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02

이병철 | Facebook 검색 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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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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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보(恒步)선생과 지상에서 돋는 별
며칠 전에 화엄사 흑매를 뵈려 가던 중에 김천에 사시는 항보 김성순선생께서 전화를 주셨다. 안부를 나눈 뒤에 선생께서 지난 해에 나온 내 시집 '지상에서 돋는 별' 170권을 주문해서 한국포도회 회원들과 지인들에게 우편으로 보냈다고 하신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뭐라고 응답할 말이 쉬 떠오르지 않았다.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이 함께 겹쳐왔다. 
변변찮은 시집을 그렇게 많이 사서 나누었다는 그 말씀 속에는 내가 감당할 수없는 어떤 것이 있다고 느껴진 때문이다.
항보선생은 올해 우리 나이로 아흔하나이시다. 1929년 생이니 나하고는 꼭 20년 연상이시다. 그럼에도 선생께선 나이를 넘어 여러면에서 모자라는 나를 4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농민운동의 동지로, 개벽운동의 도반으로 받아주셨다. 그런 선생께 나는 여태 안부인사조차 제 때에 전하지도 못하고 지내왔다. 그런터에 이번에 가난한 당신의 주머니까지 털어 큰 돈으로 책을 사서 나누신 것이다. 
책을 지인들에게 우편으로 보내면서 당신이 그 책을 나누는 마음을 '깜박이는 내 작은 촛불을 들고'라는 제목의 쪽지 글과 함께 보내셨다고 한다.
이 쪽지의 제목이 지금 선생의 심경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느낌이 다가온다.
선생은 대구 사범 3학년 때 해방을 맞으시고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서 단독정부반대와 관련하여 옥고를 치르던 중에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재소자의 절반이 학살되는 상황 속에서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셨다. 이로써 교사의 길을 접고 낙동강변의 황무지에 똥오줌을 지고 나르면서 포도밭을 경작하여 생계수단을 마련하셨고 이를 계기로 농민운동에도 깊이 참여하시게 되었다. 1970년대 당시 농민운동단체는 한국가톨릭농민회가 유일한 조직운동체라 독실한 개신교 장로이신 선생께서도 가농의 임원으로 활동하시게 되면서 나하고도 깊은 교분이 생겼다. 
또한 선생과 나는 70년대 당시 이른바 의식화교육을 통해 노동자 농민운동의 리더들을 육성하던 크리스챤아카데미 농촌지도자과정의 동기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서로간에 깊은 동지적 연대가 이루어졌다고 여긴다.
그후 80년에 접어들면서 기독교농민회가 새롭게 결성되어 선생께선 기농의 임원으로 옮겨 활동하시게 되었지만 농민운동 진영의 동지로서의 교분은 계속 이어왔다. 그런 가운데 선생은 80년에 전국의 포도재배농가들을 한데 모아 한국포도회를 결성하고 오래도록 이끌어오시기도 하셨다. 
이런 선생의 행적 가운데 놀라운 것은 십 여년 전(2007년)에 동학(수운과 해월)을 다시 새롭게 접하면서 '인류는 한 그루 큰 나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오랜 기독교 신앙을 내려놓고 동학으로 개종하시면서 개벽운동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앞장서고 계신 것이다. 
선생은 종종 당신이 개벽신문에 쓰신 글이나 일본 학자들의 글을 번역하여 주변의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시곤 하는데 그 열정과 자세가 후배인 나를 매번 부끄럽고 미안하게 한다.
이번에도 제대로 영글지 못한 내 시집을 사서 과분한 찬사를 곁들여 주변의 지인들에게 그렇게 나누신 것이다. 
나는 시는 어떠해야 되는지, 시인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 지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5권의 책을 시집이라고 묶어내었지만 나는 시인이요 하고 내세우지도, 또 남들이 나를 시인으로 알아주길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내 사유의 한 형태로 '시'라는 방식이 내게 걸맞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그런 내게 항보선생은 꼭 여류시인이라고 부른다. 
항보선생처럼 선배들로서 나를 시인으로 깍듯이 대해주신 분이 몇 분 계시는데 그 가운데 한 분이 '직녀에게'란 시로도 널리 알려졌던 고 서은(瑞隱) 문병란선생이셨다. 선생은 내 두 권의 시집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찬사를 표사로 써주시기도 했는데 말년에는 거의 매달 한번 꼴로 편지를 보내주시기도 했다. 선배들께서 나를 큰 시인의 반열에 추켜세우는 것은 내 시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런 정신을 닮아가라는 격려의 마음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아낌없이 격려해주시는 그 마음자리를 따라가지 못하고 여전히 미혹의 상태에서 헤메고 있음이 스스로 부끄러운 것이다.
이번에 항보선생께서 보내주신 당신과 관계된 신문 자료와 쪽지를 받으면서 오랜 선배들의 크신 품을 새삼 생각한다.
여태 누구에게도 그렇게 넉넉한 품이 되어 곁을 나누어 본 적이 없는 내 좁은 속내에 대한 부끄러움과 함께 새삼 선배들의 넉넉한 마음자리가 그리워진다. 
항보선생을 통해 우리 시대의 어른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의 어둠은 더 짙어가는데 별처럼 길을 밝히던 시대의 어른들은 좀체 보이지 않는다. 어른이 사라진 시대라는 자조 속에서도 항보선생은 당신의 한 생을 온몸으로 시대의 등불로써 걸어온 마지막 남은 어른의 한분이라 싶다.
봄이 저물기 전에 선생께 한번 다녀와야 겠다.
(지난번에 급하게 이 글을 올려놓고 뒤이어 몇 마디 덧붙혔으면 마음이 일어났으나  미루다가 뒤늦게 오늘 다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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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is with 성염.
