 등의 친일파도 “그 나름의 ‘리’가 있었다”라고 하면서 그것을 이해하면 “식민지 시대에 대한 시각도 변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언급한 것(『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195쪽), 한국의 ‘민족주의’ 리를 지적하면서 그것에 대한 비판과 함께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하는 듯한 입장을 내보이고,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도 “한국의 병합에 반대했던 이토를 암살한 것은 높이 평가할 수 없지만”이라고 평하면서 이 시기에 왜 “강력한 친일 단체가 생겨났고, ... 한일합병을 주장했는가 ... 감정론이 아니라 냉정한 학문적 분석이 필요” 하다고 한 언술(『조선사상사』, 226-227쪽) 등을 말합니다. 한국인으로서 이 교수님의 생각이 어떠신지 묻게 됩니다. 
   이 교수님은 두 번째 페이지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천주교 박해, 대원군의 쇄국 정치, 오늘 북한의 주체사상 등을 모두 오구라 교수의 의견에 동조하는 입장에서 “봉건적인 성리학적 이념의 다른 모습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라고 하셨는데, 뒤에서 스스로 “필자와 같은 문외한도”라는 말을 쓰실 정도로 한국사나 사상사, 유교사에 대해서 그렇게 탐구를 안 하셨다면, 어떤 근거로 그와 같은 일면적인 판단을 하시는지, 혹시 그것이야말로 오구라 교수도 많은 부분, 그리고 그 이전에 특히 일제강점 치하에서 식민주의 사가들에 의한 한국사 왜곡과 가치절하 기도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4. 
   이 교수님은 두 책에 대한 논평에서 제가 이전에 오구라 교수가 한국을 하나의 리 철학의 나라, 그것도 리를 ‘상승’과 성취에의 열망으로만 본 것에 대해 비판한 것을 일면 적실한 것으로 보셨습니다. 당시 저는 그와 같은 비판을 하면서 오구라 교수가 지적하는 대로, 한국인들이 진정 강한 ‘도덕(理)’ 지향성의 사람이라면, 거기에는 단지 ‘상승’의 방향만이 아니라 ‘자기희생’, ‘비움’, ‘겸비’나 ‘인내’, ‘고통’ 등의 ‘하강’ 이야기가 있는데, 그가 그것은 돌아보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오구라 교수는 한국에서의 도덕 지향은 그것이 “도덕의 최고형태는, 도덕이 권력 및 부와 삼위일체가 된 상태라고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21쪽). 그러나 저는 그와 같은 오구라 교수의 규정이 진정 한국적 리 추구의 진면목, 즉 리와 기를 어떻게든 함께 하나로 이루어내고, 그래서 그것이 더 높은 리가 되도록 하는 의미의 ‘리기묘합(理氣妙合)’의 특성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그 리의 추구는 하강, 자기 비움, 겸비나 인내의 그것이 되어야 함을 보지 못한 것이고, 그것은 그가 한국인들의 리 추구가 단지 ‘도덕’이나 ‘철학’만이 아니라 ‘종교’이고 ‘영성’이며, ‘뜻’의 추구인 것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이은선, 『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한나 아렌트와의 대화 속에서, 2018』, 「책을 내며」). 저는 그런 의미의 리 추구야말로 한국 사고의 진정한 고유성이라고 보면서, 그것을 또 다른 언어로 한국 유교의 ‘종교성(religiosity)’ 내지는 ‘영성(spirituality)’이라고 명했습니다. 오구라 교수가 보지 못한 것은 리 지향의 내용이나 방향성이고, 그것은 리 지향을 단지 하나의 ‘활동이나 운동(movement)’으로만 보는 것이지, 그것이 선하고, 좋고, 아름다운 내용을 가진 ‘행위(action)’라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최근에는 다시 생각했습니다. 아렌트가 그녀의 『전체주의의 기원』을 쓸 때 독일 나치의 끊임없이 움직이는 ‘운동(movement)의 법’을 비판한 것이 생각났고, 오구라 교수도 한국인의 삶을 바로 그런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게 절하시키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5. 
   이 교수님은 그다음 책 『조선사상사』의 논평에서 오구라 교수가 “순수성, 하이브리드성, 정보, 생명, 영성”의 다섯 가지 키워드로 조선사상사를 통찰하는 것에 주목하고, 특히 거기서 저자가 ‘영성’이라는 관점을 가져온 것에 여러 생각을 밝힙니다. 이 교수님도 지적했듯이 사실 순수성과 하이브리드성의 서로 상반되는 것을 동시에 가져와서 그것을 조선사상사의 특징으로 본 것은 “일종의 억지이거나 무리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오구라 교수가 그 전 단계에서는 미처 파악하지 못한 한국 사상의 리기지묘적 특성을 나름으로 다시 파악한 것의 표현일 수 있다고 여깁니다. 앞 책에서의 리 일원적 사고를 리기불이적(不二的) 사고로 수정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일본과의 비교에서 한국 사상을 외부로부터 도래한 것이 기존의 것을 전면적으로 개변하고 부정하는 순수성의 추구 차원에 더 집중하여 보는 것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축소지향적 일본이라는 말도 있지만, 오늘 지구상의 나라 중에서 한국만큼 지구라는 생명체에서 인류가 가꾼 제 종교들이 다양하게 현시적으로 역동하고 살아 역할 하는 곳이 없는 것을 보면, 한국인의 사상은 항상 다시 근원의 순수를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높은 하이브리드성을 지닌, 즉 지극히 이기묘합적이고, 그 리기묘합의 종교성과 영성이 궁극적으로 ‘생명’을 위한 것으로 표현되는 곳이 아닌가 저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전세계를 휘감고 있는 K-문화 한류의 바람이 그 한 증거라고 여기고, 여기서 저는 한국 사상의 종교성과 여성적 통합성, 실천성을 주장합니다(이은선, “한류와 유교 전통 그리고 한국 여성의 살림영성”,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 2016』, 55-84쪽).  
6. 
   다시 반복하면 저는 오구라 교수가 리의 추구를 단지 ‘철학’이나 ‘도덕’, ‘상승’이나 성취의 차원에서만 보는 것을 넘어서 한국 사상의 흐름 속에 내재하는 ‘종교성’과 ‘영성’, ‘뜻’의 차원을 보고자 합니다. 그것을 유교 성리학적 언어로는 ‘리기묘합’의 추구로 표현할 수 있지만 여러 다양한 이름으로 언술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 전통의 언어로 仙, 道, 易이나 空, 또는 이제 우리에게 또 하나의 종교 전통이 된 기독교의 인격적 하나님이나 그리스도 신앙 등으로 표현되면서 어떻게든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그것을 넘어서는, 또는 변화시키는 이상의 초월과 뜻이 있으며, 그러한 궁극 내지는 근원의 심연과 현상의 불이성(不二性)을 놓지 않으려는 추구로 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탈형이상학의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이 세상의 심연성과 궁극성, 초월성(life, 理)을 다원성(plurality, 氣) 속에서 마련하고자 하는 고투에서 “聖(거룩)의 평범성의 확대”라는 말로도 표현했고, “차이의 어두운 심연(the dark background of difference)”이라는 말도 좋아합니다. 이렇게 성(聖, the sacred)과 속(俗, the profane)을 어떻게든 함께 연결하려는 추구가 한국사의 전개 속에서 비록 겉모습의 종교 형태는 다르지만, 특히 한국 여성들의 종교적 삶과 영적 추구에서 지속적으로 표현되어왔다고 보았습니다(이은선,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한국 유교의 종교적 성찰과 여성주의, 2009』). 
