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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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영화이야기
중산층이 모럴 해저드 빠지면, 나라가 무너진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입력 2024.09.29 06:00
수정 2024.09.3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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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 영화 이야기] ‘보통의 가족’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오동진 영화 평론가

중견 스타 감독 허진호의 신작 ‘보통의 가족’은 물론 보통의 가족 얘기가 아니다. 이건 ‘보통이 아닌’ 가족의 얘기이다. 이렇게 ‘보통이 아닌’ 사건 사고의 가족 얘기는 주변에 너무 많다. 언제부턴가 많아지기 시작했고 점점 더 증가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말 그대로 보통의 가족 얘기인 측면도 있다. 이건 영화가 지닌 일종의 ‘비현실성의 현실성’, ‘현실성의 비현실성’이란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 눈앞에서 보고 있는 건 영화의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사실은 현실에 벌어지는 모든 실제 현상을 반영하고 있거나(비현실성의 현실성), 이 모든 것이 진짜 얘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한 걸음 소격(疏隔)해서 보면 그냥 영화에 불과하다(현실성의 비현실성)는 것이다. '보통의 가족'은 보통이 아니면서도 보통의 가족 얘기인 영화이다. 끔찍하다. 이런 가족의 문제가 계속되거나 늘어난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없다, 끝났다, 그런 애기를 하고 있는 영화이다.




이탈리아 영화 ‘더 디너’ 리메이크한 ‘보통이 아닌’ 가족 이야기

허진호의 ‘보통의 가족’은 리메이크이다. 이탈리아 이바노 드 마테오 감독이 2014년에 발표한 ‘더 디너’를 한국 버전으로 만든 것이다. 원작이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네덜란드 작가 헤르만 코흐의 소설이다. 소설과 가깝거나 흡사한 것은 이탈리아 영화이다. 하지만 원작소설을 더욱 더 영화처럼, 그리고 영화답게 만든 것은 이번 허진호의 버전이다. ‘보통의 가족’은 이탈리아 영화 ‘더 디너’에서 가져오되 이런저런 완충의 에피소드를 결합시켰다. 어느 쪽이 더 나은 가는 중요하지 않다. 결과적으로는 다른 작품이 됐기 때문이다.

원래의 소설과 이탈리아 영화는 공간이 좀 더 한정적이다. 사건의 상당수는 형제 둘 간 디너의 대화에서 유추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예컨대 허진호 버전 ‘보통의 가족’ 같은 오프닝 장면은 이탈리아 영화 ‘더 디너’에는 나오지 않는다. ‘더 디너’에서는 형제간 대화로 나오는 사건인데 ‘보통의 가족’에서는 외연화시킨 것이다. 대중관객들에게 좀 더 친절한 설명을 붙인 셈이다. 영화적 액세서리를 여기저기 재창조해 박아 넣었다는 점에서 ‘보통의 가족’은 ‘더 디너’보다 장식미가 강한 작품이다. 그러나 이전 작품과의 진짜 차이, 본질적인 차별성은 허진호 영화가 정서적으로 더욱 참혹하다는 것이다. 허진호의 마음속에 이런 냉혹함과 잔인함이 있었나 싶을 만큼 의심이 들 정도이다.




‘보통의 가족’은 두 형제의 이야기이다. 형 재완(설경구)은 변호사이고 동생은 소아과 의사이다. 형은 이성적이고 동생 재규(장동건)는 감성적이다. 형은 꽤나 물질만능주의자이고 동생은 이상주의자이다. 이 둘은, 당연히, 티격태격한다. 재완은 자신이 벌어들이는 돈 만큼 소비하고 살자는 주의여서 늘 메뉴판 가격이 꽤 나가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즐기기를 원한다. 속물이다. 그렇다고 완전 속물은 아니어서, 어쩌면 영어 표현 ‘스노비시(snobbish)’ 정도에 어울리는 인물이다. 예컨대 와인 하나 고를 때 이게 루이 몇 세 때, 누가 어떻게 마셨으며, 국내에 단 몇 병만이 있다는 둥, 바디감이 어쩌고저쩌고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남자인 것이다. 재완은 그런 남자이다.




각자 나름 완벽한 삶 구현하려는 두 형제 부부와 자식들

반면에 동생 재규는 소아과 의사답게 부드러운 성격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역시 아주 좋은 남자인 것만은 아니다. 뒤에서 사람들 흉도 보고 아이 엄마의 요란스러운 태도에 늘 질려하기도 한다. 환자 보호자에게 종종 거짓말도 한다. 우리 애가 정말 나을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에 빨리 나아서 걷고 뛰게 해야죠, 라고 대답하지만, 밖으로 나가면 빨리 재수술 일정을 잡으라고 지시하는 식이다. 남에게 동정적인 척 하지만 그에게 어울리는 영어 표현은 ‘셀피시(selfish)’이다.