  · 
-개벽대학과 개벽총장/
문명의 전환, 혁명에서 개벽으로.
달포전인가 조성환선생이 자신이 수업을 담당하는 원광대 대학원 학생들에게 한번의 강의를 부탁했다. 그러면서 서울에서 매달 여는 개벽포럼 7월 모임에서 내가 이야기한 '살림과 개벽'을 주제로 그냥하면 된다기에 할 일없는 백수라 그러자고 했다. 
조성환선생은 한국철학을 새롭게 정립하면서 그동안 한국근대화과정에서 척사파와 개화파 위주의 주류담론을 지양하고 간과되어온 '개벽파'의 관점에서 한국 근대화 과정을 해석하는 작업에 주력해온 학자인데 최근엔 이병한선생과 함께 '개벽파선언'을 책으로 묶어내는 등 다시개벽운동을 시대이념으로 제시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마침 이 대학, 원광대 박맹수총장이 나와는 잘 아는 사이라 학교에 오면 점심을 함께 하자고 연락이 왔다. 
그는 지난 해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원광대를 개벽대학으로 선언하고 개벽일꾼을 길려내는 개벽총장을 자임하고 있는 터라 나도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점심을 하면서 개벽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었다.
박총장은 사학자이면서 '동학' 연구에 매진해온 이 분야의 가장 권위자이기도 한데, 동학과 원불교에 담긴 개벽을 이 시대의 이념으로 재해석하고 이를 사회화하기 위한 개벽꾼을 길려내는 산실의 역할을 원광대가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박총장과 내가 만나게 된 것은 우리가 이른바 무위당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운동의 노선?을 생명운동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 무위당선생과의 만남을 통해서였던 것처럼 박총장이 동학연구에 주력하게 된 계기도 무위당선생과의 만남을 통해서였으니 그런 점에서 우리는 무위당 문도?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그래서 박총장에게 개벽총장의 역할을 몇 가지 조언하고 왔다. 그 가운데 하나로 '마쓰시다 정경숙' 같은 개벽꾼을 길려내는 '원광대 개벽학숙"을 만들면 좋겠다는 것과 전 학생들에게 자신이 꿈꾸는 개벽, 개벽세상에 관한 리포트를 쓰게 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과제를 찾는 작업을 수업으로 할 것, 그리고 학교의 학풍과 면학 분위기를 개벽으로 만들기 위해서 학교 정문에서부탁 대학본부 건물에 '문명의 전환, 혁명에서 개벽으로" '개벽꾼 길려내어 개벽세상 만들세!'라는 구호를 대문짝하게 달아서 학생들은 물론 대학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이 이 대학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게하고 대학 구성원들은 그 사명과 임무를 날마다 되새기게 할 필요가 있다 등을 제안했다.
나도 한 때 녹색대학을 함께 만들었던 적이 있어 우리는 대학들이 똑 같을 필요가 없다는 것에 십분 공감하고 시대의 사명을 수행하는 일꾼을 길려내는 일에 주력하기 위해선 현행 대학 구조와 운영체계를 전면적으로 바꾸어야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하였다.
개벽이란 개념이 쉽게 잘 다가오지 않는 것도 '인류문명의 전환, 혁명에서 개벽으로' 라고 하면 보다 선명해지지 않겠는가 싶기도 하다. 
개벽꾼이 없이는 개벽세상, 다시개벽 또한 없는 것이다. 
박총장은 강의실까지 와서 나를 소개해주었는데 그 요지가 평생을 '백수'로 살아 하는 일 없이 사는 이라는 것이다. 이는 무위당선생 10주기 때 내가 묘소에서 바쳤던 시 '나의 스승은 백수였었다.'를 빗대어 그리 말한 것이라 싶다.
'백수가 세상을 구하리라.' 그것이 시의 내용이기도 하고 평소 나의 지론이기도 하다.
수업은 2시간 동안 내가 쓴 몇 편의 시를 중심으로 모처럼 젊은이들과 즐거운 수다를 떨다가 마쳤다.
박총장의 개벽대학을 위한 노력과 개벽꾼을 길려내는 일에, 그리고 조성환선생이 추구하는 개벽파 정립에 나도 마음으로 함께 거든다. 
다시개벽, 그 설레는 꿈을 다시 꿈꾼다. 새로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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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ewon Shin is with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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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공동학술대회 
한국의 "근대"를 다시 묻는다
원광대학교 숭산기념관
#꼼비방스아니고 #꽁비방스임ㅋ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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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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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이기형 지음)을 다 읽었다.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뭐라 말하기 힘들다.
물론 저자의 관점에서 쓴 책이니까, 반대자들의 의견도 있을 것이다.
몽양의 연설 내용이다.
“....해방된 오늘 지주 자본가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 보시오, .....지식인·사무원·소시민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손들어보시오.  ....농민·노동자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우기는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손들어 보시오. ....손을 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먼요. 그렇습니다. 일제 통치 36년 동안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반역적 죄악을 저지른 극소수만을 제외하고 우리는 다같이 굳게 손을 잡고 건국대업에 매진해야 합니다. 우리 조상은 일찍이 압록강· 두만강 저 쪽 광활한 만주 땅에 용맹을 떨치고 웅지를 펴지 않았습니까.
만주 즙안현에 있는 광개토왕비는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또 문화적으로는 금속활자· 고려청자· 훈민정음 등 세계가 자랑할 뛰어난 민족유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민족적·문화적 긍지를 가지고 세계사적 흐름에 발맞추어 우리는 건국대업에 임하기 위해 조선인민당을 창건합니다.... “
그는 좌우합작과 통일조국을 위해 헌신하다가 좌우 양쪽으로부터 반대를 받고, 당시 경찰의 묵인 아래 암살되었다.
