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익의 내관 차이나
2023년 8월 29일
40. 미시생활세계의 ‘혐중’은 농촌에 대한 혐오다
사진1) 루샨 산정호수의 풍광
작년 여름, 아내의 고향인 장시江西성 지우장九江에 갔다. 지우장에서는 루샨廬山이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데, 고대부터 중국의 명산 중 한 곳이다. 이곳이 특히 중국 내에서 전국적 지명도를 얻게 된 것은 근대시기이다. 산위에 호수, 계곡을 중심으로 비교적 평평한 너른 땅이 있어서 여름 별장 지대가 조성됐다. 주로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화둥華東지역에 거주하던 서구인들이 이곳에 여름 별장을 만들고, 일 년에 두세 달 정도 기거했다. 이국적인 풍광이 제법 아름다워서 다양한 서구양식의 건물로 둘러싸인 호수 산책길을 걷다 보면, 유럽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은 메이루별장美廬別墅이다. 이 건물의 소유주는 쟝졔스蔣介石의 아내인 쑹메이링宋美齡이었는데, 부부가 모두 이곳을 매우 아꼈다고 한다. 이 건물에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회의가 몇차례 열리기도 했지만, 가장 특이한 사실은 마오쩌둥毛澤東도 이곳에 머물렀다는 점이다. 국민당과 공산당 지도자가 함께 애착을 보였던 건물은 중국내에서 유일하게 이곳 하나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 건물을 구경할 때, 가장 이채로왔던 곳은 화장실이었다. 1900년대에 지어진 이 별장의 화장실에는 당시에는 드문 좌식 양변기 (중국어로 마통馬桶이라고 부른다.)가 설치돼 있다. 그런데 바로 그옆에 화식和式변기(짐작하시는대로 일본식 변기라는 표현이다. 중국어로는 뚠컹蹲坑,뚠삐엔치蹲便器, 뚠칠蹲池 등으로 부른다. ‘뚠’은 문자그대로 쭈그려 앉는 스쿼팅squatting 자세를 의미한다)가 나란히 위치하고 있으니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원래는 건축주인 영국인과 이를 선물받았던 장졔스 부부가 이용하던 양변기밖에 없었는데, 이를 불편하게 여긴 마오쩌둥을 위해서 화식변기를 따로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농촌출신의 혁명가였던 마오의 배경을 생각하면 꽤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이다.
개인적으로 이 건물을 구경할 때, 가장 이채로왔던 곳은 화장실이었다. 1900년대에 지어진 이 별장의 화장실에는 당시에는 드문 좌식 양변기 (중국어로 마통馬桶이라고 부른다.)가 설치돼 있다. 그런데 바로 그옆에 화식和式변기(짐작하시는대로 일본식 변기라는 표현이다. 중국어로는 뚠컹蹲坑,뚠삐엔치蹲便器, 뚠칠蹲池 등으로 부른다. ‘뚠’은 문자그대로 쭈그려 앉는 스쿼팅squatting 자세를 의미한다)가 나란히 위치하고 있으니 진풍경이 아닐 수 없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원래는 건축주인 영국인과 이를 선물받았던 장졔스 부부가 이용하던 양변기밖에 없었는데, 이를 불편하게 여긴 마오쩌둥을 위해서 화식변기를 따로 만들었다고 한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농촌출신의 혁명가였던 마오의 배경을 생각하면 꽤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이다.
이 설명을 들었을 때, 1990년 난생 처음 해외여행으로 일본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신칸센新幹線을 탔는데, 초고속 열차에, 세상에나! 양변기와 화식변기 화장실이 나란히 설치돼 있었다. 당시 이미 아파트 생활이 보편화한 서울의 일반 가정이나 새로 지어진 학교와 같은 공공시설에서는 화식변기를 찾아보기 힘들어진 상황이었다.
나도 화식변기에 대해서는 그다지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 7~80년대, 어렸을 적 경험했던 냄새나고 더럽고 비좁은 화장실은 모두 화식변기였다. 그중에서도 최악은 물론 문자 그대로 ‘푸세식’ 변기이다. 수직 낙하한 분비물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화장실을 말한다. 하지만 도시의 화장실에서 ‘푸세식’은 일찌감치 사라졌다. 대개 물을 이용해서 변을 아래로 밀어서 씻어내는 수세식이 이를 대체했다. 정화조와 변기 사이에는 굽은 관이 설치돼 있어서, 늘 깨끗한 물이 고여 있다. 정화조에 쌓인 배변물을 직접 보지 않아도 되고, 가스도 직접 올라오지 않기 때문에 악취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수세식이 보급되던 당시, 한국의 화장실 문화가 그다지 성숙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공중화장실을 사용하던 사람들도 마구잡이로 사용했고, 깨끗하게 관리도 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명색이 수세식인 화장실은 ‘푸세식’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아니 푸세식은 그래도 한참 아래로 수직낙하한 변을 눈을 부릅뜨고 노려봐도, 그 형체가 불분명했는데, 관리되지 않은 수세식 화장실은 변이 내려가지 못하고 그대로 변기에 쌓여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이와 관련한 여러 가지 웃지 못할 일화들이나 이런 상황을 풍자한 농담들이 적지 않았는데, 좀 역겨워서 지금은 차마 형용하기도 어렵다.
물론, 내가 여전히 한발을 걸치고 있는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똥’은 전혀 다르게 인식되기도 한다. 퇴비로 활용할 수 있는 생태적 자원을 의미한다. 나는 특히 일본의 자급자족 센터에서 생활하던 10여 년 전에 생태화장실과 관련해서 다양한 테크닉을 배웠고, 실제로 이를 구현한 사례들을 목격했다. 사실 일본인들은 생태화장실을 만들고 운용하는 데 최적화된 사람들이다. 우선 목공 소질이 뛰어난 사람들이 많다. 또, 원래 정과 성을 들여 화장실을 깨끗하게 관리하는데 이골이 난 사람들이라 생태화장실도 규칙에 맞게 잘 사용하고, 자주 청소한다.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잘 관리하면 사실 생태화장실도 기분 좋게 사용할 수 있다. 문제는 역시 책임과 관리이다. 그리고 우리 배설물이 잘 발효되고 숙성돼 1~2년 후 전혀 혐오스럽지 않은 질 좋은 퇴비가 되는 것을 직접 눈과 코로 확인하면, 생태화장실이나 배설물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바뀔 수도 있다. 그렇게 따지면 양변기 화장실에 대한 우리의 선호는 온전히 생활방식의 차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수세식 나아가 양변기 화장실이 더위생적이고 문명적이라는 생각은 오로지 우리의 고정관념일 뿐이다.