재완은 젊은 여자 지수(수현)와 재혼했으며 재규는 연상의 아내 연경(김희애)과 살고 있다. 두 가정 다 대학 진학을 앞둔 아이들이 있다. 재완의 딸 혜윤(홍예지)은 국내 대학이 아니라 영국 명문대학의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다. 재규의 아들 시호(김정철)도 입시가 코앞이다. 지금 한창 야자(야간자습)와 개인 과외에 매달리고 있다. 늘 그렇지만 자식들이 문제이다. 이 양쪽 집안 역시 각각의 딸과 아들이 벌인 문제로 사단이 난다. 어마어마한 일이 터진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근원은 ‘그 놈의 어줍잖게 격식 차려 먹는 디너’ 탓이다. 모든 일이 어찌 보면 다 이 디너로부터 시작됐다고 하는 이유는, 부모가 디너 때문에 집을 비워야 했기 때문이다. 재완은 재규네를 여느 날처럼 디너에 초청한다. 자신들의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는 문제에 대한 논의가 이날의 이슈였다. 다들 집에 아이들을 놓고 나왔다. 그리고 이런저런 의논 아닌, 언제나처럼 끝없는 논쟁을 벌이다 다소 늦은 밤에 귀가를 한다. 이날 부모들의 디너 동안 청소년 아이 둘은 자신들만의 파티(술과 약물이 있는)에 간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이 간단치 않은 남녀 청소년들은 씻을 수 없는 짓을 저지른다.




심각한 자식의 문제 앞에 부모는 균형감각 있는 선택 할 수 있나

자, 그런데 문제는 결국 이들 아들딸이 아니다. 자녀의 문제는 엄마에게 전이되고 곧이어 각각의 가장들, 남자들에게로 옮겨 간다. 속물인 형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이며 인간주의를 추구해 온 동생은 또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영화는 매우 극단적이면서도 참혹한 결말을 향해 돌진해 간다. 아마 이 영화의 결말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충격을 당한 자신의 속마음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극장을 나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본 것이 과연 무엇인지, 의심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치열한 논쟁을 유발시킬 것이다. 자신이라면 어느 쪽에 설 것인가의 선택을 강요하게 만들 것이다.

이탈리아 영화 ‘더 디너’의 분위기를 뛰어 넘어 한국 영화 ‘보통의 가족’은 현대사회를 지켜 온 중산층의 붕괴, 그것도 완벽한 해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사회의 근간이 무너질 때는 여러 시그널이 있지만 가장 무서운 것은 중산층의 내면에 균열이 생길 때이다. 지식인 사회의 모럴이 없어질 때이다. 부모들이라면 당연히 아이들의 비행(非行)과 범죄를 가리고 덮으려고 한다. 부모란 바로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리 사선(死線)에 서게 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자식을 위한 궁극의 일을 선택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균형감각이 작동해야 한다. 그 밸런스가 깨지고 모럴 해저드가 벌어지는 사회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가 않다. 겉으로는 아무 일이 없는 척 해도 이미 그 사회는 망가져 있는 셈이다. 허진호의 ‘보통의 가족’은 한국 사회가 이미 많은 부분 다 깨져나가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허진호스럽지’ 않은 사회적 일갈이 강하게 내질러진 느낌의 작품이다. 이 영화를 보고 참담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극히 둔감하거나 사회적 공감능력이 제로에 가까운 사람일 것이다.




사라진 미래 대신 고민하고 그 짐까지 지려는 영화

모던하고 깔끔한 세련미의 영상을 주조하는 데 있어 일가견이 있는 허진호답게 영화 속 디너 장면들을 정성스럽게 찍었다. 색채, 조명, 의상, 분장 하나하나가 모여 씬의 완성도를 높인다. 조성우의 피아노 음악은 마치 히사이시 조의 그것처럼 은밀하다. 영화를 조각한다는 의미란 바로 이런 식이라는 걸 가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인공들의 삶이 겉으로는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척하지만, 사실은 그 내면이 걷잡을 수 없는 폭력에 시달리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영화 ‘보통의 가족’은 폭풍우의 전조와 같은 느낌의 작품이다. 자신이 저지른 악행은 아랑곳하지 않고 영국 명문대 합격증을 자랑스러워하며 부자 아빠에게 선물로 차를 사 달라고 하는 악마 같은 세대의 자식이 있는 한, 그런 지옥 같은 후세대를 키워낸 상황인 한에는 우리 사회에 미래란 없다. 전혀 없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미 되돌리기 어려운 지점까지 와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이미 벌써 끝난 것이 아닌지. 고민이 많아지게 하는 영화 한 편이 바로 ‘보통의 가족’이다. 영화는 종종 세상의 고민을 대신하고 그 짐을 기꺼이 지려 한다. ‘보통의 가족’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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