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08

팔레스타인의 고난과 남아공의 정의 실험(이찬수) 2024

팔레스타인의 고난과 남아공의 정의 실험(이찬수) – hr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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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의 고난과 남아공의 정의 실험(이찬수)
작성일  2024-08-06

조회  135


이찬수 /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스라엘과 가자



2023년 10월 7일에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군사 정당인 하마스가 이스라엘에 로켓 공격을 감행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이 하마스의 공격을 비판하면서도, 그 공격은 역사적 진공상태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며, 그동안 팔레스타인이 당했던 무고한 고난과 희생을 상기시켰다. 이스라엘은 구테흐스의 발언을 재비판하면서 ‘이때가 기회’인 양 가자지구를 멸절시켜 가고 있다. 몇 달 사이 가자지구 내 팔레스타인 민간인이 4만 명 가까이 희생되었다.


구테흐스의 발언에도 함축되어 있듯이, 이 사건의 배후에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사가 놓여있다. 대강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이스라엘은 3천여 년 전 오늘의 팔레스타인 지역(당시로서는 가나안)에 국가를 이루며 살았다. 독립적 국가를 이룬 기간은 사백여 년 가까이 된다. 그 뒤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지배를 차례로 받다가, 급기야 기원후 70년경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초토화된 이후 유대인들은 삶의 터전을 떠나 유럽, 아프리카, 아라비아 등으로 흩어졌다. 이른바 ‘디아스포라’의 시작이다.


게토로부터의 해방과 시오니즘


유대교 안에서 생겨났지만 그리스와 로마 제국 하에서 유대교 분위기를 탈색시킨 기독교는 392년 로마 제국의 종교가 되었고, 유대교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유대인이 예수를 죽였다는 선입견이 민중 사이에 스며들면서 유대인 차별이 본격화되었다. 1215년 라테란공의회에서는 반유대주의를 천명했고, 유대인은 일정 지역에 모여 살 수밖에 없었다. 이 집단 유대인촌을 ‘게토’라고 한다.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 지성인들 사이에서는 계몽주의가 발흥했고, 인간 해방적 분위기가 커졌다. 그러자 유대인들도 점차 게토에서 해방되어 유럽인들 사이에 섞여 살기 시작했다. 모세 멘델스존 같은 유대인은 “서구인이 되라”는 모토를 내걸며 유대교의 진리를 서구적 합리성 차원에서 파악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인간 해방적 분위기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민족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즈음 프랑스의 유대인 장교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1894년 스파이로 모함을 받아 유배를 가면서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는 반유대주의가 들끓었고,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자신들만의 국가를 이루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유대인들의 국가 회복 혹은 고향 귀환 운동이 이른바 ‘시오니즘’이다.


그 분위기 속에서 스위스의 신문기자인 테오도르 헤르츨이 『유대 국가』(1896)라는 책을 썼고, 이듬해 앞으로 50년 안에 ‘이스라엘’을 창건하자는 취지의 시오니즘 대회가 스위스에서 열렸다. 이때 헤르츨은 유대 국가의 후보지로 팔레스타인 외에도 우간다, 아제르바이잔, 아메리카 등을 염두에 두었다. 그러다가 유대인들의 정신적 유산이 큰 팔레스타인 쪽으로 방향이 정해졌다. 2000년 전에 자신들이 살던 곳이라는 정서가 크게 작용했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기독교



어떤 유대인들은 ‘타나크’(유대교경전, 기독교의 구약성경)에 기반해, 옛 가나안, 즉 현 팔레스타인에 대한 토지소유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자신들의 옛 문헌을 ‘땅문서’처럼 간주하면서, 팔레스타인을 유대인을 위해 준비된 ‘빈 땅’처럼 생각했다. 물론 타나크가 실제로 땅문서가 될 수는 없다. 만에 하나 그럴 가치가 있다고 해도, 그 땅이 어디서부터 어디를 의미하는지 경계를 측량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유럽의 일부 기독교인들도 유대인의 국가 건설을 지지했다. 심리적으로는 기독교 문화권에서 유대인에게 가한 상처에 대한 부채감을 덜기 위해서였다. 신앙적으로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배척했다가 나중에 국가를 회복하고 예수를 믿게 될 때 ‘천년왕국’이 시작되리라는 성경적 종말론을 구체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유대인의 국가가 건립된 이후에 ‘하느님 나라’가 온다는 기독교적 종말론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이를 위해 일부 기독교인들이 영국 측에 유대 국가의 건설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영국의 이중 계략


영국은 20세기 초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오스만제국(오늘의 튀르키예)을 해체하고 자기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였다. 그 과정에 아랍의 지도자 샤리프 후세인에게 오스만제국의 지배를 받던 아랍에 아랍인들의 국가를 건설하도록 지원할 테니, 전쟁(1차대전)에서 영국(연합국)을 지원해달라는 이른바 ‘맥마흔협정’(1915-1916)을 맺었다. 그와 동시에 외무장관 밸푸어는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의 건설을 지지한다는 이른바 ‘밸푸어 선언’을 했다.(1917) 이 선언문에는 “팔레스타인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권과 종교적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어떠한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는 문장도 담았다. 하지만 최강국 영국이 유대 국가를 지지한다는 선언만으로도 시오니즘 운동은 거센 불이 붙었다. 저마다 국가의 성립을 꿈꾸며 많은 이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몰려갔고 땅을 샀다. 오늘까지도 가장 위험한 분쟁지역이 된 근본 원인이다.