화장실 얘기가 길어졌다. ㅎ 이제 본격적으로 농촌 얘기를 해야겠다. 나는 도시에서 나고 자랐는데, 나이 마흔이 넘을 때까지는 뼛속까지 도시사람이었다. 친가도 몇 대에 걸쳐 정착한 서울토박이였고, 첫 커리어가 금융과 관련돼 있다 보니, 서울을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대도시, 그리고 도심부에서 일하면서 살아왔다. 어렸을 적 기억을 떠올리자면, 전형적인 바이오포비아biophobia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마이카족에 합류하고 주말마다, 교외로 가족 드라이브를 가고 싶어했는데, 나는 아버지의 이 초대가 정말로 끔찍했다. 나만 좀 빼줬으면 싶은데, 부모님은 한사코 내가 따라가야 한다고 했다. 지금도 서울시내를 조금만 벗어나서 차창을 열면 (아마도 퇴비로 사용됐을 것으로 여겨지는) 소똥 냄새가 차 안으로 날아들어 오던 것을 질색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냄새가 나는 것은 발효가 충분히 되지 않은 거름을 사용했기 때문인데, 그만큼 퇴비 만드는 기술이 성숙하지 못했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나는 그냥 집안에서 TV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아이였고, 아파트 놀이터 출입조차 또래에 비하면 덜 즐기는 편이었다. 지금의 2030세대 청년들은 아이패드와 PC 게임에 빠져서 어렸을 적부터 가상세계를 ‘리얼월드’의 일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고들 하는데, 나는 좀 시대를 앞서가며 그런 중독증상을 보였다.
농촌에 대한 거부감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한 것은 30대 초반이었는데, 소위 동남아시아 배낭여행의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 그 계기다. 처음 혼자 여행을 간 곳은 2000년의 베트남이었는데 관광지인 열대의 농촌 (사실 도시와 농촌의 구분이 좀 모호하기도 했다.) 풍광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당시 그곳의 화장실은 신기하게도 모두 수세식인 데다가 상당히 깨끗했다. 좌식 양변기도 있고 화식도 있었지만 말이다. 그 이후 내가 방문했던 동남아시아의 여행지들과 머물렀던 게스트 하우스는 공통적으로, 방은 누추할망정, 화장실이 지저분한 곳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선진국 시민인 서구에서 온 백패커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화장실은 무조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사진2) 인천공항 도착 구간의 화장실. 이 표식은 양변기를 사용한 경험이 적은 농촌 출신 입국자가 많은 저개발국 여행객을 대상으로 한 안내문구일 것이다. 어쨌든 4개 국어를 사용해서 안내하고 있다.
이런 배낭여행 이력중에 인상 깊었던 곳은 2009년에 방문했던 발리이다. 당시 나는 싱가폴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역시 배낭여행 중에 만난 한 말레이지아인 친구가 있었다.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의 파트너들과 함께 아이들을 돕는 일인 NGO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다. 빈곤한 지역 아이들에게 현지 상황에 맞는 다양한 교육과 훈련 환경을 제공해 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그 사이트 중 하나가 발리의 준중간Junjunggan이라는 마을이었다. 관광지로 유명한 우벗Ubud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그는 이곳에 작은 마을문화회관을 만들고 자신의 현지활동 베이스로도 활용했는데, 당시 이 건물을 짓는데 나도 약간의 기부를 했다. 문화회관이라고 해봐야 마을 정자보다 조금 더 큰 2층짜리 시멘트 건물이었는데 이곳에 발리 전통무용 도구나 의상들도 보관을 했다. 아이들이 외부에 나가서 관광객 등을 대상으로 공연을 하는데 사용하는 것들이었다.
나는 한차례 이곳을 방문했는데, 마을 어귀에 들어설 무렵에 몹시 당혹스러운 경험을 했다. 친구의 사진으로도 익숙한 아름다운 물가에서 마을 사람들이 멱을 감고 있었다. 사진에서는 아이들만 보였는데, 실제로는 젊은이들을 포함한 성인 여성들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전라 상태였다! 나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어쩔 줄 몰라 했는데, 오히려 이들은 내게 손을 흔들며 미소를 건넸다. 관광객이 들어오지 않는 곳이고, 그들에게는 익숙한 내 친구와 동행했기 때문에, 이들은 전혀 경계심 없이 나를 대한 것이다. 나중에 보니 나이가 어려 보이긴 하지만 이들은 모두 아이를 물가에 동반한 어머니들이었던 것 같다.