어제 밤 문득 이 책을 보다가 ‘동학’이 생각났다.
나는 과거 역사를 많이 공부해보지 않았다. 그 편파적 해석이나 현실에 도움이 안되는 역사 논쟁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좀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조선 후기 근대부터 시간 나는대로 공부를 해보고 싶다.
동학운동과 상층의 근대화 세력 간의 합작은 불가능했을까?
일본 소규모 군대의 기관총 앞에 귀중한 근대화의 동력을 소멸시킨 과정을 좀 더 들여다보고 싶은 것이다.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는 이 민족의 비극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그 다음 기회는 해방 후 ‘합작’이었다.
이것도 실패하였다.
나라가 망하고, 분단되고, 동족 상잔까지 하는데는, 외세의 절대적으로 우세한 힘이 있었지만 그 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내부의 분열과 상잔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한다면, ‘합작’했어야 한다.
‘합작’ 실패의 역사였다.
이제 세 번째 기회다.
어떤 사람들은 ‘합작’이라는 말을 들으면 아마 좌파의 ‘통일전선’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 분들에게 몽양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해방 후 ‘합작’을 실패하게 한 책임의 반은 좌파에 있다.
극좌와 극우가 아닌 사람들이 ‘합작’을 주장했고, 미국과 소련을 업은 극좌와 극우에 의해 ‘합작’은 좌절되었고, 분단이 고착화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남북 합작이 아니다.
옛날의 좌우합작도 아니다.
중국의 국공합작 같은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안에서 ‘좌도우기의 개혁을 할 수 있는 합작과 연정’을 말하는 것이다.
남북관계는 당분 간 다른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 현실에 맞다.
국가의 과제가 70년 동안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민족’은 당분간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통일’이라는 단어도 심장 속 깊이 감추어라.
‘한 민족 두 국가’로 외환(外患)을 벗어나자.
우선 대한민국의 인간화·선진화를 위해 ‘합작’하고 ‘연정’하자.
때가 되면, 한국이 선진국이 되고, 북한이 민주화되면 아마도 자연스럽게 통일이 거론될 것이다.
어쩌면 통일보다 더 나아간 ‘아시아 연방’이 논의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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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恒步 김성순 선생의 보증서/
지난 유월 말, 선생께서 내 시집 100권을 구매해서 지인들에게 보내고 40여 년 동안 당신이 책임 맡아 이어온 계간 '한국포도회'지 여름호에 내 시집 소개와 함께 '여류(如流) 이병철 시인에 대한 보증서'를 썼다며 이제 생의 마지막 불꽃이 되고자 하신다는 전화를 받고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가 뒤늦게 어제 정원님과 함께 선생을 찾아뵈었다. 
선생은 백두대간 중간쯤인 김천 황악산이 바라보이는 곳에 사신다. 선생이 사시는 곳에서 바라보는 황악산이 가장 균형 잡힌 모습이라 선생은 당신을 황악산 아래의 누구라고 표현하시길 좋아하신다.
며칠 전에 미리 전화로 찾아뵈겠다고 했더니 사모님과 함께 기다리고 계셨다. 
이태 만에 찾아뵙는 것인데 두 분의 모습이 예전처럼 건강해 보여 다행이다. 선생이 93세, 사모님이 85세이니 무엇보다 건강이 가장 우려되는 나이인데 사모님이 얼마 전까지 건강이 좋지 않아 고생하셨지만, 지금은 많이 회복되셨고 선생도 귀가 좀 어두운 것 말고는 아직 크게 불편한 것은 없으시다고 하신다. 고마운 일이다. 
우리 내외가 도착해서부터 댁을 떠나올 때까지 여섯 시간을 넘게 선생께서 열정적으로 말씀하신다. 당신과 사모님의 건강문제와 집안 문제, 동학 공부와 동갑인 일본의 역사학자 나까즈카 아키라선생과의 관계, 함께 했던 농민운동의 회고, 최근 도올과 박진도교수 중심의 농산어촌 개벽 대행진까지 이야기는 끝이 없으시다.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새삼 감탄하고 귀담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당신이 뒤늦게 입도하여 공부하고 있는 동학과 관련한 수운선생과 해월선사의 어록 등은 거의 외우고 계셨다. 더구나 최근에도 창비 등의 잡지 구독하시고 관심 가는 책들을 주문하여 꾸준히 읽고 계셨다. 그러한 선생의 말씀은 한마디도 허투루 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모든 말씀이 당신이 구십의 평생을 바쳐 몸으로, 삶으로 체득한 지혜이자 당부였기 때문이다. 
선생과 처음 만나 선생을 농민운동의 동지로, 인생의 선배로 모셔온 것이 70년대 중반 무렵부터였으니 어느새 45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선생의 걸어오신 길과 그 길에서의 선생의 걸음이 흐트러졌던 것을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렇게 선생은 평생을 운동가로, 종교인으로, 시대의 선비로 일관해오셨다는 생각이 매번 뵐 때마다 새삼스레 느껴진다. 
그런 선생이 자신이 몸 바쳐온 한국포도회란 계간지에 내 시집의 소개와 함께 나를 보증한다는 글을 공개적으로 써서 게재하신 그 마음을 생각한다. 
“-여류(如流) 시인에 대한 보증서/
유신시대 크리스천아카데미(농촌 9기) 동기생 이병철 시인은 50년 가까운 세월 농민운동과 생명평화운동에 함께 걸어오는 사이, 나는 한 마리 거북이로 헤매는데 그는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고 있었다.