   이 교수님도 지적하신 샤머니즘(무교)을 포함해서 불교, 유교, 동학, 기독교, 오늘날의 탈종교적인 페미니즘의 추구도 그러한 시각에서 탐색하고 있는 저로서는 그래서 이 교수님이 “일본 학자가 이런 책을 쓰는 동안에 한국의 학자들은 무엇을 했느냐는 자괴심마저 들기도 한다” 등의 언어에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저뿐 아니라 한국 사상의 고유성을 여러 각도에서 연구하시는 분들이 교수님이 지적하시는 “학자적 양심이나 부끄러움”, “학문적 무관심과 불통” 등의 질책을 들으면 과연 그렇게 말하는 분이 우리들의 연구를 인지했고, 살펴보았나 되묻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구라 교수의 이 책들은 원래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 아니라 한국에 대해서 너무도 얕은 지식과 여전히 혐오적인 생각하는 일본 대중들을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역수입되어 번역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한국학자들이 보기에 일천한 측면이 많이 있고,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이 책의 저자조차도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마음을 잘 모르고, 여전히 오늘 남한과 북한이 분단으로 동시에 겪고 있는 이 고통이 그들로 인한 것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로서는 오구라 교수의 단어 선택이나 틈틈이 드러나는 뉘앙스조차도 거슬리는 것이 많습니다. 
7.
   하지만 그런데도 이렇게 오늘 탈종교와 탈 형이상학의 시대에 다시 ‘도덕’을 말하고, ‘철학’을 말하며, ‘영성’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고맙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일본인에 의한 것이라면 앞에서 지적한 여러 한계와 왜곡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저도 감사하고 감탄합니다.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오구라 교수가 저의 앞선 시기부터의 한국 여성종교사 탐구와 한국사상사 관점도 알아주었으면 좋았겠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외면했거나 ‘영성’ 개념과 관련해서 저작권 운운할 정도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는 일본의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가 ‘일본적 영성’을 말했다고 하면서 거기서 ‘조선적 영성’이라는 표현을 얻었다고 합니다(『조선사상사』, 20쪽). 아무튼, 이런 교수님의 비판과 지적, 오구라 기조 교수의 두 책을 계기로 저와 같은 학자가 더욱 분발해서 한국사상사의 맥을 살피는 작업을 더 정교히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면 그 또한 좋은 성과와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이종철 교수님의 노고와 열정, 애정 어린 비판을 잘 경청하여 새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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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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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선생이 서구 기독교, 조선 유교, 다산, 한국의 근대 구분, 국학 등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이와 유사하게 서구 기독교와  동아시아, 조선 유교, 동학, 페미니즘 등을 해석해 오고 있다. <이은선,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09>
변선환 아키브 편,<3.1정신과 '以後'기독교,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2019>
도올 김용옥 “서구의 신은 황제적…동학은 ‘우리가 하느님’이라 말해”
n.news.naver.com
도올 김용옥 “서구의 신은 황제적…동학은 ‘우리가 하느님’이라 말해”
도올 김용옥(73) 전 고려대 철학과 교수가 사고를 쳤다. 30대에 그 좋다는 정규직 교수직을 때려치우고 학교 밖에 나선 이래 강경 발언으로 사고를 친 게 한두번이 아니지만, 이번에 친 사고는 다르다. 지구 문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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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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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信연구소 오늘, 22.09.27(화)>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읽기18-
점점 마무리를 향해 갑니다. 이번에 동학 최제우선생에 대한 성찰입니다. 요사이 한국사회에서 동학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데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지만 유교와 기독교 대화가로서 평소 저의 이해를 집약하고자 했습니다. 19세기 말로부터 나라상황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단지 철학이나 학문 차원이 아닌 신앙과 믿음의 차원으로 심화되어가는 유교 종교화 과정을 몇차례 살펴보고자 합니다.
#현장아카데미 #사유하는집사람회#보인회#해천우회
19세기 조선 토양에서 ‘다시개벽’으로 탄생한 동학(東學), 한국적 ‘지구종교’ - 주간기독교
cnews.or.kr
19세기 조선 토양에서 ‘다시개벽’으로 탄생한 동학(東學), 한국적 ‘지구종교’ - 주간기독교
지난 16편에서 본 것처럼 성호 우파 신후담의 서학 비판서 『돈와서학변』는 세계가 서학 기독교가 주장하는 것처럼 무에서 “제작(창조)”된 것이 아니라 氣를 통해서 현시되는 理에 의한 “개벽開闢”이라고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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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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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信연구소 오늘, 24.02.20 화>
-조선유교의 이해 : 한국적 근대와 개벽-
어제 가톨릭 여성장상연합회에서 주관하는 <여성과 수행자>모임에 가는 기차 속에서 읽다가 공유를 놓친 글입니다. 평소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 에서 19세기 후반부터의 한국 개벽사상을 '토착적 근대'라고 푸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오히려 15세기 조선 신유교의 등장을 '한국적 근대'의 시작으로 보아야한다는 저의 관점과 많이 맞닿을 수 있어서 매우 반가웠습니다. 
조선 유교를 동학이나 19세기 말의 개벽사상들이 그 운이 다했다고 단지 거부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동학 등의 좁은 의미의 개벽사상 등도 배태했고, 오늘날 세계시민사회의 등장에서 볼 때 더 크게 전인류를 통섭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씨앗으로 보고자 합니다. <동학과 서학>이라는 큰 틀에서 최제우 선생 탄신 2백주년을 기해서 나올 공동저술 속에 조선유교사, 개벽사상, 탈근대의 문제를 통괄해서 살펴보고싶습니다.
유학사상사는 근대사상사와 어떻게 만나는가 / 노관범
webzineriks.or.kr
유학사상사는 근대사상사와 어떻게 만나는가 / 노관범
나의 근대 유학 공부. 필자는 대학 2학년 1학기 전필 한국사강독2 수업 시간에 조선시대 사상사 자료집을 읽었다. 기말 과제로 장지연의 『조선유교연원』 「총론」을 쓰고 여기에 나오는 유학자를 조사했다. 조선시대 유학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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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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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信연구소 오늘>
-다석 유영모의 귀일신학과 해학 이기의 유교적 진교-
전북과 전남의 경계 도시 전북 고창에 와 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김미령 선생의 남편 윤정현 성공회 신부님의 고향 고창에서 유교와 그리스도교 대화의 일환으로 다석 유영모와 대종교, 그 대종교를 넘어서 온 세계를 위한 참된 '진교'(眞敎)를 말한 해학 이기의 사상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See more
Jeong-Hyun Youn is with 이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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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다석 일지(2020년 10월 7일, 수요일, 흐림 / 23920일째)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다석의 늙은이 풀이 2차년도 인문학 교실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늙은이 풀이 1장에서 77장까지 마쳤으니 이제 남은 4장과 두번의 특강을 마치면 도덕경 81장을 다 보게 된다. 