사진3) 원래 친구의 사진 속에는 이런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만 있었다. (source https://www.facebook.com/jktham)
문화회관에 앉아 휴식을 취하면서 마을 사람들이 가져온 간단한 음식으로 요기했다. 싱가폴에서도 자주 먹는 잎으로 싼 나시레막(코코넛과 함께 찐 밥)이었다. 밥을 먹고 나서 포장재인 잎은 논가 고랑 속 수풀로 던졌다. 이때 아이들이 함께 먹은 달달한 공산품 간식의 비닐 포장지를 함께 버리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니 도랑 속에 적지 않은 쓰레기가 눈에 띄었다. 갑자기 ‘현타’가 왔다. 농촌 마을에서 흔히 접하던 쓰레기들, 특히 간식을 포함한 음식물 포장용 비닐 쓰레기들이 왜 그렇게 많이 버려진 것인지 순간 이해가 됐다. 산업화 전에는, 유기물 쓰레기들을 수풀 속에 던지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히 분해가 돼버렸다. 당연히 쓰레기통 따위는 필요가 없다. 도시 생활과 문화를 접해 본 적이 없는 농촌사람들에게는 길옆 수풀과 고랑에 쓰레기를 던져버리는 것이 하등 문제가 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생각이 여기 미치면서, 과거 베이징에서의 경험도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2005~2007년 사이에 베이징에 거주한 적이 있다. 이때, 아파트 단지 안에서 손녀 손자를 안고 산책을 하던 노년의 주민들이 아이가 소변을 보채면, 지체없이 보도 옆 풀밭에 오줌을 누게 했다. 중국 갓난쟁이들의 옷은 성기 주위로 바지가 터져있었는데, 이렇게 바로 용변을 보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주로 중산층 시민들이 거주하는 새로 지어진 깨끗하고 고급스런 아파트였기 때문에, 당시 이 광경이 너무나 기괴하게 느껴졌다. 꽤 시간이 흐르고 베이징을 떠날 무렵에는 어지간한 장면에 놀라지 않았는데, 이 모습만큼은 영 익숙해지지 않아서 늘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몇 년 후 발리에서 목격한 쓰레기 투척 사건이 이 모든 개운치 않던 기분을 해소해 준 것이다. 추론을 해보자면 이렇다. 당시 그 아파트 주민 상당수는 지방, 특히 농촌 출신들인데, 베이징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호구를 취득하여 직장생활을 하던 젊은이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를 출산한 후,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베이징으로 불러서 함께 생활하면서 아이 양육을 맡긴 것이다. 즉, 농촌에서 평생 살아왔던 부모님들은 베이징의 현대식 아파트 단지에서 생활하게 됐지만, 과거 농촌에서 자신들이 아이를 양육했던 방법과 습관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나름대로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해석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단지 발리에서의 ‘현타’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2015년에 다시 중국에 건너와서 상하이 근교의 농촌에서도 일 년 가까이 생활을 한 적이 있고, 지금 6년째 살고 있는 광저우 근교의 마을도, 도시와 농촌의 요소가 절반씩 결합한 지역이다. 우리 마을은 4년 전부터 광저우시 정부가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쓰레기 분리수거 정책을 상당히 충실히 따르고 있는 곳이다. 또, 마을 곳곳에 매우 잘 관리되는 여러 곳의 공중화장실이 설치돼 있다. 워낙 깨끗해서, 다른 지역에서 온 중국 사람들이나 외국인들도, 아름답고 깨끗한 동네라고 감탄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쓰레기 무단투척 문제도 있고, 가끔 골목에서 아이들이 노변에 소변을 보게 하는 어르신들을 목격하게 된다. 이렇게 생활 습관이 바뀌는 것은 몇 세대에 걸친 오랜 시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번 새만금 잼버리 대회에서 영미 대표단이 일찌감치 철수를 결정했던 이유중 하나는 화장실 사용문제였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화장실을 제대로 관리하는데 실패한 것이다. 당연히 이 화장실들은 화식이 아니라 좌식 양변기였을 것이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화장실을 위생적으로 관리하는 문제는 화장실의 형태와는 본질적으로 관련이 없다. 나는 2015년에 중국으로 돌아왔는데 베이징에 거주했을 때와 달리, 이번엔 주로 농촌을 중심으로 돌아다녔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화장실이 모두 깨끗해서 큰 불편이 없었다.
하지만 양변기보다는 압도적으로 화식 변기가 많았다. 이들 모두 수세식이었는데, 다만 버튼을 누르면 물이 내려가는 곳도 있고, 손씻은 물을 ‘바케쓰’에 담아 이 물을 바가지로 퍼서 직접 내려줘야 하는 곳도 있었다. 올해 봄에 인도네시아 커피생산지인 북수마트라의 가요고원지역에 갖다왔는데, 이곳 화장실이 딱 이런 상황이었다.
‘푸세식’이라고 할만한 곳은 딱 두곳이었는데, 한 곳은 환경교육 목적으로 만든 건식생태화장실을 설치한 베이징의 한 CSA(Community Supported Agriculture)시민농장이었고, 다른 한곳은 운남성의 한 깡촌마을이었다. 사실 후자의 경우는 인적이 드문 곳이었고, 정말 옛날 생활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여전히 장작으로 불을 지펴 밥을 해먹었다. 돼지우리 옆 구석의 트인 공간에 화장실이 있었다. 그런데 이곳은 엄청나게 건조한 곳이어서 신기하게도 전혀 냄새가 나지 않았다. 배설물을 분해하면서 냄새를 유발하는 혐기성 세균이 적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화식 변기에 대한 심리적인 거부감을 극복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긴 했다. 무려 4년이나 걸렸다. 쓰촨四川성의 청두成都와 충칭重慶에서 AirB&B로 찾아 잠시 머물렀던 현대식 아파트 화장실에는 놀랍게도 샤워기 옆에 화식변기가 떡하니 설치돼 있었다. 이 구멍을 보면 왠지 모르게 발이 빠질 것 같은 위태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매일 샤워를 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샤워기를 돌려서 변기를 청소하게 됐다. 그렇게 하니까, 결과적으로 화식이 오히려 좌식 양변기보다 깨끗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사는 1978년에 건축된 오래된 집에는 두개의 화장실이 있는데 하나는 화식변기이고, 나중에 추가로 지어진 새 화장실에는 양변기가 설치돼 있다. 당연히 양 쪽 모두 깨끗하게 관리해서 잘 사용하고 있다.