“한 송이 꽃이 어떻게 피어나는지를 떨리는 가슴으로 지켜본 사람은 꽃 한 송이가 지기 위해 애씀이 어떠한지를 안다.
서녘 햇살에 긴 그림자 끌며 먼 길 걸어온 사람은 남은 날들의 소중함이 어떻게 절실한지를 안다.”
“잘 살아가는 것이 또한 잘 죽어가는 것. 마지막 자리 환히 미소 머금고 감사와 사랑으로 작별의 인사 나누며 그리움으로 하나의 문을 닫고 설레임으로 새로운 문을 열기”
코로나 이후 어떤 세상이 오더라도 아침마다 그의 시 몇 편을 읽고 잠들기 전 하루를 돌아본다면 일 년 뒤 몇 구절, 저도 모르게 외고 맑은 샘물 솟아나리라. 
촛불혁명이 깜박이는데 〈그 이름으로 부를 때〉 “한 자락 미소가 물결처럼 퍼져나가 마침내 온 우주에 가득 찬다.” 
2021년 6월 8일 황악산 아래서 동학순례자 恒步 김성순“ 
내가 이제껏 세상을 살아오면서 참으로 여러 인연들의 과분한 은혜를 입고 있다는 생각을 갈수록 더 하게 되지만 선생처럼 내게 이런 과찬을 해주신 경우는 처음인데, 그 글을 읽으며 큰 부끄러움과 함께 후배를 품어주시는 너른 품을 새삼 느껴졌다. 
이번에 하신 말씀 가운데도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관계에서 ”남의 작은 허물을 내 마음에 논하지 말고, 나의 작은 지혜를 나누라“는 수운의 탄도유심금(歎道儒心急)이나 “사람을 대하고 물건을 접함에 반드시 악을 숨기고 선을 찬양하는 것으로 주를 삼으라.”는 해월신사의 말씀을 늘 가슴에 새긴다는 말씀이 그랬다. 수운의 불연기연(不然其然) 뜻 또한, 당신은 그 의미를 ‘부정적인 것을 보되 거기에 머물지 말고 더 큰 긍정으로 나아가라.’라고 새긴다는 말씀도 그런 것이라 싶었다. 
이번에 해주신 여러 말씀 가운데 특히 가슴에 깊게 와닿은 것은 선생께서 올해 7월13일부터 이번 연말까지를 당신의 마지막 날들로 삼고 날마다 남은 날을 헤아리며 마음 챙기기를 하고 있다는 말씀이셨다. 
다석선생이 자신의 67세 때를 생의 마지막으로 여기고 날마다 쓴 육필 일기 영인본을 읽으면서 선생도 올 한해 그렇게 해 보시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 날이 지나도 살아있다면 또다시 시작해보면 되지 않겠냐며 밝게 웃으신다. 
어제가 시월 열사흘이었으니 남은 날이 채 90일도 되지 않는데, 아침에 일어나며 이제 이번 생의 날이 90일도 안 남았구나. 나는 오늘 무슨 마음, 무슨 생각으로 무엇을 하며 이날을 지낼 것인가. 그러면서 일어나는 생각을 틈틈이 메모도 하신다는 것이다. 
말씀을 들으며 말로는 ‘오늘 하루’와 ‘지금 여기’를 주문처럼 되뇌면서도 마음과 생각은 여전히 바깥을 떠도는 나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나도 칠십 줄에 접어들어 늙어간다는 것, 돌아간다는 것이 남의 이야기만이 아님을 몸으로도 체감한다. 선생을 뵐 때마다 드는 한 생각은 앞으로 나의 남은 길을  선생처럼 저렇게 흔들림 없이, 아니 마음에 한 뜻을 오롯이 품고 걸어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생이 지금  걷고 계신 그 마음과 자태가 내겐 큰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선생과 나눈 이야기를 여기에 다 소개할 수 없어 유감이지만 여러 말씀 가운데 몇 말씀만 더 보탠다면 틱낫한스님의 ‘손안의 사과는 우주적’이란 말씀을 소개하시면서 결국 그 사과도 먹어보아야 그 맛을 안다. 먹어보기 전에는 하나의 생각,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동학도 몸으로 체험해 봐야 동학이다. 사상, 철학의 동학을 떠나 동학적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 때 동학이라는 이름도 너무 앞세우지 말아야 한다. 
존경할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무조건 존경하는 것, 그렇게 해 보는 것이다.
선생께서는 마주 보이는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소설 ‘큰 바위 얼굴’을 이야기하셨다. 당신도 그렇게 저 황악산을 닮아 같으면 하시는 것이라 싶었다. 그런 선생의 모습에서 이미 선생은 저 백두대간의 한 줄기로 우뚝한 황악산이 되셨다고 느껴졌다.
해방 전후 혼돈의 공간과 한국전쟁 시기의 참혹한 시련을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인간이란 존재의미를 잃지 않고 밝음을 향해 평생을 걸어오신 분, 선생이 바로 저 황악산 같은 분이라고. 
아직도 하실 말씀이 많으신 선생과 헤어지면서 앞으로 자주 찾아와 뵙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면서 선생의 생전에 선생의 문집이나 자서전을 펴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선생과 사모님의 삶이야말로 해방 후부터 오늘까지를 증언하는 살아 숨쉬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누가 이 작업을 해줄 수 있을까. 혹시 페친 가운데 이 작업을 해줄 수 있는 분이 있으면 좋겠다. 