아랍인의 땅, 팔레스타인



물론 아랍인의 눈으로 보는 팔레스타인의 정체성은 다르다. 가령 타나크(특히 사무엘서)에는 이스라엘에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예루살렘 지역에 살던 원주민, 즉 여부스족 이야기가 나오는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 여부스족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 유대인이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 땅에 살아왔다는 것이다. (어쩌면 유대인이나 팔레스타인이나 모두 가나안인의 후손일 가능성도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원래 가나안의 도시 엘리트에 반기를 든 가나안인 집단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실제로 팔레스타인은 유대인 보다는 비유대인의 통치 기간이 더 길었고, 7세기 이후만 치면 아랍계 내지는 이슬람계가 땅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 연대기적으로 팔레스타인은 아랍(638-1071), 터키/셀주크(1071-1098), 파티미드(1098-1099), 십자군(1099-1291), 맘루크(1291-1517), 오스만(1517-1917), 이집트(1831-1840)의 지배를 받았고, 20세기 초중반에 영국(1917-1948)의 영향력 안에 있었다. 그러다가 1948년에서야 이스라엘이 건국되는 정도였다. 팔레스타인 원주민의 역사가 훨씬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더욱이 그 과정에 무수한 침략과 전쟁, 정착과 이주의 역사와 반복되었고, 인구 구성원도 혼재되었다. 이러한 혼합 과정을 고려하면 이스라엘만이 이곳의 소유자라고 할 수 없고, 누가 진짜 원주민인지 특정하기도 쉽지 않다. 분명한 사실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실질적인 침략자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노골적인 침략자였던 것은 아니다. 초기의 유대인 정착민과 팔레스타인 사람은 사이가 괜찮았다. 국경이나 국가적 주권 개념이 없던 시절, 사람들이 국가 개념 없이 서로 섞이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팔레스타인 사람 중에는 유대인에게 거처를 제공하고 농사짓는 방법을 가르치던 이들도 제법 많았다. 이스라엘 정착민들이 사실은 자신을 정복하려고 온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저항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구미 유력 국가들의 지지를 받으며 이스라엘의 점령사는 멈추지 않았다. 이 소박한 원주민들이 느꼈을 배신감을 생각하면 가슴이 짠하다.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


남아공의 정의 실험



2023년 12월 29일, 오랜 인종차별 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극복한 경험이 있는 남아공이 이스라엘을 가자지구에 대한 대량학살(제노사이드) 혐의로 유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했다. 남아공은 이스라엘이 ‘집단 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제노사이드 협약)’에 가입해 놓고도 약속을 어겼다는 이유를 들었다. 말레이시아, 튀르키예, 요르단, 볼리비아를 위시해 이슬람협력기구(57개 회원국) 등이 이 제소에 지지 의사를 밝혔다. 미국은 제소에 반대했다. 대량학살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아공은 소장에서 그저 대량학살 혐의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각종 폭력과 인종차별적 행위를 꼼꼼하게 정리해서 다각도로 문제를 제기했다. 남아공은 팔레스타인 민중과 연대해온 대표적인 나라이다.


통상 이런 국제 소송은 판결이 나기까지 몇 년씩 걸린다. 그러다보니 이스라엘에 시간을 벌어주는 빌미를 제공할 가능성도 있다. 그런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 남아공은 ICJ에 이스라엘의 학살 행위를 당장 멈추게 해달라는 긴급 요청을 네 번이나 제기했다. 급기야 ICJ는 그중 일부를 인용하면서 지난 5월 24일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의 최남단인 라파에 대한 공격을 당장 멈추고, 가자가 이집트와 물자를 소통할 수 있도록 라파검문소를 개방하라고 명령했다. 후속 조처를 한 달 이내에 ICJ에 제출하라고도 요구했다.(가자에 억류중인 이스라엘 포로도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상황에 변화는 거의 없었다. ICJ의 긴급명령은 법적 구속력은 있지만, 강제로 집행할 권한까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ICJ를 맹비난하면서 라파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이와 함께 지난 2022년, 유엔이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이 적법한지 판단해달라는 자문을 구했는데, ICJ는 그에 대한 조사 결과를 2024년 7월 19일 내놓았다. 반세기 넘게 진행 중인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은 불법이니, 가급적 빨리 중단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권고적 의견일 뿐, 강제적 집행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그 뒤에도 가자 지구를 둘러싼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도리어 점령지를 더 늘려가고 있다. 그런 식으로 지구촌에는 늘 법이 아닌, 힘이 지배하고 있다.


왜 남아공처럼 하지 못할까



남아공을 위시한 일부 국제사회의 정의 실험은 잠시 반짝거리다가 다시 묻힌다. 그나마 한국 정부는 이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다. 정치적 ‘친미’에다가 미국과 얽힌 종교적 ‘친이’ 분위기를 반영하는 정권 탓이 클 것이다. 불행하게도 한국과 같은 나라들 때문에 팔레스타인에서의 무고한 희생은 계속되고 있다. 설령 다시 꺼진다 해도, 그나마 정의의 작은 불빛을 반짝이는 이들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만이 희망으로 남아 있다.


이찬수 위원은 전 보훈교육연구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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