사진4) “오늘도 무사히” 우리집의 오래된 화식화장실. 샤워실은 양변기가 있는 새로 지은 화장실에 따로 있기때문에, 사진속의 온수기는 실제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그냥 비상용 extra이다. 안심하고 방문하시라. ㅎ
중국에 돌아와서 내가 예전에 베이징에서 지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천지개벽 수준의 변화가 생겼음을 늘 느끼고 있다. 오래전 베이징에 있었을 때는 소위 ‘엑스팻expat’의 특권적 환경속에 살았기 때문에, 중국의 서민들이 사는 곳이나 주로 농민공 차림의 주민들이 식사를 하는 ‘분식점이나 백반집’(小面馆)에도 잘가질 못했다. 환경이나 위생에 대한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지금은 중국에서의 내 생활수준이 ‘서민화’돼 이런 점들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외관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전체적인 환경이 많이 개선된 것도 더 큰 이유중 하나이다. 이런 나의 생각과 기분의 변화가 사회적 신뢰자본의 개선결과로도 여겨질 수 있다. 지금은 대도시 번화가에서는 한국과 아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그럼에도 중국의 도시화율은 아직 70%에도 미치지 못한다 (2020년 센서스 기준 63.8%).
하지만 대도시뿐 아니라 어지간한 농촌마을에 가도 인프라가 어느정도 갖춰져 있기때문에 저개발국 농촌의 오지에 와있다는 느낌은 전혀 받게 되지 않는다.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본뜬 소위 신농촌건설 정책을 2005년부터 실행해왔는데. 그중에 소위 5통정책이라는 것이 있다. 마을에 도로, 전기, 수도, 전화와 인터넷을 개통한다는 뜻이다. 정말 그렇게 됐다. 따지고 보면, 이게 한국의 리버럴 지식인들이 매우 싫어하는 중국 공산당의 신농촌건설이나 빈곤구제정책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다 친구들이 있는 농장에 가서 따뜻한 물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때, 미묘한 감상에 젖게 된다. 시진핑은 2021년에 ‘빈곤구제(부빈扶貧)’정책실행 완료를 선포하고 2017년부터 시작된 ‘향촌진흥’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다. 농촌의 인프라와 하드웨어정비를 마치고 문화적 생활환경과 산업의 소프트웨어적인 업그레이드를 추진하는 것이다.
또, 시진핑은 2015년에 ‘화장실혁명’을 추진하면서 전국 공중화장실의 숫자를 크게 늘렸는데, 덕분에 우리 마을만 해도 매일 청소를 해서 제법 깨끗하게 유지되는 공중화장실이 6곳이나 된다. 얼마전 한 중국 경제학자의 동영상을 보니, 2023년 상반기 부동산 경기 등의 침체로 일자리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간 2천만 농민공의 일거리를 주기 위해서 내륙과 농촌지역의 수자원순환 시스템 인프라를 대규모로 건설할 예정이라고 한다. 농촌은 하수처리를 하지 않고 농가의 하수를 바로 개천에 내버리는데, 이를 순환해서 활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구체적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중수도 활용같은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중국의 내륙과 북부는 만성적으로 수자원이 부족하니, 여러가지로 긍정적인 효과가 기대된다. 시진핑이 ‘좋은 지도자’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국 농촌의 생활환경 혹은 공중화장실로 대표되는 도시의 환경 개선을 위한 시진핑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 역대 정치지도자들의 노력이 상당한 진심이었음은 이야기 해두고 싶다. 물론 실제 실행과정에서 탑다운 성향이 강한 중국의 권위주의 체제가 다양한 부작용을 일으켰음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장실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도시민들과 향촌민들의 생활습관 차이는 이밖에도 여러곳에서 발견된다. 이를테면 대중교통을 비롯한 공공장소에서 마치 자기집 안방인양 큰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거나, 헤드셋 없이 스마트폰이나 패드로 비디오 음량을 크게 틀어 놓고 보는 행동이 모두, 향촌민들의 습관이다. 최근 중국의 대도시에서 문제가 되는 ‘광장무廣場舞’ 사례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개인적인 경험 몇가지를 공유해보겠다.
사례1: 얼마전 한국에 귀국하기 위해서 아침 일찍 아내와 함께 광저우 공항에 갔다. 조금 이른 시간이라 공항안의 한 조용하고 너른 카페안에 손님 몇명만이 앉아 있었다. 걔중에는 이른 새벽에 집을 나와서 피곤했는지 엎어져서 잠을 청하는 이도 있었다. 우리 좌석에서 가까운 자리에는 한 중국 청년이 큰 헤드셋을 끼고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좀 떨어진 곳에 아이들 둘과 부부가 있는 한 4인 가족이 앉아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아이가 패드로 비디오를 보고 있었는데 소리를 크게 틀어 놓아서 좀 거슬렸다. 귀를 기울여 보니 한국어가 들렸다. ‘인강’이었다. 보통 인터넷 강의가 그러하듯 청자의 주의를 끌기 위한 강사의 과장된 액센트와 하이 피치가 두드러졌다. 아마 아이들 방학을 맞아 귀국길 아침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위에서 거론한 중국의 사례들은 사실 대부분 중년 이상, 그리고 행색으로 보건데 향촌출신의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즉, 단순히 개개인의 소양 문제라기 보다는 아직 상당수의 중국인들이 도시문화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는 소위 ‘에티켓’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당연히 도시출신일 이 한국인 중산층 가족의 행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들은 중국생활에서 이런 상황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말하자면 그냥 중국 기준의 행동을 취해버린 것이다. 내가 아내에게 농담을 건넸다. “내가 가서 따끔하게 이렇게 한마디 할까? 중국에서 나쁜습관이 드셨군요. 한국에 가서는 이러시면 안되다는 것 아실텐데요!” 아내가 툴툴거렸다. “넌 저팔계야. 사람이 아니라 요물! 그렇게 맨날중국인과 한국인을 함께 욕하면, 영원히 어느쪽에도 속하지 못하겠지.” 나는 웃으면서 “그래 나 저팔계다!”라고 답했다. 잠시후에 그들의 자리로 찾아가서 공손하게 한국어로 한마디했다. “소리가 너무 큰데, 소리를 줄이든가 헤드셋을 사용하시면 안될까요?” 이들은 황급히 스피커를 껐다. 자리로 돌아와 잠시후에 돌아보니, 이들 가족이 황망히 사라졌다. 아마 좀 창피했을 것이다. 아내에게 다시 말했다. “아침부터 재수 옴붙었다고 생각했겠지. 그래도 만일 한국가서 아무 생각없이 저렇게 행동했다가 지청구들었다고 생각해봐. 그보다는 광저우 공항에서 나한테 예방주사 맞은 셈이지. 내가 복지은 거야 ㅎㅎㅎ” 아내가 나를 흘겨봤다.