한 시대를 오롯이 살아온 그 한 사람이 아직 여기에 계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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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보(恒步)선생과 지상에서 돋는 별
며칠 전에 화엄사 흑매를 뵈려 가던 중에 김천에 사시는 항보 김성순선생께서 전화를 주셨다. 안부를 나눈 뒤에 선생께서 지난 해에 나온 내 시집 '지상에서 돋는 별' 170권을 주문해서 한국포도회 회원들과 지인들에게 우편으로 보냈다고 하신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뭐라고 응답할 말이 쉬 떠오르지 않았다.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이 함께 겹쳐왔다.
변변찮은 시집을 그렇게 많이 사서 나누었다는 그 말씀 속에는 내가 감당할 수없는 어떤 것이 있다고 느껴진 때문이다.
항보선생은 올해 우리 나이로 아흔하나이시다. 1929년 생이니 나하고는 꼭 20년 연상이시다. 그럼에도 선생께선 나이를 넘어 여러면에서 모자라는 나를 40여년이 넘는 세월동안 농민운동의 동지로, 개벽운동의 도반으로 받아주셨다. 그런 선생께 나는 여태 안부인사조차 제 때에 전하지도 못하고 지내왔다. 그런터에 이번에 가난한 당신의 주머니까지 털어 큰 돈으로 책을 사서 나누신 것이다.
책을 지인들에게 우편으로 보내면서 당신이 그 책을 나누는 마음을 '깜박이는 내 작은 촛불을 들고'라는 제목의 쪽지 글과 함께 보내셨다고 한다.
이 쪽지의 제목이 지금 선생의 심경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느낌이 다가온다.
선생은 대구 사범 3학년 때 해방을 맞으시고 해방정국의 혼란 속에서 단독정부반대와 관련하여 옥고를 치르던 중에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재소자의 절반이 학살되는 상황 속에서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셨다. 이로써 교사의 길을 접고 낙동강변의 황무지에 똥오줌을 지고 나르면서 포도밭을 경작하여 생계수단을 마련하셨고 이를 계기로 농민운동에도 깊이 참여하시게 되었다. 1970년대 당시 농민운동단체는 한국가톨릭농민회가 유일한 조직운동체라 독실한 개신교 장로이신 선생께서도 가농의 임원으로 활동하시게 되면서 나하고도 깊은 교분이 생겼다.
또한 선생과 나는 70년대 당시 이른바 의식화교육을 통해 노동자 농민운동의 리더들을 육성하던 크리스챤아카데미 농촌지도자과정의 동기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서로간에 깊은 동지적 연대가 이루어졌다고 여긴다.
그후 80년에 접어들면서 기독교농민회가 새롭게 결성되어 선생께선 기농의 임원으로 옮겨 활동하시게 되었지만 농민운동 진영의 동지로서의 교분은 계속 이어왔다. 그런 가운데 선생은 80년에 전국의 포도재배농가들을 한데 모아 한국포도회를 결성하고 오래도록 이끌어오시기도 하셨다.
이런 선생의 행적 가운데 놀라운 것은 십 여년 전(2007년)에 동학(수운과 해월)을 다시 새롭게 접하면서 '인류는 한 그루 큰 나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오랜 기독교 신앙을 내려놓고 동학으로 개종하시면서 개벽운동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앞장서고 계신 것이다.
선생은 종종 당신이 개벽신문에 쓰신 글이나 일본 학자들의 글을 번역하여 주변의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시곤 하는데 그 열정과 자세가 후배인 나를 매번 부끄럽고 미안하게 한다.
이번에도 제대로 영글지 못한 내 시집을 사서 과분한 찬사를 곁들여 주변의 지인들에게 그렇게 나누신 것이다.
나는 시는 어떠해야 되는지, 시인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 지는 잘 알지 못한다. 그래서 5권의 책을 시집이라고 묶어내었지만 나는 시인이요 하고 내세우지도, 또 남들이 나를 시인으로 알아주길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내 사유의 한 형태로 '시'라는 방식이 내게 걸맞다고 생각할 따름이다. 그런 내게 항보선생은 꼭 여류시인이라고 부른다.
항보선생처럼 선배들로서 나를 시인으로 깍듯이 대해주신 분이 몇 분 계시는데 그 가운데 한 분이 '직녀에게'란 시로도 널리 알려졌던 고 서은(瑞隱) 문병란선생이셨다. 선생은 내 두 권의 시집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찬사를 표사로 써주시기도 했는데 말년에는 거의 매달 한번 꼴로 편지를 보내주시기도 했다. 선배들께서 나를 큰 시인의 반열에 추켜세우는 것은 내 시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런 정신을 닮아가라는 격려의 마음임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럼에도 아낌없이 격려해주시는 그 마음자리를 따라가지 못하고 여전히 미혹의 상태에서 헤메고 있음이 스스로 부끄러운 것이다.
이번에 항보선생께서 보내주신 당신과 관계된 신문 자료와 쪽지를 받으면서 오랜 선배들의 크신 품을 새삼 생각한다.
여태 누구에게도 그렇게 넉넉한 품이 되어 곁을 나누어 본 적이 없는 내 좁은 속내에 대한 부끄러움과 함께 새삼 선배들의 넉넉한 마음자리가 그리워진다.
항보선생을 통해 우리 시대의 어른에 대해 생각한다. 세상의 어둠은 더 짙어가는데 별처럼 길을 밝히던 시대의 어른들은 좀체 보이지 않는다. 어른이 사라진 시대라는 자조 속에서도 항보선생은 당신의 한 생을 온몸으로 시대의 등불로써 걸어온 마지막 남은 어른의 한분이라 싶다.
봄이 저물기 전에 선생께 한번 다녀와야 겠다.
(지난번에 급하게 이 글을 올려놓고 뒤이어 몇 마디 덧붙혔으면 마음이 일어났으나 미루다가 뒤늦게 오늘 다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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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is with 성염.