10월 8일(목)에는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를 주제로 이은선 교수께서 특강을 한다.  이 교수는 태어나면서 기독교인이면서 양명학을 전공하였다. 세종대 교수직을 은퇴하고 지금은 신信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일시: 2020년 10월 8일(목) 19:00 - 21:00
장소: 고창군립도서관 문화강의실
* 사회적 거리두기로 30명만 강의실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참석을 원하는 사람은 063) 560-2420로 문의하기 바랍니다(수강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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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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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信연구소 오늘, 24.03.23 금>
- 信學하기이야기 3-
어제는 말씀드린 대로 4대 종단 2024 종교인 DMZ생명평화 걷기 대회 해단식에 함께 하느라고 강원도 북쪽 고성의 통일전망대에 다녀왔습니다. 횡성에서 거의 차로 3시간 거리였는데 남편이 운전했고, 도중에 간성전통시장 부근의 한 식당에서 장칼국수를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부랴부랴 통일전망대 길로 들어서 방문자 등록을 해야해 그곳으로 가니 이번 걷기의 총인도자셨던 성공회 김현호 신부님을 입구부터 만나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입구 모인 곳의 대원들 중에 옷차림으로 스님들 모습이 가장 눈에 띄였고, 예전 NCCK 화해와통일위원회 위원으로 평화협정캠페인 다닐 때 함께 했던 여러 분들이 보였습니다. 한기양, 조헌정, 나핵집, 신승민, 송병구 목사님 등, 남기평, 김민지 두 목사님도 반갑게 만났습니다.
창밖으로 멀리 금강산 자락과 해금강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서 해단예식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불교, 원불교, 천주교의 4대 종단만이 아니라 대종교, 동학 등에서 오신 분들도 함께 해서  '믿음'(信)이라는 공통어 안에 미래의 통일과 평화라는 현실을 이곳으로 적극적으로, 온 힘을 다해 끌고 오시는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갑자기 조헌정 목사님이 이웃종교와 함께 일을 해온 저희 부부를 소개하셔서 매우 부끄러웠고 죄송했습니다. 이번 22일 동안 온 몸으로 동서 DMZ 국토를 걸어온 분들 앞에서...
아침에 다시 방제선 님이 페북에 올리신 천문학자 윤성철 교수의 글을 읽었는데, 스승 홍승수 교수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관련해  "나의 코스모스"라는 제목에서 행한 강의와 관련한 이야기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무엇에 대해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홍승수 교수는 천문학은 "사실에서 진실찾기"라는 말을 많이 하신다고 하는데, 사실 이 말은 한나 아렌트가 그녀의 뛰어난 논문 <Truth and Politics>에서 깊이 분석한 언술이기도 하고, 저희 선친 이신 목사님의 시집 <돌의 소리, 2012 동연>에도 나와 있지만, 그의 1960년대의 시 <사실 I, II>에 길게 그려져있습니다.
저는 오늘 믿음의 일, 信學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더 멀리 가면 이미 공자께서 유사하게 '경사이신(敬事而信)'을 BC 5백여년 전에 말씀하셨으니 인류의 의식은 동서고금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에서 진실찾기', 그 찾기 위한 지난하고 성실한 노력이 있고, 거기에 오랜 고통의 사유가 있으며, 그런 가운데서 놀랍게도 기적처럼 진실과 통찰이 찾아오는 경험, 진실을 만나는 신비, 그런 과정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를 하는 믿음의 사람들, 신학(信學)의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왕곡마을 장석근 목사님을 방문하자고 해서, 40년 전 첫 목회지로 와서 지금까지 곧 은퇴를 앞둔 때까지 있으시다는 오봉교회에 들렀습니다. 마을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되어서 교회도 한옥으로 지어졌는데, 그곳에서 사모님의 수고로 아주 정갈하고 맛있는 저녁식사를 들 수 있었습니다. 두 분이 땅에 두 발을 온전히 딛고 40여년을 살아오시는 모습! 신뢰의 진실이 잘 영글어진 것이 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긴 운전과 좋은 곳으로의 인도 등, 어제 남편의 수고가 컸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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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친 방제선 24.03.23. 글 퍼옴
홍승수, 《나의 코스모스》
천문학은 인간을 해방시키는 인간학!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윤성철(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수)
1994년 어느 날, 서울대학교 문화관에서 열린 행사에서 홍승수 선생님은 외계 행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다. 과학자가 대중 앞에 나서는 모습이 낯설던 시절이다. 새롭게 탄생하는 별,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강착 원반, 강착 원반의 먼지들이 뭉치면서 지구형 행성이 되는 이야기. 그중에서도 결론부에서 스치듯이 언급된 내용 하나가 특별나게 기억난다. 천문학에서 행성과 생명의 기원을 탐구하는 일은 인류평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맙소사!
학생이었던 내게 과학은 그저 일련의 수식이었다. 학문의 동기를 문제 풀이에서 오는 성취감과 천문학이라는 분야가 주는 겉멋에서 찾았을 뿐이다. 인류 평화, 그런 건 천문학자가 고민할 주제가 아니었다. 선생님의 논리에 동의할 수는 있어도 가슴으로 공명하기는 어려웠다.
2016년 5월, 서울 충무로 벙커1에서 있었던 "나의 코스모스' 강연은 무려 20여 년 만에 다시 듣게 된 선생님의 대중 강연이다. 《코스 모스』 번역 이후 선생님은 대중 앞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지만, 나는 그동안 적지 않은 시간을 외국에서 보내느라 기회를 잡기 어려웠다.
20년은 긴 세월이다. 학생 시절에 공부했던 교과서를 들추어 보면 고대 신화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우주 배경 복사의 온도 요동, 암흑 에너지와 우주의 가속 팽창, 블랙홀 병합 순간에 방출된 중력파 등 학계를 뒤집어 놓은 노벨상급 연구 결과들은 당시에 존재 하지도 않았다. 천문학은 그만큼 숨 가쁘게 발전했다. 급격하게 발전하는 관측 기술 덕에 우주를 탐색하는 창은 기하급수적으로 넓어졌고 폭풍처럼 쏟아져 나오는 데이터에는 어떤 보물들이 더 숨겨져 있을지 슈퍼 컴퓨터와 인공지능을 동원해도 아직 다 가늠하기 어렵다.
