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15

Kyung Hee Rho - * 다시 이름을 찾은 '정가당문고'의 한국 고서들

Kyung Hee Rho - * 다시 이름을 찾은 '정가당문고'의 한국 고서들 어제 쓴 '정가당 문고의... | 


Kyung Hee Rho 20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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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이름을 찾은 '정가당문고'의 한국 고서들
어제 쓴 '정가당 문고의 한국고서들'과의 인연을 이어 적으려 보니까,
오늘은 마침 '광복절'이다.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날짜가 이렇게 딱 맞을까.
정말 글이라는 것도 다 쓰는 때가 있나 보다.
언젠가 이런 글을 꼭 광복절 기념으로 한번 써봐야지 했는데, 이렇게 진짜 쓰는 날이 오는구나, 좀 신기할 정도^^


앞의 '문헌과해석' 글들에서 적었 듯이, 정가당문고의 한국 고서들은 일제강점기 때 문고에 수장된 책이라 일본의 '국서' 목록에 편입되었고, 그래서 한국 학계에도 다른 자료들에 비해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나 또한 이러한 사실을 2000년대 초반 교토대 동양사학과 교수였던 후마 스스무(夫馬 進)선생님께 처음 들었다.(그 '조선연행사와 조선통신사'의 저자이다)

이후 다산학술문화재단의 의뢰로 일본에 소장된 다산 저술을 정리하면서 처음 정가당문고를 방문해 우리 고서들의 실재를 확인하였다. 이후로 내내 이 책의 목록이 일본의 국서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 맘에 걸렸다. 그리고 귀국 후 정가당문고에 대한 글을 '문해'에 싣고, 이걸로 한국 학계에 소개하였으니 내 역할은 다 하였다고 생각하고 잠시 잊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한중연의 옥영정 선생님으로부터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이 책의 목록해제집 만드는 일을 신청해보자는 연락이 왔다. 옥영정 선생님과 그 제자들로 구성된 팀은 당시 이미 중국 상해도서관과 일본 오사카부립도서관 목록해제집을 훌륭히 만든 경험과 시스템이 있었기에 이 일의 최고 적임자였다.
 
다만, 그 제안을 받고 내가 고민했던 건, 일본의 사립 도서관들의 폐쇄성을 익히 알았고 특히 정가당문고는 그 끝판왕에 있는 곳이기에...과연 제대로 섭외가 되고 협력을 얻어낼 수 있을지...솔직히 처음엔 정말 자신이 없었다.
 
당시 내 상상으로는 도무지 그 좁은 열람실을 2주 간이나 우리팀이 독점하면서, 수천 책에 이르는 한국 고서들을 한 명의 사서가 일일이 꺼내준다는 그림이 전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 이전에 철저히 소개 문화로 굴러가는 일본 사립 단체들의 시스템을 생각할 때, 누구를 통해 그 정가당문고 사서와 연락을 해서 이 일을 요청해야 할지도, 전혀 감이 안 왔다. '정가당문고'는 일본 내에서도 그만큼 특별한 곳이었다.

그런데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진인사대천명' 이라더니...이 일은 정말 뜻밖의 인연으로 너무 쉽게 풀렸다. 이 일을 하기로 하고 제일 먼저 게이오 대학 사도문고의 오랜 벗인 스미요시 도모히코(住吉朋彦) 교수에게 상의했는데(이 분은 내가 사도문고에 처음 들어섰을 때, 나를 제일 처음 맞아 준 분이다. 이후 20년이 넘게 깊은 인연을 맺고 있은 좋은 친구다), 알고 보니 정가당문고의 사서 분은 게이도대 출신으로 스미요시 상의 오랜 지인이었다. 내가 가장 고민했던 것이 정가당문고와의 연결고리였는데, 이미 내 곁에는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확실한 보증인(?)이 있던 것이다.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이 인연은 정말 너무 신기하다.
 
스미요시 선생님은 일본의 무로마치 시대 한적 서지 연구자로 조선의 고서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이미 한국에도 여러 차례 자료조사와 학회로 방문해서 한국 학계에 아주 익숙한 분이었다. 또한 그 일 직전 2014년도 규장각 국제학술대회에서 나와 스미요시 선생님, 동경대 오오기 야스시 선생님, 그리고 옥영정 선생님은 함께 패널을 만들어 발표한 적이 있어, 이미 옥영정 선생님과도 친숙한 사이였다. 이렇게 여러가지 인연들이 겹쳐 스미요시 선생님도 이 일의 공동연구원으로 참여하시게 되면서, 이 일은 일사천리로 흘러갔다.
 
2016-7년 2년에 걸쳐 매년 여름 2주씩 한국 서지조사팀은 정가당문고를 방문해 그곳에 소장된 한국 고서들을 전부 꺼내어 일일이 확인하며 자료목록을 만들었다. 옥영정 선생님의 서지조사팀은 워낙에 서지학적으로 잘 훈련된 전문가들이었고 또 사전 준비가 완벽했기에, 정가당문고의 전폭적인 지지와 협력이 더해져 자료조사 작업은 너무도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2018년에 목록해제집 나왔다.

"일본 세이카도문고 소장 한국전적", 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18.

2019년 여름 정가당문고를 방문해 이 목록서를 문고 열람실 한쪽에 놓인 기존의 '국서목록' 옆에 나란히 놓았을 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드디어 우리 고서들이 '한국전적'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세상에 소개된 것이다.

처음 이 책들이 이곳에 왔을 때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고, 그래서 이 책들은 일본의 '국서'라 불렸다. 그리고 100년이 흘러 이 책들은 이제 해방된 국가 대한민국의 연구팀 손에서 조사되어 '한국전적'의 이름으로 세상에 다시 공개되었다.

책에도 운명이 있다면 이 얼마나 드라마 같은 인생일까.
오늘 광복절을 맞이하여 이렇게 이 글을 통해 이 사연을 기념할 수 있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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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세상을 떠돌며 책을 조사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 힘으로 이 책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이 책이 나를 불러 여기에 오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부름에 내가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면, 다시는 '책의 신'이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과 함께.

그래서 점점 자료 앞에서 마음을 비우고 겸손하게 된다. 이 자료는 내 것이 아니고 그저 나를 통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싶은 것뿐이다, 그러니까 자료가 나를 선택해준 것에 감사하고 그 역할을 잘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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