 
-개벽대학과 개벽총장/
문명의 전환, 혁명에서 개벽으로.
달포전인가 조성환선생이 자신이 수업을 담당하는 원광대 대학원 학생들에게 한번의 강의를 부탁했다. 그러면서 서울에서 매달 여는 개벽포럼 7월 모임에서 내가 이야기한 '살림과 개벽'을 주제로 그냥하면 된다기에 할 일없는 백수라 그러자고 했다.
조성환선생은 한국철학을 새롭게 정립하면서 그동안 한국근대화과정에서 척사파와 개화파 위주의 주류담론을 지양하고 간과되어온 '개벽파'의 관점에서 한국 근대화 과정을 해석하는 작업에 주력해온 학자인데 최근엔 이병한선생과 함께 '개벽파선언'을 책으로 묶어내는 등 다시개벽운동을 시대이념으로 제시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마침 이 대학, 원광대 박맹수총장이 나와는 잘 아는 사이라 학교에 오면 점심을 함께 하자고 연락이 왔다.
그는 지난 해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원광대를 개벽대학으로 선언하고 개벽일꾼을 길려내는 개벽총장을 자임하고 있는 터라 나도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점심을 하면서 개벽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었다.
박총장은 사학자이면서 '동학' 연구에 매진해온 이 분야의 가장 권위자이기도 한데, 동학과 원불교에 담긴 개벽을 이 시대의 이념으로 재해석하고 이를 사회화하기 위한 개벽꾼을 길려내는 산실의 역할을 원광대가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박총장과 내가 만나게 된 것은 우리가 이른바 무위당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운동의 노선?을 생명운동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 무위당선생과의 만남을 통해서였던 것처럼 박총장이 동학연구에 주력하게 된 계기도 무위당선생과의 만남을 통해서였으니 그런 점에서 우리는 무위당 문도?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그래서 박총장에게 개벽총장의 역할을 몇 가지 조언하고 왔다. 그 가운데 하나로 '마쓰시다 정경숙' 같은 개벽꾼을 길려내는 '원광대 개벽학숙"을 만들면 좋겠다는 것과 전 학생들에게 자신이 꿈꾸는 개벽, 개벽세상에 관한 리포트를 쓰게 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과제를 찾는 작업을 수업으로 할 것, 그리고 학교의 학풍과 면학 분위기를 개벽으로 만들기 위해서 학교 정문에서부탁 대학본부 건물에 '문명의 전환, 혁명에서 개벽으로" '개벽꾼 길려내어 개벽세상 만들세!'라는 구호를 대문짝하게 달아서 학생들은 물론 대학을 방문하는 모든 이들이 이 대학이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게하고 대학 구성원들은 그 사명과 임무를 날마다 되새기게 할 필요가 있다 등을 제안했다.
나도 한 때 녹색대학을 함께 만들었던 적이 있어 우리는 대학들이 똑 같을 필요가 없다는 것에 십분 공감하고 시대의 사명을 수행하는 일꾼을 길려내는 일에 주력하기 위해선 현행 대학 구조와 운영체계를 전면적으로 바꾸어야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동의하였다.
개벽이란 개념이 쉽게 잘 다가오지 않는 것도 '인류문명의 전환, 혁명에서 개벽으로' 라고 하면 보다 선명해지지 않겠는가 싶기도 하다.
개벽꾼이 없이는 개벽세상, 다시개벽 또한 없는 것이다.
박총장은 강의실까지 와서 나를 소개해주었는데 그 요지가 평생을 '백수'로 살아 하는 일 없이 사는 이라는 것이다. 이는 무위당선생 10주기 때 내가 묘소에서 바쳤던 시 '나의 스승은 백수였었다.'를 빗대어 그리 말한 것이라 싶다.
'백수가 세상을 구하리라.' 그것이 시의 내용이기도 하고 평소 나의 지론이기도 하다.
수업은 2시간 동안 내가 쓴 몇 편의 시를 중심으로 모처럼 젊은이들과 즐거운 수다를 떨다가 마쳤다.
박총장의 개벽대학을 위한 노력과 개벽꾼을 길려내는 일에, 그리고 조성환선생이 추구하는 개벽파 정립에 나도 마음으로 함께 거든다.
다시개벽, 그 설레는 꿈을 다시 꿈꾼다. 새로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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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공동학술대회
한국의 "근대"를 다시 묻는다
원광대학교 숭산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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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이기형 지음)을 다 읽었다.
가슴이 뜨거워지기도 하고, 눈물이 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뭐라 말하기 힘들다.
물론 저자의 관점에서 쓴 책이니까, 반대자들의 의견도 있을 것이다.
몽양의 연설 내용이다.
“....해방된 오늘 지주 자본가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손들어 보시오, .....지식인·사무원·소시민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손들어보시오. ....농민·노동자만으로 나라를 세우겠다고 우기는 사람 있으면 어디 한번 손들어 보시오. ....손을 드는 사람이 하나도 없구먼요. 그렇습니다. 일제 통치 36년 동안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반역적 죄악을 저지른 극소수만을 제외하고 우리는 다같이 굳게 손을 잡고 건국대업에 매진해야 합니다. 우리 조상은 일찍이 압록강· 두만강 저 쪽 광활한 만주 땅에 용맹을 떨치고 웅지를 펴지 않았습니까.
만주 즙안현에 있는 광개토왕비는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또 문화적으로는 금속활자· 고려청자· 훈민정음 등 세계가 자랑할 뛰어난 민족유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민족적·문화적 긍지를 가지고 세계사적 흐름에 발맞추어 우리는 건국대업에 임하기 위해 조선인민당을 창건합니다.... “
그는 좌우합작과 통일조국을 위해 헌신하다가 좌우 양쪽으로부터 반대를 받고, 당시 경찰의 묵인 아래 암살되었다.