학부생 시절에는 전무했던 외계 행성의 발견도 최근의 광범 위한 탐사에 힘입어 2016년 현재 3,000여 개로 늘어났다. 그중에서도 지구처럼 물이 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생명 거주 가능 영역 (habitable zone)'에 존재하는 행성은 300개에 달한다. 이 표본을 토대로 생명 거주 가능 영역에 있는 행성의 수를 추정하면 우리 은하만 따져 도 수백억 개에 이른다. 전 우주에 존재하는 은하가 약 2조 개이니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 행성의 수는 우리 우주에 100해(10의 22승) 개가 넘는다는 뜻이다. 생명의 탄생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하지만, 우주의 광대함은 그런 기적을 그저 평범한 필연으로 바꾸어 놓기에 충분하다. 21세기 천문학은 생명과 문명이 지구에서만 독특하게 발생한 기적적인 우연이 아니라 우주적인 필연일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한다.
과학자로서 칼 세이건의 위대함은, 이런 천문학적인 성취가 이루어지기 한참 전인 1970년대에 이미 외계 생명의 가능성을 매우 진지하게 과학적으로 접근했다는 데에 있다. 그는 21세기 천문학의 흐름을 수십 년 전에 미리 파악하고 준비한 개척자였다. 그의 역할은 천문학에 머물지 않는다. 『코스모스』 번역은 홍승수 선생님이 칼 세이건을 재평가하는 계기였다고 한다. 단순히 탁월한 과학자나 대중을 위한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는 천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인류의 미래까지 고민하던 지성인이었다.
"이 책이 일관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인류 문명의 바람직한 미래상'입니다. 칼 세이건은 그걸 1980년에 고민했던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고 계실지 모르겠는데 『코스모스』는 천문학 지식을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해 집필한 책이 아니었어요..……………. 결론적으로 『코스모스』는 지구 문명의 어둠에 비춰 줄 빛을 외계 문명에서 찾아보자고 설득하기 위해 쓴 책이었던 것입니다."
그 존재조차 불분명한 외계 문명에서 인류의 미래를 찾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물론 외계 문명과의 접촉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인류사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다. 하지만 가까운 장래에 그런 일을 기대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외계 문명을 과학적으로 진지하게 고찰하는 과정 그 자체는 역사에 커다란 정신적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신은 설사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신에 관한 탐구가 인류사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큰 영향을 끼쳐 왔듯이 말이다. 신학이 결국은 인간학이듯, 외계 문명을 찾는 노력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자 떠나는 여정이다. 홍승수 선생님이 최근 모든 강연에서 강조하시는 "사실에서 진실 찾기"라는 표현을 빌린다면, 『코스모스』는 결국 천문학적 사실에서 인류 문명이 지향할 가치라는 진실을 찾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다.
명쾌하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해설하는 선생님의 『나의 코스모스』에는 또 다른 감동적인 진실이 담겨 있다. 바로 홍승수 선생님 자신의 성장 이야기다. 한국은 일제의 강압과 남북 전쟁을 겪는 불행한 현대사를 거쳐 왔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대학에서 천문학 교육이 도입된 이유 역시 북한과의 경쟁을 정부에서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런 참담한 세상에서도 하늘에는 달이 떴고, 홍승수는 하늘을 향한 꿈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무엇 덕분인가 하면, 그 시절 그 도서관에 화성에 관한 이야기가 실린 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휴전 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3년, 선생님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 권의 천문학 교양서를 발견하고 꿈을 키웠다. 그 미약했던 한줄기 빛은 60여 년이 지난 오늘 큰 지성의 빛이 되어 2016년 여전히 일그러져 있는 한국 사회를 비추고 있다. 어른이 부재한 사회에서 치열한 삶과 끊임없는 배움을 통해 젊은 후학에게 모범이 되어 주신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독자들은 《나의 코스모스』에서 아팠던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용기를 얻으리라 믿는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은 경계를 뛰어넘는 지적 용기의 소유자입니다. 시대의 흐름을 똑바로 알고, 흐름에 앞서 달려가는 분들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행성 지구의 먼 미래가 비록 어둡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가까운 장래가 밝은 건 여기에 계신 지성인 여러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엊그제가 종강이었다. 『코스모스』를 주 교재로 삼은 교양 과목의 마지막 수업을 위해 초겨울 공기를 들이마시며 내딛는 발에는 아쉬움이 밟힌다. 아무래도 그 말은 좀 불필요했어. 상대성 이론 설명 할 때 든 예시는 오히려 학생들을 혼란스럽게 한 듯. 이렇게 한 학기를 복기하면서 강의실에 도착하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맞아 주던 학생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또 아쉽다.
이제 한 학기 강의를 마무리지어야 한다. "천문학의 발전은 여러 가지 편견과 억압에서 인간을 해방하는 데 일조해 왔습니다." 이 말을 듣고 학생들은 20여 년 전의 나처럼 속으로 '맙소사!'를 외쳤을까. 그래도 상관없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순진한 주장을 하는지 한번이라도 고민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162-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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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信연구소 오늘, 22.08.15(월) >
-8.15광복절에 오구라 기조 교수의 '조선사상사' 연구를 돌아보다-
어제 한국기독교협의회 한반도평화포럼 예배를 마치고 오늘은 다음주에 있는 한국양명학자 대회를 위한 글을 마무리하고자 앉아있는데, 77주년 8.15 광복절을 그냥 지나가기가 죄송해서 지난 6월에 있었던 한국헤겔학회에서의 오구라 기조 교수 책서평(이종철교수)에 대한 저의 토론문이 있어 여기 가져옵니다. 한반도 포럼에서 만난 일본 거류민 교회 조영철 목사님과 박현숙 교수님과의 사진과 함께.
한국 헤겔학회 6월 월례 발표회, 22.06.18(토). 줌회의
<이종철 교수님의 “오구라 기조 교수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와 『조선사상사』 논평”을 읽고>
1.
먼저 이런 기회를 통해서 이종철 교수님은 물론 헤겔학회 여러분을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고 감사합니다. 헤겔학회야말로 일찍부터 ‘재세이화(在世理化)’, 리理(이성/정신)를 통해서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자리매김하고, 규정짓고자 한 분에 대한 학회이니, 오늘 오구라 기조 교수가 그의 책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나 『조선사상사』를 가지고, 한국을 철저히 유교적 도덕 지향의 국가로 보면서 그 도덕 지향의 유교적 리理로 한국의 모든 것을 밝혀보려는 시도의 책을 다루는 것은 짐짓 마땅해 보입니다.
2.
