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젠가 비평가 유종호는 일제 말 문인들의 친일문학은 선택의 자유가 없었던 강압해서 나왔다고 말했다. 그 말은 '저항 문학'에 대한 모독이고 일제 말 문학인들의 저항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모르는 소리다.
중일전쟁 이후 일본이 동북아의 패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조선 문학계 내에서는 식민주의에 대한 협력과 저항이라는 양극화 양상이 벌어졌다.
흔히 이러한 협력과 저항을 구분 짓는 것 자체가 당시의 실상과는 무관하며 이것의 배후에는 내셔널리즘이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유종호처럼.
그럼 실제 작품을 놓고 얘기해보자. 김사량의 <천마>와 이석훈의 <고요한 폭풍>을 나란히 놓고 보면 당시의 문학계 내에서는 문학인 각자의 현실 판단에 의해 주체적으로 그러한 상반된 길을 선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억압에 대해 싸운 것과 억압에 편승한 것과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이러한 차이를 무시하고 똑같이 볼 때 우리는 더 큰 폭력을 용인하는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친일 협력과 저항에 대한 이론적 작업과 이것에 기초한 개별 작가에 대한 평가는 결코 미룰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유종호는 뭐라고 말했는가?
친일이 중요한가?문화적 업적이 중요한가? 라고 물었다. 정말 나올 수 없는 말이 그것도 비평가라는 사람 입에서 나오고, 우린 아무렇지도 않게 듣고 있는 것이다.
● 일제 말 문학인의 세 가지 저항 방식
중일전쟁 이후 가속화된 총동원체제로 인하여 조선 작가들은 이전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가혹한 억압에 시달려야 했다. 이전에는 이런 주제를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면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것들을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상황이 이렇게 바뀌어 가자 식민주의에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작가들의 경우에는 문제가 될 것이 없지만 그렇지 않고 저항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 작가들에게는 이러한 억압을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일제 말기 저항을 한 작가들을 탐구할 때 넘어서야 할 것은 식민치하의 저항이 모두 내셔널리즘에 입각해 있었던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이다. 조선의 경우 문학적 저항에 국한시켜 볼 때 내셔널리즘의 저항은 매우 작은 부분을 차지한다. 내셔널리즘 중에서 국민주의에 섰던 작가들의 경우, 예를 들면 이광수나 주요한 같은 작가의 경우 예외 없이 식민주의에 협력하였고 민족주의에 선 현진건 같은 작가들은 저항을 하였지만 문학적 저항 전체를 고려할 때 극히 소수였다. 오히려 끝까지 저항을 하였던 문학인들은 사회주의적 국제주의자이거나 혹은 세계주의자였던 것이다. 왜 해방 후 많은 문인들이 북으로 갈 수밖에 없었는지 알 수 있다.
저항 작가들을 그 저항 방식에 따라 나누면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침묵이며 둘째는 우회적 글쓰기이며 셋째는 망명이다. 유종호 교수는 이런 저항의 방식을 알고 있으면서 친일작가들을 변명하기 위해 일본의 억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쓴 것이 친일문학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뻔뻔한 변명에 발터 벤야민의 입을 빌려 싶다
- 저항을 선택할 수 없는 문학가는 침묵해야 한다.
저항을 할 경우 작가 자신들이 처한 조건에 따라 각각 다른 방향을 취하였다. 우회적 글쓰기를 택한 작가 중에서 가장 긴장이 강하였던 경우가 한설야이고, 우회적 글쓰기를 하다가 이것이 여의치 않자, 망명을 선택하였고 이에 성공했던 경우가 김사량이었다. 침묵으로서의 저항을 선택했던 작가 중에서 가장 극적 전환을 보여주는 경우로 김기림을 들 수 있다. 김기림은 신체제론이 선포되면서 많은 근대 비판론자들이 대동아공영권의 근대초극론으로 기울어질 때 이에 대해서 분명한 자의식을 갖고 비판하면서 침묵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이육사 역시 우회적 글쓰기로서 시를 쓰다가 이것으로는 더 이상 자신을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였을 때 망명을 시도한다. 김재용의 글에 의하면 당시 이육사와 같이 망명하려고 했던 이의 증언과 주변 정황을 미루어 볼 때 이육사가 망명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검거되어 옥사하였음은 거의 분명한 것 같다.
유종호 비평가는 이 친일문학에 대한 민중의 거부감을 그 시대상의 억압적 지배를 인지 못하는 대중의 폭력성으로 돌리려 한다. 물론 그런 폭력성에 대한 성찰은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에 묘한 차원의 단순 환원론이 있다. 수많은 식민 지배와 그에 따른 저항의 논리를 제국주의 담론에 다 묻어버리려는 것이다. 이런 단순 환원론이 문학계에서 '그 시절 친일 안 한 사람 나와봐라...친일과 그 작품은 분리해야 한다..' 라는 식의 무식한 담론을 만들어 낸 것이다.
물론 친일문학은 식민담론에 포획된 주체들에게는 불가피한 선택일 수는 있다.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은 그 식민구조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주체가 실은 항상 타자에게 구속된 채 고정되어 있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만약 그렇다면 저런 저항문학은 나올 수 없지 않는가? 비평가들이 역사를 보고 인식할 때 그 주체의 내재성으로 제국주의에 저항하고 인류를 억압하는 제국주의적 질서를 돌파할 가능성을 타진한 저런 주체들을 호명하면서 친일문학에 대한 반성적 인식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럴 수 없다면 유종호는 침묵해야 한다.
====

No comments:
Post a Comment
Note: Only a member of this blog may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