어제 밤 문득 이 책을 보다가 ‘동학’이 생각났다.
나는 과거 역사를 많이 공부해보지 않았다. 그 편파적 해석이나 현실에 도움이 안되는 역사 논쟁에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좀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조선 후기 근대부터 시간 나는대로 공부를 해보고 싶다.
동학운동과 상층의 근대화 세력 간의 합작은 불가능했을까?
일본 소규모 군대의 기관총 앞에 귀중한 근대화의 동력을 소멸시킨 과정을 좀 더 들여다보고 싶은 것이다.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는 이 민족의 비극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그 다음 기회는 해방 후 ‘합작’이었다.
이것도 실패하였다.
나라가 망하고, 분단되고, 동족 상잔까지 하는데는, 외세의 절대적으로 우세한 힘이 있었지만 그 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내부의 분열과 상잔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한다면, ‘합작’했어야 한다.
‘합작’ 실패의 역사였다.
이제 세 번째 기회다.
어떤 사람들은 ‘합작’이라는 말을 들으면 아마 좌파의 ‘통일전선’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 분들에게 몽양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해방 후 ‘합작’을 실패하게 한 책임의 반은 좌파에 있다.
극좌와 극우가 아닌 사람들이 ‘합작’을 주장했고, 미국과 소련을 업은 극좌와 극우에 의해 ‘합작’은 좌절되었고, 분단이 고착화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남북 합작이 아니다.
옛날의 좌우합작도 아니다.
중국의 국공합작 같은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안에서 ‘좌도우기의 개혁을 할 수 있는 합작과 연정’을 말하는 것이다.
남북관계는 당분 간 다른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 현실에 맞다.
국가의 과제가 70년 동안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민족’은 당분간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통일’이라는 단어도 심장 속 깊이 감추어라.
‘한 민족 두 국가’로 외환(外患)을 벗어나자.
우선 대한민국의 인간화·선진화를 위해 ‘합작’하고 ‘연정’하자.
때가 되면, 한국이 선진국이 되고, 북한이 민주화되면 아마도 자연스럽게 통일이 거론될 것이다.
어쩌면 통일보다 더 나아간 ‘아시아 연방’이 논의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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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恒步 김성순 선생의 보증서/
지난 유월 말, 선생께서 내 시집 100권을 구매해서 지인들에게 보내고 40여 년 동안 당신이 책임 맡아 이어온 계간 '한국포도회'지 여름호에 내 시집 소개와 함께 '여류(如流) 이병철 시인에 대한 보증서'를 썼다며 이제 생의 마지막 불꽃이 되고자 하신다는 전화를 받고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가 뒤늦게 어제 정원님과 함께 선생을 찾아뵈었다.
선생은 백두대간 중간쯤인 김천 황악산이 바라보이는 곳에 사신다. 선생이 사시는 곳에서 바라보는 황악산이 가장 균형 잡힌 모습이라 선생은 당신을 황악산 아래의 누구라고 표현하시길 좋아하신다.
며칠 전에 미리 전화로 찾아뵈겠다고 했더니 사모님과 함께 기다리고 계셨다.
이태 만에 찾아뵙는 것인데 두 분의 모습이 예전처럼 건강해 보여 다행이다. 선생이 93세, 사모님이 85세이니 무엇보다 건강이 가장 우려되는 나이인데 사모님이 얼마 전까지 건강이 좋지 않아 고생하셨지만, 지금은 많이 회복되셨고 선생도 귀가 좀 어두운 것 말고는 아직 크게 불편한 것은 없으시다고 하신다. 고마운 일이다.
우리 내외가 도착해서부터 댁을 떠나올 때까지 여섯 시간을 넘게 선생께서 열정적으로 말씀하신다. 당신과 사모님의 건강문제와 집안 문제, 동학 공부와 동갑인 일본의 역사학자 나까즈카 아키라선생과의 관계, 함께 했던 농민운동의 회고, 최근 도올과 박진도교수 중심의 농산어촌 개벽 대행진까지 이야기는 끝이 없으시다.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새삼 감탄하고 귀담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당신이 뒤늦게 입도하여 공부하고 있는 동학과 관련한 수운선생과 해월선사의 어록 등은 거의 외우고 계셨다. 더구나 최근에도 창비 등의 잡지 구독하시고 관심 가는 책들을 주문하여 꾸준히 읽고 계셨다. 그러한 선생의 말씀은 한마디도 허투루 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 모든 말씀이 당신이 구십의 평생을 바쳐 몸으로, 삶으로 체득한 지혜이자 당부였기 때문이다.
선생과 처음 만나 선생을 농민운동의 동지로, 인생의 선배로 모셔온 것이 70년대 중반 무렵부터였으니 어느새 45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선생의 걸어오신 길과 그 길에서의 선생의 걸음이 흐트러졌던 것을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렇게 선생은 평생을 운동가로, 종교인으로, 시대의 선비로 일관해오셨다는 생각이 매번 뵐 때마다 새삼스레 느껴진다.
그런 선생이 자신이 몸 바쳐온 한국포도회란 계간지에 내 시집의 소개와 함께 나를 보증한다는 글을 공개적으로 써서 게재하신 그 마음을 생각한다.
“-여류(如流) 시인에 대한 보증서/
유신시대 크리스천아카데미(농촌 9기) 동기생 이병철 시인은 50년 가까운 세월 농민운동과 생명평화운동에 함께 걸어오는 사이, 나는 한 마리 거북이로 헤매는데 그는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고 있었다.