그런데 사실 제가 맡은 역할의 일이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것을 우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먼저 저는 지금까지 동아시아 유교 문명과 기독교 문명의 대화를 학문적 주제로 삼아오면서 거기서 특히 유교 문명을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듯이 좁은 민족국가적 개념에서 중국 한족(漢族)의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외래로부터 받아온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보다는 훨씬 더 과거 고대 한국인이라고 할 수 있는 더 근원적인 그룹에 의해서 기원을 새롭게 볼 수 있고, 그 전개와 확장에서도 단지 중국인에 의해서 정리된 것 이상으로 고대 한국인을 비롯한 동북아 민중들의 토착적 삶과 깊이 연결되어 전개된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구라 교수도 이종철 교수님도 이러게 모두 제가 동의하지 않으면서 새롭게 보고자 하는 지금까지의 이해를 기본으로 하고서 논의를 펼치기 때문에 저의 입장은 시작부터 다를 수밖에 없고, 그러나 저의 다름에 대한 논증은 오늘 짧은 논평이나 한 두 시간의 이야기로 언술 되기 어려우므로 일종의 벽 앞에 서있는 느낌입니다.
3.
따라서 저의 논평은 어떤 잘 정리된 구조의 것이라기보다는 이종철 교수님이 쓰신 논평문의 페이지를 따라가면서 생각나는 질문, 논의, 비판점 등을 단편적으로 제기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먼저 첫 페이지에서 이 교수님은 오구라 교수가 한국을 유교적 ‘도덕 지향성’의 나라라고 보고 도덕을 명분으로 부와 권력을 추구하는 형세라고 한 것에 동의하시면서 “나는 한일 간의 징용공을 둘러싼 논쟁을 ‘근본주의 도덕과 극우 종족주의’의 싸움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라고 하셨는데, 그 내용을 우선 좀 더 알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이 문장에서 받은 첫인상이 한일관계에 대해서 굉장히 ‘우익적인’ 견해를 밝히신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구라 교수의 두 책이 물론 이 교수님이 지적하신 대로 한국 사람보다도 더 지대한 관심과 공부로 한국이라는 나라를 꿰뚫고, 한국사상사 전체를 통사적으로 살펴본 것이라는 점에서 감사와 감탄을 불러온다는 것에 일면 동의합니다. 그는 한국에서는 체육선수도 도덕적이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고, 한국에서 경멸의 대상으로 사용하는 ‘놈’이 의미란 “자신보다도 도덕적으로 열등한 인간을 가리킨다”라고 하면서 일본인들과는 다른 한국인들의 도덕지향적 성격을 참으로 적나라하게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 아직도 이 두 책을 읽으면 제일 거슬리는 것은, 그가 스스로 도덕 지향적이지 않다고 한 일본인이어서 그런지, 그럼에도 20세기의 한일병탄에 대해서까지 어떤 ‘불의’에 대한 감각도 없이, ‘사죄’의 마음도 없이 그냥 두 나라 사이의 일반적 관계의 일로 보는 것 같은 의혹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혹이 들 때는 이러한 모든 그의 작업이 저에게는 또 하나의 왜곡과 침략으로 보이까지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가 이완용 등의 친일파도 “그 나름의 ‘리’가 있었다”라고 하면서 그것을 이해하면 “식민지 시대에 대한 시각도 변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언급한 것(『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195쪽), 한국의 ‘민족주의’ 리를 지적하면서 그것에 대한 비판과 함께 ‘식민지 근대화론’을 지지하는 듯한 입장을 내보이고,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서도 “한국의 병합에 반대했던 이토를 암살한 것은 높이 평가할 수 없지만”이라고 평하면서 이 시기에 왜 “강력한 친일 단체가 생겨났고, ... 한일합병을 주장했는가 ... 감정론이 아니라 냉정한 학문적 분석이 필요” 하다고 한 언술(『조선사상사』, 226-227쪽) 등을 말합니다. 한국인으로서 이 교수님의 생각이 어떠신지 묻게 됩니다.
이 교수님은 두 번째 페이지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천주교 박해, 대원군의 쇄국 정치, 오늘 북한의 주체사상 등을 모두 오구라 교수의 의견에 동조하는 입장에서 “봉건적인 성리학적 이념의 다른 모습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라고 하셨는데, 뒤에서 스스로 “필자와 같은 문외한도”라는 말을 쓰실 정도로 한국사나 사상사, 유교사에 대해서 그렇게 탐구를 안 하셨다면, 어떤 근거로 그와 같은 일면적인 판단을 하시는지, 혹시 그것이야말로 오구라 교수도 많은 부분, 그리고 그 이전에 특히 일제강점 치하에서 식민주의 사가들에 의한 한국사 왜곡과 가치절하 기도가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4.
이 교수님은 두 책에 대한 논평에서 제가 이전에 오구라 교수가 한국을 하나의 리 철학의 나라, 그것도 리를 ‘상승’과 성취에의 열망으로만 본 것에 대해 비판한 것을 일면 적실한 것으로 보셨습니다. 당시 저는 그와 같은 비판을 하면서 오구라 교수가 지적하는 대로, 한국인들이 진정 강한 ‘도덕(理)’ 지향성의 사람이라면, 거기에는 단지 ‘상승’의 방향만이 아니라 ‘자기희생’, ‘비움’, ‘겸비’나 ‘인내’, ‘고통’ 등의 ‘하강’ 이야기가 있는데, 그가 그것은 돌아보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오구라 교수는 한국에서의 도덕 지향은 그것이 “도덕의 최고형태는, 도덕이 권력 및 부와 삼위일체가 된 상태라고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21쪽). 그러나 저는 그와 같은 오구라 교수의 규정이 진정 한국적 리 추구의 진면목, 즉 리와 기를 어떻게든 함께 하나로 이루어내고, 그래서 그것이 더 높은 리가 되도록 하는 의미의 ‘리기묘합(理氣妙合)’의 특성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그 리의 추구는 하강, 자기 비움, 겸비나 인내의 그것이 되어야 함을 보지 못한 것이고, 그것은 그가 한국인들의 리 추구가 단지 ‘도덕’이나 ‘철학’만이 아니라 ‘종교’이고 ‘영성’이며, ‘뜻’의 추구인 것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이은선, 『세월호와 한국 여성신학-한나 아렌트와의 대화 속에서, 2018』, 「책을 내며」). 저는 그런 의미의 리 추구야말로 한국 사고의 진정한 고유성이라고 보면서, 그것을 또 다른 언어로 한국 유교의 ‘종교성(religiosity)’ 내지는 ‘영성(spirituality)’이라고 명했습니다. 오구라 교수가 보지 못한 것은 리 지향의 내용이나 방향성이고, 그것은 리 지향을 단지 하나의 ‘활동이나 운동(movement)’으로만 보는 것이지, 그것이 선하고, 좋고, 아름다운 내용을 가진 ‘행위(action)’라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최근에는 다시 생각했습니다. 아렌트가 그녀의 『전체주의의 기원』을 쓸 때 독일 나치의 끊임없이 움직이는 ‘운동(movement)의 법’을 비판한 것이 생각났고, 오구라 교수도 한국인의 삶을 바로 그런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게 절하시키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5.