사진5) 중국의 저팔계 諧音梗 밈. 어느 준거집단에도 속하지 못하는 ‘경계인’ 혹은 ‘모두까기식 투덜이’를 의미한다.
사실 나는 정반대의 경험도 있다. 10년전쯤, 쿠바에 가서 아바나에서 삼개월쯤 지낸 적이 있다. 이때 PC방에서(이 도시에 불과 한두곳(?)정도 밖에 없는 인터넷 사용이 가능한 장소였다.) 우연히 알게 된 중국인 유학생 몇명과 함께 버스를 타고 쿠바의 다른 지방으로 여행을 떠났다. 나는 아저씨답게 목소리가 큰 편인데다, 오랜만에 아바나를 벗어나 기분이 좋았던 탓에, 큰 소리로 떠들었다. 이중 근처에 앉아 있던 한 91년생의 여자대학생이 내게 핀잔을 줬다. “아이고 아저씨, 목소리 좀 낮추세요!” 속으로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당시 중국 여행객들이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를 누비면서 여행 매너가 안좋다고 욕을 먹고 있던 처지였다. 그런데, 제법 해외여행과 체류 경험이 있고 외국어도 익숙한 젊은 중국 유학생들은 이미 이런 매너를 몸에 익혀서 ‘교양이 부족한’ 한국인 아저씨를 ‘참교육’한 것이다.
사례2: 광장무는 더욱 흥미로운 주제이다. 중국을 여행해본 적이 있는 외국인들이 매우 이채롭게 생각하는 중국의 독특한 대중문화이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광장무가 문화대혁명의 산물이라면서, 중국사회에 대한 정치적 공포감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한국 논객들의 글을 몇번 본 적도 있다. 글쎄, 중국의 군중동원문화, 노동자오락문화 혹은 집체생활문화가 광장무 문화와 관련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러 곳에서 오랜 기간 광장무를 관찰하면서 긍정적인 느낌을 더 많이 받았다. 대부분, 중장년 여성들이 참여하는데, 최근에는 젊은이들이나 중년, 노년의 남성들도 가끔씩 눈에 띈다. 심지어 대학가에서는 유학생으로 짐작되는 백인 여학생이 매일 광장무에 흥겹게 동참하는 것을 본 적도 있다.
짐작하겠지만, 광장무에 참여하기 위해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비용은 매우 적다. 광장무를 주관하는 리더에게 아주 소량의 사례를 지급하거나 심지어 단체 무복을 맞춰입기도 하는데 거의 무시할 정도의 금액으로 알고 있다. 역시 문제는 광장무가 문자 그대로 광장무로 해석되기 위한 환경이다. 상대적으로 밀집된 생활을 하는 도시에 모두의 요구를 만족시킬만한 공공공간이 충분히 확보돼 있느냐 하는 것이다. 공공공간의 주인은 지역의 모든 주민이기 때문에, 만일 공공공간에 대한 서로 다른 요구를 가진 주민들이 있다면, 이해관계 충돌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대표적인 것이 상하이와 같은 도시에서 길거리 농구를 하거나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싶어하는 청년들이 광장무 애호가들과 충돌한 사례이다. 한국의 ‘아줌마’처럼 중국에는 ‘따마大媽’라는 호칭과 밈들이 있는데, 경우에 따라서 중년 여성의 ‘억척스러움’과 ‘무례함’에 대한 혐오감이 농축된 표현으로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광장무 따마’와 도시 청년들의 갈등은 실은 어느 한쪽의 문제라기보다는 중국의 도시계획이 성숙하지 못하고, 지방정부의 개입 혹은 자치에 의해 문제를 해결할 도시문화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이유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내가 겪었던 흥미있는 사례가 있다. 우리 마을에는 광장무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데, 이유는 이들이 매일 찾아가는 강건너 옆마을에 커다란 광장이 있기 때문이다. 신해혁명기념관과 중산공원 앞에 너른 광장이 있는데, 이곳에 저녁마다 수백명이 모여서 광장무를 즐긴다. 최소한 7~8개의 규모가 다른 그룹들이 있는데, 중국의 전통무용부터, 사교댄스, 그리고 에어로빅에 가까운 집단무 등, 장르가 무척 다양해서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이들중 특히 가장 큰 그룹은 거의 100명에 가까운 인원이 흰 반팔티셔츠, 반바지, 선캡까지 ‘깔맞춤’하고 앞줄에 선 3~4명의 코치의 동작에 맞춰 춤을 춘다. 주로 2~30년전의 한국 나이트 클럽에서 유행했을 법한 음악이 흘러 나오는데, 실제로 한국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경우가 적지 않다. K-pop이 아니라 그 옛날 ‘한류 유행곡’ 말이다. 클론이나 이정현을 연상하면 된다. 중국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외국 대중문화를 잘 살펴보면, 지역의 3~4선 도시에는 (우리 동네는 1선도시 광저우에 위치하지만 교외지역이라 이 모든 요소가 섞여 있다. ) 여전히 한류(라기 보다는 한류짝퉁)가 인기이다. 1선 도시에서 서구문화, 일본문화가 인기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K-컬쳐는 주류 대중문화와 비주류 서브컬쳐 모두 보이지 않는 ‘문화장벽’에 가로막혀 떳떳히 고개를 들지 못한다. 이 문화장벽이 만들어진 것에는 물론 한중양국 정부와 시민들 모두 책임이 있고, 지금은 미국과 일본 정부의 책임도 적지 않다.