“한 송이 꽃이 어떻게 피어나는지를 떨리는 가슴으로 지켜본 사람은 꽃 한 송이가 지기 위해 애씀이 어떠한지를 안다.
서녘 햇살에 긴 그림자 끌며 먼 길 걸어온 사람은 남은 날들의 소중함이 어떻게 절실한지를 안다.”
“잘 살아가는 것이 또한 잘 죽어가는 것. 마지막 자리 환히 미소 머금고 감사와 사랑으로 작별의 인사 나누며 그리움으로 하나의 문을 닫고 설레임으로 새로운 문을 열기”
코로나 이후 어떤 세상이 오더라도 아침마다 그의 시 몇 편을 읽고 잠들기 전 하루를 돌아본다면 일 년 뒤 몇 구절, 저도 모르게 외고 맑은 샘물 솟아나리라.
촛불혁명이 깜박이는데 〈그 이름으로 부를 때〉 “한 자락 미소가 물결처럼 퍼져나가 마침내 온 우주에 가득 찬다.”
2021년 6월 8일 황악산 아래서 동학순례자 恒步 김성순“
내가 이제껏 세상을 살아오면서 참으로 여러 인연들의 과분한 은혜를 입고 있다는 생각을 갈수록 더 하게 되지만 선생처럼 내게 이런 과찬을 해주신 경우는 처음인데, 그 글을 읽으며 큰 부끄러움과 함께 후배를 품어주시는 너른 품을 새삼 느껴졌다.
이번에 하신 말씀 가운데도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관계에서 ”남의 작은 허물을 내 마음에 논하지 말고, 나의 작은 지혜를 나누라“는 수운의 탄도유심금(歎道儒心急)이나 “사람을 대하고 물건을 접함에 반드시 악을 숨기고 선을 찬양하는 것으로 주를 삼으라.”는 해월신사의 말씀을 늘 가슴에 새긴다는 말씀이 그랬다. 수운의 불연기연(不然其然) 뜻 또한, 당신은 그 의미를 ‘부정적인 것을 보되 거기에 머물지 말고 더 큰 긍정으로 나아가라.’라고 새긴다는 말씀도 그런 것이라 싶었다.
이번에 해주신 여러 말씀 가운데 특히 가슴에 깊게 와닿은 것은 선생께서 올해 7월13일부터 이번 연말까지를 당신의 마지막 날들로 삼고 날마다 남은 날을 헤아리며 마음 챙기기를 하고 있다는 말씀이셨다.
다석선생이 자신의 67세 때를 생의 마지막으로 여기고 날마다 쓴 육필 일기 영인본을 읽으면서 선생도 올 한해 그렇게 해 보시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 날이 지나도 살아있다면 또다시 시작해보면 되지 않겠냐며 밝게 웃으신다.
어제가 시월 열사흘이었으니 남은 날이 채 90일도 되지 않는데, 아침에 일어나며 이제 이번 생의 날이 90일도 안 남았구나. 나는 오늘 무슨 마음, 무슨 생각으로 무엇을 하며 이날을 지낼 것인가. 그러면서 일어나는 생각을 틈틈이 메모도 하신다는 것이다.
말씀을 들으며 말로는 ‘오늘 하루’와 ‘지금 여기’를 주문처럼 되뇌면서도 마음과 생각은 여전히 바깥을 떠도는 나를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나도 칠십 줄에 접어들어 늙어간다는 것, 돌아간다는 것이 남의 이야기만이 아님을 몸으로도 체감한다. 선생을 뵐 때마다 드는 한 생각은 앞으로 나의 남은 길을 선생처럼 저렇게 흔들림 없이, 아니 마음에 한 뜻을 오롯이 품고 걸어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생이 지금 걷고 계신 그 마음과 자태가 내겐 큰 귀감이 아닐 수 없다.
선생과 나눈 이야기를 여기에 다 소개할 수 없어 유감이지만 여러 말씀 가운데 몇 말씀만 더 보탠다면 틱낫한스님의 ‘손안의 사과는 우주적’이란 말씀을 소개하시면서 결국 그 사과도 먹어보아야 그 맛을 안다. 먹어보기 전에는 하나의 생각,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동학도 몸으로 체험해 봐야 동학이다. 사상, 철학의 동학을 떠나 동학적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 때 동학이라는 이름도 너무 앞세우지 말아야 한다.
존경할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무조건 존경하는 것, 그렇게 해 보는 것이다.
선생께서는 마주 보이는 황악산을 가리키면서 소설 ‘큰 바위 얼굴’을 이야기하셨다. 당신도 그렇게 저 황악산을 닮아 같으면 하시는 것이라 싶었다. 그런 선생의 모습에서 이미 선생은 저 백두대간의 한 줄기로 우뚝한 황악산이 되셨다고 느껴졌다.
해방 전후 혼돈의 공간과 한국전쟁 시기의 참혹한 시련을 온몸으로 겪으면서도 인간이란 존재의미를 잃지 않고 밝음을 향해 평생을 걸어오신 분, 선생이 바로 저 황악산 같은 분이라고.
아직도 하실 말씀이 많으신 선생과 헤어지면서 앞으로 자주 찾아와 뵙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면서 선생의 생전에 선생의 문집이나 자서전을 펴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선생과 사모님의 삶이야말로 해방 후부터 오늘까지를 증언하는 살아 숨쉬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누가 이 작업을 해줄 수 있을까. 혹시 페친 가운데 이 작업을 해줄 수 있는 분이 있으면 좋겠다.
한 시대를 오롯이 살아온 그 한 사람이 아직 여기에 계실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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