이 교수님은 그다음 책 『조선사상사』의 논평에서 오구라 교수가 “순수성, 하이브리드성, 정보, 생명, 영성”의 다섯 가지 키워드로 조선사상사를 통찰하는 것에 주목하고, 특히 거기서 저자가 ‘영성’이라는 관점을 가져온 것에 여러 생각을 밝힙니다. 이 교수님도 지적했듯이 사실 순수성과 하이브리드성의 서로 상반되는 것을 동시에 가져와서 그것을 조선사상사의 특징으로 본 것은 “일종의 억지이거나 무리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오구라 교수가 그 전 단계에서는 미처 파악하지 못한 한국 사상의 리기지묘적 특성을 나름으로 다시 파악한 것의 표현일 수 있다고 여깁니다. 앞 책에서의 리 일원적 사고를 리기불이적(不二的) 사고로 수정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일본과의 비교에서 한국 사상을 외부로부터 도래한 것이 기존의 것을 전면적으로 개변하고 부정하는 순수성의 추구 차원에 더 집중하여 보는 것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축소지향적 일본이라는 말도 있지만, 오늘 지구상의 나라 중에서 한국만큼 지구라는 생명체에서 인류가 가꾼 제 종교들이 다양하게 현시적으로 역동하고 살아 역할 하는 곳이 없는 것을 보면, 한국인의 사상은 항상 다시 근원의 순수를 추구하면서도 동시에 높은 하이브리드성을 지닌, 즉 지극히 이기묘합적이고, 그 리기묘합의 종교성과 영성이 궁극적으로 ‘생명’을 위한 것으로 표현되는 곳이 아닌가 저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전세계를 휘감고 있는 K-문화 한류의 바람이 그 한 증거라고 여기고, 여기서 저는 한국 사상의 종교성과 여성적 통합성, 실천성을 주장합니다(이은선, “한류와 유교 전통 그리고 한국 여성의 살림영성”, 『다른 유교 다른 기독교, 2016』, 55-84쪽).
6.
다시 반복하면 저는 오구라 교수가 리의 추구를 단지 ‘철학’이나 ‘도덕’, ‘상승’이나 성취의 차원에서만 보는 것을 넘어서 한국 사상의 흐름 속에 내재하는 ‘종교성’과 ‘영성’, ‘뜻’의 차원을 보고자 합니다. 그것을 유교 성리학적 언어로는 ‘리기묘합’의 추구로 표현할 수 있지만 여러 다양한 이름으로 언술할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 전통의 언어로 仙, 道, 易이나 空, 또는 이제 우리에게 또 하나의 종교 전통이 된 기독교의 인격적 하나님이나 그리스도 신앙 등으로 표현되면서 어떻게든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그것을 넘어서는, 또는 변화시키는 이상의 초월과 뜻이 있으며, 그러한 궁극 내지는 근원의 심연과 현상의 불이성(不二性)을 놓지 않으려는 추구로 봅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탈형이상학의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이 세상의 심연성과 궁극성, 초월성(life, 理)을 다원성(plurality, 氣) 속에서 마련하고자 하는 고투에서 “聖(거룩)의 평범성의 확대”라는 말로도 표현했고, “차이의 어두운 심연(the dark background of difference)”이라는 말도 좋아합니다. 이렇게 성(聖, the sacred)과 속(俗, the profane)을 어떻게든 함께 연결하려는 추구가 한국사의 전개 속에서 비록 겉모습의 종교 형태는 다르지만, 특히 한국 여성들의 종교적 삶과 영적 추구에서 지속적으로 표현되어왔다고 보았습니다(이은선,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한국 유교의 종교적 성찰과 여성주의, 2009』).
이 교수님도 지적하신 샤머니즘(무교)을 포함해서 불교, 유교, 동학, 기독교, 오늘날의 탈종교적인 페미니즘의 추구도 그러한 시각에서 탐색하고 있는 저로서는 그래서 이 교수님이 “일본 학자가 이런 책을 쓰는 동안에 한국의 학자들은 무엇을 했느냐는 자괴심마저 들기도 한다” 등의 언어에 불편한 점이 있습니다. 저뿐 아니라 한국 사상의 고유성을 여러 각도에서 연구하시는 분들이 교수님이 지적하시는 “학자적 양심이나 부끄러움”, “학문적 무관심과 불통” 등의 질책을 들으면 과연 그렇게 말하는 분이 우리들의 연구를 인지했고, 살펴보았나 되묻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구라 교수의 이 책들은 원래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 아니라 한국에 대해서 너무도 얕은 지식과 여전히 혐오적인 생각하는 일본 대중들을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역수입되어 번역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한국학자들이 보기에 일천한 측면이 많이 있고,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이 책의 저자조차도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마음을 잘 모르고, 여전히 오늘 남한과 북한이 분단으로 동시에 겪고 있는 이 고통이 그들로 인한 것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로서는 오구라 교수의 단어 선택이나 틈틈이 드러나는 뉘앙스조차도 거슬리는 것이 많습니다.
7.
하지만 그런데도 이렇게 오늘 탈종교와 탈 형이상학의 시대에 다시 ‘도덕’을 말하고, ‘철학’을 말하며, ‘영성’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고맙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일본인에 의한 것이라면 앞에서 지적한 여러 한계와 왜곡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저도 감사하고 감탄합니다.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오구라 교수가 저의 앞선 시기부터의 한국 여성종교사 탐구와 한국사상사 관점도 알아주었으면 좋았겠지만, 그가 의도적으로 외면했거나 ‘영성’ 개념과 관련해서 저작권 운운할 정도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는 일본의 스즈키 다이세쓰(鈴木大拙)가 ‘일본적 영성’을 말했다고 하면서 거기서 ‘조선적 영성’이라는 표현을 얻었다고 합니다(『조선사상사』, 20쪽). 아무튼, 이런 교수님의 비판과 지적, 오구라 기조 교수의 두 책을 계기로 저와 같은 학자가 더욱 분발해서 한국사상사의 맥을 살피는 작업을 더 정교히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다면 그 또한 좋은 성과와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이종철 교수님의 노고와 열정, 애정 어린 비판을 잘 경청하여 새기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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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선생이 서구 기독교, 조선 유교, 다산, 한국의 근대 구분, 국학 등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이와 유사하게 서구 기독교와 동아시아, 조선 유교, 동학, 페미니즘 등을 해석해 오고 있다. <이은선,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 2009>
변선환 아키브 편,<3.1정신과 '以後'기독교, 도서출판모시는사람들,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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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信연구소 오늘, 22.09.27(화)>
-한국 페미니스트 신학자의 유교읽기18-
점점 마무리를 향해 갑니다. 이번에 동학 최제우선생에 대한 성찰입니다. 요사이 한국사회에서 동학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데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지만 유교와 기독교 대화가로서 평소 저의 이해를 집약하고자 했습니다. 19세기 말로부터 나라상황이 더욱 어려워지면서 단지 철학이나 학문 차원이 아닌 신앙과 믿음의 차원으로 심화되어가는 유교 종교화 과정을 몇차례 살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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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信연구소 오늘, 24.02.20 화>
-조선유교의 이해 : 한국적 근대와 개벽-
어제 가톨릭 여성장상연합회에서 주관하는 <여성과 수행자>모임에 가는 기차 속에서 읽다가 공유를 놓친 글입니다. 평소 유교와 기독교의 대화 에서 19세기 후반부터의 한국 개벽사상을 '토착적 근대'라고 푸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오히려 15세기 조선 신유교의 등장을 '한국적 근대'의 시작으로 보아야한다는 저의 관점과 많이 맞닿을 수 있어서 매우 반가웠습니다.