우리 마을을 비롯한 지역민 중 상당수가 이곳에 모여서 매일 저녁 축제를 벌이는 셈이다. 실제로 유원지마냥 스낵을 팔거나 아이들에게 유료 이동식 놀이터를 제공하는 행상인들도 꽤 있다. 저녁 9시가 지나고 무객들이 귀가를 하면, 도심에 사는 이들이 이곳에 대형 애완견을 태운 차를 몰고 등장한다. 개들이 광장에서 어울려 마음껏 뛰놀게 하고, 자기들끼리 잡담을 나눈다. 도심에서는 이런 공간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에, 교외지역인 우리마을로 찾아 온것이다. 나는 팬데믹 이전에 이곳에서 몇달간 매일 조깅을 했기 때문에 이 광경을 이채롭게 지켜봤다. 나는 직접 본 적이 없지만, 마을에서 기타학원을 운영하는 젊은 원장은 여기서 매주 금요일 저녁 지역의 청년 음악인들과 버스킹을 한다고 했는데, 상상만 해도 유쾌해지는 광경이었다.
사진6) 우리 동네 광장무 그룹중 가장 ‘유니크한’ 따마들. 우아한 전통의상을 입고 문자 그대로 ‘런웨이runway 캣워크catwalk’를 한다.
작년에는 옆마을에서 커다란 옥외 PCR 검사소를 이곳에 설치해서, 광장 크기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오미크론때문에 중국 전역에서 엄격한 봉쇄조치를 취하면서 당연히 광장무도 규모나 빈도가 크게 줄어들었던 것 같다. 올해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데, 짐작컨데 예전의 흥겨운 광경이 회복됐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런데, 얼마전 마을에서 학생들과 필드조사 및 워크숍을 벌인 아내에게 의외의 이야기를 들었다. 주민 대상 워크숍에 참가한 한 중년여성이 들려준 이야기이다. 이 분은 광저우 출신인데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가 얼마전에 중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원래 자기가 거주하던 광저우 도심 대신, 주거환경이 좋고 생활비용이 적게 드는 우리 마을에 거주지를 정했다. 그런데, 이분이 마을의 환경에 대한 이모저모를 나눔하다가 뜻밖의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털어놨다. 광장무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불편을 겪다가, 마을주민위원회(동사무소)에 광장무 팀들이 음악 소리를 줄일 수 있게 시정해 달라고 건의하는 투서를 했다는 것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발끈했다. 아니 광장이 거주지에 인접한 것도 아닌데, 강건너에 사는 주민이 그걸 못참고 불평을 한단 말인가? 더구나 자신도 ‘따마’인데 동년배 이웃 주민들의 소박한 여흥과 레저생활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말이되냐 말이다.
캐나다 이민 경험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에 계속 살았다면, 이런 일이 있어도 그러려니 했을 터이다. 반면 서구사회에서 생활권이 침해되면 바로 항의를 하거나 경찰에 신고를 하는 관행에 익숙해졌을 것이니 참지 않고 행동에 나선 것이다. 갑자기 고개가 끄덕여졌다. 또, 강변이 아닌 마을안 조용한 골목길에 사는 나와 강 바로 맞은 편에서 울리는 소리를 매일 저녁 듣는 그분의 조건은 전혀 다를 것이라는 점도 이해가 됐다. 만일 내가 광장무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데다가, 중국에 와서 살기 시작한지 몇년되지 않은 시점이었다면, 아마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라는 것도 상상가능하다.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한지 이미 40년이 훨씬 넘었다. 농촌 자체야 그렇다치고, 인구 수천만, 수백만의 메트로폴리스들이 중국에 몇개인데, 아직도 농촌문화 타령인가? 아마 이렇게 반문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사실 베이징, 상하이에 거주한 적이 있고, 한때 홍콩에 거주하면서 션전을 자주 들락거리던 경험이 있으며, 지금은 광저우에 살고 있기 때문에, 소위 중국의 1선도시 네곳을 모두 경험한 나도 이 사실을 깨닫게 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소위 단위單位라 불리는 중국의 직장과, 그 일터와 함께 결합이 돼있는 주거형태인 대원大院문화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내의 고향인 3선도시 지우장에는 지금도 장모님이 아주 작고 몹시 낡은 아파트 한채를 가지고 있다. 이곳은 일찍 돌아가신 장인어른의 직장이자, 장모님의 은퇴전 마지막 직장인 지역방송국의 대원이었다고 한다. 그 옆에는 이미 문을 닫은 큰 기계설비 공장이 있는데, 사실 그 지역은 이 공장 직원들이 살림살이를 하던 거대한 아파트 단지나 다를 바없었다. 90년대 후반부터 이런 아파트들을 거래할 수 있게 됐고, 2000년대 초반부터 활발한 거래가 이뤄졌다고 아내가 설명해줬다.
장모님은 원래 다른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90년대 후반에 이 공장도 문을 닫으면서 실직을 하게 됐다. 이런 저런 직장을 전전하면서 혼자 어린 아내를 돌봐야 했는데, 나중에 장인어른의 직장이었던 방송국에서 자리를 마련해줘서 겨우 생계가 안정됐다. 중국은 원래 시장경제를 도입하기 전에 모든 도시민들은 학교를 졸업한 후에 국가에서 일자리를 정해줬다. 이것을 단위라고 부른다. 그런데 90년대 후반 아시아 금융위기 과정에서 중국 경제도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그래서 다수의 국유기업들이 문을 닫고, 대규모의 정리해고가 벌어졌다. 소위 IMF사태는 한국 경제와 사회구조, 개인의 의식에 이르기까지 매우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는데, 서구화 혹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우리가 흔히 ‘신자유주의’이념의 실현이라고 부르는 ‘전면적 미국화-금융화’나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시작된 시기라고 볼 수도 있다. 같은 시기, 같은 이유 때문에 중국에서는 바로 이 단위와 대원이 해체되기 시작한다.