조선 유교를 동학이나 19세기 말의 개벽사상들이 그 운이 다했다고 단지 거부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동학 등의 좁은 의미의 개벽사상 등도 배태했고, 오늘날 세계시민사회의 등장에서 볼 때 더 크게 전인류를 통섭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는 씨앗으로 보고자 합니다. <동학과 서학>이라는 큰 틀에서 최제우 선생 탄신 2백주년을 기해서 나올 공동저술 속에 조선유교사, 개벽사상, 탈근대의 문제를 통괄해서 살펴보고싶습니다.
유학사상사는 근대사상사와 어떻게 만나는가 / 노관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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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사상사는 근대사상사와 어떻게 만나는가 / 노관범
나의 근대 유학 공부. 필자는 대학 2학년 1학기 전필 한국사강독2 수업 시간에 조선시대 사상사 자료집을 읽었다. 기말 과제로 장지연의 『조선유교연원』 「총론」을 쓰고 여기에 나오는 유학자를 조사했다. 조선시대 유학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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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信연구소 오늘>
-다석 유영모의 귀일신학과 해학 이기의 유교적 진교-
전북과 전남의 경계 도시 전북 고창에 와 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김미령 선생의 남편 윤정현 성공회 신부님의 고향 고창에서 유교와 그리스도교 대화의 일환으로 다석 유영모와 대종교, 그 대종교를 넘어서 온 세계를 위한 참된 '진교'(眞敎)를 말한 해학 이기의 사상을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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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다석 일지(2020년 10월 7일, 수요일, 흐림 / 23920일째)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
다석의 늙은이 풀이 2차년도 인문학 교실도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늙은이 풀이 1장에서 77장까지 마쳤으니 이제 남은 4장과 두번의 특강을 마치면 도덕경 81장을 다 보게 된다.
10월 8일(목)에는 유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를 주제로 이은선 교수께서 특강을 한다. 이 교수는 태어나면서 기독교인이면서 양명학을 전공하였다. 세종대 교수직을 은퇴하고 지금은 신信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일시: 2020년 10월 8일(목) 19:00 - 21:00
장소: 고창군립도서관 문화강의실
* 사회적 거리두기로 30명만 강의실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참석을 원하는 사람은 063) 560-2420로 문의하기 바랍니다(수강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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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Joon Kim, Chung Hyun Kyung and 63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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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信연구소 오늘, 24.03.23 금>
- 信學하기이야기 3-
어제는 말씀드린 대로 4대 종단 2024 종교인 DMZ생명평화 걷기 대회 해단식에 함께 하느라고 강원도 북쪽 고성의 통일전망대에 다녀왔습니다. 횡성에서 거의 차로 3시간 거리였는데 남편이 운전했고, 도중에 간성전통시장 부근의 한 식당에서 장칼국수를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부랴부랴 통일전망대 길로 들어서 방문자 등록을 해야해 그곳으로 가니 이번 걷기의 총인도자셨던 성공회 김현호 신부님을 입구부터 만나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입구 모인 곳의 대원들 중에 옷차림으로 스님들 모습이 가장 눈에 띄였고, 예전 NCCK 화해와통일위원회 위원으로 평화협정캠페인 다닐 때 함께 했던 여러 분들이 보였습니다. 한기양, 조헌정, 나핵집, 신승민, 송병구 목사님 등, 남기평, 김민지 두 목사님도 반갑게 만났습니다.
창밖으로 멀리 금강산 자락과 해금강이 바라다 보이는 곳에서 해단예식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불교, 원불교, 천주교의 4대 종단만이 아니라 대종교, 동학 등에서 오신 분들도 함께 해서 '믿음'(信)이라는 공통어 안에 미래의 통일과 평화라는 현실을 이곳으로 적극적으로, 온 힘을 다해 끌고 오시는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갑자기 조헌정 목사님이 이웃종교와 함께 일을 해온 저희 부부를 소개하셔서 매우 부끄러웠고 죄송했습니다. 이번 22일 동안 온 몸으로 동서 DMZ 국토를 걸어온 분들 앞에서...
아침에 다시 방제선 님이 페북에 올리신 천문학자 윤성철 교수의 글을 읽었는데, 스승 홍승수 교수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관련해 "나의 코스모스"라는 제목에서 행한 강의와 관련한 이야기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무엇에 대해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 홍승수 교수는 천문학은 "사실에서 진실찾기"라는 말을 많이 하신다고 하는데, 사실 이 말은 한나 아렌트가 그녀의 뛰어난 논문 <Truth and Politics>에서 깊이 분석한 언술이기도 하고, 저희 선친 이신 목사님의 시집 <돌의 소리, 2012 동연>에도 나와 있지만, 그의 1960년대의 시 <사실 I, II>에 길게 그려져있습니다.
저는 오늘 믿음의 일, 信學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더 멀리 가면 이미 공자께서 유사하게 '경사이신(敬事而信)'을 BC 5백여년 전에 말씀하셨으니 인류의 의식은 동서고금 그렇게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실에서 진실찾기', 그 찾기 위한 지난하고 성실한 노력이 있고, 거기에 오랜 고통의 사유가 있으며, 그런 가운데서 놀랍게도 기적처럼 진실과 통찰이 찾아오는 경험, 진실을 만나는 신비, 그런 과정에 대한 세세한 이야기를 하는 믿음의 사람들, 신학(信學)의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성에서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왕곡마을 장석근 목사님을 방문하자고 해서, 40년 전 첫 목회지로 와서 지금까지 곧 은퇴를 앞둔 때까지 있으시다는 오봉교회에 들렀습니다. 마을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되어서 교회도 한옥으로 지어졌는데, 그곳에서 사모님의 수고로 아주 정갈하고 맛있는 저녁식사를 들 수 있었습니다. 두 분이 땅에 두 발을 온전히 딛고 40여년을 살아오시는 모습! 신뢰의 진실이 잘 영글어진 것이 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긴 운전과 좋은 곳으로의 인도 등, 어제 남편의 수고가 컸습니다. 감사합니다.
______
페친 방제선 24.03.23. 글 퍼옴
홍승수, 《나의 코스모스》
천문학은 인간을 해방시키는 인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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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철(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수)
1994년 어느 날, 서울대학교 문화관에서 열린 행사에서 홍승수 선생님은 외계 행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다. 과학자가 대중 앞에 나서는 모습이 낯설던 시절이다. 새롭게 탄생하는 별,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강착 원반, 강착 원반의 먼지들이 뭉치면서 지구형 행성이 되는 이야기. 그중에서도 결론부에서 스치듯이 언급된 내용 하나가 특별나게 기억난다. 천문학에서 행성과 생명의 기원을 탐구하는 일은 인류평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맙소사!