단위와 대원은 규모가 큰 공장의 경우 그 안에 거의 모든 생활요소가 갖춰진 하나의 마을이나 동네를 연상하게 한다. 지금도 대부분의 중국 대학은 사립이 아니라 정부에 소속돼 있는데, 이런 단위와 대원의 구조를 간직하고 있다. 대원내의 아파트는 지금은 모두 독립된 주방과 화장실을 갖고 있지만, 과거에는 이런 시설조차 공용으로 사용하는 기숙사같은 시스템과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설사 도시민들이라고 해도, 개별화한 핵가족위주의 삶이 아니라 마치 하나의 농촌마을 공동체와 같은 생활시스템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아니 한국 도시의 서민들도 70~80년대까지 동네가 마치 마을과 같은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80년대 이전에 출생한 사람들은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주택가뿐 아니라 긴 복도로 연결된 옛날식 아파트조차 서로 살림과 집안 사정을 쉽게 들여다 볼 수 있었고, 그런 밀접한 교류도 가능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한국 드라마가 “응답하라 1988”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진7) 내가 사는 마을의 강건너 북쪽에는 조선소와 조선소 직원들이 거주하던 거대한 주거 단지가 여전히 남아 있다. 전형적인 국유기업 단위와 대원의 구조이다. 우리마을 주민들중 상당수도 여전히 이 조선소로 출퇴근한다.
90년대 후반의 IMF bailout금융위기는 서로 다른 차원에서 한국과 중국의 도시화, 산업화 그리고 서구화 혹은 미국화를 가속시켰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중국의 도시화 역사는 불과 20년정도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 한세대에도 미치지 못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평균적인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이 왜 아직도 완전히 도시적인 형태로 변화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간다. 물론 예외는 있다.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화둥지역, 특히 상하이가 그렇다. 원래 장강하구를 중심으로 한 화둥 지역은 근대 이전부터 수백년간 상업문화, 도시문화가 발전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특히 서구의 문물을 일찍 받아들였던 상하이 시민들은 100여년전부터 스스로를 ‘도시민’으로 규정해왔다. 공산혁명과 관계없이 이곳 주민들이 도시화, 서구화의 감각에 일찍부터 익숙해져 있었다거나 그런 ‘시민’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젊은 중국인들은 어떨까? 내가 느끼기에 ‘진정한 의미의 도시인’들로 분류될만한 중국인들은 어림잡아 95년생 이후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앞서 이야기했던 여러가지 도시인들의 생활습관은 말할 것도 없고, 조금 더 심층적인 의식 측면에서 그러하다. 대표적인 예는 결혼과 출산에 대한 관념의 변화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작금의 한국 청년들은 극단적일 정도로 결혼과 출산을 기피한다. 이유는 가부장제를 둘러싼 남녀간의 이념적, 문화적 대립, 그리고 주로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주거형태와 높은 비용, 그리고 도시에서의 경제생활과 관련이 있다. 절반 이상의 인구가 수도권에 몰려있고, 특히 청년들 거의 대부분이 이곳에 살고 있지만, 이들이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할만한 환경과 조건은 갈수록 확보하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에 비하자면, 내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중국 80허우, 90허우 청년들은 여전히 결혼과 출산을 선호해왔다. 아니 여러가지 이유로 결혼을 하지 않은 경우라도, 결혼을 해야한다는 주변 사람들의 압력과 스스로의 강박에 노출돼 있다. 나는 베이징에 거주하던 2006년경에도 이미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기 시작한 당시 한국의 2030세대, 특히 여성들과 베이징에서 만난 중국의 2030세대가 많이 다르다고 느꼈는데, 2015년 중국에 돌아왔을 때는 중국 2030세대의 결혼과 출산관도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 2020년경부터는 내 주위의 중국 2030세대이든 주류 언론에 노출되는 2030세대이든 확실히 상당수가 결혼과 출산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견을 갖고 있음을 관찰하게 됐다. 서구적인 페미니즘 사회운동이 국가의 탄압을 받는 정치사회적인 분위기속에서 한국과 같은 격렬한 이성간 대립이나 ‘미소지니misogyny’까지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분명히 청년들의 결혼율과 합계출생률은 극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중국내에서는 예외적으로 도시문화가 발달한 상하이 지역이다. 그리고, 95년이후 출생자들중 고학력자, 특히 여성들에게서 이런 성향을 많이 발견하게 된다. 1995년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내가 앞서 말한 중국 도시화의 원년이라고 할 수 있는 2000년경에 주위 환경을 의식하기 시작하는 연령에 도달한 세대이므로 성장과정에서 도시화, 산업화, 서구화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짐작해본다.
또다른 도시화의 공통적인 결과는 청년세대가 느끼는 불안감이다. 이런 정서가 우울증 환자의 증가로 표현된다. 며칠전 한 페친이 런던의 서점에서 찍은 사진을 올렸다. <<죽고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는 한 젊은 만성 우울증 환자의 수기와 같은 에세이 영문판이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라있다고 한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이 책은 한국에서 이미 40만부 그리고 일본에서 10만부가 넘게 팔린 글로벌 초베스트셀러였다. 이 책이 출간됐던 2018년 이후 <시사인> 주간지에서 간단한 서평을 접한 적이 있었는데 이 정도로 흥행에 성공을 할 것이라고는 예상을 못했다.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대만에서는 2019년에, 중국대륙에서는 2020년에 이미 중문판이 출판이 돼 있었다. 이 책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제목만 보고 웃음을 지었는데, 심리적 불안과 좌절감을 농담처럼 포장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보려는 심리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갔다. “시시한 농담과 시시한 내용을 귀엽게 버무린 얄팍한 상업적 기획”이라는 악평과, “어머 이건 내 얘기야”라는 공감의 호평이 극단적으로 나눠지는 것도, 한중 독자들의 공통적인 반응이다.