학생이었던 내게 과학은 그저 일련의 수식이었다. 학문의 동기를 문제 풀이에서 오는 성취감과 천문학이라는 분야가 주는 겉멋에서 찾았을 뿐이다. 인류 평화, 그런 건 천문학자가 고민할 주제가 아니었다. 선생님의 논리에 동의할 수는 있어도 가슴으로 공명하기는 어려웠다.
2016년 5월, 서울 충무로 벙커1에서 있었던 "나의 코스모스' 강연은 무려 20여 년 만에 다시 듣게 된 선생님의 대중 강연이다. 《코스 모스』 번역 이후 선생님은 대중 앞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지만, 나는 그동안 적지 않은 시간을 외국에서 보내느라 기회를 잡기 어려웠다.
20년은 긴 세월이다. 학생 시절에 공부했던 교과서를 들추어 보면 고대 신화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우주 배경 복사의 온도 요동, 암흑 에너지와 우주의 가속 팽창, 블랙홀 병합 순간에 방출된 중력파 등 학계를 뒤집어 놓은 노벨상급 연구 결과들은 당시에 존재 하지도 않았다. 천문학은 그만큼 숨 가쁘게 발전했다. 급격하게 발전하는 관측 기술 덕에 우주를 탐색하는 창은 기하급수적으로 넓어졌고 폭풍처럼 쏟아져 나오는 데이터에는 어떤 보물들이 더 숨겨져 있을지 슈퍼 컴퓨터와 인공지능을 동원해도 아직 다 가늠하기 어렵다.
학부생 시절에는 전무했던 외계 행성의 발견도 최근의 광범 위한 탐사에 힘입어 2016년 현재 3,000여 개로 늘어났다. 그중에서도 지구처럼 물이 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생명 거주 가능 영역 (habitable zone)'에 존재하는 행성은 300개에 달한다. 이 표본을 토대로 생명 거주 가능 영역에 있는 행성의 수를 추정하면 우리 은하만 따져 도 수백억 개에 이른다. 전 우주에 존재하는 은하가 약 2조 개이니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 행성의 수는 우리 우주에 100해(10의 22승) 개가 넘는다는 뜻이다. 생명의 탄생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하지만, 우주의 광대함은 그런 기적을 그저 평범한 필연으로 바꾸어 놓기에 충분하다. 21세기 천문학은 생명과 문명이 지구에서만 독특하게 발생한 기적적인 우연이 아니라 우주적인 필연일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한다.
과학자로서 칼 세이건의 위대함은, 이런 천문학적인 성취가 이루어지기 한참 전인 1970년대에 이미 외계 생명의 가능성을 매우 진지하게 과학적으로 접근했다는 데에 있다. 그는 21세기 천문학의 흐름을 수십 년 전에 미리 파악하고 준비한 개척자였다. 그의 역할은 천문학에 머물지 않는다. 『코스모스』 번역은 홍승수 선생님이 칼 세이건을 재평가하는 계기였다고 한다. 단순히 탁월한 과학자나 대중을 위한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는 천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인류의 미래까지 고민하던 지성인이었다.
"이 책이 일관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인류 문명의 바람직한 미래상'입니다. 칼 세이건은 그걸 1980년에 고민했던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오해하고 계실지 모르겠는데 『코스모스』는 천문학 지식을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해 집필한 책이 아니었어요..……………. 결론적으로 『코스모스』는 지구 문명의 어둠에 비춰 줄 빛을 외계 문명에서 찾아보자고 설득하기 위해 쓴 책이었던 것입니다."
그 존재조차 불분명한 외계 문명에서 인류의 미래를 찾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단 말인가? 물론 외계 문명과의 접촉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인류사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다. 하지만 가까운 장래에 그런 일을 기대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외계 문명을 과학적으로 진지하게 고찰하는 과정 그 자체는 역사에 커다란 정신적 유산으로 남을 것이다. 신은 설사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신에 관한 탐구가 인류사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큰 영향을 끼쳐 왔듯이 말이다. 신학이 결국은 인간학이듯, 외계 문명을 찾는 노력은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자 떠나는 여정이다. 홍승수 선생님이 최근 모든 강연에서 강조하시는 "사실에서 진실 찾기"라는 표현을 빌린다면, 『코스모스』는 결국 천문학적 사실에서 인류 문명이 지향할 가치라는 진실을 찾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다.
명쾌하게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해설하는 선생님의 『나의 코스모스』에는 또 다른 감동적인 진실이 담겨 있다. 바로 홍승수 선생님 자신의 성장 이야기다. 한국은 일제의 강압과 남북 전쟁을 겪는 불행한 현대사를 거쳐 왔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대학에서 천문학 교육이 도입된 이유 역시 북한과의 경쟁을 정부에서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런 참담한 세상에서도 하늘에는 달이 떴고, 홍승수는 하늘을 향한 꿈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무엇 덕분인가 하면, 그 시절 그 도서관에 화성에 관한 이야기가 실린 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휴전 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53년, 선생님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 권의 천문학 교양서를 발견하고 꿈을 키웠다. 그 미약했던 한줄기 빛은 60여 년이 지난 오늘 큰 지성의 빛이 되어 2016년 여전히 일그러져 있는 한국 사회를 비추고 있다. 어른이 부재한 사회에서 치열한 삶과 끊임없는 배움을 통해 젊은 후학에게 모범이 되어 주신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독자들은 《나의 코스모스』에서 아팠던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용기를 얻으리라 믿는다.
"여기에 모인 여러분은 경계를 뛰어넘는 지적 용기의 소유자입니다. 시대의 흐름을 똑바로 알고, 흐름에 앞서 달려가는 분들이 바로 여러분입니다. 행성 지구의 먼 미래가 비록 어둡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가까운 장래가 밝은 건 여기에 계신 지성인 여러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엊그제가 종강이었다. 『코스모스』를 주 교재로 삼은 교양 과목의 마지막 수업을 위해 초겨울 공기를 들이마시며 내딛는 발에는 아쉬움이 밟힌다. 아무래도 그 말은 좀 불필요했어. 상대성 이론 설명 할 때 든 예시는 오히려 학생들을 혼란스럽게 한 듯. 이렇게 한 학기를 복기하면서 강의실에 도착하면,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맞아 주던 학생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또 아쉽다.
이제 한 학기 강의를 마무리지어야 한다. "천문학의 발전은 여러 가지 편견과 억압에서 인간을 해방하는 데 일조해 왔습니다." 이 말을 듣고 학생들은 20여 년 전의 나처럼 속으로 '맙소사!'를 외쳤을까. 그래도 상관없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순진한 주장을 하는지 한번이라도 고민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162-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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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 Jin Chung, 박미숙 and 67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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