사진8) 런던의 베스트셀러 서가에 영문판 <죽떡>이 ‘똭’ 놓여있다. 베를린과 캄보디아에서도 같은 상황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비서구사회에서 압축적으로 전개되는 도시화, 산업화의 부작용은 그 압축도가 높을수록 격렬하게 전개된다. 한국 (비슷한 수준의 홍콩과 타이완도) 사회가 겪는 어려움도 여기에서 비롯한다. 중국은 다른 동아시아 국가나 지역보다 더 압축적인 성장과 급속한 도시화가 진행중이다. 하지만 정치체의 연속성(전통적 권위주의 체제)과 일상(경제)생활속의 가부장적 공동체 사회(국유기업 등), 내륙이 중심이 되는 거대한 향촌 사회의 존재 때문에 (혹은 덕분에) 엄청난 관성이 작용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중국사회에서 목도하게 되는 각종 사회현상은 한국과는 조금 다른 의미의 ‘대환장 파티’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격렬한 대립으로 표현되는 한국의 진영정치지형 (보수, 민주, 진보)이나 페미니즘-트럼피즘 투쟁, 그리고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목격하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황당하기 이를데 없는 ‘검찰관료독재’ 현상 모두, 우리가 인정하기 싫은 전통사회(이것을 ‘농촌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정한 표현이 아니겠지만)관념과 현대화 관념의 충돌이라고 볼 수 있기는 하다. 결과적으로 중국에서는 빠른 도시화와 무거운 관성 중에 어떤 면이 더 두드러지게 표현될까? 아마 어떤 측면, 어떤 지역을, 어떻게 들여다보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보일 것 같다.
얼마전 오스트레일리아로 오래전에 이민간 아내의 친척과 급상승한 중국의 청년 실업률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이분은 노년의 부모님 간병을 위해 잠시 중국에 돌아와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청년같으면 대학등록금 때문에 생긴 대출을 상환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취업을 했을 터인데, 중국은 부모가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니 취업을 포기한 것같다고 이야기했다. 나도 옳다면서 손뼉을 쳤다. 한국은 오래전부터 청년실업문제로 고민을 해왔지만 10%안팎의 수치를 계속 유지해 올망정 중국처럼 20~40%대로 폭발적으로 급상승한 전력은 없다. 아마도 오스트레일리아와 마찬가지로 학자금 대출상환의 압박이라는 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은 왜 부모가 자녀의 학자금 대출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일까? 아니 그게 아니라 애초에 대출 자체가 필요 없었던 것일까? 답은 어쨌든 부모가 경제적 능력이 됐기 때문이고 사립대학외의 학교들은 등록금이 그리 비싸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중국 대학생의 부모들은 중국 사회의 급속한 경제성장속에 부동산 가격을 포함한 자산 가격이 상승하면서 자연스럽게 중산층 혹은 중위소득군에 편입한 세대들이다. 농촌 혹은 농촌출신의 도시 노동자들도 대개는 호구가 있는 자신의 고향에 농촌주택이나 농지와 같은 자산을 가지고 있다. 직접 농사를 짓지 않아도 자산 임대수익을 얻고 있고, 아니면 여전히 노동시장에 참여해서 돈을 번다. 물론 이들의 노후보장책 마련은 향후 중국사회의 커다란 숙제로 남아 있다. 반면, 한국에서는 이미 한세대 전에 다같이 손잡고 중산층으로 진입하는 “온국민 성공시대”가 끝나버렸다. 특히 97년 IMF경제 위기 이후가 그러하다. 반면 대학진학 요구는 여전히 높고 대학 등록금이 이미 천정부지로 치솟아버렸으니, 청년들 대부분이 자력으로 대출을 일으키고 상환할 수 밖에 없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사회에서는 이미 오래된 관행이다.
청년과 그 부모 세대의 이야기로 마무리를 하고 있는데, 한국은 일본보다, 중국은 한국보다 훨씬 압축적으로 도시화,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중국 중장년들은 향촌문화가 훨씬 익숙한 세대이다. 그런데, 우리의 기준으로 보자면 중간과정 혹은 한 세대가 생략된 채, 어느날 예고없이 젊은 “도시민의 탄생”도 이뤄지고 있다. 이렇게 탄생한 도시민들은 겉으로는 세련된 도시민의 매너를 간직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한없이 무력하고 처진듯이 보이는 모습도 보여준다. 한마디로 “독립심이 부족하고 게으르다.” 그들 부모와 선배세대(내 아내와 같은 80허우)가 보기에 그러하다는 이야기이다. 이들 세대가 스스로를 규정하는 ‘탕핑躺平’(옆으로 길게 눕다)이나 ‘바이란擺爛’(누워서 천천히 부패한다)이란 표현이 이런 이미지를 잘 표현하고 있다. 중국인들 대다수는 향후 수세대에 걸쳐, 도시화를 완성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인들도 더 이상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중국인들에게 혐오감을 내비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한국의 혐중은 실상 도시민들의 ‘농촌문화’ 혐오처럼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에 중국이 도시화의 문제점을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사실 한국인들은 남의 집 걱정할 여유가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 제 발등에 불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사진9) 내친김에 나도 ‘탕핑’, ‘바이란’ 하기로 했다. 나는 나이도 좀 먹어서 이미 장년세대이니 이런다고 누가 흉을 보지는 않을 것 같은데…. 아닌가? ㅎㅎㅎ 아내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온 친지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 좀 생각을 바꿨다. 그래 중국 청년들의 상황은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가 아닌가. 기술이 발전하고 산업구조가 변화하고 일자리가 부족해지는 것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다들 어느정도는 먹고살만한 적절한 사회적 부의 총합이 있다면, 이것도 나쁘지 않다. 중국 정부가 ‘공동부유’ 시늉이라도 제대로 낸다면, 굶어 죽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국은 사람은 많고, 일자리는 부족하니, 이게 원래 자연스런 ‘노동해방’아닌가? ㅋㅋㅋ 아내는 “제자들이 능력은 부족한데, 노력은 하지않고, 마음만 조금하고, 눈만 높아져서, 취업을 안하는 현실” 때문에 더이상 너무 스트레스 받지 않기로 했다.
(https://youtu.be/syxEuMc6UUU?si=ZOX67AdotWM0N3BD)
참고 - 중국 경제는 98년 아시아 경제위기 당시, 개혁개방 이후 최초로 생산과잉문제를 맞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국외적으로 수출주도 경제를 표방하고 (WTO가입), 국내적으로는 급격한 도시화를 추진하게 된다. 98년부터 단위가 배정한 대원의 주택들을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이는 도시에도 존재하던 농촌사회형 공동체가 붕괴하는 시발점이 된다. 중국의 실질적인 도시화는 2000년대부터 이뤄지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경제전문가 안유화 교수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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